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혜왕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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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소혜왕후 한씨는 조선 세종의 손자 도원군에게 시집가 덕종의 비가 되었으며, 성종의 즉위를 도운 인물이다. 청주 한씨 가문 출신으로, 명나라 황실과 인척 관계를 맺어 정치적 기반을 다졌다. 남편 덕종이 요절한 후, 둘째 아들 자산군(성종)을 왕위에 올리는 데 기여하여 소혜왕후로 추존되었고, 이후 인수대비, 대왕대비가 되어 막강한 권력을 행사했다. 유교적 가치관과 불교 신앙을 동시에 지녔으며, 여성의 예의범절을 담은 《내훈》을 편찬했다. 연산군과의 갈등 끝에 사망했으며, 드라마와 영화 등 다양한 작품의 소재가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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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혜왕후 - [인물]에 관한 문서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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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본 정보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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왕위 | |
왕대비 | 대왕대비 |
재위 기간 | 1495년 1월 29일 – 1504년 5월 21일 |
재위 유형 | 재임 |
이전 | 자성대왕대비 인혜대왕대비와 함께 |
이후 | 성렬대왕대비 |
왕대비 | 왕대비 |
재위 기간 | 1475년 – 1495년 1월 29일 |
재위 유형 | 재임 |
이전 | 자성왕대비 인혜왕대비와 함께 |
이후 | 자순왕대비 |
재위 기간 | 1470년–1475년 |
재위 유형 | 재임 |
재위 기간 | 1455년 – 1457년 9월 29일 |
재위 유형 | 재임 |
이전 | 현덕왕후 (세자빈 권씨) |
이후 | 장순왕후 (세자빈 한씨) |
가문 | |
왕가 | 이씨 |
가문 유형 | 씨족 |
아버지 | 한확 |
어머니 | 남양 홍씨 |
배우자 | 의경세자(1450년–1457년) |
자녀 | 이정 (월산대군) 이경근 (명숙공주) 이혈 (성종) |
생애 | |
출생일 | 1437년 10월 16일 |
출생지 | 한성, 조선 |
사망일 | 1504년 5월 21일 |
사망지 | 경춘전, 창경궁, 한성, 조선 |
묻힌 곳 | 경릉 |
시호 | 인수자숙휘숙명의소혜왕후 |
본관 | 청주 한씨 (출생) |
왕가 | 전주 이씨 (혼인) |
2. 생애
1450년(문종 즉위년) 수양대군의 큰아들 도원군(의경세자, 덕종)과 혼인하여 군부인에 봉해졌고, 1455년(세조 즉위년) 시아버지 수양대군이 왕위에 오르자 맏며느리로서 세자빈이 되었다. 1457년(세조 3년) 남편 의경세자가 20세의 나이로 갑자기 죽어 사가로 물러났으나,[1] 1469년 둘째 아들 자을산군(성종)이 왕위에 오르면서 왕비로 진봉되었다. 1475년(성종 6년) 왕대비에 올라 '''인수대비'''(仁粹大妃)가 되었다.
의정부좌의정을 지낸 서원부원군 양절공 한확(西城府院君 襄節公 韓確)과 남양부부인 홍씨(南陽府夫人 洪氏)의 여섯째 딸로, 본관은 청주이며, 한성부에서 태어났다. 당시 여성으로서는 드물게 한문과 유교 경전에 능통하여 《내훈》(內訓)을 편찬했는데, 이는 조선시대 사대부 여인들의 수신서이자 여성교육의 기본서가 되었다. 불교 옹호론자로 불교 억압 정책에 반발하여 당시 조정의 신하들과 4차례 격한 논쟁을 벌이기도 했다.[1]
연산군의 할머니로, 며느리이자 연산군의 생모 윤씨가 왕비 시절 성종의 얼굴을 할퀴어 내쫓기고 사사되는 데에 거의 전적으로 관여했다.[2] 1504년(연산군 10년) 연산군이 생모 폐비 윤씨를 제헌왕후(齊獻王后)로 추숭하는 과정에서, 윤씨 폐비와 사사에 개입한 사람들을 죽이고 추방하면서 인수대비는 손자인 연산군과 갈등을 빚었다.
고모들은 명나라 영락제의 후궁 강혜장숙려비 한씨와 선덕제의 궁녀 공신부인 한씨였다. 언니는 세종의 둘째 서자 계양군과 혼인하는 등 청주 한씨 일족은 양국 왕실과 혼인 관계를 맺고 있었다. 아버지 한확은 명나라와의 교섭을 담당한 외교관으로, 명나라의 총애를 받았다.
세조의 차남 예종이 즉위 1년여 만에 승하하자, 한명회 등 훈구파 신하들과 손잡고 둘째 아들 자산군을 왕위에 올렸다. 성종 즉위 후 죽은 남편 의경세자가 덕종으로 추존되면서 1471년 소혜왕후로, 1475년 인수대비가 되어 권력을 장악했다. 1494년 성종의 아들 연산군 즉위 후 대왕대비로 승격했다. 인수대비는 『내훈』을 편찬했고, 불교 신앙심이 깊었다.
성종의 두 번째 왕비 윤씨와 대립하여 윤씨를 폐위시키고 죽음으로 몰아넣었다. 이는 훗날 연산군에 의한 갑자사화의 원인이 되었고, 인수대비 자신도 말년에 연산군과 대립하여 1504년(연산군 10년) 훙서하였다.
2. 1. 가문 배경과 초기 생애
소혜왕후는 의정부좌의정을 지낸 서원부원군 양절공 한확(西城府院君 襄節公 韓確)과 남양부부인 홍씨(南陽府夫人 洪氏)의 여섯째 딸로, 본관은 청주이다. 한성부에서 태어났다.1450년(문종 즉위년)에 수양대군의 큰아들인 도원군(의경세자, 덕종)과 혼인하여 군부인에 봉작되었다.
아버지 한확은 당시 중추원사(中樞院使)를 지내면서 명나라로부터 광록시소경(光祿寺少卿)작위를 하사받은 조선 최고의 세도가였다.
또한 한씨의 큰 고모는 명나라 제3대 황제 영락제 성조의 후궁이었던 강혜장숙려비(康惠莊淑麗妃)였으며, 작은 고모 역시 명나라 제5대 황제 선덕제 선종의 후궁인 공신태비(恭愼太妃)였다. 큰고모가 영락제 사후 순사되었는데, 그의 절개를 높이 평가한다는 명목으로 명나라 선덕제는 그의 둘째 고모를 후궁으로 맞이하였다.
한씨의 둘째언니는 세종의 둘째 서자인 계양군의 부인이었다. 이처럼 한씨의 가문은 양국의 왕실과 인척관계를 맺었고, 한확은 명나라와의 외교를 전담하던 당시의 외교관으로서 명나라의 총애를 바탕으로 출세가도를 달렸다.
한도산(韓桃山)으로 태어난 인수왕후는 고위 관료와 왕실 외척을 다수 배출한 명문 양반 가문인 청주 한씨 출신이었다. 그녀는 유교적 가치와 중국 고전에 대한 높은 수준의 교육을 받았다.
1453년 계유정난 이후 수양대군이 영의정 겸 이조판서가 되자, 한확은 우의정에 임명되었다.
뿐만 아니라, 계유정난의 주모자 한명회는 한씨의 육촌오빠였고, 사촌인 한명진(韓明溍) 또한 정난공신(靖難功臣)에 포함되었다.
2. 2. 군부인 시절
1450년(문종 즉위년), 수양대군은 자신의 정치적 입지를 넓히기 위해 큰아들인 도원군(의경세자)과 한확의 막내딸과의 정략결혼을 추진했다.[3] 소혜왕후는 수양대군의 이복동생인 계양군의 처제였고, 시어머니가 될 정희왕후의 형부인 홍원용의 생질녀(누이의 딸)였으며, 외종언니인 강녕부부인(홍이용의 딸)은 평원대군(세종의 일곱번째 왕자)의 정실이었으므로 여러모로 왕실과 인연이 깊었다.14살에 수양대군의 큰아들 도원군과 혼인하여 도원군부인(桃源君夫人)이 되었다.[3] 남편 도원군이 당시 대군(大君)의 적장자로 아직 승습(承襲)하지 않았고, 종친부에는 정의대부(正義大夫)로 기록된 점으로 보아 한씨의 품계는 정2품(正二品) 군부인(郡夫人)임을 알 수 있으나, 작호는 조선왕조실록에 따로 기록되지 않았다.[3]
1454년에는 잠저에서 첫 번째 자녀인 월산군을 낳았다.
2. 3. 왕세자빈 시절과 남편의 죽음
1450년(문종 즉위년) 수양대군의 큰아들 도원군(의경세자, 덕종)과 혼인하여 군부인에 봉해졌으며, 1455년(세조 즉위년) 시아버지 수양대군이 왕위에 오르자 맏며느리로서 세자빈이 되어 궁궐에 들어갔다.[4] 같은 해 동궁(東宮)에서 두 번째 자녀인 태안군주를 낳았고, 이듬해인 1457년에는 세 번째 자녀인 자산군(훗날 성종)을 낳았다. 그러나 1457년(세조 3년) 남편 의경세자가 20세의 나이로 갑자기 죽어 사가로 물러났다.[1]왕세자빈 한씨는 젊어서부터 빈틈이 없었고, 시부모(세조와 정희왕후)를 섬기는 일에 극진하여 세조로부터 효부(孝婦)라는 칭찬을 들었다. 하지만 두 아들(월산군과 자산군)에게는 엄한 어머니였다. 사소한 잘못이라도 있으면 추호도 감싸는 법 없이 정색하고 꾸짖었다고 한다. 그래서 세조(수양대군)와 중전 윤씨(정희왕후) 내외가 농담 삼아 부르게 된 별명이 폭빈(暴嬪)이었다.
1457년 친정아버지 한확이 객사하고, 남편인 의경세자도 요절하였다. 연이은 불행을 안쓰럽게 여긴 세조는 그를 특별히 총애하여 궁궐에서 살도록 허용하였으나, 스스로 사양하였다.
시동생인 해양대군(예종)이 남편의 뒤를 이어 왕세자에 책봉되면서, 세조로부터 정빈(貞嬪)의 작호를 받았다. 그러나 1460년 세조가 교지를 통해 장순왕후가 세자빈이 되었을 때 정빈으로 책봉하였으므로 한씨의 작호를 수빈(粹嬪)으로 고쳤다.[5]
2. 4. 수빈 시절과 정치적 노력
1450년(문종 즉위년), 수양대군의 큰아들 도원군(의경세자, 덕종)과 혼인하여 군부인에 봉해졌다.[5] 1455년(세조 즉위년) 시아버지 수양대군이 왕위에 오르자 맏며느리로서 세자빈이 되어 궁궐에 들어갔으나, 1457년(세조 3년) 남편 의경세자가 20세의 나이로 갑자기 죽어 사가로 물러났다.[5]
시아버지 세조는 맏며느리 한씨(소혜왕후)에게 특별히 궁궐에서 살아도 좋다고 하였으나, 한씨가 이를 사양하고 두 아들과 궁궐을 떠나려 하자 세조는 그녀를 위해 특별히 집을 지어주었는데 그곳이 바로 지금의 덕수궁이다.
1467년 수빈 한씨가 병으로 자신의 둘째 언니인 계양군부인 집에서 요양하고 있었는데, 시아버지이자 임금이었던 세조가 궁궐에서 몸소 나와 계양군부인 집에 문병차 거둥하였다.[6] 그리고 병조에 명하여 군사 10명을 보내어 수빈이 요양하고 있는 계양군부인 집을 지키고 호위하게 하였다. 한 달 뒤에는 정희왕후와 동행하였다. 이듬해에는 엄청난 양의 곡물과 땅을 하사하였다.[7][8][9]
정치적 야심이 대단했던 그녀는 당대의 권신 한명회의 넷째 딸 한씨(훗날 공혜왕후)와 자신의 둘째 아들 자산군을 혼인시켜 사돈관계를 맺고, 자신의 아들에게 왕위를 계승시키기 위한 노력을 계속하였다. 궁궐을 나왔지만 세조와 정희왕후를 정성껏 봉양했고, 특히 왕위 결정권자인 정희왕후와의 관계를 돈독히 했다.
신숙주 등과도 긴밀하게 교류하였는데, 이러한 노력의 결과로 세조의 뒤를 이어 즉위한 예종이 승하한 후에 한명회의 강력한 추천과 시어머니인 정희왕후의 지지에 힘입어 당시 원자였던 예종과 안순왕후의 아들 제안대군 대신 자산군이 즉위할 수 있었다.
2. 5. 성종 즉위와 왕비, 왕대비 추숭
1469년 자신의 둘째 아들인 자을산군(성종)이 왕위에 오르자 자신도 궁궐에 다시 들어가 곧 왕비로 진봉되었다.[16] 그러나 성종은 생부인 의경세자가 아닌 작은아버지인 예종의 아들로 입적하여 왕위의 대통을 이었기 때문에 법적으로 수빈 한씨는 성종의 어머니로 인정받지 못했다. 오히려 예종의 계비인 안순왕후가 인혜왕대비(仁惠王大妃)로 성종의 법적 어머니가 되었다. 따라서 수빈 한씨는 국왕의 모후(母后)가 되는 왕대비 자격이 아니라 그저 왕세자의 부인으로서 지위가 세자빈에 불과했기 때문에 군신관계(君臣關係)상 아들의 인사를 받지 못한 것이다. 다만 국왕의 생모가 되므로, 궁궐에 들어와 살았는데 그녀의 호(呼)를 붙여 수빈궁(粹嬪宮)이라 했다.[15]수빈 한씨가 성종의 어머니임에도 인사를 받지 못하자 조정에서 이 일이 논의되었다. 문제는 그녀를 왕비로 추숭하느냐, 왕대비로 추숭하느냐였다. 이 문제는 그녀의 남편인 의경세자를 왕(王)으로 추숭하느냐, 왕(王)과 더불어 종(宗)으로 추숭하느냐의 문제와 연관되어 있었다. 의경세자를 단순히 왕(王)으로 추숭하면 한씨는 왕비가 되는 것이었고, 의경세자를 왕(王)과 더불어 종(宗)으로 추숭하면 한씨는 왕대비가 되는 것이었다.[16]
한씨를 왕비(王妃)로 추숭해야 한다고 주장한 대신들은 정인지, 정창손, 신숙주, 한명회, 구치관, 홍윤성 등으로 전부 영의정과 부원군 작위를 갖고 있었던 영향력 있는 공신들이었고,[16] 한씨를 왕대비로 추숭해야 한다고 주장한 대신들은 양성지, '''이승소(李承召)''' 등이었다.[16]
결국 조정의 논의 끝에 수빈 한씨가 인수 왕비(仁粹王妃)가 되어 아들 성종의 인사를 받을 수 있었으나, 왕(王)의 어머니였던 그녀에게는 왕대비가 되는 것이 더 합당했다. 왕실에는 성종의 할머니인 자성 대왕 대비 윤씨(慈聖大王大妃 尹氏), 법적 어머니이자 숙모가 되는 인혜 왕 대비 한씨(仁惠王大妃 韓氏), 그리고 친어머니이지만 법적으로는 큰어머니가 되는 인수 왕비 한씨, 이렇게 3명의 윗전이 있었다. 왕실 서열 1위는 할머니인 자성 대왕 대비 윤씨로 문제가 없었으나 왕실 서열 2위를 놓고 논의가 있었다.
당시 사관(史官)은 "예종 비였던 인혜 왕 대비는 당시 왕비였고, 인수 왕비는 수빈(粹嬪)으로 군신 관계에 있었기 때문에 마땅히 인혜 왕 대비를 윗전으로 해야 합니다."라고 아뢰었으나, 신숙주는 "인수 왕비는 이미 존호(尊號)를 높이어 명위(名位)가 이미 정하여졌으니, 마땅히 형제의 서열로 차서를 하여야 합니다."라고 아뢰었다.[17] 왕실의 최고 어른인 대왕대비 또한 "인혜 왕 대비의 서열이 일찍이 인수 왕비의 위에 있었으나, 세조 대왕께서 항시 인수 왕비에게 명하여 예종을 보호하게 하고 시양(侍養)이라고 일컬었으며, 또 장유(長幼)의 차서(次序)가 있으니, 인수 왕비의 서열은 마땅히 인혜 왕 대비의 위에 두어야 한다."고 하였다. 따라서 인수 왕비는 세자 빈 출신임에도 불구하고 왕실 서열 2위가 되었고, 인혜 왕 대비는 왕비 출신임에도 왕실 서열 3위로 밀려났다.[18]
1474년, 성종의 의지로 생부인 의경왕(懿敬王)을 추봉(追封)하였고, 의경왕이 덕종(德宗)의 묘호를 받으면서 인수왕비 또한 왕대비로 진봉되어 인수왕대비(仁粹王大妃)가 되었다.[19] 1475년 왕대비에 올라 '''인수대비'''(仁粹大妃)가 되었다.
2. 6. 대왕대비 시절과 연산군과의 갈등
1494년 성종이 승하하고 왕세자 융이 즉위하였는데, 그가 바로 조선 제10대 임금 연산군이다. 소혜왕후는 대왕대비로 진봉되었으며, 휘호는 자숙(慈淑)으로 새로이 올려졌다. 다만 실록에는 자숙대왕대비(慈淑大王大妃)라는 명칭이 휘호를 올린 당시에만 등장할 뿐, 인수대왕대비(仁粹大王大妃)로 계속 일컬어진다.[20]왕세자 시절 정현왕후의 아들로만 알고 있었던 연산군은 즉위 후 자신이 폐비 윤씨의 아들임을 알게 되었다. 연산군은 폐비 윤씨를 모함하여 사사(賜死)시킨 귀인 정씨와 귀인 엄씨를 철퇴로 내리쳐 죽인 뒤, 그 시체를 찢어 젓갈로 만들어 야산에 뿌리도록 했다.[21] 또한 귀인 정씨의 아들인 안양군과 봉안군을 강제로 대왕대비전으로 끌고 가 인수대비에게 술잔을 강제로 따르게 하였으며, '왜 나의 어머니를 죽였느냐'고 인수대비에게 고함을 지르며 행패를 부렸다.[21]
이후 연산군이 생모인 폐비 윤씨를 제헌왕후(齊獻王后)로 추존하려 하자 병상에 있던 인수대왕대비가 이를 꾸짖었다. 그러나 화가 치밀어 오른 연산군은 인수대왕대비의 가슴을 밀쳤고, 인수대왕대비는 그 충격으로 1504년 4월 27일, 68세의 나이로 승하하였다.[22]
인수대왕대비는 이미 죽기 서너 달 전인 1504년 1월경에 노환으로 목숨이 매우 위태로운 지경이었다.[23][24] 그런 상황에서 연산군은 병석에 누워있던 할머니에게 고함을 치며 행패를 부려 죽음에 이르게 한 것이다.
조선은 유교 사상을 근본으로 하는 나라였고, 그 중 임금에게 적용되는 가장 큰 덕목은 효(孝)였다. 이와 같은 연산군의 행동은 패륜으로 훗날 박원종이 중심이 되는 중종반정의 명분을 제공하였다.
3. 사상과 신념
소혜왕후는 한문과 유교 경전에 능통하여 《열녀전》, 《여교》, 《명감》, 《소학》 등에서 내용을 발췌하여 《내훈》을 편찬하였다. 《내훈》은 조선시대 사대부 여인들의 수신서이자 여성 교육의 기본서가 되었다.[1] 불교 옹호론자로서 숭유억불 정책에 반발하였으며, 금승법(禁僧法)[1]과 봉선사 금자경 간행 작업을 추진하여 당시 조정의 신하들과 격한 논쟁을 벌였다.
3. 1. 유교적 가치관과 여성 교육
소혜왕후는 생전에 독실한 유교 신자이자 불교 신자였으며, 범어(梵語), 한어(漢語), 국어(國語) 3자체(三字體)로 서술한 불경과 부녀자의 예의범절을 가르치기 위하여 1475년에 편찬한 《내훈》(內訓)을 남겨 후세에 귀중한 연구자료가 되었다.《내훈》은 유교적 이상에 따라 여성에게 적절한 행동을 기술한 유교적 도덕 지침서이자, 자기 수양을 여성에게 가장 적절한 행동으로 묘사하고 저자의 정치적 활동을 옹호하는 선언문으로 읽을 수도 있다.
몇몇 시를 제외하고, 이 책은 한국에서 여성이 저술한 것으로 알려진 최초의 책이다.[1]
3. 2. 불교 옹호
소혜왕후는 불교 신자이자 불교 옹호론자로, 사림의 미신 타파 주장과 불교 억압 정책에 강력히 반발하였다. 세종과 세조가 불당에 출입한 고사를 들어 궐내 법당을 철폐하려는 사림의 주장에 맞섰다. 궁궐에 설치한 불당은 선조대에 가서야 철폐되었다. 소혜왕후는 금승법(禁僧法)과 봉선사 금자경 간행 작업을 추진하여 당시 조정의 신하들과 4차례의 격한 논쟁을 벌이기도 했다.[1]1474년에는 17세의 나이로 사망한 공혜왕후를 추존하기 위해 정희왕후, 소혜왕후, 안순왕후 세 명의 대비가 내탕청을 통해 《관세음보살보문품》(관음경)을 간행하였다. 이 경전은 현재 조선 시대 인쇄술과 한국 불교 연구에 중요한 유물로 간주되고 있다.
4. 가족 관계
자녀 | 이름 | 생몰년 | 배우자 | 비고 | |
---|---|---|---|---|---|
장남 | 월산대군 | 정 婷 | 1454년 - 1488년 | 승평부부인 박씨[25] | |
장녀 | 명숙공주 | 경근 慶根 | 1456년 - 1482년 | 당양위 홍상 | 명의공주 |
차남 | 성종 잘산군 乽山君 | 혈 娎 | 1457년 - 1494년 | 공혜왕후 한씨 폐비 윤씨 정현왕후 윤씨 | 조선 제9대 국왕 |
- 시아버지 : 세조
- 시어머니 : 정희왕후
- 남편 : 덕종 (추존왕)
:* 며느리 : 승평부부인 박씨
:* 사위 : 홍상
5. 소혜왕후가 등장하는 작품
소혜왕후가 등장한 작품은 다음과 같다.
연도 | 방송사 | 제목 | 배역 |
---|---|---|---|
1972년 | TBC | 사모곡 | 황정순 |
1984년 | MBC | 설중매 | 고두심 |
1994년 | KBS | 한명회 | 김영란 |
1995년 | KBS | 장녹수 | 반효정 |
1998년 | KBS | 왕과 비 | 채시라 |
2007년 | SBS | 왕과 나 | 전인화 |
2011년 | JTBC | 인수대비 | 함은정, 채시라 |
2017년 | MBC | 역적 | 문숙 |
1962년 | 연산군 | 전옥 | |
1987년 | 연산군 | 정혜선 | |
1988년 | 연산일기 | 한은진 | |
2005년 | 왕의 남자 | 윤소정 | |
2017년 | 임금님의 사건수첩 | 장영남 |
5. 1. 드라마
- 《사모곡》 (TBC, 1972년) : 황정순
- 《설중매》 (MBC, 1984년 ~ 1985년) : 고두심
- 《한명회》 (KBS, 1994년) : 김영란
- 《장녹수》 (KBS, 1995년) : 반효정
- 《왕과 비》 (KBS, 1998년 ~ 2000년) : 채시라
- 《왕과 나》 (SBS, 2007년 ~ 2008년) : 전인화
- 《인수대비》 (JTBC, 2011년 ~ 2012년) : 함은정→채시라
- 《역적》 (MBC, 2017년) : 문숙
5. 2. 영화
6. 기타
인수대비는 성격이 강직했던 것으로 알려져 있다. 성종의 정비인 공혜왕후가 세상을 떠난 후, 계비로 책봉된 중전 윤씨가 자신의 기대에 미치지 못하고, 성종의 얼굴에 손톱 자국을 내는 사건까지 벌어지자 크게 분노하였다. 인수대비는 중전 윤씨를 폐서인하여 사가로 내쫓았고, 성종의 다른 후궁들과 함께 성종이 폐비 윤씨에게 사약을 내리도록 하였다.[14] 이 때문에 인수대비는 폐비 윤씨의 아들인 연산군의 왕위 계승에 부정적이었으며, 정현왕후의 소생 진성대군을 편애하였다.[14]
6. 1. 경릉 조성


소혜왕후의 능은 경기도 고양시 서오릉 내에 위치한 경릉(敬陵)으로 남편인 덕종과 같은 묘역에 묻혀있다. 본디 왕릉을 쓸 때는 우측에 왕을, 좌측에 왕비를 안장한다. 살아있을 때는 좌측(앉아있는 사람 기준)이 상석이니 죽으면 그 반대라고 여겼는데, 경릉은 부인인 소혜왕후가 상좌인 우측에 안장되어 있는 것이다. 이것은 승하할 당시의 신분 차이 때문인데, 덕종은 승하할 때 세자의 신분이었지만, 소혜왕후는 왕실의 최고 어른인 대왕대비로서 승하했기 때문에 군신 관계에 따라 위가 되었던 것이다. 이에 따라 남편 덕종의 무덤에는 석물도 문인석만 서 있다. 무인석은 왕권의 상징이라 왕이 되지 못한 세자, 세자빈 이하의 무덤에는 세울 수 없다. 소혜왕후 능상의 석물은 무인석까지 갖추고 있다.
소혜왕후는 사후 시호를 받아 소혜왕후(昭惠王后|소혜왕후한국어)가 되었다. 소혜왕후의 묘는 고양 경릉에 있으며, 도원군의 묘 바로 옆에 있다. 도원군은 1457년 사망 당시 왕세자였기 때문에 그의 묘는 매우 간소하다. 반면 소혜왕후의 묘는 1504년 대왕대비의 지위로 사망했기 때문에 정식 예장으로 조성되었으며 도원군의 묘 왼쪽에 위치해 있다.
6. 2. 소설
7. 참고 서적
- 조선왕비실록/신명호 지음/역사의 아침
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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승려가 되는 것을 금지하는 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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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왕비실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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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서
장경왕후의 이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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