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읍 무성서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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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정읍 무성서원은 신라 후기 학자 최치원을 추모하기 위해 건립된 서원으로, 전라북도 정읍시 칠보면 무성리에 위치한다. 고려 시대 태산사로 시작하여 조선 시대에 무성서원으로 사액되었으며, 최치원, 신잠, 정극인 등 여러 인물을 배향했다. 서원은 강당, 사당, 재실 등을 갖춘 전형적인 서원 건축 양식을 보이며, 성리학 교육을 중시했다. 흥선대원군의 서원 철폐령에도 존속하여 조선 시대 교육 활동의 중요한 사례를 보여준다. 1968년 사적으로 지정되었고, 2019년 유네스코 세계유산으로 등재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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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읍 무성서원 - [유적/문화재]에 관한 문서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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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본 정보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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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형 | 사적 |
지정 번호 | 166 |
지정일 | 1968년 12월 19일 |
주소 | 전북특별자치도 정읍시 칠보면 원촌1길 44-12 |
시대 | 조선시대 |
소유 | 무성서원 |
면적 | 4,093m2 |
문화재청 ID | 13,01660000,35 |
세계유산 정보 | |
이름 | 한국의 서원 - 무성서원 |
지정 번호 | 1498-008 |
기준 | (ⅲ) |
영어명 | Seowon, Korean Neo-Confucian Academies |
프랑스어명 | Seowon, académies néo-confucéennes coréennes |
회차 | 제43차 |
등록년 | 2019년 |
소재국 | 대한민국 |
등록 구분 | 문화유산 |
2. 역사
고려시대 지방 유림은 신라 후기 학자이자 문장가였던 최치원을 추모하기 위해 유상대(流觴臺) 위에 사당을 건립하여 '''태산사'''(泰山祠)라 하였다. 1484년(성종 15) 정극인이 세운 향학당(鄕學堂)이 있던 지금의 전라북도 정읍시 칠보면 무성리로 이전하였다. 1549년(명종 4) 영천자 신잠의 생사당(生祠堂)을 짓고 배향하였다.
1615년(광해군 7) '태산사' 자리에 현지 선비들이 '태산서원'(泰山書院)을 지었으며, 1696년(숙종 22) 최치원과 신잠의 두 사당을 합치고 '''무성서원'''(武城書院)이라 사액을 받았다. 1630년(인조 8) 정극인, 송세림, 정언충, 김약묵과 1675년(숙종 1) 김관을 추가 배향하였다.
조선 후기 서원철폐령에도 남아있던 47개 서원 중 하나로, 1486년(성종 17) 이후의 봉심안, 강안, 심원록, 《원규》등의 귀중한 자료들이 많이 남아 있어 당시 교육활동 모습을 잘 보여준다.
1968년 12월 19일 대한민국의 사적 제166호 '''무성서원'''으로 지정되었다가, 2011년 7월 28일 '''정읍 무성서원'''으로 명칭이 변경되었다.[1]
2. 1. 건립 배경
고려시대 지방 유림의 공의로 신라 후기의 학자이자 문장가였던 고운 최치원의 덕행과 학문을 추모하기 위하여 유상대(流觴臺) 위에 사당을 건립하여 '''태산사'''(泰山祠)라 하였다. 1484년(성종 15) 정극인이 세운 향학당(鄕學堂)이 있던 지금의 자리인 전라북도 정읍시 칠보면 무성리로 이전하였다. 1549년(명종 4) 신잠의 생사당(生祠堂)을 짓고 배향하였다.[1]1615년(광해군 7) '태산사'(泰山祠) 자리에 현지 선비들이 '태산서원'(泰山書院)을 지었으며, 1696년(숙종 22) 최치원과 신잠의 두 사당을 합치고 '''무성서원'''(武城書院)이라 사액(賜額)을 받았다.[1]
2. 2. 조선시대의 발전
1615년(광해군 7) 현지 선비들이 '태산사'(泰山祠) 자리에 '태산서원'(泰山書院)을 지었으며, 1696년(숙종 22) 최치원과 신잠의 두 사당을 합치고 '''무성서원'''(武城書院)이라 사액(賜額)을 받았다.[1]이후 1630년(인조 8) 정극인, 송세림, 정언충, 김약묵과 1675년(숙종 1) 김관을 추가 배향하였다.[1]
서원의 배치는 약간 경사진 땅 위에 강당과 사당을 잇는 직선축을 중심으로 정문인 누각 현가루와 내삼문을 배치하고, 주변에 전사청과 교직사, 비각 등을 세웠다. 사당은 정면 3칸, 강당은 정면 5칸이고, 강당과 재실은 모두 마루와 온돌이 결합된 양식이다. 다른 서원과는 달리 재실이 담 밖에 세워졌다는 점이 무성서원의 구조적 특징이다.[1]
무성서원의 교육 과정은 《원규》(일종의 학칙)에 상세하게 제시되어 있는데, 여기에는 교육 목표, 내용 및 방법 등이 포함되어 있다. 서원에서는 유학, 특히 성리학 공부에 힘썼으며, 《격몽요결》, 《소학》부터 시작해서 《대학》, 《논어》, 《맹자》, 《중용》, 《시경》, 《서경》, 《주역》, 《예기》, 《춘추》를 읽는 것이 원칙이었다. 입학 기준은 나이나 신분에 상관없이 독서에 뜻이 있고 배우고자 하는 자는 모두 허락하였지만, 일단 입학하면 용모를 단정히 하고 정신을 통일하여 의리 깨우침에 힘쓰며 서로 돌아보고 잡담하지 말 것을 엄격히 강조하였다.[1]
1486년(성종 17) 이후의 봉심안(奉審案), 강안(講案), 심원록(尋院錄), 《원규》등의 귀중한 자료들이 많이 남아 있으며, 조선 후기 서원철폐령에도 남아있던 47개 서원 중 하나이다. 조선 시대 수많은 선비를 길러낸 서원으로 당시 교육활동의 모습을 가장 잘 보여주는 곳이기도 하다.[1]
2. 3. 서원 철폐령과 그 이후
1868년 조선 후기 흥선대원군의 서원 철폐령에도 불구하고 살아남은 47개 서원 중 하나이다.[1] 이곳은 조선 시대에 수많은 선비를 길러낸 곳으로, 당시 교육활동의 모습을 가장 잘 보여준다.3. 건축
무성서원은 고려시대에 지방 유림이 최치원을 추모하기 위해 세운 태산사에서 비롯되었다. 1484년(성종 15) 정극인이 세운 향학당이 있던 전라북도 정읍시 칠보면 무성리로 이전하였고, 1549년(명종 4) 신잠의 생사당을 지어 배향하였다. 1615년(광해군 7)에는 현지 선비들이 태산서원을 지었으며, 1696년(숙종 22) 최치원과 신잠의 두 사당을 합치고 무성서원이라 사액받았다.
이후 1630년(인조 8) 정극인, 송세림, 정언충, 김약묵과 1675년(숙종 1) 김관을 추가 배향하였다.
3. 1. 배치와 구조
무성서원은 약간 경사진 땅 위에 강당과 사당을 잇는 직선축을 중심으로 정문인 누각 현가루와 내삼문을 배치하고, 주변에 전사청, 교직사, 비각 등을 세웠다. 사당은 정면 3칸, 강당은 정면 5칸이고, 강당과 재실은 모두 마루와 온돌이 결합된 양식이다. 다른 서원과는 달리 재실이 담 밖에 세워졌다는 점이 무성서원의 구조적 특징이다.[1]3. 2. 건축 양식
무성서원은 약간 경사진 땅 위에 강당과 사당을 잇는 직선축을 중심으로 정문인 누각 현가루와 내삼문을 배치하고, 주변에 전사청, 교직사, 비각 등을 세웠다. 사당은 정면 3칸, 강당은 정면 5칸이고, 강당과 재실은 모두 마루와 온돌이 결합된 양식이다. 다른 서원과 달리 재실이 담 밖에 세워졌다는 점이 무성서원의 구조적 특징이다.[1]4. 교육
정읍 무성서원은 조선 시대 수많은 선비를 길러낸 곳으로, 당시 교육활동 모습을 엿볼 수 있다. 1486년(성종 17) 이후 작성된 봉심안(奉審案), 강안(講案), 심원록(尋院錄), 《원규》 등 귀중한 자료들이 남아있다.[1]
4. 1. 교육 목표 및 내용
무성서원의 교육 과정은 《원규》(일종의 학칙)에 상세히 제시되어 있다. 서원에서는 유학, 특히 성리학을 중점적으로 공부했다. 《격몽요결》, 《소학》부터 시작하여 《대학》, 《논어》, 《맹자》, 《중용》, 《시경》, 《서경》, 《주역》, 《예기》, 《춘추》를 읽는 것이 원칙이었다.[1]입학 기준은 나이나 신분에 상관없이 독서에 뜻이 있는 자는 모두 허락하였다. 그러나 입학 후에는 용모를 단정히 하고 정신 통일을 통해 의리를 깨우치는 데 힘쓰며, 잡담을 금지하는 등 엄격한 규율이 적용되었다.[1]
4. 2. 교육 방법 및 특징
무성서원의 교육과정을 상세하게 제시하고 있는 《원규》(일종의 학칙)에 따르면, 서원에서는 유학 가운데서도 특히 성리학을 공부하는데 힘썼다. 《격몽요결》, 《소학》에서부터 시작해서 《대학》, 《논어》, 《맹자》, 《중용》, 《시경》, 《서경》, 《주역》, 《예기》, 《춘추》를 읽는 것이 원칙이었다.[1] 입학 기준은 나이나 신분에 상관없이 독서에 뜻이 있고 배우고자 하는 자는 모두 허락하였지만, 일단 입학하면 반드시 용모를 단정히 하고 오로지 정신을 통일하여 의리를 깨우침에 힘쓰며 서로 돌아보고 잡담하지 말 것을 엄격히 강조하였다.[1]4. 3. 교육 자료
무성서원의 교육 목표, 내용, 방법 등 교육 과정 전반은 《원규》(일종의 학칙)에 상세히 제시되어 있다. 서원에서는 유학, 특히 성리학 공부에 힘썼으며, 《격몽요결》, 《소학》부터 시작하여 《대학》, 《논어》, 《맹자》, 《중용》, 《시경》, 《서경》, 《주역》, 《예기》, 《춘추》를 읽는 것을 원칙으로 삼았다.[1] 입학 기준은 나이나 신분에 관계없이 독서에 뜻이 있는 자는 모두 허락하였으나, 입학 후에는 용모를 단정히 하고 정신을 통일하여 의리 깨우침에 힘쓰며, 잡담을 금지하는 등 엄격한 규율을 강조하였다.[1]1486년(성종 17) 이후 봉심안(奉審案), 강안(講案), 심원록(尋院錄), 《원규》 등 귀중한 자료들이 많이 남아 있다.[1]
5. 배향 인물
인물 | 생몰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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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치원 | 857년 ~ ? |
신잠 | 1491년 ~ 1554년 |
정극인 | 1401년 ~ 1481년 |
송세림 | 1479년 ~ ? |
정언충 | 1706년 ~ 1771년 |
김약묵 | 1500년 ~ 1558년 |
김관 | 1575년 ~ 1635년 |
6. 현대
1968년 12월 19일 대한민국의 사적 제166호로 지정되었다가, 2011년 7월 28일 '''정읍 무성서원'''으로 명칭이 변경되었다.[1] 조선 후기 서원철폐령에도 남아있던 47개 서원 중 하나로, 조선 시대 수많은 선비를 길러낸 곳이며 당시 교육활동의 모습을 잘 보여주는 곳이기도 하다.
6. 1. 문화재 지정
1968년 12월 19일 대한민국의 사적 제166호로 지정되었다가, 2011년 7월 28일 '''정읍 무성서원'''으로 명칭이 변경되었다.[1]6. 2. 유네스코 세계유산 등재
문화재청은 2018년 1월 정읍 무성서원을 비롯한 한국의 대표 서원 9곳을 「한국의 서원」으로 지정하여 유네스코 세계유산에 등재 신청하였고, 2019년 7월 10일 세계문화유산으로 등재되었다.[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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