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철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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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이철득은 사도세자의 서자인 은언군의 서자로, 1780년에 태어났으나 정확한 생년월일은 알려지지 않았다. 홍국영이 상계군을 세자로 추대하려 한 사건으로 인해 가족과 함께 강화도로 유배되었으며, 천주교 관련 사건에 연루되어 가택 연금되었다. 1801년 아버지 은언군과 함께 탈출을 시도하다 체포되었고, 이후 홍경래의 난에 연루되기도 했으나 죽음을 모면했다. 1817년 형 이성득이 사망한 후 순조의 명으로 임시 석방되었으나 이후 행적은 기록되지 않았으며, 사망 시기와 묘소 위치도 알려지지 않았다.
이철득은 1780년(정조 4) 사도세자의 서자인 은언군 이인의 서자로 태어났으나, 정확한 생년월일은 미상이다. 그의 존재는 오랫동안 잊혀졌다가 1970년대 이후 대한민국 정부 주도로 조선왕조실록, 승정원일기, 비변사등록, 일성록 등을 국역하는 과정에서 알려지게 되었다. 은언군의 아들이었으나 왕족으로 예우받지 못했고, 관련된 기록은 대부분 철종, 고종 때 삭제되어 상세히 알 수 없다. 한때 상계군 이담의 어릴 적 아명으로 추정되었으나, 상계군은 1786년 의문의 독살을 당했고, 이철득의 이름은 1801년(순조 1) 이후의 기록에 등장한다. 비변사등록 1812년 2월 기사에 따르면, 강화부로 파견된 금부도사 심노숭(沈魯崇)은 이철득이 당시 만 32세이며 미혼이었다고 보고했다. 한때 풍계군과 동일인물로도 추정되었으나, 풍계군은 선원록 선원보략에 1783년생으로 기록되어 있다.
[1]
실록
황승원이 은원군과 그 아들 철득이 달아나다 잡힌 일을 장계하다
순조실록
1801-05-28
2. 생애
이철득은 한성부에서 태어났지만, 홍국영이 상계군을 정조의 양자로 삼고 세자로 추대하려다 실패하면서 강화도로 유배되었다. 1812년(순조 12) 2월 24일 강원도관찰사 이호민(李好敏)의 비밀 계획에 의해 강화도로 파견된 금부도사의 보고서에 의하면 당시 그는 얼굴이 철색이고 구레나룻이 짧고 다소 비대하였다 한다.
이철득은 자녀 없이 일찍 사망하여 철종 즉위 후에도 조명받지 못했다.
2. 1. 출생과 가계
1780년(정조 4) 사도세자의 서자인 은언군 이인의 서자로 태어났으나, 정확한 생년월일은 미상이다. 상계군 이담, 이창순, 이창덕의 이복 동생이며 풍계군 이당의 이복 형이었다. 생모가 이성득의 생모와 동일인인지 전산군부인 이씨인지 여부는 불분명하다. 정조에게는 서조카가 된다.[1]
홍국영이 상계군을 정조의 양자로 들이고 세자로 추대하려 했으나 실패하고, 아버지 은언군도 삭탈당하고 역적으로 몰리면서 가족을 따라 강화도로 가서 성장하였다.
2. 2. 강화도 유배와 탈출 시도
1801년(순조 1) 적모 상산군부인 송씨와 적형수 평산군부인 신씨가 천주교 신앙으로 사사당한 뒤 천극죄인 신분이 되어 가택연금되었다.[1] 그해 5월 27일 새벽 3~4시 경 이철득은 아버지 은언군과 함께 가시덤불을 뚫고 강화도에서 탈출하려다가 강화와 김포의 경계에서 병졸에게 적발, 체포되고, 강화 유수 황승원(黃昇源)의 탄핵을 받았다.[1] 아버지 은언군은 5월 29일 사사령을 받고 6월 30일 사사되었다.
이철득은 천극죄인의 신분으로 형제들인 이성득, 이당, 이광 등과 함께 강화도의 한 민가에 감금되어 지속적인 감시를 받았다. 1805년 8월 27일에는 이철득, 이성득, 이쾌득이 감금당한 집에 불이 나 강화부유수 오재소(吳載紹)가 조정에 장계를 올려 보고하였다.[2] 1812년(순조 12) 2월 24일, 강화부로 파견된 금부도사 심노숭(沈魯崇)이 조정에 보고한 보고서에 따르면, 당시 이철득은 만 32세였으며 미혼이었다.
2. 3. 홍경래의 난 관련 역모
1817년 홍경래의 난에 가담했다가 살아남은 채수영 등이 김조순을 비롯한 세도가를 비난하며 무사를 모아 거병하려다 체포되어 사형당했다.[3] 이때 이철득은 추대 대상이었으나 죽음을 모면하였다.[3]
2. 4. 석방 시도와 이후 행적
1817년(순조 17) 11월 30일 형 이성득이 형문을 받다가 고문치사하면서 순조는 은언군의 자녀들을 석방하려 했다. 순조는 특별 명령을 내려 이철득과 이쾌득을 임시로 풀어주었다.[3] 이후의 행적은 미상이다.
전산군부인 이씨의 묘비문에 의하면 전산군부인 이씨가 낳은 첫 아들은 요절하였다 하며[4], 그가 이성득의 동복 친동생인지 혹은 전계대원군의 동복 친형인지 여부는 불분명하다. 1817년 무렵까지는 생존해 있었는데, 당시까지도 그는 미혼이었다. 1817년 이후로 기록이 등장하지 않는다. 사망 장소와 사망 원인은 미상이며 묘소의 위치도 미상이다.
2. 5. 사후
가까운 왕족이 사망했을 때 하사되는 예장 등에 대한 기록은 나타나지 않고 있다. 묘소의 위치는 미상이다.
철종 즉위 후 은언군 가족 및 관련자들, 상계군 내외 등이 복작되거나 복권되고, 전산군부인 이씨, 이원경, 이욱 등 작위 미수여자에게 작위가 추서되었지만 그는 증직과 증작을 받지 못하고 잊혀졌다.
3. 가족 관계
관계 이름 출생 사망 조부 사도세자 1735년 2월 13일 1762년 7월 12일 이복 큰아버지 정조 사촌 동생 문효세자 사촌 동생 순조 사촌 동생 숙선옹주 아버지 은언군 1754년 5월 29일 1801년 6월 30일 적모 상산군부인 송씨 1753년 1801년 서모 또는 생모 전산군부인 이씨 1764년 1819년 6월 4일 생모 또는 서모 이름 미상 1821년 12월 16일 이복 형 상계군 담 1769년 1786년 11월 20일 이복 형 이창순 이복 형 이창덕 이복 동생 풍계군 당 1783년 2월 1일 1826년 5월 8일 이복 누나 형 또는 이복 형 이성득 1775년 1817년 11월 27일 동생 또는 이복 동생 전계대원군 광 1785년 4월 29일 (음력 3월 21일) 1841년 12월 14일 (음력 11월 2일) 조카 철종
상산군부인 송씨는 진천인(鎭川人) 송낙휴(宋樂休)의 딸이다.[5]
전산군부인 이씨는 은언군의 첩으로, 전주인(全州人) 이덕희(李德喜)의 딸이다.[6]
이름 미상의 생모 또는 서모는 은언군의 첩이다.[7]
이복 누나는 참봉(參奉) 한각신(韓覺新)에게 시집갔다.
풍계군 당은 이복 숙부 은전군 이찬(恩全君 李禶, 1759년 - 1778년)의 양자로 출계하였다.
전계대원군 광의 자는 창강(昌康), 본명은 해동(海東)이다.
참조
[2]
승정원일기
1805-08-29
[3]
실록
승정원에서 의계하여 죄인을 옮기면 안된다고 하였으나, 듣지 않다
순조실록
1817-11-30
[4]
묘비문
전계군의 친형, 김포시 통진면 마송리 전산군부인 이씨 묘비문
[5]
문서
생전에 받은 작위이다.
[6]
문서
사후 철종이 즉위한 뒤에 추증된 작위이다.
[7]
승정원일기
1821-12-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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