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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기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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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정기룡은 1562년에 태어나 1622년에 순직한 조선 중기의 무신이다. 1586년 무과에 급제하여 임진왜란과 정유재란에서 경상우도 방어사, 경상우도 병마절도사 등을 역임하며 혁혁한 공을 세웠다. 고령 전투, 율원 전투 등에서 승리하였으며, 토포사, 독포대장으로 토적을 토벌하는 활약을 펼쳤다. 임진왜란 이후에도 국방력 강화에 힘썼으며, 1617년 삼도수군통제사를 역임했다. 1773년 충의라는 시호를 받았으며, 묘는 경상북도 상주시에, 사당은 경상남도 하동군에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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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기룡
기본 정보
한글 이름정기룡
한자 이름鄭起龍
로마자 표기Jeong Giryong
한글 자경운
한자 자景雲
로마자 자Gyong Wun
한글 시호충의
한자 시호忠毅
로마자 시호Chungui
인적 사항
출생일1562년
출생지경상도 곤양현 금양면 중평리 (현, 하동군 금남면 중평리)
사망지통영 진중
사망일1622년
사망 원인병사
본관진양(晋陽)
별명자는 경운(景雲), 호는 매헌(梅軒)
시호충의(忠毅)
직업무관, 장군
종교유교
가족
아버지정호(鄭浩)

2. 생애

wikitext

정기룡은 1562년 명종 17년 4월 24일 곤양군 태촌(현재 경상남도 하동군 금남면 중평리)에서 증좌찬성 정호(鄭浩)의 3남으로 태어났다.[1] 첨정공(僉正公) 정중공(鄭仲恭)의 15세손이다. 모친이 천연두를 앓아 산달이 지나 어렵게 낳았기에, 부친은 무병장수를 바라며 초명을 무수라 지었다.

19세 때인 1580년 8월 곤양 인근 고성현 향시 초장에 합격하였다.[1] 당시 태촌에서 고성까지는 육로가 아닌 뱃길로 남해 창선도를 거쳐 이동했다.[1] 1585년 24세 때 진주의 향리 강세정의 딸과 결혼하였는데,[1] 부인 강씨는 1563년생으로 정기룡보다 한 살 어렸다.[1] 두 사람 모두 당시 결혼 적령기에 비하면 늦은 나이였다.[1]

1586년 25세 때 '''10월 26일 무과별시 병과 제4등으로 급제'''하였다.[1] 세상에는 선조의 명으로 기룡으로 이름을 고쳤다고 알려져 있으나,[1] 실제로는 집안 항렬인 "룡" 자에 따라 1579년 18세에 관례를 치르며 관명을 '기룡'으로 짓고 자를 '경운'으로 하였다.[1] 족보에는 형제 이름이 몽룡, 인룡이며, 사촌은 견룡, 룡, 응룡으로 기록되어 있다.[1] 급제 교지에는 '정기룡무과병과제4인급제출신자 만력14년10월26일'이라 적혀 있다.[1]

1587년 봄부터 1589년까지 북쪽 변방 국경에서 3년간 근무하였다.[1] 1590년에는 경상우도 '''병마절도사 신할(1548~1592)'''의 휘하에서 창원도호부에 복무하였다.[1] 신할은 신립 장군의 동생으로, 1589년 경상도 좌병사에서 1590년 경상도 우병사로 재임하다 임진왜란 발발 후 조대곤과 교체되어 경기수어사 겸 남병사로 임명되었고, 1592년 6월 27일 임진강 전투에서 전사하였다.[1] '''경상우병사를 역임했다는 기록은 <촉영도선생안>에 나오며, <선조실록>에는 보이지 않는다.'''[1] '''<매헌실기>에도 신할로 표기'''되어 있으며, '''신립(1546~1592)으로 소개 및 표기된 것은 바로잡아야 할 것이다.'''[1] 1408년 태종 8년 창원부로 승격된 후 경상우도 병마절도영이 설치되었다가 1603년 진주로 옮겨갔다.[1]

1591년 30세에 전력부위(종9품) 직에 나아가 한양 훈련원에서 종8품 봉사직으로 복무하였다.[1]

2. 1. 출생과 성장

정기룡은 1562년 명종 17년 4월 24일 곤양군 태촌(현재 경상남도 하동군 금남면 중평리)에서 증좌찬성 정호(鄭浩)의 3남으로 태어났다.[1] 첨정공(僉正公) 정중공(鄭仲恭)의 15세손이다. 모친이 천연두를 앓아 산달이 지나 어렵게 낳았기에, 부친은 무병장수를 바라며 초명을 무수라 지었다.

19세 때인 1580년 8월 곤양 인근 고성현 향시 초장에 합격하였다.[1] 당시 태촌에서 고성까지는 육로가 아닌 뱃길로 남해 창선도를 거쳐 이동했다.[1] 1585년 24세 때 진주의 향리 강세정의 딸과 결혼하였는데,[1] 부인 강씨는 1563년생으로 정기룡보다 한 살 어렸다.[1] 두 사람 모두 당시 결혼 적령기에 비하면 늦은 나이였다.[1]

1586년 25세 때 '''10월 26일 무과별시 병과 제4등으로 급제'''하였다.[1] 세상에는 선조의 명으로 기룡으로 이름을 고쳤다고 알려져 있으나,[1] 실제로는 집안 항렬인 "룡" 자에 따라 1579년 18세에 관례를 치르며 관명을 '기룡'으로 짓고 자를 '경운'으로 하였다.[1] 족보에는 형제 이름이 몽룡, 인룡이며, 사촌은 견룡, 룡, 응룡으로 기록되어 있다.[1] 급제 교지에는 '정기룡무과병과제4인급제출신자 만력14년10월26일'이라 적혀 있다.[1]

1587년 봄부터 1589년까지 북쪽 변방 국경에서 3년간 근무하였다.[1] 1590년에는 경상우도 '''병마절도사 신할(1548~1592)'''의 휘하에서 창원도호부에 복무하였다.[1] 신할은 신립 장군의 동생으로, 1589년 경상도 좌병사에서 1590년 경상도 우병사로 재임하다 임진왜란 발발 후 조대곤과 교체되어 경기수어사 겸 남병사로 임명되었고, 1592년 6월 27일 임진강 전투에서 전사하였다.[1] '''경상우병사를 역임했다는 기록은 <촉영도선생안>에 나오며, <선조실록>에는 보이지 않는다.'''[1] '''<매헌실기>에도 신할로 표기'''되어 있으며, '''신립(1546~1592)으로 소개 및 표기된 것은 바로잡아야 할 것이다.'''[1] 1408년 태종 8년 창원부로 승격된 후 경상우도 병마절도영이 설치되었다가 1603년 진주로 옮겨갔다.[1]

1591년 30세에 전력부위(종9품) 직에 나아가 한양 훈련원에서 종8품 봉사직으로 복무하였다.[1]

2. 2. 무과 급제와 관직 생활

정기룡은 1586년 10월 26일 무과 별시 병과 제4등으로 급제하였다.[1] 실제로는 집안 항렬인 "룡"자 돌림에 따라 1579년 관례를 치르고 관명을 '기룡'으로 지었으며, 자를 '경운'으로 하였다.[1] 1587년 봄부터 1589년까지 북쪽 변방 국경에서 3년간 근무하였다.[1] 1590년에는 경상우도 병마절도사 신할(1548~1592)의 휘하에서 창원도호부에서 복무하였다.[1] 신할은 신립 장군의 동생으로, 1589년 경상도 좌병사에서 1590년 경상도 우병사로 재임하다가 전쟁이 발발하자 조대곤과 교체되어 경기수어사 겸 남병사로 임명되었고, 1592년 6월 27일 임진강 전투에서 전사하였다.[1] 1591년에는 전력부위(종9품) 직에 나아가고, 한양에서 병법 훈련을 관장하는 훈련원의 종8품 봉사직으로 복무하였다.[1]

2. 3. 임진왜란 시기의 활약

정기룡은 1586년 무과에 급제한 후, 1592년 임진왜란이 발발하자 경상우도 방어사 조경의 휘하에서 종군하며 왜군과 맞서 싸웠다.[1] 거창 전투와 김산 전투에서 직속상관인 조경을 구출하는 등 공을 세웠다.[2] 1592년 6월 하순에는 곤양 수성장에 임명되어 고향을 지켰고, 이후 김성일의 휘하에서 유병별장으로 활약하며 진주성 1차 전투 승리에 기여했다. 1592년 10월 10일, 김성일은 정기룡의 뛰어난 용맹함과 전공을 높이 평가하여 상주 가판관으로 파격 승진시켰다.[1]

정기룡은 상주 가판관으로 부임한 후, 상주목사 김해 등과 협력하여 1592년 11월 23일 상주성을 일시 탈환하는 데 성공했다.[1] 1592년 12월에는 창의군과 함께 함창, 문경 지역에서 왜군을 격퇴하고, 1593년 1월에는 상주 및 함창, 문경의 관군을 지휘하며 왜군과 싸웠다.[1] 1593년 3월 20일 전후에는 '''율원전투'''에서 큰 승리를 거두었다.[1]

1593년 4월, 명나라 장수 유정, 사대수 등을 접대하고, 진주성 2차 전투 직전에는 상주 목사 대행으로 명나라 장수 왕필적과 함께 진주성을 방문하여 방어 상황을 점검했다.[1] 1593년 8월, 가목사로 승진한 후, 11월 30일에는 상주목사로 승진하고 감사군 대장을 겸임했다.[1]

1594년에는 독포대장 및 토포사로 임명되어 토적들을 토벌하고, 1595년에는 상주목사로 재임명되어 명나라 사신을 접대하는 등 다양한 임무를 수행했다.[1] 1597년 '''정유재란'''이 발발하자, 경상도 방어군 선봉장으로 임명되어 고령 전투에서 승리하고, 1597년 9월 22일 경상우도 병마절도사로 승진했다. 1597년 12월에는 명나라 군대와 함께 경주성을 수복하고, 울산 도산성을 공격하는 등 활약을 이어갔다.[1]

1598년에는 가선대부로 가자되고, 합천, 초계, 함양 등지에서 왜군과 전투를 벌여 승리했다.[1] 특히, 1598년 3월 24일부터 25일까지 벌어진 '''합천 삼가현 율원 전투'''에서는 명나라 총병과 연합하여 큰 전과를 올렸다.[1] 1598년 9월에는 사천 옛 성을 공격하여 왜군 장수를 목 베는 등 전공을 세웠으나, 사천왜성 전투에서는 명나라 군사의 패전으로 후퇴했다.[1] 1598년 12월, 전쟁이 종결되자 창원부의 옛 병영으로 돌아왔다.[1]

2. 4. 토포사 및 독포대장 활동

1586년 10월 26일 무과 별시에 병과 4등으로 급제한 정기룡은[1] 1590년 경상우도 병마절도사 신할(1548~1592)의 휘하에서 창원도호부에 복무하였다. 신할은 신립 장군의 동생으로, 1589년 경상도 좌병사에서 1590년 경상도 우병사로 재임하다가 전쟁 발발 직후 조대곤(생몰년 미상)과 교체되어 경기수어사 겸 남병사로 임명되었고, 1592년 6월 27일 임진강 전투에서 전사하였다. '''촉영도선생안에 경상우병사를 역임했다는 기록이 나오며, 매헌실기에도 신할로 표기'''되고 있으나, 선조실록에는 관련 기록이 없다.

1592년 임진왜란이 발발하자 정기룡은 경상우도 방어사 조경(1541~1609)의 휘하에서 종군하며 거창 신창지역과[2], 김산[2] 등에서 활약하였다. 특히 김산 전투에서는 왜병이 조경을 공격하려 하자, 즉시 말을 달려 왜병을 베어 조경을 구출하였다.[2] 이 공로로 박진은 1년 후인 1593년 11월 5일 선조실록 기사에서 정기룡의 용맹함을 칭찬하며, 조경이 정기룡 덕분에 목숨을 구했다고 언급하였다.[2]

1592년 5월 14일, 3도근왕군 경상도 소속으로 경상감사 김수(1547~1615) 휘하에서 한양으로 북상하던 중, 6월 4일 왜군 1명의 머리를 베는 공을 세웠다. 정만록에는 정기룡이 김산 접전에서 2개의 머리를 베었고, 이번에 또 1개를 베어 이미 3개가 되었으니 당상관이 될 만하다고 칭찬하고 있다. 당시 규정에 따르면 왜적 머리 3개를 베면 당상에 오르고 가선대부에 훈봉될 수 있었다.

1594년 7월 3일, 정기룡은 독포대장으로 임명되어 토포사를 겸임하며 토적들을 토벌하였다. 각 도에서 토적들이 떼를 지어 다녔는데, 남원의 토적 김희와 영남의 도적 임걸년이 가장 횡포하였다. 유성룡은 정기룡을 독포대장으로 임명하여 이들을 잡게 하였다. 선조실록 8월 21일자 기록에 따르면, 유성룡은 정기룡이 인심을 얻었고 싸움도 잘하니 당상에 올려 토포사로 삼고, 왜적이 움직이기 전에 토적을 잡는 것이 유익하다고 건의하였다. 정기룡은 1594년 8월 도적 이복의 목을 베고, 1595년 1월 12일에는 산청 단성에서 토적 괴수 김희를 붙잡았다.

2. 5. 정유재란 시기의 활약

1597년 가토 기요마사의 제1군이 부산 다대포에 상륙하면서 정유재란이 발발했다.[1] 정기룡은 경상도 방어군 선봉장으로 임명되어 왜군의 재침을 막는 임무를 맡았다.[1] 도체찰사 이원익도원수 권율, 경상좌도방어사 곽재우가 상의하여 정기룡을 적임자로 정하고, 이원익은 정기룡에게 방문을 보내어 방어군 선봉장으로 기용할 뜻을 밝혔다.[1]

1597년 8월 7일, 나게시마 나오시게가 이끄는 12,000명의 왜군이 의령현을 점령하고 삼가현을 거쳐 북상하여 고령에 도달했다.[1] 정기룡은 군사를 거느리고 고령 녹가전에 진을 쳤다.[1] 8월 16일 새벽, 정기룡 군사 전 병력과 왜군은 용담천을 사이에 두고 대진했다.[1] 정기룡은 이동현 쪽에 복병을 배치하고 거짓 퇴각을 하다 일제히 공격하여 많은 왜적을 살상했다.[1] 이 고령 전투는 정유재란 시기 육지 전투에서 조선군이 거둔 첫 승리였다.[1] 정기룡 부대에 큰 타격을 입은 왜군은 북진 계획을 중단하고 가토 기요마사를 선두로 전주에 들어가 일단 왜군의 좌군과 합류했다.[1]

1597년 9월 20일, 정기룡은 충청도 직산 소사평 전투, 화덕 전투, 형강 전투에서 패하고 크게 밀리던 왜군 부대 중 가등청정 부대를 만나 왜적을 많이 살상했다.[1] 유격병 400여 명을 거느리고 보은 방면에서 왜군을 공격하려다가, 적암에서 가등청정 군사와 짙은 안개 속에서 충돌하여 왜적을 많이 죽이고, 기마 연락을 보내 백성들이 빨리 피란할 수 있도록 했다.[1]

고령 전투 전공으로 1597년 9월 22일, 정기룡은 절충장군으로 승진하고 경상우도 병마절도사에 임명되었다.[1] 10월 말, 명나라 군대의 출병이 결정되면서 조·명 연합군이 구성되었고, 정기룡 휘하 1,000명은 좌·우협군 중 우협부대에 편성되었다.[1] 12월 7일, 김산 아천에서 왜적을 크게 무찔렀고, 남은 왜적들은 상주성에 들어가 노략질을 했다.[1]

1597년 12월 20일, 명나라 군대와 함께 경주에 주둔한 왜적을 격파하고 경주성을 수복했다.[1] 왜적들은 울산 방면으로 후퇴했다.[1] 12월 22일, 울산 도산성을 새벽에 공격하여 수급 400여 개를 베었고, 다음 날 명나라 경리 양호와 합동으로 도산성을 포위, 모국기와 함께 선봉장이 되어 적병 수급 660여 개를 베었다.[1] 1597년 12월 24일부터 1598년 1월 3일까지 도산성을 맹렬히 공격했으나, 명나라 군의 패전으로 정기룡을 비롯한 경상우도 절도사 소속 병력도 경주로 후퇴했다.[1]

1598년 1월, 정기룡은 김산군 아산촌과 상주 목통현, 거창군 연송촌, 가조현 등에서 많은 왜적을 살상했다.[1] 거창군 모곡에서 항복한 왜적 사지지를 시켜 많은 왜적을 항복시켰으나, 항왜들이 다른 마음을 품을까 의심하여 모두 죽여버렸다.[1] 1월 26일, 정기룡은 적군을 제압하는 일체의 일을 스스로 결단하여 처리할 수 있도록 하는 비상(非常)한 명령을 내리는 선조의 유지를 받았다.[1]

1598년 2월 24일, 가선대부(종2품 문무관)로 가자되었고, 특별히 허리에 금대(金帶)를 띠도록 허락받았다.[1] 유성룡이 경상도의 내부가 텅 비어있고 정기룡이 작은 군졸로서 좌도와 우도의 적군이 침입하는 길을 끊고 있으니 표창하는 유지를 가하기 바란다고 선조에게 아뢰어 윤허를 받은 것이다.[1] 3월 24일에서 25일, 합천군 삼가현 율원 전투에서 명나라 총병 해생과 연합하여 많은 왜적을 살상했다.[1] 선조실록 4월 3일 기사에는 마 제독과의 대화에서 지난 3월 24일 정기룡이 적 24명의 목을 베었다는 내용이 기록되어 있다.[1]

1598년 4월 20일, 함양 사근역 전투에서 명나라 부총병 이령이 전사하자 명나라 군인 700여 명을 임시 지휘했으며, 명나라 도독부에서 신패(보물 669-2호/도독 마귀가 전달), 명나라 도찰원에서 표패(4월 1일 전달), 명나라 감군 사세용은 증정시 1수를 내렸다.[1] 6월 15일에는 창녕 영산현에 있는 왜적을 공격하여 패퇴시켰다.[1]

1598년 8월 12일, 적군의 괴수에게 항복하여 거짓으로 단성현감이라 부르던 안득을 잡아 풍신수길이 죽었다는 말을 듣고는 사실을 선조께 계문했다.[1] 9월 18일부터 20일 새벽까지 남강진주의 망진산성, 24일 영성왜성과 곤양왜성을 점령하고, 사천고성과 동양창(선진리 왜성)으로 육박해 나아갔다.[1] 9월 28일, 사천현의 옛 성을 공격하여 조명 연합군이 성을 되찾고 왜적 장수 이선도를 목 베었다.[1] 그러나 10월 1일 사로병진작전으로 동양창(사천왜성) 전투에서 명나라 동일원의 군사와 함께 공격하다가 명나라 군사가 패전하자 많은 전사자를 내고 진주를 거쳐 삼가현으로 후퇴했다.[1]

1598년 11월 16일, 사천현 동양창(사천 선진리왜성)에서 철수하여 순천성에 명나라 수군과 조선 수군에게 포위된 고니시 유키나가를 구원하기 위해 출전한 시마즈 요시히로 군의 배를 타지 못한 병든 군사 등 50여 명의 목을 베었다.[1] 이후 시마즈 군은 이순신의 조선 수군과 노량 해전에서 싸워 크게 패하고 겨우 목숨을 건져 부산을 거쳐 일본으로 철수한다.[1] 12월 1일경, 창원부의 옛 병영으로 돌아왔으며, 전쟁이 종료되었다.[1]

2. 6. 전후 활동과 죽음

정기룡은 임진왜란이 끝난 후에도 군직에 머물며 국방력 강화에 힘썼다.[1] 1598년 12월 18일 오위도총부 용양위부호군으로 임명되었고, 상주로 돌아와 어머니의 안부를 살피고 분황제를 지냈다.[1] 1599년 1월 24일 경상우도 병마절도사로 다시 임명되어 창원도호부에서 옛 군영을 복구하였다.[1] 1599년 3월 22일에는 임금의 전지를 받들어 굶주린 백성들을 구제하였고,[1] 9월 20일에는 왜군의 재침에 대비하여 군대와 무기를 정비하였다.[1]

1599년 10월 2일 명나라 유격 모국기는 선조에게 "정기룡은 몸을 돌보지 않고 나아가 싸우는 훌륭한 장수"라고 칭찬하였다.[1] 이후에도 정기룡은 군량 확보, 군사 훈련, 무기 제조 등 국방력 강화에 힘쓰는 한편, 백성들을 위한 정책에도 힘썼다.[1]

1601년 3월 21일 경상우도 방어사로 임명되었을 때는 임금이 직접 《소학》 1부를 내려주며 충성과 효성을 칭찬하였다.[1] 그러나 1602년 윤달 2월 16일, 남해 백성 관련 문제로 김해 도호부사로 좌천되기도 했다.[1]

1604년, 정기룡은 백성들의 호소와 경상도 순검어사 유간의 장계 덕분에 밀양도호부사로 복귀하고 가의대부(종2품)와 자헌대부(정2품)로 승진했다.[1] 1605년에는 선무원종공신 1등 5위에 녹훈되었고,[1] 경상좌도 병마절도사 겸 울산도호부사로 임명되었다.[1]

1607년에는 전라도 병마절도사, 평안도 구성도호부사 등에 임명되었으나, 어머니의 병환으로 사양하거나 임금의 명으로 상주로 돌아가기도 했다.[1] 1608년 선조가 승하하고 광해군이 즉위한 후에도 정기룡은 전라도 병마절도사, 용양위부호군, 오위도총부 도총관 등 요직을 역임했다.[1]

1613년 경상 좌수사로 임명되었으나, 1614년 계축옥사에 연루되어 투옥되었다가 무혐의로 석방되었다.[1] 1616년 경상우도 병마절도사로 복귀했고,[1] 1617년에는 제15대 삼도수군통제사 겸 경상우도 수군절도사로 임명되어 남해안 방어에 힘썼다.[1]

정기룡은 여러 차례 품계가 승진하여 1621년에는 보국숭록대부(정1품)에 오르고 제17대 삼도수군통제사 겸 경상우도 수군절도사가 되었다.[1] 또한 명나라 어민 구조에 대한 공로로 명나라 황제로부터 상을 받기도 했다.[1]

1622년 2월 28일, 정기룡은 통제영 진중에서 순직하였고, 4월 3일 상주 사벌동에 안장되었다.[1] 1773년(영조 49) 1월 20일, 사후 151년 만에 충의(忠毅)라는 시호를 받았다.[1] 그의 묘는 경상북도 상주시 사벌면 금흔리에 있으며, 경북 기념물 제13호로 지정되었다.[1] 경상남도 하동군 금남면 중평리에는 사당인 '경충사'가 있다.[1]

3. 사후

4. 가족 관계

아버지 정호(鄭浩)의 슬하에는 아들 3명과 딸 1명이 있었다. 아버지는 분성 김씨(족보에는 경주 김씨로 되어 있음)와 혼인하였으며, 큰어머니는 남양 홍씨이다. 형 정몽룡(鄭夢龍)은 남양 홍씨 소생으로, 생몰 연대는 미상이나 벼슬이 참봉에 이르렀으며, 아들 정수린은 후에 훈련원정 벼슬을 지냈다. 정수린은 임진왜란 때 삼촌인 정기룡의 참모로 활약하였다. 형 정인룡(鄭仁龍)은 분성 김씨 소생이다.

정기룡은 진주 강씨(晉州姜氏) 강세정(姜世鼎)의 딸과 처음 혼인하였으나, 후에 예천 권씨(醴泉權氏) 권홍계(權弘啓)의 딸과 1594년 6월 10일 재혼하였다. 예천 권씨와의 사이에서는 딸 1명을 두었는데, 이 딸은 학봉 김성일의 손자며느리가 되었다. 1594년 12월 24일에는 함양 유씨와도 혼인하였는데, 함양 유씨는 뇌계 유호인(1445~1494)의 후손이자, 정기룡과 먼 친척인 정경운(1556~1610)의 외가 7촌 서숙인 유계선의 딸이었다. 함양 유씨는 <고대일록>을 지은 정경운 가문의 사람이었다. 그 외에 달성 서씨를 측실로 두었다는 기록이 있다. 정기룡은 아들 익린(翼麟), 득린(得麟), 덕린(德麟), 시린(時麟)과 딸 1명을 두었다.

5. 관련 문화재


  • 정기룡 유물은 보물 제669호로 지정되어 있다.
  • 정기룡장군유적은 경상북도 기념물 제13호이다.
  • 상주시에는 정기룡 장군 관련 유적으로 경천대가 있다.
  • 상주시 충의사는 정기룡 장군을 모신 사당이다.
  • 상주박물관에는 정기룡 장군 관련 유물이 전시되어 있다.
  • 하동군 경충사는 정기룡 장군을 모신 사당이다.

6. 일화

정기룡은 이미 죽은 어머니에게서 열두 달 만에 태어났다는 설화가 있다. 할아버지가 명당을 획득하여 발복, 장군이 될 운명을 타고 났으며, 친구들과 산에 갔다가 호랑이를 만나 죽을 위기에 처했지만 큰 인물이 될 것이니 살려 두라는 산신령의 명령으로 살아났다고 한다. 공부할 때도 하늘이 장군을 알아보고 용마와 신검을 주었다고 전해진다.

19세 무렵에는 진주에서 소금장수를 하거나 관노비 생활을 하기도 했다. 진주 남강에서 전쟁놀이를 하다가 불어난 홍수로 인해 친구가 빠져 죽자 죄책감으로 20세에 홀어머니와 몰래 상주로 이사를 갔다는 이야기도 있다. 20세 무렵에는 상주 경천대에서 용마를 얻었다고 한다.

정기룡의 본명은 정무수였는데, 과거를 보러 서울로 가던 중 선조가 꿈에서 종각의 용을 보았고, 그 용이 정무수였다는 이야기가 있다. 선조는 무과 시험에서 뛰어난 정무수에게 기룡이라는 이름을 내렸다고 한다.

정기룡은 1593년 6월 진주성 제2차 전투에서 강씨 부인을 잃는 슬픔을 겪었지만, 이후 권씨와 혼인하였다. 권씨 부인은 결혼 선물로 준마를 가져왔는데, 정기룡은 이 말을 타고 전쟁을 치렀다고 한다. 또한 권씨 부인은 정기룡이 전장에서 승리할 수 있도록 무기와 의병을 준비해 주는 조력자 역할을 하였다.

정기룡은 추풍령 고개에서 줄공개와 화공 전략으로 왜적을 물리쳤으며, 관노에서 속량되어 임진왜란에서 큰 공을 세웠다. 전설에 따르면, 모든 전장에서 승리한 뒤 상주성 전투에서 아들과 함께 비장한 죽음을 맞이했다고 전해진다.

7. 평가

참조

[1] 웹인용 충의사(정기룡 장군 유적지) http://korean.visitk[...] 한국관광공사 2008-11-17
[2] 텍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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