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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세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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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이세좌는 조선 전기의 문신으로, 1477년 식년문과에 급제하여 대사간, 이조참판, 경상도관찰사 등을 역임했다. 1485년 명나라에 정조사로 다녀왔으며, 무오사화 때 김종직과 그 제자들을 극형에 처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1503년 연산군에게 술을 엎지르는 실수로 유배되었고, 1504년 갑자사화 때 거제도로 유배된 후 사약을 받고 자결했다. 드라마 《한명회》, 《왕과 비》, 《왕과 나》, 《인수대비》, 《역적 : 백성을 훔친 도적》 등에서 이세좌를 연기한 배우들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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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세좌 - [인물]에 관한 문서
인물 정보
이름이세좌
원어 이름李世佐
출생일1445년
사망일1504년 4월 4일
사망지곤양군 양포역
사망 원인갑자사화로 자결
국적조선
본관광주(廣州)
자녀이준경
부모이극감,양주趙氏조말생 손녀

2. 생애

(내용 없음 - 하위 섹션에서 상세 내용을 다루므로 중복 방지를 위해 본문 생략)

2. 1. 관직 생활

1477년(성종 8) 식년문과에 갑과로 급제한 뒤 여러 벼슬을 거쳐 사간원 대사간으로 특별 승진하였다.[3] 이후 부제학과 동부승지, 우부승지, 좌부승지, 우승지, 좌승지를 지낸 뒤 도승지로 승진했다. 이후 예조참판, 대사헌을 거쳐서 1485년 이조참판이 되고 그해 명나라에 파견되는 정조사(正朝使)가 되어 북경에 다녀왔다. 그해 말 귀국하고, 귀국 직후 광양군(廣陽君)의 봉호를 받았다. 그 뒤 형조참판, 예조참판, 동지중추부사를 거쳐서 경상도관찰사로 나가서 민정을 다스렸고 호조참판도 지냈다. 그 뒤 황해도관찰사를 거쳐서 경기도관찰사 등의 외직을 계속했다. 성종의 탈상 후 1493년 산릉도감(山陵都監) 제조(提調)의 한사람으로 차출되었다. 1494년 산릉도감 제조의 한사람으로 성종의 국장의례 및 능(陵)축조를 담당하였으며, 이어 한성부판윤‧호조판서를 거쳐 1496년(연산군 2) 순변사로 여진족의 귀순처리와 회유책의 강구를 위하여 북방에 파견되었다. 1497년 이조판서에 임명되었다. 이듬해 무오사화김종직 및 그 제자를 극형에 처해야 한다고 주장하였다.[4] 이어 판중추부사(判中樞府事)를 거쳐 예조판서‧지경연사(知經筵事)를 겸임하였다.

2. 2. 갑자사화와 죽음

1503년 인정전에서 열린 양로연에 참석했다. 이때 어사주를 돌리는 과정에서 한치형과 함께 연산군에게 술을 따르다가 손이 떨려 연산군의 옷에 술을 엎지르는 실수를 저질렀다.[5] 이 일로 연산군의 노여움을 사서 무안으로 유배되었다가[6] 다시 온성과 평해로 옮겨졌다.

1504년 갑자사화가 일어나자, 과거 연산군의 생모인 폐비 윤씨를 폐위할 당시 적극적으로 반대하지 않았다는 점과 형방 승지로서 폐비 윤씨에게 사약을 전달했다는 이유로 다시 죄를 받게 되었다. 결국 거제도로 유배되던 중, 곤양군 양포역(良浦驛)에서 스스로 목숨을 끊으라는 명령을 받고 목을 매어 자결하였다.[7] 이는 1504년 음력 4월 4일이었다.[9]

이세좌의 외손자이자 성종의 사위인 봉성위(奉城尉) 정원준(鄭元俊) 역시 이세좌의 일에 연좌되어 귀양을 가야 했다.[8] 정원준은 성종의 딸 정순옹주의 남편이었다.

3. 관련 작품

이세좌는 여러 편의 드라마에서 등장인물로 다루어졌다.

3. 1. 드라마

참조

[1] 서적 국조방목
[2] 서적 연려실기술
[3] 조선왕조실록 조선왕조실록 성종일기 1477-03-21
[4] 조선왕조실록 조선왕조실록 연산일기 1498-07-17
[5] 조선왕조실록 조선왕조실록 연산일기 1503-09-11
[6] 조선왕조실록 조선왕조실록 연산일기 1503-09-20
[7] 조선왕조실록 조선왕조실록 연산일기 1504-04-09
[8] 조선왕조실록 조선왕조실록 중종일기 1506-10-23
[9] 조선왕조실록 조선왕조실록 연산일기 1504-04-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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