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도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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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장도영은 일제강점기 일본군 장교 출신으로, 대한민국 국군에 입대하여 육군참모총장까지 역임한 군인이자, 5.16 군사정변 이후 국가재건최고회의 의장, 내각수반, 국방부 장관을 지냈다. 5.16 군사정변 당시 모호한 태도를 보인 혐의로 실각 후, 반혁명 혐의로 기소되어 무기징역을 선고받았으나 석방되었고, 이후 미국으로 망명하여 정치학 박사 학위를 취득하고 대학교수로 활동했다. 2012년 미국 플로리다에서 사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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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도영 - [인물]에 관한 문서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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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본 정보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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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름 | 장도영 |
한자 표기 | 張都暎 |
로마자 표기 | Jang Doyeong |
출생일 | 1923년 1월 23일 |
출생지 | 일제강점기 평안북도 룡천군 |
사망일 | 2012년 8월 3일 |
사망지 | 미국 플로리다주 올랜도 |
묘지 | 서울국립현충원 |
종교 | 기독교 (개신교) |
배우자 | 백형숙 |
자녀 | 5명 |
본관 | 인동 장씨 |
학력 | |
출신 학교 | 일본육군사관학교 |
군사 학교 | 대한민국 육군사관학교 |
군사 경력 | |
소속 | 일본 제국 육군 (1944–1945) |
소속 | 대한민국 육군 (1945–1961) |
최종 계급 | 일본 제국 육군 소위 |
최종 계급 | 대한민국 육군 중장 |
복무 기간 | 1944년 - 1961년 |
참전 | 중일 전쟁 |
참전 | 제2차 세계 대전 |
참전 | 한국 전쟁 |
주요 전투 | 온정리 전투 중공군 춘계공세 사창리 전투 가평 전투 용문산 전투 파로호 전투 |
정치 경력 | |
정당 | 무소속 (군사 정권) |
직책 | 국가재건최고회의 의장 |
임기 | 1961년 5월 16일 – 1961년 7월 3일 |
부의장 | 박정희 |
직책 | 대한민국 국무총리 권한대행 (국가재건최고회의 내각수석) |
임기 | 1961년 5월 21일 – 1961년 7월 3일 |
전임 총리 | 장면 |
후임 총리 대행 | 송요찬 |
직책 | 대한민국 국방부 장관 |
대통령 | 윤보선 |
임기 시작 | 1961년 5월 20일 |
임기 종료 | 1961년 6월 6일 |
전임자 | 현석호 |
후임자 | 신응균 |
기타 | |
서훈 | 태극무공훈장 |
서훈 | 미국 은성훈장 |
근무 | 대한민국 육군본부 |
지휘 | 대한민국 육군참모총장 |
지휘 | 계엄사령관 |
지휘 | 군사혁명위원회 위원장(재임: 1961년 5월 16일 ~ 1961년 5월 18일) |
지휘 | 국가재건최고회의 의장(재임: 1961년 5월 18일 ~ 1961년 7월 3일) |
지휘 | 내각수석 장관 |
지휘 | 대한민국 국방부 장관 |
차관 | 신응균 국방부 사무차관 |
교수 경력 | 미국 위스콘신 대학교 |
교수 경력 | 미국 웨스턴 미시간 대학교 |
외부 링크 | |
사망 기사 | 5·16 당시 육참총장 장도영 전 국방장관 별세 |
회고록 | 장도영 前 육군참모총장 회고록 출간 |
사망 기사 | Do Young Chang obituary WMU News |
사망 기사 | Do Young Chang Obituary - Gotha, FL |
2. 생애
장도영은 인동 장씨(仁同張氏)로, 기독교 가정에서 태어났다.[16] 신의주동중학교 재학 중에는 육상 선수로 활약했다.[16] 동양대학교 사학과 재학 중 학도병(학도출진)으로 징집되어 중국 전선에 배치되었고, 견습장교를 거쳐 소위로 종전을 맞았다.[16] 종전 후 귀국을 위해 '무궁단'이라는 단체를 조직, 난징을 출발하여 서주(徐州), 지난, 톈진, 산하이관(山海關), 진저우, 선양을 거쳐 안둥에서 압록강(鴨綠江)을 건너 귀환했다.
일본 통치 종료 후 이응준(李應俊)의 권유로 미군정(미국 군정청) 하의 대한민국 국방경비대에 입대하여 소위(군번 10080번)로 임관, 제6연대 소대장으로 부임했다. 이후 제3연대 중대장, 대대장을 거쳐 1948년 7월 15일 제5연대장, 1949년 5월 25일 제9연대장, 1949년 11월 육군본부 정보국장을 역임했다.
한국전쟁 발발 직후인 1950년 6월 28일, "잔적 소탕 및 보도연맹원, 적색분자 수색" 특명을 받았다.[5] 1950년 10월 제6사단장이 되었다.[5] 1952년 1월 제1훈련소장을 거쳐[5] 같은 해 8월 미국 육군 지휘참모대학교에 유학했다. 1954년 2월 제2군단장,[5] 1956년 3월 육군참모차장, 1956년 10월 육군교육총장, 1959년 2월 제2군 사령관을 역임하였다.[5]
한국전쟁 당시 1951년 5월 26일부터 4일간 대한민국 국군 제6사단장으로 파로호 전투에서 중국군 제63사단을 크게 격파, 2만 명 이상의 사상자와 2,617명의 포로를 획득했다.[17] 이 승리로 이승만 대통령은 1955년 댐 호수를 파로호로 명명했다.[17][18]
1961년 제2공화국 성립 후 장면(張勉) 총리에 의해 육군참모총장으로 임명되었으나, 1961년 5월 16일 박정희 등이 일으킨 5·16 군사정변을 사실상 묵인했다. 쿠데타 성공 후 5월 19일 국가재건최고회의 의장에 추대, 내각수반과 국방부 장관을 겸임했다. 그러나 7월 3일 의장직에서 해임되고, 다음 달 예비역으로 편입되어 사실상 실각했다.
박정희 정권 성립 후 1962년 중앙정보부에 의해 반혁명·내란 음모 혐의로 체포, 군사재판에서 무기징역을 선고받았으나 같은 해 5월 석방되었다. 이후 미국(미국합중국)으로 망명, 1969년 미시간 대학교에서 정치학 박사 학위를 취득하고 1993년까지 위스콘신 대학교에서 정치학 교수를 역임했다.
2011년 5월 치매를 앓고 있다는 소식이 보도되었고,[19] 2012년 8월 3일 플로리다주 올랜도에서 89세로 사망했다.
2. 1. 생애 초기 및 교육
장도영은 1923년 1월 23일 평안북도 용천군에서 태어나 신의주고등보통학교를 졸업했다. 이후 일본으로 건너가 1944년 도요 대학교를 졸업했다.[22] 인동 장씨(仁同張氏)로 기독교 가정에서 태어났으며, 신의주동중학교 재학 중에는 육상 선수로도 활약했다.[16] 동양대학교 사학과 재학 중 학도병(학도출진)으로 징집되어 중국 전선에 배치되어 훈련을 받고 견습장교가 되었으며, 종전 당시에는 소위였다.[16]일제 패망 후 선천으로 돌아와 모교인 신의주중학교에서 교편을 잡았으나, 1945년 11월 23일 신의주 반공 학생 의거 이후 소련 군정과 공산주의자들의 탄압을 피해 월남하여 서울로 왔다. 이후 이응준(李應俊)의 권유로 미군정(미국 군정청) 하의 대한민국 국방경비대에 입대하여 소위(군번 10080번)로 임관했다.[5] 1952년 8월부터 미국 육군 지휘참모대학교에 유학했다.
2. 2. 군 경력
1950년 한국 전쟁 발발 직후 6월 28일 "내려가면서 잔적을 소탕하고, 잠복해 있는 보도연맹원이나 후방을 교란시키는 적색분자를 수색하라"는 특명을 받았다.[5] 1950년 10월, 제6사단장이 되었다.[5] 1952년 1월 제1훈련소장이 되었다.[5] 1952년 8월부터 미국 육군 지휘참모대학교에 유학했다.1954년 2월 제2군단장, 1956년 3월 육군참모차장, 1956년 10월 육군교육총장, 1959년 2월 제2군 사령관을 역임하였다.[5]
2. 2. 1. 대한민국 국군 입대
일제강점기에 일본군 장교였던 그는 광복 후 국군에 입대하였다. 당시 미 군정청 군사고문이었던 이응준의 권고로 1946년 2월 군사영어학교에 입교하여 1946년 3월 졸업하고 육군 참위로 임관했다.1946년 3월 23일 군번 10080을 부여받은 뒤 국방경비대 육군 참위로 임관하여 대구 주둔 국방경비대 제6연대 1중대 소대장에 보직되었고, 그해 가을 중위로 진급하여 이리 제3연대 2중대장으로 진급 후, 제3연대 제3대 신설에 참여, 신설 3연대 3대 초대 대대장으로 부임하였다.
1947년 9월 태능 국방경비사관학교로 전보되어 제5기 생도대 중대장이 되었으며, 1948년 7월 부산 육군 제5연대장으로 부임하였다. 1948년 여순 육군 제14연대 반란 사건 당시 반란 가담자였던 박정희가 무기징역을 언도받자 백선엽 등과 함께 박정희 구명운동에 적극 참여하여 도움을 주었다.[16] 1949년 6월 육군 수도사단 제9연대장으로 승진하였고, 1949년 11월 육군본부 정보국 국장으로 부임하였다.
2. 2. 2. 초기 군 생활
일제강점기에 일본군 장교였던 장도영은 광복 후 국군에 입대하였다. 당시 미 군정청 군사고문이었던 이응준의 권고로 1946년 2월 군사영어학교에 입교하여 1946년 3월 졸업하고 육군 참위로 임관했다.1946년 3월 23일 군번 10080을 부여받고 국방경비대 육군 참위로 임관하여 대구 주둔 국방경비대 제6연대 1중대 소대장에 보직되었다. 그해 가을 중위로 진급하여 이리 제3연대 2중대장이 되었고, 제3연대 제3대대 신설에 참여한 뒤 신설 3연대 3대대 초대 대대장으로 부임하였다.
1947년 9월 국방경비사관학교로 전보되어 제5기 생도대 중대장이 되었으며, 1948년 7월 부산 육군 제5연대장으로 부임하였다. 1948년 여순 육군 제14연대 반란 사건 당시 반란 가담자였던 박정희가 무기징역을 언도받자 백선엽 등과 함께 박정희 구명운동에 적극적으로 참여하여 도움을 주었다. 1949년 6월 육군 수도사단 제9연대장으로 승진하였고, 그 해 11월 육군본부 정보국 국장으로 부임하였다.
2. 2. 3. 한국 전쟁 참전
1950년 한국 전쟁에 참전하였고 김종오 대령의 후임으로 6사단장에 부임하였다. 사창리 전투에서 패배하였으나 병력을 수습한 뒤 후퇴하였다.[5] 이후 용문산 전투에서 중공군 3개 사단, 3만 명을 막아내며 대승을 거두었다.[5]1951년 5월 26일부터 4일간 댐 부근에서 장도영이 이끈 대한민국 국군 제6사단과 중국군 제63사단이 교전하여 중국군 2만 명 이상의 사상자와 2,617명의 포로를 획득했다. 한국 측에서는 중국군 병사의 시체를 댐호(ダム湖)에 수장(水葬)했기 때문에 호수의 물이 붉게 변했다고 전해진다. 파로호 전투는 한국전쟁 당시 한국군이 거둔 가장 큰 승리였다고 한다.[17] 1955년, 이승만 대통령이 댐호를 방문했을 때 "적(虜)"을 "깨뜨리다(破)"라는 의미로 '''파로호'''로 명명했다. 2019년 현재도 이승만이 휘호(揮毫)한 파로호 기념비가 남아 있다.[17][18]
2. 2. 4. 한국 전쟁 이후
1950년 한국 전쟁에 참전하였고 김종오 대령의 후임으로 6사단장에 부임하였다. 사창리 전투에서 패배하였으나 병력을 수습한 뒤 후퇴하였다. 이후 용문산 전투에서 중공군 3개 사단, 3만 명을 막아내며 대승을 거두었다. 휴전 이후 1953년 6월 육군 제8사단장, 1954년 2월 육군 제2군단장 등을 거쳐 그해 10월 육군 중장으로 승진했다. 1955년 5월 육군본부 기획참모부장, 행정참모부장, 참모차장을 역임하고 1956년 육군참모차장에 취임했다. 1957년 7월 육군참모차장에 연임되었으며 육군 제2군사령관을 거쳐 5.16 군사 정변 이전에 제2공화국 출범 이후 장면 국무총리에 의해 육군참모총장으로 발탁되어 재직했다.1960년 국무총리 장면이 그를 육군참모총장으로 발탁하자 내부에 반발이 있었다. 국회의원 이철승은 그가 겉과 속이 표리부동하다며 참모총장 인준을 반대했고, 민주당 신파에서는 그가 쿠데타를 일으킬 위험이 있는 인물이라며 부정적으로 봤다. 외무부 장관 정일형은 이한림 중장과 최경록 중장 중에서 고르는 것이 어떻느냐며 부정적인 시각을 드러냈으나, 각계의 반대를 극복하고 참모총장에 등용되었다. 장면 역시 그의 선대가 평북이므로 서북계로 분류하여 부정적으로 보는 경향도 있었지만, 등용되었다.
한국전쟁 당시, 1951년 5월 26일부터 4일간 댐 부근에서 장도영(張都暎)이 이끈 대한민국 국군 제6사단과 중국군 제63사단이 교전하여 중국군을 크게 격파하고 2만 명이 넘는 사상자와 2,617명의 포로를 얻었다.[17] 한국 측에서는 중국군 병사의 시체를 댐호(ダム湖)에 수장(水葬)했기 때문에 호수의 물이 붉게 변했다고 전해진다. 파로호 전투는 한국전쟁 당시 한국군이 거둔 가장 큰 승리였다고 한다. 1955년 이승만 대통령이 댐호를 방문했을 때 "적(虜)"을 "깨뜨리다(破)"라는 의미로 '''파로호'''로 명명했다. 2019년 현재도 이승만이 휘호(揮毫)한 파로호 기념비가 남아 있다.[17][18]
1954년 2월 제2군단장, 1956년 3월 육군참모차장, 1956년 10월 육군교육총장, 1959년 2월 제2군 사령관을 역임하였다.
1961년 제2공화국 성립 후 장면(張勉) 총리에 의해 육군참모총장으로 임명되었으나, 1961년 5월 16일 박정희 등이 일으킨 5·16 군사정변을 묵살했다. 쿠데타 성공 후 5월 19일 장도영은 국가재건최고회의 의장에 추대되었고, 동시에 내각수반과 국방부 장관을 겸임했다. 그러나 7월 3일 박정희를 중심으로 의장직에서 해임되었고, 다음 달 예비역으로 편입되어 사실상 실각했다.
박정희 정권 성립 후 1962년 중앙정보부가 반혁명·내란 음모 혐의로 장도영을 체포하여 군사재판에서 무기징역 판결을 받았으나 같은 해 5월에 석방되었다. 이후 미국(미국합중국)으로 망명하여 1969년 미시간 대학교에서 정치학 박사 학위를 취득하고, 1993년까지 위스콘신 대학교에서 정치학 교수를 역임했다.
2. 3. 5.16 군사정변과 이후
1961년 5월 16일, 박정희 소장이 주도한 5·16 군사정변이 일어나자, 장도영은 이에 대해 적극적으로 찬성하거나 반대하지 않고 모호한 태도를 취했다. 이로 인해 사실상 군사정변을 방조했다는 의혹을 받았으나, 본인은 쿠데타 음모를 하루 전에 알았고 방첩대를 동원해 조사했으나 거짓 보고로 실패했으며, 쿠데타 동조 세력이 아니었다고 주장했다.[24]5월 19일 밤, 박정희와 장도영은 윤보선 대통령의 사퇴를 만류했지만, 이는 표면적인 행동이었고 실제로는 박정희는 윤보선의 사퇴를 내심 반겼다.[25]
5월 20일, 김용식 외무부 차관은 윤보선에게 대통령 하야가 국제법상 새 정부 승인 문제를 복잡하게 만들 수 있다고 설명했다.[25] 같은 날 오후 2시, 윤보선, 박정희, 장도영, 김용식 4자 회담에서 김용식은 북한의 남침 시 대한민국을 대표하여 국제사회에 호소할 기관이 없어진다는 점을 들어 사임 재고를 요청했고, 박정희와 장도영도 이에 동조했으며, 미국 역시 만류했다.[25][26][27]
5·16 군사정변 성공 이후, 장도영은 군사혁명위원회 의장, 계엄사령관, 국가재건최고회의 의장, 내각수반, 국방부 장관으로 추대되었다. 그러나 1961년 6월, 정변 주체 세력에 의해 해임되었고, 8월 22일에는 중장으로 예편되었다.[28] 이후 박정희의 중앙정보부에 의해 '반혁명' 혐의로 기소되었으며, 이때 장도영을 체포 연행한 대위가 노태우였다. 1963년 3월에는 무기징역을 선고받았으나, 5월에 형집행면제로 풀려났다.

2. 3. 1. 장면 내각의 육군참모총장
1960년 국무총리 장면이 장도영을 육군참모총장으로 발탁하자 내부에서 반발이 있었다. 국회의원 이철승은 장도영이 겉과 속이 다르다며 참모총장 인준을 반대했고, 민주당 신파는 그가 쿠데타를 일으킬 위험이 있다며 부정적으로 보았다. 외무부 장관 정일형은 이한림 중장과 최경록 중장 중에서 고르는 것이 어떻느냐며 부정적인 시각을 드러냈으나, 이러한 반대를 극복하고 장도영은 참모총장에 등용되었다.[6] 장면 역시 장도영의 선대가 평북 출신이므로 서북계로 분류된다는 점 때문에 부정적인 시각도 있었지만, 결국 등용을 결정했다.1961년 쿠데타 당시, 장도영은 박정희로부터 쿠데타 계획을 들었으나, 이에 가담하지도 않고 정부에 알리지도 않음으로써 결정을 미루었다.[6] 이러한 우유부단한 태도는 쿠데타의 정당성을 부여한 것으로 평가받는다. 장도영은 당시 장면 총리에게 쿠데타 관련 보안 보고서(5월 12일 발생 예정)가 신뢰할 수 없다고 설득했고, 이로 인해 쿠데타 계획자들은 쿠데타 시기를 5월 16일로 연기할 수 있었다.[7]
2. 3. 2. 5.16 군사정변
1961년 5월 9일, 5·16 군사 정변 일주일 전 장면은 육군 참모 총장인 장도영을 불러 쿠데타 모의에 대한 정보를 전달하고 확인을 요청했다.[23] 장도영은 "천만의 말씀이십니다. 그런 일이 있겠습니까?"라고 대답하며, 박정희 소장을 주동으로 한 쿠데타 모의를 부인했다.[23] 장면은 장도영에게 책임지고 내사할 것을 지시했지만, "알아는 보겠습니다만, 그럴 리가 없습니다"라는 답변만 반복되었다.[23]5월 16일 박정희 소장이 5·16 군사정변을 일으키자, 장도영은 적극적인 반대나 찬성을 하지 않는 모호한 태도를 보였다. 이는 사실상 군사정변을 방조했다는 의혹을 샀지만, 본인은 쿠데타 음모를 하루 전에야 알았고, 방첩대를 동원해 조사했으나 거짓 보고로 실패했으며, 쿠데타 동조 세력이 아니었다고 주장했다.[24]
5월 19일 밤, 박정희와 장도영은 청와대를 찾아 윤보선의 사퇴를 만류했다.[25] 그러나 이는 시늉이었고, 박정희는 윤보선의 사퇴를 속 시원하게 생각하고 있었다.[25] 5월 20일 외무부 차관 김용식은 윤보선에게 대통령 하야가 국제법상 새 정부 승인 문제를 복잡하게 할 수 있다고 설명했다.[25] 김용식은 박정희에게도 같은 내용을 설명했고, 5월 20일 오후 2시 윤보선, 박정희, 장도영, 김용식 4자 회담이 열렸다. 이 자리에서 김용식은 이북의 남침 시 대한민국을 대표하여 호소할 기관이 없다는 점을 들어 사임 재고를 요청했고, 박정희와 장도영도 이에 가세했으며, 미국의 만류도 있었다.[25][26][27]
6월 6일 현충일 행사에서 장도영은 제2공화국을 비판하며, 부패와 쟁파만을 일삼는 구악의 독소를 조장하여 국민의 기대를 저버렸다고 주장했다.
1961년 군사정변이 성공하자 장도영은 군사혁명위원회 의장, 계엄사령관, 국가재건최고회의 의장, 내각수석 장관, 국방부장관으로 추대되었다. 그러나 같은 해 6월 정변 주체세력에 의해 해임되고 8월 22일 중장으로 예편되었다.[28] 이후 박정희의 중앙정보부에 의해 '반혁명' 혐의로 기소되었으며, 이때 장도영을 체포 연행한 대위가 노태우였다.
1963년 3월 무기징역을 선고받았으나, 5월 형집행면제로 풀려났다.
장도영은 1960년 4·19 혁명 이후 장면 내각 아래에서 육군참모총장이 되었지만, 정부에 충성하지 않았다. 1961년 4월 10일 박정희로부터 쿠데타 계획을 처음 들었을 때, 박정희는 군 전체의 지지를 얻기 위해 장도영이 새로운 정부를 이끌어주기를 원했다. 그러나 장도영은 쿠데타 음모자들에게 가담하지도 않고 정부에 알리지도 않음으로써 결정을 미루었다.[6] 이러한 우유부단함은 쿠데타의 정당성을 부여한 것으로 여겨진다. 장도영은 장면 총리에게 쿠데타의 구체적인 내용이 유출된 보안 보고서(5월 12일 발생 예정이었다는 내용)가 신뢰할 수 없다고 설득하여 쿠데타 계획자들이 쿠데타 시기를 5월 16일로 연기할 수 있도록 하였다.[7]
2. 3. 3. 국가재건최고회의 의장
1961년 5·16 군사 정변이 성공하자 군사혁명위원회 의장, 계엄사령관, 국가재건최고회의 의장, 내각수반, 국방부 장관으로 추대되었다.[28] 5월 16일 5·16 군사정변 당시, 적극적으로 반대하거나 찬성하지 않는 모호한 태도를 보여 사실상 군사정변을 방조했다는 의혹을 받았다. 그러나 본인은 쿠데타 음모를 하루 전에 알았고, 쿠데타 세력에 대해 방첩대를 동원해 조사를 실시했으나 거짓 보고로 실패했으며 쿠데타 동조 세력이 아니었다고 주장했다.[24]5월 19일 밤, 박정희와 장도영은 청와대를 찾아가 윤보선의 사퇴를 만류했다.[25] 그러나 그 만류는 시늉이었고, 장도영에게 윤보선이 좀 더 필요했던 것 같으나, 박정희는 윤보선의 사퇴를 속 시원하게 생각하고 있었다.[25]
5월 20일 상오, 외무부 차관 김용식이 윤보선에게 "유일한 헌법기관인 대통령의 이 시점에서의 하야는 국제법상 새 정부의 승인문제를 복잡하게 할 우려가 있다.[25]”고 설명했고, 박정희에게도 설명했다. 같은 날 오후 2시, 윤보선, 박정희, 장도영, 김용식 4자 회담이 열렸다. 이 자리에서 김용식은 다시 “만일 각하가 사임한 뒤 이북이 남침하면 외국과 유엔에 호소하려 해도 대한민국을 대표하여 호소할 기관이 없다.[25]”며 사임 재고를 요청했다. 재고 요청에 박정희와 장도영도 가세했고, 미국의 만류도 있었다.[25][26][27]
5·16 군사 정변 직후, 장면은 명목상의 지도자로 임명되었지만, 실권은 박정희가 장악했다.[8] 그러나 곧 온건파의 소규모 파벌을 형성하여 박정희를 포함한 다른 군부 강경파 장교들과 갈등을 빚었다.[9]
장면은 최고회의 의장, 국무총리, 국방부 장관, 육군참모총장 등 네 자리를 동시에 역임했다.[10] 1961년 5월까지 그는 5월 24일 존 F. 케네디와의 회담에서 8월 15일까지 민정 이양을 약속하며(미국과 명목상의 대통령 윤보선의 최우선 과제였으며, 장면은 윤보선이 계속 집권하기를 바랐다.[11]) 미국으로부터 신정부의 승인을 얻으려 했다. 이러한 행보는 그의 권력과 쿠데타 목표에 대한 위협으로 여긴 다른 군 지도자들의 반감을 샀다.[12]
6월 6일 대통령 윤보선을 수행하여 현충일 행사에 참석하였다. 현충일 행사에서 그는 제2공화국을 비판하였다.
1961년 6월, 미국의 승인을 얻은 박정희와 그의 추종자들은 장면의 영향력을 제한하는 법을 시행하여 장면에 대한 반격을 가했다. 같은 해 7월 3일, 장면과 그의 경호를 위해 배치된 10명의 군사경찰 그리고 다른 44명의 장교들은 반쿠데타 모의 혐의로 체포되었다.[10][12] 그는 아무런 저항 없이 항복했다.[12] 같은 해 6월 정변 주체세력에 의해 해임되고 8월 22일 중장으로 예편되었다.[28] 이후 박정희의 중앙정보부에 의해 '반혁명' 혐의로 기소되었다. 이 때 장도영을 체포 연행한 대위가 노태우였다.
2. 3. 4. 반혁명 혐의와 투옥
1961년 군사정변이 성공하자 군사혁명위원회 의장, 계엄사령관, 국가재건최고회의 의장, 내각수반, 국방부 장관으로 추대되었다. 같은 해 6월 정변 주체세력에 의해 해임되고 8월 22일 중장으로 예편되었다.[28] 이후 박정희의 중앙정보부에 의해 '반혁명' 혐의로 기소되었다. 이 때 장도영을 체포 연행한 대위가 노태우였다.1963년 3월 무기징역을 선고받았으나, 5월 형집행면제로 풀려났다. 1961년 7월 3일, 장면과 그의 경호를 위해 배치된 10명의 군사경찰(MP) 그리고 다른 44명의 장교들은 반쿠데타 모의 혐의로 체포되었고,[10][12] 그는 아무런 저항 없이 항복했다.[12]
박정희 정권 성립 후 1962년에 중앙정보부가 반혁명·내란 음모 혐의로 장도영을 체포하여 군사재판에서 무기징역 판결을 받았으나 같은 해 5월에 석방되었다.
2. 4. 미국 망명과 학자 생활
1961년 5·16 군사정변 이후 박정희 정권에 의해 반혁명 혐의로 체포되어 무기징역을 선고받았으나, 1962년 5월 석방된 후 미국으로 망명하였다.[13] 재판 전에 이미 미국 망명을 밝힐 정도로, 그의 박해자들은 이에 반대하지 않았다.[12]미시간 대학교에서 정치학 박사 학위를 취득하였고,[14] 1969년부터 위스콘신 대학교 교수를 지냈으며, 1971년에는 웨스턴 미시간 대학교 부교수로 임용되어 1993년까지 교수로 재직하였다.[2]
1982년 중앙일보와의 인터뷰에서 그는 군사정부 기간을 6개월로 설정하려 했으며, 6개월 안에 질서를 회복하고 선거를 통해 민정부를 구성하려 했다고 회상했다. 그러나 그의 부하들은 그의 말을 듣지 않았다고 한다.[14]
2011년 치매를 앓고 있다는 소식이 전해졌으며,[19] 2012년 8월 3일 플로리다주 올랜도에서 알츠하이머병과 파킨슨병의 합병증으로 89세의 나이로 별세하였다.[29]
2. 5. 사망
1963년 미국으로 건너가 1969년 위스콘신 대학교 교수를 지냈고 1993년까지 교수로 재직하였다.[29] 2011년 5월 무렵 미국 플로리다주 올랜도에서 알츠하이머병과 파킨슨병의 합병증으로 투병하다가 2012년 8월 3일 89세의 나이로 별세하였다.[29]3. 평가
장도영은 영어 실력이 뛰어나 미 8군에서 좋은 평가를 받았고, 매그루더는 이를 바탕으로 현석호 국방장관에게 장도영을 참모총장으로 추천했다.[30] 그러나 4.19 이후에는 이승만 정권, 특히 이기붕과의 밀접한 관계 때문에 정군 대상 중 한 명으로 꼽혔으며, '이기붕 양자'라는 소문까지 있었다.[30]
3. 1. 긍정적 평가
장도영과 그의 부인은 모두 영어를 잘했고, 이는 미 8군 내에서 좋은 평가를 받는 데 기여했다.[30] 이를 바탕으로 매그루더는 현석호 국방장관에게 장도영을 참모총장으로 추천했다.[30]3. 2. 부정적 평가
장도영은 4.19 이후 가장 먼저 숙청되어야 할 정군 대상 중 한 명이었다.[30] 이승만 정권, 특히 이기붕과 매우 밀접한 관계를 맺고 있었으며, '이기붕 양자'라는 소문까지 있었다.[30]4. 학력
5. 저서
6. 수상
훈장 | 날짜 |
---|---|
태극무공훈장 | |
은성훈장 | |
레지옹 도뇌르 훈장 | 1950년 12월 28일[20] |
레지옹 도뇌르 훈장 | 1951년 9월 25일[21] |
은성훈장 | 1953년 3월 26일[21] |
은성훈장 | 1953년 4월 29일[21] |
은성태극무공훈장 | 1954년 7월 6일 |
7. 장도영을 연기한 배우들
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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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11-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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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16 당시 육참총장 장도영 전 국방장관 별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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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11-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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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정희를 머리 숙이게 한 남자, 쫓겨난 진짜 이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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