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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시카리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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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이시카리국은 1869년 홋카이도에 설치된 옛 행정 구역으로, 현재의 이시카리 지청, 소라치 지청, 유바리 지청, 가바토 지청, 우리유 지청, 가미카와 지청의 일부를 포함한다. 1869년 9개의 군으로 시작하여, 1882년 폐지될 때까지 홋카이도 개척의 중요한 역할을 했다. 에도 시대에는 마쓰마에 번의 지배를 받았으며, 메이지 시대에는 삿포로를 중심으로 홋카이도의 개발과 징병 제도가 시행되었다. 이 지역에는 다양한 신사와 불교 사찰이 존재했으며, 이시카리 도선 등 교통망이 발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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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시카리국
지도
기본 정보
국가일본
지방홋카이도
별칭호쿠몬
역사
설치1869년 8월 15일 (음력)
폐지1882년 2월 8일
율령국 시대기나이
상세 정보소라치 군 (空知郡)
가바토 군 (樺戸郡)
우라우스 군 (浦臼郡)
유바리 군 (夕張郡)
가미카와 군 (이시카리 국) (上川郡)
아사히카와 군 (旭川郡)
후라노 군 (富良野郡)
이시카리 군 (石狩郡)
아쓰타 군 (厚田郡)
하마마스 군 (浜益郡)

2. 역사

1869년 8월 15일 이시카리국이 9개의 군으로 설치되었다.[2] 1872년 인구는 6,003명이었다.[2] 1882년 홋카이도에서 국이 폐지되었다.[2]

일본서기에 따르면, 660년(사이메이 천황 6년) 3월 아베노 히라후가 원정했을 때 큰 강 하구에서 에미시와 숙신의 교전을 알았다고 하며, 이 강이 이시카리 강이라는 설[4]이 있다.

아스카 시대부터 헤이안 시대 초기에는 삿포로 군역 내(현재의 에벳시)에 스에키 등이 출토된 에벳 고분군이 축조되었다. 이는 일본 최북단의 고분이며, 이부리국치토세 군(현 에니와시)의 모요 고분군이나 북토호쿠의 말기 고분과 같은 군집분이다. 히라후가 정소·군령을 둔 시리베시는 삿포로 군역(에벳이나 삿포로) 주변이라는 설[5]이 있다. 2011년 4월에는 홋카이도 대학 구내[6]에서도 비슷한 고분(삿포로시 k39 유적)이 발견되었다. 이 시기 에미시(에미시) 사이에서는 찰문 문화도 번성했다.

가마쿠라 시대 이후 홋카이도의 일본해 측이나 사할린에는 당자라고 불리는 에미시(에조)가 있었고, 에미시 사타직·에미시 관령(무로마치 시대 이후는 에미시 관령)이 통괄했다(『스와 대명신 그림말』).

에도 시대에는 마쓰마에 번에 의해 이시카리 13개 장소, 아쓰타 장소, 하마마시케 장소 등 마쓰마에 번 가신이 에조(아이누)와 거래를 하는 지행지가 설치되었고, 각지에 운상옥 등 거래 거점이 만들어졌다. 운상옥은 번의 출장 기관 기능을 겸비하여 무육 정책('''옴샤''') 등을 행하고, 을명·소사·토산취 등 역에조의 임명과 율령서 전달, 부지미 지급(개호) 등도 이루어졌다. 아이누는 백성 신분이었다.

1644년(쇼호 원년)에는 이시카리국역을 포함한 「쇼호 어국 그림」이 작성되었고, 1688년(조쿄 5년) 미토 번주·도쿠가와 미쓰쿠니가 이시카리에 쾌풍환을 파견하여 이시카리 강 유역을 조사했다. 1700년(겐로쿠 13년) 마쓰마에 번은 에조치의 지명을 적은 '''[https://ja.wikisource.org/wiki/%E6%9D%BE%E5%89%8D%E5%B3%B6%E9%83%A1%E5%B8%B3 마쓰마에 섬 향장]'''을 막부에 제출했다. 1715년(쇼토쿠 5년) 마쓰마에 번주는 막부에 「십주도, 당태, 추프카 제도, 감찰가」는 마쓰마에 번령이라고 보고했다.

에도 시대 중기 다누마 오키쓰구 치세의 1786년(덴메이 6년) 2월, 사토 겐로쿠로는 막부에 제출한 에조치 조사 보고서에서 에조치는 곡물 재배를 금지하고 있으며, 가미카와군역에서 아이누가 미작을 한 곳은 일본인이 벼·종자를 몰수하고 변상시켰다고 적고 있다. 산 속에서 를 재배하는 사람도 있었다. 1792년(간세이 4년) 이시카리 장소에서 막부에 의한 어구 거래가 이루어졌는데, 이는 에조(아이누)에게 유리한 거래였다.[7]

에도 시대 후기 이시카리국역은 서에조치에 속했다. 1807년(분카 4년) 국방상의 이유로 서에조치도 공의어료(막부 직할령)가 되었고, 이후 전에조치 아이누의 종문인별개장 (호적)이 작성되었다. 막리마미야 린조1803년(교와 3년) 연안부를 측량했고, 1811년(분카 8년) 가미카와 군역을 조사했다. 1821년(분세이 4년) 마쓰마에 번령으로 복귀했지만, 1855년(안세이 2년) 다시 천령이 되어 하마마시케(하마마스)에는 쇼나이 번이 진야를 축조해 이시카리국역을 경고했다. 토쿠히라 장소 부근에는 하코다테 부교에 의해 이시카리 역소가 설치되어, 그 범위는 가미카와 군역(현 아사히카와시) 부근까지 미쳤다. 1859년(안세이 6년) 6번 분령 이후에도 대부분은 공의어료(쇼나이 번 경고지)였지만, 하마마시케만 쇼나이 번령이 되었다.

이 무렵 가미카와 군역에서는 마쓰다 시타로나 마쓰우라 타케시로 등에 의해 소운쿄 온천이 발견되었고, 소라치 군역의 이시카리 탄전과 아쓰타 군역·보라이 주변의 유전이 이시카리 역소의 아라이 킨스케에 의해 발견되었다. 1866년(게이오 2년) 삿포로군역에서는 미이즈미 조잔에 의해 조잔케이 온천에 탕치장이 열리거나, 삿포로 원촌이 열릴 때 오토모 카메타로에 의해 오토모 보리(후의 창성천)가 개착되었다.

1869년 7월부터 6군이 도외의 이나 사족, 사원 등에 의해 분령 지배되었고, 개척사 직할령은 삿포로, 아쓰타, 가미카와의 3군이었다. 같은 해 8월 15일(9월 20일) 이시카리국 9군이 제정되어 100개 촌이 속했다. 9월 21일 홋카이도 신궁이 창건되었고, 10월 이시카리국에서 장소 청부제가 폐지되었다.

1870년-1871년) 본원사 도로가 건설되었고, 삿포로 군 내(후의 삿포로시미나미구 렌마이)에 숙소로 렌마이 통행옥이 놓였다. 1871년 5월 개척사청이 하코다테에서 삿포로로 이전했고, 7월 14일(8월 29일) 폐번치현이 단행되었다. 8월 20일(10월 4일) 홋카이도의 분령 지배가 폐지되어 전역이 개척사 관할이 되었다.

1872년 삿포로 농학교가 개교했고, 임신호적이 편제되었다. 4월 9일(5월 15일) 전국 일률적으로 호장·부호장을 설치했고, 10월 10일(11월 10일) 대구소구제가 시행되었다. 12월 2일(1872년12월 31일) 덴포력에서 그레고리력으로 개력했다.

1872년-1873년) 삿포로 본도가 건설되었고, 1875년 5월 삿포로 교외 고토니 병촌 입지를 시작으로 둔전이 시작되었다. 1879년 7월 23일 군구정촌 편제법이 시행되었고, 1880년 11월 28일 관영 호로나이 철도·테미야-삿포로 간이 개업했다.

1882년 2월 8일 폐사치현에 따라 삿포로현 소관이 되었고, 6월 25일 관영 호로나이 철도 삿포로 - 에벳 간이 가개업하고, 11월 13일 테미야 - 호로나이 간이 전선 통과했다. 1885년 8월 이와미자와 신사가 창건되었고, 1893년 7월 15일 가미카와 신사가 창건되었다. 1896년 5월 가미카와군에서 둔전병을 모체로 한 육군제7사단이 편성되어, 이시카리국에서 징병제도가 시행되었다.

2. 1. 이시카리국 설치 이전

일본서기에 따르면, 사이메이 천황 6년(660년) 3월 아베노 히라후가 원정했을 때 큰 강의 하구에서 에미시와 숙신의 교전을 알았다고 하며, 이 큰 강이 이시카리 강에 해당한다는 설[4]이 있다.

아스카 시대부터 헤이안 시대 초기에는 에미시 정벌이 활발하게 이루어졌으며, 삿포로 군역 내(현재의 에벳시)에서는 스에키 등의 부장품이 발견된 에벳 고분군이 축조되었다. 이는 현재 확인된 것 중에서는 일본 최북단의 고분이며, 그 구조는 이부리국치토세 군(현 에니와시)의 모요 고분군이나 북토호쿠의 말기 고분과 마찬가지인 군집분이다. 히라후가 정소·군령을 둔 시리베시(후시리베시)는 삿포로 군역(에벳이나 삿포로) 주변이라는 설[5]이 있다. 2011년 4월에는 홋카이도 대학 구내[6]에서도 비슷한 고분(삿포로시 k39 유적)이 발견되었다. 또한, 이 시기 에미시(에미시) 사이에서는 찰문 문화도 번성했다고 한다.

가마쿠라 시대 이후 홋카이도의 일본해 측이나 사할린에는 당자라고 불리는 에미시(에조)가 있었고, 당자는 에미시 사타직·에미시 관령(무로마치 시대 이후는 에미시 관령)이 통괄하고 있었다(『스와 대명신 그림말』).

에도 시대 무렵에는 마쓰마에 번에 의해 이시카리 13개 장소, 아쓰타 장소, 하마마시케 장소 등 마쓰마에 번 가신이 에조(아이누)의 사람들과 거래를 하는 지행지가 설치되었고, 각지에 운상옥 등 거래 거점이 만들어졌다. 운상옥은 번의 출장 기관 기능을 겸비하여 무육 정책('''옴샤''') 등을 행하고, 을명·소사·토산취 등 역에조의 임명과 율령서의 전달, 부지미의 지급(개호) 등도 이루어졌다. 아이누의 사람들은 백성 신분에 위치했다.

장소와 후의 군의 상대는 다음과 같다.

장소후의 군비고
이시카리 13개 장소이시카리 강 하구 주변 및 이시카리 강 본지류 관할
토쿠히라 장소이시카리군이시카리 강 좌안 하구 부근
핫샤브 장소삿포로군이시카리 강(현·이바라토 강) 좌안, 핫사무 강 합류 지점 부근, 현 삿포로시기타구
시노로 장소삿포로군이시카리 강(현·이바라토 강) 좌안, 시노로 강 합류 지점 부근, 현 삿포로시 기타구
나이호우 장소삿포로군후시코 강 상류 부근, 현 삿포로시 히가시구
상삿포로 장소삿포로군도요히라 강 유역, 현 삿포로시
하삿포로 장소삿포로군도요히라 강 유역, 현 삿포로시
상쓰이시카리 장소삿포로군 등이시카리 강 좌안, 도요히라 강(현·세타도요히라 강) 합류 지점 부근, 현 에벳시 등
하쓰이시카리 장소삿포로군 등이시카리 강 좌안, 도요히라 강(현·세타도요히라 강) 합류 지점 부근, 현 에벳시 등
상유바리 장소유바리군 부근유바리 강 유역
하유바리 장소유바리군 부근유바리 강 유역
상카바토 장소소라치군 부근가바토 강 합류점에서 상류, 현 우타시나이시, 다키카와시
하카바토 장소가바토군 부근가바토 강 합류점에서 하류 쓰이시카리까지, 현 에벳시 시노쓰, 신시노쓰 촌, 우라우스 정 등
슈마마프 장소삿포로군(현 기타히로시마시) 및 이부리국치토세군 북부(현 에니와시) 등시마마쓰 강 유역
아쓰타 장소아쓰타군
하마마시케 장소하마마스군



에도 시대 초기인 쇼호 원년(1644년)에는 이시카리국역을 포함한 「쇼호 어국 그림」이 작성되었고, 조쿄 5년에는 미토 번주·도쿠가와 미쓰쿠니가 이시카리에 쾌풍환을 파견하여 이시카리 강 유역을 조사했다. 겐로쿠 13년에는 마쓰마에 번이 에조치의 지명을 적은 '''[https://ja.wikisource.org/wiki/%E6%9D%BE%E5%89%8D%E5%B3%B6%E9%83%A1%E5%B8%B3 마쓰마에 섬 향장]'''을 작성해 막부에 제출했다. 쇼토쿠 5년(1715년)에는 마쓰마에 번주가 막부에 대해 「십주도, 당태, 추프카 제도, 감찰가」는 마쓰마에 번령이라고 보고했다.

에도 시대 중기 다누마 오키쓰구 치세의 덴메이 6년 2월, 사토 겐로쿠로는 막부에 제출한 에조치 조사 보고서에서 에조치는 곡물 재배를 금지하고 있으며, 가미카와군역에서 아이누가 미작을 한 곳은 일본인이 벼·종자를 몰수하고 변상시켰다고 적고 있다. 산 속에서 를 재배하고 있는 사람도 있었다고 한다.

간세이 4년 이시카리 장소에서도 막부에 의한 어구 거래가 이루어졌다. 이는 에조(아이누)에게 유리한 거래로, 노인·어린이에게 지급미를, 빈자에게 수당을 주었다고 한다(『에조 초지 후편』[7]).

에도 시대에서 메이지 시대 초기에 걸쳐 육상 교통[8]은 이시카리 만 해안을 통과하는 도지마국에서 데시오국마시케 군으로의 길(국도 231호 등의 전신)의 도중이 되고 있었고, 이시카리군에서는 안세이 연간에는 이미 장소 청부인에 의해 이시카리 강을 건너는 이시카리 도선이 운영되고 있었다. 아쓰타군의 농칠 산도, 하마마스군의 송모 산도, 하마마스군에서 데시오국마시케 군에 이르는 마시케 산도 등도 개착되었다. 안세이 연간에는 고시리국오타루 군의 젠바코에서 삿포로 군을 거쳐 이부리국치토세 군에 이르는 삿포로월 신도(치토세 신도)도 하코다테 부교의 명령을 받은 오타루 장소 청부인·에비스야 한베에, 이시카리 장소 청부인·아베야 하쿠지로, 유후쓰 장소 청부인·야마다 분에몬 등에 의해 개착되었고, 이때 시무라 테츠이치와 요시다 시게야가 도요히라 강의 뱃사공이 되었다. 젠바코에서 현재의 삿포로 시내까지는 국도 5호, 삿포로 시내에서 치토세까지는 삿포로 본도·국도 36호의 전신이다. 이 외에, 문화 연간에 데시오국의 루모이에서 니세바루마, 에타이베츠를 거쳐 이시카리 강 유역의 시라리카(가바토군과 우류군의 경계의 강)에 이르는 약 25리(98.2km)의 우류월도 야마다 분에몬에 의해 개착되고 있다. 또한, 이시카리 국내의 하천에는 번정 시대부터 폐사치현까지 8개소의 도선장이 있어 이시카리 도선을 비롯한 나룻배 등도 운행되고 있었다.

해상 교통은 아쓰타 등에 키타마에 부네가 기항하고 있었다.

에도 시대 후기에는 이시카리국역은 서에조치에 속했다. 분카 4년 국방상의 이유로 서에조치(당자 에조 거주지인 홋카이도 일본해안·오호츠크 해안·사할린)도 공의어료(막부 직할령)로 하고, 이후 전에조치의 아이누의 종문인별개장 (호적)이 작성되게 된다. 막리마미야 린조교와 3년(1803년) 연안부의 측량을 실시, 분카 8년(1811년)에는 가미카와 군역을 조사했다. 분세이 4년에는 일단 마쓰마에 번령으로 복귀했지만, 안세이 2년 다시 천령이 되어 하마마시케(하마마스)에는 쇼나이 번이 진야를 축조해 이시카리국역의 경고를 했다. 또한, 토쿠히라 장소 부근에는 하코다테 부교에 의해 이시카리 역소가 설치되어, 그 범위는 가미카와 군역(현 아사히카와시) 부근까지 미쳤다. 마쓰우라 타케시로는 고카 3년 이시카리, 안세이 3년 이시카리군·삿포로군·가바토군·우류군, 안세이 4년 이시카리·삿포로·가바토군·우류군·가미카와군·소라치군, 안세이 4년 이시카리군·삿포로군·가바토군·우류군·가미카와군·소라치군·하마마스군·아쓰타군·유바리군, 안세이 5년 이시카리군·삿포로군·가바토군·가미카와군·소라치군을 방문하고 있다. 안세이 6년의 6번 분령 이후에도 대부분은 공의어료(쇼나이 번 경고지)인 채였지만, 하마마시케만 쇼나이 번령이 되었다.

이 무렵 가미카와 군역에서는 마쓰다 시타로나 마쓰우라 타케시로 등에 의해 소운쿄 온천이 발견되었고, 소라치 군역의 이시카리 탄전과 아쓰타 군역·보라이 주변의 유전이 이시카리 역소의 아라이 킨스케에 의해 발견되고 있다. 또한, 게이오 2년의 삿포로군역에서는 미이즈미 조잔에 의해 조잔케이 온천에 탕치장이 열리거나, 삿포로 원촌이 열릴 때 오토모 카메타로에 의해 오토모 보리(후의 창성천)가 개착되고 있다.

게이오 4년 4월 12일에는 이시카리국역은 하코다테 부교에서 하코다테 재판소(4월 24일에 하코다테 부로 개칭)로 인계되었다.

2. 2. 이시카리국 설치와 발전

1869년 8월 15일 이시카리국이 9개의 군으로 설치되었다.[2] 1872년 인구 조사에서는 6,003명으로 나타났다.[2] 1882년 홋카이도에서 국이 폐지되었다.[2]

일본서기에 따르면, 사이메이 천황 6년(서기 659년) 3월에 아베노 히라후가 원정했을 때 큰 강의 하구에서 에미시와 숙신의 교전을 알았다고 하며, 이 큰 강이 이시카리 강에 해당한다는 설[4]이 있다.

아스카 시대부터 헤이안 시대 초기에는 삿포로 군역 내(현재의 에벳시)에 스에키 등의 부장품이 발견된 에벳 고분군이 축조되었다. 이는 현재 확인된 것 중 국내 최북단의 고분이며, 이부리국치토세 군(현 에니와시)의 모요 고분군이나 북토호쿠의 말기 고분과 마찬가지인 군집분이다. 히라후가 정소·군령을 둔 시리베시(후시리베시)는 삿포로 군역(에벳이나 삿포로) 주변이라는 설[5]이 있다. 2011년 4월에는 홋카이도 대학 구내[6]에서도 비슷한 고분(삿포로시 k39 유적)이 발견되었다. 이 시기 에미시(에미시) 사이에서는 찰문 문화도 번성했다고 한다.

가마쿠라 시대 이후 홋카이도의 일본해 측이나 사할린에는 당자라고 불리는 에미시(에조)가 있었고, 에미시 사타직·에미시 관령(무로마치 시대 이후는 에미시 관령)이 통괄하고 있었다(『스와 대명신 그림말』).

에도 시대 무렵에는 마쓰마에 번에 의해 이시카리 13개 장소, 아쓰타 장소, 하마마시케 장소 등 마쓰마에 번 가신이 에조(아이누)의 사람들과 거래를 하는 지행지가 설치되었고, 각지에 운상옥 등 거래 거점이 만들어졌다. 운상옥은 번의 출장 기관 기능을 겸비하여 무육 정책('''옴샤''') 등을 행하고, 을명·소사·토산취 등 역에조의 임명과 율령서의 전달, 부지미의 지급(개호) 등도 이루어졌다. 아이누의 사람들은 백성 신분에 위치했다.

에도 시대 초기인 1644년(쇼호 원년)에는 이시카리국역을 포함한 「쇼호 어국 그림」이 작성되었고, 조쿄 5년(1688년)에는 미토 번주·도쿠가와 미쓰쿠니가 이시카리에 쾌풍환을 파견하여 이시카리 강 유역을 조사했다. 겐로쿠 13년(1700년)에는 마쓰마에 번이 에조치의 지명을 적은 '''[https://ja.wikisource.org/wiki/%E6%9D%BE%E5%89%8D%E5%B3%B6%E9%83%A1%E5%B8%B3 마쓰마에 섬 향장]'''을 막부에 제출했다. 쇼토쿠 5년(1715년)에는 마쓰마에 번주가 막부에 대해 「십주도, 당태, 추프카 제도, 감찰가」는 마쓰마에 번령이라고 보고했다.

에도 시대 중기 다누마 오키쓰구 치세의 덴메이 6년(1786년) 2월, 사토 겐로쿠로는 막부에 제출한 에조치 조사 보고서에서 에조치는 곡물 재배를 금지하고 있으며, 가미카와군역에서 아이누가 미작을 한 곳, 일본인은 벼·종자를 몰수하고 변상시켰다고 적고 있다. 산 속에서 를 재배하고 있는 사람도 있었다고 한다. 간세이 4년(1792년) 이시카리 장소에서도 막부에 의한 어구 거래가 이루어졌는데, 이는 에조(아이누)에게 유리한 거래였다.[7]

에도 시대 후기 이시카리국역은 서에조치에 속했다. 분카 4년(1807년) 국방상의 이유로 서에조치도 공의어료(막부 직할령)가 되었고, 이후 전에조치의 아이누의 종문인별개장 (호적)이 작성되었다. 막리마미야 린조교와 3년(1803년) 연안부의 측량을 실시했고, 분카 8년(1811년)에는 가미카와 군역을 조사했다. 분세이 4년(1821년)에는 일단 마쓰마에 번령으로 복귀했지만, 안세이 2년(1855년) 다시 천령이 되어 하마마시케(하마마스)에는 쇼나이 번이 진야를 축조해 이시카리국역의 경고를 했다. 토쿠히라 장소 부근에는 하코다테 부교에 의해 이시카리 역소가 설치되어, 그 범위는 가미카와 군역(현 아사히카와시) 부근까지 미쳤다. 안세이 6년(1859년)의 6번 분령 이후에도 대부분은 공의어료(쇼나이 번 경고지)인 채였지만, 하마마시케만 쇼나이 번령이 되었다.

이 무렵 가미카와 군역에서는 마쓰다 시타로나 마쓰우라 타케시로 등에 의해 소운쿄 온천이 발견되었고, 소라치 군역의 이시카리 탄전과 아쓰타 군역·보라이 주변의 유전이 이시카리 역소의 아라이 킨스케에 의해 발견되고 있다. 게이오 2년(1866년) 삿포로군역에서는 미이즈미 조잔에 의해 조잔케이 온천에 탕치장이 열리거나, 삿포로 원촌이 열릴 때 오토모 카메타로에 의해 오토모 보리(후의 창성천)가 개착되고 있다.

메이지 2년(1869년) 7월부터 6군이 도외의 이나 사족, 사원 등에 의해 분령 지배되었고, 개척사 직할령은 삿포로, 아쓰타, 가미카와의 3군이었다. 같은 해 8월 15일(9월 20일)에 이시카리국 9군이 제정되어 100개 촌이 속했다. 9월 21일에는 홋카이도 신궁이 창건되었고, 10월에는 이시카리국에서 장소 청부제가 폐지되었다.

메이지 3~4년(1870년부터 1871년) 본원사 도로가 건설되었고, 이 때 삿포로 군 내(후의 삿포로시미나미구 렌마이)에 숙소의 하나로서 렌마이 통행옥이 놓였다. 1871년(메이지 4년) 5월에 개척사청이 하코다테에서 삿포로로 이전했고, 7월 14일(8월 29일) 폐번치현이 단행되었다. 8월 20일(10월 4일)에는 홋카이도의 분령 지배가 폐지되어 전역이 개척사의 관할이 되었다.

1872년(메이지 5년) 삿포로 농학교가 개교했고, 임신호적이 편제되었다. 4월 9일(5월 15일)에는 전국 일률적으로 호장·부호장을 설치했고, 10월 10일(11월 10일) 대구소구제가 시행되었다. 12월 2일(1872년12월 31일)에는 덴포력에서 그레고리력으로 개력했다.

메이지 5~6년(1872년부터 1873년) 삿포로 본도가 건설되었고, 1875년(메이지 8년) 5월 삿포로 교외의 고토니 병촌으로의 입지를 시작으로 둔전이 시작되었다. 1879년(메이지 12년) 7월 23일 군구정촌 편제법이 시행되었고, 1880년(메이지 13년) 11월 28일 관영 호로나이 철도·테미야-삿포로 간이 개업했다.

1882년(메이지 15년) 2월 8일 폐사치현에 따라 삿포로현의 소관이 되었고, 6월 25일 관영 호로나이 철도의 삿포로 - 에벳 간이 가개업하고, 11월 13일에는 테미야 - 호로나이 간이 전선 통과했다. 1885년(메이지 18년) 8월에는 이와미자와 신사가 창건되었고, 1893년(메이지 26년) 7월 15일 가미카와 신사가 창건되었다. 1896년(메이지 29년) 5월 가미카와군에서 둔전병을 모체로 한 육군제7사단이 편성되어, 이시카리국에서 징병제도가 시행되었다.

3. 행정 구역

군명비고
이시카리군
삿포로군1996년 9월 1일 히로시마정기타히로시마 시로 승격되면서 소멸
유바리군
가바토군
소라치군
우리유군
가미카와군
아쓰타군현재 소멸
하마마스군현재 소멸



1869년(메이지 2년) 제정 당시 영역은 현재의 홋카이도 가미카와 종합진흥국, 소라치 종합진흥국, 이시카리 진흥국 관내에서 다음을 제외하고, 오타루시 일부 (신카와 이동)를 더한 구역에 해당한다.

4. 경제

에도 시대 무렵 마쓰마에 번은 이시카리 13개 장소, 아쓰타 장소, 하마마시케 장소 등에서 아이누 사람들과 거래를 했다. 이 거래 거점은 운상옥이라고 불렸으며, 번의 출장 기관 기능도 겸하여 무육 정책('''옴샤''') 등을 시행했다. 이때 역에조의 임명과 율령서 전달, 부지미 지급(개호) 등도 이루어졌다. 아이누 사람들은 백성 신분에 위치했다.[4]

쇼호 원년(1644년)에는 이시카리국역을 포함한 「쇼호 어국 그림」이 작성되었다. 간세이 4년에는 이시카리 장소에서 막부에 의한 어구 거래가 이루어졌는데, 이는 에조(아이누)에게 유리한 거래였다.[7]

분카 4년, 국방상의 이유로 서에조치(홋카이도 일본해안·오호츠크 해안·사할린)도 공의어료(막부 직할령)가 되었다. 분세이 4년에는 일단 마쓰마에 번령으로 복귀했지만, 안세이 2년 다시 천령이 되었다. 하마마시케(하마마스)에는 쇼나이 번이 진야를 축조해 이시카리국역을 경고했다.

메이지 2년(1869년) 8월 15일 (9월 20일)에는 이시카리국 9군이 제정되었고, 10월에는 이시카리국에서 장소 청부제가 폐지되었다.

4. 1. 에도 시대

가마쿠라 시대 이후 홋카이도의 일본해 측과 사할린에는 당자라고 불리는 에미시(에조)가 있었고, 당자는 에미시 사타직·에미시 관령(무로마치 시대 이후는 에미시 관령)이 통괄하고 있었다(『스와 대명신 그림말』).

에도 시대 무렵이 되면 마쓰마에 번에 의해 이시카리 13개 장소, 아쓰타 장소, 하마마시케 장소 등 마쓰마에 번 가신이 에조(아이누) 사람들과 거래를 하는 지행지에서는, 거래 거점으로서 각지에 운상옥 등이 만들어졌다. 또한 운상옥은 번의 출장 기관 기능도 겸비해 무육 정책('''옴샤''') 등을 행하고, 이때 을명·소사·토산취 등 역에조의 임명과 율령서 전달, 부지미 지급(개호) 등도 이루어졌다. 아이누 사람들은 백성 신분에 위치했다.[4] 제도적인 것의 자세한 내용은 상장(장소)지행제 및 장소 청부제를, 어장 상황에 대해서는 홋카이도에서의 청어 어업사를 참조하기 바란다. 장소와 후의 군의 상대는 다음과 같다.

장소명관할 구역
이시카리 13개 장소이시카리 강 하구 주변 및 이시카리 강 본지류 관할
토쿠히라 장소후의 이시카리군(이시카리 강 좌안 하구 부근)
핫샤브 장소후의 삿포로군(이시카리 강(현·이바라토 강) 좌안, 핫사무 강 합류 지점 부근. 현 삿포로시기타구)
시노로 장소후의 삿포로군(이시카리 강(현·이바라토 강) 좌안, 시노로 강 합류 지점 부근. 현 삿포로시 기타구)
나이호우 장소후의 삿포로군(후시코 강 상류 부근, 현 삿포로시 히가시구)
상삿포로 장소후의 삿포로군(도요히라 강 유역, 현 삿포로시)
하삿포로 장소후의 삿포로군(도요히라 강 유역, 현 삿포로시)
상쓰이시카리 장소후의 삿포로군 등(이시카리 강 좌안, 도요히라 강(현·세타도요히라 강) 합류 지점 부근. 현 에벳시 등)
하쓰이시카리 장소후의 삿포로군 등(이시카리 강 좌안, 도요히라 강(현·세타도요히라 강) 합류 지점 부근. 현 에벳시 등)
상유바리 장소후의 유바리군 부근(유바리 강 유역)
하유바리 장소후의 유바리군 부근(유바리 강 유역)
상카바토 장소후의 소라치군 부근(가바토 강 합류점에서 상류, 현 우타시나이시, 다키카와시 등)
하카바토 장소후의 가바토군 부근(가바토 강 합류점에서 하류 쓰이시카리까지. 현 에벳시 시노쓰, 신시노쓰 촌, 우라우스 정 등)
슈마마프 장소후의 삿포로군(현 기타히로시마시) 및 후의 이부리국치토세군 북부(현 에니와시) 등, 시마마쓰 강 유역.
아쓰타 장소아쓰타군
하마마시케 장소하마마스군



에도 시대 초기 쇼호 원년(1644년)에 이시카리국역을 포함한 「쇼호 어국 그림」이 작성되었고, 조쿄 5년에는 미토 번주 도쿠가와 미쓰쿠니가 이시카리에 쾌풍환을 파견하여 이시카리 강 유역을 조사했다. 겐로쿠 13년에는 마쓰마에 번이 에조치 지명을 적은 '''[https://ja.wikisource.org/wiki/%E6%9D%BE%E5%89%8D%E5%B3%B6%E9%83%A1%E5%B8%B3 마쓰마에 섬 향장]'''을 작성해 막부에 제출했다. 쇼토쿠 5년(1715년)에는 마쓰마에 번주가 막부에 「십주도, 당태, 추프카 제도, 감찰가」는 마쓰마에 번령이라고 보고했다.

에도 시대 중기 다누마 오키쓰구 치세의 덴메이 6년 2월, 사토 겐로쿠로는 막부에 제출한 에조치 조사 보고서(「에조치의 의례는 지금까지 견문해온 바를 말씀드립니다」『에조치 일건』2)에서 에조치는 곡물 재배를 금지하고 있으며, 가미카와군역에서 아이누가 미작을 한 곳은 일본인이 벼·종자를 몰수하고 변상시켰다고 적고 있다(참고:아마미 제도의 역사#근세). 산속에서 를 재배하고 있는 사람도 있었다고 한다.

간세이 4년, 이시카리 장소에서도 막부에 의한 어구 거래가 이루어졌다. 이것은 에조(아이누)에게 유리한 거래로, 노인·어린이에게 지급미를, 빈자에게 수당을 주었다고 한다(『에조 초지 후편』[7]).

에도 시대에서 메이지 시대 초기에 걸친 교통에 대해, 육상 교통[8]은 이시카리 만 해안을 통과하는 도지마국에서 데시오국마시케 군으로의 길(국도 231호 등의 전신)의 도중이 되고 있어, 이시카리군에서는 안세이 연간에 이미 장소 청부인에 의해 이시카리 강을 건너는 이시카리 도선이 운영되었다. 아쓰타군의 농칠 산도, 하마마스군의 송모 산도, 하마마스군에서 데시오국마시케 군에 이르는 마시케 산도 등도 개척되었다. 또한, 안세이 연간에는 고시리국오타루 군의 젠바코에서 삿포로 군을 거쳐 이부리국치토세 군에 이르는 삿포로월 신도(치토세 신도)도 하코다테 부교의 명령을 받은 오타루 장소 청부인·에비스야 한베에, 이시카리 장소 청부인·아베야 하쿠지로, 유후쓰 장소 청부인·야마다 분에몬 등에 의해 개척되어, 이때 시무라 테츠이치와 요시다 시게야가 도요히라 강의 뱃사공이 되었다. 젠바코에서 현재의 삿포로 시내까지는 국도 5호, 삿포로 시내에서 치토세까지는 삿포로 본도·국도 36호의 전신이다. 이 외에, 문화 연간에 데시오국의 루모이에서 니세바루마, 에타이베츠를 거쳐 이시카리 강 유역의 시라리카(가바토군과 우류군의 경계의 강)에 이르는 약 25리(98.2km)의 우류월도 야마다 분에몬에 의해 개척되고 있다. 또한, 이시카리 국내의 하천에는 번정 시대부터 폐사치현까지 8개소의 도선장(渡船場)가 있어 이시카리 도선을 비롯한 나룻배 등도 운행되고 있었다.

해상 교통은 아쓰타 등에 키타마에 부네가 기항하고 있었다.

에도 시대 후기가 되면 이시카리국역은 서에조치에 속했다. 분카 4년, 국방상의 이유로 서에조치(당자 에조 거주지인 홋카이도 일본해안·오호츠크 해안·사할린)도 공의어료(막부 직할령)로 하고, 이후 전에조치의 아이누의 종문인별개장 (호적)이 작성되게 된다( 에도 시대의 일본의 인구 통계도 참조). 막리마미야 린조교와 3년(1803년) 연안부의 측량을 실시, 분카 8년(1811년)에는 가미카와 군역을 조사했다. 분세이 4년에는 일단 마쓰마에 번령으로 복귀했지만, 안세이 2년 다시 천령이 되어 하마마시케(하마마스)에는 쇼나이 번이 진야를 축조해 이시카리국역을 경고했다. 또한, 토쿠히라 장소 부근에는 하코다테 부교에 의해 이시카리 역소가 설치되어, 그 범위는 가미카와 군역(현 아사히카와시) 부근까지 미쳤다. 마쓰우라 타케시로는 고카 3년 이시카리, 안세이 3년 이시카리군·삿포로군·가바토군·우류군, 안세이 4년 이시카리·삿포로·가바토군·우류군·가미카와군·소라치군, 안세이 4년 이시카리군·삿포로군·가바토군·우류군·가미카와군·소라치군·하마마스군·아쓰타군·유바리군, 안세이 5년 이시카리군·삿포로군·가바토군·가미카와군·소라치군을 방문하고 있다. 안세이 6년의 6번 분령 이후에도 대부분은 공의어료(쇼나이 번 경고지)인 채였지만, 하마마시케만 쇼나이 번령이 되었다. 이 무렵 가미카와 군역에서는 마쓰다 시타로나 마쓰우라 타케시로 등에 의해 소운쿄 온천이 발견되고, 소라치 군역의 이시카리 탄전과 아쓰타 군역·보라이 주변의 유전이 이시카리 역소의 아라이 킨스케에 의해 발견되고 있다. 또한, 게이오 2년의 삿포로군역에서는 미이즈미 조잔에 의해 조잔케이 온천에 탕치장이 열리거나, 삿포로 원촌이 열릴 때 오토모 카메타로에 의해 오토모 보리(후의 창성천)가 개착되고 있다. 게이오 4년 4월 12일에 이시카리국역은 하코다테 부교에서 하코다테 재판소(4월 24일에 하코다테 부로 개칭)로 인계되었다.

4. 2. 메이지 시대 이후

메이지 2년(1869년)

  • 7월부터 6군이 도외의 이나 사족, 사원 등에 의해 분령 지배되었다. 개척사 직할령은 삿포로, 아쓰타, 가미카와의 3군이었다.
  • 8월 15일(9월 20일)에 이시카리국 9군이 제정되어, 100개 촌이 속했다.
  • 9월 21일, 홋카이도 신궁 창건.
  • 10월, 이시카리국에서 장소 청부제 폐지. 어장주가 설정되지 않음.

메이지 3~4년(1870년~1871년) 본원사 도로가 건설되었다. 이 때, 삿포로 군 내(후의 삿포로시미나미구 렌마이)에 숙소의 하나로서 렌마이 통행옥이 놓였다.

메이지 4년(1871년)
메이지 5년(1872년)
메이지 5~6년(1872년~1873년) 삿포로 본도가 건설되었다.

메이지 8년(1875년) 5월, 삿포로 교외의 고토니 병촌으로의 입지를 시작으로 둔전이 시작되었다.

메이지 12년(1879년) 7월 23일, 군구정촌 편제법 (메이지 11년 7월 22일태정관 포고 제17호) 시행.

메이지 13년(1880년) 11월 28일, 관영 호로나이 철도·테미야-삿포로 간 개업.

메이지 15년(1882년)

  • 2월 8일, 폐사치현에 따라 삿포로현의 소관이 됨.
  • 6월 25일, 관영 호로나이 철도의 삿포로 - 에벳 간이 가개업하고, 11월 13일에는 테미야 - 호로나이 간이 전선 통과.

메이지 18년(1885년) 8월, 이와미자와 신사 창건.

메이지 26년(1893년) 7월 15일, 가미카와 신사 창건.

메이지 29년(1896년) 5월, 가미카와군에서 둔전병을 모체로 한 육군제7사단이 편성되어, 이시카리국에서 징병제도가 시행되었다.

5. 종교

이시카리국의 종교는 크게 불교와 신토로 나눌 수 있다.

에도 시대에는 이시카리군(이시카리시)의 에너지사를 비롯한 4개의 사찰, 삿포로군에서는 본원사 삿포로 별원(삿포로시 주오구)의 전신인 서본원사 삿포로 출장소와 삿포로 모토무라(삿포로시 히가시구)의 본룡사, 아쓰타군의 고류지, 하마마스군의 다이신지 등이 건립되었다. 게이오 연간에는 삿포로 모토무라의 본룡사 경내에 묘켄당이 건립되었다.

신사는 겐로쿠 7년(1694년)에 창건된 이시카리 벤텐샤, 덴포 연간(1830년~1844년)에 존재했던 하마마스 신사, 가에이 원년(1848년)에 창립된 아쓰타 신사, 안세이 연간(1854년~1860년)에 창립된 이시카리 하치만 신사, 시노로 신사, 핫사무 신사 등이 있다. 아사히카와의 진수, 가미카와 신사의 구 사격현사이며, 현재는 별표 신사에 가입되어 있다.[1]

이시카리 지역의 주요 신사는 다음과 같다.[1]


  • 이시카리군 이시카리 벤텐샤(이시카리시)
  • 이시카리군 이시카리 하치만 신사(이시카리시)
  • 삿포로군 와카미야 하치만→시노로 하치만 신사(현 시노로 신사, 삿포로시 기타구)
  • 삿포로군 이나리샤→이나리 신사(현 핫사무 신사, 삿포로시 니시구)
  • 가미카와군 가미카와 신사(아사히카와시)
  • 아쓰타군 아쓰타 신사(이시카리시 아쓰타구)
  • 하마마스군 이나리 신사(현 하마마스 신사, 이시카리시 하마마스구)


이치노미야(一宮)는 지역에서 가장 격이 높은 신사를 의미한다. 홋카이도 신궁과 이와미자와 신사(소라치 이치노미야)가 이치노미야로 불린다.[1] 전국 일궁회에서는 홋카이도 신궁(삿포로시 주오구)을 "에조국 신 일궁"으로 인정하고 있다.[1]

5. 1. 불교

에도 시대에 이시카리군(이시카리시)의 에너지사를 비롯한 4개의 사찰, 삿포로군에서는 본원사 삿포로 별원(삿포로시 주오구)의 전신인 서본원사 삿포로 출장소와 삿포로 모토무라(삿포로시 히가시구)의 본룡사, 아쓰타군의 고류지, 하마마스군의 다이신지 등이 건립되었다. 또한 게이오 연간에는 삿포로 모토무라의 본룡사 경내에 묘켄당이 건립되었다.

5. 2. 신토

신사는 겐로쿠 7년(1694년)에 창건된 이시카리 벤텐샤, 덴포 연간(1830년~1844년)에 존재했던 하마마스 신사, 가에이 원년(1848년)에 창립된 아쓰타 신사, 안세이 연간(1854년~1860년)에 창립된 이시카리 하치만 신사, 시노로 신사, 핫사무 신사 등이 있다. 또한 아사히카와의 진수, 가미카와 신사의 구 사격현사이며, 현재는 별표 신사에 가입되어 있다.[1]

  • 이시카리군 이시카리 벤텐샤(이시카리시)[1]
  • 이시카리군 이시카리 하치만 신사(이시카리시)[1]
  • 삿포로군 와카미야 하치만→시노로 하치만 신사(현 시노로 신사, 삿포로시 기타구)[1]
  • 삿포로군 이나리샤→이나리 신사(현 핫사무 신사, 삿포로시 니시구)[1]
  • 가미카와군 가미카와 신사(아사히카와시)[1]
  • 아쓰타군 아쓰타 신사(이시카리시 아쓰타구)[1]
  • 하마마스군 이나리 신사(현 하마마스 신사, 이시카리시 하마마스구)[1]


; 이치노미야 이하

홋카이도 신궁과 이와미자와 신사(소라치 이치노미야)가 이치노미야로 불린다.[1]

※ 율령국으로서의 이치노미야는 아니지만, 전국 일궁회에서는 홋카이도 신궁(삿포로시 주오구)을 "에조국 신 일궁"으로 인정하고 있다.[1]

6. 교통

에도 시대부터 메이지 시대 초기까지 육상 교통[8]은 이시카리 만 해안을 통과하는 도지마국에서 데시오국마시케 군으로 가는 길(국도 231호 등의 전신)의 일부였다. 이시카리군에서는 안세이 연간에 이미 장소 청부인이 이시카리 강을 건너는 이시카리 도선을 운영했다. 아쓰타군의 농칠 산도, 하마마스군의 송모 산도, 하마마스군에서 데시오국마시케 군으로 이어지는 마시케 산도 등도 개척되었다. 안세이 연간에는 고시리국오타루 군의 젠바코에서 삿포로 군을 거쳐 이부리국치토세 군에 이르는 삿포로월 신도(치토세 신도)가 하코다테 부교의 명령을 받은 오타루 장소 청부인 에비스야 한베에, 이시카리 장소 청부인 아베야 하쿠지로, 유후쓰 장소 청부인 야마다 분에몬 등에 의해 개척되었고, 이때 시무라 테츠이치와 요시다 시게야가 도요히라 강의 뱃사공이 되었다. 젠바코에서 현재의 삿포로 시내까지는 국도 5호, 삿포로 시내에서 치토세까지는 삿포로 본도·국도 36호의 전신이다. 이 외에도 문화 연간에 데시오국의 루모이에서 니세바루마, 에타이베츠를 거쳐 이시카리 강 유역의 시라리카(가바토군과 우류군의 경계의 강)에 이르는 약 25ri의 우류월이 야마다 분에몬에 의해 개척되었다. 이시카리 국내 하천에는 번정 시대부터 폐사치현까지 8개소의 도선장이 설치되어 이시카리 도선을 비롯한 나룻배 등이 운행되었다.

해상 교통은 아쓰타 등에 키타마에 부네가 기항했다.

1880년 11월 28일, 관영 호로나이 철도의 테미야-삿포로 구간이 개업하였다. 1882년 6월 25일에는 관영 호로나이 철도의 삿포로- 에벳 구간이 임시 개업하였고, 11월 13일에는 테미야-호로나이 전 구간이 개통되었다.

6. 1. 에도 시대

마쓰마에 번은 이시카리 13개 장소, 아쓰타 장소, 하마마시케 장소 등에서 아이누들과 거래를 했다. 이 거래 거점들은 지행지에 해당하며, 각지에 운상옥 등이 설치되었다. 운상옥은 번의 출장 기관 역할도 하며 무육 정책('''옴샤''') 등을 시행했다. 이 과정에서 을명, 소사, 토산취 등 역에조를 임명하고 율령서를 전달했으며, 부지미를 지급(개호)하기도 했다. 아이누 사람들은 백성 신분으로 간주되었다.

장소와 후의 군(郡)의 관계는 다음과 같다.

장소명관할 구역비고
이시카리 13개 장소이시카리 강 하구 주변 및 이시카리 강 본지류
토쿠히라 장소후의 이시카리군(이시카리 강 좌안 하구 부근)
핫샤브 장소후의 삿포로군(이시카리 강(현 이바라토 강) 좌안, 핫사무 강 합류 지점 부근)삿포로시기타구
시노로 장소후의 삿포로군(이시카리 강(현 이바라토 강) 좌안, 시노로 강 합류 지점 부근)현 삿포로시 기타구
나이호우 장소후의 삿포로군(후시코 강 상류 부근)현 삿포로시 히가시구
상삿포로 장소후의 삿포로군(도요히라 강 유역)현 삿포로시
하삿포로 장소후의 삿포로군(도요히라 강 유역)현 삿포로시
상쓰이시카리 장소후의 삿포로군 등(이시카리 강 좌안, 도요히라 강(현 세타도요히라 강) 합류 지점 부근)현 에벳시 등
하쓰이시카리 장소후의 삿포로군 등(이시카리 강 좌안, 도요히라 강(현 세타도요히라 강) 합류 지점 부근)현 에벳시 등
상유바리 장소후의 유바리군 부근(유바리 강 유역)
하유바리 장소후의 유바리군 부근(유바리 강 유역)
상카바토 장소후의 소라치군 부근(가바토 강 합류점에서 상류)우타시나이시, 다키카와시
하카바토 장소후의 가바토군 부근(가바토 강 합류점에서 하류 쓰이시카리까지)현 에벳시 시노쓰, 신시노쓰 촌, 우라우스 정 등
슈마마프 장소후의 삿포로군(현 기타히로시마시) 및 후의 이부리국치토세군 북부(현 에니와시) 등, 시마마쓰 강 유역
아쓰타 장소아쓰타군
하마마시케 장소하마마스군



에도 시대 초기인 쇼호 원년(1644년)에는 이시카리국역을 포함한 「쇼호 어국 그림」이 작성되었다. 조쿄 5년에는 미토 번주 도쿠가와 미쓰쿠니가 쾌풍환을 이시카리에 파견하여 이시카리 강 유역을 조사하였다. 겐로쿠 13년, 마쓰마에 번은 에조치의 지명을 기록한 '''[https://ja.wikisource.org/wiki/%E6%9D%BE%E5%89%8D%E5%B3%B6%E9%83%A1%E5%B8%B3 마쓰마에 섬 향장]'''을 작성하여 막부에 제출하였다. 쇼토쿠 5년(1715년) 마쓰마에 번주는 막부에 십주도, 당태, 추프카 제도, 감찰가가 마쓰마에 번령이라고 보고했다.

에도 시대 중기 다누마 오키쓰구 시대인 덴메이 6년 2월, 사토 겐로쿠로는 막부에 제출한 에조치 조사 보고서에서 에조치는 곡물 재배가 금지되었으며, 가미카와군역에서 아이누가 미작을 하면 일본인이 벼와 종자를 몰수하고 변상시켰다고 기록했다.[7] 간세이 4년에는 이시카리 장소에서 막부에 의한 어구 거래가 이루어졌는데, 이는 에조(아이누)에게 유리한 거래였으며 노인과 어린이에게는 지급미를, 빈자에게는 수당을 주었다고 한다.

에도 시대부터 메이지 시대 초기까지 육상 교통[8]은 이시카리 만 해안을 통과하는 도지마국에서 데시오국마시케 군으로 가는 길(국도 231호 등의 전신)의 일부였다. 이시카리군에서는 안세이 연간에 이미 장소 청부인이 이시카리 강을 건너는 이시카리 도선을 운영했다. 아쓰타군의 농칠 산도, 하마마스군의 송모 산도, 하마마스군에서 데시오국마시케 군으로 이어지는 마시케 산도 등도 개척되었다. 안세이 연간에는 고시리국오타루 군의 젠바코에서 삿포로 군을 거쳐 이부리국치토세 군에 이르는 삿포로월 신도(치토세 신도)가 하코다테 부교의 명령을 받은 오타루 장소 청부인 에비스야 한베에, 이시카리 장소 청부인 아베야 하쿠지로, 유후쓰 장소 청부인 야마다 분에몬 등에 의해 개척되었고, 이때 시무라 테츠이치와 요시다 시게야가 도요히라 강의 뱃사공이 되었다. 젠바코에서 현재의 삿포로 시내까지는 국도 5호, 삿포로 시내에서 치토세까지는 삿포로 본도·국도 36호의 전신이다. 이 외에도 문화 연간에 데시오국의 루모이에서 니세바루마, 에타이베츠를 거쳐 이시카리 강 유역의 시라리카(가바토군과 우류군의 경계의 강)에 이르는 약 25ri의 우류월이 야마다 분에몬에 의해 개척되었다. 이시카리 국내 하천에는 번정 시대부터 폐사치현까지 8개소의 도선장이 설치되어 이시카리 도선을 비롯한 나룻배 등이 운행되었다.

해상 교통은 아쓰타 등에 키타마에 부네가 기항했다.

에도 시대 후기 이시카리국역은 서에조치에 속했다. 분카 4년, 국방상의 이유로 서에조치(당자 에조 거주지인 홋카이도 일본해안·오호츠크 해안·사할린)도 공의어료(막부 직할령)로 지정되었고, 이후 전에조치 아이누의 종문인별개장 (호적)이 작성되었다. 막리 마미야 린조교와 3년(1803년) 연안부를 측량했고, 분카 8년(1811년)에는 가미카와 군역을 조사했다. 분세이 4년에는 일시적으로 마쓰마에 번령으로 복귀했지만, 안세이 2년 다시 천령이 되어 하마마시케(하마마스)에 쇼나이 번이 진야를 축조하여 이시카리국역 경비를 담당했다. 토쿠히라 장소 부근에는 하코다테 부교에 의해 이시카리 역소가 설치되었으며, 그 범위는 가미카와 군역(현 아사히카와시) 부근까지 미쳤다. 마쓰우라 타케시로는 고카 3년 이시카리, 안세이 3년 이시카리군·삿포로군·가바토군·우류군, 안세이 4년 이시카리·삿포로·가바토군·우류군·가미카와군·소라치군, 안세이 4년 이시카리군·삿포로군·가바토군·우류군·가미카와군·소라치군·하마마스군·아쓰타군·유바리군, 안세이 5년 이시카리군·삿포로군·가바토군·가미카와군·소라치군을 방문했다. 안세이 6년의 6번 분령 이후에도 대부분 공의어료(쇼나이 번 경고지)로 유지되었지만, 하마마시케만 쇼나이 번령이 되었다. 이 무렵 가미카와 군역에서는 마쓰다 시타로나 마쓰우라 타케시로 등에 의해 소운쿄 온천이 발견되었고, 소라치 군역의 이시카리 탄전과 아쓰타 군역·보라이 주변의 유전이 이시카리 역소의 아라이 킨스케에 의해 발견되었다. 게이오 2년 삿포로군역에서는 미이즈미 조잔에 의해 조잔케이 온천에 탕치장이 설치되었고, 삿포로 원촌이 개발될 때 오토모 카메타로에 의해 오토모 보리(후의 창성천)가 개착되었다.

6. 2. 메이지 시대 이후

메이지 유신 이후, 1869년 8월 15일(구력) 이시카리국에 9군이 설치되고 100개 촌이 설치되었다.[4] 같은 해 10월에는 장소 청부제가 폐지되어 어장주가 설정되지 않았다.[5]

1871년 5월, 개척사 청사가 하코다테에서 삿포로로 이전되었다. 같은 해 7월 14일(구력) 폐번치현이 이루어졌고, 8월 20일(구력)에는 홋카이도의 분령 지배가 폐지되어 전 지역이 개척사의 관할이 되었다.

1872년에는 삿포로 농학교가 개교하고, 임신호적이 편제되었다. 같은 해 4월 9일(구력)에는 전국적으로 호장·부호장이 설치되었으며, 10월 10일(구력)에는 대구소구제가 시행되었다. 12월 2일(구력)에는 덴포력에서 그레고리력으로 개력되었다.

1875년 5월, 삿포로 교외의 고토니 병촌을 시작으로 둔전이 시작되었다. 1879년 7월 23일에는 군구정촌 편제법이 시행되었다.

1880년 11월 28일, 관영 호로나이 철도의 테미야-삿포로 구간이 개업하였다. 1882년 2월 8일, 폐사치현에 따라 삿포로현의 소관이 되었다. 같은 해 6월 25일에는 관영 호로나이 철도의 삿포로- 에벳 구간이 임시 개업하였고, 11월 13일에는 테미야-호로나이 전 구간이 개통되었다.

1896년 5월, 가미카와군에서 둔전병을 모체로 한 육군 제7사단이 편성되어, 이시카리국에서 징병제도가 시행되었다.

참조

[1] 서적 Japan Encyclopedia Google Books 2005
[2] 서적 Transactions of the Asiatic Society of Japan Google Books 1882
[3] 문서 銭函4・5丁目相当区域は後年の1975年に石狩町(当時、現石狩市)から割譲されたものであり、北海道 (令制)における後志国の範囲には元から含まれていない。
[4] 문서 樺太の栞
[5] 간행물 歴史家―第四号 北海道歴史家協議会
[6] 문서 北海道大学医学部陽子線研究施設付近
[7] 서적 千島列島をめぐる日本とロシア
[8] 간행물 北海道道路誌 北海道庁 1925-06-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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