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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카쓰 신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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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다카쓰 신고는 일본의 전 야구 선수이자 감독으로, 사이드암 투구 폼과 다양한 싱커를 구사하는 투수로 활약했다. 히로시마 공업고등학교와 아시아 대학을 거쳐 1990년 야쿠르트 스왈로스에 입단하여 1993년부터 마무리 투수로 활약하며 4번의 최우수 구원 투수 타이틀을 획득했다. 2003년에는 일본 프로 야구 통산 세이브 기록을 경신했고, 메이저 리그 시카고 화이트삭스, 뉴욕 메츠에서 활동하기도 했다. 이후 한국, 대만, 독립 리그를 거쳐 2012년 선수 은퇴 후, 지도자로 변신하여 야쿠르트 스왈로스 1군 투수 코치, 2군 감독을 거쳐 2020년부터 1군 감독을 맡아 2021년 팀을 6년 만에 리그 우승으로 이끌었으며, 2022년에는 일본 야구 명예의 전당에 헌액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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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카쓰 신고 - [인물]에 관한 문서
선수 정보
도쿄 야쿠르트 스왈로스 투수 코치 시절 (2015년 8월 19일, [[요코하마 스타디움]])
도쿄 야쿠르트 스왈로스 투수 코치 시절 (요코하마 스타디움에서, 2015년 8월 19일)
이름다카쓰 신고
로마자 표기Shingo Takatsu
한자 표기高津 臣吾
출생일1968년 11월 25일
출생지히로시마현 히로시마시 미나미구
신장180
체중75
포지션투수
투타우투우타
소속 구단도쿄 야쿠르트 스왈로스
등번호22
역할감독
프로 입단 정보
드래프트 연도1990년
드래프트 순위드래프트 3순위
첫 출장
NPB1991년 4월 24일
MLB2004년 4월 9일
KBO2008년 6월 24일, 잠실 두산전
CPBL2010년 3월 23일
BCL2011년 4월 16일
최종 출장
NPB2007년 10월 9일
MLB2005년 10월 2일
KBO2008년 10월 1일, 목동 삼성전
CPBL2010년 9월 29일
BCL2012년 9월 22일
선수 경력
감독 및 코치 경력
수상
NPB일본 시리즈 우승 (선수: 1993, 1995, 1997, 2001, 감독: 2021)
6× NPB 올스타 선정 (1994, 1996, 1999–2000, 2003, 2007)
쇼리키 마쓰타로 상 (2021)
NPB 통산 기록 (선수)
승-패36승 46패
평균 자책점3.20
탈삼진591
세이브286
MLB 통산 기록 (선수)
승-패8승 6패
평균 자책점3.38
탈삼진88
세이브27
KBO 통산 기록 (선수)
승-패1승 0패
평균 자책점0.86
탈삼진18
CPBL 통산 기록 (선수)
승-패1승 2패
평균 자책점1.88
탈삼진32
기타 정보
출신 학교히로시마현립 히로시마 공업 고등학교
아시아 대학
야구 명예의 전당일본 야구 명예의 전당 (2022년 헌액)
명예의 전당 종류일본
선정 연도2022년
선정 방식경기자 표창 (플레이어 부문)
득표율86.1% (361표 중 311표)

2. 선수 시절

2006년 도쿄 야쿠르트 스왈로스에서 투구하는 다카쓰 신고


고교 시절과 대학 시절을 거쳐 1990년 프로 야구 드래프트에서 야쿠르트 스왈로스에 3라운드로 지명되었다. 입단 초기에는 선발 투수로 활동했으나, 1993년부터 팀의 마무리 투수로 전향하여 그해 20세이브를 기록하며 팀의 센트럴 리그 우승에 기여했다. 이후 야쿠르트의 핵심 마무리 투수로 자리매김하며 1994년, 1999년, 2001년, 2003년 총 네 차례에 걸쳐 리그 최다 세이브 타이틀을 차지했다. 특히 2001년에는 개인 최다인 37세이브를 올리며 팀의 일본 시리즈 우승을 이끌었고, 2003년에는 사사키 가즈히로를 넘어 일본 프로 야구 통산 최다 세이브 기록을 경신했다.

2003 시즌 종료 후 FA 자격을 얻어 2004년 메이저 리그시카고 화이트삭스와 계약했다. 이적 첫해 56경기에 등판하여 2.31의 ERA과 19세이브를 기록하는 인상적인 활약을 펼쳤고, 아메리칸 리그 올해의 신인 투표에서 2위에 올랐다. 그러나 다음 해인 2005년에는 부진을 겪으며 시즌 중 방출되었고, 뉴욕 메츠를 거쳐 일본으로 복귀했다.

2006년 친정팀 야쿠르트 스왈로스로 돌아와 마무리 투수로 활동하며 10월 7일, 미일 통산 300세이브를 달성했다. 이는 사사키 가즈히로에 이어 일본 선수로는 두 번째에 해당하는 기록이었다. 그러나 2007 시즌 종료 후 팀에서 방출되었다.

이후에도 현역 생활을 이어가고자 2008년 시카고 컵스와 마이너 계약을 맺었으나 스프링 트레이닝 기간 중 방출되었다.[1][2] 같은 해 6월, KBO 리그의 우리 히어로즈와 계약하며 한국 무대에 진출했다.[3] 6월 29일 첫 세이브를 기록하며 일본 프로 야구, 메이저 리그 베이스볼, KBO 리그에서 모두 세이브를 기록한 최초의 투수가 되었다.[4] 2008 시즌 종료 후 히어로즈에서 방출되었고, 2009년에는 샌프란시스코 자이언츠 산하 마이너 리그 팀에서 뛰었다.[5]

2010년에는 타이완 CPBL의 신농 불스에 입단하여, 일본, 미국, 한국, 대만 4개국 프로 야구 리그를 모두 경험한 최초의 일본인 선수가 되었다. 2010 시즌 종료 후 신농 불스와의 계약이 갱신되지 않으면서 선수 생활을 마무리했다.

선수 은퇴 후 지도자의 길을 걸어 2020년 도쿄 야쿠르트 스왈로스의 감독으로 부임했으며, 2022년 일본 야구 명예의 전당에 헌액되었다.

2. 1. 프로 입단 전

히로시마 출신으로, 어릴 적부터 히로시마 도요 카프의 팬이었으며, 특히 ‘미스터 빨간 헬멧’으로 불린 야마모토 고지의 열렬한 팬이었다.[11] 다카쓰가 히로시마 시립 단바라 초등학교에 입학하기 전, 가족이 히지야마 정의 신축 맨션으로 이사했는데, 당시에는 높은 건물이 드물어 집 창문으로 히로시마 시민 구장이 잘 보였다. 어린 시절 시민 구장을 자주 드나들며 카프 선수들을 동경했고, 초등학교 3학년 때 지역 연식 야구팀 '단바라 레드 이글스'에서 야구를 시작했다.[12] 이후 장훈 등을 배출한 히로시마 시립 단바라 중학교에 진학했으나[13][14], 당시 야구부는 활동이 활발하지 않았다.

고등학교는 집 근처의 히로시마현립 히로시마 공업고등학교로 진학했다. 고교 시절, 현 내에서 뛰어난 투수였던 우에다 슌지를 보며 자신만의 특징을 만들고자 투구폼을 스리쿼터에서 언더스로로 변경했다. 3학년 때인 1986년, 대기 투수 겸 1루수로 봄과 여름 연속으로 고시엔 대회에 출전했다. 봄 고시엔에서는 팀이 준준결승까지 진출했으나 우츠노미야 미나미고에 패했고, 여름 고시엔에서는 3회전에서 우라와 학원에 패했다. 고시엔 본선 무대에서는 직접 등판할 기회는 없었고 대타로만 출전했지만[64], 히로시마 지역 예선에서는 4경기에 등판해 2완봉승을 거두고 준결승전에서도 완투승을 기록하며 팀의 고시엔 진출에 기여했다.

고교 졸업 후, 아시아 대학 오가와 나루미 감독의 권유로 아시아 대학에 진학했다. 대학 동기인 고이케 히데오와 함께 팀의 주축 투수로 활약했다. 대학 2학년 때 구속을 늘리기 위해 투구폼을 언더스로에서 사이드스로로 다시 수정했고, 이때 싱커를 익히게 되었다. 도토 대학 야구 리그에서 통산 40경기에 등판하여 11승 15패, 평균자책점 2.34, 140탈삼진을 기록했다. 1990년에는 팀의 춘계 및 추계 리그 연속 우승을 이끌었으며, 같은 해 전일본 대학 야구 선수권 대회에서도 우승을 경험했다. 메이지 신궁 야구 대회에서는 준결승에서 패했다. 다른 대학 동기로는 카와지리 테츠로가 있다.

대학 졸업 후에는 어릴 적부터 팬이었던 히로시마 도요 카프 입단을 강하게 원했지만, 카프 측에서 '사이드스로 투수는 뽑지 않는다'는 방침 때문에 영입 제안을 받지 못했다. 사회인 야구 팀인 미쓰비시 중공 히로시마 입단이 내정된 상태였으나, 야쿠르트 스왈로스의 스카우터 카타오카 히로오가 원래 고이케 히데오를 관찰하러 왔다가 사이드스로 투수인 다카쓰의 가능성에 주목했다.[15][16] 결국 1990년 프로 야구 드래프트 회의에서 야쿠르트 스왈로스로부터 3순위 지명을 받았고, 계약금 5500만, 연봉 700만(금액은 추정)의 조건으로 입단했다.[17][18] 등번호는 '''22'''번을 받았다. 만약 야쿠르트가 드래프트에서 고이케 히데오의 교섭권을 획득했다면 다카쓰를 지명하지 않았을 것이라는 이야기도 있다.

2. 2. 야쿠르트 시절 (1991년 ~ 2003년)



다카쓰 신고는 1990년 드래프트에서 야쿠르트 스왈로스에 3라운드로 지명되었다. 입단 초기에는 선발 투수로 기대되었으나, 특별히 눈에 띄는 특징이 없는 투수였다. 그의 프로 경력에서 중요한 전환점은 1992년 가을 캠프에서 느린 싱커를 습득한 것이었다[19]. 당시 노무라 가쓰야 감독은 1992년 일본 시리즈에서 세이부 라이온즈의 시오자키 테츠야가 던진 느린 싱커에 팀 타선이 고전하자, 다카쓰에게 이 구종의 습득을 지시했다[20][21].

프로 3년차인 1993년, 다카쓰는 마무리 투수로 전향했다. 5월 2일 요미우리 자이언츠전에서 마쓰이 히데키에게 프로 데뷔 첫 홈런을 허용했지만[22], 팀의 리드를 지켜내며 자신의 첫 세이브를 기록했다. 그 해 여름부터 시속 100km/h대의 싱커를 활용한 투구가 효과를 거두기 시작했고[23][24], 당시 구단 신기록인 20세이브를 달성하며 팀의 센트럴 리그 2년 연속 우승에 기여했다. 1993년 일본 시리즈에서는 3세이브를 기록하며 팀의 일본 시리즈 제패를 이끌었고, 7차전에서는 8회부터 구원 등판하여 헹가래 투수가 되었다.

1994년에는 치열한 경쟁 끝에 19세이브를 기록하며 생애 첫 최우수 구원 투수 타이틀을 차지했다. 1995년에는 확고한 마무리 투수로서 자신의 기록을 경신하는 28세이브를 올리며 팀의 리그 우승과 일본 시리즈 우승에 기여했고, 일본 시리즈에서 다시 한번 헹가래 투수가 되었다.

1996년에는 시즌 초반 안정적인 모습을 보였으나(5월 말까지 1승 10세이브, 방어율 1.65), 6월 이후 투구가 흔들리며 시즌 6패(개인 최다패)를 기록했다. 21세이브를 올렸지만 구원 실패도 잦았다. 7월 올스타전 2차전에서는 대타로 출전해 상대 투수 이치로에게 유격수 땅볼로 물러나기도 했다[25].

1997년에는 시즌 초반 마무리로서 부진하여 선발로도 기용되었으나 2연패하며 성과를 내지 못했다[26]. 7월 이후 중간 계투로 점차 안정을 되찾았고, 기존 마무리였던 이토 도모히토의 부상 및 연투 부담 문제로 인해 좌완 가토 히로토와 함께 셋업 및 마무리 역할을 번갈아 맡으며 팀의 리그 우승과 일본 시리즈 우승에 기여했다(시즌 방어율은 개인 최고 기록). 일본 시리즈에서는 세 번째 헹가래 투수가 되었다. 이는 당시 감독이었던 노무라 가쓰야가 "마무리는 이토보다 다카쓰가 어울린다"고 말했을 정도로 다카쓰에 대한 깊은 신뢰를 보여주는 대목이다.

1998년에는 이토가 선발로 복귀하면서 다시 마무리를 맡았지만, 42경기에 등판해 2승 3패 3세이브, 방어율 5.56으로 극심한 부진을 겪으며 마무리 자리를 다시 잃었다. 시즌 후반에는 이토나 베테랑 히로타 히로아키가 마무리를 맡았다.

와카마쓰 쓰토무가 신임 감독으로 부임한 1999년, 코칭스태프로부터 선발 전향 제의를 받았으나 "마무리 투수에 자부심을 느낀다"며 거절하고 마무리 투수로 복귀했다[28]. 이 해 자신의 기록을 경신하는 30세이브를 올리며 통산 두 번째 최우수 구원 투수 타이틀을 차지하며 성공적으로 부활했다.

2001년에는 개인 최고 기록인 37세이브를 기록하며 통산 세 번째 최우수 구원 투수 타이틀을 획득했고, 팀의 리그 우승과 일본 시리즈 우승에 크게 기여했다. 리그 우승 확정 경기와 일본 시리즈 우승 확정 경기 모두에서 헹가래 투수가 되었다. 이 일본 시리즈에서 자신의 통산 일본 시리즈 세이브 기록을 8개로 늘렸으며, 시리즈 연속 무실점 기록도 이어갔다. 이것이 그의 현역 마지막 일본 시리즈 등판이 되어, 일본 시리즈 무실점 기록을 유지한 채 선수 생활을 마감하게 된다.

2003년에는 사사키 가즈히로가 보유하고 있던 통산 229세이브의 일본 프로 야구 기록을 경신했다. 시즌 종료 후 개인 통산 네 번째 최우수 구원 투수 타이틀을 획득했고, FA권을 행사하여 11월 메이저 리그시카고 화이트삭스와 연봉 75만달러의 1년 계약(2년차는 구단 옵션)을 맺고 미국 진출을 결정했다.

2. 3. 메이저 리그 시절 (2004년 ~ 2005년)

2003년 11월, 조 아본을 대리인으로 하여 시카고 화이트삭스와 연봉 75만달러의 1년 계약(2년차는 구단 옵션)을 맺고 메이저 리그에 진출했다. 등번호는 '''10'''번을 받았다.[29]

2004년 4월 9일 뉴욕 양키스전에서 메이저 리그 데뷔전을 치렀고, 첫 상대 타자는 마쓰이 히데키였다. 5월 1일 토론토 블루제이스전에서 메이저 리그 첫 승리를, 6월 12일 애틀랜타 브레이브스전에서는 첫 세이브를 기록했다. 이후 빌리 코치를 대신하여 마무리 투수를 맡게 되었다. 4월 23일 탬파베이 레이스전부터 6월 29일 미네소타 트윈스전까지 24경기 연속 무실점을 기록하며 현지 언론으로부터 "미스터 제로"(Mr. Zeroeng)라는 별명을 얻었다. 당시 감독 아지 기옌은 “마리아노 리베라도 데려오지 않는 한 다카쓰는 우리에게 있어서 최고의 마무리다”라고 극찬했다.[65][29] 9월에는 ESPN이 선정한 ‘이득을 본 FA선수 베스트 10’에서 오쓰카 아키노리에 이어 7위에 올랐다.[65] 최종적으로 56경기에 등판하여 구원 투수 중 리그 3위인 WHIP 0.98, 공동 8위인 평균 자책점 2.31을 기록하며 19세이브(20번의 기회 중 1번 실패)를 올렸다.[65] 아메리칸 리그 올해의 신인 투표에서는 바비 크로스비에 이어 2위를 차지했다. 시즌 종료 후 10월 28일, 구단은 옵션을 행사하여 연봉 250만달러의 1년 계약을 맺었다.[65]

2005년 시즌 개막 이후에도 마무리 투수로 기용되었으나, 4월 7일 클리블랜드 인디언스전에서 1이닝 3개의 홈런을 허용하는 등 초반부터 구원 실패가 잦았다.[65] 특히 5월까지 14.1이닝 동안 7개의 피홈런을 기록하며 부진했다. 6월에는 평균자책점 0.96, WHIP 0.75로 잠시 회복세를 보였지만,[65] 7월 들어 평균자책점 12.60, WHIP 2.20으로 다시 부진에 빠졌다.[65] 결국 7월 18일 지명할당(DFA)되었고, 8월 1일에 방출되어 FA 신분이 되었다.[65] 8월 12일 뉴욕 메츠와 마이너 계약을 맺었고, 9월 1일에 메이저 리그로 승격되었으나 시즌 종료 후 다시 FA가 되어 팀을 떠났다.[65]

2. 4. 야쿠르트 복귀 (2006년 ~ 2007년)



2006년, 과거 팀 동료였던 후루타 아쓰야야쿠르트의 감독으로 부임하면서 입단 테스트를 거쳐 3년 만에 친정팀으로 복귀했다. 시즌 초반에는 중간 계투로 나섰으나, 이시이 히로토시이가라시 료타가 부상으로 전력에서 이탈하자 주로 마무리 투수를 맡게 되었다. 10월 7일 히로시마와의 경기(메이지 진구 야구장)에서 미일 통산 300세이브를 달성했으며, 이는 사사키 가즈히로에 이어 일본인 선수로는 역대 두 번째 기록이었다. 그 해 다카쓰는 팀 내 최다인 13세이브를 기록했다.

2007년에도 전년도와 마찬가지로 마무리 투수로 시즌을 시작했다. 하지만 6월 30일 주니치 드래건스전(아키타 현립 야구장) 등판 후, 숙소 호텔에서 목욕 중 발이 미끄러져 넘어지는 사고로 왼발 엄지 발가락에 골절상(전치 3주)을 입고 전력에서 이탈했다. 여름 이후 복귀했지만 구원에 실패하는 경기가 잦아지자 8월 중순 다시 2군으로 내려갔다. 약 한 달 후 1군에 복귀하여 다시 마무리 투수를 맡았으나, 시즌 종반 구단으로부터 다음 시즌 계약에 대한 이야기가 없다고 밝혔다. 결국 시즌 최종전 다음 날인 10월 10일, 구단으로부터 방출 통보를 받았다.

방출 과정에서 스즈키 다다시 구단 사장이 "(실적이 있는 선수에게 마지막 등판 기회 등 배려를 해야 하지 않느냐는 기자의 질문에) 그것이 배려라고는 생각하지 않는다. 현역 생활을 계속하고 싶으면 트라이아웃을 받으면 된다"고 발언하여 팬들과 언론으로부터 큰 비판을 받았다. 이 발언으로 구단에는 약 600건이 넘는 항의와 불만이 쏟아졌고, 결국 구단 측은 스즈키 사장 명의의 사과문을 발표하며 사태 수습에 나섰다. 다카쓰 본인은 현역 생활을 계속하겠다는 의사를 밝혔지만, "자신에게도 자긍심이 있다"며 12개 구단 합동 입단 테스트 참가를 거부하고 영입 제안을 기다렸다. 그러나 영입 의사를 나타내는 구단은 나타나지 않았고, 11월 30일 자유 계약 선수로 공시되었다.

2. 5. 한국, 대만, 독립 리그 시절 (2008년 ~ 2012년)

2008년 1월 18일, 시카고 컵스와 마이너 계약을 맺고 스프링 트레이닝에 초청 선수로 참가했으나[1], 시범 경기 5경기에서 4와 1/3이닝 동안 평균자책점 9.64를 기록하는 등 뚜렷한 결과를 남기지 못하고 3월 11일에 방출되었다.[2] 현역 생활을 계속하겠다는 의지를 밝힌 그는 16일, 예전에 활약했던 시카고 화이트삭스아지 기옌 감독의 권유로 입단 테스트를 받았지만 합격하지 못했다.

같은 해 6월, 한국 프로 야구우리 히어로즈와 계약금 6만달러, 연봉 12만달러로 계약을 맺고 입단해 한국 프로 야구에서는 4번째 일본인 선수가 되었다.[3] 6월 24일에 첫 등판하였고 6월 29일에는 1과 2/3이닝을 던지면서 무실점으로 호투하는 등 첫 세이브를 올렸다. 이로써 다카쓰는 일본 프로 야구, 메이저 리그 베이스볼, KBO 리그에서 세이브를 기록한 최초의 투수가 되었다.[4] 최종적으로 18경기에 등판해 1승 0패 8세이브, 평균자책점 0.86, WHIP 1.00 등 마무리 투수로서 좋은 성적을 남겼다. 그러나 12월 17일 히어로즈 구단은 다카쓰가 고질적인 허리 부상을 안고 있다는 이유로 2009년의 외국인 선수로서 더그 클라크클리프 브룸바를 선택했기 때문에 다카쓰와 재계약을 포기하고 방출했다.

2009년 5월, 로스앤젤레스 교외에서 메이저 리그 구단의 스카우트가 지켜보는 가운데 트라이아웃을 받았고 샌프란시스코 자이언츠와 마이너 계약을 맺었다.[5] 당시 나이는 40세였는데 일본인으로서는 최고령 나이(40세 7개월)에 계약을 맺어 7월에 트리플 A팀 프레즈노 그리즐리스에 합류했지만 메이저 리그에 승격하지는 못했다.

이듬해 2010년 1월, 대만 프로 야구팀 싱농 불스와 계약을 맺으면서 일본(NPB), 미국(MLB), 대한민국(KBO), 중화민국(CPBL)에서 4개의 프로 리그를 경험한 최초의 일본인 선수가 되었다. 등번호도 야쿠르트 시절과 똑같은 '''22'''번으로 배정되었고 6월 12일 대만 야구계에서 1위에 해당되는 13세이브째를 기록해 소속팀인 싱농 불스가 전기 우승을 결정하면서 ‘헹가래 투수’가 되었다. 11월 26일에는 싱농 불스와의 계약을 포기하고 방출당했다.[66]

3. 지도자 시절

2012년부터 니가타 알비렉스 베이스볼 클럽의 선수 겸 감독으로 부임했고[70], 같은 해 8월 31일 시즌 종료 후 현역에서 은퇴하겠다는 의사를 밝혔다. 9월 22일 나가오카 시 유큐잔 야구장에서 열린 시나노 그랜드세로우스와의 경기를 은퇴 경기로 치렀으며, 9회 2아웃 상황에 등판하여 마지막 타자를 좌익수 플라이로 처리했다. 이로써 2012 시즌을 끝으로 19년간의 현역 선수 생활을 마감하고 감독직에서도 물러났다.

이후 친정팀 도쿄 야쿠르트 스왈로스에 투수 코치로 복귀했다. 2014년 시즌부터 1군 투수 코치를 맡았으며[45], 등번호는 '''99'''번을 달았다. 2015년에는 팀 투수진 안정화에 기여하며 구원 평균자책점 리그 1위를 기록, 팀의 리그 우승에 공헌했다[46].

야쿠르트 2군 감독 시절의 다카쓰 신고 (2019년)


2017년부터는 2군 감독으로 자리를 옮겼다.

2020년 시즌을 앞두고 오가와 준지의 후임으로 야쿠르트 1군 감독에 취임했다[47]. 등번호는 현역 시절 사용했던 '''22'''번으로 변경했다[48]. 메이저 리그 경험이 있는 일본인 선수가 NPB 1군 감독이 된 것은 이구치 타다히토에 이어 두 번째이며, 일본 독립 리그 감독 경험자가 NPB 감독이 된 것은 사상 처음이다. 또한 야쿠르트 구단에서는 세키네 쥰조 이후 31년 만의 투수 출신 감독이다. 감독 부임 첫 해인 2020년에는 투타 모두 부진하며 팀이 최하위에 머물렀지만, 선발 로테이션 간격을 넓히는 등 새로운 시도를 했다.

2021년에는 팀을 6년 만의 센트럴 리그 우승으로 이끌며 구단 역사상 첫 투수 출신 우승 감독이 되었다[49]. CS 파이널 스테이지에서는 3위 요미우리 자이언츠를 상대로 2경기 연속 완봉승을 거두는 등 압도적인 모습을 보이며 6년 만의 일본 시리즈 진출을 확정지었다. 일본 시리즈에서는 오릭스 버펄로스를 상대로 접전 끝에 4승 2패로 승리하며, 구단에 20년 만이자 통산 6번째 일본 시리즈 우승을 안겼다[71]. 이 우승으로 다카쓰는 현역 시절 헹가래 투수였던 선수가 같은 팀의 감독으로서 일본 시리즈 우승을 달성한 최초의 사례가 되었다.

2022년 1월 14일, 선수 부문으로 일본 야구 명예의 전당에 헌액되었다. KBO 리그, CPBL, BC 리그에서 선수 경력이 있는 인물이 명예의 전당에 들어간 것은 다카쓰가 처음이다. 히로시마현 출신으로는 16번째 헌액자이며[50][51], 이는 도쿄도의 23명에 이어 전국 2위에 해당한다. 같은 해부터 등록명을 '高津 臣吾'에서 '髙津 臣吾'로 변경했다[52]. 6월 14일에는 구단과 2년의 감독 계약 연장이 발표되었고[53], 해당 시즌 팀의 센트럴 리그 2연패를 달성했다. 또한 팀의 주축 타자 무라카미 무네타카가 일본인 선수 시즌 최다인 56홈런을 기록하고 레이와 시대 최초이자 사상 최연소 3관왕을 달성하자 "만화에서도 그릴 수 없는 일"이라고 극찬했다[54].

4. 투구 스타일

다카쓰는 사이드암 투구 폼으로 공을 던지며, 타자를 혼란스럽게 하기 위해 속도가 다른 세 종류의 싱커를 구사한다. 그의 패스트볼 구속은 시속 80mph대에 형성된다. 싱커의 속도는 다양한데, 두 종류는 시속 66mph~70mph 사이로 매우 느리다. 다카쓰는 이 공들을 스크루볼과 유사한 메커니즘으로 던지며, 때때로 체인지업으로 묘사되기도 한다. 나머지 싱커 하나는 시속 80mph까지 나온다. 그는 가끔 커브도 던진다.

다카쓰가 메이저 리그에 처음 진출했을 때, 해설자들은 그의 싱커가 일반적인 싱커에 비해 매우 느렸기 때문에 체인지업이라고 부르기도 했다. 그는 빠른 패스트볼이나 날카로운 변화구를 던지기보다는, 뛰어난 제구력을 바탕으로 타자가 스스로 아웃되도록 유도하는 스타일의 투수이다. 이는 마무리 투수로서는 흔치 않은 유형으로 평가받는다.

5. 에피소드

일본의 NHK 방송은 일본과 미국을 거쳐 대한민국에서 활약하는 다카쓰의 모습을 취재해서 다큐멘터리로 만들기로 기획했다. 이를 위해 취재 팀이 대한민국에 방한했으나, 때마침 소속 팀 우리 히어로즈가 부진해 다카쓰의 마무리 등판 기회 자체가 부여되지 않아 한동안 그가 세이브를 올리는 모습을 취재할 수 없었다. 때마침 베이징 올림픽으로 KBO 리그가 오랜 휴식 기간을 가지는 시기가 겹쳐서, NHK는 한 달 넘게 다카쓰를 취재하지 못했다.[73]

그라운드에서의 진지한 행동과는 반대로, 그라운드 밖에서는 쾌활한 캐릭터를 가진 인물이다.[55] 현역 시절에는 매년 춘계 캠프에서 아프로 헤어 가발을 쓰고 크리스탈 킹의 무슈 요시자키의 성대모사로 「대도시」를 열창하는 개인기를 후지 TV 계열의 『프로 야구 뉴스』나 『프로 야구 진 플레이·명 플레이 대상』등을 통해 선보였다.[56] 1993년에는 진 플레이 대상을 수상했다. 또한, 2020년 1군 감독 취임 후, 경기에서 우에다 츠요시가 등장곡으로 「대도시」를 사용한 타석에서 삼진으로 물러났을 때 벤치에서 "「대도시」를 틀었는데 삼진입니까"라고 말을 걸었다는 에피소드도 있다.

장남도 한때 니가타 메이쿤 고등학교, 무사시 대학에서 사이드스로 투수로 활약했다.[57][58]

2022년부터 성을 기존의 "다카쓰"에서 "타카쓰"로 변경했다.[59]

필체가 좋으며, 야쿠르트의 감독으로서 팬이나 선수에게 보낸 메시지 등을 [https://twitter.com/swallowspr 구단 공식 트위터]가 사진 촬영하여 공개하고 있다.[60] 서예 경험은 없다.[61]

6. 상세 정보



어린 시절 히로시마 도요 카프 팬이었던 다카쓰는 고교와 대학 시절에는 주로 백업 투수였다. 1990년 드래프트 3라운드로 도쿄 야쿠르트 스왈로스에 입단한 후, 1993년부터 팀의 마무리 투수로 활약하며 팀의 일본 시리즈 우승에 기여했다. 일본 프로 야구(NPB)에서 네 차례 최우수 구원 투수 타이틀을 차지하고 통산 최다 세이브 기록을 세우는 등 리그를 대표하는 마무리 투수로 명성을 떨쳤다.

2004년 MLB 시카고 화이트삭스에 자유 계약 선수로 입단하여 미국 무대에 도전, 첫해 인상적인 활약을 보이며 아메리칸 리그 신인왕 투표 2위에 올랐다. 이후 뉴욕 메츠를 거쳐 일본으로 복귀했다.

2008년에는 KBO 리그우리 히어로즈와 계약하여 한국 무대에서 활동했으며[3], NPB, MLB, KBO 리그에서 모두 세이브를 기록한 첫 투수가 되었다.[4] 2009년에는 샌프란시스코 자이언츠 산하 마이너 리그 팀과 계약했고[5], 2010년에는 대만 프로 야구 리그(CPBL)의 싱농 불스에 입단하여 NPB, MLB, KBO, CPBL 4개 리그를 모두 경험한 최초의 일본인 선수가 되었다.

선수 생활 말년에는 일본 독립 리그에서 선수 겸 감독으로 활동했으며, 은퇴 후에는 해설가를 거쳐 2014년부터 친정팀 도쿄 야쿠르트 스왈로스 코치로 지도자 생활을 시작했다. 2020년에는 1군 감독으로 부임하여 2021년 팀을 일본 시리즈 우승으로 이끌었다. 이러한 선수 및 지도자로서의 공로를 인정받아 2022년 일본 야구 명예의 전당에 헌액되었다.

6. 1. 출신 학교

히로시마 시립 단바라 초등학교에 입학하기 전에 히지야마 정의 신축 맨션으로 이사했다. 이후 장훈 등을 배출한 히로시마 시립 단바라 중학교를 거쳐[13][14], 집 근처의 히로시마 현립 히로시마 공업고등학교에 진학했다. 고등학교 3학년 때 봄과 여름 고시엔 대회에 출전했지만, 대기 투수였기 때문에 등판 기회는 없었고 야수로서 출전하기도 했다.[64]

아시아 대학 시절에는 당시 대학 야구를 대표하는 좌완 투수였던 고이케 히데오의 뒤를 잇는 2번째 투수였다. 도토대학 리그 통산 40경기에 등판해 11승 15패, 평균자책점 2.34, 140개의 탈삼진을 기록했다. 대학 시절 내내 백업 투수였다는 기록도 있다.

6. 2. 선수 경력



다카쓰는 히로시마 시립 단바라 초등학교 입학 전 히지야마 정으로 이사했으며, 집 창문으로 히로시마 시민 구장이 보였다. 어린 시절부터 시민 구장을 자주 방문하며 히로시마 도요 카프 선수들을 동경했고, 특히 야마모토 코지의 팬이었다.[11] 초등학교 3학년 때 지역 연식 야구팀에서 야구를 시작했다. 히로시마 시립 단바라 중학교를 거쳐 히로시마 공업고등학교에 진학했다.

히로시마 공업고등학교 시절, 투구폼을 스리쿼터에서 언더스로로 변경했다. 1986년에는 백업 투수 겸 1루수로 봄, 여름 고시엔에 연속 출전했다. 봄 고시엔에서는 준준결승까지 진출했고, 여름 고시엔에서는 3회전에서 탈락했다. 고시엔 본선 등판은 없었지만, 히로시마 대회에서는 4경기에 등판해 팀의 고시엔 진출에 기여했다.

고교 졸업 후 아시아 대학에 진학하여 동기 코이케 히데로와 함께 투수진의 주축으로 활약했다. 도토 대학 야구 리그에서는 1990년 춘계와 추계 리그 연속 우승을 경험했다. 같은 해 전일본 대학 야구 선수권 대회에서도 우승을 차지했다. 대학 2학년 때 구속 향상을 위해 투구폼을 언더스로에서 사이드스로로 수정하며 싱커를 익히게 되었다. 리그 통산 40경기에 등판하여 11승 15패, 평균자책점 2.34, 140탈삼진을 기록했다.

대학 졸업 후 히로시마 도요 카프 입단을 원했으나 영입 제의는 없었고, 사회인 야구 팀 미쓰비시 중공 히로시마에 내정되어 있었다. 그러나 야쿠르트 스왈로스의 스카우트 카타오카 히로오의 눈에 띄어[15][16], 1990년 드래프트 회의에서 야쿠르트에 3위로 지명되었다. 계약금 5500만, 연봉 700만(추정)에 입단했으며[17][18], 등번호는 '''22'''번을 받았다.

=== 일본 프로 야구 시절 (1기) ===

입단 초기에는 선발 투수로 기대를 받았으나, 결정구 부족으로 두각을 나타내지 못했다. 1992년 가을 캠프에서 노무라 가쓰야 감독의 지시로 느린 싱커를 습득한 것이 전환점이 되었다[19][20][21].

1993년 5월 2일 요미우리 자이언츠전에서 마쓰이 히데키에게 프로 첫 홈런을 허용했지만[22], 팀 리드를 지켜내며 프로 첫 세이브를 기록했다. 그 해 여름부터 느린 싱커를 활용한 투구가 효과를 보이며[23][24] 마무리 투수로 자리 잡았고, 당시 구단 신기록인 20세이브를 올리며 팀의 리그 우승에 기여했다. 일본 시리즈에서는 세이부 라이온즈를 상대로 3세이브를 기록하며 팀 우승을 이끌었고, 헹가래 투수가 되었다.

1994년에는 처음으로 최우수 구원 투수 타이틀을 획득했다. 1995년에는 자신의 기록을 경신하는 28세이브를 올리며 리그 우승과 일본 시리즈 우승에 공헌했고, 다시 한번 헹가래 투수가 되었다. 1996년에는 21세이브를 기록했으나 개인 최다인 6패를 당하며 다소 부진했다. 1997년 시즌 초반 부진으로 선발과 중간 계투를 오갔으나, 후반기에 안정을 되찾아 이토 토모히토, 가토 히로토와 함께 셋업 및 마무리 역할을 수행하며 팀의 리그 우승과 일본 시리즈 우승에 기여, 세 번째 헹가래 투수가 되었다. 1998년에는 다시 마무리 투수를 맡았지만 42경기 2승 3패 3세이브, 평균자책점 5.56으로 부진했다.

와카마쓰 쓰토무 감독이 부임한 1999년, 코칭스태프의 선발 전향 제안을 거절하고 마무리 투수직을 고수했다[28]. 그 결과 30세이브를 기록하며 5년 만에 두 번째 최우수 구원 투수 타이틀을 획득, 성공적으로 부활했다. 2001년에는 개인 최다인 37세이브를 올리며 세 번째 최우수 구원 투수 타이틀을 차지했고, 팀의 리그 우승과 일본 시리즈 우승에 크게 기여하며 네 번째 헹가래 투수가 되었다. 일본 시리즈 통산 세이브 기록을 8개로 늘렸고, 시리즈 통산 무실점 기록도 이어갔다. 2003년에는 사사키 가즈히로의 통산 229세이브 기록을 경신하며 일본 프로 야구 통산 세이브 신기록을 세웠고, 3년 연속 최우수 구원 투수 타이틀을 획득했다. 시즌 종료 후 FA권을 행사했다.

=== 메이저 리그 시절 ===

2003년 11월, 시카고 화이트삭스와 연봉 75만달러의 1년 계약(2년차 구단 옵션)을 맺고 메이저 리그에 진출했다. 등번호는 '''10'''번을 받았다.

2004년 4월 9일 뉴욕 양키스전에서 데뷔하여 첫 타자로 마쓰이 히데키를 상대했다. 5월 1일 토론토 블루제이스전에서 메이저 리그 첫 승을, 6월 12일 애틀랜타 브레이브스전에서 첫 세이브를 기록했다. 이후 빌리 코치를 대신해 마무리 투수를 맡았다. 4월 23일부터 6월 29일까지 24경기 연속 무실점을 기록하며 현지 언론으로부터 '''미스터 제로'''(Mr. Zero)라는 별명을 얻었다. 당시 감독 아지 기옌은 "마리아노 리베라를 데려오지 않는 한, 신고는 우리에게 최고의 마무리 투수"라고 극찬했다[29]. 시즌 최종 성적은 리그 구원 투수 중 3위인 WHIP 0.98, 공동 8위인 평균자책점 2.31, 19세이브(20번의 기회 중 1번 실패)를 기록했다. 시즌 후 구단은 옵션을 행사하여 연봉 250만달러의 1년 계약을 연장했다.

2005년 시즌 초반에도 마무리로 기용되었으나, 4월 7일 클리블랜드 가디언스전에서 1이닝 3피홈런을 허용하는 등 구원 실패가 잦았다. 특히 5월까지 14.1이닝 동안 7개의 홈런을 내주었다. 6월에는 평균자책점 0.96, WHIP 0.75로 잠시 회복세를 보였으나, 7월 들어 평균자책점 12.60, WHIP 2.20으로 다시 부진에 빠졌다. 결국 7월 18일 지명할당되었고, 8월 1일 방출되었다.

8월 12일 뉴욕 메츠와 마이너 계약을 맺고 9월 1일 메이저 리그로 승격되었으나, 시즌 종료 후 FA가 되어 팀을 떠났다. 그 해 시카고 화이트삭스2005년 월드 시리즈에서 우승하면서 챔피언 링을 받았다.

=== 일본 프로 야구 시절 (2기) ===

2006년, 선수 겸 감독으로 부임한 옛 동료 후루타 아쓰야의 부름을 받고 스프링 캠프 입단 테스트를 거쳐 3년 만에 야쿠르트에 복귀했다[30][31]. 등번호는 '''11'''번을 달았다. 시즌 초반에는 중간 계투로 뛰었으나, 이시이 히로토시이가라시 료타의 부상 이탈로 여름부터 다시 마무리 투수를 맡았다. 10월 7일 히로시마 도요 카프전(메이지 진구 야구장)에서 미일 통산 300세이브를 달성했다. 이는 사사키 가즈히로에 이어 일본인 선수로는 역대 2번째 기록이었다. 시즌 최종 13세이브(팀 내 최다)를 기록했다. 시즌 후 등번호를 예전의 '''22'''번으로 변경했다.

2007년에도 마무리 투수로 시즌을 시작했으나, 6월 30일 주니치 드래건스전 등판 후 숙소에서 넘어져 왼발 엄지 발가락 골절(전치 3주) 부상을 당해 전력에서 이탈했다[32]. 복귀 후 구원 실패가 반복되면서 8월 중순 다시 2군으로 내려갔고, 약 1개월 후 1군에 복귀했지만 등판 기회는 줄었다. 시즌 성적은 13세이브, 5패, 평균자책점 6점대로 부진했다. 시즌 최종전 다음 날인 10월 10일, 구단으로부터 갑작스럽게 전력 외 통보를 받았다[33]. 사전 통보나 팬들에게 작별 인사를 할 기회 없이 방출된 것에 대해 비판이 일었고, 구단 사장이 사과문을 발표하는 사태로 이어졌다[35]. 다카쓰는 현역 연장 의사를 밝혔으나, 12개 구단 합동 트라이아웃 참가는 거부했고[36], 영입 제의를 받지 못해 11월 30일 자유 계약 선수로 공시되었다.

=== 미국 마이너 리그 및 한국 프로 야구 시절 ===

2008년 1월 18일, 시카고 컵스와 마이너 리그 계약을 맺고 스프링 트레이닝에 초청 선수로 참가했으나[1], 시범 경기 부진(5경기 4.1이닝 평균자책점 9.64)으로 3월 11일 방출되었다[2]. 이후 시카고 화이트삭스 입단 테스트를 받았지만 불합격했다.

같은 해 6월 13일, KBO 리그우리 히어로즈와 계약금 6만달러, 연봉 12만달러에 계약하며 한국 프로 야구 4번째 일본인 선수가 되었다[3]. 6월 24일 첫 등판했고, 6월 29일에는 첫 세이브를 기록하며 NPB, MLB, KBO 세 리그에서 모두 세이브를 기록한 최초의 투수가 되었다[4]. 시즌 최종 성적은 18경기 1승 0패 8세이브, 평균자책점 0.86, WHIP 1.00으로 좋은 활약을 펼쳤으나, 시즌 후 고질적인 허리 부상을 이유로 재계약에 실패하고 방출되었다.

2009년 5월, 샌프란시스코 자이언츠와 마이너 리그 계약을 맺었다[5]. 당시 만 40세 7개월로, 일본인 최고령 계약 기록이었다. 7월 트리플 A팀 프레즈노 그리즐리스에 합류했지만 메이저 리그 승격은 하지 못했다.

=== 대만 프로 야구 시절 ===

2010년 1월, 대만 프로 야구 리그(CPBL)의 싱농 불스와 계약하며 NPB, MLB, KBO, CPBL 4개 리그를 모두 경험한 최초의 일본인 선수가 되었다. 등번호는 야쿠르트 시절과 같은 '''22'''번을 사용했다. 6월 12일 리그 1위인 13세이브를 기록하며 팀의 전기 리그 우승을 확정짓고 헹가래 투수가 되었다. 시즌 종료 후 11월 26일, 싱농 불스로부터 재계약 불가 통보를 받았다[66].

=== 일본 독립 리그 시절 ===

2011년 1월 24일, 일본 베이스볼 챌린지 리그의 니가타 알비렉스 베이스볼 클럽에 입단했다[67][68][38]. 등번호는 계속 '''22'''번을 사용했다. 명구회 회원이 독립 리그에서 뛰는 것은 최초였다[69][39]. 2011년 시즌에는 27경기에 등판하여 0승 2패 16세이브, 평균자책점 2.16을 기록하며 리그 세이브 1위에 올랐다.

2012년부터 니가타 팀의 선수 겸 감독으로 부임했다[70][41]. 8월 31일, 시즌 종료 후 현역 은퇴를 발표했다[42]. 9월 22일 나가오카 시 유큐잔 야구장에서 열린 시나노 그랜드세로우스와의 홈 경기가 은퇴 경기로 치러졌고, 9회 2사 상황에 등판하여 마지막 타자를 처리했다. 경기 후 열린 은퇴식에서는 야쿠르트 시절 배터리를 이뤘던 후루타 아쓰야에게 마지막 공을 던졌다[43]. 감독으로서는 팀을 BC 리그 첫 우승 및 시코쿠 아일랜드 리그 plus 챔피언 가가와 올리브 가이너스와의 그랜드 챔피언십 우승으로 이끌었다. 시즌 종료 후 감독직에서 물러났으며, 그의 등번호 22번은 니가타 알비렉스 베이스볼 클럽의 영구 결번으로 지정되었다.

=== 소속팀 경력 ===

;NPB

;MLB

;KBO

;CPBL

;독립 리그

  • 니가타 알비렉스 베이스볼 클럽 (2011년 ~ 2012년)

6. 3. 지도자 경력

2012년부터 베이스볼 챌린지 리그의 니가타 알비렉스 베이스볼 클럽에서 선수 겸임 감독으로 취임했다[41]. 같은 해 8월 31일 현역 은퇴를 발표했고[42], 9월 22일 나가오카시 유큐야마 야구장에서 열린 시나노 그란세로스와의 경기를 끝으로 선수 생활을 마감했다. 감독으로서는 팀의 베이스볼 챌린지 리그 첫 우승과 시코쿠 아일랜드 리그 plus 챔피언 가가와 올리브 가이너스와의 그랜드 챔피언십 우승을 이끌었다. 시즌 종료 후 감독직에서 물러났으며, 그의 등번호 22번은 니가타 구단의 영구 결번으로 지정되었다.

은퇴 후 2013년부터는 후지 TV, 닛폰 방송, J SPORTS 등에서 야구 해설가 및 스포츠 닛폰의 야구 평론가로 활동했다[44].

2014년 시즌부터 친정팀 도쿄 야쿠르트 스왈로스의 1군 투수 코치로 복귀하여[45] 등번호 '''99'''번을 달았다. 2015년에는 팀의 투수진 안정에 기여하며 리그 우승을 도왔다[46].

2017년부터 2군 감독으로 자리를 옮겼고, 2019년 시즌 후 오가와 준지 감독이 물러나자 그의 후임으로 2020년부터 1군 감독을 맡게 되었다[47]. 등번호는 현역 시절 달았던 '''22'''번으로 변경했다[48]. 이로써 메이저 리그 경험이 있는 일본인 선수가 NPB 1군 감독이 된 것은 이구치 타다히토에 이어 두 번째이며, 일본 독립 리그 감독 경험자가 NPB 감독이 된 것은 처음이다. 또한 야쿠르트 구단에서는 세키네 쥰조 이후 31년 만의 투수 출신 감독이다.

감독 첫 해인 2020년에는 팀이 최하위에 머물렀으나, 2021년에는 팀을 6년 만의 센트럴 리그 우승으로 이끌며 구단 역사상 첫 투수 출신 우승 감독이 되었다[49]. CS 파이널 스테이지에서도 승리하여 일본 시리즈에 진출했다. 2021년 일본 시리즈에서는 오릭스 버펄로스를 4승 2패로 꺾고 20년 만의 일본 시리즈 우승을 달성했다. 선수 시절 헹가래 투수였던 그가 감독으로서 같은 팀의 일본 시리즈 우승을 이끈 최초의 사례가 되었다.

2022년 1월 14일, 일본 야구 명예의 전당에 선수 부문으로 헌액되었다. KBO, CPBL, BC 리그 경력이 있는 선수가 명예의 전당에 들어간 것은 다카쓰가 처음이다. 히로시마현 출신으로는 16번째 헌액자이며[50][51], 이는 도쿄도(23명)에 이어 전국 2위에 해당한다. 같은 해 등록명을 '高'에서 '髙'로 변경했으며[52], 6월에는 2년 계약 연장을 발표했다[53]. 2022년 시즌에도 팀의 센트럴 리그 2연패를 이끌었다. 팀의 주포 무라카미 무네타카가 일본인 시즌 최다 홈런(56개) 및 최연소 트리플 크라운을 달성하자 "만화에도 그려지지 않을 일"이라며 극찬했다[54].

지도자 경력 요약
소속팀직책기간
니가타 알비렉스 베이스볼 클럽선수 겸임 감독2012년
도쿄 야쿠르트 스왈로스1군 투수 코치2014년 ~ 2016년
도쿄 야쿠르트 스왈로스2군 감독2017년 ~ 2019년
도쿄 야쿠르트 스왈로스1군 감독2020년 ~ 현재


6. 4. 수상·타이틀 경력

일본 프로 야구 시절 네 차례 최우수 구원 투수 타이틀을 차지했으며(1994년, 1999년, 2001년, 2003년), 2003년에는 사사키 가즈히로가 가지고 있던 일본 프로 야구 통산 최다 세이브 기록을 경신했다.[27] 일본 시리즈에서는 통산 11경기에 등판하여 역대 최다인 8세이브를 기록하는 동안 단 한 점도 실점하지 않는 완벽한 투구를 선보였다.

MLB에 진출한 첫 해인 2004년에는 시카고 화이트삭스 소속으로 19세이브를 올리며 아메리칸 리그 신인왕 투표에서 2위를 차지하기도 했다. 2006년 도쿄 야쿠르트 스왈로스로 복귀한 뒤에는 미일 통산 300세이브를 달성했는데, 이는 사사키 가즈히로에 이어 일본 선수로는 두 번째 기록이다.

2022년 1월 14일, 선수 시절의 뛰어난 업적을 인정받아 일본 야구 전당에 헌액되었다.[72] 이는 한국프로야구CPBL에서 활약했던 선수로는 최초의 사례이기도 하다.[72]

6. 4. 1. 타이틀

6. 4. 2. 수상


  • 월간 MVP: 2회 (2000년 5월, 2001년 8월) ※투수 부문
  • 파이어맨상: 3회 (1994년, 1999년, 2001년)
  • JA 전농 Go·Go상: 1회 (구원상: 1995년 7월)
  • 일본 시리즈 우수 선수상: 2회 (1993년, 1995년)
  • 센트럴 리그 회장 특별 수상: 2회 (회장 특별상: 2003년[74], 최우수 감독상: 2021년)
  • 쇼리키 마쓰타로상: 1회 (2021년)
  • 일본 야구 전당 헌액 (플레이어 부문): 2022년[72]

참조

[1] 웹사이트 Cubs sign ex-Sox reliever Takatsu http://www.suntimes.[...]
[2] 웹사이트 The Official Site of The Chicago Cubs: Official Info: Cubs announce second round of roster cuts http://mlb.mlb.com/n[...]
[3] 웹사이트 Tsubamegun: The Tokyo Yakult Swallows – "Takatsu is a Hero" http://tokyoswallows[...]
[4] 웹사이트 Tsubamegun: The Tokyo Yakult Swallows – "Takatsu is Now a Pioneering Hero" http://tokyoswallows[...]
[5] 웹사이트 Giants Sign Shingo » NPB Tracker http://www.npbtracke[...]
[6] 간행물 新・家の履歴書 高津臣吾 文藝春秋 2011-03-03
[7] 웹사이트 高校時代は控え投手も…日本人初の4つの野球リーグを経験した通算313セーブの守護神は https://column.sp.ba[...] 2022-07-03
[8] 웹사이트 新潟アルビレックス投手・高津臣吾 http://digital.asahi[...] 2022-07-03
[9] 웹사이트 歴代最高記録 セーブ 【通算記録】 https://npb.jp/bis/h[...] 2011-06-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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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 간행물 高津臣吾超ロングインタビュー 白夜書房 2011-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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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 웹사이트 張本勲氏とヤクルト高津監督は中学の先輩後輩だった 日本一を祝福 https://www.nikkansp[...] 日刊スポーツ新聞社 2022-01-17
[14] 웹사이트 速報!マツダスタジアムそば段原の町と比治山も祝福…高津臣吾氏が野球殿堂入り、黒田博樹氏は届かず https://hirospo.com/[...] スポーツコミュニケーションズ・ウェスト 2022-01-17
[15] 웹사이트 ヤクルト支えた名スカウト・片岡宏雄さん死去 89年ドラフト、ノムさんの反対を押し切って「メガネの」古田敦也を2位で獲得 https://www.sanspo.c[...] 2021-12-22
[16] 웹사이트 「だから“プロ野球志望届”は必要ない」 元MLBスカウトがドラフト制度の問題点を指摘 https://times.abema.[...] 2021-10-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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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 웹사이트 ヤクルト・高津臣吾監督が野村監督に与えられた“転機”「シンカー投げられないか?」 https://www.fnn.jp/a[...] 2021-09-21
[20] 웹사이트 30歳高津臣吾(ヤクルト)は迷っていた「オレ、このままでいいのかな」右ヒジ痛、伊藤智仁との激戦…“2番手の男”がメジャー挑戦するまで(中溝康隆) https://number.bunsh[...] 2022-07-03
[21] 웹사이트 ヤクルト・高津臣吾監督「改革は会話から」 https://web.archive.[...] 2021-11-13
[22] 웹사이트 松井秀喜さんが始球式 5月3日の巨人―ヤクルト戦 https://www.nikkei.c[...]
[23] 웹사이트 「あれほどの大投手になるとは…」八重樫幸雄が見た高津臣吾の試行錯誤と勝負師の顔 https://sportiva.shu[...] 2021-08-15
[24] 웹사이트 「150キロの腕の振りで、100キロのシンカーを投げられないか?」野村克也の“無茶振り”が高津臣吾を守護神へと変貌させた(長谷川晶一) https://number.bunsh[...] 2022-10-10
[25] 웹사이트 イチローvs松井を拒んだノムさんの哲学。「オールスターは格式ある真剣勝負の場」 - 二宮清純コラム https://www2.myjcom.[...] 2024-08-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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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7] 서적 江川卓スカウティングレポート'99 ザ・マサダ 1999-03-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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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9] 간행물 日本スポーツ企画出版社
[30] 웹사이트 ヤクルト・高津臣吾が古巣のテストに合格し復帰【2006年2月13日】 {{!}} 野球コラム https://column.sp.ba[...] 2022-07-03
[31] 웹사이트 高津臣吾36歳と38歳…2度の“戦力外通告”も「まだやりたい気持ちはある」アメリカ、韓国、台湾…43歳で“現役最後のシンカー”を投げるまで(中溝康隆) https://number.bunsh[...] 2022-07-03
[32] 웹사이트 高津臣吾36歳と38歳…2度の“戦力外通告”も「まだやりたい気持ちはある」アメリカ、韓国、台湾…43歳で“現役最後のシンカー”を投げるまで(中溝康隆) https://number.bunsh[...] 2022-07-03
[33] 웹사이트 殿堂入り高津氏と古田氏の友情 知られざる10年前の“裏引退試合” https://www.sponichi[...] 2022-07-03
[34] 웹사이트 必ず伝えます https://archive.spor[...] 2022-07-03
[35] 웹사이트 ヤクルト球団社長、高津投手の戦力外通告めぐりHP上で謝罪 https://www.j-cast.c[...] 2022-07-03
[36] 웹사이트 2007年度自由契約選手 https://npb.jp/annou[...] 2021-07-09
[37] 웹사이트 残念... http://takatsu.laff.[...] 2010-11-26
[38] 웹사이트 高津臣吾投手入団決定のお知らせ http://www.niigata-a[...] 2011-01-24
[39] 웹사이트 旅は終わらず 高津 BC新潟入り“名球会”選手で初! https://www.sponichi[...] 2011-01-24
[40] 웹사이트 〈高津臣吾〉野球を愛し、去った男。僕は投げ続ける http://digital.asahi[...] 2011-08-22
[41] 웹사이트 新監督決定のお知らせ http://www.niigata-a[...] 2011-12-16
[42] 웹사이트 高津臣吾選手兼任監督現役引退のお知らせ http://www.niigata-a[...] 2012-08-31
[43] 웹사이트 高津 10歳次男の言葉に涙こらえきれず…引退試合 https://www.sponichi[...] 2012-09-23
[44] 웹사이트 サブマリン高津氏 スポニチ評論家就任 https://www.sponichi[...] 2013-01-23
[45] 웹사이트 投手コーチに高津氏、真中氏1軍へ ヤクルトが来季スタッフ発表 https://www.sponichi[...] 2013-10-23
[46] 웹사이트 ヤクルトの14年ぶり優勝に張本氏「ごめんなさいだね」 https://baseballking[...] フロムワン 2015-10-04
[47] 웹사이트 ヤクルト高津新監督が就任「投手陣を再建する」 https://www.asahi.co[...] 2019-10-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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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0] 웹사이트 広島県出身の殿堂入りは高津で16人目 殿堂入り未記録4県は今年も埋まらず https://hochi.news/a[...] 報知新聞社 2022-01-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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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9] 웹사이트 一軍監督になって、すぐに変えられたこととは?――髙津臣吾著『一軍監督の仕事』より本文、目次公開 https://shinsho.kobu[...] 2022-05-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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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4] 문서 당시 주전 투수는 현재 [[주고쿠 방송]](RCC)의 사원(보도기자 → 영업부 → 편성부)이었던 우에다 슌지였다。
[65] 서적 월간 슬러거 일본 스포츠 기획 출판사 2004-09-01
[66] 문서 다카쓰, 대만에서도 방출 통보 http://osen.mt.co.kr[...]
[67] 문서 다카쓰 신고, 일본 독립 리그 니가타 입단 http://www.mydaily.c[...]
[68] 문서 高津臣吾投手入団決定のお知らせ http://www.niigata-a[...]
[69] 문서 旅は終わらず 高津 BC新潟入り“名球会”選手で初! http://www.sponichi.[...]
[70] 문서 新監督決定のお知らせ http://www.niigata-a[...]
[71] 뉴스 야쿠르트 20년만에 통합우승, ‘前 히어로즈’ 다카쓰 감독 성공시대 https://sports.news.[...] 스포츠동아
[72] 뉴스 한국에서도 뛴 다카쓰, 일본프로야구 명예의 전당 입회 https://sports.news.[...] 연합뉴스
[73] 뉴스 "'신고'가 세이브를 '신고'하지 못하네요" https://sports.news.[...] 스포츠조선
[74] 문서 통산 세이브(세이브 포인트) NPB 신기록 달성
[75] 문서 동시에 일본 프로 야구 기록인 통산 270세이브 포인트를 달성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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