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적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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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일본 적군은 1969년 결성된 일본의 신좌파 테러 조직으로, 마르크스-레닌주의를 기반으로 자본주의 타도와 사회주의 공화국 건설을 목표로 했다. 팔레스타인 해방 인민 전선(PFLP)과 연대하여 1970년대와 1980년대에 걸쳐 텔아비브 공항 총기 난사 사건, 일본항공 납치 사건 등 다수의 테러를 자행했다. 1980년대 후반 이후 조직은 쇠퇴하여, 2001년 시게노부 후사코의 해산 선언으로 공식적으로 해체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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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일본적군 - 로드 공항 사건
1972년 일본 적군이 팔레스타인 해방인민전선의 의뢰를 받아 로드 국제공항에서 무차별 총격 테러를 일으켜 승객과 공항 이용객 26명이 사망하고 73명이 중경상을 입어 국제적인 비난을 받았으며 공항 보안 강화의 계기가 되었다. - 일본의 공산주의 - 재일본조선인총련합회
재일본조선인총련합회(조총련)는 1955년 결성된 재일 조선인 단체로, 북한을 지지하며 교육, 금융, 언론 기관을 산하에 두고 북한과 밀접한 관계를 유지해 왔으나, 일본 정부의 감시 대상이자 사회 갈등, 북한 관계 변화, 재정난 등으로 어려움을 겪고 있다. - 일본의 공산주의 - 연합적군
연합적군은 마오주의를 이념으로 내세운 일본 신좌익 계열의 무장 조직으로, 내부 숙청과 폭력적인 행위, 그리고 사회적으로 큰 파장을 일으킨 사건들로 인해 몰락했다. - 공산동계 - 신주쿠 소란
신주쿠 소란은 1968년 신주쿠역에서 베트남 전쟁 반대 시위로 인해 급진적 신좌파 학생들이 주도한 대규모 폭동으로, 역 점거와 시설 파괴 등의 폭력 행위로 인해 정부가 강경 진압에 나섰으며 일본 사회에 큰 영향을 미쳤다. - 공산동계 - 공산주의자동맹 (일본)
공산주의자동맹(분트)은 1958년 일본공산당에서 분리된 학생들이 결성한 단체로, 마르크스-레닌주의와 세계 공산주의 혁명을 주장하며 일본공산당 노선을 비판했고, 미일안보조약 반대 투쟁 이후 분열되어 여러 분파로 나뉘어 활동하다가 1970년대 이후 쇠퇴했다.
일본적군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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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본 정보 | |
명칭 | 일본 적군 |
원어 명칭 | 日本赤軍 (니혼세키군) |
약칭 | JRA |
활동 기간 | 1971년 – 2001년 |
창립자 | 시게노부 후사코 오쿠다이라 쓰요시 |
설립 시기 | 1971년 2월 (아랍 적군) |
설립 장소 | 팔레스타인 , 베카 계곡 |
해산 | 2001년 4월 |
후신 | 무브먼트 연대(2001년 12월 '연대'로 결성, 동명 단체 존재로 2003년 1월 이후 개칭) |
이전 명칭 | 공산주의자동맹 적군파 (獄外G), 교토대 파르티잔 |
이념 및 목표 | |
이념 | 공산주의 마르크스-레닌주의 마오쩌둥 사상 반파시즘 반제국주의 반시오니즘 |
목표 | 마르크스-레닌주의에 기반한 공산주의 사회 건설 (일본의 공산주의 혁명) 정세 변화에 따른 세계 혁명을 위한 전략 전개 |
주요 사상 | 세계 혁명론 전단계 무장 봉기론 국제 근거지론 |
조직 | |
지도자 | 시게노부 후사코 |
주요 인물 | 오쿠다이라 쓰요시 마루오카 오사무 오쿠다이라 준조 오카모토 고조 니시카와 준 와코 하루오 등 |
관련 단체 | 독일 적군 |
규모 | 20~30명 |
활동 | |
활동 지역 | 일본 중동 유럽 남아시아 동남아시아 |
주요 활동 | 로드 공항 학살 일본항공 404편 납치 사건 일본항공 472편 납치 사건 (1977년) 말레이시아 항공 시스템 653편 추락 사건(용의) |
관계 | |
연계 단체 | 레바논 리비아 팔레스타인 해방인민전선 |
적대 국가 | 미국 |
기타 | |
지정 | 미국 테러 단체 지정 테러 단체 지정 테러 단체 지정 테러 단체 지정 |
2. 역사
시게노부 후사코는 일본의 공산주의자 동맹에서 시작된 급진적인 일본 신좌파 조직인 적군파의 주요 멤버였다. 이들은 테러리즘을 통한 혁명을 주장하며,[3] 1969년 9월에 국가에 전쟁을 선포했다. 경찰은 창립자이자 지도자인 시오미 타카야를 포함한 많은 사람들을 체포했으며, 시오미 타카야는 1970년까지 투옥되었다. 적군파는 약 200명의 회원을 잃었고, 잔당은 마오주의 그룹인 혁명좌파와 합병하여 1971년 7월 연합 적군을 결성했다. 연합 적군은 아사마 산장 사건으로 악명을 떨쳤는데, 수백 명의 경찰이 참여한 일주일 간의 포위 작전 전에 하루나 산에서 회원 14명을 숙청하여 살해했고, 이 과정에서 행인 1명과 경찰관 1명이 사망했다.[4]
시게노부 후사코는 소수의 사람들과 함께 일본을 떠났지만, 그녀의 그룹은 최대 약 40명의 회원을 보유했으며, 로다 공항 습격 사건 이후 세계에서 가장 잘 알려진 무장 좌익 단체 중 하나였다고 한다.[5]
일본 적군은 팔레스타인 해방 인민 전선(PFLP)과 밀접한 관계를 맺고 와디 하디드에게 재정 지원, 훈련 및 무기를 의존했다.
2001년 4월, 시게노부는 구금 상태에서 일본 적군이 해산되었으며, 앞으로 그들의 투쟁은 합법적인 수단으로 수행되어야 한다는 성명을 발표했다.[6]
경찰청은 2001년에 ムーブメント連帯|무브멘토 렌타이일본어라는 후속 그룹이 결성되었다고 공식적으로 밝혔다.[7]
2022년 2월 15일, 도쿄도 경찰청은 반도 쿠니오와 오카모토 코조를 포함하여 체포되지 않은 다른 전 일본 적군 테러리스트를 체포하기 위한 호출을 갱신했다.[8]
2. 1. 결성 배경 (전사(前史))
1958년 12월, 일본 공산당에서 이탈한 학생들이 공산주의자동맹(분트)를 결성했다. 이를 제1차 분트라고 부른다.[47] 제1차 분트는 1960년 안보 투쟁을 주도했지만, 지도 책임을 둘러싼 내부 갈등으로 분열, 해체되었다.[47]1966년 공산주의자동맹이 재건되었고 (제2차 분트)[47], 시게노부 후사코는 1965년 메이지 대학 야간부에 입학하여 학생 운동에 참여했고,[48][49] 1967년 하네다 투쟁에서 컷 레몬을 나눠주는 역할을 하기도 했다.[50]
1969년 9월 4일, 제2차 분트 내 최좌파가 이탈하여 공산주의자동맹 적군파(적군파)를 설립했다.[40] 시게노부 후사코는 적군파 결성에 참여했다.[50] 적군파는 전단계 무장 봉기론을 주장하며 무장 투쟁을 준비했지만, 다이보사쓰 고개 사건 등으로 대량 체포를 겪으며 실패했다.[40] 이후 시오미 다카야는 국제 근거지론을 주장했다.[40]
1970년 3월 31일, 요도호 하이재킹 사건 이후 조직이 혼란스러워졌다.[41][40] 한편, 중동 팔레스타인에서는 팔레스타인 해방 기구 등의 무장 투쟁이 이어지고 있었다.[44][40]
2. 2. 결성과 초기 활동
1971년 2월 26일, 시게노부 후사코[50][49]와 오쿠다이라 츠요시 등은 적군파의 「국제 근거지론」에 따라 팔레스타인으로 건너가 팔레스타인 해방 인민 전선(PFLP)에 국제 의용병으로 참가했다. 처음에는 '아랍 적군', '적군파 아랍 위원회' 등으로 불렸으나, 독일 적군과의 구분을 위해 1974년경부터 '일본 적군'이라는 이름을 사용하게 되었다.[51]이들은 레바논의 베카 고원을 주된 근거지로 삼아 군사 훈련을 포함한 활동을 펼쳤다. 아다치 마사오, 와카마츠 코지 등의 영화 제작자를 팔레스타인으로 초청하여 영화 '적군 - PFLP 세계 전쟁 선언' 제작에 협력하기도 했다.
1972년 2월, 연합 적군의 아사마 산장 사건이 발생하자, 일본 적군은 '적군파의 동지 제군 그리고 연합 적군의 동지 제군 그리고 친구들에게'라는 성명을 발표하여 공산동 적군파와 결별하고 독자적인 혁명 운동을 전개할 것을 선언했다.
2. 3. 과격 활동
1970년대와 1980년대에 걸쳐 일본 적군은 팔레스타인 인민해방전선(PFLP)과 연계하여 다수의 테러 사건을 일으켰다.[9] 주요 사건은 다음과 같다.발생일 | 사건명 | 장소 | 설명 |
---|---|---|---|
1972년 5월 30일 | 로도 공항 학살 | 이스라엘 텔아비브 벤구리온 국제공항 | 총격과 수류탄 공격으로 26명 사망, 약 80명 부상. 공격자 3명 중 오카모토 고조만 생존. 희생자 다수는 기독교 순례자.[10] |
1973년 7월 | 일본항공 404편 납치 | 네덜란드 상공 | 승객과 승무원은 리비아에서 풀려났고, 납치범들은 항공기를 폭파. |
1974년 1월 | 라주 사건 | 싱가포르 | 쉘 시설 공격, 5명 인질 발생. PFLP는 쿠웨이트 주재 일본 대사관 점거. 인질들은 몸값과 남예멘으로의 안전 이동 조건으로 교환. |
1974년 9월 13일 | 네덜란드 헤이그 주재 프랑스 대사관 습격 | 네덜란드 헤이그 | 대사와 10명 인질. 네덜란드 경찰관 총격 부상. 인질들은 수감된 적군파 회원 석방, 30만달러, 항공기 사용을 대가로 풀려남. 인질범들은 아덴, 남예멘을 거쳐 시리아로 이동. 시리아는 몸값 요구를 혁명으로 간주하지 않아 포기 강요.[11] |
1975년 8월 | 말레이시아 쿠알라룸푸르 AIA 빌딩 인질 사건 | 말레이시아 쿠알라룸푸르 | 50명 이상 인질. 미국 영사, 스웨덴 임시 대리자 포함. 무장 괴한들은 5명의 수감된 동료 석방 후 리비아로 이동. |
1977년 9월 | 일본항공 472편 납치 | 인도 상공 | 방글라데시 다카 강제 착륙. 일본 정부는 수감된 단체 회원 6명 석방, 600만달러 몸값 지불. |
1977년 12월 | 말레이시아 항공 653편 납치 | 불명 | 적군파 단독 회원 추정. 쿠바 주재 도쿄 대사 탑승. 항공기 추락, 탑승자 100명 전원 사망.[12] |
1986년 5월 | 박격포탄 공격 | 인도네시아 자카르타 | 일본, 캐나다, 미국 대사관에 발사.[13] |
1986년 11월 | 미쓰이 물산 마닐라 지점장 납치 | 필리핀 마닐라 | 신인민군이 와카오지 노부유키 납치, 1000만달러 (12억엔) 몸값 요구.[14] 초기 요구액은 800만달러.[15] 필리핀 공산당 대변인은 납치 비난. 적군파 연루 추측 존재.[14] |
1987년 6월 | 유사 공격 | 이탈리아 로마 | 영국 및 미국 대사관 공격.[28] |
1988년 4월 | USO 레크리에이션 시설 차량 폭탄 테러 | 이탈리아 나폴리 | 이탈리아 민간인 4명, 미국 군인 1명 사망, 15명 부상.[16][28] |
1988년 4월 | 키쿠무라 유 체포 | 미국 뉴저지 턴파이크 | 폭발물 소지. USO 폭탄 테러와 연관 추정.[17] 유죄 판결 후 2007년 석방, 일본 귀국 후 위조 서류 사용 혐의로 체포.[18] |
이러한 테러 행위는 국제적인 비난을 받았으며, 특히 텔아비브 공항 총기 난사 사건은 무고한 민간인 사상자를 발생시켜 큰 충격을 주었다.[52]
일본 정부는 일본 적군의 테러에 대응하기 위해 특수부대(SAT)를 창설했다.[52]
2. 4. 쇠퇴와 해산
1980년대에 PFLF-EO의 와디 하다드가 실각하고 사망하면서 일본적군의 활동은 정체되었다. 지도부와 멤버 간의 내부 대립도 심각해졌다.[59] 1981년 야세르 아라파트 PLO 의장이 일본을 방문했을 때, 고토다 마사하루가 일본적군에게 일본에 대한 하이재킹을 중단하도록 요청했고, PLO 도쿄 사무소 소장은 "절대 하지 않게 하겠다"라는 답변을 받았다.[60]1980년대 중반, 일본적군은 리비아의 지원을 받아[61] 팔레스타인 해방 인민 전선 총사령부(PFLP-GC)와 연계하여 '반 제국주의 국제 여단(AIIB)' 또는 '성전 여단 기구(OJB)'라는 이름으로 아시아와 유럽에서 무장 게릴라 활동을 벌였다.[62] 미쓰이 물산 마닐라 지점장 유괴 사건 등에서 다른 무장 조직을 지원하기도 했지만, 아랍 및 동구권 국가들의 지원 감소와 서방 국가들의 대테러 대책 강화로 활동이 쇠퇴했다.
1980년대 후반 이후, 새로운 지지자와 지원 확보가 어려워지고, 이스라엘 및 서방 국가들과 대립하던 아랍 및 동구권 국가들의 지원마저 끊기면서 1990년대에는 일본적군으로서의 활동이 거의 불가능해졌다. 주요 멤버들은 베카 고원을 떠나 각지로 흩어져 거점을 마련했다.
1990년, 불가리아 주재 미국 대사관 폭파를 시도했으나 불가리아 경찰에 저지되었고, PFLP-GC와 함께 시리아의 보호를 받았지만, 서방 국가와의 마찰을 피하려는 시리아의 입장 때문에 공개적인 활동은 불가능했다.[63] 1980년대 후반부터 1990년대 후반까지 마루오카 오사무와 와코 하루오 등 주요 멤버들이 잇따라 체포되면서 조직은 사실상 궤멸 상태에 놓였다.
주요 멤버 체포 상황은 다음과 같다.
연도 | 내용 |
---|---|
1987년 11월 | 도쿄도에서 잠복 중이던 마루오카 오사무 체포. |
1988년 6월 | 마루오카 오사무의 관계자로부터 필리핀에서 가명으로 생활하던 이즈미 히로시가 체포. |
1995년 3월 | 루마니아에서 잠복 중이던 요쿠다 유키코가 국외 추방 후 체포. 일본계 페루인으로 위장하여 페루 위조 여권 소지. |
1996년 6월 | 페루에서 잠복 중이던 요시무라 카즈에가 국외 추방 후 체포. |
1996년 9월 | 네팔에서 잠복 중이던 조시키 츠토무 구속. |
1997년 2월 | 레바논에서 잠복 중이던 와코 하루오, 아다치 마사오, 야마모토 마리코, 토헤이 카즈오, 오카모토 코조 구속. 토헤이는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에 의해 납치된 이시오카 토루 명의의 위조 여권 소지. 오카모토를 제외한 4명은 일본으로 송환. |
1997년 11월 | 볼리비아에서 잠복 중이던 니시카와 준 체포. |
2000년 11월, "최고 지도자" 시게노부 후사코가 오사카부다카츠키시에서 여권법 위반 혐의로 체포되었다.[52] 압수된 자료를 통해 1991년부터 일본에서 폭력 혁명을 목적으로 하는 "인민 혁명당"과 "희망의 21세기"를 설립하고, 사회민주당 (구 일본사회당)과의 연계를 계획했다는 사실이 밝혀졌다.
"희망의 21세기"는 경시청과 오사카부 경찰의 가택 수색을 받았지만, 일본적군과의 관계를 부인했다. 사회민주당 구의원 자택 등도 수색을 받았지만, 사회민주당은 관계를 부인했다.
2001년 4월, 시게노부 후사코는 옥중에서 일본적군의 해산을 선언했다.[6]
2. 5. 해산 이후
2000년 11월, "최고 지도자"였던 시게노부 후사코는 오사카부다카츠키시에서 여권법 위반 혐의로 체포되었다.[52] 체포 당시 압수된 자료를 통해 1991년부터 일본에서 폭력 혁명을 목표로 하는 "인민 혁명당"과 그 공공 활동 부문인 "희망의 21세기"를 설립하고, 이를 기반으로 사회민주당 (구 일본사회당)과의 연계를 계획했다는 사실이 밝혀졌다."희망의 21세기"는 경시청과 오사카부 경찰의 가택 수색을 받았으나 일본 적군과의 관계를 부정했다. 사회민주당 구의원 자택 등도 수색을 받았지만, 사회민주당은 관계를 부인했다.
2001년 4월, 시게노부 후사코는 옥중에서 "일본 적군으로서의 해산 선언"을 발표했다.[52] 그러나 경찰청은 시게노부 후사코의 해산 선언[64]이 무장 투쟁을 완전히 부정하지 않고, 도주 중인 7명의 멤버에 대해 언급하지 않은 점을 지적하며, 일본 적군의 위험성이 여전하다고 판단했다.[65]
2001년 12월, 일본 적군의 후계 조직 "연대"가 결성되었다. 이들은 "투쟁의 역사를 계승한다"고 밝히며 텔아비브 공항 난사 사건을 "일본인 3명의 전사가 목숨을 걸었던 연대의 증거"라고 평가했다.[40]
시게노부 후사코는 산케이 신문과의 인터뷰에서 과거 활동에 대해 "많은 사람들에게 폐를 끼치고 있다는 것을 깨닫지 못했다"며 자기 비판했지만, 텔아비브 공항 난사 사건 등 살인 사건에 대한 견해는 바꾸지 않았다.
헤이그 사건 등에 관여했던 와코 하루오는 2005년 전 멤버의 절도 사건을 계기로 "일본 적군에는 반사회적·반인민적 성격이 있었다"고 비판했다.[66]
2022년 5월 28일, 징역 20년 형기를 마치고 출소한 시게노부는 "반세기 전의 일이지만, 인질을 잡는 등 우리들의 전투를 우선시하여 알지도 못하는 사람들에게 피해를 준 일이 있었다"며 사죄했지만, "자신이 '테러리스트'라고 생각한 적은 없다"고 주장했다.[49]
2022년 6월 2일, 나카무라 이타루(中村格) 경찰청장은 일본 적군의 해산이 형식적일 뿐이며, 테러 조직으로서의 위험성이 여전하다고 밝혔다.[69][70]
3. 주요 멤버
정치 위원
군사 위원
(와카마츠 프로덕션 소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