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정희 (1903년)
"오늘의AI위키"의 AI를 통해 더욱 풍부하고 폭넓은 지식 경험을 누리세요.
1. 개요
이정희(1903년)는 일제강점기부터 대한민국 정치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분야에서 활동한 인물이다. 경북교원양성소와 경북사범학교 강습과를 졸업하고 교사, 공무원을 거쳐 영주군수, 안동군수를 역임했다. 1954년 제3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당선되어 국회 문교위원회 위원 등으로 활동했으며, 제4대 국회의원에도 당선되었으나 선거 부정으로 의원직을 상실했다. 이후 자유당 활동을 지속하며 정치적 행보를 이어갔다.
본관은 우계, 자(字)는 맹실(孟實), 호(號)는 효산(曉山) 또는 만정(晩汀)이다.[3] 경상북도 영주 출신이다.
본관은 우계이고 자(字)는 맹실(孟實), 호(號)는 효산(曉山), 만정(晩汀)이다. 경상북도 영주 출신으로, 당숙 이근춘(李根春)의 문인이었다.
2. 생애
1922년 경상북도 교원양성소와 경북사범고등학교 강습과를 졸업하고, 일제강점기 동안 봉화, 예천군 감천, 영주 등지의 여러 보통학교에서 교사로 활동했다.
1938년 공무원으로 전직하여 영주군 평은면장, 영주군청 학무과 교화담당주사, 산업과장, 내무과장 등을 지냈다. 해방 후에는 경상북도 문경군수와 안동군수를 역임했으며, 1952년부터 1954년까지 영주군 교육감으로 재직했다.
1954년 자유당에 입당하여 제3대 및 제4대 국회의원 선거(영주군 선거구)에서 연이어 당선되었다. 그러나 제4대 국회의원 임기 중이던 1959년, 선거 부정이 드러나 당선무효 판결을 받고 의원직을 상실하였다.[68][70] 1960년 1월 재보궐선거에서 다시 당선되었으나, 이 선거 또한 부정 논란이 있었다.[71]
1961년 5.16 군사 정변으로 국회가 해산되면서 의원직을 최종적으로 상실했다. 이후 자유당 중앙위원으로 당 재건 운동에 참여했으며, 1963년 제6대 총선에 출마했으나 낙선했다. 1967년 신민당 공천과 1973년 공화당 공천에서 연이어 탈락한 뒤 정계에서 은퇴하였다.
2. 1. 초기 생애 및 교육 활동
본관은 우계이고 자(字)는 맹실(孟實), 호(號)는 효산(曉山) 또는 만정(晩汀)이다.[3] 1903년 12월 9일 경상북도 영주군 영주면 상망동 보름골에서 도촌 이수형(李秀亨)의 16대손으로 태어났다. 아버지는 이원춘(李元春)이고 어머니는 참판 정도존(鄭道存)의 후손인 봉화 정씨(奉化鄭氏) 정응룡(鄭應龍)의 딸이다. 일설에는 1906년생 또는 1901년생이라는 설도 있다. 그의 15대조 이양근(李陽根) 대에 봉화군 도촌리에서 영주시 상망동, 하망동 지역인 봉향면 망동(望洞) 보름골로 이주해왔다. 이후 영주군 영주읍 영주리(榮州里) 12번지를 거쳐 휴천동 642-67번지로 이주했다.[2] 어릴 적에는 성리학자인 당숙 이근춘(李根春)의 문하에서 한학을 배웠다.
1922년 경상북도 도립교원양성소를 수료하고, 경북사범고등학교 강습과(慶北師範高等學敎 講習科)를 졸업하였다. 졸업 후 교사로 임용되어 일제강점기 동안 여러 학교에서 근무했다. 처음 봉화군 내성공립보통학교(현 봉화초등학교) 교사로 부임했으며[4], 이후 1928년 경주 내성보통학교, 1929년 예천군 감천보통학교, 1931년부터 1937년까지 영주보통학교 교사로 근무했다. 또한 조선공립보통학교, 김천공립보통학교에서도 근무했으며, 1937년에는 영주서부심상소학교 교사로 부임했으나 1938년 9월 교직을 사퇴하였다.[5]
교사로 재직하는 동안 학교 설립 운동, 교사(校舍) 및 부지 확보 활동, 장학회 운영 및 장학금 지급 활동 등 지역 교육 발전에 힘썼다.
교사직을 그만둔 후 잠시 공직에 몸담기도 했다. 1937년 9월 1일 영주군 평은면장으로 부임하여 1939년 3월 29일까지 재직했으며,[5] 같은 해 충청북도 청원군 강외심상소학교 서무실 촉탁으로 잠시 근무했다.
2. 2. 공직 생활
교사로 활동하다가 1938년 공무원으로 전직하였다. 1937년 9월 1일 영주군 평은면장으로 부임했으며[5], 1939년 유임되었으나 그해 3월 29일 면직했다.
1940년 4월 1일 영주군청 학무과 교화주사로 임명되었다.[15][16] 같은 해 6월에는 영주 지역 유림들이 추진한 중등학교 설립 운동 단체인 영주중등교육기성회의 상담역으로 선출되기도 했다.[13] 일제강점기 말기인 1940년대 영주군 교화주사로 재직하면서, 1941년 창씨개명령이 실시되었을 때 창씨를 거부하고 본래 성명을 계속 사용하였다. 또한 영주군 지역 유지들의 중등학교 유치 운동에 동참했다.[17]
1945년 해방 이후에도 공직에 남아 영주군청 산업과장으로 재직했으며, 1946년 11월 2일에는 영주군청 내무과장으로 자리를 옮겼다.[18]
대한민국 정부 수립 이후, 1949년 7월 29일 경상북도 문경군수로 부임하여[19] 1950년 9월 23일까지 재임했다.[20] 이후 1950년 9월 23일 안동군수로 부임하였다. 6.25 전쟁 중에는 안동군수로서 혼란한 민심을 수습하고 전쟁 피난민 구호 및 전후 복구 사업에 힘썼다. 1952년 8월 10일 안동군수직에서 퇴임하였다.[21]
2. 3. 정치 활동
일제강점기 말기인 1938년 공무원으로 전직하여 영주군 평은면장을 지냈고, 1940년 영주군 학무과 교화담당주사, 광복 전후 영주군청 산업과장, 1946년 영주군청 내무과장을 역임했다.
대한민국 정부 수립 이후 경상북도 문경군수와 안동군수를 지냈다. 1952년부터 1954년까지 영주군 교육감으로 재직했다. 1954년 자유당에 입당하여 공천을 받아 제3대 국회의원 선거에 출마, 당선되었다.[4] 이후 1958년 제4대 국회의원 선거에서도 자유당 후보로 출마하여 재선에 성공하였다.
그러나 제4대 국회의원 재임 중이던 1959년, 선거 과정에서의 부정 행위가 드러나 의원직을 상실하였다.[68][70] 이듬해인 1960년 1월 23일에 치러진 재보궐선거에 다시 자유당 후보로 출마하여 당선되었으나,[72] 이 선거 역시 부정 의혹이 제기되었다.[71]
1961년 5.16 군사 정변으로 국회가 해산되면서 의원직을 상실하였다. 이후 자유당 중앙위원으로 활동하며 당 재건 운동에 참여했고, 1963년 제6대 국회의원 선거에 출마하였으나 낙선하였다. 1967년에는 신민당 공천에서, 1973년에는 공화당 공천에서 연이어 탈락한 후 정계를 은퇴하였다.
2. 3. 1. 제3대 국회의원
1952년 7월 영주군 교육감 선거에 출마하여 당선, 1952년 8월 8일부터 제1대 영주군 교육감을 지냈다.[22] 1954년 4월 21일 제3대 국회의원 선거에 출마하기 위해 영주군 교육감직을 사퇴하였다. 사퇴 직후 자유당에 입당하였고, 4월 24일 자유당 선거대책위원회의 공천 심사를 통과하여 4월 25일 자유당 최종 공천을 받았다.[23][24]
1954년 5월 10일 실시된 제3대 국회의원 총선거에서 자유당 후보로 경상북도 영주군 선거구에 출마하여 당선되었다.[4] 이후 자유당 중앙위원회 위원과 국회 문교위원회 위원으로 활동하였다. 또한 국회 국방위원회 위원[25]으로도 선출되어 활동했다.
1954년 7월 14일 국회에서 열린 변영태 국무총리의 시정연설 시, 자유당 측 질의 위원 중 한 명으로 선정되었다.[26] 같은 해 9월 8일 국민투표 개헌안 논의에 참여하였고[27], 9월 29일 국회 본회의에서는 수복지역행정조치법 축소 심의안 발표 후, 세무행정과 교육행정 분리 시행을 골자로 하는 수정안을 다른 의원 24인과 함께 대표 발의하여 통과시켰다.[28][29]
제3대 국회의원으로서 그는 6.25 전쟁으로 폐허가 된 경상북도 지역의 국민학교와 중학교 복구 및 재건 운동에 힘썼다. 9월 24일 국회 제48차 본회의에서는 고급 요정 등 유흥업소에 대한 세금 개정안에 반대 입장을 표명했다.[30] 10월 20일과 21일 임시회의에서는 제1회 추경예산안 심의 중, 국회 예결위가 삭감한 공보처 소관 방송 시설비 4억 2천만 환에 대해, 반공 정책 강화를 위해 복구해야 한다고 주장했다.[31]
1954년 사사오입 개헌 당시에는 개헌안에 항의하며 다른 자유당 의원 12명과 함께 자유당 탈당 선언에 서명하였으나[32], 곧 이를 보류하고 철회하였다.[33] 12월 20일 자유당 의원총회에서 중앙위원(경북지역 담당)으로 선출되었다.[34]
1955년 2월 19일 풍기국민학교 전재복구기성회 명예회장으로 추대되었고[35], 4월 24일 국회 본회의에서는 문화재 해외 반출 전시안에 대해 "우리의 찬란한 문화를 세계에 널리 인식시키고 우리 한국민족이 단일문화민족임을 주지시키기 위하여 필요하다"며 찬성 입장을 밝혔다.[36] 그는 유네스코에 국내 유물 전시 기획 예산 편성을 요청하기도 했다.
1955년 5월 13일 자유당 중앙당 대표자회의에서 중앙위원회 조직부 차장으로 임명되었고[37][38], 6월 7일에는 윤제술, 현석호 등과 함께 윌리스 지프차 통관사건에 대한 국회 징계위원회 조사위원으로 현장에 파견되었다.[39] 같은 날 자유당 중앙위원에도 선출되었다.[40] 6월 29일에는 국회 문교분과위원으로서 각 지방 학교의 징수금 실태 조사를 위해 파견되는 조사단 B반에 포함되어 7월 15일부터 7월 22일까지 인천, 청주, 대구, 마산, 부산, 진주 등지를 방문 조사했다.[42] 조사 후 기자회견에서는 지방 학교들이 서울 학교보다 문교 당국 지시를 잘 준수하며, 사립학교보다 국공립학교의 부정 사실이 적었다고 발표했다.[43]
그해 7월 동아일보사 주최 불량학생 단속 및 학생 풍기 단속 활동에 참여하고 관련 좌담회에도 참석했으며[44][45], 9월 1일에는 소백산 지역 빨치산 토벌에 참여한 경찰자위대를 위문 방문하여 식료품과 약품을 전달했다.[47] 11월 6일 국회 질의에서는 공무원 및 구호 대상자에 대한 양곡 배급 지연 문제를 지적하며 조속한 배급을 촉구했다.[49] 11월 10일부터는 대학의 불법 정원 조정 문제에 대한 학생 청원을 접수하고, 건국학원 및 부산 남성학원 재단 분규 관련 국회 문교위원회 진상조사단원으로 현장을 방문했다. 10월 29일에는 교육특별심의위원회 위원으로 선출되었다.[50]
1955년 12월 9일 국회 국방위원회 소속으로 백금상회 강도사건 국회 진상조사단에 파견되었다.[51][52] 1956년 2월 23일 자유당 문교위원회 상임위원장 선거에 입후보했으나 차점으로 낙선했다. 그해 4월에는 자유당 영주군지구당 위원장 자리를 두고 박용만과 갈등을 빚었으며[53], 4월 24일에는 영주군 읍내에서 박용만 등과 함께 민주당 전 의원 현석호의 선거 강연을 방해했다는 의혹을 받았다.[54][55]
1956년 2월 24일 제3대 국회 후반기 문교분과위원장 선거에 출마했으나 1, 2차 투표 모두 2위로 낙선했다.[58][59] 3월 13일부터 동아일보사 주최 극장 입장세법 개정안 좌담회에 여러 차례 참석하여 면세 및 감면 여부, 학교의 극장 대관 문제 등을 논의했다.[60][61][62][63]
1956년 5월 21일 대구 지역 선거 개표 부정 사건 국회 진상조사단원으로 활동했으며, 7월 3일에는 자유당 정책위원으로 위촉되었다.[65] 7월 2일 자유당 당원 총회에서 문교 부문 원내정책위원으로 선출되었다.[65]
1957년 8월 28일 국회 문교위원회 위원으로 다시 선임되었다. 1958년 2월 10일에는 민의원 문교위원회에서 의무교육 재정 평형교부금 법안을 다른 의원 28인과 함께 대표 발의하였다.[66]
2. 3. 2. 제4대 국회의원 및 의원직 상실
1958년 5월 제4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경상북도 영주군 지역구에 자유당 공천으로 출마하여 재선에 성공하였다.
그러나 선거 직후 차점자로 낙선한 박용만이 부정선거 의혹을 제기하며 소송을 제기했다. 진상조사단의 조사 결과, 박용만의 표 일부를 이정희의 표로 부정하게 개표한 이른바 '영주투표함사건'이 있었고, 이정희의 당선을 위해 지역 읍의원 등이 유권자들에게 향응을 제공한 사실 등이 확인되어 경향신문 등에 보도되었다. 박용만은 이를 근거로 선거무효소송을 제기하였다.
1959년 9월 8일 국회 문교위원회 상임위원에, 9월 9일에는 국회 교체위원회 위원에 선임되기도 했다.[67] 하지만 같은 해 11월 21일, 영주군 관내 일부 지역의 투표 부정 문제가 인정되어 법원으로부터 당선무효 판결을 받았다.[68] 이 판결로 12월 9일부로 의원직 자격을 잃었으며, 12월 27일 국회 본회의에서 의원직 박탈이 최종 확정되었다.[70]
의원직을 상실했으나 재보궐선거가 결정되자, 이정희는 1959년 12월 13일 자유당의 공천을 다시 받았다.[69] 1960년 1월 23일에 치러진 영주군 재보궐선거에 출마하여, 무소속으로 나온 박용만과 민주당 황호영 후보를 누르고 다시 당선되었다. 당시 이정희는 24,888표를 얻어 당선자로 발표되었다.[72] 그러나 민주당의 황호영 후보는 이 재보궐선거 역시 부정 개표와 무효 의혹을 제기하며 문제를 삼았다.[71]
이후 1960년 6월 12일, 재보궐선거 당시 이정희에게 생활비 보조 명목으로 학급비에서 37만 5천 환을 인출하여 전달한 혐의로 당시 영주군 교육감과 경상북도청 상공과장 이정호 등이 영주경찰서에 체포되어 구속되는 일도 있었다.[75]
2. 3. 3. 5.16 군사 정변 이후
1960년 7월 29일 제5대 국회의원 총선거에 영주군 지역구에서 자유당 후보로 출마하였으나 낙선하였다. 4.19 혁명 이후 일부 자유당 의원들이 시류에 편승하여 탈당하는 상황에서도, 그는 소수의 인사들과 함께 자유당에 대한 신의를 지키겠다며 당에 잔류하였다. 낙선 후에는 자유당 중앙위원과 영주군지구당 위원장 등으로 활동했다.
자유당 영주지구당 위원장으로 있던 1961년 1월, 3.15 부정선거에 직접 개입하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자유당 소속 국회의원이었다는 이유로 제4조 4호에 따른 공민권 제한 대상자로 분류되어 피선거권을 제한당했다.[77] 같은 해 5월 16일 발생한 5.16 군사 정변 직후인 5월 20일, 군부 세력에 의해 정치정화법 대상자로 지정되었다.[78]
1963년 2월 1일, 정치정화법 및 공민권 제한 대상자 심사에서 추가 구제 대상자로 선정되어 정치 활동을 재개할 수 있게 되었다.[79] 2월 9일에는 장석윤, 김종신 등과 함께 민주공화당 입당 공동성명을 발표하고[80][81] 당일 입당하였으나[82], 한 달도 채 되지 않은 3월 4일 탈당하였다. 같은 날, 구 자유당 출신 인사들과 함께 친목회를 조직하고 자유당 재건 운동에 참여했다.[83] 6월 3일에는 범국민정당(가칭) 결성에 참여했다가 이탈하였고, 7월 11일에는 자유민주당 창당 조직에 참여했으나 당내 파벌 다툼으로 인해 일주일 만에 다시 이탈하였다.[84] 이후 장택상 등과 함께 자유당 재건 운동을 이어갔다. 1963년 제6대 국회의원 선거에 출마하였으나 낙선하였다.
1967년 2월에는 신민당 공천을 신청하여 경주·월성 지역구에 도전했으나 공천에서 탈락하였다.[85] 1973년 2월 9일에는 경주-월성-청도 지역구에 공화당 공천을 신청하였으나[86] 이 역시 탈락하였다. 이후 정계에서 은퇴하였다.
3. 평가 및 기타
묘는 경상북도 영주시 휴천3동 조암리 탑거리부락 좌에 안장되었다. 이산면 조암리는 후일 영주시 휴천3동에 편입되었다. 비석은 1990년 6월 23일 세웠으며 비석은 매제 김영하가 짓고, 비문은 인천인 이재학이 썼다.[87] 묘소 앞에는 망주석이 있고 묘 바로 앞 우측에 1990년대에 오석으로 세운 묘비가 있다.
부인 인동 장씨의 묘는 경기도 파주시 광탄면 용미리 공원묘지에 있으며, 아들 이준한의 묘 역시 용미리 공원묘지 내에 있다.
아들 이종은 기업인으로 활동했으며 후에 준한으로 개명했다. 그는 유한양행, 선인학원의 이사를 역임했다. 사위 이창희(李昌羲)는 교육자로 영주 안정초등학교 교장을 지냈다. 조카사위 중 한 명인 김춘택은 대구광역시 서구청장을 역임했다.
3. 1. 평가
교육자, 공무원을 거쳐 정치인으로 활동하며 다양한 이력을 남겼다. 일제강점기부터 교사로 활동했으며, 해방 후에는 경상북도 문경군과 안동군의 군수, 영주군 교육감을 역임하며 지역 행정과 교육 발전에 기여했다. 특히 6.25 전쟁으로 폐허가 된 지역 국민학교와 중학교의 복구와 재건에 힘썼고[35], 국회의원 시절에는 의무교육 재정 관련 법안 발의에 참여하기도 했다.[66]
자유당 소속으로 제3대, 제4대 국회의원을 지냈다. 국회에서는 주로 문교위원회에서 활동하며 오랜 교육 현장 경험을 바탕으로 무게감 있는 발언을 한다는 평가를 받았다.[88] 그는 변영태 국무총리 시정연설 질의[26], 수복지역행정조치법 수정안 발의[28][29], 방송 시설비 복구 요청[31], 문화재 해외 전시 찬성[36], 공무원 양곡 배급 촉구[49] 등 다양한 의정 활동에 참여했다. 또한 자유당 중앙위원 및 조직부 차장 등을 역임하며 당내에서도 활동했다.[34][37][38][40]
그러나 1954년 사사오입 개헌 당시 개헌안에 항의하며 다른 의원들과 함께 탈당 선언에 서명했다가 이를 보류하고 철회하는 등[32][33] 정치적으로 일관되지 못한 모습을 보이기도 했다. 1956년에는 자유당 영주군지구당 위원장 자리를 놓고 박용만과 갈등을 빚었으며[53], 민주당 현석호 의원의 선거 강연을 방해했다는 의혹을 받기도 했다.[54][55] 1959년에는 영주군 일부 지역의 선거 부정 의혹으로[56] 국회의원직을 상실했으나, 1960년 재보궐선거를 통해 다시 당선되는 등 정치적 부침을 겪었다.
1961년 5.16 군사 정변으로 국회가 해산되면서 의원직을 상실했고, 이후 자유당 재건을 시도하거나[83] 신민당[85], 공화당[86] 공천을 받으려 했으나 실패하며 정계에서 은퇴했다.
3. 2. 기타
그가 활동하던 시기에는 여자 비행사 이정희(李貞喜)와 한자 이름까지 동일한 작가 이정희(李正熙) 등 동명이인이 있었다.
4. 가계
본관은 우계(牛溪)이고 자(字)는 맹실(孟實), 호(號)는 효산(曉山) 또는 만정(晩汀)이다. 경상북도 영주 출신으로, 당숙 이근춘(李根春)의 문인이었다.
부인 인동장씨의 묘는 경기도 파주시 광탄면 용미리 공원묘지에 있으며, 아들 이준한의 묘 역시 같은 공원묘지 내에 있다.
아들 이종(琮)은 후에 준한(俊翰)으로 개명했으며, 기업인으로 유한양행과 선인학원(善仁學園)의 이사를 지냈다. 사위 이창희(李昌羲)는 교육자로 안정국민학교 교장을 역임했다. 조카사위 중 한 명인 김춘택(金春澤, 본명 춘근)은 대구광역시 서구청장을 지냈다.
그의 외종손과 고모부의 이름이 같으나(동명이인), 고모부는 청도 김씨이고 외종손은 의성 김씨이다.
관계 | 이름 | 생몰년 및 기타 |
---|---|---|
할아버지 | 이윤영(李潤榮) | |
아버지 | 이원춘(李元春) | 1871년 ~ 1958년 |
어머니 (본처) | 안동권씨(安東權氏) | 1868년 ~ ? |
어머니 (생모) | 봉화정씨(奉化鄭氏) | 1883년 ~ 1963년 |
동생 | 이익희(李益熙) | 1907년 ~ 1928년 |
조카사위 | 정경화(鄭慶和) | 동래인(東萊人) |
동생 | 이진희(李晉熙) | 1911년 ~ 1936년 |
조카사위 | 김춘근(金春根) | 의성인(義城人), 본명 춘택(春澤), 제10대 대구광역시 서구청장 역임 |
외종손 | 김창식(金昌植) | |
외종손 | 김현식(金賢植) | |
부인 | 인동장씨(仁同張氏) | 1901년 3월 16일 ~ ?, 경기도 파주시 광탄면 용미리 공원묘지에 안장 |
딸 | 이름 미상 | |
사위 | 이창희(李昌羲) | 고성인(固城人), 안정국민학교 교장 역임 |
외손자 | 이상흠(李相欽) | |
외손자 | 이세흠(李世欽) | |
외손자 | 이인흠(李仁欽) | |
외손녀 | 이름 미상 | |
아들 | 이준한(李俊翰) | 1932년 ~ 1992년, 초명 종(琮), 기업인 (유한양행, 선인학원 이사 역임), 용미리 공원묘지에 안장 |
아들 | 이각(李珏) | 1938년 ~ , 숙부 이진희(李晉熙)의 양자로 출계 |
아들 | 이광웅(李光雄) | 1941년 ~ , 숙부 이익희(李益熙)의 양자로 출계 |
장인 | 장복심(張復心) | 과제(果劑) 장수희(張壽禧)의 후손 |
외조부 | 정응룡(鄭應龍) |
5. 역대 선거 결과
참조
[1]
문서
[2]
서적
대한민국인물연감
청운출판사
1967
[3]
서적
건국십년
건국십년지간행회
1958
[4]
웹사이트
Untitled Document
http://www.rokps.or.[...]
[5]
뉴스
消息
동아일보
1938-09-20
[6]
뉴스
嶺南地方
동아일보
1925-10-24
[7]
뉴스
泰川音樂盛况
동아일보
1928-05-09
[8]
뉴스
會舘修理로 演藝大會 開催
조선일보
1929-06-21
[9]
뉴스
基督敎가 第一
동아일보
1934-10-30
[10]
뉴스
榮普校增築期成
조선일보
1935-06-26
[11]
뉴스
榮州公普校
조선일보
1937-06-30
[12]
뉴스
社會事業協會 收合 水害義捐金
조선일보
1936-11-19
[13]
뉴스
榮州 中等校期成會 定期總會 開催
동아일보
1940-06-22
[14]
뉴스
榮州西小學 奬學會定總
조선일보
1940-06-30
[15]
뉴스
消息
동아일보
1940-04-05
[16]
뉴스
消息
동아일보
1940-04-05
[17]
문서
[18]
뉴스
永川郡守에 金震東氏
대구시보
1946-11-02
[19]
뉴스
二月의 陣痛겪고 內務農林商工局長發令, 同時課長郡守級도 一部異動
영남일보
1949-08-02
[20]
웹인용
역대 문경군수
https://web.archive.[...]
2012-12-03
[21]
웹사이트
역대 안동군수
http://mayor.andong.[...]
[22]
웹사이트
영주시 교육청 역대 교육감
http://www.yeongju-e[...]
[23]
뉴스
自由黨의 三次公薦 李總裁, 一部 變更
조선일보
1954-04-27
[24]
뉴스
自由黨 追加 公薦 李總裁 修正裁可
경향신문
1954-04-27
[25]
뉴스
某種『對委(대위)』를構成, 內務部 國會調委는 調查에 着手
동아일보
1955-12-09
[26]
뉴스
復興과 軍擴을 促進
조선일보
1954-07-15
[27]
뉴스
改憲案遂國會에 即日로 政府에 移送
조선일보
1954-09-08
[28]
뉴스
民議院 稅務敎育을 分離
경향신문
1954-09-29
[29]
뉴스
三個廢棄法案法司委에 廻附, 收復地區行政措置法案討議, 民議院本會議
평화신문
1954-09-28
[30]
뉴스
遊興·電氣稅 改正案 通過
조선일보
1954-09-24
[31]
뉴스
民議院 本格的 逐條討議
동아일보
1954-10-22
[32]
뉴스
少壯派, 脫黨을 决定
조선일보
1954-12-10
[33]
뉴스
自由黨 12議員, 離黨을 聲明
조선일보
1954-12-11
[34]
뉴스
役員·中央委選出 自由黨議院部
조선일보
1954-12-22
[35]
웹사이트
http://newslibrary.n[...]
[36]
뉴스
民議院 豫算案 質疑開始
경향신문
1955-04-26
[37]
뉴스
自由黨部次長決定
동아일보
1955-05-13
[38]
뉴스
中央黨部次長 名單
경향신문
1955-05-13
[39]
URL
http://newslibrary.n[...]
[40]
뉴스
中央委員 26名
조선일보
1955-06-08
[41]
뉴스
壇上壇下
동아일보
1955-06-07
[42]
뉴스
地方各級學園 徵收金等 調査
동아일보
1955-06-30
[43]
뉴스
地方學接는 良好
조선일보
1955-07-22
[44]
뉴스
學生風紀 문제를 얘기하는 좌담회
동아일보
1955-07-19
[45]
뉴스
學生風紀 문제를 얘기하는 座談會 (2)
동아일보
1955-07-20
[46]
URL
http://newslibrary.n[...]
[47]
URL
http://newslibrary.n[...]
[48]
뉴스
責任者 嚴重處斷토록
조선일보
1955-10-28
[49]
뉴스
早速配給에 努力
조선일보
1955-11-06
[50]
뉴스
敎育審議會任員도 選出
조선일보
1955-10-31
[51]
뉴스
某種『對委(대위)』를構成, 內務部 國會調委는 調查에 着手
동아일보
1955-12-09
[52]
뉴스
壇上壇下
동아일보
1955-12-09
[53]
URL
http://newslibrary.n[...]
[54]
URL
http://newslibrary.n[...]
[55]
URL
http://newslibrary.n[...]
[56]
뉴스
郡委員長戰에 要覺書
조선일보
1956-03-10
[57]
뉴스
野黨은 公薦을 抛棄
동아일보
1956-02-23
[58]
뉴스
分委長公薦候補 决定
동아일보
1956-02-24
[59]
뉴스
常任 分委長公薦 決定
경향신문
1956-02-24
[60]
뉴스
劇場文化와 民族芸術座談会 (1) 入場稅法 改正案의 是非
동아일보
1956-03-13
[61]
뉴스
劇場文化와 民族芸術座談会 (2) 入場稅法改正案의 是非
동아일보
1956-03-14
[62]
뉴스
劇場文化와 民族芸術座談会 (4) 入場稅法改正案의 是非
동아일보
1956-03-16
[63]
뉴스
劇場文化와 民族芸術座談会 (完) 入場稅法改正案의 是非
동아일보
1956-03-17
[64]
뉴스
常任分委長을 選出
경향신문
1956-02-26
[65]
뉴스
政策委員 選定
조선일보
1956-07-03
[66]
URL
http://newslibrary.n[...]
[67]
뉴스
國會常委員 配定을 完了
조선일보
1958-09-09
[68]
URL
http://newslibrary.n[...]
[69]
URL
http://newslibrary.n[...]
[70]
URL
http://newslibrary.n[...]
[71]
뉴스
http://newslibrary.n[...]
네이버 뉴스 라이브러리
1960-01-25
[72]
뉴스
"榮州 一部 迎日乙區 再選 終了"
마산일보
1960-01-25
[73]
뉴스
http://newslibrary.n[...]
네이버 뉴스 라이브러리
1960-05-11
[74]
뉴스
http://newslibrary.n[...]
네이버 뉴스 라이브러리
1960-06-16
[75]
뉴스
http://newslibrary.n[...]
네이버 뉴스 라이브러리
1960-06-12
[76]
뉴스
"各常任委員配定"
동아일보
1959-09-08
[77]
뉴스
http://newslibrary.n[...]
네이버 뉴스 라이브러리
1961-01-31
[78]
뉴스
"공고"
조선일보
1962-03-30
[79]
뉴스
"旣成政治人 二百73名 追加解除"
조선일보
1963-02-02
[80]
뉴스
"最高委員 優先權은 無根"
경향신문
1963-02-09
[81]
뉴스
"聲明書"
경향신문
1963-02-09
[82]
뉴스
"大擧共和黨에 參與 舊自由黨系 解禁者 22名"
동아일보
1963-02-09
[83]
뉴스
"舊自由, 創黨合意"
경향신문
1963-03-04
[84]
뉴스
"自民黨兩派 드디어 袂別"
경향신문
1963-07-18
[85]
뉴스
"新民黨 地區黨 委員長 신청자 명단"
동아일보
1967-02-27
[86]
뉴스
https://newslibrary.[...]
네이버 뉴스 라이브러리
1973-01-31
[87]
문서
한국의 2~5대 국회의원 이재학과는 동명이인이다.
[88]
웹사이트
이정희
http://www.history.g[...]
[89]
웹인용
극락과 지옥
http://www.yjinews.c[...]
영주시민신문
2016-03-10
본 사이트는 AI가 위키백과와 뉴스 기사,정부 간행물,학술 논문등을 바탕으로 정보를 가공하여 제공하는 백과사전형 서비스입니다.
모든 문서는 AI에 의해 자동 생성되며, CC BY-SA 4.0 라이선스에 따라 이용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위키백과나 뉴스 기사 자체에 오류, 부정확한 정보, 또는 가짜 뉴스가 포함될 수 있으며, AI는 이러한 내용을 완벽하게 걸러내지 못할 수 있습니다.
따라서 제공되는 정보에 일부 오류나 편향이 있을 수 있으므로, 중요한 정보는 반드시 다른 출처를 통해 교차 검증하시기 바랍니다.
문의하기 : help@durumis.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