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능선 (1902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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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이능선(1902년 ~ 1963년)은 일제강점기와 광복 이후 언론인, 문인, 친일 행위자로 활동한 인물이다. 경성부에서 출생하여, 배재학당과 경성고등보통학교를 거쳐 일본 도요대학에서 수학했다. 매일신보 기자, 발행인을 역임하며, 잡지 《신청년》, 《백조》 등의 동인으로 참여했다. 일제강점기에는 정국물산주식회사 대표이사 사장, 남성무역주식회사 취체역 등을 지냈고, 해방 후에는 독립촉성중앙회, 대한청년단 등에서 활동했다. 저서로 《남양대관》이 있으며, 1963년에 사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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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흥선은 1898년에 태어나 대한제국 법무부 협판의 아들이자 언론인 이능선의 형으로, 센슈 대학을 졸업하고 경기도 시흥군 북면 신길리 구장, 금강산선 현리역 역장, 매일신보사 동경지사 영업주임을 역임했다.
이능선 (1902년) - [인물]에 관한 문서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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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본 정보 | |
이름 | 이능선 |
한자 표기 | 李能善 |
별칭 | 자(字) : 경백(景百), 아호 : 미상, 일본식 이름 : 하타니 노지(羽溪能二) |
출생일 | 1902년 11월 30일 혹은 1902년 7월 2일 |
출생지 | 조선 경성부 종로구 수은동 32번지 |
거주지 | 대한제국 시대 * 경성부 종로구 수은동 32번지 * 경기도 포천시 일동면 기산리 원통마을 일제 시대 * 경성부 종로구 수은동 * 황해도 장연군 장연읍 * 황해도 해주군 해주읍 * 경성부 종로구 팔판동 151번지 광복 이후 * 경성부 종로구 팔판동 151번지 * 서울 종로구 팔판동 * 서울 종로구 삼청동 |
사망일 | 1963년 3월 29일 |
사망지 | 대한민국 서울특별시 종로구 삼청동 |
본관 | 우계(羽溪) |
종교 | - |
학력 | |
가족 관계 | |
부모 | 친 아버지 이재정 친 본어머니 고성이씨 이름불명(1898년 사망) 친 생모 안동김씨 이름불명(1912년 사망) 친 서모 1명 이름불명(1912년 사망) 친 서모 1명(1912년에 들어왔으나 물의를 빚음) 양 아버지 이재영(실제 5촌 아저씨) 양 본어머니 전주이씨 이름 불명 양어머니 풍양조씨(1917년에는 생존해 있었음) |
친척 | 형 이흥선, 동생 이양선, 친할아버지 이유녕, 양할아버지 겸 종조부 이우녕 |
배우자 | 2명(청주 한씨, 이름 미상) |
자녀 | 딸 이원순, 아들 이원상(李源翔, 아들 이원익(李源翊) 딸 이원희, 아들 이원민(李源敏) 딸 이원애, 아들 이원태(李源泰, 초등학교 교사), 아들 이원영(李源榮) |
경력 | |
언론 | 매일신보 본사 기자 매일신보 광고부 기자 매일신보 발행인 매일신보 해주지국장 겸 황해도 특파원 해주신문 기자 겸 특파원 현대일보 이사 현대일보 후생국장 현대일보 상무이사 |
공무원 | 경성부 종로구 팔판정 재무과장 경성부 종로구 팔판정회장 서울시 종로구 팔판동동회장 |
기타 | 작가, 수필가, 광고인, 출판인, 언론인(언론사 간부), 기업인, 사회운동가 |
2. 생애
이능선은 1902년 11월 30일 경성부 종로 수은동에서 태어났다. 이름은 능선이고 자(字)는 경백(景百)이다. 배재학당을 거쳐, 1917년 경성고등보통학교에 입학했다. 1919년 1월 동인지 〈신청년 新青年〉 발간에 참여했고, 1920년부터 매일신보 광고부 기자로 근무했다.[12][13] 같은 해 일본 도쿄에 유학, 도요대학을 수료하고 귀국하여 매일신보 본사 기자, 광고부 기자로 재직하였다.
1920년 박영희의 잡지 《신청년》 동인으로 참여했고[18], 배재 동창인 박영희, 최승일, 나도향 등과 동인지 《신청년》을 발간했다.[19] 1922년 최승일, 나경손, 박영희, 이홍 등과 함께 잡지 《백조》 동인으로 참여했다.[20] 1924년 1월 1일부터 1927년 1월 17일 매일신보 휴간 전까지 발행인으로 재임했다.
1926년 김을한, 최삼우 등과 함께 조선문예협회 동인으로 참여했다.[28] 1935년 10월 1일 매일신보사 사원에서 매일신보사 황해도특파통신원 겸 매일신보사 해주지국장으로 승진 발령되었다.[42] 1937년 4월 6일 매일신보사 황해도특파통신원 겸 해주지국장을 사직하고, 매일신보사에서 의원퇴사하였다.[56]
1943년 3월 삼청공립국민학교 후원회 이사로 선출될 때 창씨개명한 이름인 하타니 노지(羽溪能二)를 사용했다.[57] 같은 해 팔판정 정회 총대 및 역원 선출 때 팔판정 경제부장에 선출되었다.[58]
광복 후 독립촉성중앙회와 대한청년단에 가입하여 활동했다. 1946년 서울 종로구 황금동에서 현대일보가 창립되자, 현대일보사 상무이사가 되었다. 1947년 1월 30일 서울시 종로구 팔판동 동회장(八判洞 洞會長)에 선출되었고[63], 9월 4일 한국농민총연맹 후생부장(韓國農民總聯盟 厚生部長)에 선임되었다.[65] 11월 9일 대한독립청년단 북악지단 지단장(北岳支團 支團長)에 선임되었고,[67] 12월 31일 대한독립청년단 총무부장(大韓獨立靑年團 總務部長)에 선임되었다.[70]
1963년 3월 29일 사망했다.[74]
2. 1. 출생과 가계
이능선은 1902년(광무 6년) 11월 30일 경성부 종로 수은동에서 태어났다. 이름은 능선이고 자(字)는 경백(景百)이다. 가명 여부, 활자 오탈자 여부는 알 수 없으나 이능수(李能售)라는 이름으로도 나타난다. 아호는 실전되어 알 수 없다.[1]고조부는 가선대부동지중추부사를 지낸 이원석(李元錫)이고, 증조부는 증 정삼품 통정대부 비서원승(贈 正三品 通政大夫 祕書院丞)에 추증된 이현송(李顯松)이다. 생조부는 이문학관과 돈녕부도정을 지낸 이유녕(李裕寧)이며, 생부는 인천부윤 겸 인천감리사, 탁지부협판을 역임한 관료 이재정(李在正)이고, 생모는 안동 김씨(安東金氏)로 김인석(金仁奭)의 딸이다. 양아버지는 이재영(李在永)이다.
순조 때의 조선통신사 수행원으로 일본을 다녀온 태화 이현상(太華 李顯相)은 증조부 이현송과 8촌 간이었다. 친형제로는 형 이흥선(李興善), 동생 이양선(李亮善)과 4명의 누이가 있었다.
그는 자녀가 없이 일찍 죽은 5촌 당숙 이재영(李在永)의 양자로 입양되었다. 경안역 찰방 이상우(李商雨)의 9대손으로, 이상우가 이영구의 양자가 되어 경기도 성남에서 영평으로 왔다. 7대조 이상우(李商雨)가 먼 친족 이영구(李永久)의 양자가 되어 경기도 광주군 낙생면 대장리 아랫장토리 또는 대장리 벌말에서 경기도 영평군 이동면 장암리로 이주해 왔다. 이후 가계는 포천시 일동면 기산리, 유동리, 길명리 일대에 살게 되었다. 능선의 조부 이유녕(李裕寧)이 경기도 포천시 일동면 기산리 또는 유동리에서 경성부 종로구 수은동으로 이사해 왔다.
양아버지이자 5촌 당숙 이재영(李在永)은 본부인 전주 이씨(全州李氏)와 사별하고 뒤에 풍양 조씨(豊壤趙氏)와 재혼했으나, 재혼한 부인에게서도 아들을 얻지 못했다. 양 할아버지이자 종조부 이우녕(李祐寧)은 친할아버지 이유녕(李裕寧)의 친형이다.
부인 청주 한씨(淸州韓氏)는 연천현감, 내금위장, 해주군수를 지낸 죽농(竹農) 한형리(韓炯履)의 딸로, 병조판서 장도공 한치의(章悼公 韓致義)의 후손이다.
2. 2. 초기 활동 (1910년대 ~ 1920년대 초)
1912년 생모 안동 김씨와 그해 서모 1명이 연이어 사망했다. 생모 안동 김씨는 양주군 진접면 금곡리(후일의 남양주시 진접읍 금곡리) 앞산 경좌(庚坐)에 매장됐고, 생가 친형 이흥선의 부인 권용철(權用哲)의 딸 안동 권씨(安東權氏)의 묘소도 인근에 있다.그는 경기도 포천군 일동면 유동리에 있는 양어머니의 집에서 성장하다 뒤에 경성부로 올라와 수학했다. 양어머니 풍양 조씨는 1917년 당시에는 생존해 있었다. 후일 경성부 종로구 수은동에 살다가 경성부 종로구 팔판동 151번지로 이주했으며, 한때 황해도 장연군에 거주하다가 1925년 무렵에는 경성부 봉익동에 일시 거주하였다.[10]
교류하던 인물로는 작가 회월(懷月) 박영희, 기자 김을한 등이 있었다.
배재학당에 입학했는데 졸업인지 수료인지 여부는 확인되지 않는다. 1917년 이전 청주 한씨, 한확의 장남 한치인의 14대손 한형리의 셋째 딸과 혼인했으며, 1917년 당시에는 이미 혼인 상태였다. 1917년에 편찬된 그의 집안 족보에 부인 한씨가 실렸다.
배재학당을 거쳐, 1917년 경성고등보통학교에 입학했다. 1919년 1월 동인지 〈신청년 新青年〉의 발간에 참여했다. 1919년 1월 이후 박영희, 최승일, 나도향, 이능선 등 배재 출신 동창들은 동인지 『신청년』( 1919.1.20 ~ 1921.7.15, 통권 6호)을 발간하고 있었다.[11] 1919년 당시 그는 경성고등보통학교 3학년에 재학 중이었다.
1920년부터 매일신보 광고부 기자로 근무했다.[12][13] 1920년 일본 도쿄에 유학, 도요대학을 입학했다. 일본 유학 중 1921년 5월 잡지 〈신청년 新青年〉 순문예혁신호(純文藝革新號)가 나오자 그 동인(同人)은 최승일(崔承一), 나도향, 박영희, 이능선, 이홍(李虹) 등이었으며, 비용은 최승일이 담당했다 한다.[14][15][16][17] 도요대학 수료 후 귀국했으며, 매일신보에 입사, 매일신보 본사 기자, 광고부 기자로 재직하였다. 매일신보 본사 기자로 재직하며 동인지 활동에도 참여했다.
2. 3. 언론 활동과 문학 활동 (1920년대 중반 ~ 1930년대)
1920년 박영희의 잡지 《신청년》의 동인으로 참여했고[18], 배재 동창인 박영희, 최승일, 나도향 등과 동인지 《신청년》을 발간했다.[19] 1922년 최승일, 나경손, 박영희, 이홍 등과 함께 잡지 《백조》의 동인으로 참여했다.[20]1924년 1월 1일부터 1927년 1월 17일 매일신보 휴간 전까지 발행인으로 재임했다. 1925년에는 박영희, 나도향, 최승일, 현진건 등과 함께 잡지 《백홍》 발행을 추진했으나 실패하였다.[23]
1925년 5월 10일 창간한 잡지 《신민》의 필진으로 참여했다. 1926년 1월 30일 매일신문사에서 조선문(한글) 신문사 광고부원이 모여 조직한 신문사교협회 출범과 조직에 매일신보 기자 자격으로 참여, 사교협회 서무에 선임되었다.[24][25][26] 1926년 김을한, 최삼우 등과 함께 조선문예협회 동인의 한 사람으로 참여했다.[28] 같은 해 영화동호회에 회원 가입, 6월 27일 조선시네마 상영작 영화 농중조의 영화평을 올렸다.[29][30]
1926년 7월 1일 잡지 신민 제15호에 일본 유학담을 실은 "六年前의 녀름"을 기고했고[31], 9월 1일 신민 제17호에는 "情死問題批評-第三者로는 몰을 일"이라는 글을 기고했다.[32] 9월 25일 김을한, 정인익, 최삼우 등과 잡지 문예시대를 창간, 필진으로 참여했다.[33] 9월 30일 문예시대사 사무소를 이전하고, 11월 1일 잡지 문예시대 창간호를 준비했다. 동시에 80명의 필진을 모으고, 잡문, 수필, 창작 등 작품 공모를 하였다.[34] 그러나 문예시대는 1927년 1월 폐간되었다.
1928년 3월 12일 경성일보사 주최 정구부랍회에 참가, 윤명길과 같은 조로 출전, 일본인 팀과 상대했으나 패하였다.[35] 9월 5일까지 매일신보사에서 수해의연금을 모금할 때 50전의 성금을 냈다.[36] 이때 매일신보 경성지국 기자였다.[37] 1929년 6월 10일 매일신보 주최 단오대운동회에 시상부 위원으로 참여했다.[38]
1931년 6월 9일 경성일보 주최 본사 테니스 대회에 참가, 기자 정관용과 한 팀이 되어 다른 팀을 꺾었으나 최종 우승에서 떨어졌다.[39] 7월 27일 일부 신문사 통합을 추진할 때 광고부 부원으로 추천되었다.[40]
1934년 스즈키 상점에서 출간한 《사계의 조선요리》의 머리말을 썼다.[41]
1935년 10월 1일 매일신보사 사원에서 매일신보사 황해도특파통신원 겸 매일신보사 해주지국장으로 승진 발령되었다.[42] 같은 날 매일신보 남천지국장을 겸직하였다.[43][44] 11월 18일 매일신보 해주지국장 겸 특파원으로, 조선신문사의 신임축하 피로연에 참석, 해주신문 특파원에 임명되었다.[45]
1936년 3월 6일 ~ 3월 7일 매일신보 본사 주최 지방특파원 회의에 참석했다.[49] 8월 31일부터 9월 3일까지 황해도에 큰 수해가 발생하자, 황해도특파원 자격으로 현장을 방문, 취재하였다.[52] 9월 6일 해주신문기자단에서 수해구제금을 9월 25일까지 모집하기로 결의했다.[53]
1936년 가을 황해도 지역의 장기 가뭄으로 한해가 발생하고, 9월 황해도에 폭우가 내렸다.[54] 10월 15일부터 10월 19일까지 그는 해주지국 기자 최철기 등과 함께 가뭄 피해 농가를 방문, 위문 및 현장 답사를 했다.[54]
1937년 2월 15일과 2월 16일 매일신보사 특파원 회의에 황해도지역 특파원 자격으로 참석했다.[55] 4월 6일 매일신보사 황해도특파통신원 겸 해주지국장을 사직하고, 매일신보사에서 의원퇴사하였다.[56]
2. 4. 친일 활동 (1940년대)
1942년 저서 《남양대관 (南洋大觀)》을 간행할 당시에는 본명을 사용하고 있었으나,[57] 1943년 3월 14일 삼청공립국민학교 후원회 이사로 선출될 때는 창씨개명한 이름인 하타니 노지(羽溪能二)를 사용했다.[57]1943년 3월 19일 4월 1일에 신설되는 팔판정 정회(町會) 총대 및 역원 선출 때 팔판정 경제부장에 선출되었다.[58] 그해 7월 1일 팔판정회 부총대 겸 총무과장 히라노 모리테루(平野盛暉)가 사직하자 회계과장 유종현(柳宗鉉)이 팔판정 부총대 겸 회계역원이 되고,[59] 유종현이 부총대직을 사임하자 그는 팔판정회 부총대 겸 총무과장직에 임명되었다. 12월 15일 팔판정회 총대 겸 총무부장 쓰기야마 준에이(杉山潤永)가 사임하자, 팔판정회 총회에서 정회 부총대 겸 경제부장인 그를 팔판정회 총대로 선출했다.[60]
2. 5. 광복 이후 활동 (1945년 ~ 1963년)
1945년 3월 29일 경성부 종로구 관철정 9번지에 있던 목재벌채, 제탄, 임업부산물 취급 회사인 대동산업주식회사(大同產業株式會社)에 일본인 淸水案敏, 松村吉泰 등과 공동 취체역으로 선임되었다.[61] 당시 그는 경성부 종로구 팔판정 151번지에 거주 중이었다.[62] 이 회사는 20년 기한으로 설립한 회사였다.광복 후 독립촉성중앙회와 대한청년단에 가입하여 활동했다. 1949년 무렵 서울 종로구 팔판정 151번지에 거주하였다.
1946년 서울 종로구 황금동에서 현대일보가 창립되자, 현대일보사 상무이사가 되었다. 현대일보는 1946년 9월 6일 폐간되었으나, 1947년 1월 29일 서상천이 인수하여 다시 발행했다.
1947년 1월 30일 서울시 종로구 팔판동 동회장(八判洞 洞會長)에 선출되었다.[63] 1947년 10월 1일 재선되었다.[64]
1947년 9월 4일 한국농민총연맹 중앙위원회 소집에 참여, 같은 날 한국농민총연맹 후생부장(韓國農民總聯盟 厚生部長)에 선임되었다.[65] 1947년 10월 15일 현대일보사 후생국장 자격으로 현대일보 총무국장 박세동(朴世東), 산업국장 송한용(宋漢容) 등과 경기도 포천을 방문, 대한독립청년단 포천지단 결성식에 참석하였다.[66] 1947년 11월 9일 서울 삼청국민학교에서 열린 대한독립청년단 북악지단 지단장(北岳支團 支團長)에 선임되었다.[67] 11월 13일 독립촉성국민회의 북악지단 지단장(北岳支團 支團長)에 임명되었다.[68] 12월 30일 대한독립청년단 기획위원[69], 12월 31일 대한독립청년단 총무부장(大韓獨立靑年團 總務部長)에 선임되었다.[70]
2. 6. 사망
1963년 3월 29일 사망했다.[74] 사후 아들 원상(源翔), 원익(源翊) 등이 연이어 젊은 나이에 요절하였다. 넷째 아들 이원태(李源泰)는 초등학교 교사로 재직하였다. 다섯째 아들 이원영은 기업인으로 대한항공, 한진에서 근무했다.그의 시신은 경기도 포천시 일동면 유동2리 원통(圓通) 마을 부락 뒷산 동북쪽 축좌(丑坐)에 매장되고, 1967년 부인 청주한씨가 사망하여 그의 묘소 옆에 합장되었다. 그가 후원하던 삼청국민학교는 1969년 11월 28일부로 폐교, 학생들은 서울재동국민학교(서울재동초)로 전출되었다.
그의 묘소 근처 포천시 일동면 유동리 원통(圓通) 부락 뒷산 손좌(巽坐)에는 할아버지 이유녕의 묘소가 소재해 있다.
3. 저서
- 《남양대관》 (경성 행림서원, 1942)
4. 기고문
5. 가족 관계
(아버지의 본부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