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2회 일본 중의원 의원 총선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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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제2회 일본 중의원 의원 총선거는 1892년에 치러진 선거로, 정부의 선거 개입 시도와 그로 인한 정치적 혼란을 보여준다. 정부는 민권파의 의회 장악을 막기 위해 선거에 적극적으로 개입하여 후보 체포, 폭행, 개표 조작 등 불법 행위를 자행했다. 이러한 개입에도 불구하고 선거는 민당의 승리로 끝났고, 정부는 의회와 귀족원의 비판을 받았다. 선거 개입에 대한 책임을 지고 내무대신이 사임하고, 마쓰카타 내각이 총사퇴하는 등 정치적 혼란이 이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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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회 일본 중의원 의원 총선거 | |
---|---|
선거 개요 | |
국가 | 일본 제국 |
선거 유형 | 의회 선거 |
선거 이름 | 1892년 일본 총선거 |
선거 날짜 | 1892년 2월 15일 |
이전 선거 | 1890년 일본 총선거 |
이전 선거 연도 | 1890년 |
다음 선거 | 1894년 3월 일본 총선거 |
다음 선거 연도 | 1894년 3월 |
선출 의석 | 중의원의 전체 300석 |
과반 의석 | 151석 |
주요 정당 및 지도자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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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거 결과 | |
자유당 의석 | 94석 |
자유당 의석 변화 | 36 |
주오 클럽 의석 | 81석 |
주오 클럽 의석 변화 | 신설 |
입헌개진당 의석 | 38석 |
입헌개진당 의석 변화 | 3 |
독립 클럽 의석 | 31석 |
독립 클럽 의석 변화 | 신설 |
긴키 클럽 의석 | 12석 |
긴키 클럽 의석 변화 | 신설 |
총리 | |
선거 전 총리 | 마쓰카타 마사요시 |
선거 전 총리 소속 | 무소속 |
선거 후 총리 | 마쓰카타 마사요시 |
선거 후 총리 소속 | 무소속 |
2. 배경
1890년 선거에서 입헌자유당, 입헌개진당 등 민권파 정당들이 승리하면서 정부와 의회 간의 갈등이 시작되었다. 정부는 예산안 부결 등 의회의 저항에 직면하여 의회를 해산하고 제2회 총선거를 실시하게 되었다.[3]
메이지 천황은 같은 사람들이 다시 선출될 경우 문제가 반복될 것을 우려하여 지방 관청에 훌륭한 인재를 추천하도록 제안했다.[3] 내무 대신 시나가와 야지로는 이를 정당 활동에 대한 비난으로 해석, 지방 정부에 정치 활동 관여자의 해고를 장려하는 메모를 보냈다. 또한 경찰에 뇌물 및 협박 행위에 대한 엄중 대처를 지시했다.[1] 그러나 이러한 조치는 마쓰카타 마사요시 총리의 격려를 받은 시나가와가 "불충"하다고 여긴 후보들을 체포하고, 불량배를 동원해 유권자를 괴롭히거나 반대파 정치인의 재산을 불태우는 등, 선거를 일본 역사상 가장 폭력적인 선거 중 하나로 만들었다.[1][2]
2. 1. 메이지 정부와 의회의 갈등
1890년 선거에서 입헌자유당, 입헌개진당 등 민권파 정당이 승리하면서 정부와 대립했다. 이들은 예산안을 부결시키는 등 정부에 대한 비판적인 입장을 견지했다.[3] 중의원 의원들은 이토 히로부미 등 메이지 유신 지도자들의 예상보다 정부에 덜 협조적이었다. 이들은 메이지 헌법에 따라 주어진 권한인 예산 승인 보류를 통해 저항했다. 이러한 상황은 정부의 의회 해산과 새로운 선거로 이어졌다.[3]1890년 11월 29일, 제1회 제국의회가 소집되었다. 번벌 중심의 정부(제1차 야마가타 내각)와 "민력휴양"을 내건 민당은 대립했지만, 양측 모두 서로의 움직임을 주시했다. 정부는 대외적 체면 때문에 의회 개설 직후 중의원 해산을 원치 않았고, 자유당 도사파를 일시적으로 와해시킨 점 등을 통해 1891년 3월 8일 폐회까지 버틸 수 있었다.
그러나 제1차 마쓰카타 내각 하의 제2회 제국의회 (1891년 11월 26일 개회)에서는 중의원 해산이라는 선택지를 고르기 어려웠다. 게다가 민당은 삿초 출신 각료가 과반수를 넘지 못한 마쓰카타 내각을 약체로 보고 정부 비판을 강화했다. 12월 20일 가바야마 스케노리 해상의 이른바 "만용 연설"로 긴장감이 고조된 상황에서, 마쓰카타 내각은 12월 25일 첫 중의원 해산을 단행했다.
2. 2. 메이지 천황의 우려와 정부의 선거 개입 명분
1890년 선거 이후, 중의원 의원들은 이토 히로부미를 비롯한 메이지 유신 지도자들이 예상했던 것보다 정부에 덜 협조적이었다. 중의원 지도자들은 메이지 헌법에 따라 예산 승인을 보류하는 방식으로 저항했다. 이러한 상황은 정부와 의회 간의 교착 상태를 야기했고, 예상보다 빠른 정부 해산과 새로운 선거로 이어졌다. 메이지 천황은 같은 문제가 반복될 것을 우려하여 지방 관청이 "훌륭한 사람들"이 출마하도록 장려할 것을 제안했다.[3]내무 대신 시나가와 야지로는 메이지 천황의 발언을 정당 활동에 대한 비난으로 해석하고, 모든 지방 정부 관청에 정치 활동에 깊이 관여한 사람들의 해고를 장려하는 메모를 보냈다. 그는 또한 경찰에게 뇌물 수수와 협박 행위에 대해 엄중히 대처하도록 지시했다.[1]
3. 선거 과정
제1회 중의원 의원 총선거 이후, 중의원 의원들은 이토 히로부미를 비롯한 메이지 유신 지도자들의 예상보다 정부에 협조하지 않았다. 이들은 메이지 헌법에 따라 주어진 예산 승인 권한을 활용하여 정부에 저항했고, 이는 정부 해산과 새로운 선거로 이어졌다. 메이지 천황은 같은 문제가 반복될 것을 우려하여 지방 관청에 훌륭한 인재를 등용할 것을 제안했다.[3]
내무 대신 시나가와 야지로는 이를 정당 활동에 대한 비난으로 해석하고, 지방 정부에 정치 활동 관여자를 해고하도록 지시했다. 또한 경찰에게 뇌물과 협박 행위를 엄중히 단속하도록 지시했지만, 선거는 일본 역사상 가장 폭력적인 선거가 되었고, 수많은 폭동으로 25명이 사망하고 388명이 부상당했다. 특히 자유당 지지세가 강했던 지역에서 폭력이 심했다.[1] 마쓰카타 마사요시 총리는 "불충"하다고 판단한 후보들을 체포하고, 불량배들을 동원하여 유권자들을 괴롭히고 반대파 정치인들의 재산을 불태우는 등 선거에 적극 개입했다.[2]
고치현에서는 투표함이 도난당했고, 사가현 일부 지역에서는 투표가 불가능했다. 이시카와현, 후쿠오카현 등에서도 부정행위가 있었다.
2월 12일에는 효고현 고베시 산노미야에서 이타가키 다이스케 암살 미수 사건이 발생했다.[5]
고치현과 도야마에서는 개표 부정으로 당선 소송이 제기되어 당선자가 바뀌었다.
3. 1. 내무성의 조직적 선거 개입
내무성은 시나가와 야지로 내상과 시라네 센이치 차관을 중심으로 조직적인 선거 간섭을 주도했다.[4] 메이지 천황이 난항을 겪는 의회 운영에 우려를 표하며, "동일한 의원"이 아닌 새로운 세력이 다수가 당선되기를 바라는 의향을 내비치자, 정부는 선거 개입에 적극적으로 나섰다.[3]마쓰카타 마사요시 수상과 시나가와 내상은 부현 지사에게 내유를 내려 중정(中正)의 인물을 당선시키도록 지시했다. 이후 마쓰카타, 시나가와, 시라네, 히라야마 나리노부 내각서기관장, 고마쓰바라 에이타로 경보국장, 오우라 가네타케 경보국 주사 등이 비밀리에 선거 대책 본부를 조직하여 정부계 후보에 대한 선거 지원책을 협의했다.[4]
내무성은 경찰력을 동원하여 민권파 후보와 지지자들을 탄압하고, 친정부 후보를 지원했다. "불충"하다고 여겨지는 후보들을 체포하고, 불량배들을 동원하여 유권자들을 괴롭히거나 반대파 정치인들의 재산을 불태우기도 했다.[2]
고치현에서는 투표함이 도난당하고, 사가현 일부 지역에서는 투표가 불가능해지는 등[2] 각지에서 민당 후보 및 지지자와 경찰 간의 충돌이 발생했다. 특히 자유당이 강세였던 고치현에서는 정부 공식 발표로 사망자 10명, 부상자 66명이 발생하는 유혈 참사가 벌어졌다. 전국적으로는 25명의 사망자와 388명의 부상자가 발생했다.[1]
대규모 사상자가 발생한 지역은 다음과 같다.
현 | 사망자 | 부상자 | 지사 (출신 번) |
---|---|---|---|
고치현 | 10명 | 66명 | 조쇼 히로타케 (사쓰마번 출신) |
사가현 | 8명 | 92명 | 가바야마 스케오 (사쓰마번 출신) |
후쿠오카현 | 3명 | 65명 | 야스바 야스카즈 (히고번 출신) |
지바현 | 2명 | 40명 | 후지시마 마사타케 (히고번 출신) |
구마모토현 | 2명 | 39명 | 마쓰다이라 마사나오 (에치젠번 출신) |
이들 지역의 지사는 대부분 사쓰마번 또는 인접 지역과 연계가 깊은 히고번 출신으로, 마쓰카타 마사요시 총리를 지지하며 지방 의회에서 민당 의원들과 격렬하게 대립했다. 이러한 배경이 폭력적인 선거 간섭을 일으키는 한 요인이 되었다.[1]
고치와 도야마에서는 개표 과정에서 부정이 발생하여 당선 소송이 제기되었고, 결국 당선자가 뒤바뀌는 결과가 나왔다.[6] 이는 선거 관리자에 의해 선거 결과가 조작된 사례이다.
3. 2. 폭력과 유혈 사태
1890년 중의원 의원 총선거 이후, 중의원 의원들은 이토 히로부미를 비롯한 메이지 유신 지도자들의 예상보다 정부에 협조하지 않았다. 이들은 메이지 헌법에 따라 주어진 예산 승인 권한을 활용하여 정부에 저항했고, 이는 정부 해산과 새로운 선거로 이어졌다. 메이지 천황은 같은 문제가 반복될 것을 우려하여 지방 관청에 훌륭한 인재를 등용할 것을 제안했다.[3]내무 대신 시나가와 야지로는 이를 정당 활동에 대한 비난으로 해석하고, 지방 정부에 정치 활동 관여자를 해고하도록 지시했다. 또한 경찰에게 뇌물과 협박 행위를 엄중히 단속하도록 지시했지만, 선거는 일본 역사상 가장 폭력적인 선거가 되었고, 수많은 폭동으로 25명이 사망하고 388명이 부상당했다. 특히 자유당 지지세가 강했던 지역에서 폭력이 심했다.[1] 마쓰카타 마사요시 총리의 격려를 받은 시나가와는 "불충"하다고 판단한 후보들을 체포하고, 불량배들을 동원하여 유권자들을 괴롭히고 반대파 정치인들의 재산을 불태웠다. 현 지사들과 경찰서장들은 비밀리에 야당 정치인들의 선거 운동을 방해하고 친정부 지지자들을 도왔다.[2]
고치현에서는 투표함이 도난당했고, 사가현 일부 지역에서는 투표가 불가능했다. 이러한 부정행위는 고치현, 사가현, 이시카와현, 후쿠오카현에서 두드러졌다.
메이지 천황은 난항을 겪는 의회 운영에 대한 우려를 나타냈고, 12월 26일 도쿠다이지 사네쓰네 시종장은 이토 히로부미에게 다가오는 선거에서 같은 의원이 재선되면 해산이 반복될 것을 우려했다고 전했다. 12월 28일 마쓰카타 마사요시 총리는 시나가와 내상에게 천황이 "이번 선거에 최선을 다해 좋은 결과를 얻도록 거듭 지시를 받았다"고 전했다.
천황의 의향에 따라 마쓰카타와 시나가와는 부현 지사에게 중정(中正) 인물을 당선시키도록 지시했다. 이후 마쓰카타, 시나가와, 시라네 센이치 차관, 히라야마 나리노부 내각서기관장, 고마쓰바라 에이타로 경보국장, 오우라 가네타케 경보국 주사 등이 극비리에 선거 대책 본부를 조직하여 정부계 후보 지원책을 협의했다.
2월 12일에는 민당과 리당의 대립이 격화되어 효고현 고베시 산노미야에서 이타가키 다이스케 암살 미수 사건이 발생했다.[5]
각지에서 민당 후보 및 지지자와 경찰 간의 충돌이 발생하여, 자유당이 강세인 고치현에서 사망자 10명, 부상자 66명이 발생하는 등 전국에서 25명의 사망자가 발생했다.
현 | 사망자 | 부상자 | 지사 | 지사 출신 |
---|---|---|---|---|
고치현 | 10명 | 66명 | 조쇼 히로타케 | 사쓰마번 |
사가현 | 8명 | 92명 | 가바야마 스케오 | 사쓰마번 |
후쿠오카현 | 3명 | 65명 | 야스바 야스카즈 | 히고번 |
지바현 | 2명 | 40명 | 후지시마 마사타케 | 히고번 |
구마모토현 | 2명 | 39명 | 마쓰다이라 마사나오 | 에치젠번 |
대규모 사상자가 발생한 현의 지사들은 사쓰마번 또는 인접국과 연계가 깊은 히고번 출신자가 많았고, 사쓰마 출신 마쓰카타 마사요시 총리를 지지하며 지방 현 의회에서 민당 의원과 격렬하게 대립했다. 이러한 지역적 배경이 폭력적인 선거 간섭을 일으킨 요인 중 하나로 꼽힌다.
고치현과 사가현에서는 경찰이 하야시 유사조 (고치 2구)와 마쓰다 마사히사 (사가 1구) 등 자유당 유력 의원을 투표일 이후에도 체포하려 했다. 이는 당선된 경우에도 의회 출석을 막으려는 의도였다. 사가현에서는 오우라 가네타케가 문부대신 오키 다카토의 뜻을 받아 나카무라 준쿠로와 고가 렌조를 통해 마쓰다 구인을 시도했지만, 사법성의 소극적인 태도로 실패했다.
고치현과 도야마에서는 개표 부정으로 당선 소송이 제기되어 당선자가 바뀌었다. 고치 2구에서는 자유당 가타오카 겐키치와 하야시 유조가 낙선했지만, 선거장의 부정행위가 밝혀져 당선이 확정되었다.[6] 도야마 4구에서도 개진당 시마다 다카유키가 낙선했지만, 무효표 중 일부가 시마다 표로 인정되어 당선되었다.
이러한 선거 간섭은 각료들의 반발을 샀다. 무쓰 무네미쓰 농상무 대신과 다카시마 도모노스케 육상은 자유당 간부에게 선거 자금을 지원했고, 내무성이 자유당 기관지 내용을 문제 삼아 이타가키 다이스케를 체포하려 하자 오자키 미쓰지로 법제국 장관과 다나카 후지마로 사법상이 반발했다.
3. 3. 개표 부정
고치현과 도야마에서는 선거 관리자에 의해 개표 부정이 발생하여 당선자가 뒤바뀌는 사건이 발생했다.고치현 제2구에서는 자유당 전 의원 가타오카 겐키치와 하야시 유조가 가타오카 나오하루와 야스오카 유키치에게 패했다. 그러나 선거장이 자유당 지지자가 투표한 표를 읽지 않아, 투표 현물과 명세서 열람 요구가 있었다. 명세서 열람은 허용되었으나, 투표 현물 증거 보전 청구는 기각되었고, 당선 소송 중 투표 현물은 분실되었다고 보고되었다. 1심과 오사카 고소원 판결은 증거 불충분으로 패소했지만, 상고심인 대심원 판결은 투표함 자물쇠 파손을 중요하게 여겨 1심 판결을 파기하고 나고야 고소원으로 돌려보냈다. 전체 유권자 조사 결과 가타오카 겐키치와 하야시 유조가 승소했고, 최종심인 대심원 판결로 확정되었다.[6]
도야마현 제4구에서는 개선당 전 의원 시마다 다카유키가 다케베 소분에게 패했지만, 선거장이 시마다 다카유키의 표를 대량으로 무효 처리하여 당선 소송이 제기되었다. 투표 현물 확인 결과 무효표 중 69표가 시마다 다카유키의 표로 인정되어 승소했다.
두 사건 모두 선거 관리자가 선거 결과를 조작한 것이다.
4. 선거 결과
정부의 적극적인 선거 개입에도 불구하고, 자유당, 입헌개진당 등을 포함한 민당(民党)은 다수 의석을 유지하며 선거에서 승리했다.[3]
4. 1. 정당별 의석 분포
정당 | 의석수 |
---|---|
입헌자유당 | 94석 |
중앙교섭회 | 81석 |
입헌개진당 | 38석 |
독립구락부 | 31석 |
긴키구락부 | 12석 |
무소속 | 44석 |
합계 | 300석 |
정부의 적극적인 선거 개입에도 불구하고, 선거는 민당(民党)의 승리로 끝났다.[3]
4. 2. 민당의 승리와 정부의 실패
정부의 적극적인 선거 개입에도 불구하고, 선거는 민당의 승리로 끝났다. 자유당은 94석, 입헌개진당은 38석을 얻어 민당 계열이 다수 의석을 유지했다.[3]정당 | 의석수 |
---|---|
입헌자유당 | 94석 |
중앙교섭회 | 81석 |
입헌개진당 | 38석 |
독립구락부 | 31석 |
긴키 구락부 | 12석 |
무소속 | 44석 |
합계 | 300석 |
선거 후, 내무성이 작성한 후보자 명부에 따르면 '과격파'(민당) 130명, '착실파'(이당) 168명으로 여겨져 각료와 시라네 센이치 등 내무성 간부는 아군의 승리를 기뻐했다. 그러나 '착실파'로 분류되었던 독립구락부는 무쓰 무네미쓰 농상무대신의 지도하에 민당에 가까운 의원 11명과 이당에 가까운 의원 16명으로 분열되었다. 또한, 민당 소속 의원 중에서도 온건파를 '착실파'로 계산했지만, 제3의회에서는 민당에 가까운 자세를 취하는 의원이 잇따라 정부의 다수파 공작은 실패했다. 이나가키 시메스에 의해 매수 공작의 일단이 의사당에서 폭로되기도 했다.[7]
귀족원은 정부의 선거 간섭을 비판하는 결의를 채택했고, 중의원에서도 민당이 '선거 간섭에 관한 결의안'을 제출하여 154대 111로 통과시켰다. 소에지마 타네오미 내무대신은 사태를 수습하려 했으나, '소에지마 몰아내기'가 성공하여 사임하게 되었다. 고노 도가마가 후임 내상이 되었지만, 마쓰카타 마사요시 총리에게 압박하여 시라네를 해임시켰다. 이에 사쓰마 번 출신인 다카시마 육상, 가바야마 해상이 반발하여 사표를 제출했고, 결국 마쓰카타 내각은 총사퇴하게 되었다.
5. 선거 이후
1890년 중의원 의원 총선거 이후, 중의원 의원들은 이토 히로부미와 다른 메이지 유신 지도자들의 예상보다 정부에 덜 협조적이었다. 중의원 지도자들은 귀족원과 원로에서 발행된 법안에 단순히 도장을 찍는 대신, 메이지 헌법에 따라 예산 승인을 보류하며 저항했다. 이러한 교착 상태는 예상보다 이른 정부 해산과 새로운 선거로 이어졌다. 메이지 천황은 같은 사람들이 다시 선출되면 같은 문제가 반복될 것이라는 우려를 표명하며, 지방 관청이 훌륭한 사람들이 출마하도록 장려할 것을 제안했다.[3]
내무 대신 시나가와 야지로는 이를 정당 활동에 대한 비난으로 해석하고, 모든 지방 정부 관청에 정치 활동에 깊이 관여한 사람들의 해고를 장려하는 메모를 보냈다. 또한 경찰에게 뇌물 수수와 협박 행위에 대해 엄중히 대처하도록 지시했다. 그러나 선거는 일본 역사상 가장 폭력적인 선거가 되었으며, 수많은 폭동으로 25명이 사망하고 388명이 부상당했다. 폭력은 반대 정당인 자유당에 대한 강력한 지지를 보였던 지역에서 특히 심했다.[1] 마쓰카타 마사요시 총리의 격려를 받은 시나가와는 "불충"하다고 여긴 후보들을 체포하고, 불량배들을 동원하여 유권자들을 괴롭히고 반대파 정치인들의 재산을 불태웠다. 현 지사들과 경찰서장들은 비밀리에 야당 정치인들의 선거 운동을 방해하고 친정부 지지자들을 도왔다.[2] 고치현에서는 투표함이 도난당했고, 사가현 일부 지역에서는 투표가 불가능해졌다.
이후 상황은 다음과 같이 전개되었다.
사건 | 내용 |
---|---|
선거 간섭 비판 | 귀족원과 중의원 모두 정부의 선거 간섭을 비판하는 결의안을 채택했다. 중의원에서는 민당의 상소안은 부결되었으나, 이후 결의안은 가결되었다. |
시나가와 내무대신 사임 | 제국 의회에서 정부는 중의원과 귀족원의 비난에 직면했고, 결국 시나가와는 선거 간섭에 대한 책임을 지고 사임했다. |
마쓰카타 내각 총사퇴 | 독립구락부가 분열하고 온건파 의원들이 민당에 가까운 자세를 취하면서 정부의 다수파 공작은 실패했다. 이토 히로부미는 신당을 결성하려 했으나 실패하고, 결국 내각이 총사퇴했다. |
5. 1. 선거 간섭에 대한 비판 여론
1890년 중의원 의원 총선거 이후, 귀족원과 중의원 모두 정부의 선거 간섭을 비판하는 결의안을 채택했다.[3] 내무 대신 시나가와 야지로가 선거에 개입하여 폭력 사태를 유발하고, 야당 후보들을 탄압한 것에 대한 비판 여론이 거셌다.[1][2]중의원에서는 민당이 '선거 간섭에 관한 상소안'을 제출했지만, 정부의 다수파 공작으로 부결되었다. 그러나 이후 제출된 '선거 간섭에 관한 결의안'은 가결되었다.[3] 이러한 일련의 사건으로 시나가와 내무대신의 후임인 소에지마 타네오미는 내무성 간부와 지방 지사들을 물러나게 했지만, 결국 소에지마 자신도 사임하게 되었다. 이후 고노 토시마가 후임 내무대신이 되었지만, 마쓰카타 마사요시 총리에게 압박하여 시라네를 해임시키고, 시나가와와 시라네를 지지한 지사들도 해임했다.[2]
5. 2. 시나가와 내무대신 사임
1890년 중의원 의원 총선거 이후, 중의원 의원들은 정부에 대한 비협조적인 태도를 보였다. 이에 메이지 천황은 지방 관청에 훌륭한 인재들이 출마하도록 장려할 것을 제안했다.[3] 내무대신 시나가와 야지로는 이를 정당 활동에 대한 비난으로 해석하여, 지방 정부 관청에 정치 활동 관여자의 해고를 장려하고 경찰에 뇌물 수수와 협박 행위에 대해 엄중히 대처하도록 지시했다. 그러나 제2회 중의원 의원 총선거는 일본 역사상 가장 폭력적인 선거가 되었으며, 수많은 폭동으로 25명이 사망하고 388명이 부상당했다.[1]마쓰카타 마사요시 총리의 격려를 받은 시나가와는 '불충'하다고 여긴 후보들을 체포하고, 불량배들을 동원하여 유권자들을 괴롭히는 등 강압적인 방법을 동원했다. 현 지사들과 경찰서장들은 비밀리에 '불충'한 야당 정치인들의 선거 운동을 방해하고 친정부 지지자들을 도왔다.[2] 고치현에서는 투표함이 도난당했고, 사가현 일부 지역에서는 투표가 불가능했다.
이후 제국 의회 회기에서 정부는 분노한 중의원과 귀족원의 비난에 직면했고, 결국 시나가와는 선거 간섭에 대한 책임을 지고 사임했다.[2]
5. 3. 마쓰카타 내각 총사퇴
선거 후, 내무성은 후보자 명단에서 당선자 다수가 '착실파'(리당)에 속한다고 판단했지만, 독립구락부가 분열하고 온건파 의원들이 민당에 가까운 자세를 취하면서 정부의 다수파 공작은 실패했다. 의원 폭행과 매수 의혹까지 불거지면서 정국은 혼란에 빠졌다.[7]이토 히로부미는 온건파 세력을 모아 신당을 결성하려 했으나, 메이지 천황과 야마가타 아리토모, 마쓰카타 마사요시 총리의 반대로 무산되었다. 선거 간섭 책임자인 시나가와 야지로 내무대신과 이토의 측근인 무쓰 무네미쓰 농상무대신이 사임했지만, 귀족원과 중의원에서 선거 간섭 비판 결의안이 통과되면서 정국 불안은 계속되었다.
소에지마 다네오미가 시나가와의 후임 내무대신이 되었지만, 시라네 센이치 등 내무성 간부들의 반발로 사임했다. 고노 도가마가 후임 내무대신이 되어 시라네를 해임하고 시나가와파 지사들을 해임했지만, 다카시마 도모노스케 육군대신과 가바야마 스케노리 해군대신이 "사쓰마 벌의 잘라내기"라며 반발하여 사표를 제출했다. 이에 각료 통제에 자신감을 잃은 마쓰카타 총리는 결국 내각 총사퇴를 결단했다.
참조
[1]
서적
Japan: Its History and Culture
McGraw-Hill Professional
2004
[2]
서적
Political Bribery in Japan
University of Hawaii Press
1996
[3]
서적
Emperor Of Japan: Meiji And His World, 1852–1912
Columbia University Press
2002
[4]
웹사이트
末木孝典「明治二十五年・選挙干渉事件と立憲政治-系統的指令説と暴発説をめぐって‐」『近代日本研究』第32巻、2016年2月。
https://koara.lib.ke[...]
2019-06-24
[5]
서적
板垣退助君傳記(第3巻)
原書房
2009
[6]
문서
以上の経緯については、末木、2018、第3章。
[7]
문서
以上については、末木、2018、178-198頁。
[8]
법률
衆議院議員選挙法(明治22年法律第3号)第111条
[9]
링크
都道府県の人口一覧#外部リンク
[10]
간행물
愛知県における第一回衆議院議員選挙(下)
20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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