이근호 (조선귀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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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이근호는 1861년에 태어나 1923년에 사망한 조선의 무관 출신으로, 일제강점기에 남작 작위를 받은 친일파이다. 1878년 무과에 급제하여 관직에 진출했으며, 상업은행 설립에 참여하고 육군참모장을 지냈다. 1910년 한일 병합 조약 체결 후 일본 정부로부터 남작 작위를 받았으며, 친일 행적으로 인해 친일반민족행위자로 지정되었다. 그의 아들 이동훈과 동생들도 친일 행위로 명단에 포함되었으며, 후손들은 친일 재산 환수를 위한 소송을 제기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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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근호 (조선귀족) - [인물]에 관한 문서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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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본 정보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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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름 | 이근호 |
한자 표기 | 李根澔 |
출생 | 1861년 |
출생지 | 함경도, 조선 |
사망 | 1923년 3월 1일 (62세) |
사망지 | 러시아 제국 |
경력 | |
소속 군대 | 대한제국군 |
복무 기간 | 1901년–1907년 |
계급 | 육군 부장 |
관직 | |
임기 시작 | 1905년 4월 4일 |
임기 종료 | 1905년 5월 20일 |
전임 | 최익현 |
후임 | 이도재 |
군주 | 고종 |
전임 | 이지용 |
후임 | 박제순 |
작위 정보 | |
작위 | 남작 |
가문 | 전주 이씨 경명군파 |
아버지 | 이민승(李敏承) |
자녀 | 아들: 이동훈 |
친인척 | 동생: 이근택, 이근상 |
2. 생애
이근호는 충청북도 충주의 무인 집안에서 태어났다. 1878년 무과에 급제했는데, 동생인 이근택이 임오군란 때 충주로 피신한 명성황후의 눈에 들면서 요직에 기용되었다.[1] 1887년, 승정원의 승지와 자산 부사를 지냈다. 1896년에는 내무부의 전염병 국장으로 임명되었고, 개화파의 사상에 동의하여 독립 협회의 위원으로 참여했다.[1]
2. 1. 관직 생활과 기업 활동
1891년 평안북도 영변 부사로 재직하면서 재물을 탐학한 죄로 벌을 받았으나 재기용될 정도로 일찍부터 이재에 밝았다.[1] 1899년 상업은행의 전신인 대한천일은행 설립 때 발기인으로 참여했고,[3] 민병석이 사장을 맡은 종로직조사의 부사장에 취임했으며,[4] 민소식과 함께 광신교역회사를 설립하는 등 기업 활동에 꾸준한 관심을 보였다.1898년 경무사에 임명되었고,[2] 지방의 관찰사를 거쳐 1906년 육군참모장을 지냈다. 같은 해, 대한제국 황실 재산을 관리하는 궁내부 철도국 국장으로 부임했다.[1]
2. 2. 친일 행적과 몰락
이근호는 한일 병합 조약 체결 이후 일본 정부로부터 조선귀족 남작 작위를 받았다.[1] 2002년 발표된 친일파 708인 명단, 2007년 대한민국 친일반민족행위진상규명위원회가 발표한 친일반민족행위 195인 명단, 2008년 민족문제연구소에서 친일인명사전에 수록하기 위해 정리한 친일인명사전 수록예정자 명단에 조선귀족 작위를 받은 동생들과 함께 선정되었다. 민족문제연구소의 명단에는 이근호의 작위를 습작한 아들 이동훈도 포함되어 있다.[7]이근호의 집안은 세 형제가 작위를 받아 습작자까지 모두 여섯 명이 조선귀족이 된 대표적인 친일 집안으로, 사람들은 이근상 5형제를 '5귀(五鬼)'라고 불렀다. 대한민국 친일반민족행위진상규명위원회가 발표한 친일반민족행위 106인 명단, 친일반민족행위 195인 명단에도 삼형제가 포함되어 있다.
일본 황태자가 한국을 방문했을 때, 이근호는 황태자를 환영하는 친일 단체인 신사회에 참여했다. 같은 해, 격분한 민중(주로 1907년 한일 신협약 때문에)은 친일 관리 중 한 명인 이근호의 성북동 집을 불태웠다.[1]
한국 병합 후, 이근호는 일본 정부로부터 남작 작위를 받았으며 1911년 1월 13일에는 25000JPY을 받았다. 이근호는 1923년 3월에 사망했으며, 그의 작위는 아들 이동훈에게 상속되었다.[1]
이근호가 친일 행위로 일제로부터 습득한 경기도 화성시와 오산시, 충북 음성군 등의 토지를 되찾고자 하는 소송을 이근호의 손자가 낸 바 있다.[7]
3. 친일반민족행위자 지정
2002년 발표된 친일파 708인 명단, 2007년 대한민국 친일반민족행위진상규명위원회가 발표한 친일반민족행위 195인 명단, 2008년 민족문제연구소에서 친일인명사전에 수록하기 위해 정리한 친일인명사전 수록예정자 명단에 조선귀족 작위를 받은 동생들과 함께 선정되었다.[7] 민족문제연구소의 명단에는 이근호의 작위를 습작한 아들 이동훈도 포함되어 있다.[7]
이근호의 집안은 세 형제가 작위를 받아 습작자까지 모두 여섯 명이 조선귀족이 된 대표적인 친일 집안으로, 사람들은 이근상 5형제를 '5귀(五鬼)'라고 불렀다.[7] 대한민국 친일반민족행위진상규명위원회가 발표한 친일반민족행위 106인 명단, 친일반민족행위 195인 명단에도 삼형제가 포함되어 있다.[7]
이근호가 친일 행위로 일제로부터 습득한 경기도 화성시와 오산시, 충북 음성군 등의 토지를 되찾고자 하는 소송을 이근호의 손자가 낸 바 있다.[7]
4. 가족 관계
5. 서훈
참조
[1]
웹사이트
이근호(李根澔)
https://encykorea.ak[...]
2022-11-17
[2]
웹사이트
4) 황국협회의 공격 격퇴
https://db.history.g[...]
[3]
웹사이트
이근호
https://terms.naver.[...]
2023-01-23
[4]
웹사이트
(4) 경제제도
https://db.history.g[...]
[5]
웹사이트
이근호 등에게 훈장을 주다
https://sillok.histo[...]
[6]
웹사이트
경은군 이재성 등에게 훈장을 주다
https://sillok.histo[...]
[7]
뉴스
친일파 후손 잇단 토지 반환소송…일부 승소
http://www.hani.co.k[...]
한겨레 (연합뉴스 인용)
2005-02-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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