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산군부인 이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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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전산군부인 이씨는 조선 후기의 인물로, 은언군의 첩이었으며, 훗날 철종의 생모인 전계대원군의 어머니이다. 1779년 은언군의 첩이 되어 전계대원군을 낳았으며, 1801년 은언군의 사후에 작위 없이 살았다. 1819년 강화도에서 사망했으며, 사후 전산군부인으로 추봉되었다. 묘소는 김포시에 있었으나, 도로 공사로 인해 파묘되어 유해는 김포시립 추모공원에 안치되었다.
본관은 전주(全州)로 유학(幼學) 이덕희(李德喜)의 딸이다. 초기 생애나 가계에 대해서는 자세히 알려진 바가 없다. 조선 중기 이후 동성동본 혼인이 금지되었음에도 왕족인 은언군의 첩이 된 구체적인 경위는 불분명하다.
남편은 사도세자의 서자이자 영조의 서손자인 은언군 이인(李䄄)이며, 전산군부인 이씨는 은언군의 첩이었다. 슬하에 아들 전계대원군 이광(李㼅)을 두었고, 손자로는 회평군 명, 영평군 경응, 그리고 조선 제25대 국왕 철종이 있다. 친정 아버지는 이덕희(李德喜)이다.
2. 생애
1779년`(정조 4년)` 가을, 은언군의 소실이 되어 아들 둘을 낳았다. 첫째 아들은 일찍 사망했고, 둘째 아들이 후일 철종의 아버지가 되는 이광이다. 1801년 남편 은언군이 강화도 유배지에서 사약을 받고 사망하자, 검소하게 생활하며 지냈다고 전해진다. 그러나 은언군이 정치적 사건에 연루되었고, 그의 본부인과 며느리가 천주교 박해로 처형되는 일에 연좌되면서 아들 이광 역시 왕족으로서의 대우를 받지 못하고 평생 작위 없이 지내야 했다. 전산군부인 이씨 또한 생전에 특별한 작위를 받지 못했다.
1819년 6월 4일 강화도에서 오래 앓던 병으로 사망했다.[2][3] 사후 처음에는 강화도에 임시로 묻혔다가 이후 경기도 고양군을 거쳐 1853년(철종 4년) 경기도 통진군 양촌면 마송리(현 김포시 통진읍 마송리)로 묘소가 이장되었다.
1849년 손자인 철종이 즉위한 후, 순원왕후와 대신들의 건의에 따라 전산군부인(全山郡夫人)으로 추봉되었다. 그러나 왕실 족보인 선원보략에는 한동안 이름이 오르지 못하다가 1900년대 이후에야 등재되었다. 대한민국 정부 수립 이후 조선왕조실록 등의 국역과 묘소 발견 등을 통해 그 존재가 알려지게 되었다.
2. 1. 출생과 가계
본관은 전주(全州)로, 유학(幼學) 이덕희(李德喜)의 딸로 태어났으나 초기 생애에 대해서는 알려진 바가 없다. 그가 전주 이씨 어느 파의 후손인지 역시 알려져 있지 않다.
조선 중기 이후 성리학이 사회 규범으로 자리 잡으면서 동성동본 간의 혼인이 금지되었음에도, 그가 어떤 이유로 은언군의 첩이 되었는지는 명확하지 않다. 전산군부인의 묘소 근처에 임영대군의 후손들이 살고 있었으나, 그의 친정이 임영대군 가문과 관련이 있는지는 확실하지 않다.
2. 2. 은언군의 소실
1779년`(정조 4년)` 가을, 은언군의 소실이 되었다. 그녀는 서자인 첫 아들을 낳았으나 일찍 세상을 떠났고, 이후 둘째 아들 이광(후일 전계대원군)을 낳았다. 이는 김문근이 기록한 그녀의 묘비문에 근거한다. 일찍 죽은 첫 아들이 이철득과 같은 인물인지, 혹은 은언군의 다른 첩에게서 태어난 아들인지는 명확하지 않다. 관련된 실록, 일성록, 승정원일기, 비변사등록 등의 기록 상당수가 세초(洗草)되거나 먹줄, 칼 등으로 훼손되어 확인하기 어렵다. 그녀가 1779년 은언군의 첩이 된 사실은 은언군 신도비에도 기록되어 있다. 그녀의 친손자인 철종은 서자였던 전계대원군 이광의 서자였다.
1801년 5월, 남편 은언군이 유배지에서 사약을 받고 세상을 떠났다. 묘비문에 따르면, 남편이 사망하자 그녀는 피눈물을 흘리며 상을 치렀고, 이후 감식(甘食, 맛있는 음식)이나 비단옷을 전혀 가까이 하지 않았다. 또한, 영조의 계비였던 정순왕후 김씨와 사도세자의 기일에는 하루 종일 채식만 하며 고인들을 추모했다고 전해진다.
그녀는 생전에 특별한 작위를 받지 못했다. 아들 이광 역시 은언군의 여러 서자 중 한 명이었고, 아버지 은언군이 이복 형인 상계군 추대 사건에 연루되어 강화도로 유배된 전력이 있었다. 게다가 은언군의 본부인 송씨와 며느리 신씨가 천주교 신자라는 이유로 처벌받는 일에 연좌되면서, 이광은 왕족으로 제대로 대우받지 못하고 평생 작위 없이 평민처럼 살아야 했다. 이광은 그의 아들 철종이 순원왕후 등에 의해 순조의 양자 자격으로 조선의 국왕으로 즉위한 후에야 '전계군'이라는 작호를 받았고, 이후 대원군으로 추존되었다. 철종실록에는 작위가 없던 이광의 작호를 정할 때, 그의 이복형들인 상계군과 풍계군의 작호에서 글자를 따 '전계(全溪)'로 정했다는 기록이 남아 있다.
2. 3. 최후
1819년 6월 4일 강화도에서 사망했다. 승정원일기의 1819년 6월 5일[2]과 6월 7일 기록에 따르면, 당시 강화부 유수였던 조만원(趙萬元)은 전산군부인이 숙병(오래 앓던 병)으로 6월 4일에 사망했다고 보고했다.[3] 또한 6월 7일 금부도사 권사겸(權思謙)의 보고에는 시신에서 액체가 흘러나오는 삼루(滲漏) 현상이 나타났다고 기록되어 있다. 정확한 사망 장소와 사망 원인은 알려지지 않았다.
2. 4. 사후
사후 시신은 처음 강화도의 한 야산에 임시로 안장되었다가 이후 고양군으로 이장되었다. 1853년(철종 4년)에는 경기도 통진군 양촌면 마송리 산 13-48(현재 경기도 김포시 통진읍 마송리 산 13-48)에 토지를 마련하여 다시 이장하였고, 철종의 명으로 봉분이 추가로 조성되었다. 묘소가 있는 지역은 후에 김포군 양촌면으로 편입되었다가, 다시 김포시 통진면으로 편입되었다. 현재 묘소 주변에는 공원과 중학교, 고등학교가 들어서 있으며, 금쌀공원 서편, 마송중학교, 마송고등학교 북서쪽에 위치한다. 전산군부인이 김포 통진과 직접적인 연고가 있었는지는 명확히 알려지지 않았으나, 남편 은언군의 외가이자 시어머니 숙빈 임씨의 친정 일가가 통진 인근에 살고 있었다.
1849년(철종 즉위년) 9월 20일, 친손자인 철종이 즉위하자 순원왕후는 전계대원군의 사친(私親)이자 철종의 본생조모인 이씨를 상산군부인 송씨의 예에 따라 추증해야 한다고 건의했다. 같은 날 정원용 등도 전계대원군의 생모이므로 상산군부인 송씨의 예를 따라 추존해야 한다고 상소하여, 결국 전산군부인(全山郡夫人)으로 추봉되었다. 그러나 고종 즉위 후에 편찬된 왕실 족보인 선원보략에는 한동안 이름이 오르지 못했고, 1900년대 이후에야 왕실 족보 선원보에 실리게 되었다.
묘비문은 1852년(철종 3년) 11월 말 철종의 명으로 1853년(철종 4년) 2월 돈녕부 영사 영은부원군 김문근이 글을 짓고, 순조의 사위인 수록대부 남녕위 윤의선의 글씨로 새겨 세워졌다.
대한민국 정부 수립 이후, 김포에 있던 그의 묘소가 발견되면서 그 존재가 널리 알려지게 되었다. 대한민국 정부 주도로 조선왕조실록, 승정원일기, 일성록, 비변사등록 등을 국역하는 과정에서 전산군부인이라는 작호명이 확인되었고, 철종대왕팔고조도가 발견되면서 그의 존재가 다시 알려졌다. 1979년에는 통진 마송리에 있는 묘비문을 탁본하여 판독하였다.
3. 가족 관계
3. 1. 남편과 자녀
김문근이 기록한 묘비문에 따르면, 1779년 가을 은언군의 첩(소실)이 되었다.[1] 그녀는 은언군과의 사이에서 두 아들을 두었으나 첫 아들은 일찍 세상을 떠났다. 둘째 아들은 후일 전계대원군이 되는 이광(李㼅)이다.[1] 이 첫 아들이 이철득과 동일 인물인지, 혹은 은언군의 다른 첩에게서 태어난 아들인지는 관련 기록들이 손상되어 명확하게 확인할 수 없다.[1]
1801년 5월 남편 은언군이 유배지에서 사사되자, 묘비문의 기록에 따르면 그녀는 피눈물을 흘리며 상을 치렀고, 좋은 음식과 비단옷을 멀리했다고 한다.[1] 또한 영조의 계비 정순왕후 김씨나 사도세자의 기일에는 종일 채식을 하며 고인들을 추모했다고 전해진다.[1]
아버지 은언군이 이복 적형 상계군 추대 사건에 연루되어 강화도로 유배되었고, 이후 은언군의 본부인 송씨와 며느리 신씨가 천주교 신앙 문제로 처벌받는 등 집안이 어려움을 겪었다. 이로 인해 아들 이광 역시 왕족으로 대우받지 못하고 작위 없이 평민으로 살았다.[1] 이광은 그의 아들 원범이 순원왕후 등에 의해 순조의 양자 자격으로 왕위에 오르면서 전계군으로 추증되었고, 이후 대원군으로 다시 추존되었다.[1]
관계 | 이름 | 생몰년 | 비고 |
---|---|---|---|
남편 | 은언군 이인(李䄄) | 1754년 5월 29일 ~ 1801년 6월 13일 | |
아들 | 이름 미상 | 요절 | 첫째 아들[1] |
아들 | 전계대원군 이광(李㼅) | 1785년 4월 29일 ~ 1841년 12월 14일 | 둘째 아들 |
며느리 (정실) | 완양부대부인 최씨(崔氏) | 1804년 2월 19일 ~ 1840년 2월 19일 | 전계대원군의 부인 |
손자 (적손) | 회평군 명(李明) | 1827년 9월 11일 ~ 1844년 9월 6일 | 다른 이름은 원경(元慶) |
며느리 (첩) | 이씨(李氏) | 전계대원군의 첩 | |
손자 (서손) | 영평군 경응(李景應) | 1828년 7월 20일 ~ 1902년 2월 1일 | |
며느리 (첩) | 용성부대부인 염씨(廉氏) | 1793년 7월 20일 ~ 1863년 3월 | 전계대원군의 첩 |
손자 (서손) | 철종 묘(昪) | 1831년 ~ 1863년 | 제25대 국왕 |
3. 2. 며느리와 손자
전산군부인 이씨는 아들 전계대원군 이광(李㼅)을 통해 며느리 셋과 손자 셋을 두었다. 전계대원군은 은언군의 서자였으며, 철종의 아버지이다.전계대원군의 부인과 자녀는 다음과 같다.
구분 | 이름 | 생몰년 | 비고 |
---|---|---|---|
며느리 | 완양부대부인 최씨(完陽府大夫人 崔氏) | 1804년 2월 19일 - 1840년 2월 19일 | 전계대원군의 정실 부인 |
이씨(李氏) | ? - ? | 전계대원군의 첩 | |
용성부대부인 염씨(龍城府大夫人 廉氏) | 1793년 7월 20일 - 1863년 3월 | 전계대원군의 첩, 철종의 생모 | |
손자 | 회평군 명(懷平君 明) | 1827년 9월 11일 - 1844년 9월 6일 | 적손, 완양부대부인 최씨 소생. 다른 이름은 원경(元慶). |
영평군 경응(永平君 景應) | 1828년 7월 20일 - 1902년 2월 1일 | 서손, 이씨 소생. | |
철종(哲宗) 변(昪) | 1831년 - 1863년 | 서손, 용성부대부인 염씨 소생. 조선의 제25대 국왕. |
정실 부인인 완양부대부인 최씨에게서는 적손자인 회평군 명을 얻었고, 첩인 이씨에게서는 서손자 영평군 경응을, 또 다른 첩인 용성부대부인 염씨에게서는 훗날 왕위에 오르는 철종을 얻었다. 철종은 은언군의 서자인 전계대원군의 서자였다.
3. 3. 친정
전주 사람인 유학 이덕희(李德喜)의 딸이다.[1][2] 친정어머니의 이름은 알려져 있지 않다.전산군부인이 전주 이씨 어느 파의 후손인지는 알려져 있지 않다.[3] 그녀의 묘소 근처에 임영대군의 후손이 살았다는 기록이 있지만, 친정이 임영대군의 후손인지는 확실하지 않다.[3]
4. 무연고 분묘 처리 사건
은언군의 부인인 전산군부인 이씨의 묘소가 후손들의 관리 부재와 도시 개발 과정에서 무연고 분묘로 취급되어 파묘되는 일이 발생했다. 한때 왕족이었던 인물의 묘소임에도 불구하고, 시대 변화와 후손 및 사회의 무관심 속에 방치되다가 결국 김포시의 도로 공사 과정에서 2011년 이후 행정 절차에 따라 정리되었다. 이 사건은 권력에서 멀어진 왕족의 쓸쓸한 말로를 보여주는 동시에, 역사적 인물이나 유적 관리에 대한 사회적 관심의 필요성을 시사한다.
4. 1. 묘소 관리와 매각
은언군의 후손을 대신하여 묘소를 관리한 것은 인근에 살던 광평대군파의 후손이었다.1934년 은언군의 후손들에 의해 묘소 부지가 포함된 산이 매각되었다. 묘소는 2015년 무렵까지도 김포시 마송리에 소재해 있었으나, 2011년 경기도 김포의 터널 및 4차선 도로 공사 부지에 포함되면서 문제가 발생했다. 결국 유족이 나타나지 않아 공고 후 무연고 분묘로 처리되어 파묘되었다. 묘소가 있던 부지는 2017년 당시 4차선 도로 준공 예정이었다.
파묘된 시신은 화장되어 김포시 통진읍 애기봉로571번길 165(귀전리 83-4)에 위치한 김포시립 추모공원 봉안당에 안치되었다.
한편, 묘소 인근 주민들이 군부인 묘비와 석물을 문화재로 보존해달라고 건의하였으나 받아들여지지 않았고, 현재 묘비석과 상석, 장명등은 모두 행방을 알 수 없다.
4. 2. 파묘와 현황
은언군의 후손을 대신하여 인근에 살던 광평대군파 후손들이 묘소를 관리하였다.1934년 은언군의 후손들은 묘소 부지가 포함된 산을 매각했다. 2011년 경기도 김포에서 진행된 터널 및 4차선 도로 공사 부지에 전산군부인 이씨의 묘소도 포함되었다. 그러나 후속 조치가 이루어지지 않고 유족도 나타나지 않아, 공고 후 무연고 분묘로 처리되어 파묘되었다. 묘소가 있던 부지에는 2017년 4차선 도로가 준공될 예정이었다.
파묘된 시신은 화장되어 김포시 통진읍 애기봉로571번길 165(귀전리 83-4)에 위치한 김포시립 추모공원 봉안당에 안치되었다.
전산군부인의 묘소는 2015년 무렵까지 김포시 마송리에 있었다. 묘비와 석물에 대해 인근 주민들이 문화재 보존을 건의했으나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결국 묘비석, 상석, 장명등은 모두 행방을 알 수 없게 되었다.
참조
[1]
문서
철종대왕 팔고조도 2
http://kyujanggak.sn[...]
[2]
간행물
승정원일기 2117권 1819년(순조 19년, 청 가경 24년) 6월 5일 을미 29번째 기사
[3]
간행물
승정원일기 2117권 1819년(순조 19년, 청 가경 24년) 6월 7일 정유 23번째 기사
[4]
간행물
승정원일기 2148권 1821년(순조 21년, 청 도광 1년) 12월 17일 계사 27번째 기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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