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경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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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장경근은 일제강점기 경성지방법원 판사를 지냈으며, 광복 후 미군정 시기 경성지방법원장을 역임했으나 반민족행위처벌법 제정으로 사임했다. 이후 이승만 정부에서 내무부 차관보와 차관을 지냈으며, 반민특위 해체를 주도했다. 자유당 정권에서 핵심 인물로 활동하며 3·15 부정선거에 관여, 4·19 혁명 이후 일본으로 도피했다가 1977년 귀국하여 사망했다. 2008년 친일인명사전 수록예정자로 선정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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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경근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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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본 정보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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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름 | 장경근 |
원어명 | 張暻根 |
출생일 | 1911년 5월 18일 |
출생지 | 일제 강점기 평안북도 용천군 |
사망일 | 1978년 7월 25일 |
사망지 | 대한민국 서울특별시 강남구 역삼동 |
별명 | 일본식 이름은 나가야마 게이콘(長山暻根) |
정당 | 무소속 |
학력 | |
학력 | 일본 도쿄 제국대학교 법학과 학사 대한민국 국방대학교 행정학사 1기 |
경력 | |
경력 | 법조인 출신 정치인 자유당 당무위원 겸 정책위원장 |
공직 | |
직책 | 제2대 국방부 차관 |
임기 | 1950년 5월 14일 ~ 1951년 6월 22일 |
대통령 | 이승만 |
장관 | 신성모 국방부 장관 장경근 국방부 장관 직무대리 이기붕 국방부 장관 |
전임 | 최용덕 |
후임 | 김일환 |
부통령 | 이시영 부통령 허정 부통령 권한대행 |
공직 (직무대리) | |
직책2 | 국방부 장관 직무대리 |
임기2 | 1951년 5월 5일 ~ 1951년 5월 7일 |
전임2 | 신성모 (전임 국방부 장관) |
후임2 | 이기붕 (후임 국방부 장관) |
대통령2 | 이승만 |
부통령2 | 이시영 |
총리3 | 신성모 국무총리 서리 |
2. 생애
인동 장씨로, 평안북도 용천에서 태어나 경성부에서 잠시 유아기를 보냈고 경기도 부천에서 성장하였다. 도쿄 제국대학 법학부를 졸업하고 고등문관시험에 합격하였다. 졸업 후 경성지방법원과 검찰국의 사법관 시보를 거쳐 경성지방법원 및 경성복심법원 판사를 지냈다.[2]
광복 후 미군정 시기에 판사로 임명되어 1945년 10월 11일 경성지방법원장에 임명되었으나, 반민족행위처벌법 제정으로 일제강점기 친일파이자 고위 관직 경력자에 대한 부정적인 여론 때문에 사임했다. 이승만 초대 대통령은 1949년에 장경근을 내무부 차관보와 차관으로 발탁했다.
조봉암이 이승만과 결별하고 안호상, 이범석 계열이 몰락하면서 장경근은 제1공화국의 핵심 관료이자 집권당인 자유당의 이론가로 성장했다. 이승만의 종신 집권을 추진했으며, 자유당 의원총회에서 반대한 김두한 의원에게 주먹을 맞기도 했다.[2] 이기붕 계열의 강경파로 활동했고, 1953년, 1958년, 1959년, 1960년 네 차례에 걸쳐 한일회담 정부대표를 맡을 정도로 일본통으로도 인정받았다.
1960년 3·15 부정선거 당시 자유당 선거대책위원회의 기획위원 겸 상임위원회 제7부장(정책부장)으로 경찰력을 동원하는 부정선거 방법을 기획했다.[2] 4·19 혁명이 일어나면서 부정선거 책임자로 지목되어 구속되자, 재판 중이던 1960년 11월 13일 병원을 탈출해 일본으로 밀항했다. 이후 17년 동안 미국, 브라질 등 여러 나라를 전전하다 1977년 5월 11일에 귀국하였고, 1978년 7월 25일 서울특별시 강남구 역삼동 자택에서 당뇨병과 중풍으로 사망했다.
2. 1. 일제 강점기 활동
평안북도 용천 출신으로, 도쿄 제국대학 법학부를 졸업하고 고등문관시험에 합격했다. 학교 졸업 후 경성지방법원과 검찰국의 사법관 시보를 거쳐 경성지방법원 및 경성복심법원 판사를 역임했다.[2]2. 2. 광복 이후 활동과 반민특위 해체
1945년 10월 11일 경성지방법원장에 임명되었으나, 반민족행위처벌법이 제정되면서 일제 강점기 친일파이자 고위 관직 경력자에 대한 부정적인 여론 때문에 사임했다. 이승만 초대 대통령은 1949년에 장경근을 내무부 차관보와 차관으로 발탁했다.
장경근 내무부 차관은 신성모 내무부 장관과 이승만 대통령을 설득하여 반민특위 해체 허락을 받았다. 장경근이 내무차관으로 재직하던 중 그의 지시로 친일경찰 세력들은 반민특위를 습격하였고, 이 문제가 제헌 국회에서 논의되었을 때, 장경근은 반민특위 습격은 불법적인 유사 경찰 조직을 무장해제하기 위한 정당한 것이었으며 반민특위는 공산주의 단체라고 답변했다. 분노한 국회는 장경근의 퇴진과 처벌을 요구하는 결의안을 통과시켰고, 반민특위는 상해 및 공무집행방해죄로 그를 고발했다. 그러나 이 사건으로 반민특위는 크게 위축되었고, 1949년 9월 반민법 3차 개정을 거쳐 결국 중단되었다.
2. 3. 자유당 핵심 인물
이승만과 신성모 내무부 장관의 허락을 받아 반민특위 해체를 주도했다. 장경근은 내무차관 재직 중 자신의 지시로 친일경찰을 동원해 반민특위를 습격했다. 이 사건은 제헌 국회에서 논의되었는데, 장경근은 반민특위 습격은 불법적인 유사 경찰 조직을 무장해제하기 위한 정당한 것이었으며, 반민특위는 공산주의단체라고 답변했다. 분노한 국회는 장경근의 퇴진과 처벌을 요구하는 결의안을 통과시켰고, 반민특위는 상해 및 공무집행방해죄로 그를 고발했다. 그러나 이 사건으로 반민특위는 크게 위축되었고 1949년 9월 반민법 3차 개정을 거쳐 결국 중단되었다.[2]조봉암이 이승만과 결별하고 안호상, 이범석 계열이 몰락하면서, 장경근은 제1공화국의 핵심 관료이자 집권당인 자유당의 이론가로 성장했다. 이승만의 종신 집권을 추진했으며, 자유당 의원총회에서 이에 반대한 김두한 의원에게 주먹으로 맞기도 했다. 제1공화국 후반기에 자유당이 창당된 뒤에는 이기붕 계열의 강경파로 활동했다. 1953년, 1958년, 1959년, 1960년 네 차례에 걸쳐 한일회담 정부대표를 맡을 정도로 일본 전문가로 인정받았다. 이 시기 야당 탄압 등 여러 정치공작 사건의 배후에 있었다거나, 이승만에게 과잉충성을 보였다는 평도 있다.[2]
2. 4. 3·15 부정선거와 도피 생활
1960년 3·15 부정선거에 깊이 관여했다. 당시 직책은 자유당 선거대책위원회의 기획위원 겸 상임위원회 제7부장(정책부장)이었다. 장경근은 경찰력을 동원하는 부정선거 방법을 기획하여 치안국장을 통해 하달한 것으로 알려졌다.[2] 4·19 혁명이 일어나면서 부정선거 책임자로 지목되어 구속되자, 재판 계류 중 입원해 있던 병원을 1960년 11월 13일 탈출해 일본으로 밀항했다. 이후 17년 동안 미국, 브라질 등 여러 나라를 전전하다가 지병인 당뇨병과 중풍이 심해지면서 정부에 귀국을 청원, 허가를 얻어 도피 17년 만인 1977년 5월 11일에 귀국하였고, 요양하다 1978년 7월 25일 서울특별시 강남구 역삼동 자택에서 사망했다.2. 5. 사망
4·19 혁명으로 3·15 부정선거의 책임자로 지목되어 구속되었으나, 재판 계류 중이던 1960년 11월 13일 입원해 있던 병원을 탈출해 일본으로 밀항했다.[2] 이후 미국, 브라질 등 여러 나라를 전전하다가 지병인 당뇨병과 중풍이 심해져 정부에 귀국을 청원, 허가를 얻어 도피 17년 만인 1977년 5월 11일에 귀국하였고, 요양하다 1978년 7월 25일 서울특별시 강남구 역삼동 자택에서 사망했다.2. 6. 사후
2008년 민족문제연구소가 발표한 친일인명사전 수록예정자 명단 중 사법 부문에 선정되었다.3. 학력
4. 장경근을 연기한 배우
5. 역대 선거 결과
참조
[1]
뉴스
前內務장관 張暻根씨
http://gonews.kinds.[...]
한국일보
1978-07-25
[2]
뉴스
김두한의 장경근 구타 사건·개헌열풍
http://dbs.donga.com[...]
동아방송
1970-12-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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