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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넉 파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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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이넉 파월은 1912년 버밍엄에서 태어나 케임브리지 대학교에서 고전학을 전공한 후 제2차 세계 대전에 참전한 영국의 정치인이다. 보수당 소속으로 여러 각료를 역임했으며, 1968년 이민 문제에 대한 '피의 강' 연설로 논란을 일으켰다. 이후 유럽 경제 공동체 가입에 반대하며 보수당을 탈당, 얼스터 연합주의당 소속으로 하원 의원을 지냈다. 그는 통화주의, 유럽 회의주의, 영국 민족주의, 이민 통제, 핵무기 반대 등 다양한 정치적 신념을 가졌으며, 1987년 정계에서 은퇴한 후 1998년 사망했다. 파월은 영국 정치 담론에 큰 영향을 미쳤지만, 그의 '피의 강' 연설은 인종차별 논란을 불러일으키며 긍정적, 부정적 평가를 동시에 받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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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넉 파월 - [인물]에 관한 문서
기본 정보
1987년 초상화
1987년 초상화
존함존 이녹 파월
출생일1912년 6월 16일
출생지버밍엄, 잉글랜드
사망일1998년 2월 8일
사망지런던, 잉글랜드
안장 장소워릭 묘지, 워릭, 잉글랜드
국적영국
정당보수당 (1947–1974)
얼스터 연합주의자당 (1974–1987)
배우자파멜라 윌슨 (1952년 1월 2일 결혼)
자녀2
학력트리니티 칼리지, 케임브리지 대학교
학교
군 복무영국 육군
소속 부대로열 워릭셔 연대
일반 근무대
정보 군단
복무 기간1939–1945년
계급준장
참전 전투제2차 세계 대전
북아프리카 전역
인도
훈장대영 제국 훈장 (1943년)
정치 경력
그림자 국방장관재임 시작: 1965년 7월 7일
재임 종료: 1968년 4월 21일
전임: 피터 소니크로프트
후임: 레지널드 모들링
보건부 장관수상: 해럴드 맥밀런
재임 시작: 1960년 7월 27일
재임 종료: 1963년 10월 18일
전임: 데렉 워커-스미스
후임: 앤서니 바버
재무부 재정 차관수상: 해럴드 맥밀런
재임 시작: 1957년 1월 14일
재임 종료: 1958년 1월 15일
전임: 헨리 브룩
후임: 잭 사이먼
의회 경력
영국 하원 의원
사우스 다운
재임 시작: 1974년 10월 10일
재임 종료: 1987년 5월 18일
전임: 로렌스 오어
후임: 에디 맥그레이디
영국 하원 의원
울버햄프턴 남서부
재임 시작: 1950년 2월 23일
재임 종료: 1974년 2월 8일
전임: 선거구 신설
후임: 니컬러스 버드젠
기타 정보
대표 연설피의 강 연설
인기갤럽 조사: 74%
ORC 조사: 82%
NOP 조사: 67%
익스프레스 조사: 79%

2. 생애

이넉 파월은 1912년 6월 16일 버밍엄에서 태어나 제2차 세계 대전에 참전했다.[138] 종전 후 1945년 총선에서 뮌헨 협정에 대한 응징으로 노동당에 투표했으나, 이후 보수당에 입당했다. 1950년 총선에서 울버햄프턴 선거구에 출마해 당선된 후, 헤럴드 맥밀런 내각에서 보건부 장관을 역임했다.[139]

1964년 총선에서 보수당이 패배한 후, 1968년 '피의 강물' 연설을 통해 이민 정책에 대한 우려를 표명하며 논란의 중심에 섰다.[140] 1972년 에드워드 히스 총리의 유럽 경제 공동체(EEC) 가입에 반대하며 1974년 보수당을 탈당, 얼스터 연합주의자당에 입당하여 10월 총선에서 북아일랜드 사우스 다운 선거구에 출마해 당선되었다.[139] 1987년 총선에서 낙선할 때까지 의원직을 유지했다.[142] 1992년 파킨슨병 진단을 받았으며, 1998년 2월 8일 사망했다.[142]

2. 1. 초기 생애 및 교육 (1912-1939)

이넉 파월은 1912년 6월 16일 버밍엄에서 태어났다.[138] 파월 가문은 웨일스계 혈통이었다.[138] 그는 어릴 때부터 책을 매우 좋아했으며, 가족들은 그의 학업을 적극 지원했다. 파월은 버밍엄에 있는 학교에서 고전학에 깊은 관심을 갖게 되었다. 1930년 케임브리지 대학교 트리니티 칼리지에 입학하여 1933년까지 공부했다.[139] 그는 라틴어, 그리스어, 인도 지방어, 포르투갈어, 웨일스어 등 여러 언어를 구사했다.[139]

케임브리지 대학교에서 공부하는 동안 파월은 여러 상을 수상했다.

상 이름수상 연도비고
크레이븐 장학금(Craven scholarship)1931년신입생으로서는 두 번째 수상
퍼시 펨버턴 상(Percy Pemberton Prize)
포슨 상(Porson Prize)
예이츠 상(Yeats Prize)
리스 놀즈 상(Lees Knowles)
회원상(Members' prize)라틴어 산문
총장 고전 메달(Chancellor's Classical Medal)1등
크로머 그리스 에세이 상(Cromer Greek essay prize)1933년"투키디데스, 그의 도덕적, 역사적 원칙과 후대 유물에 미친 영향" 논문
브라운 메달(Browne Medal)1933년케임브리지 상원 의사당(Senate House, Cambridge)에서 수상 에세이 발표



1933년 케임브리지 대학교를 졸업한 후에도 파월은 트리니티 칼리지의 펠로우로 남았다.[13] 그는 라틴어 고대 원고를 연구하고 그리스어웨일스어로 학술 저술을 하는 데 많은 시간을 보냈다.[13]

1937년, 파월은 시드니 대학교 그리스어 교수가 되었다.[17] 1938년, 그는 옥스퍼드 대학교 출판부를 위해 헨리 스튜어트 존스의 투키디데스의 ''Historiae''를 개정했다. 같은 해 캠브리지 대학교 출판부에서 그의 ''헤로도토스 사전''을 출간했다.[18]

1938년 5월 7일 그리스어 교수 취임 강연에서 파월은 영국의 유화 정책을 비판하고 독일과의 전쟁이 다가오고 있다고 예측했다.[20]

2. 2. 군 복무 (1939-1945)

제2차 세계 대전이 발발하자 파월은 즉시 영국으로 돌아왔다. 그는 "러시아가 1812년과 1916년처럼 우리의 생존과 승리의 열쇠를 쥐게 될 것"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에 러시아 사전을 구입한 후에 영국으로 귀국했다.[138]

1939년 영국으로 귀국한 파월은 왕립 워릭셔 연대에 이등병으로 입대하였다.[138] 파월은 정보 장교로 복무하면서, 카이로, 델리 등지에서 근무하였다. 엘 알라메인 전투 계획에도 참여하였다.[138] 1943년에는 대영 제국 훈장 5등급(MBE)을 수훈하였다.[143] 종전 당시 그의 계급은 준장이었다.[138]

2. 3. 정계 입문 (1945-1950)

1945년 총선에서 노동당에 투표했는데, 그 이유는 보수당 내각이 체결한 뮌헨 협정에 대해 응징하기 위해서였다. 종전 후 그는 보수당에 입당하여 래브 버틀러 밑에서 보수당 조사부(CRD)에서 일했으며, 아이언 매클로드와 레지널드 모들링이 그의 동료였다.

1947년 노맨턴(Normanton|노맨턴영어)에서 실시된 보궐선거에서 파월은 보수당 소속으로 출마했지만 노동당 후보에게 큰 표차로 패배했다. 1950년 총선에서 그는 울버햄프턴 선거구에 다시 출마하여 노동당 후보를 2% 차로 꺾고 당선되었다.

2. 4. 보수당 의원 시절 (1950-1974)

1947년 노맨턴(Normanton)에서 실시된 보궐선거에서 파월은 보수당 소속으로 출마했지만 노동당 후보에게 큰 표차로 패배했다. 1950년 총선에서 울버햄프턴 선거구에 출마하여 노동당 후보를 2% 차로 꺾고 당선되었다.[139] 이후 보수당 내각에서 여러 각료를 역임한 후 1960년 헤럴드 맥밀런 내각에서 보건부 장관을 지냈다. 1964년 총선에서 보수당이 패배하면서 치러진 대표 선거에 출마하였지만 15표를 얻어 당선되지 못했다.

에드워드 히스그림자 내각 국방장관이던 1968년 4월 20일, 파월은 '피의 강물' 연설을 통해 이민자들이 영국을 위험에 빠뜨릴 수 있다는 제노포비아적 주장을 펼쳤다. 이 연설로 정계의 집중적인 공격을 받았는데, 《타임스》는 '악마의 연설'이라 혹평했고,[140] 마이클 푸트는 '비극적 사건'이라고 평했다.[141] 그럼에도 1970년 총선에서 울버햄프턴에서 쉽게 재선되었다.

1972년 에드워드 히스 총리가 유럽 경제 공동체(EEC)에 가입하자 파월은 크게 반대하며 내각과 충돌했고, 1974년 2월 총선 5일 전인 1974년 2월 23일 보수당을 탈당했다. 그는 보수당의 EEC 가입이 큰 사태를 야기할 수 있다고 경고하며, EEC 탈퇴를 조건으로 노동당 지지를 선언해 국수주의 진영 지지자들에게 충격을 주었다.

2. 4. 1. 초기 의정 활동 (1950-1957)

1950년 총선에서 울버햄프턴 선거구에 출마하여 노동당 후보를 2% 차로 꺾고 당선되었다.[139] 1950년 3월 16일, 파월은 국방에 관한 백서를 주제로 하원에서 자신의 첫 연설을 했다. 그는 연설을 시작하며 "이 하원에 처음으로 연설하기 위해 일어서는 모든 존경받는 의원들이 느끼는 경외감과 주저함을 가장할 필요는 없습니다."라고 말했다.[25]

1953년 3월 3일, 파월은 하원에서 왕실 칭호 법안에 반대하는 연설을 했다. 그는 영국의 칭호에서 세 가지 주요 변화를 발견했는데, "그것들은 모두 악하다고 생각합니다."라고 말했다. 첫 번째 변화는 "이 칭호에서, 처음으로, 이 나라에서 그동안 결코 인정된 적이 없는 원칙, 즉 왕관의 분할 가능성이 인정될 것입니다."라는 것이었다. 파월은 영국의 통합은 수 세기에 걸쳐 진화해 왔으며 대영 제국을 포함한다고 말했다. "그것은 하나의 군주가 있었기 때문에 하나의 단위였습니다. 하나의 군주, 하나의 왕국이 있었습니다." 그는 "왕국을 별개의 왕국으로 나누는 것을 인정함으로써, 우리는 나머지 통합—마지막 통합인 인물—이 나머지 길을 가는 길을 열고 있지 않습니까?"라고 우려했다.[26]

그가 반대한 두 번째 변화는 "'영국(British)'이라는 단어를 '왕국과 영토(Realms and Territories)' 앞에서 '그녀의 다른(her other)'라는 단어로 대체하고, 웨스트민스터 법에서 '영국 국민 국가 연합(British Commonwealth of Nations)'으로 묘사된 '연방(Commonwealth)' 앞에서 제거한 것"이었다.

파월은 그 이유가 1948년 영국 국적법(British Nationality Act 1948)이 왕관에 대한 충성을 시민권의 근거로 제거하고 법령으로 결합된 9개의 별개의 시민권으로 대체했기 때문이라고 말했다. 따라서 이 9개국 중 어느 나라가 공화국이 되더라도, 인도가 공화국이 되었을 때와 마찬가지로 법은 바뀌지 않을 것이다. 게다가 파월은 통합의 본질은 "모든 부분이 전체의 이익을 위해 자신을 희생할 것임을 인식하는 것"이라고 말했다. 그는 인도에 "전체에 속한다는 인식, 특정 상황에서 전체의 이익을 위해 자기 희생이라는 궁극적인 결과를 포함하는 것"이 없다고 부인했다. 따라서 세 번째 주요 변화인 '연방의 수장(Head of the Commonwealth)'이라는 칭호는 "본질적으로 허울입니다. 그것은 우리가 현실을 눈가리기 위해 고안해낸 것입니다."라고 말했다.[26]

이러한 변화는 파월에게 "매우 불쾌한" 것이었다. 그는 여생 동안 이 연설을 (훨씬 더 잘 알려진 1968년 반이민 연설이 아닌) 자신이 한 최고의 연설로 여겼다.[26]

파월은 영국군의 수에즈 운하 철수에 반대하는 의원들로 구성된 수에즈 그룹의 일원이었다. 그는 그러한 조치가 영국이 더 이상 수에즈 운하에서 지위를 유지할 수 없음을 보여줄 것이며, 따라서 수에즈 운하에 대한 어떠한 주장도 비논리적일 것이라고 주장했다. 그러나 1956년 6월 영국군이 철수하고 한 달 후 이집트가 운하를 국유화한 후, 파월은 영국이 더 이상 세계 강국이 될 자원이 없다고 생각했기 때문에 수에즈 위기에서 운하를 탈환하려는 시도에 반대했다.[9]

2. 4. 2. 주택부 및 재무부 차관 (1957-1958)

1955년 주택부 정무차관으로 임명되었다.[24] 1956년 주택 보조금법과 빈민가 정비 법안을 지지하였다. 1957년 재무부 재정차관으로 임명되었으나, 1958년 정부 지출 증가 계획에 항의하여 재무장관 및 동료 차관과 함께 사임하였다. 이는 파월이 통화주의를 신봉했기 때문이다.

2. 4. 3. 보건부 장관 (1960-1963)

1960년 7월, 헤럴드 맥밀런 내각에서 이넉 파월은 보건부 장관(보건 장관)에 임명되었다.[28] 그러나 1962년까지 내각 구성원은 아니었다.[30]

1961년 12월 4일, 파월은 보건 장관으로서 피임약 코노비드(Conovid)가 NHS(국민건강보험)를 통해 여성들에게 월 2실링의 보조금 가격으로 처방될 수 있다고 발표했다.[29]

보건부 장관 재임 중, 파월은 1962년 병원 계획을 수립했다.[30] 그는 거대한 정신병원을 일반 병원의 병동으로 대체할 것을 촉구하며, 1961년 "워터 타워(Water Tower)" 연설을 통해 정신병원 폐쇄와 지역사회 돌봄을 주장했다. 그의 연설 내용은 다음과 같다.

이는 1980년대 지역사회 돌봄 계획의 시발점이 되었다.

한편, 파월은 탈리도마이드 약물로 인해 기형아를 출산한 부모들과의 회의에서 피해자들에게 무관심한 태도를 보였고, 약물 피해 아동들을 만나기를 거부했다.[28] 또한 공공조사 시작을 거부하고, 존 F. 케네디 미국 대통령처럼 탈리도마이드 약에 대한 경고를 발표하라는 요구도 무시했다.[28]

2. 4. 4. 야당 시절 및 "피의 강" 연설 (1964-1970)

1964년 총선에서 보수당이 패배한 후, 이넉 파월은 야당 국방장관이 되었다.[140] 1965년 보수당 대표 선거에 출마하였으나 15표를 얻는 데 그쳐 3위로 낙선하였다.

1968년 4월 20일, 파월은 버밍엄에서 열린 보수당 정치 센터 서미들랜즈 지역 연례 회의에서 "피의 강" 연설을 하였다.[140] 이 연설에서 파월은 대규모 이민이 영국의 안정을 위협할 수 있다는 주장을 펼쳤다. 그는 이민자들이 영국 사회에 통합되지 않고, 오히려 영국인들을 차별하며, 영국 사회의 조화를 파괴할 것이라고 주장했다. 파월은 이민자들의 유입이 계속된다면 미래에 영국은 "피의 강"이 흐르는 전쟁터가 될 것이라고 경고했다.[140]

이 연설은 영국 사회에 큰 파장을 일으켰다. 《타임스》는 이 연설을 "악마의 연설"이라고 혹평하였으며[140], 마이클 푸트는 "비극적 사건"이라고 평가하였다.[141] "피의 강" 연설 직후, 파월은 에드워드 히스에 의해 그림자 내각에서 해임되었다.

1968년 10월, 파월은 "모어캠브 예산"을 발표했다. 이 예산안은 대규모 감세, 공공 지출 삭감, 국영 기업 민영화, 규제 완화 등 급진적인 자유 시장 정책을 제안했다. 파월은 이러한 정책들이 영국의 경제를 활성화하고, 개인의 자유를 증진하며, 정부의 역할을 축소할 것이라고 주장했다.

2. 4. 5. 보수당 탈당 (1970-1974)

1972년 에드워드 히스 총리가 유럽 경제 공동체(EEC)에 가입하자, 파월은 크게 반대하며 히스 내각과 충돌했다.[139] 1974년 2월 총선 5일 전인 1974년 2월 23일 보수당을 탈당했다.[139] 그는 탈당 과정에서 보수당이 EEC에 가입함으로써 큰 사태가 우려된다고 역설하며, EEC 탈퇴를 조건으로 노동당 지지를 선언했다. 이는 국수주의 진영을 대표한다고 여겨졌던 파월의 지지자들에게 충격을 주었다.[139] 선거 결과는 헝 의회였으며, 전 총리였던 해럴드 윌슨이 다시 총리에 취임했다.[139] 이후 같은 해 치러진 10월 총선에서 그는 북아일랜드에서 활동하는 얼스터 연합주의자당에 입당해 사우스 다운 선거구에 출마해 당선되었다.[139]

2. 5. 얼스터 연합주의당 의원 시절 (1974-1987)

1974년 10월 총선에서 파월은 북아일랜드 얼스터 연합주의자당에 입당, 사우스 다운 선거구에 출마해 당선되었다.[139] 영국의 EEC 탈퇴 국민투표에서 탈퇴 진영 대표 주자로 활동했으나, 국민투표는 잔류로 결정되었다.

파월은 북아일랜드의 영국 잔류를 지지하며 영국과의 완전 통합을 주장했다. 1982년 포클랜드 전쟁 당시 마거릿 대처 정부의 강경 대응을 지지했고, 1985년 영국-아일랜드 협정에는 반대했다.

1987년 총선에서 사회민주노동당 에디 맥그레디(Eddie McGrady영어)에게 패배, 37년간의 의원 생활을 마감했다.[142]

2. 6. 정계 은퇴 이후 (1987-1998)

1987년 영국 총선에서 사회민주노동당 소속 에디 맥그레디(Eddie McGrady영어)에게 패하며 37년간의 의원 생활을 마감한 파월은 1992년 파킨슨병 진단을 받았다.[142] 그는 저술 및 강연 활동을 지속하며 유럽 통합 반대와 핵무기 반대 입장을 견지했다.

1998년 2월 8일 런던에서 사망한 파월은 워릭셔주 워릭 묘지에 안장되었다.[142]

3. 정치적 신념

이넉 파월은 다양한 정치적 신념을 가진 인물이었다. 그의 주요 신념은 다음과 같이 요약될 수 있다.


  • 통화주의: 파월은 인플레이션을 억제하기 위해 통화 공급을 엄격하게 관리해야 한다고 주장하는 통화주의자였다. 그는 화폐 발행 증가가 인플레이션의 주된 원인이며, 이는 화폐 가치를 떨어뜨려 사실상 세금과 같다고 믿었다.[27] 1960년대에는 국유 산업 민영화와 보조금 폐지 등 자유 시장 정책을 옹호했는데, 당시에는 급진적이고 실현 불가능하며 인기가 없는 것으로 여겨졌다.[27] 그는 1964년 초 우체국과 전화망의 민영화를 주장하기도 했다.[27]
  • 유럽 회의주의: 1969년부터 파월은 유럽 경제 공동체(EEC) 가입에 반대하며 의회 주권과 국가 정체성이 위협받는다고 주장했다.[9] 그는 1975년 EEC 탈퇴 국민투표에서 탈퇴 운동을 주도했다.
  • 영국 민족주의와 이민 정책: 파월은 영국 민족주의자로, 특히 이민 문제에 대해 강경한 입장을 보였다. 그는 1968년 4월 20일에 피의 강 연설을 통해 대규모 이민의 위험성을 경고하며 인종 갈등과 사회 통합 문제를 우려했다. 이 연설은 큰 논란을 일으켰으며, 여론 조사에 따르면 영국인의 74%가 파월의 견해에 동의했다.[47] 그러나 파월은 자신이 인종차별주의자가 아니라고 주장했다. 그는 인종 간의 차이를 인정하지만, 특정 인종이 본질적으로 열등하다고 믿지 않는다고 밝혔다.[121]
  • 핵무기 반대: 파월은 1980년대부터 일방적 핵 군축을 주장했다. 그는 핵 억제 이론을 비판하고, 핵무기 사용의 비합리성을 강조했다.


파월의 정치적 신념은 보수주의 내에서도 다양한 스펙트럼을 포괄했다. 그는 대처리즘과 같은 자유 시장 경제 정책을 지지하는 한편, 영국의 주권과 정체성을 강조하는 민족주의적 성향을 보였다. 그의 이민 정책은 특히 논란이 많았으며, 인종차별주의라는 비판을 받기도 했다.

3. 1. 통화주의

1950년대 후반, 이넉 파월은 인플레이션을 막기 위해 통화 공급 관리를 주장했다. 1960년대에는 국유 산업 민영화와 보조금 폐지 등 자유 시장 정책을 옹호했는데, 당시에는 급진적이고 실현 불가능하며 인기가 없는 것으로 여겨졌다.[27] 그는 1964년 초 우체국과 전화망의 민영화를 주장하기도 했다.[27]

파월은 디스인플레이션의 강력한 옹호자였으며, 현대 용어로는 통화주의자이자 시장 경제 신봉자였다.[27] 그는 추가적인 화폐 발행이 인플레이션의 원인이며, 이는 화폐 가치를 떨어뜨려 사실상 세금과 같다고 믿었다.

3. 2. 유럽 회의주의

1969년부터 파월은 유럽 경제 공동체(EEC) 가입에 반대하며 의회 주권과 국가 정체성이 위협받는다고 주장했다.[9] 1975년 EEC 탈퇴 국민투표에서 탈퇴 운동을 주도했다.

3. 3. 영국 민족주의

파월은 1968년 4월 20일에 피의 강 연설을 했다. 연설 후 실시된 여론 조사에 따르면 영국인의 74%가 파월의 대량 이민에 대한 견해에 동의했다.[47] 1998년 4월, 피의 강 연설 30주년(그리고 그가 사망한 지 두 달 후)에 방영된 채널 4 텔레비전 프로그램인 ''에녹 파웰 재판''에서 스튜디오 청중의 64%가 파월이 인종차별주의자가 아니라고 투표했다. 파월이 회원이었던 잉글랜드 교회의 일부 사람들은 다른 견해를 가지고 있었다. 파월의 사망 당시, 바베이도스 출신 흑인인 윌프리드 우드 크로이던 주교는 "에녹 파웰은 그렇지 않으면 인정하기 부끄러워하는 괜찮은 사람들에게 백인 인종차별주의적 견해에 대한 존경심을 증명했습니다."라고 말했다.[113]

보수적인 논평가인 브루스 앤더슨은 피의 강 연설이 파웰의 기록을 연구한 사람들에게는 완전히 놀라운 일이었을 것이라고 주장했다. 그는 18년 동안 웨스트 미들랜즈 국회의원이었지만 이민에 대해 거의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114] 이 관점에서 볼 때, 이 연설은 히스가 무너질 경우 당 대표가 되기 위한 잘못 계산된 전략의 일부에 불과했다. 앤더슨은 이 연설이 이민에 영향을 미치지 않았으며, 예의 바른 사회에서 합리적으로 논의하기 어렵게 만든 것 외에는 아무런 영향을 미치지 않았다고 덧붙인다.[114]

파월의 반대자들은 그가 극우, 파시스트 및 인종차별주의자라고 주장했다. 그의 지지자들은 첫 두 가지 혐의는 대부분의 사회 문제에 대한 그의 투표 기록과 상충한다고 주장한다(그는 실제로 1965년 5월 이 문제에 대한 법안의 공동 발의자였으며 당시 보수주의자들 사이에서 인기가 없었던 사형에 반대했다. 그러나 그는 이러한 당의 "양심의 문제"에 대해 저조한 태도를 유지했다).[9] 파월은 1969년부터 1987년 사이에 여러 차례 사형 제도 부활에 반대표를 던졌다.

1960년대 초 파웰은 이민 통제 운동을 지지했다.[115] 당시 파월이 이민에 대해 한 가장 초기이자 유일한 진술은 1956년 8월 울버햄프턴에서 "영국의 시민권법에 근본적인 변화가 필요하다"고 말했을 때였다. 그러나 그는 당시에는 변화가 필요하지 않다고 설명했지만 미래의 변화 가능성을 배제하지 않았다.[116] 1950년대 후반, 다른 보수주의자들이 인종 폭동 이후 이민 통제 운동을 옹호했을 때, 파웰은 시민권법이라는 "진짜 문제"가 변하지 않은 상태에서 세부 사항을 논의하는 것은 소용없다고 말하며 그들에게 합류하기를 거부했다.[117] 1960년 11월, 파웰은 코먼웰스 이민 통제를 도입하기를 원했던 장관위원회의 9명의 회원 중 한 명이 되었으며, 1961년 4월에 "유색 인종 영국 국민의 이 나라 입국에 대한 제한이나 조건을 원한다면" 기존의 "영국 국민"이라는 법적 정의를 변경해야 한다는 편지를 제출했다. 왜냐하면 1948년 영국 국적법은 영국의 국적법에 따라 열거된 독립 코먼웰스 국가의 모든 사람들을 영국 국민으로 간주했기 때문이다.[118]

1967년 2월, 파웰은 "영국의 인종 문제에 직면하기"라는 제목의 ''데일리 텔레그래프'' 기사를 썼는데, 그는 이민자 인구가 영국의 전체 비율의 5%에 도달하기 훨씬 전에 "비율은 일반 인구에 스며들어 직업, 거주지, 습관 및 혼인에서 섞였을 것"이라고 썼다. 다른 비율은 "현재보다 습관, 직업 및 생활 방식에서 더 분리될 것"이라고 비교했다.[119]

그의 선거구의 지역 사회에서 유색 인종 이민의 영향에 대한 우려는 그의 논평에 일부 영향을 미쳤다. "피의 강" 연설 한 달 전인 1968년 3월, 그는 월솔에서 한 연설에서 이에 대해 처음으로 공개적으로 언급하면서 딸이 초등학교 학급에서 유일한 백인 아이였고 유색 인종 학생들에게 괴롭힘을 당한 익명의 선거구민의 우려를 설명했다. ''울버햄프턴 익스프레스 앤 스타'' 기자들이 아이나 학급을 찾지 못하자, 당시 신문 편집장이자 개인적인 친구였던 클레멘트 존스는 그에게 이의를 제기하며 존스 자신도 비슷한 익명의 불만을 받았고 그것은 국민 전선(NF) 회원들에게 추적되었다고 말했다.

3. 4. 이민 정책

1964년 총선 기간 동안 파월은 자신의 선거 연설에서 "우리 국민뿐만 아니라 이민자들을 위해서도 허용되는 인원수를 통제하는 것이 필수적이다. 우리 자신과 우리 아이들을 위해 이 나라에서 '색깔 문제'의 악을 피하려면 엄격한 통제가 계속되어야 한다고 확신한다"고 말했다.[36]

파월은 1968년 4월 20일에 피의 강 연설을 했다. 이 연설에서 그는 대규모 이민의 위험성을 경고하며 인종 갈등과 사회 통합 문제를 우려했다. 연설 후 실시된 여론 조사에 따르면 영국인의 74%가 파월의 견해에 동의했다.[113] 1998년 4월, 피의 강 연설 30주년(그리고 그가 사망한 지 두 달 후)에 방영된 채널 4 텔레비전 프로그램인 ''에녹 파웰 재판''에서 스튜디오 청중의 64%가 파월이 인종차별주의자가 아니라고 투표했다.[113]

그러나 파월이 회원이었던 잉글랜드 교회의 일부 사람들은 다른 견해를 가지고 있었다. 파월의 사망 당시, 바베이도스 출신 흑인인 윌프리드 우드 크로이던 주교는 "에녹 파웰은 그렇지 않으면 인정하기 부끄러워하는 괜찮은 사람들에게 백인 인종차별주의적 견해에 대한 존경심을 증명했습니다."라고 말했다.[113]

보수적인 논평가인 브루스 앤더슨은 피의 강 연설이 파월의 기록을 연구한 사람들에게는 완전히 놀라운 일이었을 것이라고 주장했다. 그는 18년 동안 웨스트 미들랜즈 국회의원이었지만 이민에 대해 거의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114] 이 관점에서 볼 때, 이 연설은 히스가 무너질 경우 당 대표가 되기 위한 잘못 계산된 전략의 일부에 불과했다. 앤더슨은 이 연설이 이민에 영향을 미치지 않았으며, 예의 바른 사회에서 합리적으로 논의하기 어렵게 만든 것 외에는 아무런 영향을 미치지 않았다고 덧붙인다.[114]

파월의 반대자들은 그가 극우, 파시스트 및 인종차별주의자라고 주장했다. 그의 지지자들은 첫 두 가지 혐의는 대부분의 사회 문제에 대한 그의 투표 기록과 상충한다고 주장한다(그는 실제로 1965년 5월 이 문제에 대한 법안의 공동 발의자였으며 당시 보수주의자들 사이에서 인기가 없었던 사형에 반대했다.[9] 파월은 1969년부터 1987년 사이에 여러 차례 사형 제도 부활에 반대표를 던졌다.

1960년대 초 파월은 이민 통제 운동을 지지했다.[115] 1950년대 후반, 다른 보수주의자들이 인종 폭동 이후 이민 통제 운동을 옹호했을 때, 파월은 시민권법이라는 "진짜 문제"가 변하지 않은 상태에서 세부 사항을 논의하는 것은 소용없다고 말하며 그들에게 합류하기를 거부했다.[117] 1960년 11월, 파월은 코먼웰스 이민 통제를 도입하기를 원했던 장관위원회의 9명의 회원 중 한 명이 되었으며, 1961년 4월에 "유색 인종 영국 국민의 이 나라 입국에 대한 제한이나 조건을 원한다면" 기존의 "영국 국민"이라는 법적 정의를 변경해야 한다는 편지를 제출했다. 왜냐하면 1948년 영국 국적법은 영국의 국적법에 따라 열거된 독립 코먼웰스 국가의 모든 사람들을 영국 국민으로 간주했기 때문이다.[118]

1967년 2월, 파월은 "영국의 인종 문제에 직면하기"라는 제목의 ''데일리 텔레그래프'' 기사를 썼는데, 그는 이민자 인구가 영국의 전체 비율의 5%에 도달하기 훨씬 전에 "비율은 일반 인구에 스며들어 직업, 거주지, 습관 및 혼인에서 섞였을 것"이라고 썼다. 다른 비율은 "현재보다 습관, 직업 및 생활 방식에서 더 분리될 것"이라고 비교했다.[119]

그의 선거구의 지역 사회에서 유색 인종 이민의 영향에 대한 우려는 그의 논평에 일부 영향을 미쳤다. "피의 강" 연설 한 달 전인 1968년 3월, 그는 월솔에서 한 연설에서 이에 대해 처음으로 공개적으로 언급하면서 딸이 초등학교 학급에서 유일한 백인 아이였고 유색 인종 학생들에게 괴롭힘을 당한 익명의 선거구민의 우려를 설명했다. ''울버햄프턴 익스프레스 앤 스타'' 기자들이 아이나 학급을 찾지 못하자, 당시 신문 편집장이자 개인적인 친구였던 클레멘트 존스는 그에게 이의를 제기하며 존스 자신도 비슷한 익명의 불만을 받았고 그것은 국민 전선(NF) 회원들에게 추적되었다고 말했다. 파웰은 그 설명을 받아들이지 않았고 존스에게 월솔 연설의 결과로 "지지 메일을 가득 받았다"고 말했다.[120]

파월의 "피의 강" 연설 후 2주 만에 ''버밍햄 포스트''와의 인터뷰에서 그는 자신이 인종주의자인지 아닌지에 대해 질문을 받았다. 그는 "내가 인종주의자라고 여길 것은 인류의 한 인종이 다른 인종보다 본질적으로 열등하다고 믿고 그러한 믿음으로 행동하고 말하는 사람입니다. 따라서 제가 인종주의자인지 아닌지에 대한 질문에 대한 답은 '아니오'입니다. 아마도 반대로 말입니다. 저는 인도의 많은 사람들이 지적으로나 다른 측면에서 유럽인보다 우수하다고 생각합니다. 아마도 그것이 과장된 반응일 것입니다."라고 대답했다.[121]

1969년 1월 3일 데이비드 프로스트의 저녁 텔레비전 프로그램에서 프로스트는 파월에게 그가 인종주의자인지 아닌지에 대해 질문했고, 파월은 " '인종주의자'라는 단어를 어떻게 정의하느냐에 따라 달라집니다. 만약 당신이 인간과 국가, 그리고 그로부터 인종의 차이를 의식하는 것을 의미한다면, 우리 모두는 인종주의자입니다. 그러나 당신이 다른 인종에 속해 있다는 이유로 인간을 경멸하는 사람, 또는 한 인종이 다른 인종보다 본질적으로 우월하다고 믿는 사람을 의미한다면, 답은 단호하게 '아니오'입니다."라고 대답했다.

1970년 선거에서 토니 벤은 연설에서 파월의 이민 접근 방식이 "악마적"이라고 선언하고 "울버햄프턴에 게양된 인종주의의 깃발은 다하우와 벨젠 위에서 나부꼈던 깃발처럼 보이기 시작했습니다."라고 말했다. 그에 대한 답변으로, 한 텔레비전 기자가 회의에서 벤의 발언을 파웰에게 전달했을 때, 파웰은 마이크를 잡고 "내가 말할 것은 1939년에 나는 자발적으로 호주에서 이 나라로 돌아와 독일나치즘에 맞서 사병으로 복무했습니다. 저는 오늘날에도 같은 사람입니다."라고 대답했다.[122]

1968년 11월 파월은 영국에 독일인이나 러시아인이 대거 유입될 경우 발생할 문제는 "서인도 제도나 파키스탄 사람들의 유사한 수의 도입으로 인해 발생할 수 있는 것만큼 심각하고 어떤 면에서는 더 심각할 것"이라고도 제안했다.[123]

파월은 1964년 연설에서 "나는 이 나라의 시민 한 사람과 다른 사람 사이에 그의 기원을 이유로 차별을 두는 것에 대해 항상 단호하게 반대해 왔고 앞으로도 그럴 것입니다."라고 말했다.[125]

1968년 11월 연설에서 그는 "서인도 제도 사람이나 아시아인은 잉글랜드에서 태어났다고 해서 잉글랜드인이 되는 것은 아닙니다. 법적으로 그는 출생으로 영국 시민이 되지만, 사실 그는 여전히 서인도 제도 사람이나 아시아인입니다."라고 말했다.[126]

그럼에도 불구하고 파월의 민족주의와 인종차별주의에 대한 비난은 때때로 미묘한 경계를 밟았다. 1996년 BBC 기자 마이클 코커렐은 그에게 "피의 강" 연설에서 사용한 언어에 대해 질문하며 그 언어가 자칭 인종차별주의자들이 유색 인종에 대해 사용할 수 있다고 주장했다. 그는 연설에서 사용한 언어를 옹호하면서 "인종차별주의의 문제점은 무엇입니까? 인종차별주의는 국민의 기초입니다. 국가는 대체로 서로와의 정체성, 시민들의 자기 정체성으로 단결되어 있으며, 이는 일반적으로 인종적 차이로 간주되는 유사성 때문입니다."라고 대답했다.[123]

파월은 또한 "유색 인종이 영국인이 되는 것은 불가능하지 않지만 어렵습니다."라고 말했다.[128]

3. 5. 핵무기 반대

Enoch Powell영어은 1980년대부터 일방적 핵 군축을 주장했다. 그는 핵 억제 이론을 비판하고, 핵무기 사용의 비합리성을 강조했다.

4. 유산 및 평가

이넉 파월은 뛰어난 지성과 웅변술, 독창적인 사상을 가진 인물로 평가받는다. 1969년 2월 갤럽 여론조사에서는 "가장 존경받는 인물"로 선정되었고,[6] 1972년 ''데일리 익스프레스'' 여론조사에서는 영국에서 가장 인기 있는 정치인으로 나타났다.[7]

그러나 파월은 논쟁적이고 분열적인 인물로도 평가받는다. 1968년 피의 강 연설은 큰 논란을 일으켰으며, 이민 문제에 대한 그의 견해는 많은 비판을 받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파월은 유럽 경제 공동체(EEC) 가입 반대 등 자신의 주장을 일관되게 펼쳐나갔다.

파월은 영국 정치사에 중요한 족적을 남겼다. 1970년 영국 총선에서 보수당 승리에 기여했다는 주장이 제기되었고, 1974년 2월 영국 총선에서는 보수당을 탈당하고 노동당 지지를 선언하기도 했다. 1974년 10월 영국 총선에서는 얼스터 연합주의당(UUP) 소속으로 사우스다운 지역구 의원으로 당선되어 의회에 복귀했다.

북아일랜드 문제에 대해서는 연합주의자들을 강력히 지지했으며, 아일랜드 공화군(PIRA)의 테러에 대해서는 강경한 입장을 취했다. 핵무기에 대해서는 일방적 핵무장 해제를 주장하기도 했다.

1998년 사망할 때까지 파월은 자신의 정치적 신념을 굽히지 않았으며, 사후에도 많은 정치인들이 그에게 경의를 표했다. 노동당 총리 토니 블레어는 "그의 견해가 아무리 논란의 여지가 있더라도, 그는 뛰어난 지성을 가진 20세기 영국 정치의 위대한 인물 중 한 명"이라고 평가했고,[96] 전 보수당 총리 마거릿 대처는 "이넉 파웰만큼 매력적인 사람은 다시는 없을 것"이라고 말했다.[96]

4. 1. 논란

파월은 1968년 4월 20일에 피의 강 연설을 했다. 연설 후 실시된 여론 조사에 따르면 영국인의 74%가 파월의 대량 이민에 대한 견해에 동의했다.[113] 1998년 4월, 피의 강 연설 30주년(그리고 그가 사망한 지 두 달 후)에 방영된 채널 4 텔레비전 프로그램인 ''에녹 파웰 재판''에서 스튜디오 청중의 64%가 파월이 인종차별주의자가 아니라고 투표했다. 파월이 회원이었던 잉글랜드 교회의 일부 사람들은 다른 견해를 가지고 있었다. 파웰의 사망 당시, 바베이도스 출신 흑인인 윌프리드 우드 크로이던 주교는 "에녹 파웰은 그렇지 않으면 인정하기 부끄러워하는 괜찮은 사람들에게 백인 인종차별주의적 견해에 대한 존경심을 증명했습니다."라고 말했다.[113]

보수적인 논평가인 브루스 앤더슨은 피의 강 연설이 파웰의 기록을 연구한 사람들에게는 완전히 놀라운 일이었을 것이라고 주장했다. 그는 18년 동안 웨스트 미들랜즈 국회의원이었지만 이민에 대해 거의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114] 이 관점에서 볼 때, 이 연설은 히스가 무너질 경우 당 대표가 되기 위한 잘못 계산된 전략의 일부에 불과했다. 앤더슨은 이 연설이 이민에 영향을 미치지 않았으며, 예의 바른 사회에서 합리적으로 논의하기 어렵게 만든 것 외에는 아무런 영향을 미치지 않았다고 덧붙인다.[114]

파웰의 반대자들은 그가 극우, 파시스트 및 인종차별주의자라고 주장했다. 그의 지지자들은 첫 두 가지 혐의는 대부분의 사회 문제에 대한 그의 투표 기록과 상충한다고 주장한다. 그는 실제로 1965년 5월 이 문제에 대한 법안의 공동 발의자였으며 당시 보수주의자들 사이에서 인기가 없었던 사형에 반대했다.[9] 파웰은 1969년부터 1987년 사이에 여러 차례 사형 제도 부활에 반대표를 던졌다.

1960년대 초 파웰은 이민 통제 운동을 지지했다.[115] 당시 파웰이 이민에 대해 한 가장 초기이자 유일한 진술은 1956년 8월 울버햄프턴에서 "영국의 시민권법에 근본적인 변화가 필요하다"고 말했을 때였다. 그러나 그는 당시에는 변화가 필요하지 않다고 설명했지만 미래의 변화 가능성을 배제하지 않았다.[116] 1950년대 후반, 다른 보수주의자들이 인종 폭동 이후 이민 통제 운동을 옹호했을 때, 파웰은 시민권법이라는 "진짜 문제"가 변하지 않은 상태에서 세부 사항을 논의하는 것은 소용없다고 말하며 그들에게 합류하기를 거부했다.[117] 1960년 11월, 파웰은 코먼웰스 이민 통제를 도입하기를 원했던 장관위원회의 9명의 회원 중 한 명이 되었으며, 1961년 4월에 "유색 인종 영국 국민의 이 나라 입국에 대한 제한이나 조건을 원한다면" 기존의 "영국 국민"이라는 법적 정의를 변경해야 한다는 편지를 제출했다. 1948년 영국 국적법은 영국의 국적법에 따라 열거된 독립 코먼웰스 국가의 모든 사람들을 영국 국민으로 간주했기 때문이다.[118]

1967년 2월, 파웰은 "영국의 인종 문제에 직면하기"라는 제목의 ''데일리 텔레그래프'' 기사를 썼는데, 그는 이민자 인구가 영국의 전체 비율의 5%에 도달하기 훨씬 전에 "비율은 일반 인구에 스며들어 직업, 거주지, 습관 및 혼인에서 섞였을 것"이라고 썼다. 다른 비율은 "현재보다 습관, 직업 및 생활 방식에서 더 분리될 것"이라고 비교했다.[119]

그의 선거구의 지역 사회에서 유색 인종 이민의 영향에 대한 우려는 그의 논평에 일부 영향을 미쳤다. "피의 강" 연설 한 달 전인 1968년 3월, 그는 월솔에서 한 연설에서 이에 대해 처음으로 공개적으로 언급하면서 딸이 초등학교 학급에서 유일한 백인 아이였고 유색 인종 학생들에게 괴롭힘을 당한 익명의 선거구민의 우려를 설명했다. ''울버햄프턴 익스프레스 앤 스타'' 기자들이 아이나 학급을 찾지 못하자, 당시 신문 편집장이자 개인적인 친구였던 클레멘트 존스는 그에게 이의를 제기하며 존스 자신도 비슷한 익명의 불만을 받았고 그것은 국민 전선(NF) 회원들에게 추적되었다고 말했다.

4. 2. 영향력

1969년 갤럽 여론조사에서 파월은 영국 여론에서 "가장 존경받는 인물"로 나타났다.[6] 1972년 ''데일리 익스프레스'' 여론조사에서는 파월이 영국에서 가장 인기 있는 정치인으로 나타났다.[7]

파월은 이민 문제와 유럽 경제 공동체(EEC) 가입 문제 등에서 영국의 정치 담론에 큰 영향을 미쳤다. 특히, 1969년 3월 영국의 유럽 경제 공동체 가입에 반대하며, 의회의 주권과 국가로서의 영국의 생존 자체가 위협받고 있다고 주장했다. 이러한 민족주의적 분석은 수백만 명의 중산층 보수당원과 다른 사람들을 사로잡았다.

1970년 총선에서 보수당의 승리에 파월이 기여했다는 주장이 제기되었다. 미국 여론조사 전문가 더글러스 쇼엔과 옥스퍼드 대학교 학자 R. W. 존슨은 파월이 보수당에 250만 표를 가져왔다고 주장했지만, 보수당 득표수는 1966년 이후 170만 표만 증가했다.[53]

파월은 1974년 2월 총선에서 보수당을 배신하고 노동당에 투표할 것을 촉구했다. 그는 보수당이 EEC 가입을 추진하고 다른 공약을 포기했다고 비판했다. 통화주의 경제학자 밀턴 프리드먼은 파월에게 원칙 있는 사람이라고 칭찬하는 편지를 보냈다.[56]

1974년 10월 총선에서 파월은 얼스터 연합주의당(UUP) 소속으로 사우스다운 지역구 의원으로 의회에 복귀했다. 그는 EEC 정책 때문에 노동당에 투표하라고 거듭 촉구했다.[62]

1975년 국민투표에서 EEC 회원국 지위에 대해 파월은 '반대' 투표를 옹호했다. 파월은 마이클 풋, 토니 벤, 피터 쇼어, 바바라 캐슬 등 소수의 저명한 '반대' 진영 지지자 중 한 명이었다. 유권자들은 2대 1이 넘는 차이로 '찬성'에 투표했다.[60][61]

파월은 마거릿 대처가 1975년 2월 당대표 선거에서 승리한 후 그림자 내각에 합류하지 못했다. 파월은 대처가 자신을 제외시킨 것이 옳다고 답했다. "첫째, 나는 보수당원이 아니고, 둘째, 보수당이 매우 먼 길을 걸어가기 전까지는 나를 다시 받아들이지 않을 것이다."[59]

파월은 북아일랜드 문제에 대해서도 강경한 입장을 보였다. 그는 북아일랜드를 영국의 일부로 유지해야 한다고 주장했으며, 아일랜드 공화군(IRA)에 대한 강경 대응을 촉구했다.

4. 3. 평가

이넉 파월은 뛰어난 지성과 웅변술, 독창적인 사상을 가진 인물로 평가받는다. 1969년 2월 갤럽 여론조사에서 "가장 존경받는 인물"로 선정되기도 했다.[6] 1972년 ''데일리 익스프레스'' 여론조사에서는 영국에서 가장 인기 있는 정치인으로 나타났다.[7]

그러나 그는 동시에 논쟁적이고 분열적인 인물로도 평가받는다. 특히 1968년의 피의 강 연설은 큰 논란을 일으켰으며, 이민 문제에 대한 그의 견해는 많은 비판을 받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파월은 자신의 신념을 굽히지 않았으며, 유럽 경제 공동체(EEC) 가입 반대 등 자신의 주장을 일관되게 펼쳐나갔다.

파월은 영국 정치사에 중요한 족적을 남긴 인물로 평가된다. 1970년 영국 총선에서 보수당의 승리에 기여했다는 주장도 있으며, 1974년 2월 영국 총선에서는 보수당을 탈당하고 노동당 지지를 선언하는 등 파격적인 행보를 보이기도 했다. 1974년 10월 영국 총선에서는 얼스터 연합주의당(UUP) 소속으로 사우스다운 지역구 의원으로 당선되어 의회에 복귀했다.

그는 북아일랜드 문제에 대해서는 연합주의자들을 강력히 지지했으며, 아일랜드 공화군(Provisional Irish Republican Army)(PIRA)의 테러에 대해서는 강경한 입장을 취했다. 또한, 핵무기에 대해서는 일방적 핵무장 해제 정책을 주장하기도 했다.

파월은 1998년 사망할 때까지 자신의 정치적 신념을 굽히지 않았으며, 그의 사후에도 많은 정치인들이 그에게 경의를 표했다. 노동당 총리 토니 블레어(Tony Blair)는 "그의 견해가 아무리 논란의 여지가 있더라도, 그는 뛰어난 지성을 가진 20세기 영국 정치의 위대한 인물 중 한 명"이라고 평가했다.[96] 전 보수당 총리 마가렛 대처(Margaret Thatcher)는 "이넉 파웰만큼 매력적인 사람은 다시는 없을 것"이라고 말했다.[96]

5. 저서

John Enoch Powell영어의 저서는 다음과 같다.

연도제목비고
1937《첫 번째 시》 (First Poems)시집
1938헤로도토스 사전》 (A Lexicon to Herodotus)
1939《벗어던지기》 (Casting off)시집
1939헤로도토스의 역사》 (The History of Herodotus)
1939헤로도토스, 8권》 (Herodotus, Book VIII)
1942《블레기우르드에 따른 휘웰 다의 법》 (The Law of Hywel Dda according to Blegwryd)
1942투키디데스 역사 1권: 1~4권 2판》 (Thucydidis Historia, Book I: Books 1-4 2nd Edition)
1949헤로도토스》 (Herodotus)
1950《하나의 국가》 (One Nation)앵거스 모드 등과 공저
1951《무용수의 끝과 결혼 선물》 (The Wedding Gift)시집
1952《사회복지: 필요와 수단》 (Social Services: Needs and Means)이언 노먼 맥리오드와 공저
1954《변화는 우리의 동맹이다》 (Change is our Ally)
1955《국가의 전기》 (Biography of a Nation)앵거스 모드와 공저
1960《위대한 의회의 순간들》 (Great Parliamentary Occasions)
1960《자유 사회에서의 저축》 (Saving in a Free Society)
1965《두려워하지 않는 국가》 (A Nation Not Afraid)
1966《의학과 정치: 1975년 이후》 (Medicine and Politics: 1975 and After)
1968《중세의 상원》 (The House of Lords in the Middle Ages)키스 월리스와 공저
1969《자유와 현실》 (Freedom and Reality)
1969《영국의 주택 정책》 (The Housing Policy of Great Britain)
1971《공동 시장: 반대의 주장》 (The Common Market: the Case Against)
1972《여전히 결정해야 할 것》 (Still to Decide)
1973《공동 시장: 재협상 또는 탈퇴》 (The Common Market: Re-negotiate Or Come Out)
1973《쉬운 답은 없다》 (No Easy Answers)
1977《천사와의 씨름》 (Wrestling with the Angel)
1977조셉 체임벌린》 (Joseph Chamberlain)
1978《국가 또는 무국가》 (A Nation or No Nation)
1989《에녹 파월의 1992년에 대한 성찰》 (Enoch Powell on 1992)
1990《시집》 (Collected Poems)시집
1991《정치가의 성찰: 에녹 파월의 선집》 (Reflections of a Statesman: the Writings and Speeches of Enoch Powell)
1994《복음서의 진화》 (The Evolution of the Gospel)


참조

[1] 논문
[2] 뉴스 Editorial comment The Times 1968-04-22
[3] 논문
[4] 서적 The White Man's World https://books.google[...] OUP Oxfor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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