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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치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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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한치형은 조선 전기의 문신으로, 1451년 음서로 관직에 올라 좌익원종공신, 순성명량좌리공신에 책록되었으며 청성군에 봉해졌다. 형조판서, 호조판서, 평안도 체찰사 등을 역임하고, 연산군 때 좌의정을 거쳐 영의정에 이르렀다. 무오사화에 연루되어 김일손 등 사림을 처형하는 데 관여했다. 연산군의 폭정에 반대하다 미움을 받아 1502년 사망했으며, 갑자사화 때 부관참시되고 일가가 몰살당했으나 중종반정 이후 신원되었다. 드라마 《장녹수》, 《왕과 비》, 《인수대비》 등에 등장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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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치형

2. 생애

한치형은 1451년(문종 1) 18세에 음보로 관직에 올라 호위청 기사관(扈衛廳記事官)이 되었다. 1453년(단종 1) 사온서직장(司醞署直長)이 된 후, 감찰, 장령, 지평, 사복시소윤(司僕寺少尹) 등을 역임하였다. 1455년(세조 1) 12월 소윤으로 재직 중 좌익원종공신 3등(佐翼原從三等)에 녹선되었다.

1463년(세조 9) 9월 사헌부 장령에 제수되었다. 이후 우부승지(右副承旨)를 거쳐 1467년(세조 13) 4월 좌부승지(左副承旨)가 되어 왕명으로 이조의 인사업무를 관장하였고, 5월 20일 우승지가 되었다. 평안도 선위사(平安道宣慰使), 좌승지 등을 거쳐 그해 10월 평안도 별선위사(平安道別宣慰使)로 다녀왔다. 1467년 장례원판결사를 거쳐 위장(衛將), 수성대장을 역임하고 중추부 동지사로 전임되었다. 1467년 12월 12일 이조참판이 되었다가 12월 27일 호조참판이 되었다.[1]

1468년(예종 즉위년) 함길남도관찰사로 발령받았다가 6개월 만에 행 호군(行護軍)으로 전임되고, 1469년(예종 1) 다시 호조참판에 임명되었다. 성종 즉위 직후 명나라에 책봉주청사(策封奏請使)로 파견되어 연경에 다녀왔다.[1]

성종 즉위 후 행 호군으로 예종의 산릉 도감 제조(山陵都監提調)에 임명되었으며 동지중추부사, 대사헌을 역임하였다. 1471년(성종 2) 순성명량좌리공신 3등(純誠明亮佐理功臣三等)에 책록되고 청성군(淸城君)에 봉하여졌으며, 형조판서에 승진되었다. 이후 명나라에 파견되는 성절사의 부사(副使)에 임명되어 명나라를 다녀왔다.[1]

1473년(성종 4) 개성부유수를 거쳐 이듬해 다시 개성부유수에 재임명되었으며 자헌대부(資憲大夫) 청성군(淸城君) 겸 경기도 관찰사에 임명되어 경기감사로 나갔다가 한성부판윤이 되었다. 다시 호조판서, 병조판서를 거쳐, 겸선공감 도제조(兼繕工監都提調), 평안도 체찰사(平安道체察使) 등을 역임했다.[1]

1480년(성종 11) 공조판서 때 사은사(謝恩使)로, 1481년(성종 12) 호조판서 때 성절사(聖節使)로, 1484년(성종 15) 명나라에 파견되는 성절사의 정사로 명나라에 다녀왔다. 1481년 좌참찬에 올랐다. 이후 경상도 진휼사(慶尙道賑恤使), 형조판서, 축장도감 재조(築墻都監提調) 등을 역임했다.[1]

1495년(연산군 1) 좌찬성 겸 대사헌을 지냈으며, 이듬해 대광보국숭록대부 의정부우의정으로 승진하고 청성부원군(淸城府院君)에 봉해졌다.

1498년(연산군 4) 좌의정이 되었으며, 그해 7월 김종직의 제자들을 잡아들여 국문할 것을 상주하며 무오사화 발생에 깊이 관여하였다. 노사신, 유자광 등과 함께 김일손 등의 처형에 동의하였다. 한편, 권오복에게 늙은 어머니가 있다는 점을 들어 그의 형을 감경해줄 것을 청하기도 했다.

1500년(연산군 6) 의정부영의정에 임명되었고, 세자사부(世子師父), 충훈부 당상, 비융사 제조(備戎司提調) 등을 겸직했다.[3] 영의정에 올랐으나 연산군과 갈등했고, 검소(儉素)와 절용을 여러번 건의하다가 연산군의 미움을 받았다. 1502년(연산군 8) 10월 3일 영의정 재직 중 사망하였다. 향년 68세였다.

1504년(연산군 10) 5월 갑자사화 때 추죄되어 부관참시되고 일가가 몰살당하였다. 연산군의 생모인 윤비(尹妃)를 폐출시킨 모의에 가담하였다는 이유였다.

2. 1. 생애 초반

한방신(韓方信)의 4대손으로 증조부는 한영(韓寧), 할아버지는 한영정(韓永矴)이며, 아버지는 공조정랑을 지내고 사후 순충적덕병의보조공신 의정부영의정에 증직되고 청성부원군에 추봉된 한절(韓)이고, 어머니는 한양 조씨로 중군총제(中軍摠制) 조서(趙敍)의 딸이며, 개성 왕씨로 영원군 왕진의 외손녀였다.

증조부 한영은 고려 시대에 신호위 녹사를 지냈지만 홍륜의 난에 연루되어 사형당했으며, 조선 건국 후 자헌대부 병조판서에 추증되었다. 할아버지 한영정은 조선 건국 후 중훈대부 순창군사에 이르렀다. 그러나 아버지 한절의 관직은 공조정랑에 그쳤고, 생몰년대도 알 수 없다. 종고조부 한공의(韓公義)는 세조의 측근이자 책사인 한명회의 고조부로, 그는 한명회와는 10촌이 된다. 소혜왕후의 친정아버지이자 계양군 부인의 친정아버지인 한확은 그의 백부로서 소혜왕후와는 4촌 간이자, 한치인의 사촌 형제간이 된다.

친고모인 여비 한씨는 명나라에 공녀로 바쳐졌다가 영락제의 눈에 띄어 그의 후궁이 되었다. 다른 고모 공신부인선덕제의 후궁이 되었다.

친형 한치원은 성종 초기에 의영고관원, 사직서령, 군자감첨정 등을 지냈고, 동생 한치미는 봉사를 역임하였지만 생몰년 기록이 없고, 다른 동생 한치량은 훗날 그의 일가가 화를 입을 때 화를 면하고 1525년까지 생존하였다.

그는 1451년(문종 1) 18세에 음보로 관직에 올라 군직에 임명되고, 호위청 기사관(扈衛廳記事官)이 되었다. 1453년(단종 1) 음보로 사온서직장(司醞署直長)이 되었다. 이후 감찰(監察)을 거쳐 장령, 지평, 사복시소윤(司僕寺少尹)을 역임하였다. 1455년 12월 소윤으로 재직 중 좌익원종공신 3등(佐翼原從三等)에 녹선되었다.

2. 2. 관료 생활

1463년 9월 사헌부장령에 제수되었다. 사헌부장령 재직 시 사헌부지평 김이용(金利用)이 김처의(金處義)가 《무재록(武才錄)》을 읽지 않고 작은 일이라 말한 것을 비판했다가 김처의가 국문당했다. 이 일로 그해 11월 사헌부 관원이 모두 피혐하면서 사퇴할 때 같이 사퇴하였다.[1]

이후 우부승지(右副承旨)를 거쳐 1467년 4월 세조가 집상전(集祥殿)에서 승지 적임자를 추천받을 때 물망에 올랐다. 4월 27일 좌부승지(左副承旨)가 되어 왕명으로 이조의 인사업무를 관장하였고, 5월 20일 우승지가 되었다. 평안도 선위사(平安道宣慰使), 좌승지 등을 거쳐 그해 10월 평안도 별선위사(平安道別宣慰使)로 다녀왔다. 1467년 장례원판결사를 거쳐 위장(衛將), 수성대장을 역임하고 중추부 동지사로 전임되었다. 1467년 12월 12일 이조참판이 되었다가 12월 27일 호조참판이 되었다.[1]

1468년 예종 즉위 직후 함길남도관찰사로 발령받았다가 6개월 만에 행 호군(行護軍)으로 전임되고, 1469년 다시 호조참판에 임명되었다. 성종 즉위 직후 명나라에 책봉주청사(策封奏請使)로 파견되어 연경에 다녀왔다.[1]

성종 즉위 후 행 호군으로 예종의 산릉 도감 제조(山陵都監提調)에 임명되었으며 동지중추부사, 대사헌을 역임하였다. 1471년(성종 2) 순성명량좌리공신 3등(純誠明亮佐理功臣三等)에 책록되고 청성군(淸城君)에 봉하여졌으며, 형조판서에 승진되었다. 이후 명나라에 파견되는 성절사의 부사(副使)에 임명되어 명나라를 다녀왔다.[1]

1473년 개성부유수를 거쳐 이듬해 다시 개성부유수에 재임명되었으며 자헌대부(資憲大夫) 청성군(淸城君) 겸 경기도 관찰사에 임명되어 경기감사로 나갔다가 한성부판윤이 되었다. 다시 호조판서, 병조판서를 거쳐, 겸선공감 도제조(兼繕工監都提調), 평안도 체찰사(平安道체察使) 등을 역임했다.[1]

1480년 공조판서 때 사은사(謝恩使)로, 1481년 호조판서 때 성절사(聖節使)로, 1484년 명나라에 파견되는 성절사의 정사로 명나라에 다녀왔다. 1481년 좌참찬에 올랐다. 이후 경상도 진휼사(慶尙道賑恤使), 형조판서, 축장도감 재조(築墻都監提調) 등을 역임했다.[1]

2. 3. 생애 후반

1495년(연산군 1) 좌찬성 겸 대사헌을 지냈으며, 이듬해 대광보국숭록대부 의정부우의정으로 승진하고 청성부원군(淸城府院君)에 봉해졌다.

1498년(연산군 4) 좌의정이 되었으며, 그해 7월 김종직의 제자들을 잡아들여 국문할 것을 상주하며 무오사화 발생에 깊이 관여하였다. 노사신, 유자광 등과 함께 김일손 등의 처형에 동의하였다. 한편, 권오복에게 늙은 어머니가 있다는 점을 들어 그의 형을 감경해줄 것을 청하기도 했다.

1500년 의정부영의정에 임명되었고, 세자사부(世子師父), 충훈부 당상, 비융사 제조(備戎司提調) 등을 겸직했다.[3] 영의정에 올랐으나 연산군과 갈등했고, 검소(儉素)와 절용을 여러번 건의하다가 연산군의 미움을 받았다. 1502년(연산군 8년) 10월 3일 영의정 재직 중 사망하였다. 향년 68세였다. 사후 질경(質景)의 시호가 추서되었는데, 충성스럽고 정직하여 간사함이 없다는 뜻의 충정무사왈질(忠正無邪曰質)과 의리에 의하여 일을 성사시켰다는 뜻의 유의이제왈경(由義而濟曰景)에서 따온 것이다.

2. 4. 사후

1504년 5월 갑자사화 때 추죄되어 부관참시되고 일가가 몰살당하였다. 연산군의 생모인 윤비(尹妃)를 폐출시킨 모의에 가담하였다는 이유로 윤필상, 한명회 등과 함께 부관참시되었고, 그해 5월 4일 그의 수급은 참수되어 저잣거리에 걸렸다. 또한 그가 올린 10조의 서도 모두 불태워졌다.[1] 그해 12월에는 그가 아뢴 법은 모두 폐지되고, 그의 시신은 분골되어 바람에 날려버리게 했으며, 그의 집은 압수되어 장녹수의 친정오라비에게 주어졌다.[1]

12월 18일 그의 서자 한수(韓遂)도 참형당하고 그밖에 일가가 몰살되었으며, 사위 임유침도 유배되었다.[1] 중종반정 후 신원되었다. 결국 사후에 그의 형 한치원의 아들 한적을 사후양자로 들여서 가계를 이었다.[1]

묘소는 아버지 한절의 묘소 근처인 양주군 서산(西山 梨洞, 현 경기도 양주시 장흥면 삼상리 이골) 사좌(巳坐)에 있으며, 묘지명과 묘표음기는 참찬(參贊)을 지낸 허백정 홍귀달(虛白亭 洪貴達)이 짓고 썼다.[1] 신도비문은 후손인 정교(正敎)가 짓고, 후손 상갑(相甲)이 글씨를 썼다.[1]

3. 가족 관계

구 분내 용
증조부한녕(韓寧)[1]
조부한영정(韓永矴)[1]
조모의성 김씨 (의성군 김영렬의 딸)[1]
아버지한절(韓𥑇)[1]
어머니양주 조씨[1]
고모여비 한씨 (명나라 영락제의 후궁)[1]
고모공신부인 (명나라 선덕제의 후궁)[1]
백부한확(韓確)[1]
사촌누이소혜왕후 인수대비[1]
사촌매제조선 덕종 (조선 세조의 장남)[1]
당질월산대군[1]
당질조선 성종[1]
한치원(韓致元)[1]
동생한치량(韓致良, 1436년 ~ 1525년)[1]
동생한치미(韓致美)[1]
부인현주 전주이씨(? ~ 1494년 7월 17일), 이제(양녕대군)의 딸[1]
장녀청주 한씨[1]
사위보안 임씨(保安 林氏) 임유침(林有琛)[1]
계실단양우씨(丹陽禹氏), 안변도호부사(安邊都護府使) 우연지(禹延之)의 딸[1]
아들한사자(韓獅子)[1]
이름 미상[1]
서자한수[1]


4. 평가

성품이 순박하고 침착하여 말이 적었으며 실지를 속여 겉을 꾸미는 것을 일삼지 않았다. 관직에 있어서는 부지런하고 조심하여 사사로운 뜻으로 법을 굽히지 않았다. 집정(執政)이 일찍이 한치형을 위하여 그의 외손(外孫)에게 벼슬을 주려고 하니, 이를 제지하며 "이 늙은 것 때문에 벼슬을 어리석은 아이에게 줄 수는 없다"하고는 마침내 허락하지 않았다고 한다.[3]

비록 큰 공적은 없지만 또한 드러난 과실도 없었다. 연산군이 정치를 어지럽힐 때를 당하여 누차 검소(儉素)와 절용할 것을 아뢰다가 이로 인하여 비위를 거슬렀고 화(禍)가 죽은 뒤에까지 미쳤으니, 슬픈 일이라고 한다. 다만 배우지 못하여 학술(學術)이 없어서 일을 만나면 막히는 것이 많았다고도 한다.[3]

참조

[1] 서적 연산군일기 1505-07-02
[2] 서적 연산군일기 1504-12-18
[3] 문서 조선시대 인사 이동 기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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