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학균 (대한제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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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이학균은 대한제국 시기의 군인으로, 윤무 군사 학당 교장의 부관으로 시작하여 육군무관학교 교장, 원수부 기록국장 등을 역임했다. 을미사변 당시 명성황후 시해 사실을 외국 군사고문과 외교관에게 알렸으며, 러일 전쟁 중 대한제국의 중립을 위해 노력했으나, 한일의정서 체결 이후 일본의 감시를 피해 상하이로 망명했다. 망명 중에는 언론을 통해 일본의 침략을 알리려 노력했으며, 이후 아편 중독으로 고통받다 1909년 상하이에서 사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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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학균 (대한제국) - [인물]에 관한 문서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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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본 정보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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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름 | 이학균 |
한자 표기 | 李學均 |
생애 | |
출생 | 미상 |
사망 | 1909년 4월 |
사망 장소 | 청나라 상하이 |
경력 | |
소속 | 조선군 대한제국군 |
복무 기간 | 1895년–1907년 |
최종 계급 | 정장 (正將) 또는 참장 (參將) (오늘날의 준장) |
주요 지휘 | 조선군 제1대대 |
2. 생애
이학균은 대한제국 시기의 군인으로 활동했다. 1895년 시위대 제1대대장으로 임명되었으며,[32] 을미사변 당시 명성황후 시해 사건의 급박한 상황을 외국 공관에 알리는 역할을 했다.[33][34] 이후 궁내부 참의관, 영선사 장, 중추원 의관 등 여러 관직을 거쳤고,[35][36][37] 시위 제2대대장을 맡기도 했다.[38][39]
그는 육군무관학교 교장,[40] 원수부 기록국장 등을 역임하며 군 요직을 거쳤고,[43][45][46] 육군 부령,[41] 참장으로 진급했다.[44] 독일 하인리히 폰 프로이센 왕자가 방한했을 때 호위를 맡기도 했다.[42] 러일 전쟁 발발 즈음에는 이용익 등과 함께 고종에게 중립을 지킬 것을 건의했으나,[47] 한일의정서 체결 이후 일본의 압박을 받게 되었다. 신변의 위협을 느낀 그는 현상건과 함께 미국 군함을 통해 상하이로 망명했다.[48] 망명지에서도 영국 <트리뷴>지의 기자 더글라스 스토리를 만나 일본 침략의 부당성을 알리고 고종의 의지를 전하는 등 활동을 이어갔다.
1907년 참장 직에서 해임되었고,[49] 이후 상하이에서 아편 중독으로 고생하다[50] 1909년경 사망했다.[51]
2. 1. 초기 활동
1888년, 이학균은 윤무관의 교장이었던 미국인 윌리엄 맥엔타이어 다이의 부관으로 임명되었다.[24] 1895년 5월에는 시위대 제1대대장으로 임명되었고,[1][32] 같은 해 7월 종2품이 되었다.[2]1895년 10월 8일 을미사변이 발생하여 명성황후가 일본 낭인과 군인들에게 시해당하자, 이학균은 경복궁의 심상치 않은 상황을 파악하고 외국 군사고문과 외교관들에게 이 사실을 알렸다.[32][3] 그는 새벽 4시경 윌리엄 맥엔타이어 다이 장군과 영국 총영사 흴리어를 깨워 급박한 상황을 전했다.[33][4] 이 덕분에 외국 고문들과 외교관들은 위험을 감지하고 궁궐에서 빠져나올 수 있었으나,[33] 황후를 구하기에는 이미 늦은 상황이었다.[34] 총소리가 가까워지자 이학균은 사복으로 갈아입고 도망쳤다.[4]
을미사변 이후 일본의 영향력이 강화되자, 이학균은 이범진과 함께 러시아 공사관으로 피신하기도 했다.[5] 1896년에는 궁내부 참의관[35] 및 내부 통역관으로 임명되었다.[6] 1897년 7월에는 청나라에 파견되는 특명전권공사(영선사 장)로 임명되었으나,[7][36] 같은 달 다시 내부 통역관으로 임명되기도 하였다.[8] 이후 다시 궁내부 참의관을 거쳐[37] 중추원 일등의관이 되었다.[9][37] 1897년 11월, 참령 계급으로 시위 제2대대장에 임명되었다.[10][38] 그러나 이후 부하 장교인 정위 한봉호가 문제를 일으키자 대대장으로서 감독 책임을 물어 근신 처분을 받기도 했다.[39]
2. 2. 을미사변과 그 이후
1895년 5월 시위대 제1대대장으로 임명되었고,[1][32] 같은 해 7월에는 종2품으로 승진했다.[2] 을미사변 당시, 명성황후가 일본 낭인과 군인들에게 시해당하자 이학균은 경복궁에서 벌어지는 심상치 않은 상황을 윌리엄 맥엔타이어 다이, 아파나시 세레딘-사바틴[3] 및 영국 총영사 힐리어 등 외국 군사고문과 외교관들에게 알렸다.[33] 그는 새벽 4시경 다이 장군과 힐리어 총영사 등을 직접 깨워 급박한 상황을 알리고 궁궐에서 안전하게 빠져나올 수 있도록 도왔으나,[33][4] 황후를 구하기에는 이미 늦은 상황이었다.[34] 총소리가 가까워지자 이학균 자신도 사복으로 갈아입고 몸을 피했다.[4] 을미사변 이후 조선에 대한 일본의 통제력이 강화되자, 신변의 위협을 느낀 그는 이범진과 함께 러시아 공사관으로 피신했다.[5]1896년에는 궁내부 참의관[35]과 내부 통역관(내부 대신 이재순에 의해 임명)을 지냈다.[6] 1897년 7월에는 잠시 청나라 주재 특명전권공사(영선사 장)로 임명되었으나,[7][36] 곧 다시 내부 통역관으로 복귀했다.[8] 이후 궁내부 참의관을 거쳐 중추원 일등의관으로 임명되었다.[9][37] 1897년 11월, 참령 계급으로 시위 제2대대장이 되었으나,[10][38] 예하 부대 소속 정위 한봉호가 근무지를 이탈하여 문제를 일으키자, 대대장으로서 지휘 책임을 물어 근신 징계를 받았다.[39]
1898년 10월 7일, 육군무관학교 교장으로 임명되었다.[11][40] 민족주의적 성향의 교장으로서 그는 박승환을 포함한 많은 생도들에게 영향을 미쳐 일본의 침략에 저항하는 군인을 양성하고자 노력했다.[12] 같은 해 12월 30일에는 신태휴와 함께 육군 부령(현재의 중령)으로 진급했고,[13][41] 독일 하인리히 왕자가 방한했을 때 경호를 맡기도 했다.[14][42] 1899년 7월에는 원수부 기록국장(또는 군부 검사국장)에 임명되었고,[15][43] 같은 해 8월 21일 육군 참장(현재의 소장)으로 승진했다.[16][44] 1900년 2월 19일에는 다시 원수부 기록국장을 맡았으며,[17][45] 1901년 3월 19일에는 다시 육군무관학교 교장으로 복귀했다.[18][46] 1901년 10월 11일에는 군법재판소장에 임명되었고,[19] 1902년 10월에는 일본 제국 육군의 추계 훈련을 참관하기 위해 일본을 방문했다.[20]
러일 전쟁 발발 직전, 이학균은 이용익 등 친러시아 및 친미국 성향의 인사들과 함께 고종에게 대한제국의 중립을 선언하도록 설득했다.[21][47] 그러나 한일의정서가 강압적으로 체결되자, 일본은 이학균, 현상건, 길영수 등 반일 성향 인사들의 정치적 영향력을 제거하기 위해 이들을 투옥하려 시도했다.[22] 이학균은 한때 연금 상태에 놓이기도 했으나,[47] 일본이 자신을 납치하려는 음모를 꾸미고 있음을 감지하고 경계했다.[24][47] 그는 신변 보호를 위해 프랑스 공사관에 잠시 피신했다가,[24] 미국 군함 신시내티호에 비밀리에 승선하여 현상건과 함께 상하이로 망명길에 올랐다.[48] 일본 측도 그의 망명 사실을 뒤늦게 파악했지만 체포에는 실패했다.[25][48] 1904년 3월 9일, 그는 군법재판관 직에서 해임되었다.[23]
상하이 망명 중 이학균은 현상건과 함께 영국 <트리뷴>지의 종군기자 더글라스 스토리를 만나, 일본 제국주의 침략의 부당함과 이에 맞서는 고종의 항일 의지를 세계 여론에 알리고자 노력했다. 이는 스토리 기자가 한국 문제에 관심을 갖게 되는 중요한 계기가 되었다. 또한 제1차 한일 협약(1904년 8월) 체결 이후에는 러시아 제국으로 건너가, 전 주한 러시아 공사 파블로프의 비밀 메시지를 고종에게 전달하는 임무를 수행하기도 했다.[26] 이 메시지에는 러시아가 대한제국의 독립을 보장하고 일본의 간섭을 저지할 것이라는 약속이 담겨 있었다.[26]
1907년 9월 3일, 그는 군대에서 해임되었고,[27][49] 1909년 4월경 상하이에서 사망했다.[28][51] 사인은 아편 중독으로 알려져 있다.[50]
2. 3. 대한제국 시기 군사 활동
1898년 10월 7일, 이학균은 대한제국 육군무관학교 교장으로 임명되었다.[11] 그는 민족주의적 신념을 바탕으로 박승환을 비롯한 많은 생도들에게 영향을 주었으며, 이들이 장차 일제의 침략에 맞서는 민족주의 군인으로 성장하는 데 기여했다.[12] 같은 해 12월 30일, 신태휴와 함께 육군 부령(현재의 중령)으로 진급하였다.[41][13] 독일 제국의 하인리히 폰 프로이센 왕자가 대한제국을 방문했을 때에는 그의 호위를 맡기도 했다.[42][14]1899년 7월 20일에는 원수부 기록국장에 임명되었고,[43] 며칠 뒤인 7월 25일에는 군부 검사국장으로도 임명되었다.[15] 같은 해 8월 21일에는 육군 참장(현재의 소장)으로 승진하였다.[44][16] 이듬해인 1900년 2월 19일에는 군부 기록국장으로 임명되었다.[17][45]
1901년 3월 19일, 이학균은 다시 대한제국 육군무관학교 교장으로 임명되었고,[46][18] 같은 해 10월 11일에는 군법재판소장이 되었다.[19] 1902년 10월에는 일본 제국 육군의 가을 군사 훈련을 참관하기 위해 일본을 방문하기도 했다.[20]
러일 전쟁 발발 직전, 이학균은 이용익 등 친러시아 및 친미국 성향의 인사들과 함께 고종에게 전쟁에서 중립을 지킬 것을 설득하였다.[47][21] 이는 일본의 침략 야욕을 경계하고 대한제국의 자주권을 지키려는 노력이었으나, 한일의정서가 강제로 체결된 이후 일본은 이학균과 현상건, 길영수 등에게 압력을 가하기 시작했다. 일본은 이들의 정치적 영향력을 약화시키려 했으며 투옥까지 시도하였다.[22] 1904년 3월 9일, 이학균은 군법재판관 직에서 해임되었다.[23]
일본의 납치 위협을 느낀 이학균은 프랑스 공사관에 잠시 몸을 숨겼다가[24] 현상건과 함께 미국 군함 신시내티호를 통해 비밀리에 상하이로 망명하였다.[47][48] 일본은 그의 망명 사실을 뒤늦게 파악했지만 체포에는 실패했다.[48][25] 상하이 망명 중에도 이학균은 현상건과 함께 영국 <트리뷴>지의 종군기자 더글라스 스토리를 만나 일본 제국주의 침략의 실상과 이에 저항하는 고종의 의지를 국제 사회에 알리고자 노력했다. 1904년 8월 한일 협약이 체결된 후에는 러시아 제국으로 건너가 당시 주한 러시아 공사였던 파블로프의 비밀 메시지를 고종에게 전달하기도 했다. 이 메시지에는 러시아가 한국의 독립을 보장하고 일본의 간섭을 막겠다는 내용이 담겨 있었다.[26]
그러나 이러한 노력에도 불구하고 대한제국의 국권은 점차 일본에게 넘어가고 있었으며, 결국 1907년 9월 3일 이학균은 참장 계급을 박탈당하고 군대에서 강제로 해임되었다.[49][27]
2. 4. 러일전쟁 전후의 행보와 망명
러일 전쟁 발발 이전, 이학균은 이용익 및 다른 친러시아, 친미국 성향의 관료들과 함께 고종에게 전쟁에서 중립을 지킬 것을 설득하였다.[21][47] 이는 일본의 영향력 확대를 경계한 움직임이었다. 그러나 한일의정서가 체결된 이후, 일본은 이학균과 현상건, 길영수 등 그의 정치적 동지들이 대한제국 정치에 미치는 영향력을 약화시키기 위해 이들을 투옥하려 시도하였다.[22] 비록 투옥에는 실패했지만, 일본의 압박은 계속되었다. 1904년 3월 9일, 이학균은 군법재판관 직에서 해임되었다.[23]일본 제국이 자신을 납치하려 한다는 위협을 느낀 이학균은 프랑스 공사관에 잠시 몸을 숨겼다가,[24] 이후 현상건과 함께 미국 군함 신시내티호에 비밀리에 승선하여 상하이로 망명하였다.[48] 일본 측도 이학균의 망명 사실을 인지했지만, 그를 체포하는 데는 실패하였다.[25][48]
상하이 망명 중에도 이학균은 활동을 멈추지 않았다. 그는 현상건과 함께 영국 <트리뷴> (Tribune) 지에서 파견한 종군 기자 더글라스 스토리 (Douglas Story)와 면담하였다. 이 자리에서 이학균은 일본 제국주의의 침략 실상과 이에 굴하지 않는 고종의 독립 의지를 세계 언론에 알려줄 것을 호소하였다. 이는 스토리 기자가 한국의 현실을 깊이 파악하는 계기가 되었다.[47] 또한 1904년 8월 한일 협약이 체결된 이후, 이학균은 러시아로 건너갔다. 그는 당시 주한 러시아 공사였던 파블로프의 비밀 메시지를 고종에게 전달했는데, 이는 러시아가 한국의 독립을 보장하고 일본의 간섭을 막겠다는 약속을 담고 있었다.[26] 이는 일본의 침략에 맞서 외교적 활로를 찾으려 했던 노력으로 평가된다.
그러나 대한제국 내에서 그의 입지는 점차 좁아졌다. 1907년 9월 3일, 이학균은 결국 군대에서 참장(소장) 계급을 박탈당하며 해임되었다.[27][49] 그는 망명지인 상하이에서 1909년 4월 사망하였다.[28][51]
2. 5. 사망
1907년 9월 3일, 대한제국 육군 참장(소장) 직위에서 해임되었다.[27][49] 이후 상하이 망명 생활 중 아편 중독이 심해져 고통스러운 시간을 보냈으며,[50] 1909년 4월경 상하이에서 사망하였다.[51][28]3. 평가
호러스 뉴턴 앨런은 이학균을 "유능한 군인"으로 평가하면서도, 그가 "겁을 먹고 현상건과 함께 손탁 호텔에 피신하기 전까지는 아무런 문제도 일으키지 않았다"고 언급했다. 이후 의심을 받자 중국으로 도피했고, 낙마 사고 후 아편 중독자가 되었다며 "그는 유능한 사람이 될 수도 있었을 것이다"라고 아쉬움을 표했다.[29]
반면 윌리엄 프랭클린 샌즈는 이학균을 다이(Dye) 장군의 조수이자 육군무관학교 교장으로 언급하며 "좋은 친구였다"고 긍정적으로 평가했다.[30]
4. 상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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