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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시이 히로토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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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이시이 히로토시는 일본의 전 프로 야구 선수로, 1996년부터 2011년까지 도쿄 야쿠르트 스왈로스에서 투수로 활동했다. 2002년 최우수 중간 계투 투수상을 수상했으며, 2004년 아테네 올림픽에서 일본 국가대표팀으로 동메달을 획득했다. 2006년 월드 베이스볼 클래식에도 참가했으나 부상으로 인해 조기 하차했다. 2011년 은퇴 후에는 야쿠르트 스왈로스에서 코치로 활동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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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시이 히로토시 - [인물]에 관한 문서
기본 정보
도쿄 야쿠르트 스왈로스 코치 시절 (2019년 2월 10일)
도쿄 야쿠르트 스왈로스 코치 시절 (2019년 2월 10일)
선수명이시이 히로토시
원어명石井 弘寿
로마자 표기Ishii Hirotoshi
등번호98
국적일본
출생지일본 지바현 이치하라시
생년월일1977년 9월 14일
신장180
체중100
利き腕
타석
수비 위치투수
프로 입단1995년
드래프트 순위드래프트 4위
첫 출장1996년 7월 6일
최종 출장2011년 10월 25일 (은퇴 경기)
선수 경력
고등학교도쿄학관고등학교
프로 구단야쿠르트 스왈로스/도쿄 야쿠르트 스왈로스 (1996–2011)
코치 경력
코치 구단도쿄 야쿠르트 스왈로스 (2012–현재)
국가대표 경력
대표팀일본
올림픽2004년 하계 올림픽
월드 베이스볼 클래식2006년 월드 베이스볼 클래식 (도중 사퇴)
수상
수상 내역센트럴 리그 최고 셋업 투수 (2002년)
통계 (2011년 시즌 종료 기준)
리그NPB
승-패27-15
평균자책점2.66
탈삼진485
세이브55
메달
올림픽2004년 아테네 올림픽 야구 동메달 (단체전)
월드 베이스볼 클래식2006 샌디에이고 금메달 (단체전)

2. 선수 경력

; 프로팀 경력



; 국가 대표 경력

=== 프로 입단 전 ===

아버지가 현지 아마추어 야구팀에 소속되어 있던 영향으로 초등학교 5학년 때 야구를 시작했다.[1] 중학교 시절에는 투수외야수였고 이시이 가즈히사를 동경하여 도쿄가쿠칸 고등학교에 입학했다.[1] 3학년 여름에 열린 현 대회에서 팀은 16강에 진출했지만 고시엔 대회 출전은 이뤄지지 않았다.[1] 같은 학교 1년 선배인 아이카와 료지를 보러 온 스카우트가 눈에 띈 것을 계기로 주목을 받아,[1] 1995년 프로 야구 드래프트 회의에서 야쿠르트 스왈로스로부터 4순위 지명을 받아 입단했다.[1] 등번호는 이시이 가즈히사의 등번호 16번을 뒤집은 61번으로 배정되었다.[1]

=== 초기 (1996년 ~ 2001년) ===

프로 1년차인 7월 16일 히로시마 도요 카프전(진구 구장)에서 프로 첫 등판을 하였으며, 같은 해 8월 10일 같은 히로시마전에서 첫 승리를 거두었다. 고졸 신인임에도 13경기에 등판하여 1승 0패 평균자책점 3.38의 성적을 남겼다. 그러나, 볼넷이 많아 불안정한 투구가 자주 보였다.[1] 그 후 2년간은 부상과 제구력 난의 영향으로 1경기 등판에 그쳤다.

은 중간 계투로 25경기에 등판했지만, 0승 1패 평균자책점 6.28로 끝나, 다음 시즌 전에 타자 전향을 시사받았다. 이토 아키미츠 투수 코치의 지도 아래 타격 연습과 병행하여 제구력 난을 극복하는 전환점이 되었다.

부터는 중간 계투와 틈새 선발로 활약했다. 5월 3일 히로시마전에서 선발 등판하여 승리했지만, 그 후 2번의 선발 등판에서는 3회를 넘기지 못하고, 나머지 시즌은 중간 계투로 기용되었다. 이 해에는 45경기에 등판하여 76과 1/3이닝에서 4승 3패, 평균자책점 3.30이었다.

4월 24일 주니치 드래곤즈전에서 1점차 8회초 도중부터 등판하여 첫 세이브를 올렸다. 이 해에는 39경기에 등판하여 평균자책점 3.40의 성적을 남겼다. 일본 시리즈에서는 3차전 1경기만 등판했지만, 1이닝을 무실점으로 막아 리그 우승과 일본 제일에 기여했다.

=== 전성기 (2002년 ~ 2005년) ===

2002년에는 팬들의 공모를 통해 이가라시 료타와 함께 ‘로켓 보이즈’라는 애칭이 붙었다. 이 해에 크게 약진하여 셋업맨으로 리그 최다인 69경기에 등판, 6승 2패 5세이브, 평균자책점 1.51의 성적으로 최우수 중간 계투 투수에 선정되었다. 69경기 등판은 가네다 마사이치의 기록을 46년 만에 경신한 구단 신기록이었다.[2] 10월 11일 요코하마 DeNA 베이스타스전(진구 구장)에서는 최고 속도 155km/h를 기록했다.[3]

2003년에는 옆구리 통증으로 36경기 등판에 그쳤지만, 6승 1패 1세이브, 평균 자책점 1.99, 45와 1/3이닝 동안 61개의 탈삼진을 기록하며 탈삼진율 12.17을 기록했다.

2004년에는 다카쓰 신고의 이적으로 이가라시 료타와 함께 중간 계투를 맡았지만, 전년도 왼쪽 옆구리 통증으로 이가라시에게 중간 계투 자리를 양보했다. 여름에 회복하여 아테네 올림픽 야구 일본 국가대표팀 선수로 발탁되어 동메달을 획득했다. 시즌에서는 38경기에 등판하여 평균 자책점 2.05를 기록했다. 5월 4일 주니치전(진구)에서는 8회초부터 등판하여 그 이닝 타석에서 이와세 히토키에게서 프로 유일의 홈런을 쳤다.

2005년에는 이가라시의 부진으로 구원 투수로 61경기에 등판, 평균 자책점 1.95와 개인 최고 성적인 37세이브를 기록했다. 이는 구단 세이브 기록과 타이기록이었다. 그러나 이 해가 현역 생활의 마지막 활약이 되었다.

=== 부상과 은퇴 (2006년 ~ 2011년) ===

2006년 월드 베이스볼 클래식 일본 대표팀 선수로 발탁되는 등 빠른 조정을 실시하고 있었지만, 2006년 월드 베이스볼 클래식 1라운드 한국전에서 8회말 이승엽 선수에게 2점 홈런을 허용한 이후 왼쪽 어깨 부상으로 인해 1차 리그에서 출전을 포기했다.[4] 일정 이상의 활약으로 메이저 리그 이적이 용인될 전망이었지만 1군에서는 11경기 등판에만 그쳤다. 오프 시즌에는 야쿠르트 잔류를 전제로 한 수술을 받았다.

2007년은 재활 훈련에만 전념하면서 1군에 등판하는 일이 없이 시즌을 마쳤다. 이듬해 2008년은 9월 27일의 2군 최종전에서 777일만의 정규 경기 등판을 이루는 등 1이닝을 피안타 1개의 무실점으로 호투했지만 2년 연속으로 1군 등판은 없었다. 2009년은 2군에서 13경기에 등판했지만 그 해에도 1군 등판은 없었다.

추계 스프링 캠프에 참가하면서 2010년 시즌에 본격적으로 부활할 의지를 보이기도 했다. 2010년 시즌은 4년 만에 춘계 스프링 캠프를 1군에서 보냈지만 실내 풀에서 가진 트레이닝 도중 부상을 당해 4바늘을 꿰매는 수술을 받아 전력에서 이탈했다. 페넌트레이스 개막 후에도 2군에서는 7경기에 등판했지만 평균자책점 11.12의 저조한 성적을 남길 정도의 부진에 시달리면서 그 해에도 1군 등판은 없었다.

그 해 9월 29일에 현역 은퇴를 표명했고[4] 은퇴 경기는 10월 25일의 정규 시즌 마지막 경기인 히로시마와의 경기(24차전, 메이지 진구 야구장)에서 7회초에 입단할 당시의 스카우트 담당이었던 오가와 준지 감독으로부터 공을 건네 받은 후 구원 등판해 선두 타자 마쓰모토 다카아키로부터 3구 삼진을 빼앗아 현역 생활을 마감했다. 재활훈련 중에는 2009년요코하마로부터 이적해 온 아이카와 료지와 함께 다시 배터리를 짜는 등 1군에서의 마운드에 오르는 것을 목표로 두었지만[5] 아이카와와 함께 정규 경기에서도 배터리를 짠 것은 이 은퇴 등판이 처음이자 마지막이 되었다. 은퇴식이 끝난 뒤 야쿠르트의 선수들로부터 헹가래를 받아 프로 야구 선수로서의 종지부를 찍게 되었다.

2. 1. 프로 입단 전

아버지가 현지 아마추어 야구팀에 소속되어 있던 영향으로 초등학교 5학년 때 야구를 시작했다.[1] 중학교 시절에는 투수외야수였고 이시이 가즈히사를 동경하여 도쿄가쿠칸 고등학교에 입학했다.[1] 3학년 여름에 열린 현 대회에서 팀은 16강에 진출했지만 고시엔 대회 출전은 이뤄지지 않았다.[1] 같은 학교 1년 선배인 아이카와 료지를 보러 온 스카우트가 눈에 띈 것을 계기로 주목을 받아,[1] 1995년 프로 야구 드래프트 회의에서 야쿠르트 스왈로스로부터 4순위 지명을 받아 입단했다.[1] 등번호는 이시이 가즈히사의 등번호 16번을 뒤집은 61번으로 배정되었다.[1]

2. 2. 프로 입단 후

7월 16일 히로시마 도요 카프전(진구 구장)에서 프로 첫 등판을 하였으며, 같은 해 8월 10일 같은 히로시마전에서 첫 승리를 거두었다. 고졸 신인임에도 13경기에 등판하여 1승 0패 평균자책점 3.38의 성적을 남겼다. 그러나, 볼넷이 많아 불안정한 투구가 자주 보였다. 그 후 2년간은 부상과 제구력 난의 영향으로 1경기 등판에 그쳤다.

은 중간 계투로 25경기에 등판했지만, 0승 1패 평균자책점 6.28로 끝나, 다음 시즌 전에 타자 전향을 시사받았다. 이토 아키미츠 투수 코치의 지도 아래 타격 연습과 병행하여 제구력 난을 극복하는 전환점이 되었다.

부터는 중간 계투와 틈새 선발로 활약했다. 5월 3일 히로시마전에서 선발 등판하여 승리했지만, 그 후 2번의 선발 등판에서는 3회를 넘기지 못하고, 나머지 시즌은 중간 계투로 기용되었다. 이 해에는 45경기에 등판하여 76이닝 1/3에서 4승 3패, 평균자책점 3.30이었다.

4월 24일 주니치 드래곤즈전에서 1점차 8회초 도중부터 등판하여 첫 세이브를 올렸다. 이 해에는 39경기에 등판하여 평균자책점 3.40의 성적을 남겼다. 일본 시리즈에서는 3차전 1경기만 등판했지만, 1이닝을 무실점으로 막아 리그 우승과 일본 제일에 기여했다.

에 팬들의 공모를 통해 이가라시 료타와 함께 로켓 보이즈라는 애칭이 붙었다. 이 해에 크게 약진하여 셋업맨으로 리그 최다인 69경기에 등판하여 6승 2패 5S, 평균자책점 1.51의 성적으로 최우수 중간 계투 투수에 빛났다. 69경기 등판은 카네다 마사이치의 기록을 46년 만에 넘어선 구단 신기록이었다[2]。 또한, 10월 11일 요코하마 베이스타즈전(진구 구장)에서, 최고 속도 155km/h를 기록했다[3]

은 평균자책점 1.99로 안정되었고, 승수에서도 6승을 올렸지만, 부상으로 인해 36경기 등판에 그쳤다.

은 2004년 아테네 올림픽 야구에 선출되어 동메달을 획득했다. 시즌에서는 올림픽으로 인해 전열에서 이탈한 적도 있어 38경기 등판이었지만, 평균자책점은 2.05로 이 해에도 안정적이었다. 5월 4일 주니치전(진구)에서는 8회초부터 마운드에 올라간 관계로 그 이닝에서 타석에 들어서서 이와세 히토키로부터 프로에서 유일한 홈런을 쳤다.

은 이가라시의 부상과 부진으로 인해 클로저로 지명되었다. 61경기에 등판하여 평균자책점 1.95, 자기 최다이자 구단 세이브 기록 타이가 되는 37세이브를 올렸다. 그러나, 이 해가 현역 생활에서 마지막 활약이 되었다.

은 개막 전 3월에 개최된 제1회 월드 베이스볼 클래식(WBC)의 일본 대표로 선출되었다. 대회에 대비하여 빠른 시기에 컨디션 조절을 하고 있었지만, 도쿄 돔에서 열린 1차 리그 대한민국전에서 왼쪽 어깨 통증을 호소하여 2차 리그를 위해 미국으로 건너갔지만 어깨 악화로 이탈했다. 일정 수준 이상의 활약으로 메이저 리그 이적이 용인될 전망이었지만, 1군에서는 11경기 등판에 그쳤다. 이 어깨 상태 악화로 MLB 이적을 포기하고, 오프에 스왈로즈 잔류를 전제로 수술을 받았다.

은 재활에 힘썼으며, 1군 등판 없이 끝났다.

은 9월 27일 이스턴 리그 최종전에서 777일 만에 실전 등판을 하여 1이닝을 1피안타 무실점으로 막았지만, 2년 연속으로 1군 등판은 없었다.

은 2군에서 13경기에 등판했지만, 3년 연속 1군 등판은 없었다.

은 4년 만에 스프링 캠프를 1군에서 맞이했지만, 실내 수영장에서 훈련 중 오른발 엄지 발가락이 찢어져 4바늘을 꿰매는 부상을 입어 이탈했다. 페넌트레이스 개막 후에도 2군에서 7경기에 등판했지만 평균자책점 11.12로 부진하여, 이 해에도 1군 등판은 없었다.

9월 29일에 현역 은퇴를 표명했다[4]。 은퇴 경기는 10월 25일 정규 시즌 최종전 히로시마 24차전(진구 구장)에서 7회초에 입단 당시 담당 스카우트였던 오가와 준지 감독으로부터 공을 건네받아 구원 등판하였고, 받은 포수는 2009년에 요코하마에서 야쿠르트로 FA 이적해 온 고교 시절의 배터리 파트너였던 아이카와 료지였다[5]。 선두 타자 마츠모토 타카아키를 삼진으로 잡아 현역 생활을 마쳤다. 경기 후 은퇴식 이후, 팀 동료들로부터 헹가래를 받았다.

2. 2. 1. 초기 (1996년 ~ 2001년)

프로 1년차인 7월 16일 히로시마 도요 카프전(진구 구장)에서 프로 첫 등판을 하였으며, 같은 해 8월 10일 같은 히로시마전에서 첫 승리를 거두었다. 고졸 신인임에도 13경기에 등판하여 1승 0패 평균자책점 3.38의 성적을 남겼다. 그러나, 볼넷이 많아 불안정한 투구가 자주 보였다.[1] 그 후 2년간은 부상과 제구력 난의 영향으로 1경기 등판에 그쳤다.

은 중간 계투로 25경기에 등판했지만, 0승 1패 평균자책점 6.28로 끝나, 다음 시즌 전에 타자 전향을 시사받았다. 이토 아키미츠 투수 코치의 지도 아래 타격 연습과 병행하여 제구력 난을 극복하는 전환점이 되었다.

부터는 중간 계투와 틈새 선발로 활약했다. 5월 3일 히로시마전에서 선발 등판하여 승리했지만, 그 후 2번의 선발 등판에서는 3회를 넘기지 못하고, 나머지 시즌은 중간 계투로 기용되었다. 이 해에는 45경기에 등판하여 76과 1/3이닝에서 4승 3패, 평균자책점 3.30이었다.

4월 24일 주니치 드래곤즈전에서 1점차 8회초 도중부터 등판하여 첫 세이브를 올렸다. 이 해에는 39경기에 등판하여 평균자책점 3.40의 성적을 남겼다. 일본 시리즈에서는 3차전 1경기만 등판했지만, 1이닝을 무실점으로 막아 리그 우승과 일본 제일에 기여했다.

2. 2. 2. 전성기 (2002년 ~ 2005년)

2002년에는 팬들의 공모를 통해 이가라시 료타와 함께 ‘로켓 보이즈’라는 애칭이 붙었다. 이 해에 크게 약진하여 셋업맨으로 리그 최다인 69경기에 등판, 6승 2패 5세이브, 평균자책점 1.51의 성적으로 최우수 중간 계투 투수에 선정되었다. 69경기 등판은 가네다 마사이치의 기록을 46년 만에 경신한 구단 신기록이었다.[2] 10월 11일 요코하마 DeNA 베이스타스전(진구 구장)에서는 최고 속도 155km/h를 기록했다.[3] 이는 일본인 좌완 투수의 공식 기록 최고 속도였다.[12]

2003년에는 옆구리 통증으로 36경기 등판에 그쳤지만, 6승 1패 1세이브, 평균 자책점 1.99, 45와 1/3이닝 동안 61개의 탈삼진을 기록하며 탈삼진율 12.17을 기록했다.

2004년에는 다카쓰 신고의 이적으로 이가라시 료타와 함께 중간 계투를 맡았지만, 전년도 왼쪽 옆구리 통증으로 이가라시에게 중간 계투 자리를 양보했다. 여름에 회복하여 아테네 올림픽 야구 일본 국가대표팀 선수로 발탁되어 동메달을 획득했다. 시즌에서는 38경기에 등판하여 평균 자책점 2.05를 기록했다. 5월 4일 주니치전(진구)에서는 8회초부터 등판하여 그 이닝 타석에서 이와세 히토키에게서 프로 유일의 홈런을 쳤다.

2005년에는 이가라시의 부진으로 구원 투수로 61경기에 등판, 평균 자책점 1.95와 개인 최고 성적인 37세이브를 기록했다. 이는 구단 세이브 기록과 타이기록이었다. 그러나 이 해가 현역 생활의 마지막 활약이 되었다.

2. 2. 3. 부상과 은퇴 (2006년 ~ 2011년)

2006년 월드 베이스볼 클래식 일본 대표팀 선수로 발탁되는 등 빠른 조정을 실시하고 있었지만, 2006년 월드 베이스볼 클래식 1라운드 한국전에서 8회말 이승엽 선수에게 2점 홈런을 허용한 이후 왼쪽 어깨 부상으로 인해 1차 리그에서 출전을 포기했다.[4] 일정 이상의 활약으로 메이저 리그 이적이 용인될 전망이었지만 1군에서는 11경기 등판에만 그쳤다. 오프 시즌에는 야쿠르트 잔류를 전제로 한 수술을 받았다.

2007년은 재활 훈련에만 전념하면서 1군에 등판하는 일이 없이 시즌을 마쳤다. 이듬해 2008년은 9월 27일의 2군 최종전에서 777일만의 정규 경기 등판을 이루는 등 1이닝을 피안타 1개의 무실점으로 호투했지만 2년 연속으로 1군 등판은 없었다. 2009년은 2군에서 13경기에 등판했지만 그 해에도 1군 등판은 없었다.

추계 스프링 캠프에 참가하면서 2010년 시즌에 본격적으로 부활할 의지를 보이기도 했다. 2010년 시즌은 4년 만에 춘계 스프링 캠프를 1군에서 보냈지만 실내 풀에서 가진 트레이닝 도중 부상을 당해 4바늘을 꿰매는 수술을 받아 전력에서 이탈했다. 페넌트레이스 개막 후에도 2군에서는 7경기에 등판했지만 평균자책점 11.12의 저조한 성적을 남길 정도의 부진에 시달리면서 그 해에도 1군 등판은 없었다.

그 해 9월 29일에 현역 은퇴를 표명했고[4] 은퇴 경기는 10월 25일의 정규 시즌 마지막 경기인 히로시마와의 경기(24차전, 메이지 진구 야구장)에서 7회초에 입단할 당시의 스카우트 담당이었던 오가와 준지 감독으로부터 공을 건네 받은 후 구원 등판해 선두 타자 마쓰모토 다카아키로부터 3구 삼진을 빼앗아 현역 생활을 마감했다. 재활훈련 중에는 2009년요코하마로부터 이적해 온 아이카와 료지와 함께 다시 배터리를 짜는 등 1군에서의 마운드에 오르는 것을 목표로 두었지만[5] 아이카와와 함께 정규 경기에서도 배터리를 짠 것은 이 은퇴 등판이 처음이자 마지막이 되었다. 은퇴식이 끝난 뒤 야쿠르트의 선수들로부터 헹가래를 받아 프로 야구 선수로서의 종지부를 찍게 되었다.

2. 3. 은퇴 후

은퇴 후 2012년 시즌부터 도쿄 야쿠르트 스왈로스의 2군 육성 코치로 발탁되었다. 2013년 10월 23일, 2014년 시즌부터 2군 투수 코치로 취임하는 것이 발표되었다. 2017년부터는 1군 투수 코치(주로 불펜 담당)를 맡고 있다. 2022년에는 키자와 나오후미, 쿠보 타쿠마 등 신규 전력도 두각을 나타내 안정적인 릴리프를 구축하며 불펜 담당 역할을 훌륭하게 수행했다.

3. 투구 스타일

150km/h를 넘는 빠른 공과 날카로운 슬라이더를 무기로 구원 투수로서 활약했다. 2002년에는 왼손 투수 일본 최고 속도 기록인 155km/h를 기록하는 등, 최우수 중간 계투 투수로 선정되었다[8].

MLB 진출을 열망하여, 여러 번 포스팅을 통한 이적을 지원했지만 거부당했다. 2004년 오프 시즌, 구단 측은 조건을 충족한 상태에서의 이적을 용인했지만, 이듬해 2005년 오프 시즌, 후루타 아쓰야 신임 감독 취임으로 상황이 바뀌었다며 불허 방침으로 전환했다. 2006년 1월, 구단이 약속 번복에 대해 사죄했고, 같은 해 오프 시즌의 이적을 용인하면서 야쿠르트에 잔류하기로 결정했다[10]. 그러나 같은 해 어깨 상태가 악화된 것을 이유로 MLB 이적을 단념했다.

로켓 보이즈로 불리며 좌우 구원 투수, W 스토퍼로서 함께 활약한 이가라시 료타에 대해서는 라이벌이자 동생 같은 존재였다고 말했고, 이가라시도 이시이에 대해 "이시이 씨가 없었다면 더 성적이 나빴을 것이다"라고 말했다[11].

4. 논란

4. 1. 메이저리그 진출 시도 좌절

5. 수상 경력

5. 1. 타이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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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 2. 수상

이시이 히로토시는 2004년에 아테네 올림픽 야구 일본 대표팀의 일원으로서 동메달을 획득하여 지바 현 지사 상을 수상했다.[13]

5. 3. 국제 대회

이시이 히로토시는 2004년 아테네 올림픽에서 동메달을 획득했다. 2004년 하계 올림픽 야구 일본 대표로 참가했다. 2006년 월드 베이스볼 클래식에도 일본 대표로 참가했다.

6. 개인 기록

이시이 히로토시는 1996년 7월 6일 히로시마 도요 카프와의 경기(메이지 진구 야구장)에서 9회초에 구원 투수로 처음 등판하여 2/3이닝을 무실점으로 막았다. 같은 날, 9회초에 사사오카 신지로부터 첫 탈삼진을 기록했다. 1996년 8월 10일 히로시마 도요 카프와의 경기(메이지 진구 야구장)에서 8회초에 구원 등판하여 1이닝 1실점을 기록하며 첫 승리를 거두었다. 1996년 8월 16일 요미우리 자이언츠와의 경기(도쿄 돔)에서는 처음으로 선발 등판하여 1과 1/3이닝 동안 1실점을 기록했다.

2000년 5월 3일, 히로시마 도요 카프와의 경기(히로시마 시민 구장)에서 선발로 등판해 5이닝 3실점으로 첫 선발 승리를 따냈다. 2001년 4월 24일 주니치 드래건스와의 경기(나고야 돔)에서는 8회말 1사에 구원 등판하여 1과 2/3이닝을 무실점으로 막아 첫 세이브를 올렸다. 2005년 4월 6일 주니치 드래건스와의 경기(메이지 진구 야구장)에서는 7회초 2사에 구원 등판하여 1과 1/3이닝 무실점으로 첫 홀드를 기록했다.

타자로서 이시이 히로토시는 2002년 6월 6일 요코하마 베이스타스와의 경기(요코하마 스타디움)에서 8회초에 아즈마 가즈마사로부터 좌전 안타를 기록하며 첫 안타를 신고했다. 2004년 5월 4일 주니치 드래건스와의 경기(메이지 진구 야구장)에서는 8회말에 이와세 히토키를 상대로 우월 솔로 홈런을 쳐 첫 홈런과 첫 타점을 동시에 기록했다.

올스타전에는 2002년과 2005년, 총 두 차례 출장했다.

7. 등번호

1996년부터 2011년까지 61번을, 2012년부터 98번을 등번호로 사용했다.

참조

[1] 웹사이트 ヤクルト・石井 引退登板で万感の3球 https://web.archive.[...] スポーツニッポン 2011-10-25
[2] 웹사이트 2000年代 https://www.yakult-s[...] 東京ヤクルトスワローズ 2022-02-15
[3] 서적 日本プロ野球偉人伝 vol.14 2000→2005編 ベースボール・マガジン社
[4] 뉴스 ヤクルトの石井が引退=速球派左腕、肩痛に勝てず - プロ野球 http://www.asahi.com[...] asahi.com 2011-09-29
[5] 웹사이트 石井弘寿、悲運のWBCマウンドも「自分の決断なので後悔はない」 https://sportiva.shu[...] sportiva 2017-03-07
[6] 웹사이트 2014年コーチングスタッフについて http://www.yakult-sw[...] 東京ヤクルトスワローズ 2013-10-23
[7] 간행물 週刊ベースボール2023年2月25日号増刊2023プロ野球全選手保存版カラー写真名鑑
[8] 웹사이트 ヤクルト石井弘寿引退 1軍復帰ならず https://www.nikkansp[...] 日刊スポーツ 2011-09-29
[9] 뉴스 ヤクルト・石井弘寿 今季限り引退 1軍登板なしで決断 https://www.sponichi[...] スポーツニッポン 2011-09-29
[10] 뉴스 石井弘はヤクルト残留 今季の大リーグ移籍断念 https://web.archive.[...] 47NEWS 2006-01-29
[11] 웹사이트 五十嵐亮太[ヤクルト/投手]×石井弘寿[ヤクルト/投手コーチ] 永遠のロケットボーイズ https://column.sp.ba[...] 週刊ベースボールONLINE 2020-10-23
[12] 문서
[13] 문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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