맨위로가기

신응희

"오늘의AI위키"는 AI 기술로 일관성 있고 체계적인 최신 지식을 제공하는 혁신 플랫폼입니다.
"오늘의AI위키"의 AI를 통해 더욱 풍부하고 폭넓은 지식 경험을 누리세요.

1. 개요

신응희는 1858년 또는 1859년에 태어나 1928년에 사망한 대한제국 말기, 일제강점기의 무관이자 관료이다. 갑신정변에 가담하여 일본으로 망명했다가 귀국 후 관료 생활을 시작했으며, 을사조약 이후 다시 일본으로 건너갔다. 1907년 중추원 부찬의를 거쳐 전라남도 관찰사를 역임했고, 일제강점기에는 조선총독부 고등관으로 활동하며 함경남도 장관, 황해도 지사를 지냈다. 그는 근대적 군사 지식 보급에 기여하고 어업 생산량 증대에 긍정적인 영향을 주었으나, 친일 행위로 인해 비판을 받았다.

2. 생애

신응희는 1858년(철종 9년) 11월 2일 신식(申式)의 아들로 태어났다. 11월 5일생 설, 9월생 설, 1859년생 설도 존재한다. 대한제국조선총독부 관원 이력서에는 1858년생 설과 1859년생 설이 모두 수록되어 있다. 한성부 서서(西署) 동영동(東嶺洞) 42통 7호 출신으로, 이후 경성부 북부(北部) 송현방(松峴防)에서 거주하였다. 그는 어릴 때 집에서 성리학을 공부했고, 소년 시절에 첫 결혼을 했지만, 첫 부인과 헤어진 이유는 알려져 있지 않다.

1875년(고종 12년) 부사과가 되었다. 무관으로 일하면서 박영효(朴泳孝)의 심복이 되었다. 조선총독부 인사자료에 따르면, 그는 키와 체격이 큰 거구였으며 풍채는 당당했지만, 도량이 좁아 타인을 포용할 줄 몰랐다는 평을 남겼다.

1883년(고종 20년) 5월 김옥균, 박영효 등의 주선으로 서재필, 정란교, 이규완 등 13명과 함께 사관생도의 신분으로 일본 유학길에 올랐다. 처음에는 게이오의숙에서 일본어를 배우고, 1883년 10월 3일 일본 육군부사관 양성기관인 육군 도야마 하사관학교에 입학, 1884년 5월에 졸업하였다.[2]

1884년 7월 여비가 떨어져 귀국하였다. 귀국 직후 병조 조련국(操鍊局)에서 교관으로 근무하며 사관생도들의 훈련을 맡았고, 김옥균, 박영효 및 미리 귀국해 있던 서재필, 이규완 등과 갑신정변 준비에 가담하였다. 1884년 8월 남행부장 겸 사과(南行部將兼司果), 8월 28일 부장(部將), 9월 후영군사마(後營軍司馬)를 거쳐 10월 남행군직(南行軍職)에 임명되었다. 갑신정변 계획에서 그는 서재필, 이규완, 서재창 등과 함께 군사 지휘관으로 내정되었다.

1884년(고종 21년) 12월 4일 갑신정변이 일어나자 서재필, 정난교 등과 함께 생도들을 이끌고 궐내에 잠입하였다. 국왕과 비빈들을 경우궁(景祐宮)으로 옮겼으나,[1] 12월 7일 청나라군의 개입으로 실패하자, 박영효 등과 함께 일본으로 건너갔다가 1886년(고종 23) 미국으로 건너갔다. 이듬해 다시 일본으로 돌아왔으며, 1896년 조선으로 귀국하였다.[1] 망명생활 중 도쿄사범학교(東京師範學校)를 다녔다.[1] 일본 체류 중 유혁로, 정난교 등과 박영효, 김옥균의 경호를 담당하였으나 어느정도 거리를 두었다.[1] 1886년 5월 이규완지운영(池運永)이 조선 조정에서 보낸 자객임을 간파하자, 김옥균의 지시로 유혁로 등과 함께 지운영을 유인, 고종의 밀서와 비수 등을 압수하였다.[1] 1888년(고종 23) 미국으로 건너갔다가 1894년 초 귀국하였다.[1]

1894년 일본으로 잠입한 홍종우김옥균을 만나려 할 때, 주선하여 홍종우김옥균과 만나게 했다.[1] 그러나 이규완 등의 극력 만류에도 김옥균은 3월 홍종우를 신뢰하여 상하이로 떠났다.[1] 김옥균이 떠난 뒤에는 도쿄사범학교의 공부와 박영효의 경호에 전념하였다.[1] 일본에 체류하며 일본 여인 신매자(申梅子)와 결혼, 1남 7녀를 두었다.[1]

1894년 7월 비밀리에 귀국, 그해 11월 통위영 정령관(統衛營副領官)에 임명되었다. 1895년 1월 대한제국 육군 정위(正尉)가 되어 훈련대(訓練隊)에 배치되었고, 2월 훈련대 제1대대장이 되고 육군참령(陸軍參領)으로 승진하였다. 그해 박영효, 이규완, 정난교, 유혁로 등과 함께 명성황후 암살을 기도했으나, 유길준의 밀고로 명성황후 암살 미수 사건이 실패로 돌아갔다.[4] 1895년 12월 박영효, 오세창, 이규완, 권동진, 우범선, 이두황, 정난교 등과 함께 일본으로 망명하였다.

1895년 12월 말 다시 입국했으나 1896년 2월 아관파천이 실패로 돌아가자 다시 일본으로 망명하였다. 1898년 9월 대한제국 중추원 의관직에 임명되었으나 거절하고 귀국하지 않았다. 1904년 4월 중순 고종은 주한일본국공사관에 조선인 출신 정치적 난민 신청자 중 박영효, 유길준, 장박, 조희연, 이두황, 이진호, 권동진, 구연수, 정란교, 이규완, 이범래, 신응희 등 14명을 일본에서 추방하고, 나머지 다른 망명객은 송환할 것을 요청하였다. 주한일본공사는 4월 14일 일본 외무대신에게 보고했는데 일본 정부에서는 이들의 송환을 거절하였다.

1907년 6월 대한제국으로 귀국, 중추원 부찬의에 임명되었다가, 순종 즉위 후 육군 부령에 임명되었다. 1907년 9월 19일 육군부령에서 면직되고, 육군정령에 임명되었다가 1907년 10월 정령으로 예편하고 중추원 부찬의에 임명되었다. 11월 10일 다시 중추원 부찬의에 임명되고 주임관 2등(奏任官二等)에 서임되었다. 그러나 그해 12월 20일 의원면직하였다.

1908년 1월에는 그의 친구인 특진관 장박이 평리원 판사 박만서에게 신응희를 위해서 사퇴하라고 압력을 넣어 물의를 빚기도 했다. 정미 7조약 이후 그는 내무부대신 송병준 등의 추천과 통감부의 비호를 받아 1908년 2월 19일 전라남도 관찰사 칙임관 3등에 임명되었다. 그러나 그는 전남 관찰사직을 여러번 사양했다. 총리대신 이완용이토 히로부미 통감이 여러번 권하였으나 그는 마다하였다.[6] 결국 그해 6월 11일 전라남도 관찰사에 취임하였다. 1908년 6월 25일 겸임 전라남도재판소 판사를 겸임하였다.

전라남도 관찰사로 재직 중, 1909년 8월 의병운동 탄압 작전인 한국통감부의 남조선대토벌작전을 지원하고, 의병들을 회유하는 공작에 적극적으로 참여했다. 한국통감부는 당시의 한국 관원들 중 신응희를 지목하여 "그는 폭도의 절멸에 열중하여 군대 간부와 함께 전후 2회 폭도가 창궐하는 지방을 순시하면서 군수 이하를 경고, 장려하고 민중을 훈유하는 등 백방으로 수단을 강구"했다고 높이 평가했다.

1908년(융희 2년) 3월 대동학회의 평의원으로 위촉되었고, 그해 5월에는 대한학회 찬성회 창립발기인이 되었으며 대한학회 평의원이 되었다. 그해 6월에는 대한협회 회원으로 임명되었다. 1909년 공립 광주농림학교가 설립되자 전라남도 관찰사이던 신응희가 초대 교장을 겸했다. 공립광주농림학교는 설립 당시 농림업 및 측량과의 경우 수업연한이 3년, 속과는 1년이었으며, 학생 수는 5개 학급에 52명이었다.[1] 교장은 관찰사 신응희가 겸하고 교사는 30평 2동, 실습지는 학교에서 1.1km 정도 떨어진 양림리에 있었다.[1] 1910년 한일합방 이전까지 전남 관찰사로 교장직을 겸임했다.

1910년 10월 1일 한일합방조약 체결과 동시에 조선총독부 고등관에 임용되었다. 한일합방조약 직후 함경남도 장관 고등관 3등(咸鏡南道長官高等官三等), 종5위(從五位)가 되었고[7], 1914년부터 1918년까지 함경남도 지방토지조사위원회 위원장을 맡아 일제의 토지조사 사업에 협력하였다. 함경남도 장관 재직 시 일본미국의 어업 도구와 그물 등을 들이고 양식업을 독려하여, 함경남도 일대의 어업 생산량을 늘렸다. 특히 조선총독부는 "함경남도 서호진(西湖津) 이북의 어업이 舊來의 면모를 일신하여 융성해지고 관내의 저금 액수가 장관의 독려로 이상 증대를 초래한 치적이 있다고 평가됨"이라고 평가했다. 그러나 조선총독부 측 인사자료에는 한 도의 장관으로서 백성들에게 털끝만한 위엄이라도 실추하지 않는 것만을 염려하며, 부하가 직무를 행할 때 큰 일 작은 일을 불문하고 일일이 간섭하지 않으면 견디지 못하는 모습을 보인다며 부정적으로 평가하기도 했다.

1921년 2월 황해도지사에서 물러난 후 휴직을 신청했으며, 1923년 2월 도지사직에서 사퇴했다.[7] 1924년 4월 중추원 칙임관대우 참의에 임명되어 1925년부터 1927년까지 중추원 참의를 지냈다. 1924년 4월 일본인과 조선인이 함께 만든 내선융화단체인 동민회 결성에 참여하고, 동민회 평의원에 선출되었다. 1926년 동민회 본부 이사, 1927년 동민회 상담역을 맡았다. 1926년 11월 경성부부협의회 의원 후보자로 추천되었으며[8], 11월 20일 투표에서 113표를 받아 6위로 낙선하였다.[9] 1928년 2월 12일 중추원 참의로 재직 중, 경성부 종로구 도렴동 자택에서 급성폐렴으로 사망하였다.

2. 1. 초기 활동

1858년(철종 9년) 11월 2일 신식(申式)의 아들로 태어났다. 11월 5일생 설, 9월생 설, 1859년생 설도 존재한다. 대한제국조선총독부 관원 이력서에는 1858년생 설과 1859년생 설이 모두 수록되어 있다. 한성부 서서(西署) 동영동(東嶺洞) 42통 7호 출신으로, 이후 경성부 북부(北部) 송현방(松峴防)에서 거주하였다. 어려서 가숙에서 성리학을 배웠고, 소년 시절 첫 결혼을 하였지만, 첫 부인과 이별한 사연은 알려져 있지 않다.

1875년(고종 12년) 부사과가 되었다. 무관으로 재직하며 박영효(朴泳孝)의 심복이 되었다. 조선총독부 인사자료에 따르면, 그는 키와 체격이 큰 거구였으며 풍채는 당당했지만, 도량이 좁아 타인을 포용할 줄 몰랐다는 평을 남겼다.

1883년(고종 20년) 5월 김옥균, 박영효 등의 주선으로 서재필, 정란교, 이규완 등 13명과 함께 사관생도의 신분으로 일본 유학길에 올랐다. 처음에는 게이오의숙에서 일본어를 배우고, 1883년 10월 3일 일본 육군부사관 양성기관인 육군 도야마 하사관학교에 입학, 1884년 5월에 졸업하였다.[2]

1884년 7월 여비가 떨어져 귀국하였다. 귀국 직후 병조 조련국(操鍊局)에서 교관으로 근무하며 사관생도들의 훈련을 맡았고, 김옥균, 박영효 및 미리 귀국해 있던 서재필, 이규완 등과 갑신정변 준비에 가담하였다. 1884년 8월 남행부장 겸 사과(南行部將兼司果), 8월 28일 부장(部將), 9월 후영군사마(後營軍司馬)를 거쳐 10월 남행군직(南行軍職)에 임명되었다. 갑신정변 계획에서 그는 서재필, 이규완, 서재창 등과 함께 군사 지휘관으로 내정되었다.

1884년(고종 21년) 12월 4일 갑신정변이 일어나자 서재필, 정난교 등과 함께 생도들을 이끌고 궐내에 잠입하였다. 국왕과 비빈들을 경우궁(景祐宮)으로 옮겼으나,[1] 12월 7일 청나라군의 개입으로 실패하자, 박영효 등과 함께 일본으로 건너갔다가 1886년(고종 23) 미국으로 건너갔다. 이듬해 다시 일본으로 돌아왔으며, 1896년 조선으로 귀국하였다.[1]

망명생활 중 도쿄사범학교(東京師範學校)를 다녔다.[1] 일본 체류 중 유혁로, 정난교 등과 박영효, 김옥균의 경호를 담당하였으나 어느정도 거리를 두었다.[1] 1886년 5월 이규완지운영(池運永)이 조선 조정에서 보낸 자객임을 간파하자, 김옥균의 지시로 유혁로 등과 함께 지운영을 유인, 고종의 밀서와 비수 등을 압수하였다.[1] 1888년(고종 23) 미국으로 건너갔다가 1894년 초 귀국하였다.[1]

1894년 일본으로 잠입한 홍종우김옥균을 만나려 할 때, 주선하여 홍종우김옥균과 만나게 했다.[1] 그러나 이규완 등의 극력 만류에도 김옥균은 3월 홍종우를 신뢰하여 상하이로 떠났다.[1] 김옥균이 떠난 뒤에는 도쿄사범학교의 공부와 박영효의 경호에 전념하였다.[1] 일본에 체류하며 일본 여인 신매자(申梅子)와 결혼, 1남 7녀를 두었다.[1]

2. 1. 1. 생애 초반

1858년(철종 9년) 11월 2일 신식(申式)의 아들로 태어났다. 11월 5일생 설, 9월생 설, 1859년생 설도 존재한다. 대한제국조선총독부 관원 이력서에는 1858년생 설과 1859년생 설이 모두 수록되어 있다. 한성부 서서(西署) 동영동(東嶺洞) 42통 7호 출신으로, 이후 경성부 북부(北部) 송현방(松峴防)에서 거주하였다. 어려서 가숙에서 성리학을 배웠고, 소년 시절 첫 결혼을 하였지만, 첫 부인과 이별한 사연은 알려져 있지 않다.

1875년(고종 12년) 부사과가 되었다. 무관으로 재직하며 박영효(朴泳孝)의 심복이 되었다.

조선총독부 인사자료에 따르면, 그는 키와 체격이 큰 거구였으며 풍채는 당당했지만, 도량이 좁아 타인을 포용할 줄 몰랐다는 평을 남겼다.

2. 1. 2. 일본 유학과 귀국

1883년(고종 20년) 5월 김옥균, 박영효 등의 주선으로 서재필, 정란교, 이규완 등 13명과 함께 사관생도의 신분으로 일본 유학길에 올랐다. 처음에는 게이오의숙에서 일본어를 배우고, 1883년 10월 3일 일본 육군부사관 양성기관인 육군 도야마 하사관학교에 입학, 1884년 5월에 졸업하였다.[2] 1883년 10월 3일에는 게이오의숙을 수료하고 도야마 하사관학교로 진학하였다.[3]

1884년 7월 여비가 떨어져 귀국하였다. 귀국 직후 병조 조련국(操鍊局)에서 교관으로 근무하며 사관생도들의 훈련을 맡았고, 김옥균, 박영효 및 미리 귀국해 있던 서재필, 이규완 등과 갑신정변 준비에 가담하였다. 1884년 8월 남행부장 겸 사과(南行部將兼司果), 8월 28일 부장(部將), 9월 후영군사마(後營軍司馬)를 거쳐 10월 남행군직(南行軍職)에 임명되었다.

갑신정변 계획에서 그는 서재필, 이규완, 서재창 등과 함께 군사 지휘관으로 내정되었다.

2. 1. 3. 갑신정변

1884년(고종 21년) 12월 4일 갑신정변이 일어나자 그는 행동대의 1개 부대를 이끌고 서재필, 정난교, 서재창, 윤경순, 유혁로, 이규완 등과 함께 생도들, 장사패들을 이끌고 궐내에 잠입하였다. 그는 서재필의 부대, 이규완이 인솔하는 부대와 함께 사관생도들을 이끌고 국왕과 비빈들을 경우궁(景祐宮)으로 옮겼다.[1] 그러나 12월 7일 청나라군의 개입으로 갑신정변이 실패하자, 박영효, 서재필, 서광범, 이규완 등 10인과 함께 일본으로 건너갔다가 1886년(고종 23) 박영효, 서광범, 이규완, 서재필 등과 함께 미국으로 건너갔다가 이듬해 그는 박영효 등과 함께 다시 일본으로 돌아왔으며, 1896년 다시 조선으로 귀국하였다.[1]

망명생활 중 그는 도쿄사범학교(東京師範學校)를 다녔다.[1] 그는 일본에 체류하며 유혁로, 정난교 등과 함께 박영효, 김옥균의 경호를 담당하였으나 어느정도 거리를 두었다.[1] 1886년 5월 이규완지운영(池運永)이 조선 조정에서 보낸 자객임을 간파하자, 김옥균의 지시로 유혁로, 정난교 등과 함께 김옥균, 박영효에게 불만이 있는 척 가장하여 김옥균 암살밀지를 받고 일본으로 온 지운영을 유인, 그를 안심시킨 뒤 고종의 밀서와 비수, 칼 등을 압수하였다.[1] 1888년(고종 23) 다시 배편으로 미국으로 건너갔다가 1894년 초 귀국하였다.[1]

1894년 일본으로 잠입한 홍종우김옥균을 만나려 할 때, 주선하여 홍종우김옥균과 만나게 했다.[1] 그러나 이규완, 유혁로 등의 극력 만류에도 김옥균은 그해 3월 홍종우를 신뢰하여 함께 상하이로 떠나게 된다.[1] 김옥균이 떠난 뒤에는 도쿄사범학교의 공부와 박영효의 경호에 전념하였다.[1] 일본에 체류하며 일본 여인 신매자(申梅子)와 결혼, 1남 7녀를 두었다.[1]

2. 2. 관료 생활

1894년(고종 31년) 7월 비밀리에 귀국, 그해 11월 통위영(統衛營) 정령관(부령관)에 임명되었다. 1895년(고종 32년) 1월 대한제국 육군 정위(正尉)가 되어 훈련대에 배치되었고, 2월 훈련대 제1대대장이 되고 육군 참령(參領)으로 승진하였다. 그해 박영효, 이규완, 정난교, 유혁로 등과 함께 명성황후 암살을 기도했으나, 유길준의 밀고로 명성황후 암살 미수 사건이 실패로 돌아갔다.[4] 1895년 12월 박영효, 오세창, 이규완, 권동진, 우범선, 이두황, 정난교 등과 함께 일본으로 망명하였다.

1895년 12월 말 다시 입국했으나 1896년(고종 33년) 2월 아관파천이 실패로 돌아가자 다시 일본으로 망명하였다. 1898년(광무 2년) 9월 대한제국 중추원 의관직에 임명되었으나 거절하고 귀국하지 않았다.

1904년(광무 8년) 4월 중순 고종은 주한일본국공사관에 조선인 출신 정치적 난민 신청자 중 박영효, 유길준, 장박, 조희연, 이두황, 이진호, 권동진, 구연수, 정란교, 이규완, 이범래, 신응희 등 14명을 일본에서 추방하고, 나머지 다른 망명객은 송환할 것을 요청하였다. 주한일본공사는 4월 14일 일본 외무대신에게 보고했는데 일본 정부에서는 이들의 송환을 거절하였다.

1907년 6월 대한제국으로 귀국, 바로 중추원 부찬의에 임명되었다가, 순종 즉위 후 육군 부령에 임명되었다. 1907년 9월 19일 육군 부령에서 면직되고, 육군 정령에 임명되었다가 1907년 10월 정령으로 예편하고 중추원 부찬의에 임명되었다. 11월 10일 다시 중추원 부찬의에 임명되고 주임관 2등(奏任官二等)에 서임되었다. 그러나 그해 12월 20일 의원면직하였다.

1908년(융희 2년) 1월에는 그의 친구인 특진관 장박이 평리원 판사 박만서에게 신응희를 위해서 사퇴하라고 압력을 넣어 물의를 빚기도 했다. 정미7조약 이후 그는 내무부대신 송병준 등의 추천과 통감부의 비호를 받아 1908년 2월 19일 전라남도 관찰사 칙임관 3등에 임명되었다. 그러나 그는 전남 관찰사직을 여러번 사양했다. 총리대신 이완용이토 히로부미 통감이 여러번 권하였으나 그는 마다하였다.[6] 결국 그해 6월 11일 전라남도 관찰사에 취임하였다. 1908년 6월 25일 겸임 전라남도재판소 판사를 겸임하였다.

전라남도 관찰사로 재직 중, 1909년 8월 의병운동 탄압 작전인 한국통감부의 남조선대토벌작전을 지원하고, 의병들을 회유하는 공작에 적극적으로 참여했다. 한국통감부는 당시의 한국 관원들 중 신응희를 지목하여 "그는 폭도의 절멸에 열중하여 군대 간부와 함께 전후 2회 폭도가 창궐하는 지방을 순시하면서 군수 이하를 경고, 장려하고 민중을 훈유하는 등 백방으로 수단을 강구"했다고 높이 평가했다.

1908년(융희 2년) 3월 대동학회의 평의원으로 위촉되었고, 그해 5월에는 대한학회 찬성회 창립발기인이 되었으며 대한학회 평의원이 되었다. 그해 6월에는 대한협회 회원으로 임명되었다.

1909년 공립 광주농림학교가 설립되자 전라남도 관찰사이던 신응희가 초대 교장을 겸했다. 공립광주농림학교는 설립 당시 농림업 및 측량과의 경우 수업연한이 3년, 속과는 1년이었으며, 학생 수는 5개 학급에 52명이었다.[1] 교장은 관찰사 신응희가 겸하고 교사는 30평 2동, 실습지는 학교에서 1.1km 정도 떨어진 양림리에 있었다.[1] 1910년 한일합방 이전까지 전남 관찰사로 교장직을 겸임했다.

2. 2. 1. 귀국과 관료 생활, 재망명

1894년 7월 비밀리에 귀국, 그해 11월 통위영 정령관(統衛營副領官)에 임명되었다. 1895년 1월 대한제국 육군 정위(正尉)가 되어 훈련대(訓練隊)에 배치되었고, 2월 훈련대 제1대대장이 되고 육군참령(陸軍參領)으로 승진하였다. 그해 박영효, 이규완, 정난교, 유혁로 등과 함께 명성황후 암살을 기도했으나, 유길준의 밀고로 명성황후 암살 미수 사건이 실패로 돌아갔다.[4] 1895년 12월 박영효, 오세창, 이규완, 권동진, 우범선, 이두황, 정난교 등과 함께 일본으로 망명하였다.

이때 신응희의 모친이 사망하여 집안 사람들이 부음을 전하니, 그는 "일이 있어 갈 수 없다." 고 회답하고, 사람을 보내 장례를 치르게 하였다.[4] 매천 황현은 이때 그의 아버지가 죽은 것으로 오인하였다. 신응희의 아버지 신식(申式)은 1900년대 초까지도 생존해 있었는데, 황성신문 1901년 1월 5일자 기사에 그의 아버지가 체포된 기사가 나타난다.

1895년 12월 말 다시 입국했으나 1896년 2월 아관파천이 실패로 돌아가자 다시 일본으로 망명하였다. 1898년 9월 대한제국 중추원 의관직에 임명되었으나 거절하고 귀국하지 않았다.

1904년 4월 중순 고종은 주한일본국공사관에 조선인 출신 정치적 난민 신청자 중 박영효, 유길준, 장박, 조희연, 이두황, 이진호, 권동진, 구연수, 정란교, 이규완, 이범래, 신응희 등 14명을 일본에서 추방하고, 나머지 다른 망명객은 송환할 것을 요청하였다. 주한일본공사는 4월 14일 일본 외무대신에게 보고했는데 일본 정부에서는 이들의 송환을 거절하였다.

2. 2. 2. 을사 보호조약 체결 이후

1905년 을사늑약 이후 귀국했다가 다시 일본으로 돌아갔다. 1907년 4월 27일 아버지 신식의 부음을 전보로 보냈으나, 분망하지 못할 이유가 있다며 다른 사람을 보내 장례를 대신하게 했다.[5]

1907년 6월 대한제국으로 귀국, 바로 중추원 부찬의에 임명되었다가, 순종 즉위 후 육군 부령에 임명되었다. 1907년 9월 19일 육군부령에서 면직되고, 육군정령에 임명되었다가 1907년 10월 정령으로 예편하고 중추원 부찬의에 임명되었다. 11월 10일 다시 중추원 부찬의에 임명되고 주임관 2등(奏任官二等)에 서임되었다. 그러나 그해 12월 20일 의원면직하였다.

1908년 1월에는 그의 친구인 특진관 장박이 평리원 판사 박만서에게 신응희를 위해서 사퇴하라고 압력을 넣어 물의를 빚기도 했다. 정미 7조약 이후 그는 내무부대신 송병준 등의 추천과 통감부의 비호를 받아 1908년 2월 19일 전라남도 관찰사 칙임관 3등에 임명되었다. 그러나 그는 전남 관찰사직을 여러번 사양했다. 총리대신 이완용이토 히로부미 통감이 여러번 권하였으나 그는 마다하였다.[6] 결국 그해 6월 11일 전라남도 관찰사에 취임하였다. 1908년 6월 25일 겸임 전라남도재판소 판사를 겸임하였다.

전라남도 관찰사로 재직 중, 1909년 8월 의병운동 탄압 작전인 한국통감부의 남조선대토벌작전을 지원하고, 의병들을 회유하는 공작에 적극적으로 참여했다. 한국통감부는 당시의 한국 관원들 중 신응희를 지목하여 "그는 폭도의 절멸에 열중하여 군대 간부와 함께 전후 2회 폭도가 창궐하는 지방을 순시하면서 군수 이하를 경고, 장려하고 민중을 훈유하는 등 백방으로 수단을 강구"했다고 높이 평가했다.

2. 2. 3. 한일 병합 직전

1908년(융희 2년) 3월 대동학회의 평의원으로 위촉되었고, 그해 5월에는 대한학회 찬성회 창립발기인이 되었으며 대한학회 평의원이 되었다. 그해 6월에는 대한협회 회원으로 임명되었다.

1909년 공립 광주농림학교가 설립되자 전라남도 관찰사이던 신응희가 초대 교장을 겸했다. 공립광주농림학교는 설립 당시 농림업 및 측량과의 경우 수업연한이 3년, 속과는 1년이었으며, 학생 수는 5개 학급에 52명이었다.[1] 교장은 관찰사 신응희가 겸하고 교사는 30평 2동, 실습지는 학교에서 1.1km 정도 떨어진 양림리에 있었다.[1] 1910년 한일합방 이전까지 전남 관찰사로 교장직을 겸임했다.

2. 3. 한일 병합 이후

1910년 10월 1일 한일합방조약 체결과 동시에 조선총독부 고등관에 임용되었다. 한일합병 조약 직후 함경남도 장관 고등관 3등(咸鏡南道長官高等官三等), 종5위(從五位)가 되었고,[7] 1914년부터 1918년까지 함경남도 지방토지조사위원회 위원장을 맡아 일제의 토지조사 사업에 협력하였다.

함경남도 장관 재직 시 일본미국의 어업 도구와 그물 등을 들이고 양식업을 독려하여, 함경남도 일대의 어업 생산량을 늘렸다. 특히 조선총독부는 "함경남도 서호진(西湖津) 이북의 어업이 舊來의 면모를 일신하여 융성해지고 관내의 저금 액수가 장관의 독려로 이상 증대를 초래한 치적이 있다고 평가됨"이라고 평가했다. 그러나 조선총독부 측 인사자료에는 한 도의 장관으로서 백성들에게 털끝만한 위엄이라도 실추하지 않는 것만을 염려하며, 부하가 직무를 행할 때 큰 일 작은 일을 불문하고 일일이 간섭하지 않으면 견디지 못하는 모습을 보인다며 부정적으로 평가하기도 했다.

1921년 2월 황해도지사에서 물러난 후 휴직을 신청했으며, 1923년 2월 도지사직에서 사퇴했다.[7] 1924년 4월 중추원 칙임관대우 참의에 임명되어 1925년부터 1927년까지 조선총독부 중추원 참의를 지냈다.

1924년 4월 일본인과 조선인이 함께 만든 내선융화단체인 동민회 결성에 참여하고, 동민회 평의원에 선출되었다. 1926년 동민회 본부 이사, 1927년 동민회 상담역을 맡았다. 1926년 11월 경성부부협의회 의원 후보자로 추천되었으며[8], 11월 20일 투표에서 113표를 받아 6위로 낙선하였다.[9] 1928년 2월 12일 중추원 참의로 재직 중, 경성부 종로구 도렴동 자택에서 급성폐렴으로 사망하였다.

2. 3. 1. 조선총독부 고등관 재직

1910년 10월 1일 한일합방조약 체결과 동시에 조선총독부 고등관에 임용되었다. 한일합병 조약 직후 함경남도 장관 고등관 3등(咸鏡南道長官高等官三等), 종5위(從五位)가 되었고[7], 1914년부터 1918년까지 함경남도 지방토지조사위원회 위원장을 맡아 일제의 토지조사 사업에 협력하였다.

함경남도 장관 재직 시 일본미국의 어업 도구와 그물 등을 들이고 양식업을 독려하여, 함경남도 일대의 어업 생산량을 늘렸다. 특히 조선총독부는 "함경남도 서호진(西湖津) 이북의 어업이 舊來의 면모를 일신하여 융성해지고 관내의 저금 액수가 장관의 독려로 이상 증대를 초래한 치적이 있다고 평가됨"이라고 평가했다. 그러나 조선총독부 측 인사자료에는 한 도의 장관으로서 백성들에게 털끝만한 위엄이라도 실추하지 않는 것만을 염려하며, 부하가 직무를 행할 때 큰 일 작은 일을 불문하고 일일이 간섭하지 않으면 견디지 못하는 모습을 보인다며 부정적으로 평가하기도 했다.

2. 3. 2. 생애 후반

1921년 2월 황해도지사에서 물러난 후 휴직을 신청했으며, 1923년 2월 도지사직에서 사퇴했다.[7] 1922년 2월 흥린건축주식회사 취체역에 선임되었다. 1924년 4월 중추원 칙임관대우 참의에 임명되어 1925년부터 1927년까지 조선총독부 중추원 참의를 지냈다.

1924년 4월 일본인과 조선인이 함께 만든 내선융화단체인 동민회 결성에 참여하고, 동민회 평의원에 선출되었다. 1926년 동민회 본부 이사, 1927년 동민회 상담역을 맡았다. 1926년 11월 경성부부협의회 의원 후보자로 추천되었으며[8], 11월 20일 투표에서 113표를 받아 6위로 낙선하였다.[9] 1928년 2월 12일 중추원 참의로 재직 중, 경성부 종로구 도렴동 자택에서 급성폐렴으로 사망하였다.

3. 가족 관계

관계이름
아버지신식
어머니미상
부인미상 (갑신정변으로 이혼)
부인신매자 (申梅子|신매자일본어, 일본인)
아들1남
7녀


4. 평가

신응희는 근대적 군사 지식을 습득하고 보급하기 위해 노력했으며, 일제강점기 함경남도 지역의 어업 생산량 증대에 기여한 점이 긍정적으로 평가된다.[1]

그러나 조선총독부의 관원 이력서 및 인사 기록에서는 부정적인 평가가 주를 이룬다. 조선총독부는 신응희가 한 도의 장관으로서 백성들에게 위엄을 실추하지 않으려는 모습과 부하 직원의 직무에 사사건건 간섭하는 모습을 보였다고 평가했다.[1] 또한 부하에게는 엄격했지만 윗사람에게는 아첨하며, 중후함이 부족하고 이익을 쫓는 경향이 강하다는 평가를 받았다.[1]

나아가 조선총독부는 신응희가 경박한 미국의 분위기에 영향을 받아 뻔뻔스럽고 건방진 태도를 보이며, 지식이 얕고 국제 정세에 어둡다고 평가했다. 다만, 재물 축적에는 깨끗한 면모를 보였다는 평가도 덧붙였다.[1]

4. 1. 긍정적 평가

신응희는 근대적 군사 지식을 습득하고 보급하기 위해 노력했으며, 일제강점기 함경남도 지역의 어업 생산량 증대에 기여한 점이 긍정적으로 평가된다.[1]

4. 2. 부정적 평가

조선총독부는 관원 이력서를 통해 신응희의 인물됨을 부정적으로 평가하였다. 이력서에 따르면, 신응희는 한 도의 장관으로서 백성들에게 털끝만한 위엄이라도 실추하지 않으려는 염려가 있었고, 부하 직원이 직무를 수행할 때 큰일 작은 일을 불문하고 일일이 간섭하지 않고는 견디지 못하는 모습을 보였다.[1]

조선총독부의 인사 기록에 따르면, 신응희는 준민교혜(寯敏巧慧)하며 부하에게는 매우 엄격했지만, 윗사람에게는 아첨하며 허리를 굽실거리는 데 정신이 없었다. 또한, 천성이 교묘하고 영리하여 중후함이 부족하고, 이익을 쫓는 경향이 강했다.[1] 조선총독부는 더 나아가 신응희가 경박한 미국의 분위기에 영향을 받아 협소한 인물에 뻔뻔스러움까지 더해져 건방진 태도를 보이며, 지식이 얕고 국제 정세에 어둡다고 평가했다.[1] 다만, 신응희는 도량이 좁기는 하지만 축재(蓄財) 문제에는 깨끗하여 억지로 재산을 모으는 일에는 급급하지 않았다고 덧붙였다.[1]

4. 3. 종합 평가

신응희는 조선총독부 관원 이력서 및 인사 기록에서 부정적으로 평가되었다. 조선총독부는 신응희가 한 도의 장관으로서 백성들에게 위엄을 실추하지 않는 것에만 염려하고, 부하의 직무에 사사건건 간섭하는 모습을 보인다고 평가했다.[1]

조선총독부 인사 기록에 따르면, 신응희는 준민교혜(寯敏巧慧)하며 부하에게는 엄격하지만 윗사람에게는 아첨을 일삼는 인물로 묘사된다. 또한, 천성이 교묘하고 영리하여 중후함이 부족하고, 이익을 쫓는 경향이 강하다고 평가되었다.[1]

조선총독부는 신응희가 경박한 미국의 공기에 영향을 받아 협소한 인물에 뻔뻔함까지 갖추게 되었으며, 건방진 태도를 보인다고 평가했다. 또한 지식이 저급하고 천하의 형세에 어둡다는 평가도 덧붙였다. 다만, 도량이 좁기는 하지만 재물 축적에는 깨끗하여 억지로 재산을 모으는 일에는 급급하지 않다는 평가도 있었다.[1]

참조

[1] 뉴스 1896년 공립소학교 첫 개교 … 1925년 중·고 수업료 2원50전 http://www.kwangju.c[...] 광주일보 2012-08-22
[2] 서적 친일파 99인 1 돌베개 1993-02-01
[3] 문서 서재필은 1884년 1월, 이규완은 1884년 2월에 게이오의숙을 수료하고 도야마 하사관학교로 진학하여 각각 진학 시기가 다르다.
[4] 서적 역주 매천야록 2 문학과지성사 2005
[5] 뉴스 送人慰問 대한매일신보 1907-04-27
[6] 뉴스 신씨강직 대한매일신보 1908-02-19
[7] 서적 실록 친일파 돌베개 1991-02-01
[8] 뉴스 京城府協議員 公認候補如此 동아일보 1926-10-16
[9] 뉴스 日人 十八名에 朝鮮人 十二名 동아일보 1926-11-22



본 사이트는 AI가 위키백과와 뉴스 기사,정부 간행물,학술 논문등을 바탕으로 정보를 가공하여 제공하는 백과사전형 서비스입니다.
모든 문서는 AI에 의해 자동 생성되며, CC BY-SA 4.0 라이선스에 따라 이용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위키백과나 뉴스 기사 자체에 오류, 부정확한 정보, 또는 가짜 뉴스가 포함될 수 있으며, AI는 이러한 내용을 완벽하게 걸러내지 못할 수 있습니다.
따라서 제공되는 정보에 일부 오류나 편향이 있을 수 있으므로, 중요한 정보는 반드시 다른 출처를 통해 교차 검증하시기 바랍니다.

문의하기 : help@durumis.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