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안대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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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제안대군은 조선 예종의 아들이자 성종의 이복 동생으로, 본래 왕위 계승 1순위였으나 성종이 즉위하면서 제안대군에 봉해졌다. 그는 여러 번의 혼인과 이혼을 겪었으며, 첫 번째 부인과의 재결합을 시도하는 등 기행을 보였다. 연산군과 친밀한 관계를 유지하며 정치와 거리를 두고 풍류를 즐겼으며, 《패관잡기》에는 그의 기행에 대한 일화가 실려 있다. 1525년에 사망했으며, 효성이 지극했으나 어리석다는 평가를 받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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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안대군 - [인물]에 관한 문서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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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본 정보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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휘 | 이현(李琄) |
작위 | 조선 예종의 왕자 |
자 | 국보(國寶) |
시호 | 영효(靈孝) |
출생일 | 1466년 3월 8일 (음력) |
출생지 | 조선 한성부 창덕궁 수강전 |
사망일 | 1526년 1월 6일 (음력, 1525년 12월 2일) |
아버지 | 예종 |
어머니 | 안순왕후 한씨 |
배우자 | 상산부부인 상주 김씨, 부부인 순천 박씨 |
자녀 | 낙풍군 이파 (양자) |
2. 생애
예종과 안순왕후의 아들로 태어난 제안대군은 4세의 어린 나이로 왕위 계승 1순위였으나, 조모 정희왕후에 의해 사촌형인 잘산군(성종)이 즉위하면서 1470년(성종 1년) '''제안대군'''(齊安大君)에 봉해졌다.[1] 1474년(성종 5년)에는 세종의 7남 평원대군의 봉사손으로 출계하였다.
제안대군은 김수말(金守末)의 딸 상산부부인 김씨와 혼인하였으나, 김씨가 다리를 절고 간질을 앓는다는 이유로 이혼하였다.[3] 이후 박중선[4]의 딸과 재혼하였으나, 여종들과 동침하였다는 이유로 다시 이혼을 요구하였다. 이 사건은 부인 박씨의 억울함이 밝혀져 여종들을 처벌하는 선에서 마무리되었으나, 안순왕후가 며느리 박씨가 부모에게 불순하다는 이유로 이혼을 청하여 결국 이혼하게 되었다.[11]
이후 제안대군은 첫 번째 부인 김씨와의 재결합을 청하였으나 성종은 이를 허락하지 않고 새 아내를 짝지어 주겠다고 하였다. 이에 제안대군은 새 아내를 얻느니 평생 혼자 살겠다고 맞섰고,[5] 결국 김씨와 다시 혼인하였다. 그러나 자녀는 없었으며, 기록에 따르면 평생 여자를 멀리하고 남녀관계의 즐거움을 깨닫지 못하였다고 한다.[6]
제안대군은 정치와 거리를 두고 풍류를 즐기는 삶을 살았다. 중종반정 이후 정국원종공신 1등에 책록되기도 하였으나, 중종조에도 왕실의 종친으로 대우받으며 정쟁에 휘말리지 않았다.
1525년(중종 20년) 12월 4일 졸하였으며,[7] 시호는 영효(靈孝)이다. 묘소는 경기도 성남시 수진동에 있었다가 포천군 소흘면 이곡리로 이장되었으며, 김씨 부인의 묘와 쌍분을 이루고 있다.
2. 1. 탄생과 가계
1466년(세조 12년) 2월 13일, 창덕궁 수강전에서 당시 왕세자였던 해양대군(예종)과 세자의 후궁인 종5품 소훈 한씨(안순왕후)의 아들로 태어났다.[1][2]1468년(예종 즉위년), 예종이 즉위하면서 원자에 책봉되었다.
1469년(예종 1년) 11월, 아버지 예종이 승하하였다. 당시 왕위 승계 1순위였으나 나이가 4세에 불과하여 조모 정희왕후가 백부인 의경세자의 차남이자 제안대군의 사촌형인 잘산군(성종)을 후계자로 지명하여 즉위시켰다.
1470년(성종 1년), '''제안대군'''(齊安大君)에 봉해졌다. 봉작을 받기에는 이른 나이였으나, 직계를 대접한다는 방계의 명분이 컸다.
1474년(성종 5년), 증조부 세종의 적7남인 평원대군의 봉사손으로 출계하였다.
2. 2. 혼인과 파란
성종 7년(1476년) 김수말(金守末)의 딸인 상산부부인 김씨와 혼인하였으나, 성종은 김씨가 다리를 절고 풍과 간질을 앓고 있다는 이유로 혼인 전에 알리지 않았다며 김씨의 외조부인 유수(柳洙)에게 이혼 의사를 밝히고 이혼시켰다.[3]이후 박중선[4]의 딸과 재혼하였으나, 제안대군은 두 번째 부인 박씨가 여종들과 동침하였다며 성종에게 이혼을 요청하였다. 이 동성애 사건은 부인 박씨의 억울함이 밝혀져 박씨를 능욕한 여종들을 처벌하는 선에서 마무리되었다.
李琄|제안대군 이현중국어은 처음에 김씨에게 장가들었다가 오래 되지 않아 병이 들었다 하여 버리고, 또 박씨에게 장가들었다가 오래 되지 아니하여 불순(不順)하다는 것으로써 버리는데, 그 병든 것과 불순한 형상은 자세히 알지는 못하겠지만 마땅히 버려야 하는 데 합당한 것입니까? 두어 해가 못되는 사이에 두 번씩 배필을 바꾸어 바둑을 놓는 것처럼 하니, 이것은 천만세(千萬世)에 이륜(彝倫)의 중함이 이현(李琄)으로부터 허물어지는 것입니다.
: 제안대군의 이혼을 반대하는 사헌부 대사헌 이철견의 상소
하지만 안순왕후는 성종에게 며느리 박씨가 부모에게 불순하다는 이유로 이혼을 청하였고, 성종은 제안대군과 두 번째 부인 박씨를 이혼시켰다.[11] 두 번째 아내 박씨는 이후 사망하였다.
제안대군이 성종에게 첫 번째 아내 김씨와의 재결합을 청하자 성종은 재결합은 불가하다며 새 아내를 짝지어 주겠다고 하였다. 그러자 제안대군은 새 아내를 얻느니 평생 혼자 살겠다고 맞섰다.[5]
결국 첫 번째 아내인 김씨와 다시 혼인하였으나, 자녀는 없었다. 기록에 의하면 평생 여자를 멀리하고 남녀관계의 즐거움을 깨닫지 못하였다고 한다.[6]
2. 3. 삶의 방식과 중종반정
성종은 며느리 김씨가 발을 절뚝거리며 풍과 간질을 앓자, 혼례 전 미리 알리지 않았다며 김씨 부인의 외조부인 유수(柳洙)에게 이혼 의사를 전하고 폐하여 이혼시켰다.[3]이후 박중선[4]의 딸과 재혼하였으나, 제안대군은 두 번째 부인 박씨가 여종들과 동침하였다며 성종에게 이혼을 요청하였다. 이 동성애 사건은 부인 박씨의 억울함이 밝혀져, 박씨를 능욕한 여종들을 처벌하는 선에서 마무리되었다.
李琄|이현중국어은 처음에 김씨에게 장가들었다가 오래 되지 않아 병이 들었다 하여 버리고, 또 박씨에게 장가들었다가 오래 되지 아니하여 불순(不順)하다는 것으로써 버리는데, 그 병든 것과 불순한 형상은 자세히 알지는 못하겠지만 마땅히 버려야 하는 데 합당한 것입니까? 두어 해가 못되는 사이에 두 번씩 배필을 바꾸어 바둑을 놓는 것처럼 하니, 이것은 천만세(千萬世)에 이륜(彝倫)의 중함이 이현(李琄)으로부터 허물어지는 것입니다.
: 제안대군의 이혼을 반대하는 사헌부 대사헌 이철견의 상소
하지만 안순왕후는 성종에게 며느리 박씨가 부모에게 불순하다는 이유를 들어 아들과의 이혼을 청하였고, 성종은 제안대군과 두 번째 부인 박씨를 이혼시켰다.[11] 두 번째 아내 박씨는 이후 사망하였다.
제안대군이 성종에게 첫 번째 아내 김씨와의 재결합을 청하자 성종은 제안대군을 타이르며 김씨와의 재결합은 불가하다 하고 새로운 아내를 짝지어 주겠다 하자, 제안대군은 새로운 아내를 얻을 바에 평생 독신으로 살겠다며 맞섰다.[5]
마침내 첫 번째 아내인 김씨를 다시 아내로 맞이하였는데, 자녀는 두지 못하였다. 기록에 의하면 평생 여자를 멀리하고 남녀관계의 즐거움을 깨닫지 못하였다고 한다.[6]
제안대군은 평생 정치와 거리를 두고 살았다. 특히 그는 성악(聲樂)을 즐기고 사죽관현(絲竹管絃)을 연주하기를 좋아하는 등 풍류에 심취하였다.
중종반정 직후에는 특별히 정국원종공신 1등에도 책록되었다. 그는 당조카인 연산군과 친분이 두터웠으나, 중종 반정 이후에도 별다른 정쟁에 휘말리지 않고 중종조에도 왕실의 종친으로 대우를 받았다.
2. 4. 최후와 사후
1525년(중종 20년) 12월 4일 졸하였다.[7] 시호는 영효(靈孝)이다. 靈孝중국어는 부지런하지 않고도 이름을 낸 것이 영(靈)이고, 어버이를 사랑함이 효(孝)이다.[7] 제안대군은 행동거지가 엉뚱하여 자주 세상 사람들의 웃음거리가 됐으나 어머니 안순왕후에게는 효성이 지극했던 것으로 전해진다.묘소는 경기도 성남시 수진동에 있었으나 포천군 소흘면 이곡리로 이장하였다. 김씨 부인의 묘와 쌍분을 이루고 있으며, 수진동에 있던 박씨 부인 묘는 화장하여 묘를 없애고 사당에 위패만 봉안하고 있다.
그의 양자인 이파(李葩)는 생전 왕족으로 예우받지 못하다가 1872년 고종 때에 낙풍군(洛豐君)에 추증되었다. 동시에 이파의 아들, 손자들에게도 제안대군의 적손, 적중손, 적증손의 예로써 각각 군의 작위가 추증되었다.
3. 결혼 생활의 문제점
제안대군은 결혼 생활에서 여러 문제점을 보였다. 첫 번째 부인 김씨와 이혼과 재결합을 반복하며 논란을 일으켰다. 김씨가 병에 걸리자 이혼을 요구했다가, 다시 재결합을 요청하며 평생 독신으로 살겠다고 주장하기도 했다.[5] 성종은 제안대군이 김씨를 미워하다 병이 들자 이혼시켰고, 박씨와 혼인했으나 박대하여 문제가 발생했음을 지적하며, 다시 김씨와 결합하려는 이유를 알 수 없다고 했다. 결국 안순왕후의 설득과 신하들의 건의로 재결합이 허락되었다.[12]
제안대군은 이혼 후에도 첫 번째 부인과 몰래 만나는 등 부적절한 행동을 했다.[1] 두 번째 부인 박씨는 여종들과 동성애를 했다는 추문에 휩싸이기도 했다.[9] 결국 박씨와 이혼은 안순왕후의 주도로 이루어졌다.[11]
3. 1. 잦은 이혼과 재결합
제안대군은 첫 번째 아내인 김씨와 이혼하고 재결합하는 과정에서 많은 논란을 겪었다. 제안대군은 김씨가 죽기를 바랄 정도로 미워했으며, 김씨가 풍병으로 거동이 불편해지자 이혼을 청했다.[8] 1485년(성종 16년), 제안대군은 김씨와 재결합을 요청하며 허락하지 않으면 평생 독신으로 살겠다고 주장했다.[5]제안대군은 한글한국어 상소문에서 김씨와 다시 결합하였는데 새 여자를 간택한다는 소식에 실망감을 표하며, 다시 장가들 마음이 없고 사족의 딸을 내치는 것은 나라에 폐단이 있을 뿐 아니라 소혜왕후와 안순왕후께 불효하는 것이라 주장했다. 만약 재결합이 허락되지 않으면 평생 홀아비로 살겠다고 하였다.
성종은 제안대군이 김씨를 미워하다가 병이 들자 이혼시켰고, 박씨에게 장가들었으나 박대하여 문제가 발생했던 점을 지적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제안대군이 다시 김씨와 결합하고자 하는 이유를 알 수 없다고 했다. 또한, 김씨와의 이혼은 정희왕후와 소혜왕후, 안순왕후가 이미 의논하여 결정한 일이며, 다시 결합하게 한다면 국가의 법을 후세에 어떻게 설명할 수 있겠냐며 반문했다. 제안대군은 아내를 두고 자식을 두어 봉사해야 하는데, 억지로 홀로 살겠다는 것은 불효라고 질책했다.
제안대군은 다른 마음은 없으며, 성종의 허락을 받지 못하면 평생 홀로 살겠다고 답했다. 승지들은 제안대군이 김씨를 내친 뒤 다시 사통하였으니 재결합은 불가하다고 주장했다.
성종은 예종의 아들인 제안대군을 밀어내고 왕위에 오른 것에 대한 부담감과, 아들의 고집이 세고 어리석으며 병이 있다는 안순왕후의 당부 때문에 결국 재결합을 허락했다. 신료들은 김씨의 이혼 사유가 질병이었고, 두 번째 부인 박씨는 이미 사망했으며, 김씨의 질병이 완치되었음을 들어 재결합을 허락할 것을 청했다.[12]
3. 2. 첫 번째 부인과의 밀회
1482년(성종 13년), 사간원 정언(司諫院正言) 정광세가 제안대군이 전부인 김씨와 은밀히 사통한다고 성종에게 보고하였다. 사실을 확인한 결과, 제안대군은 거리낌 없이 김씨의 집에 가서 하룻밤을 묵고 오거나 함께 거처하였다.[1]두 번째 아내와 혼인한 상태에서 전처와 밀회하는 등의 행동으로 종부시에서 제안대군의 처벌을 논하였다. 전처 김씨의 아버지인 김수말은 이 사실을 즉시 알리지 않고 오히려 제안대군을 집으로 유인하였다며 추국할 것을 청하니, 성종은 김수말에 대해서만 처벌하고 제안대군의 나이가 어리다는 이유를 들어 비호하였다.[1]
3. 3. 두 번째 부인의 동성애 추문
1482년(성종 13년), 형방 승지(刑房承旨) 강자평(姜子平)이 제안대군의 부인 박씨가 여종들과 동침했다는 혐의로 여종 내은금(內隱今), 금음물(今音勿), 둔가미(屯加未)를 추궁하였다. 이들은 박씨가 유혹했다고 진술했다.[9] 이 사실은 인혜왕대비(안순왕후)에게 보고되었고, 대비전에서는 내관 안중경(安仲敬)과 서경생(徐敬生)을 시켜 박씨를 추궁하였다. 박씨는 자신이 한 것이 아니라 여종들이 자신을 희롱하며 겁간하려 했다고 진술하였다.[10]이에 우의정 홍응(洪應)과 우부승지(右副承旨) 강자평이 의금부에서 죄인들을 직접 국문하여 박씨에 대한 모함이었다는 자백을 받아냈다. 여종들의 처벌을 두고 성종과 대신들의 의견이 나뉜 가운데, 성종은 이들에게 장형 100대와 유형에 처하고, 주범 금음물에게는 관비형을 추가하였다.
박씨의 추문이 불거진 같은 해, 대왕대비(정희왕후)와 인혜왕대비(안순왕후)는 성종에게 제안대군의 이혼 의사를 전달한다. 성종은 박씨의 누명도 벗겨졌고 별다른 허물이 없다는 이유로 반대했고, 신료들의 견해도 같음을 확인하였다. 그러나 안순왕후가 며느리 박씨의 불순함을 이혼 사유로 들자 신료들의 반대를 물리치고 이혼을 허락하였다.[11]
4. 일화
어숙권의 야사 《패관잡기》에는 제안대군이 성품이 어리석고, 남녀 관계에 대한 지식이 없었다는 일화가 실려있다.[1] 또한 연산군과는 서로 가깝게 지냈다고 한다.[1]
4. 1. 어숙권의 《패관잡기》에 실린 일화
어숙권이 지은 야사인 《패관잡기》에는 제안대군이 무지하며, 평생 남녀 간의 성관계에 대한 즐거움을 알지 못했다는 일화가 실려있다.《패관잡기》에 따르면 제안대군은 예종의 아들로 성품이 어리석었다. 한번은 문턱에 앉아 있다가 거지를 보고 종에게 "쌀이 없으면 꿀떡 찌꺼기를 먹으면 될 것이다"라고 말했는데, 이는 "어째서 고기죽을 먹지 않느냐?"라는 말과 같다고 한다.[1]
성종은 예종의 후사가 없음을 가슴 아프게 여겨 "제안대군에게 남녀관계를 알게 해주는 자에게 상을 주겠다"라고 명했고, 이에 한 궁녀가 나섰다. 궁녀는 밤에 제안대군의 집에 가서 잠든 사이 그의 음경을 더듬어 발기 여부를 확인하고 몸을 굴려 성관계를 시도했다. 그러나 잠에서 깬 제안대군은 깜짝 놀라 소리를 지르며 물을 가져오라 하여 씻으면서 "더럽다, 더럽다"라고 부르짖었다고 한다.[1]
또한, 제안대군이 여자 5~6명을 데리고 문밖에서 산보하는 것을 보았는데, 한 여자 종이 도랑에서 오줌 누는 것을 보고 "바로 메추리 둥지 같구나"라고 말했는데, 이는 음모가 무성한 것을 빗댄 표현이었다고 한다.[1]
중종 때 상의원에서 품질이 좋은 서각(犀角) 띠를 바쳤는데, 제안대군이 이를 보고 허리에 띠고 차비문 밖에 가서 "이 띠를 신에게 하사하소서"라고 청하자 임금이 웃으며 주었다는 일화도 있다.[1]
혹자는 제안대군이 실제로는 어리석은 것이 아니라, 종실의 맏아들로서 어질고 덕이 있다는 소문이 나면 몸을 보전하지 못할까 두려워 스스로를 감춘 것이라고도 한다. 그러나 《패관잡기》의 저자는 남녀 간의 욕망은 천성으로 타고난 것이어서 인정으로 막을 수 없는 것인데, 평생 여자를 더럽다 하여 가까이하지 않은 것은 실제로 어리석은 것이라고 평했다.[1]
4. 2. 연산군과의 관계
제안대군은 당조카인 연산군과 친분이 두터웠다. 정치와 학문을 멀리하고 술과 풍류를 좋아하던 제안대군은 연산군과 어울렸고, 자신의 기생인 장녹수를 연산군에게 바치기도 하였다.[1]가흥청(假興淸)은 정식 기생을 일컫는 흥청(興淸)을 선발하기 전의 예비 기생인데, 왕실이 필요에 따라 제안대군의 저택을 임시로 사용하였다.[1] 대군의 저택은 수진방(壽進坊)에 위치하며, 실록에 따르면 다른 종친의 저택보다 훨씬 규모가 컸다.[1] 이는 흥청의 규모와 거리적 편리에 따른 것임을 알 수 있다.[1]
4. 3. 두모포 정자
두모포는 현재의 서울특별시 성동구 옥수동 동호대교 북단에 있는 포구인데, 1506년(연산군 12년) 이곳 주민들을 내쫓고 정자를 세워 연산군의 음행에 사용되었다. 중종 즉위 후 정자는 제안대군에게 하사되었다. 1516년(중종 11년), 이 정자의 기둥이 임금을 상징하는 주홍빛으로 칠해져 문제가 되었다. 결국 왕명으로 주홍칠을 벗겨냈다.5. 평가
본래 왕위 계승 1순위였던 제안대군을 제치고 왕위에 오른 성종은 예종 소생의 제안대군과 현숙공주를 우대하였으며 이들이 일으킨 크고 작은 소동들도 숙모인 안순왕후를 배려하여 여러 차례 무마시켰다.[6]
제안대군은 학문에 뜻을 두지 않고 풍류를 즐겼는데, 성종에게 상소를 올릴 때는 한문이 아닌 언문(한글)으로 작성하였다. 이러한 무지함과 순박함으로 역모나 정쟁에 휘말리지 않고 수를 다하였다.[6]
6. 가족 관계
7. 관련 작품
;드라마
- 설중매 (MBC, 1984년~1985년, 배우:정욱)
- 풍란 (MBC, 1985년, 배우:정욱)
- 장녹수 (KBS2, 1995년, 배우:백윤식)
- 한명회 (KBS2, 1994년, 배우:이호재)
- 왕과 비 (KBS1, 1998년~2000년, 배우:박찬환)
- 왕과 나 (SBS, 2007년~2008년, 배우:임성표)
- 인수대비 (JTBC, 2011년~2012년, 배우:고윤후, 이우주)
;영화
;시사 교양
- 天一野史|천일야사중국어 배우: 박재현
7. 1. 드라마
- 설중매 (MBC, 1984년~1985년, 배우:정욱)
- 풍란 (MBC, 1985년, 배우:정욱)
- 장녹수 (KBS2, 1995년, 배우:백윤식)
- 한명회 (KBS2, 1994년, 배우:이호재)
- 왕과 비 (KBS1, 1998년~2000년, 배우:박찬환)
- 왕과 나 (SBS, 2007년~2008년, 배우:임성표)
- 인수대비 (JTBC, 2011년~2012년, 배우:고윤후, 이우주)
7. 2. 영화
7. 3. 시사 교양
天一野史|천일야사중국어 배우: 박재현참조
[1]
서적
세조실록 38권, 세조 12년(1466년 명 성화(成化) 2년) 2월 13일 (을유)
1466-02-13
[2]
문서
제안대군 신도비명
[3]
서적
성종실록 112권, 성종 10년(1479년 명 성화(成化) 15년) 12월 20일 (신미)
1479-12-20
[4]
문서
[5]
서적
성종실록 179권, 성종 16년(1485년 명 성화(成化) 21년) 5월 29일 (무인)
1485-05-29
[6]
서적
중종실록 56권, 중종 20년(1525년 명 가정(嘉靖) 4년) 12월 14일 (무술)
1525-12-14
[7]
서적
중종실록 56권, 중종 20년(1525년 명 가정(嘉靖) 4년) 12월 14일 (무술)
1525-12-14
[8]
서적
성종실록 179권, 성종 16년(1485년 명 성화(成化) 21년) 5월 29일 (무인)
1485-05-29
[9]
서적
성종실록 142권, 성종 13년(1482년 명 성화(成化) 18년) 6월 11일 (무신)
1482-06-11
[10]
서적
성종실록 142권, 성종 13년(1482년 명 성화(成化) 18년) 6월 16일 (계축)
1482-06-16
[11]
서적
성종실록 149권, 성종 13년(1482년 명 성화(成化) 18년) 12월 11일 (을해)
1482-12-11
[12]
서적
성종실록 181권, 성종 16년(1485년 명 성화(成化) 21년) 7월 12일 (경신)
1485-07-12
[13]
문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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