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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의 대미영 선전포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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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일본의 대미영 선전포고는 1941년 12월 8일, 일본 천황의 이름으로 발표된 조서를 통해 이루어졌다. 이 조서는 일본이 미국과 영국에 전쟁을 선포하는 내용을 담고 있으며, 일본의 육해군 장병과 국민들에게 전쟁 수행에 매진할 것을 촉구했다. 조서에서는 동아시아의 안정을 확보하고 세계 평화에 기여하는 것을 전쟁의 명분으로 내세웠으나, 실제로는 대동아공영권을 내세운 아시아 침략을 정당화하려는 의도가 담겨 있었다. 일본은 미국과 영국의 경제 제재를 자국의 생존을 위협하는 행위로 간주하고, 이를 전쟁 개시의 주요 원인으로 제시했다. 조서에는 천황의 권위를 강조하고, 국민의 단결을 호소하는 내용이 포함되어 있다. 이 선전포고는 1931년 만주 사변 이후 악화된 미일 관계와, 1941년 8월 일본에 대한 미국의 경제 제재, 그리고 11월의 일미 교섭 결렬 등을 배경으로 이루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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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의 대미영 선전포고
개요
쇼와 천황 공식 사진 1 (잘림)
쇼와 천황
도조 히데키
개전 당시의 내각총리대신, 도조 히데키
주요 내용미국영국에 대한 일본의 선전 포고
관련 문서제국 정부의 대미 통첩 각서
문서 정보
원문米國及󠄁英國ニ對スル宣戰ノ詔書 (미국 및 영국에 대한 선전의 조서)
관련 링크Japan declares war, 1941

2. 조서 전문

다음은 일본 천황의 이름으로 발표된 선전포고문의 텍스트다.[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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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음은 대일본제국 천황의 이름으로 발포된 선전 조서의 원문과 그 문면을 상용한자와 현대 가나 표기법으로 표기한 것이다.[4] 혼동하기 쉽지만, 이 조서는 "선전포고"한 것을 국민에게 알리는 것이며, 선전포고는 상대에게 통고하여 행하는 것이다. 후자의 의미에서의 "선전포고"는 같은 날 오후 1시 20분에 대영미 개전을 선명하는 정부 성명과 그 각국에 대한 통고 내지 전 세계를 향한 발표에 의해 이루어지게 된다. 다만, 도고 시게노리 외상(당시)은 훗날의 도쿄 재판에서 자신으로서는 미일 특별 교섭 중에서 "향후 교섭을 계속해도 타결에 이를 수 없다고 인정할 수밖에 없는 뜻을 미국 정부에 통고하는 것을 유감으로 생각한다"라는 문면의 "제국 정부의 대미 통첩 각서"를 통고한 것으로, 사실상의 최후 통첩을 행한 것으로 생각하고 있다고 말했다.(참고 진주만 공격#「제국 정부의 대미 통첩 각서」와 선전포고)

2. 1. 원문

원문한국어 번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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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음은 대일본제국 천황의 이름으로 발포된 선전 조서의 원문과 그 문면을 상용한자와 현대 가나 표기법으로 표기한 것이다.[4]

s:미국 및 영국에 대한 선전의 조서

2. 2. 한국어 번역

원문한국어 번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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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음은 일본 천황의 이름으로 발표된 선전포고문의 번역문이다.[2]

2. 3. 현대 일본어 번역






어명어새




쇼와 16년 12월 8일[5]

3. 역사적 배경

1931년 만주사변 이후 일본 제국중국 침략을 본격화했다. 1937년 중일 전쟁 발발 후, 일본은 중국 대륙을 빠르게 점령했지만, 장제스국민당마오쩌둥의 공산당은 제2차 국공 합작으로 결사항전했다.

국제 사회는 일본의 침략을 비난했다. 미국은 9개국 조약(워싱턴 체제)에 따라 일본에 경제 제재를 강화했다. 1941년 8월, 미국은 일본의 만주, 중국, 프랑스령 인도차이나 진주를 문제 삼아 석유 및 철 수출 금지 조치를 단행했다. 이는 대동아공영권을 명분으로 한 일본 팽창 정책에 타격을 주었고, 일본은 이를 적대 행위로 간주하여 진주만 공격과 미국 및 영국 선전포고로 태평양 전쟁을 일으켰다.

1941년 4월부터 워싱턴 D.C.에서 '''일미 교섭'''이 진행되었다. 11월 1일 대본영 정부 연락 회의와 11월 5일 어전 회의의 「제국 국책 수행 요령」에 따라, 일본 정부는 11월 말까지 협상 결렬 시 무력 사용 방침을 세웠다.

11월 26일(일본 시간 11월 27일) 코델 헐 국무 장관의 "헐 노트"는 일본에 최후 통첩으로 받아들여져 개전 결정으로 이어졌다. "헐 노트"는 초안이며 구속력이 없다고 명시되어 최후 통첩 여부는 논란이 있지만, 일본 측 「을안」과 "헐 노트"의 큰 차이로 전쟁이 불가피했다는 주장도 있다.

일본국 정부11월 27일11월 29일 대본영 정부 연락 회의와 11월 29일 중신 회의를 거쳐 12월 1일 오후 2시 어전 회의에서 개전을 최종 확정했다.

11월 5일 일본 개전 결정 후, 외무성은 선전 포고 방식을 검토해 전투 시작 다음 날 선전 포고를 결정했다. 도고12월 1일 개전을 예상했으나, 11월 27일 대본영 정부 연락 회의에서 개전 결정 후에도 해군에게서 대미 교섭 지속 요청을 받았다. 해군과 대화에서 개전 예정일이 12월 8일이며, 해군이 미국을 방심시키려 교섭을 늦춘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12월 1일 어전 회의에서 개전이 최종 결정되었지만, 교섭 중단 통고 여부, 최후 통첩 문구는 대본영과 외무성이 결정했다.

3. 1. 중일 전쟁과 국제 정세

1931년 만주사변 이후 일본 제국중국에 대한 침략을 본격화했다. 1937년 중일 전쟁이 발발하자, 일본은 중국 대륙을 빠르게 점령해 나갔다. 그러나 중국은 중화민국 국민정부의 장제스가 이끄는 국민당마오쩌둥이 이끄는 공산당의 제2차 국공 합작을 통해 결사항전을 이어갔다.[1]

국제 사회는 일본의 침략 행위를 비난했다. 미국은 9개국 조약(워싱턴 체제)에 의거, 일본에 대한 경제 제재를 강화했다. 1941년 8월, 미국은 일본의 만주, 중국, 프랑스령 인도차이나 진주를 문제 삼아 일본에 대한 석유 및 철 수출 금지 조치를 단행했다.[2] 이는 대동아공영권 건설을 명분으로 내세운 일본의 팽창 정책에 큰 타격을 주었다. 일본은 이를 적대적 행위로 간주하고, 진주만 공격과 함께 미국 및 영국에 선전포고를 하며 태평양 전쟁을 일으켰다.[3]

3. 2. 미일 관계 악화와 협상 과정

1931년 만주 사변 이후, 일본미국의 관계는 계속 나빠졌다. 이 문제를 해결하고자 1941년 4월부터 워싱턴 D.C.에서 양국 정부 간 '''일미 교섭'''이 진행되었다. 11월 1일 대본영 정부 연락 회의와 11월 5일 어전 회의에서 결정된 「제국 국책 수행 요령」에 따라, 일본 정부는 11월 말까지 협상이 이루어지지 않으면 무력을 사용한다는 방침을 세웠다.[6]

11월 26일(일본 시간 11월 27일) 코델 헐 국무 장관이 일본에 제시한 "헐 노트"는 일본에서 최후 통첩으로 받아들여졌고, 이는 개전 결정으로 이어졌다. "헐 노트"는 초안이며, (향후 교섭에) 구속력이 없다고 명시되어 있어, 최후 통첩 여부에 대한 논란은 존재한다. 그러나 일본 측의 「을안」과 "헐 노트"의 큰 차이 때문에 전쟁은 불가피했다는 주장도 있다.[6]

"헐 노트"의 중국 철병 요구에 대해, 당시 일본에게 만주 포함 여부는 중요했다. 도고 외상은 만주를 포함하는 것으로 해석해[7] 개전이 불가피했다고 주장했다. 그러나, 다른 고위 관계자들은 "만주 포함" 해석을 인정하지 않아, 전범 재판에서 일본이 전쟁으로 몰렸다는 음모론이라는 주장도 제기되었다.[8]

일본국 정부11월 27일11월 29일 대본영 정부 연락 회의와 11월 29일 중신 회의를 거쳐 12월 1일 오후 2시 어전 회의에서 개전 방침을 최종 확정했다.[9]

11월 5일 일본의 개전 결정 후, 외무성은 선전 포고 방식을 검토했고, 최종적으로 전투 시작 다음 날 선전 포고를 하기로 결정했다.[11]

도고12월 1일 개전을 예상했으나, 11월 27일 대본영 정부 연락 회의에서 개전이 결정된 후에도 해군에게서 대미 교섭 지속 요청을 받았다. 해군과의 대화에서 개전 예정일이 12월 8일이며, 해군이 미국을 방심시키기 위해 교섭을 최대한 늦추려 한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10] 12월 1일 어전 회의에서 개전이 최종 결정되었지만, 교섭 중단 통고 여부, 최후 통첩 문구 등은 대본영과 외무성이 결정하기로 했다.[11]

워싱턴에서 12월 8일 (현지 7일) 노무라 주미 대사와 구루스 특명 전권 대사의 대미 선전 포고 통고 지연 문제는, 이들이 지참한 문서가 "일본 측이 교섭 성립 전망이 없다고 판단했다"는 내용이었고, 선전 포고, 국교 단절, 교섭 중단을 직접 선언하는 문구는 없었다는 점에서 기인한다.[11] 이것이 사실상 선전 포고였다는 주장은 개전 당시부터 있었지만, 통고문 전달 지연설은 도조가 전후 도쿄 재판에서 자신의 변호를 위해 이 통고를 선전 포고로 생각한다고 주장하면서 일본에 퍼졌다.[12]

3. 3. 진주만 공격과 태평양 전쟁 발발

1931년 만주사변 이후 일본미국의 관계는 악화일로를 걷고 있었다. 1941년 4월부터 워싱턴에서 일미 교섭이 계속되었으나, 11월 26일 (일본 시간 11월 27일) 코델 헐 국무 장관이 일본 측에 제시한 "헐 노트"는 일본에게 최후통첩과 다름없었다.[6] "헐 노트"는 중국에서의 철병 요구를 담고 있었는데, 당시 일본에게는 만주를 포함하는지 여부가 중요했다. 도고 외상은 만주를 포함하는 것으로 해석[7]하여 개전으로 이어졌다고 주장했다. 그러나 "만주를 포함한다"라고 해석했다고 인정되는 인물은 없어, 전후 전범 재판에서 일본이 전쟁으로 몰렸다는 음모론이라는 설[8]도 있다.

결국 일본 정부는 12월 1일 어전 회의에서 개전을 최종 결정했다.[9] 12월 8일(현지 시간 12월 7일), 일본은 진주만 공격을 감행하고 미국 및 대영 제국에 선전포고를 함으로써 태평양 전쟁을 일으켰다. 일본은 대동아공영권을 명분으로 내세웠지만, 이는 제국주의의 구실이었다는 견해가 지배적이다. 미국은 일본의 침략을 막기 위해 1941년 8월 일본에 석유 금수 조치를 부과했고, 일본은 이를 적대적 행위로 간주하여 진주만 공격으로 보복했다.[4]

노무라 주미 대사와 구루스 특명 전권 대사가 미국에 선전포고를 통고하는 것이 지연되었는데, 이들이 지참한 문서는 "일본 측이 교섭 성립의 전망이 없다고 판단하게 되었다"는 것을 알리는 것이었으며, 선전포고나 국교 단절을 선언하는 문구는 없었다.[11] 이것이 사실상 선전포고문이라는 설은 개전 당시부터 있었지만, 통고문 전달 지연설은 도조가 전후 도쿄 재판에서 자신의 변호를 위해 주장한 데서 비롯되었다.[12]

4. 조서의 내용 분석

일본 천황의 이름으로 발표된 선전포고 조서의 내용을 항목별로 나누어 분석하면 다음과 같다.

'''1. 서두:'''

조서는 "천우(天佑)를 보유하고 만세일계(萬世一系)의 황조(皇祚)를 디뎌온 대일본제국 천황"[4]이라는 문장으로 시작한다. 이는 천황이 신의 가호를 받아 영원히 하나의 혈통으로 이어져 온 황위를 계승하는 존재임을 나타낸다. 이어서 천황은 "충성용무(忠誠勇武)로운" 국민에게 전쟁을 선포한다고 밝힌다.

'''2. 전쟁 선포:'''

천황은 미국대영 제국에 대한 전쟁을 선포하며, 육군해군 장병, 공무원, 일반 백성 등 모든 국민에게 전쟁 수행에 전력을 다할 것을 명령한다.[2]

'''3. 전쟁의 배경:'''

조서는 전쟁의 배경을 다음과 같이 설명한다.


  • 동아시아 안정과 세계 평화 기여: 일본은 동아시아 안정을 확보하고 세계 평화에 기여하는 것을 메이지 천황다이쇼 천황으로부터 이어진 정책적 목표로 삼았다.
  • 미국과 영국의 방해: 미국영국이 일본의 평화적 통상을 방해하고 경제 단교를 감행하여 일본의 생존에 중대한 위협을 가했다고 주장한다. 또한, 이 두 나라가 충칭 정부(장제스 정권)를 지원하여 동아시아의 혼란을 조장하고 동양 제패의 야망을 품고 있다고 비난한다.
  • 자존자위: 이러한 상황에서 일본은 자국의 존립과 자위를 위해 부득이하게 전쟁을 선택할 수밖에 없었다고 주장한다.


'''4. 천황의 역할:'''

皇祖皇宗|황조황종일본어의 신령이 굽어살피는 가운데, 천황은 백성들의 충성과 용기에 의지하여 선조의 유업을 완수하고 동아시아의 평화를 확립할 것을 맹세한다.[2]

'''5. 국민에 대한 호소:'''

조서는 "억조일심(億兆一心)"[4], 즉 천황을 중심으로 모든 국민이 하나 되어 전쟁에 임해야 한다는 점을 강조하며, 전쟁 참여를 독려한다.

하지만 이러한 주장은 일본의 침략 전쟁을 정당화하기 위한 명분일 뿐이었다. 일본은 대동아공영권이라는 이념을 내세워 동아시아를 침공했지만, 현재는 이것이 제국주의의 구실이었다는 견해가 지배적이다.[4]

4. 1. 전쟁 명분과 정당화

일본은 조서를 통해 미국과 영국에 대한 선전포고 명분과 정당성을 제시했다. 조서의 주요 내용은 다음과 같다.

  • 동아시아 안정과 세계 평화 기여: 일본은 동아시아 안정을 확보하고 세계 평화에 기여하는 것을 메이지 천황다이쇼 천황으로부터 이어진 정책적 목표로 삼았다.
  • 미국과 영국의 방해: 미국영국이 일본의 평화적 통상을 방해하고 경제 단교를 감행하여 일본의 생존에 중대한 위협을 가했다고 주장했다. 또한, 이 두 나라가 충칭 정부(장제스 정권)를 지원하여 동아시아의 혼란을 조장하고 동양 제패의 야망을 품고 있다고 비난했다.
  • 자존자위: 이러한 상황에서 일본은 자국의 존립과 자위를 위해 부득이하게 전쟁을 선택할 수밖에 없었다고 주장했다.


그러나 이러한 주장은 표면적인 명분일 뿐, 실제로는 일본의 침략 전쟁을 정당화하고 미화하려는 의도가 담겨 있었다. 일본은 '대동아공영권'이라는 이념을 내세워 동아시아 대부분을 침공했지만, 현재는 이것이 제국주의의 구실이었다는 견해가 지배적이다.[4] 일본은 9개국 조약을 통해 확립된 워싱턴 체제 하에서, 미국이 일본의 만주, 중국, 프랑스령 인도차이나 진주 등 아시아에 대한 무력 침략을 중단시키기 위해 경제 제재를 가하자, 이를 적대적이고 도발적인 행위로 간주하고 전쟁을 개시했다.

4. 2. 천황의 역할과 권위

일본 천황의 이름으로 발표된 선전포고 조서에서 천황은 "천우(天佑)를 보유하고 만세일계(萬世一系)의 황조(皇祚)를 디뎌온" 존재[4], 즉 신의 가호를 받아 영원히 하나의 혈통으로 이어져 온 황위를 계승하는 존재로 묘사된다. 皇祖皇宗|황조황종일본어의 신령이 굽어살피는 가운데, 천황은 백성들의 충성과 용기에 의지하여 선조의 유업을 완수하고 동아시아의 평화를 확립할 것을 맹세한다.[2]

조서는 천황을 중심으로 한 일본의 국가 체제를 명확히 보여준다. 천황은 국가의 최고 통치자이자, 국민 통합의 상징이다. 조서에서 "억조일심(億兆一心)"[4]이라는 표현은 천황을 중심으로 모든 국민이 하나 되어 전쟁에 임해야 한다는 점을 강조한다.

전쟁 수행에 있어서 천황은 단순한 상징적 존재가 아니었다. 조서는 천황이 직접 미국과 영국에 대한 선전을 포고하고, 육해군 장병, 공무원, 일반 백성 등 모든 국민에게 전쟁 수행에 전력을 다할 것을 명령하는 주체임을 명시한다.[2] 이는 천황이 전쟁의 최고 결정권자이며, 전쟁 수행의 구심점임을 보여준다.

4. 3. 일본 국민에 대한 호소

詔書|쇼쇼|조서일본어는 일본 국민에게 전쟁 참여를 독려하고 있다. 먼저, "충성용무로운 그대 유중에 표한다"라며 국민을 직접 지칭하고, "억조일심 국가의 총력을 다하여 정전의 목적을 달성함에 유산함이 없도록 기하라"고 명령한다. 즉, 모든 국민이 한마음으로 전쟁에 총력을 다할 것을 요구하고 있다.[2]

또한, "황조황종의 신령이 위에 있노라. 짐은 그대 유중의 충성용무에 신의하여 조종의 유업을 회홍하고"라는 구절을 통해, 국민의 충성심과 용맹함을 믿고 천황의 유업을 이어받아 전쟁에서 승리할 것이라는 점을 강조한다.[2]

이는 전쟁을 '조종의 유업'으로 미화하고, 당시 일본 사회에 만연했던 천황 숭배 사상을 이용하여 국민의 희생을 정당화하려는 의도로 해석된다. 詔書|쇼쇼|조서일본어는 이러한 방식으로 일본 국민들에게 전쟁에 대한 적극적인 참여와 헌신을 요구하고 있다.

5. 조서에 대한 비판적 시각

일본대동아공영권 성립을 목표로 동아시아 대부분을 침공했으며, 현재는 일본에서도 제국주의의 구실이라는 견해가 지배적이다.[4] 미국은 9개국 조약(워싱턴 체제)에서처럼 대중·대만 권익에 강한 관심을 가졌고, 1941년 8월, 일본의 만주, 중국, 프랑스령 인도차이나 진주 등 아시아 무력 침략을 중단시킨다는 명목으로, 일본의 행동을 봉쇄할 목적으로, 일본에 대한 경제 제재로서 석유 수출 및 철 수출을 금지했다. 일본은 이러한 행동을 적대적이고 도발적인 행위라고 판단, 진주만 공격 및 미국과 영국 양국에 대한 선전포고를 통해 전쟁을 개시함으로써 그 해결을 도모했다.

5. 1. 침략 전쟁 미화 비판

일본은 조서를 통해 침략 전쟁을 정당화하고, '대동아 공영권'이라는 허구적 이념을 내세웠다는 비판을 받는다.[4] 이는 당시 일본이 동아시아 대부분을 침공한 것에 대한 명분으로 사용되었으나, 현재는 제국주의의 구실로 널리 인식되고 있다.[5]

5. 2. 역사 왜곡 문제

조서에는 일본이 대동아공영권을 내세워 동아시아를 침략한 행위를 정당화하고, 미국의 경제 제재를 침략 행위로 규정하는 등 역사 왜곡 문제가 나타난다.[4] 大東亜共栄圏|대동아공영권일본어은 현재 일본에서도 제국주의 침략을 위한 구실이었다는 견해가 지배적이다.[4]

특히, 중일 전쟁의 책임을 중화민국 정부에 전가하고, 미국의 경제 제재를 일본의 생존을 위협하는 행위로 묘사하는 부분은 심각한 역사 왜곡이다. 실제로는 일본의 침략 행위가 중일 전쟁의 근본 원인이었으며, 미국의 경제 제재는 일본의 침략을 막기 위한 조치였다.

이러한 역사 왜곡은 일본의 침략 전쟁을 정당화하고, 전쟁 범죄에 대한 반성을 회피하려는 의도로 해석될 수 있다. 올바른 역사 인식은 과거의 잘못을 인정하고, 미래 세대에게 진실을 전달하는 데 필수적이다.

5. 3. 한국의 관점

1941년 12월 8일 일본의 대미영 선전포고 조서는 일제 강점기라는 아픈 역사를 겪은 한국의 관점에서 볼 때, 일본 제국주의의 침략적 본성을 드러내는 문서로 해석된다. 조서의 내용과 당시의 역사적 사건들은 다음과 같이 비판적으로 조명될 수 있다.

  • "동아의 안정"과 "세계 평화"라는 명분의 허구성: 조서는 "동아의 안정을 확보"하고 "세계 평화에 기여"한다는 명분을 내세우지만, 이는 1931년 만주 사변 이후 일본이 만주국을 건설하고, 1937년 중일 전쟁을 일으켜 중국 대륙을 침략한 사실을 은폐하려는 기만적인 주장에 불과하다. 특히, 1910년 한일 병합 조약을 통해 대한제국을 강제로 병합하고 식민 지배를 시작한 일본이 "동아의 안정"을 운운하는 것은 한국인들에게는 용납할 수 없는 역사 왜곡이다.[4]

  • "대동아공영권"의 허상: 조서에는 명시되지 않았지만, 일본은 대동아공영권이라는 구호 아래 아시아 여러 나라를 침략하고 자원을 수탈했다. 이는 "아시아 민족 해방"이라는 허울 좋은 명분으로 포장되었지만, 실제로는 일본의 패권 추구를 위한 제국주의적 침략 행위였다. 한국 역시 일제 강점기 동안 대동아공영권의 일환으로 강제 징용, 위안부 동원 등 수많은 인권 유린과 경제적 착취를 당했다.[4]

  • 미국의 경제 제재에 대한 왜곡된 주장: 조서는 미국이 일본의 평화적 통상을 방해하고 경제 단교를 감행했다고 주장하지만, 이는 일본의 침략 행위에 대한 정당한 대응을 왜곡하는 것이다. 미국은 9개국 조약을 통해 중국의 영토 보전을 약속했고, 일본의 침략 행위는 이를 위반하는 것이었다. 1941년 8월 미국의 석유 금수 조치는 일본의 침략을 막기 위한 불가피한 조치였다.[4]

  • "자존자위"라는 명분의 기만성: 조서는 일본이 "자존자위"를 위해 전쟁을 일으킬 수밖에 없었다고 주장하지만, 이는 침략 전쟁을 정당화하기 위한 궤변에 불과하다. 일본은 진주만 공격을 통해 선제공격을 감행했으며, 이는 국제법을 위반하는 명백한 침략 행위였다.


결론적으로, 일본의 대미영 선전포고 조서는 일제 강점기의 아픔을 겪은 한국인들에게는 일본의 침략적 본성과 역사 왜곡을 보여주는 문서로 인식된다. 조서에 담긴 미사여구는 일본의 제국주의적 야욕을 가리기 위한 허울에 불과하며, 한국은 일본의 침략 전쟁으로 인해 막대한 피해를 입었다는 사실을 잊어서는 안 된다.

6. 조서 발표 이후의 경과

조서가 발표된 당일, 일본 제국은 말레이 반도에 상륙함과 동시에 진주만 공격을 감행하여 태평양 전쟁을 개시하였다.[1] 이후 일본군은 필리핀, 홍콩, 싱가포르 등 동남아시아 각지로 진격하며 파죽지세의 공세를 이어갔다.

참조

[1] 웹사이트 Japan declares war, 1941 | Gilder Lehrman Institute of American History https://www.gilderle[...] 2021-12-08
[2] 서적 The Rise and Fall of Imperial Japan https://books.google[...] Pen and Sword Military 2021-07-18
[3] 웹사이트 Japan declares war, 1941 | Gilder Lehrman Institute of American History https://www.gilderle[...] 2021-12-08
[4] 문서 米國及英國ニ對スル宣戰ノ詔書
[5] 웹사이트 "「米英両国に対する宣戦のご詔勅」をわかりやすく解説します" https://shakai-chire[...] まほろば社会科研究室 2022-12-25
[6] 서적 東郷茂徳 : 伝記と解説 原書房
[7] 간행물 ハル・ノートと満州問題 https://koara.lib.ke[...] 慶應義塾大学法学研究会 1996-12
[8] 서적 太平洋戦争開戦過程の研究 https://iss.ndl.go.j[...] 芙蓉書房出版 2013
[9] 서적 祖父東郷茂徳の生涯 文藝春秋
[10] 서적 昭和史 : 1926-1945 平凡社
[11] 웹사이트 対米宣戦布告と日・タイ軍事協定問題 https://chuo-u.repo.[...] 中央大学 2023-10-27
[12] 뉴스 朝日新聞 1947-12-20
[13] 뉴스 我生存を脅威権威冒涜 平和の希望遂に空し 1941-12-09
[14] 웹인용 Japan declares war, 1941 | Gilder Lehrman Institute of American History https://www.gilderle[...] 2021-12-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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