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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효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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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장효조는 대한민국 야구 선수로, 1983년부터 1992년까지 프로 선수로 활동했다. 대구상고 시절 뛰어난 타격 실력으로 두각을 나타냈으며, 한양대학교에서도 국가대표로 활약했다. 프로 입단 후 삼성 라이온즈의 프랜차이즈 스타로, 통산 4번의 타격왕을 차지하며 '타격의 달인'이라는 명성을 얻었다. 롯데 자이언츠로 이적 후 1992년 한국시리즈 우승을 마지막으로 은퇴했다. 은퇴 후에는 코치와 2군 감독을 역임했으며, 2011년 간암으로 사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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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효조
기본 정보
장효조
원어명Jang Hyo-Jo
한글장효조
한자張孝祚
출생1956년 7월 6일
출생지부산광역시
사망2011년 9월 7일 (향년 55세)
사망지부산광역시
포지션우익수
투구/타석좌투좌타
선수 경력
프로 입단 연도1983년
드래프트1983년 1차 3순위 (삼성 라이온즈)
소속 팀삼성 라이온즈 (1983년 ~ 1988년)
롯데 자이언츠 (1989년 ~ 1992년)
첫 출장KBO / 1983년
마지막 경기KBO / 1992년
실업 야구포항제철 야구단 (1979년 ~ 1980년)
육군 경리단 (1981년 ~ 1982년)
통계
통산 타율0.331
홈런54개
타점437점
안타1009개
수상
KBO MVP1987년
골든 글러브5회 (1983년, 1984년, 1985년, 1986년, 1987년)
타이틀1983, 1985~1987년 수위 타자
1983년 최다 안타, 최고 장타율
1983~1987, 1991년 최고 출루율
KBO 리그 우승2회 (1985년, 1992년)
국가대표
야구 월드컵1982 서울
인터컨티넨탈컵1977 마나과
코치 및 감독 경력
코치롯데 자이언츠 코치 (1994년)
삼성 라이온즈 타격 코치 (2000년)
감독삼성 라이온즈 2군 감독 겸 타격코치 (2010년 ~ 2011년)
삼성 라이온즈 2군 감독 (2011년)
프런트삼성 라이온즈 스카우트 (2000년 ~ 2009년)

2. 야구 입문

부산광역시 영도구에서 태어나 대구삼덕초등학교 4학년 때 야구를 시작했다.[7][8] 대구상고 시절에는 각종 대회에서 맹활약하며 팀을 대통령배, 봉황대기, 황금사자기 정상에 올려놓았다. 특히 황금사자기에서는 우수선수, 타격 1위(0.428), 최다 안타상을 받았고,[10] 봉황대기에서도 타격왕을 차지했다.[9] 1973년 일본과의 고교야구 친선경기에 대한민국 국가대표로 참가하여 2승 1무로 승리하는데 기여했다. 1974년 봉황기 우승과 함께 타격왕, 최다안타 상을 받았고,[11] 대통령배 고교야구대회에서는 5할 타율로 타격상을 받았다. 그 해 네 개 고교야구대회에서 0.383의 타율을 기록했다.[12] 한양대학교 시절, 1976년 백호기 대회에서 0.714(14타수 10안타)의 타율로 타격왕을 차지하는 등 장효조는 크게 성장할 선수로 기대를 모았다.[9]

2. 1. 한양대학교 시절

장효조는 서울 한양대학교에서 대학 야구를 했다. 1979년 2월 한양대학교 졸업 후, 한국 아마추어 리그의 포스코 야구단에 입단했다. 1982년 9월, 1982년 세계 야구 선수권 대회에 대한민국 야구 국가대표팀의 일원으로 참가하여, 주전 우익수로서 팀의 첫 번째 세계 선수권 대회 우승에 기여했다. 이 대회를 마치고 KBO 드래프트 참가를 발표했고, 1983년 KBO 드래프트 3라운드에서 삼성 라이온즈에 지명되었다.

3. 프로 야구 경력

포항제철에 입단하였다가 경리단에서 병역을 마친 후 삼성 라이온즈에 입단했다. 프로 야구 선수 생활 동안 뛰어난 활약으로 '타격의 달인', '안타 제조기' 등의 별명을 얻었다. 기자들 사이에서는 '장효조가 치지 않는 볼은 볼이다', '장효조는 배트를 거꾸로 잡아도 3할은 친다'라는 우스갯소리가 있을 정도로 뛰어난 선구안과 컨택트 능력을 자랑했다.

1988년 12월 21일 롯데 자이언츠로 트레이드된 후, 지명타자로 뛰면서 홀수 해에만 3할 타율을 기록하는 '격년제 징크스'를 겪기도 했다. 1991년에는 0.347의 타율을 기록하며 2년 만에 3할 타율을 달성했고, 1992년 한국시리즈에서 프로 데뷔 9년 만에 처음으로 한국시리즈 우승을 경험한 후 은퇴했다.

10시즌 동안 통산 961경기에 출장하여 타율 0.331, 78홈런, 437타점, 출루율 0.430을 기록했으며, 3050타수에서 1009개의 안타를 기록했다. 6시즌 동안 KBO에서 출루율 1위를 차지했고, 1983년부터 1987년까지 5년 연속 골든 글러브를 수상했다.[2] 2011년 KBO 리그 30년 레전드 올스타에 선정되었다.

3. 1. 삼성 라이온즈 시절 (1983-1988)

삼성 라이온즈에 입단하여 프로 첫 해부터 뛰어난 성적을 기록했다. 1983년 1군 92경기에서 타율 0.369(1위), 18홈런(공동 5위), 22도루(4위), 장타율 0.618(1위), 출루율 0.475(1위)를 기록하며 천재성을 입증했다.[13] 특히 5월에는 8연타석 안타와 3연타석 홈런을 기록하며 타율이 0.414까지 치솟기도 했다. 시즌 내내 0.380 이상의 고타율을 유지했으나, 막판 부진으로 0.369의 타율로 시즌을 마감했다. 삼성 라이온즈의 대표적인 프랜차이즈 스타로 활약하며 '타격의 달인', '안타 제조기' 등의 별명을 얻었다. 1985 시즌 삼성 라이온즈의 전·후기 통합 우승을 이끈 주역이기도 하다.[14]

뛰어난 선구안과 컨택트 능력을 가졌지만, 수비 능력은 부족했다. 1984년 한국시리즈에서 삼성이 패배한 원인 중 하나로 장효조의 캐치 미스가 지적되기도 했다. 그러나 해설자들은 약한 어깨에도 불구하고 정확한 송구 능력을 보여줬다고 평가했다.

1988년에는 트레이드설에 휩싸이고,[15] 연봉 협상 문제로 구단과 갈등을 겪었다.[16] 선수협 파동 직후인 1988년 12월 21일, 투수 장태수와 함께 외야수 김용철, 투수 이문한을 상대로 롯데 자이언츠에 트레이드되었다.[1] 이는 최동원김시진 등이 트레이드된 지 한 달 후의 일이었다.

삼성 라이온즈에서 그의 등번호 10번은 1993년 입단한 양준혁이 물려받았다. 양준혁은 장효조와 같이 좌타자이며, 타격왕을 4번이나 차지했다. 두 선수의 통산 타율은 장효조 0.331, 양준혁 0.316으로 한국 프로 야구 통산 타율 1, 2위에 해당한다. 삼성 구단과 팬들은 등번호 10번을 팀 내에서 가장 타율이 높은 타자가 물려받는 등번호라고 의미를 부여하기도 했다.[17][18][19]

3. 2. 롯데 자이언츠 시절 (1989-1992)

1988년 시즌 후, 김시진과 함께 최동원, 김용철을 상대로 롯데 자이언츠로 트레이드되었다.[1] 이적 후에는 지명타자로 뛰었으며, 홀수 해에만 3할대 타율을 기록하는 '격년제 징크스'를 겪었다. 1989년 1월 삼성 라이온즈에서 롯데 자이언츠로 트레이드될 때 연봉 5600만에 계약했다.

대구상고 후배였던 이정훈은 1991년에 '장효조 선배는 늘 경기 후 밤에 맥주를 2캔 마시고 자는 습관이 있었다. 하지만 나와 타격왕 경쟁을 하면서 그 맥주를 끊고 밤새 연습을 하더라'라고 평가했다. 그 해에 장효조는 타율 0.347를 기록하며 2년 만에 타율 3할대를 달성했다. 1992년, 마지막 프로 시즌에 한국시리즈 우승을 차지했지만, 타율은 0.265로 선수 경력 최저치를 기록했고, 홈런과 타점은 각각 0개, 25개였다. 1992 시즌 후, 장효조는 은퇴를 선언했다.

4. 은퇴 이후

(결과물이 없으므로, 수정할 내용이 없습니다.)

5. 사망

레전드 올스타 행사가 있기 며칠 전, 장효조는 몸에 이상을 느껴 병원에서 정밀 검사를 받았다. 그 결과 간암과 위암이 동시에 발견되어 2군 투수코치 양일환에게 2군 감독직을 넘겼다.

이후 부산으로 내려가 동아대학교병원에 입원하여 치료를 받았으나, 결국 2011년 9월 7일 오전 7시 30분, 55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났다.[2] 부산광역시 금정구 두구동 영락공원에 안장되었다. 장효조가 세상을 떠난 지 1주일 후인 9월 14일에는 국내 최고의 선발 투수로 꼽혔던 전 롯데 자이언츠 투수 최동원도 대장암 투병 끝에 53세로 별세해, 2011년 9월에만 한국프로야구계에서 큰 별 두 개가 졌다. 2011년 한국시리즈 1차전에서 아들 장의태 씨가 시구를 했다.

6. 출신 학교

7. 주요 기록

기록날짜소속상대팀상대 투수경기수타석수달성 당시 나이기타
최소 타석 1000안타1992년 8월 13일롯데 자이언츠쌍방울951360636세 1개월 7일역대 4번째


8. 통산 기록

연도소속나이출장타석타수득점안타2루타3루타홈런타점도루도실볼넷삼진타율출루율장타율OPS루타병살타몸맞희타희플고4
1983삼성28923863176111719318622225839.369.475.6181.09319616056
1984298936530956100197744884925.324.424.498.92315425028
1985301074223466612824111651785723.370.467.5431.01018864866
19863195367304551002026411675930.329.436.467.90314261037
1987328833528451110164258744126.387.461.493.95414013163
198833963342834189122435554927.314.419.413.83311722000
1989롯데3494393333401018313112155630.303.407.354.76211823010
199035963643243689134122843433.275.347.349.69611352400
1991361224243465612017104541177031.347.452.488.94116940246
19923782242204235490025313325.265.365.309.6746321131
KBO 통산 : 10년961363230504851008157365443710961506289.459.88614003127163037


참조

[1] 웹사이트 Korean baseball legend Jang dies at 55 https://www.koreatim[...] The Korea Times 2011-09-07
[2] 웹사이트 Former All-Star Jang dies of cancer http://www.koreahera[...] The Korea Herald 2011-09-07
[3] 뉴스 장효조 삼성 2군 감독 별세 http://sports.chosun[...] 스포츠 조선
[4] 뉴스 "하나님의 구장에서 장외홈런 날려야죠" http://www.pckworld.[...] 기독공보 2016-02-02
[5] 뉴스 백대삼심판 1,500경기 출장 https://newslibrary.[...] 경향신문 1996-05-15
[6] 뉴스 롯데선수에 파워가드(치아턱보호대) 보급...최치갑 치과원장 http://www.kookje.co[...] 국제신문 1996-01-13
[7] 문서 현재의 부산남항초등학교이며, 2002년 부산영선초등학교와 합병했다.
[8] 뉴스 장효조 삼성 2군 감독 어제 별세 - 한국 야구계 큰 별이 지다 http://sports.news.n[...]
[9] 칼럼 화려했으나 외로웠던 사내, 장효조 https://news.naver.c[...] 2011-09-07
[10] 뉴스 ‘타격 달인’ 장효조“요즘 고교야구 투지 실종…잔꾀만 늘어” http://news.donga.co[...] 동아일보 20160304205824
[11] 뉴스 ‘전설’ 장효조의 발자취 http://sports.khan.c[...] 스포츠경향 2011-09-07
[12] 뉴스 "[노재현의 시시각각] 장효조에게 명예의 전당을" https://news.joins.c[...] 중앙일보 2011-09-09
[13] 기사 '장효조, 최동원 불멸의 야구 천재' 주간경향 2011-09-27
[14] 뉴스 "OB의 재구성 - 삼성 역대 최고 타선" http://isplus.joins.[...] 일간 스포츠 20100424074330
[15] 뉴스 "장(張)효조 데려가겠다" https://newslibrary.[...] 조선일보 1988-01-28
[16] 뉴스 "[김원익의 휴먼볼] 우리는 ‘타격천재’ 장효조를 잊지 않았다" https://www.mbcsport[...] 엠스플뉴스 2016-09-09
[17] 뉴스 "이래서 내가 타격왕 해야 한다, 사연 있는 타격왕 전쟁" http://www.sportsseo[...] 스포츠 서울 2007-09
[18] 뉴스 "등번호엔 가치관 · 꿈 · 사연이…" http://news.hankooki[...] 한국일보 20111119173252
[19] 뉴스 "숫자로 본 양준혁 데뷔 이후 줄곧 썼던 등번호는?" http://isplus.joins.[...] 일간 스포츠 2010-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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