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종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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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이종형은 일제강점기 만주 지역에서 관동군 촉탁 밀정으로 활동하며 독립운동가들을 탄압한 인물이다. 그는 의열단에 위장 가입하여 밀정 활동을 하였으며, 만주보민회와 같은 조직에서 고문 및 군재판관으로 활동하면서 많은 독립운동가들을 체포하고 살해했다. 해방 후에는 극우 우익 계열에 가담하여 반공주의를 내세우며 《대동신문》을 창간하고, 반민족행위처벌법을 반대했다. 1949년 반민특위에 체포되었으나 풀려났고, 1950년 제2대 국회의원에 당선되었으나, 임기 중 교통사고로 사망했다. 2002년 친일파 708인 명단에 밀정 부문으로 선정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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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종형 - [인물]에 관한 문서 | |
---|---|
기본 정보 | |
이름 (한자) | 李鍾榮 |
원어명 | 李鍾榮 |
출생일 | 1895년 4월 20일 |
출생지 | 조선 강원도 정선 |
사망일 | 1954년 2월 15일 |
사망지 | 대한민국 강원도 정선에서 병사 |
직업 | 정치인, 前 언론인 |
배우자 | 강신상 (필명 이취성) |
웹사이트 | 대한민국헌정회 |
정치 경력 | |
의원 선수 | 1 |
정당 | 무소속 |
경력 | 한국민주당 당무위원, 대한독립촉성국민회 전임위원, 무소속 국회의원 (1954년 1월 23일 사퇴) |
의원 대수 | 제2대 前 국회의원 |
학력 | |
학력 | 일본 와세다 대학교 법학과 중퇴 |
2. 생애와 주요 이력
이종형은 일제강점기 관동군의 밀정으로 활동했으며, 해방 이후에는 극우 반공주의자로 활동한 인물이다.
강원도 정선 출신으로, 원산에서 소학교와 중학교를 졸업했다. 와세다 대학교 법학과를 중퇴했다는 주장이 있으나, 학교 측 기록에서는 확인되지 않는다. 3·1 운동에 참여했다가 복역했다는 주장 역시 본인의 주장 외에는 근거가 부족하다.
일제강점기에는 만주에서 관동군 촉탁 밀정으로 활동하며 수많은 독립운동가를 체포하고 살해하는 데 앞장섰다. 해방 이후에는 대동신문을 창간하여 반공주의를 주장하고 여운형 등 진보 인사들을 공격했다. 반민특위에 체포되기도 했으나, 반민특위 해산으로 풀려났다. 이후 제2대 국회의원에 당선되었으나, 재임 중 교통사고로 사망했다.
주요 이력은 다음과 같다.
시기 | 내용 |
---|---|
일제강점기 이전 | 강원도 정선 출생, 원산 보광중학교 졸업, 와세다 대학교 정경과 수학 (졸업 여부 불분명) |
일제강점기 | 3·1 운동 이후 조상섭, 이광세, 김도원 등과 운니동 사건 참여[1][4][5][3], 관동군 밀정 활동, 조선총독부 경무국 촉탁 |
해방 이후 | 대동신문 사장[6], 반민특위에 의해 체포 및 석방, 제2대 총선에서 정선군 선거구 (대한독립촉성국민회) 당선[1], 1954년 수원시에서 지프 전복 사고로 사망[7] |
2. 1. 일제강점기 밀정 활동
일제강점기 만주 지역에서 관동군 촉탁 밀정으로 활동하며 악명을 떨쳤다. 밀정 활동 중에는 권수정(權守楨)이라는 가명도 사용했다.[11]강원 정선 출생으로, 자세한 성장 과정은 알려져 있지 않다. 원산에서 소학교와 중학교를 졸업하고 와세다 대학교 법학과 보통청강과정을 중퇴했다고 주장했으나, 와세다 대학교 학적 퇴학 명부에서 확인되지 않아 신빙성이 떨어진다는 견해가 있다. 3·1 운동 참가 및 복역 주장 역시 본인의 주장일 뿐, 사료에서 확인되지 않아 거짓으로 여겨진다.
만주로 건너가 의열단에 위장 가입한 뒤 밀정으로 활동했다. 1930년 밀정 조직인 만주보민회와 연관된 초공군(剿共軍) 사령부 조직에 가담하여 고문 겸 군재판관을 지냈다. 군경 지휘권을 가지고 지린성에서 독립운동가 수십 명을 직접 체포하여 살해하거나 투옥시켰다. 그에게 체포된 독립운동가는 250명에 달하며, 그 가운데 17명은 이종형에 의해 사형 판결을 받았다고 한다.[12] 팟캐스트 이이제이 95회 '친일파 이종형특집' 편에 의하면, 당시 투옥된 250명 중 사형 당한 독립투사의 수는 70명에 이르렀다고 한다.
1931년부터 동북군 총사령부 겸 동삼성 순열사위내고문의 직책으로 외교 부문을 담당하면서 밀정 활동을 계속했다. 만보산 사건을 취재한 조선일보 기자 김이삼을 살해하고, 정의부 소속 독립운동가 승진을 암살했으며, 남자현을 밀고해 사망에 이르게 한 사건에 연루된 것으로 알려져 있다. 1941년 귀국 후 조선총독부 경무부 촉탁으로 근무하면서 광복 시점까지 중국을 중심으로 활동하던 독립운동가들을 밀고 체포되도록 하였다.
2. 2. 친일 단체 활동
1942년 친일단체인 총진회를 조직하였다. 총진회는 신토 계열의 친일 단체로 정춘수 등 기독교의 친일파 인사들을 내세워 신사참배 강요 정책에 따라 신사참배를 독려하는 활동을 했다.[12]2. 3. 해방 후 친일 행적 은폐와 반공 활동
일제 패망 후, 이종형은 건준에 가담하고자 건준위원장 여운형을 찾아갔으나 거절당했다.[13] 이후 극우 우익 계열에 가담하여 철저한 반공주의를 내세웠다. 1945년 11월 반공주의를 표방하는 《대동신문》을 창간했다. 대동신문은 미군정을 비난하고 여운형을 '친일파'로 몰아붙였는데, 1946년 2월 10일 자에 여운형이 학병 권유를 했다고 대서특필하고,[14][15] 1946년 2월 17일과 18일 자 대동신문에 이틀 연속 특집 연재로 이종형 자신이 친일 한시(漢詩) 한 편을 짓고 여운형이 직접 지은 것이라고 소개했다.[16]1946년 5월에는 여운형 암살 음모를 교시하거나 찬양하여 미군정에 의해 정간 처분을 받았고, 이후 《대한일보》로 제호를 바꾸어 발행을 이어갔다. 이 무렵 정치인 테러 활동을 뒤에서 지원한 것으로 의심받기도 한다. 1946년 9월 24일 적산(敵産) 불법 처분과 공금 횡령 죄로 구속되어[17] 3년 징역 및 40만 원 벌금형을 선고받고 서대문형무소에 복역했다. 서대문형무소 수감 중 수해구제금 10만 원을 불법 처분한 혐의로 검찰의 재취조를 받기도 했다.[18] 그러나 1946년 11월 8일 돌연 무죄 판결을 받고 석방되었다.[19]
2. 4. 부정축재와 반민특위 체포
이종형은 일제 패망 후 극우 우익 계열에 가담하여 반공주의를 내세웠다. 광복 직후인 1945년 11월에 반공주의를 표방하는 《대동신문》을 창간했다.[13] 대동신문은 미군정을 비난하고 여운형을 '친일파'라고 몰아붙였으며, 1946년 2월에는 여운형이 학병 권유를 했다고 대서특필하고,[14][15] 이종형 자신이 지은 친일 한시(漢詩)를 여운형이 지은 것이라고 소개하는 특집 기사를 연달아 싣기도 했다.[16] 1946년 5월에는 여운형 암살 음모를 교시하거나 찬양하여 미군정에 의해 정간 처분을 받았고, 이후 《대한일보》로 이름을 바꾸어 발행되었다.1946년 9월 24일, 이종형은 적산(敵産) 불법처분과 공금횡령 죄로 구속되어[17] 3년 징역 및 40만원 벌금형을 선고받고 서대문형무소에 복역했다. 수감 중 수해구제금 10만원을 불법 처분한 혐의로 검찰의 재취조를 받기도 했다.[18] 그러나 1946년 11월 8일, 돌연 무죄 판결을 받고 석방되었다.[19]
대한민국 정부 수립 후 반민족행위처벌법 제정 당시, 이종형은 대동신문을 통해 "반민법은 망민법"이라 주장하며 궐기대회를 여는 등 적극적으로 반대 활동을 벌였다.
1949년 1월 10일, 반민특위는 이종형을 자택에서 체포했다. 그는 박흥식에 이어 반민법에 의해 두 번째로 체포된 인물이었다. 체포 당시 이종형은 “내가 무슨 죄가 있길래 잡으러 왔느냐”면서 육혈포를 꺼내 위협하기도 했다.[20] 반민특위 사무실에 잡혀와서도 “나는 애국자다. 나를 친일파로 몰아넣다니 이럴 수가 있느냐."고 소리치고, 마포형무소 수감 중에도 “내가 감옥에 들어온 것은 빨갱이를 잡는 데 앞장섰기 때문”이라고 악을 썼다.[20] 반민법정에서도 '자신은 만주에서 공산주의자들을 토벌했을 뿐'이라며 스스로를 '독립운동의 터를 닦은 애국자'라고 주장했다.[21] 그러나 반민특위 해산으로 곧 풀려났다.
2. 5. 제2대 국회의원 당선과 사망
1950년 고향인 정선에서 국민회 소속으로 제2대 국회의원에 당선되었다.[1] 국회의원 임기 중이던 1954년 수원시에서 지프 전복 사고로 사망했다.[7]3. 가족 관계
부인 이취성은 장로교 목회자이자 한글학자인 강병주의 딸이다.[22] 이취성의 본명은 강신상이나 이종형이 필명을 지어주었다. 이취성은 연세대학교 재단 이사장, 숭실대학교 이사장과 총장을 지낸 강신명[23]의 여동생이기도 하다.
4. 사후 평가
2002년 민족정기를 세우는 국회의원모임이 발표한 친일파 708인 명단의 밀정 부문에 선정되었다.[10] 이종형은 일제강점기에 독립운동가를 탄압하고, 해방 후에는 반공을 앞세워 친일 행적을 숨기려 한 대표적인 인물로 평가된다. 관동군 밀정 시절에는 돈화·동만 일대에서 초공군 총사령부를 조직하여 남자현 등 50명 이상의 독립운동가를 체포했으며, 만보산 사건을 보도한 기자와 독립운동가 승진을 암살했다.[2][8] 1949년 반민족행위특별조사위원회 1차 공판의 피고인이 되었으나, 본인은 그 행위를 공산당을 타멸하기 위한 반공 행위라고 변명했다.[8][9]
5. 역대 선거 결과
선거명 | 결과 | 비고 |
---|---|---|
대한민국 제헌 국회의원 선거 (충남 아산) | 낙선 | |
1948년 대한민국 재보궐선거 (서울 동대문갑) | 낙선 | |
대한민국 제2대 국회의원 선거 (강원 정선) | 당선 | 초선 |
참조
[1]
웹사이트
대한민국헌정회
https://rokps.or.kr/[...]
2023-10-10
[2]
웹사이트
공훈전자사료관 - 승진
https://e-gonghun.mp[...]
2023-10-10
[3]
웹사이트
공훈전자사료관 - 김도원
https://e-gonghun.mp[...]
2023-10-10
[4]
웹사이트
공훈전자사료관 - 조병현
https://e-gonghun.mp[...]
2023-10-10
[5]
웹사이트
공훈전자사료관 - 이광세
https://e-gonghun.mp[...]
2023-10-10
[6]
웹사이트
미군정, ‘공산당 내부 비판’ 조봉암 편지를 슬쩍 흘렸다
https://www.hani.co.[...]
2019-08-03
[7]
웹사이트
李鍾滎議員死亡(이종형의원사망)
https://newslibrary.[...]
1954-02-03
[8]
웹사이트
秘話(비화)한 世代(세대) (192) 反民特委(반민특위) [46] "나는 愛國者(애국자)다"
https://newslibrary.[...]
1977-08-15
[9]
웹사이트
"공산당 타도해 독립운동 터 닦았다"
https://www.ohmynews[...]
2005-06-06
[10]
웹사이트
국회민족정기모임 발표 친일파 708명 명단(한자이름) : 정치 : 인터넷한겨레 The Hankyoreh
http://legacy.www.ha[...]
2023-10-10
[11]
독립유공자
승진
[12]
뉴스
1949년 3월 26일자 경향신문
http://dna.naver.com[...]
경향신문
1949-03-26
[13]
서적
여운형: 시대와 사상을 초월한 융화주의자
서울대학교출판부
2008
[14]
웹사이트
국립중앙도서관
http://www.dlibrary.[...]
[15]
서적
한국현대민족운동연구 2(역비한국학연구총서 13)
역사비평사
[16]
서적
몽양 여운형 평전
[17]
뉴스
1946년 11월 10일자 동아일보
http://dna.naver.com[...]
동아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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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
뉴스
1946.11.09 경향신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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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향신문
1946-11-09
[19]
뉴스
1946년 11월 10일 경향신문
http://dna.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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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46-11-10
[20]
뉴스
1977.06.15 경향신문
http://dna.naver.com[...]
경향신문
1977-06-15
[21]
뉴스
"공산당 타도해 독립운동 터 닦았다" - 친일파들의 어처구니 없는 변명... 민족문제연구소 자료공개
http://www.ohmynews.[...]
오마이뉴스
2005-06-06
[22]
간행물
피의자 심문조서 - 이취성
http://www.pcic.go.k[...]
1949-02
[23]
웹인용
강신명 [姜信明]
http://100.empas.com[...]
엠파스 백과사전
2008-01-06
[24]
뉴스
1949년 2월 8일자 경향신문
http://dna.naver.com[...]
경향신문
1949-02-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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