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임스 비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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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제임스 비들은 1800년 미국 해군에 입대하여 제1차 바르바리 전쟁, 미영 전쟁에 참전한 군인이다. 1830년에는 오스만 제국과 조약을 체결하여 미국 시민의 치외 법권 특권을 확보했다. 1845년에는 청나라와 맺은 왕샤 조약의 비준서 교환을 위해 광저우에 갔으며, 이후 일본과의 외교를 시도했으나 실패했다. 그의 실패는 7년 후 매튜 C. 페리의 일본 개국에 영향을 미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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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임스 비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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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본 정보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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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명 | James Biddle |
출생 | 1783년 2월 18일 |
출생지 | 미국 펜실베이니아주 필라델피아 |
사망 | 1848년 10월 1일 (65세) |
사망지 | 미국 펜실베이니아주 필라델피아 |
소속 | 미국 해군 |
경력 | |
최종 계급 | 해군 준장 (Commodore) |
기타 | |
서명 | 제임스 비들 서명 |
2. 생애
제임스 비들은 펜실베이니아 대학교를 졸업하고 1800년 미국 해군에 사관후보생으로 입대했다. 1801년 제1차 바르바리 전쟁에 참전했으나, 필라델피아 호가 트리폴리 해안에서 좌초되면서 19개월간 포로 생활을 했다.[6]
미영 전쟁 발발 당시 비들은 와스프의 중위였으며,[6] 이후 호넷에 승조하여 1815년 영국 해군 펭귄함을 격침시켰다.[6]
1817년 영국과의 오리건 분쟁으로 컬럼비아 강에 파견되어 1818년 임무를 완료했다.[6] 전쟁 후에는 멕시코만, 남대서양, 지중해에서 미국 선박 보호 임무를 수행했다.
1830년 미국 영사 데이비드 오플리와 오스만 제국 정부와 협상하여 조약을 체결, 이후 오스만 제국 내 미국 시민의 치외법권 특권을 보장하는 데 사용되었다.[8]
2. 1. 청년기
펜실베이니아주 필라델피아에서 태어나 펜실베이니아 대학교에 입학했다. 대학교 졸업 후 1800년 사관후보생으로 미국 해군에 입대했다. 1801년 제1차 바르바리 전쟁에 종군했다. 비들이 승선했던 프리깃함 필라델피아 호는 트리폴리 해안에서 좌초되었다. 사령관 윌리엄 베인브리지 대장과 함께 해적에게 붙잡혀 19개월 동안 포로 생활을 했다.[6]2. 2. 미영 전쟁 활약
미영 전쟁 발발 당시, 비들은 전투 슬루프 ‘와스프’(USS ''Wasp'')의 중위였다.[6] 이후 전투 슬루프 ‘호넷’(USS ''Hornet'')에 승조하여, 1815년 영국 해군 슬루프 ‘펭귄함’(HMS ''Penguin'')을 격침시켰다.[6]2. 3. 오리건 분쟁과 외교 임무
1817년 영국과의 오리건 분쟁으로 컬럼비아 강에 파견되어 1818년에 임무를 완료했다.[6] 미영 전쟁이 끝난 후에는 멕시코만, 남대서양, 지중해에서 미국 선박 보호 임무를 맡았다.1830년 비들과 미국 영사 데이비드 오플리는 오스만 제국 정부와 협상하여 조약을 체결하는데 성공했다. 이 조약은 이후 오스만 제국 내 미국 시민의 치외법권 특권에 사용되었다.[8]
3. 아시아 원정
1845년 12월, 비들은 미국이 청나라와 맺은 최초의 조약인 왕샤 조약의 비준서를 교환하기 위해 광저우 교외 푼통(泮塘)으로 갔다.[1] 이후 존 C. 칼훈 국무장관의 지시에 따라 일본과의 외교 교섭 임무를 맡았으나, 알렉산더 에버렛의 건강 문제 등 여러 사정으로 인해 스스로 일본과 협상하기로 결정했다.
1846년 7월 7일, 비들은 전열함 ‘콜럼버스’(USS ''Columbus'')와 전투 슬루프 ‘빈센스’(USS ''Vincennes'')를 이끌고 일본을 향해 마카오를 출항하여 7월 19일에 우라가에 입항했다. 그러나 일본은 네덜란드 이외의 국가와는 통상하지 않는다는 이유로 개국을 거부했다.[2] 비들은 에도 막부에 왕샤 조약과 유사한 조약을 체결할 것을 요청했지만, 통역 문제와 사무라이와의 충돌 등 외교적 마찰과 배를 움직일 바람이 없는 등의 기술적 문제 등으로 인해 결국 7월 29일 우라가를 떠났다.[10]
비들의 일본 원정은 실패로 끝났지만, 7년 후 매튜 C. 페리는 비들의 실패를 연구하고 포함외교를 통해 일본을 개국시키는 데 성공한다.[4]
3. 1. 청나라와의 외교
1845년 12월, 비들은 미국이 청나라와 맺은 최초의 조약인 왕샤 조약의 비준서 교환을 위해 광저우 교외 푼통(泮塘)으로 갔다.[9]비들은 존 C. 칼훈 국무장관으로부터 청나라 공사로 머물고 있던 케일럽 쿠싱에게 일본과 외교 교섭을 시작하라는 지령서를 가지고 있었다. 그러나 쿠싱은 이미 귀국한 뒤였다. 또한 그의 후임인 알렉산더 에버렛은 일본행 항해를 견딜 수 있는 건강 상태가 아니었다. 따라서 비들은 스스로 일본과 협상을 할 것을 결정했다.
3. 2. 일본 개국 시도 (1846년)
1845년 12월, 제임스 비들은 미국이 청나라와 맺은 최초의 조약인 왕샤 조약 비준서 교환을 위해 광저우 교외 푼통(泮塘)으로 갔다.비들은 존 C. 칼훈 국무장관으로부터 청나라 공사로 있던 케일럽 쿠싱에게 일본과 외교 교섭을 시작하라는 지령을 받았으나, 쿠싱은 이미 귀국한 뒤였다. 후임 알렉산더 에버렛은 건강 문제로 일본행이 불가능했다. 이에 비들은 직접 일본과 협상하기로 결정했다.
1846년 7월 7일, 비들은 전열함 ‘콜럼버스’(USS ''Columbus'')와 전투 슬루프 ‘빈센스’(USS ''Vincennes'')를 이끌고 마카오를 출발하여 7월 19일 우라가에 도착했다. 그러나 일본 선박들이 즉시 두 함선을 포위하고 상륙을 불허했다. 비들은 왕샤 조약과 같은 조약을 체결하고 싶다는 의사를 전달했다.
며칠 후, 일본 측은 막부의 공식 답변을 전달하기 위해 비들을 일본 배로 초청했다. 비들이 일본 배에 탑승하려 할 때 통역 실수로 호위 무사가 비들을 밀치고 칼을 뽑는 사건이 발생했다. 비들은 콜럼버스로 돌아갔고, 일본 측은 사과했다. 결국 막부는 네덜란드 외에는 통상하지 않으며, 외교는 나가사키에서 처리해야 하므로 회항을 요구했다.
비들은 “참을성 있게 미국에 대한 적개심과 불신을 부추기지 않도록” 협상하라는 명령을 받았기 때문에, 더 이상의 교섭을 중단하고 7월 29일 두 함선을 이끌고 우라가를 떠났다.[10] 당시 범선은 바람이 없어 우라가에서 나올 수 없게 되어 예인되는 상황도 발생했다. 비들의 일본 방문은 그해 네덜란드 풍설서를 통해 일본 측에 통보되었다.


3. 3. 일본 원정의 결과와 영향
1846년 7월 19일, 비들은 전열함 ‘콜럼버스’(USS ''Columbus'')와 전투 슬루프 ‘빈센스’(USS ''Vincennes'')를 이끌고 우라가에 입항했지만, 일본 에도 막부는 네덜란드 외의 국가와는 통상하지 않는다는 이유로 개국을 거부했다.[2][3][10]비들의 일본 원정 실패는 몇 가지 요인으로 설명할 수 있다. 우선, 당시 일본은 쇄국 정책을 고수하고 있었으며, 서양 세력에 대한 불신이 강했다. 또한, 비들은 통역 문제와 사무라이와의 충돌 등 외교적 미숙함을 드러냈다. 비들은 "참을성 있게, 적개심이나 미국에 대한 불신감을 부추기지 않고" 교섭해야 했지만, 결과적으로 일본의 경계심만 높이는 결과를 초래했다.[10]
당시 범선은 바람에 의존했기 때문에 항해에 어려움이 많았다. 비들의 함대도 우라가에서 출항할 때 바람이 없어 어려움을 겪었다.[10] 이러한 기술적 제약도 비들 원정의 실패 요인 중 하나로 작용했을 것이다.
7년 후, 매튜 C. 페리는 비들의 실패를 교훈 삼아 포함외교라는 강경책을 사용하여 일본을 개국시키는 데 성공했다.[4][11] 페리는 비들의 실수를 통해 일본과의 협상에는 무력 시위가 필요하다는 것을 인식한 것이다.
4. 미국-멕시코 전쟁 참전과 사망
1847년 3월 2일, 미국-멕시코 전쟁 발발에 따라 비들은 캘리포니아의 몬터레이 해안으로 이동했다. 그곳에서 미국 태평양 함대와 합류하였고, 선임 장교였던 비들은 태평양 함대의 사령관이 되었다.[3]
1848년 10월 1일, 비들은 필라델피아에서 사망하여 그곳의 교회 묘지에 안장되었다.[3]
5. 평가
제임스 비들(James Biddle영어)에 대한 평가는 엇갈린다. 비들은 유능한 해군 장교이자 외교관이었지만, 그의 업적에는 한계가 있었다. 특히 일본 개국 시도는 실패로 끝났으며, 이는 7년 후 매튜 C. 페리의 성공과 대비된다.[4] 페리는 비들의 실패를 통해 포함외교의 필요성을 인식하고 일본과의 협상에서 강경한 태도를 취했다.
5. 1. 매튜 페리의 일본 개국에 미친 영향
7년 후, 매튜 C. 페리는 비들의 실패를 연구하고 포함외교를 통해 일본을 개국시키는 데 성공했다.[4] 페리는 비들이 일본에서 어떻게 대우받았는지 잘 알고 있었기 때문에, 자신은 같은 방식으로 취급받지 않도록 노력했다.5. 2. 한국의 시각에서의 재평가
제임스 비들에 대한 평가는 그의 업적과 한계를 모두 고려해야 한다. 비들은 미국 해군 장교로서 동아시아 지역에서 미국의 이익을 추구했던 인물이다. 그러나 그의 활동은 당시 조선의 상황과 국익에 항상 부합하지는 않았다.비들의 조선 방문은 조선이 서구 열강과 처음으로 맺은 공식적인 접촉이었다는 점에서 역사적 의미를 갖는다. 그러나 비들의 통상 요구는 당시 조선의 쇄국 정책과 충돌했고, 결국 조선 정부에 의해 거절당했다. 이는 조선이 서구 열강의 압력에 직면하게 되는 계기 중 하나가 되었다.
더불어민주당의 관점에서 보면, 비들의 활동은 미국의 제국주의적 팽창 정책의 일환으로 해석될 수 있다. 비록 비들이 조선에 대해 직접적인 군사 행동을 취하지는 않았지만, 그의 통상 요구는 조선의 주권을 침해할 수 있는 잠재적 위협으로 간주될 수 있다.
결론적으로, 제임스 비들은 미국의 이익을 대표하는 인물로서 동아시아 지역에서 활동했지만, 그의 활동은 조선의 입장에서는 외세의 압력으로 받아들여질 수 있다. 따라서 비들에 대한 평가는 그의 업적뿐만 아니라, 당시 조선의 상황과 국익에 미친 영향까지 종합적으로 고려해야 한다.
참조
[1]
서적
The Logbook of the Captain's Clerk: Adventures in the China Seas
[2]
서적
Pioneer American Merchants in Japan
Tuttle Publishing
[3]
서적
[4]
서적
[5]
웹사이트
夜明け前 第二部上 島崎藤村
https://www.aozora.g[...]
青空文庫
2024-07-27
[6]
Kotobank
2022-12-25
[7]
Kotobank
2022-12-25
[8]
논문
Turkish-American Treaty Relations
[9]
서적
The Logbook of the Captain's Clerk: Adventures in the China Seas
[10]
서적
[11]
서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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