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헐 노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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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헐 노트는 1941년 11월 26일 미국 국무장관 코델 헐이 일본에 제시한 외교 문서로, 일본의 프랑스령 인도차이나 및 중국 철수, 만주국과 왕징웨이 정권 부인 등을 요구했다. 이 노트는 일본 정부가 사실상 최후통첩으로 받아들여, 진주만 공격을 결정하는 데 영향을 미쳤다. 헐 노트에 대한 평가는 최후통첩 여부, 소련의 개입 의혹 등 다양한 해석이 존재하며, 역사적 의의와 교훈에 대한 논쟁이 이어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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헐 노트
개요
명칭하르 노트
유형미국이 일본에 제시한 최후 통첩
시기1941년 11월 26일
작성 주체미국 국무부
주요 내용일본군의 중국 및 인도차이나 반도에서의 철수
만주국 불인정
중화민국과의 평화 협상
모든 국가에 대한 무차별 통상 (경제적 양보)
결과진주만 공격을 유발하는 요인이 됨
태평양 전쟁 발발
일본의 입장'자살적 요구'로 간주, 사실상 전쟁을 선언한 것으로 받아들임
미국의 입장일본의 중국 침략에 대한 불만, 군사적 위협에 대한 대응
협상 위치미국 측은 '비공식 예비 회담', 일본 측은 '정식 협상'으로 간주
별칭일본 측: '을호 제안(乙号提案)'
영어: Hull note
의미미국이 일본에 제시한 최후 통첩
배경
당시 상황일본의 대외 팽창 정책 심화
미국의 대일 제재 강화
제2차 세계 대전 발발 및 확전
미국 측의 목표일본의 침략 정책 중단
동남아시아에서의 일본 영향력 축소
태평양 지역의 안보 확보
일본 측의 목표남방 진출 계획 추진
자원 확보
미국의 경제 제재 해제
주요 내용 상세
주권과 영토 존중모든 국가의 주권과 영토 보전
내정 불간섭
무역 자유화모든 국가에 대한 무차별 통상 원칙
무역 차별 철폐
태평양 지역 안정태평양 지역의 평화와 안정 유지
무력 사용 자제
영토 확장 반대
인도차이나 및 중국 철수모든 일본군 병력의 중국 및 인도차이나 철수
점령지에서 철수
중국에서의 특권 포기
만주국 불인정일본이 세운 괴뢰 국가인 만주국의 불인정
중국의 주권 회복 지지
중화민국과의 협상중화민국과의 평화 협상 촉진
일본군의 중국 침략 중단
하르 노트의 전달 및 일본의 반응
전달일1941년 11월 26일
전달자코델 하르 미국 국무장관
수령자노무라 기치사부로 주미 일본 대사
일본의 반응미국 측의 요구를 '자살적 요구'로 간주
사실상의 최후통첩으로 인식
전쟁 불가피론 대두
하르 노트의 영향 및 결과
영향일본의 대미 개전 결정에 결정적인 요인
진주만 공격의 주요 원인 중 하나
태평양 전쟁 발발의 직접적인 원인
분석일본의 외교적 선택지를 제한했다는 평가
일본으로 하여금 전쟁을 결심하게 만들었다는 평가
미국 외교 정책의 실패 사례로 평가되기도 함
결론제2차 세계 대전의 주요 전환점 중 하나
관련 문서
영어 원문Hull note
일본어 원문ハル・ノート(日本語原文)

2. 배경

미국 국무장관 코델 헐


헐 노트 이전 미일 관계는 중일전쟁과 미국의 대일 제재로 악화일로를 걷고 있었다. 미국은 일본의 중국 침략에 반대하며 장제스의 중국 국민당 정부를 지원했고, 일본은 1941년 7월 프랑스령 인도차이나 반도 남부를 점령하고 캄보디아와 사이공에 군사 기지를 설치하며 맞섰다. 이는 영국령 말라야를 공격하기 위한 전략적 요충지 확보 차원이었으며, 미국은 자국 안보를 위협하는 행위로 간주했다.

이에 미국은 일본 자산 동결과 대일 석유 수출 금지 등 경제 제재를 단행, 일본의 전쟁 수행 능력을 약화시키고자 했다. 딘 애치슨 미 국무부 고위 관료는 대일 강경책을 주도하며 "일본에 대한 전면적인 금융전"을 추진했다.[2][1] 이는 일본에게 큰 타격을 주었다.[2]

2. 1. 중일 전쟁과 미국의 대일 정책

미국 정부는 일본의 중일전쟁을 반대하였고, 장제스의 중국 국민당 정부를 원조하였다. 1941년 7월, 일본군은 신사협정을 파기하고 프랑스령 인도차이나 반도 남부를 점령하였으며, 일본 폭격기가 영국령 말라야를 공격할 수 있는 캄보디아와 사이공으로 기지를 옮겼다. 그 결과, 미국 정부는 일본에 대하여 미국의 일본 자산 동결과 대일 석유 수출 금지를 내용으로 한 무역 제재를 부과하였다.[76]

미국은 제2차 중일전쟁과 일본군 및 일본 이주민에 의한 중국 만주 지역 점령에 반대했다. 미국은 항의의 표시로 국민당 정부인 장제스 정부에 렌드리스법을 시작으로 지원을 보냈다. 1941년 7월, 일본군 부대는 남부 프랑스령 인도차이나를 점령하여 신사협정을 위반했다. 일본 폭격기는 사이공과 캄보디아의 기지로 신속하게 이동하여 영국령 말레이아를 공격할 수 있게 되었다. 그 결과, 미국 정부는 일본에 대한 무역 제재를 가했는데, 여기에는 미국 내 일본 자산 동결이 포함되었고, 이는 일본이 미국산 석유를 구매할 충분한 통화를 보유하지 못했기 때문에 사실상 석유 수출 금지로 이어졌다.[1]

미국 국무부 고위 관료였던 딘 애치슨은 주요 결정권자였다. 그는 미국의 정책을 수출 제한에서 "일본에 대한 전면적인 금융전"으로 전환시켰다.[2][1] 밀러는 이러한 자금 동결을 "일본에 대한 미국이 취한 가장 파괴적인 조치"라고 묘사했다.[2]

2. 2. 미일 협상의 전개

1941년 11월 5일, 일본 정부는 어전회의에서 대미 교섭의 최종 시한을 11월 25일로 정하고, 협상이 결렬되면 12월 초에 미국 및 영국에 대해 개전한다는 방침을 결정했다.[76] 주미대사 노무라 기치사부로는 미국 정부에 두 가지 제안을 제시했다.

1941년 11월 6일에 제시된 첫 번째 제안 A는 일본군의 부분 철수와 중일전쟁의 종결을 내용으로 했다. 그러나 미국 육군정보처는 일본의 외교 암호를 해독하고 있었고, 제안 A가 실패할 경우 후속 제안이 있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1941년 11월 14일, 미국 정부는 제안 A를 거부했다.

1941년 11월 20일, 노무라는 제안 B를 제시했다. 이 제안은 미국이 네덜란드령 동인도에서 일본의 자원 획득을 지원하고, 일본에 충분한 석유를 제공하며, 동남아시아에서의 군사 배치를 중지하고(인도차이나 북부의 일본군 증강 제외), 중국 국민당에 대한 원조를 중단한다면, 일본군을 인도차이나 남부에서 철수하겠다는 내용을 담고 있었다.[77]

미국 정부는 이 제안에 대해 민간인에 대한 연료 공급을 포함하는 반대 제안을 고려하고 있었다. 그러나 프랭클린 D. 루스벨트 대통령은 일본군의 인도차이나 작전 계획을 보고받고 일본이 협상에 진지하지 않다고 판단, 코델 헐 국무장관에게 반대 제안을 제시하도록 지시했다.[78]

3. 헐 노트의 주요 내용

헐 노트는 크게 두 부분으로 구성되어 있다.[7] 첫 번째 부분은 "정책에 대한 상호 선언 초안"으로, 헐 4원칙을 포함한 여러 원칙들을 명시하고 있다. 두 번째 부분은 "미국 정부와 일본 정부가 취해야 할 조치"라는 제목으로, 10개 항의 구체적인 조치를 제시하고 있다.

헐 노트는 "극비, 임시적이며 구속력 없음(Strictly Confidential, Tentative and Without Commitment)"이라는 문구로 시작한다.

헐 노트는 6월 21일자 미국안과 9월 25일자 일본안의 차이를 조정한 것이라고 설명되지만, 실제로는 일본 측의 요구가 모두 무시되었다. 6월 21일자 미국안에는 일본군의 중국 주둔을 향후 검토 대상으로 하는 등 일본의 입장에 대한 이해를 보이는 문구가 있었지만, 헐 노트는 강경한 조건을 제시하였다.

3. 1. 정책에 대한 상호 선언 초안

헐 노트의 첫 번째 부분은 "정책에 대한 상호 선언 초안"으로, 다음과 같은 원칙들을 명시하고 있다.[7]

# 모든 국가의 영토 보전 및 주권의 불가침

# 타국의 내정 불간섭

# 평등, 상업적 기회 및 대우의 평등 포함

# 분쟁 예방 및 평화적 해결을 위한 국제 협력 및 조정에 대한 의존

# 국제 상업 관계에서의 차별 금지

# 국제 경제 협력 및 과도한 무역 제한으로 표현되는 극단적 민족주의의 철폐

# 모든 국가의 원자재 공급에 대한 차별 없는 접근

# 국제 상품 협정 운영과 관련하여 소비국 및 인구의 이익을 충분히 보호

# 국제 금융 기구 및 제도의 설립

3. 2. 미국 정부와 일본 정부가 취해야 할 조치

영국, 중국, 일본, 네덜란드, 소련, , 미국 간의 다자간 불가침 조약 체결, 프랑스령 인도차이나의 영토 주권 존중, 일본의 중국 및 프랑스령 인도차이나에서의 완전 철군[18][19], 미국이 지원하는 장제스 정권(중국국민당 충칭 정부) 이외의 어떠한 정부도 인정하지 않음(일본이 지원했던 왕징웨이 정권 부정) 등 10개 항의 구체적인 조치가 제시되었다.[7]

번호내용
1영국중국・일본・네덜란드・소련・・미국 간의 다자간 불가침 조약 제안
2프랑스령 인도차이나(프랑스령 인도차이나)의 영토 주권 존중, 프랑스령 인도차이나와의 무역 및 통상에 있어서의 평등 대우 보장
3일본의 중국(China) 및 프랑스령 인도차이나에서의 완전 철군[18][19]
4미국이 지원하는 장제스 정권(중국국민당 충칭 정부) 이외의 어떠한 정부도 인정하지 않음 (일본이 지원했던 왕징웨이 정권 부정)
5영국 또는 여러 국가의 중국 대륙에 있는 해외 조계 및 관련 권익을 포함하는 1901년 베이징 의정서에 관한 치외법권 포기에 대한 여러 국가의 합의를 얻기 위한 양국의 노력
6최혜국 대우를 기초로 하는 통상 조약 재체결을 위한 협상 개시
7미국에 의한 일본 자산 동결 해제, 일본에 의한 미국 자산 동결 해제
8달러 환율 안정에 관한 협정 체결 및 통화 기금 설립
9일미가 제3국과 체결한 어떠한 협정도 태평양 지역의 평화 유지에 반하는 것으로 해석하지 않을 것에 대한 동의(삼국 동맹의 사실상 공문화)
10본 협정 내용의 양국에 의한 추진


4. 헐 노트 전달과 일본의 반응

1941년 11월 26일, 은 일본 대사에게 헐 노트[7]를 전달했다. 이 문서에는 모든 일본군의 프랑스령 인도차이나와 중국 철수 요구 등의 조건이 담겨 있었다. 도조 히데키 일본 총리는 이를 "최후통첩"이라고 자신의 내각에 보고했지만, 헐 노트는 "잠정적인" 문서였고 마감일은 없었다.[8]

11월 27일 오후, 노무라 주일 미국 대사의 헐 노트 요지 보고와 주미(駐美) 무관(武官)의 요지 보고 전보가 일본에 도착했다. 도조 히데키 수상과 도고 시게노리 외무대신의 회상에 따르면, 이 보고를 받은 후 오후 2시에 연락회의를 열어 심의했다. 도조는 심의 결론을 “11월 26일의 각서(覚書)는 분명히 일본에 대한 최후통첩이다”, “이 각서는 우리나라로서는 수락할 수 없다"라고 하였다.

스기야마 메모에 따르면, 27일 연락회의에서 “선전(宣戦)에 관한 사무 절차 순서” 및 “전쟁 수행에 수반되는 국론 지도 요강”이 채택되었다. 12월 1일 어전회의에서 전쟁 개시의 국가 의지를 결정하고, 개전 다음 날 “선전의 칙서(詔書)”로 선전포고를 한다는 등의 내용이 결정되었다(일본의 대미영 선전포고).

쇼와 천황은 11월 27일 오후 1시 27분에 도조 수상으로부터 미일 협상에 대해, 다음 날 28일 오전 11시 30분에는 도고 외무대신으로부터 헐 노트에 대한 설명을 들었다.[27]

쇼와 천황은 전후 회상에서 “석유 수입 금지로 일본은 궁지에 몰렸다. 만일의 행운에 기대어 싸우는 것이 자연스러운 흐름이었다… 헐의 최후통첩이 왔기에 외교적으로도 마지막 단계였다”라고 말했다.[29]

4. 1. 미국 측의 전달 과정

1941년 11월 26일, 국무장관은 일본 대사에게 헐 노트[7]를 전달했다. 이 문서에는 모든 일본군의 프랑스령 인도차이나와 중국 철수 요구 등의 조건이 있었다. 도조 히데키 일본 총리는 이를 "최후통첩"이라며 내각에 보고했지만, 문서 자체는 "잠정적"이었고 마감일은 없었다.[8]

11월 27일 오후, 노무라 주일 미국 대사의 헐 노트 요지 보고와 주미(駐美) 무관(武官)의 요지 보고 전보가 일본에 도착했다. 도조 히데키 수상과 도고 시게노리 외무대신은 보고를 받은 후 오후 2시에 연락회의를 열어 심의했다. 도조는 “11월 26일의 각서(覚書)는 일본에 대한 최후통첩”, “일본은 수락할 수 없다. 미국은 일본이 수락할 수 없다는 것을 알고 통지했다”, “미국은 이미 대일전쟁을 결의한 것 같다”라고 회상했다. 도고는 “참석자 모두 미국의 강경한 태도에 놀랐다. 군부의 일부 주전론자는 안심한 듯했지만, 대체로 낙담한 기색이었다”라고 회상했다.

쇼와 천황은 11월 27일 오후 1시 27분에 도조 수상으로부터 미일 협상에 대해, 다음 날 28일 오전 11시 30분에는 도고 외무대신으로부터 헐 노트에 대한 설명을 들었다.[27] 기도 고이치의 일기에는 11월 28일, “도고 외무대신 참내(參內), 미국의 대안 설명 奏上. 형세 역전”[28]이라고 기록되어 있다.

쇼와 천황은 전후 회상에서 “석유 수입 금지로 일본은 궁지에 몰렸다. 만일의 행운에 기대어 싸우는 것이 자연스러운 흐름이었다… 헐의 최후통첩이 왔기에 외교적으로도 마지막 단계였다”라고 말했다.[29]

중국의 해외 유출 정보로 일본은 잠정 협정안에 대해 "미국은 경제 관계를 회복하니 일본도 무력 사용을 그만두라는 내용"(사토 켄료(佐藤賢了) 군무과장), "미측 요구로, 프랑스령 인도차이나 주둔군 완전 철수와 자산 동결 해제를 관련시키는 모양"(도고 외상)이라고 판단했다.[30] 그러나 헐의 답변은 "예상과 달리 매우 강경했다"(사토).[30]

사토 군무과장은 "미국의 회유 정책으로 일본 여론 일부가 온화해져 중요한 시기에 발맞추지 못할까 우려했지만, 강경한 답변 덕에 여론이 일치하게 되어 경하할 일이다"라고 했다. 도고와 가야 오키노리 대장대신도 개전에 반대하지 않았고, 해군도 전쟁 결의를 굳혀 만장일치로 개전이 결의되었다.

4. 2. 일본 대사의 반론

노트를 받은 노무라(野村)·쿠리스(来栖) 두 대사는 난색을 표하며 헐 국무장관과 설전을 벌였지만, 헐은 “어느 것에도 자세히 들어가 설명이나 주장을 하지 않았다. 전체적인 태도가 거의 무조건적인 것으로, 속칭 손대기 어려운 상황이었다”[20]고 한다.

쿠리스는 다변적 불가침 조약 체결(제2항 1)에 대해 “(일본에) 워싱턴 회의 이래의 쓰라린 경험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다시 구국 조약과 같은 기구를 부활시키라는 것은 지난 4년간의 일중 사변을 전혀 무시하라는 것이 된다”고 반대했지만, 헐은 어떠한 강력한 반박도 하지 않았다[20].

제2항 3의 전면 철병과 제2항 4의 장개석 정권(중경 정부) 이외 불지지에 대해서는 “할 수 없는 이야기로, 미국이 장 정권을 방치할 수 없는 것과 마찬가지로 일본은 난징 정부를 방치할 수 없다”고 하자, 헐은 “난징 정부는 도저히 중국을 통치할 능력이 없다”고 응수했고, 철병에 대해서는 “즉시 철병을 주장하는 것은 아니다”라고 말했다[20][21].

일본 측은 “삼국 조약 문제에 이르러서는 미국은 일본으로 하여금 가능한 한의 양보를 하도록 바라면서 한편, 중국 문제에 대해서는 거의 우리 측으로 하여금 중경에 사과하라고 하는 것과 같고, 얼마 전 루즈벨트 대통령이 일중 평화의 ‘주선’을 하고 싶다고 말한 것은 도저히 이러한 취지라고는 생각하지 않았다"고 항의하자, 헐은 묵묵히 대답하지 않았다.

잠정 협정에 대해 쿠리스가 질문하자, 헐은 그 문제의 가능성은 이미 조사했고, 조사에는 최선을 다했다고만 대답했다.

회담 마지막에 쿠리스는 이 노트를 그대로 정부에 전달하는 것은 심각한 의문이 있다고까지 말했고, 노무라는 미국으로서는 이 안 이외에 고려의 여지가 없느냐고 하며 헐에게 대통령과의 회담을 요청했다[22][21].

4. 3. 일본 정부의 반응과 해석

1941년 11월 26일, 미국코델 헐 국무장관은 일본 대사에게 헐 노트[7]를 전달했다. 이 문서에는 일본군의 프랑스령 인도차이나중국에서의 전면 철수를 요구하는 내용이 담겨 있었다. 일본 총리 도조 히데키는 이를 "최후통첩"으로 간주했다.[8] 헐 노트는 "잠정적인" 문서였고, 마감일은 명시되지 않았다.[8]

헐 노트를 받은 노무라·구루스 두 대사는 헐 국무장관과 격론을 벌였다. 구루스는 다변적 불가침 조약 체결(제2항 1)에 대해 "워싱턴 회의 이래의 쓰라린 경험"을 언급하며 반대했다.[20] 전면 철병(제2항 3)과 장개석 정권 이외 불지지(제2항 4)에 대해서는 "일본은 난징 정부를 방치할 수 없다"고 주장했다.[20][21]

11월 27일(미국 시간), 프랭클린 D. 루스벨트 대통령은 노무라, 구루스 양 대사와의 회담에서 "나는 지금도 여전히 크게 평화를 바라고, 희망을 가지고 있다"고 말했지만, 노무라의 "이번 귀국 측 제안은 일본을 실망시킬 것이다"라는 말에는 "나도 사태가 이 지경에 이른 것은 정말 실망스럽다"고 답했다.[24]

도고 시게노리 외무대신은 헐 노트의 내용에 크게 실망하여 외교적 해결을 포기했다. 도고는 "나는 눈이 멀 정도의 실망에 격분했다"고 회상하며, 헐 노트를 "일본에 대해 전면적인 항복 또는 전쟁을 강요하는 이상의 의미"라고 평가했다.

12월 1일 어전회의에서 도조 히데키 수상은 미국이 "중국으로부터 무조건 전면 철병, 난징 정부의 부인, 일독이 삼국 조약의 사문화"를 요구하며 "제국의 일방적인 양보를 강요"하고 있다고 주장했다. 도고 외상 역시 헐 노트의 여러 조항이 "제국으로서는 도저히 동의할 수 없는 것"이라고 강조했다. 회의 결과, 대미영란 개전이 최종 결정되었다.

5. 헐 노트에 대한 평가와 논란

헐 노트는 발표 이후 다양한 평가와 논란에 휩싸였다. 크게 일본을 자극하여 전쟁을 유발했다는 비판적 시각과, 미국의 원칙을 제시한 정당한 외교 문서라는 옹호적 시각으로 나뉜다.
일본 측의 반응 및 평가| 인물 | 평가 |

| ---------------------------------- | -------------------------------------------------------------------------------------------------------------------------------------------------------------------------------------------------------------------------------------------------------------------------------------------- |

| 도고 시게노리 외무대신 | 수년에 걸친 일본의 희생을 무시하고 극동에서의 강대국 지위를 포기하라는 요구라고 비판하며, 일본에 대한 도전장으로 간주했다.[41] |

| 도조 히데키 수상 | 일본의 권위를 실추시키고 중일전쟁의 완수를 불가능하게 할 뿐 아니라, 제국의 존립마저 위태롭게 할 것이라고 주장했다.[41] |

| 무토 아키라 군무국장 | 일본에 대한 협상 중단 통고였다고 회고하며, 미국에게 크게 속은 느낌을 지울 수 없다고 말했다.[52] |

| 시게미쓰 마모루 | 비타협적이며, 일본의 대동아공영권 확립, 중일전쟁 완수, 삼국 협상에 의한 추축 정책과는 거리가 멀다고 평가했다.[53] |

| 아리타 하치로 전 외무대신 | 평화로운 일본의 경제 발전에 유리하게 이용할 수 있는 조항들이 포함되어 있었으므로, 더 신중하게 고려했어야 했다고 평가했다.[54] |

| 요시다 시게루 | 외교 문서 상으로는 '최후 통첩'이 아니었을 것이라고 회고하며, 도고 시게노리 외무대신에게 사임을 각오하고서라도 주의를 환기하려 했다고 밝혔다.[55] |
미국 및 기타 국가의 반응| 인물 | 평가 |

| -------------------------------------- | ------------------------------------------------------------------------------------------------------------------------------------------------------------------------------------------------------------------------------------------------------------------------------------------------------------------------------------------------------------------------------------------------------------------------ |

| 코델 헐 국무장관 | 일본 군부가 상식을 되찾기를 바라는 희망을 품고 협상을 계속하려 했던 진실된 노력이었으며, 일본의 선전과는 달리 최후통첩이 아니었다고 주장했다. |

| 조셉 그루 주일 미국 대사 | 폭넓고 객관적이며 정치적 해결책을 구현한 문서로, 일본이 침략적 정책을 중단하기만 한다면 일본이 원하는 것을 거의 전부 제공할 것을 제안했다고 평가했다. |

| 윈스턴 처칠 영국 수상 | 일본의 대미 공격을 "하늘의 은총"으로 여기며, 미국의 참전을 통해 대영제국에 큰 행운이 찾아왔다고 평가했다.[57] |

| 장제스 | 일미 개전을 염원해 왔으며, 헐 노트를 통해 항전 4년 반 이래 최대의 효과를 얻었다고 평가했다.[58] |
학계 및 기타 평가| 인물 | 평가 |

| ---------------------------------- | ------------------------------------------------------------------------------------------------------------------------------------------------------------------------------------------------------------------------------------------------------------------------------------------------------------------------------------------------------ |

| 찰스 오스본 비어드 | 헐 노트를 불필요한 전쟁을 의미하는 최후통첩으로 간주했다.[10] |

| 벤 스타일 | 일본 정부가 헐 노트를 최후통첩으로 받아들인 후 진주만 공격을 결정했다고 주장했다.[12] |

| 하타 이쿠히코 | 헐 노트가 프랭클린 D. 루스벨트의 "도전장"인 것은 맞지만, 일본 역시 그 이전에 진주만을 향해 기동 부대를 출발시켰으므로, 누가 먼저 도발했는지는 의미 없는 논쟁이라고 지적한다.[65] |

| 존 톨랜드 | 헐 노트의 '중국'에 만주가 포함되지 않았다는 점을 명확히 했어야 했으며, 만약 일본이 만주국을 승인받을 수 있다는 것을 알았다면 헐 노트를 수락했을 가능성도 있다고 주장한다.[67] |

| 허버트 페이스 | 헐 노트가 일본의 구상과 정면 충돌하는 내용을 담고 있었지만, 이를 최후통첩으로 간주하는 것은 정치적으로나 군사적으로나 타당하지 않다고 주장한다. |

5. 1. 헐 노트에 대한 다양한 해석

찰스 오스본 비어드를 비롯한 일부 역사가들과 일본 측 인사들은 헐 노트를 일본을 전쟁으로 몰아넣기 위한 최후통첩으로 해석한다. 이들은 헐 노트가 일본의 자존심을 짓밟고, 중국프랑스령 인도차이나에서의 전면 철수, 왕징웨이 정권 불인정, 일독이 삼국 군사 동맹의 사실상 무력화 등 일본이 도저히 수용할 수 없는 조건들을 담고 있다고 주장한다. 다모가미 도시오는 이러한 주장을 펼치다 2008년 해임되기도 했다.[11] 벤 스타일은 "일본 정부는 최후통첩을 받은 후 진주만 공격을 진행하기로 결정했다"고 한다.[12]

도고 시게노부 외무대신은 헐 노트에 대해 "수년에 걸친 일본의 희생을 무시하고 극동에서의 강대국으로서의 지위를 버리라고 하는 것이다. 그러나 이것은 일본의 자살과 같다"라고 회상하며, "일본에 대해 전면적인 항복 또는 전쟁을 강요하는 이상의 의미, 즉 일본에 대한 도전장을 내민 것으로 봐도 무방할 것이다"라고 평가했다. 도조 히데키 수상 역시 헐 노트의 내용이 일본의 권위를 실추시키고 중일전쟁의 완수를 불가능하게 만들 뿐 아니라, 제국의 존립마저 위태롭게 할 것이라고 주장했다.[41]

반면, 헐 노트가 최후통첩이 아니라는 반론도 존재한다. 헐 노트 서두에 "극비, 임시적이며 구속력 없음"이라는 문구가 명시되어 있다는 점,[12] 그리고 일본이 헐 노트를 받기 전에 이미 진주만 공격을 위한 기동 부대를 출항시켰다는 점[44] 등이 그 근거로 제시된다. 요시다 시게루는 헐 노트가 외교 문서 상으로는 결코 '최후 통첩'이 아니었을 것이라고 회고한다.[55]

하타 이쿠히코는 헐 노트가 루스벨트의 "도전장"인 것은 맞지만, 일본 역시 그 이전에 진주만을 향해 기동 부대를 출발시켰으므로, 누가 먼저 도발했는지는 의미 없는 논쟁이라고 지적한다.[65] 허버트 페이스는 헐 노트가 일본의 구상과 정면 충돌하는 내용을 담고 있었지만, 이를 최후통첩으로 간주하는 것은 정치적으로나 군사적으로 타당하지 않다고 주장한다.

존 톨랜드는 헐 노트의 '중국'에 만주가 포함되지 않았다는 점을 명확히 했어야 했다고 지적하며, 만약 일본이 만주국을 승인받을 수 있다는 것을 알았다면 헐 노트를 수락했을 가능성도 있다고 주장한다.[67]

5. 2. 관련국들의 반응 및 평가

찰스 오스본 비어드(Charles A. Beard)는 1948년에 헐 노트가 불필요한 전쟁을 의미하는 최후통첩이었다고 주장했다.[10] 다모가미 도시오(Toshio Tamogami)는 이러한 입장을 취했다는 이유로 2008년 일본 정부에 의해 강제로 퇴역당했다.[11]

국제관계위원회(Council on Foreign Relations) 국제경제 담당 이사인 벤 스타일(Benn Steil)은 "일본 정부는 최후통첩을 받은 후 진주만 공격을 진행하기로 결정했다"고 한다.[12]

; 라이슈 대사

"(Tentative and without commitment 잠정적이고 구속력이 없음)이라고 문서 서두 여백에 적혀 있었고, 상대방은 일종의 제안(a plan)이라고 설명했지만, 내용을 보면 미국 측이 기존 주장에서 한 발짝도 물러서지 않았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뿐만 아니라, 협상의 시작으로 완전히 돌아간 것과 같은 점이 많았습니다. '을안을 수락할 수 없으니, 더 논의하자는 것입니다.' '을안 제출 시 "이로써 미측의 동의를 얻지 못할 경우 협상 결렬 또한 어쩔 수 없는 처지입니다"라고 지시받은 데다가, 29일까지 조인을 완료해야 한다는 시간 제한까지 받았기에 우리의 실망은 컸습니다."라고 회고하고 있다.[50] 또한, 헐 노트를 최후통첩으로 생각했는지 여부에 대해서는 "최후통첩이라고는 생각하지 않았지만, 당시 상황에서는 그렇게 생각할 수도 있었다"고 말하고 있다.[50]

; 노무라 기치사부로 대사

루즈벨트 대통령과 헐 국무장관에 대해, "미국의 신조인 대외 정책의 여러 원칙에 고착하여 한 발짝도 벗어나지 않고, 주고받음(give and take)은 전혀 없었다. 두 사람 모두 여론을 매우 고려했다. 이것이 바로 민주주의의 본질일 것이다"라고 회고하고 있다.[51]

; 무토 아키라 군무국장

헐 노트에 대해 "이는 일본에 대해 협상 중단 통고였다"고 회고하며 다음과 같이 말했다. "나는 당시 생각했습니다. 만약 4월 이후의 일미 협상이 없었다면 어떻게 되었을까 하고... 그런데 최초의 일미 양해안이 매우 관대한 것이었고, 그것이 점차 힘든 것으로 변해 갑니다. 일본은 인내하며 양보해 왔는데 마지막으로 중단됩니다. 그래서 모두 한결같이 분개합니다. 반대할 수 없는 것입니다. 나는 일미 협상의 경위를 생각하며 미국에게 크게 속은 느낌을 지울 수 없습니다." [52]

; 시게미쓰 마모루

헐 노트에 대해, "비록 시안이라고 명명되어 있다 하더라도 협상의 최종 단계에서 제출된 것이므로 매우 비타협적인 것입니다. 일본 측이 공공연히 말하고 있는 대동아공영권의 확립, 중일전쟁의 완수, 삼국 협상에 의한 추축 정책과는 대체로 관계가 먼 것입니다. 일본의 제안과 미국의 이 시안을 조화시키는 것은 절망적이라고는 말하지 않더라도 매우 어려운 일입니다."라고 수기(手記)에 적어 놓았고, 또한 "이 제안을 접한 일본 정부는 거의 협상 지속 의지를 상실했습니다"라고 기록하고 있다.[53]

; 아리타 하치로 전 외무대신

"헐 노트에는 최혜국 대우 및 통상 장벽 감소 조치에 기반한 일미 통상 조약 체결, 자금 동결 명령의 폐지, 엔달러 환율의 안정, 원자재의 무차별 대우 원칙의 지지 등 평화로운 일본의 경제 발전에 유리하게 이용할 수 있는 것이 포함되어 있었으므로, 더 신중하게 다시 생각해 보았어야 했습니다."라고 하여, 헐 노트를 수락해도 좋았을지도 모른다고 전후에 말하고 있다.[54]

; 요시다 시게루

헐 노트에 대해, "즉, 이것은 '시안'이며, '일미 협상의 기초안'이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실제 속마음은 그렇지 않다 하더라도 외교 문서 상으로는 결코 '최후 통첩'이 아니었을 것입니다. 나는 다시 도고 외무대신을 방문하여... 집요하게 헐 노트의 위와 같은 취지를 말하며 주의를 환기했습니다. 나는 다소 무례하다고 생각했지만, 도고 씨에게 '자네가 이것을 받아들일 수 없다면 외무대신을 사임해야 한다. 자네가 사직하면 각의가 정체될 뿐만 아니라, 무분별한 군부도 다소 반성할 것이다. 그렇게 죽는 것이 남자의 본분이 아니겠는가'라고까지 말했습니다."라고 회고하고 있다.[55]

; 사토 켄료

"'잠정 협정안이 11월 26일 헐 노트 대신에 왔다면, 당신들은 전쟁을 결심했겠습니까, 안 했겠습니까?'라는 질문을 도조 총리, 도고 외무대신, 가야 재무대신, 무토 군무국장, 시마다 해군대신, 오카 군무국장 등 관계자에게 물어봤습니다. 역시 도조 씨는 '음, 이것이 온다면 물론...'이라고 하려고 했지만, 설마 이 시점에서 '이것이 왔다면 전쟁을 하지 않았다'라고 말할 수는 없다는 듯한 표정으로 '음...'이라고 말하고는 침묵했습니다. 그 이후 사람들은 모두 '이것만 왔더라면 전쟁을 하지 않았을 것이다'라고 말했습니다. 그러나 과연 그랬을지는, 질문한 시점이 전쟁에서 이미 패배하여 포로의 신세가 된 후의 느낌이므로, 만약 그런 것이 실제로 11월 25일이나 4일에 왔다면 전쟁을 하지 않았을지는 매우 의문입니다."라고 회고하고 있다.[56]

"잠정 협정안으로 극소량의 석유를 준다 해도, 당시 일본의 석유 문제는 물론 해결되지 않았습니다. 협상을 늦춘다면 일본 해군은 더 이상 버틸 수 없다는 것을 미국은 계산하고 있었을 것입니다. 그렇다면 역시, 일본의 주장이 약간 통했다는 것만으로 실질적으로는 결국 아무것도 되지 않는 것입니다. 그래서 역시 전쟁이 된 것이 아닐까 생각합니다." [56]

; 코델 헐(Cordell Hull) 국무장관

“제가 1941년 11월 26일 노무라(野村)와 구루스(来栖) 두 대사에게 전달한 제안(10개조 평화적 해결 방안)은, 이 마지막 단계에서도 일본 군부가 조금이라도 상식을 되찾을지도 모른다는 희박한 희망을 품고 협상을 계속하려 했던 진실된 노력이었다. 나중에, 특히 일본이 큰 패배를 당하기 시작한 후, 일본의 선전은 이 11월 26일 우리의 각서를 왜곡하여 최후통첩이었다고 말하려 했다. 이것은 전혀 거짓 핑계를 대어 국민을 속이고 군사적 약탈을 지지하게 하려는 일본 특유의 방식이었다.”

또한 헐은 미일 협상의 목적에 대해 다음과 같이 언급하고 있다. “유럽에서 전쟁이 발발하고, 특히 프랑스가 함락된 후, 미국은 일본과의 모든 관계에서 두 가지 목표를 가지고 있었다. 하나는 평화이고, 두 번째는 만약 평화를 얻지 못한다면 미국의 방위를 준비하기 위해 시간을 벌고자 하는 것이었다. 미국은 평화를 얻지는 못했지만, 무한한 가치가 있는 시간을 벌었다. 일본이 만약 6개월 앞서 진주만을 공격했다면, 세계 대전의 전체 양상이 달라졌을지도 모른다.”

; 조셉 그루(Joseph Grew) 주일 미국 대사

“미국 정부는 극동의 모든 정세를 조정하기 위한 10개조로 된 제안 초안을 일본에 전달했다. 폭넓고 객관적이며 정치적 해결책을 구현한 문서로, 만약 일본이 침략적 정책을 중단하기만 한다면 일본이 그 때문에 싸우고 있다고 주장하는 것의 거의 전부를 제공할 것을 제안하고 있다. 이 프로그램에 따르면 일본은 필요한 원료를 자유롭게 입수하고, 통상 무역의 자유와 재정적 협력 및 지원, 동결령 철회, 미국과 새로운 통상 조약을 협상할 기회를 얻게 된다. 그러나 만약 일본이 동아시아 국가들을 정치적, 경제적으로 억압하려고 하고 — 일본의 극단주의자들의 대부분이 이것을 원하고 있다 — 무력으로 남진을 감행하려 한다면, 곧 ABCD 국가들 모두와 전쟁을 벌이게 되고, 문제없이 패배하여 삼류 국가의 지위로 추락하게 될 것이다. 일본의 여론은 언제든지 비교적 짧은 시간 안에 형성할 수 있다. 지금 정부가 취해야 할 현명한 조치는 워싱턴 회담에서 더 이상 무력에 의존하지 않고, 지금까지 그것을 목표로 싸워 온 보전 및 ‘자유’를 획득하고, 위대한 외교적 승리를 거머쥐었다는 것을 국민에게 납득시키는 것이다.”

또한 그루는 헐 노트(Hull Note)가 결코 최후통첩이 아니며, 미일 간에 인정된 협의의 기초를 명시한 것임을 도고 외무상에게 설명하고 싶어서, 요시다 시게루(吉田茂)에게 부탁하여 회담을 요청했지만, 도고는 응하지 않았다.[55] 후에 그루는 도고를 만났지만, “나는 매우 실망했다”는 말을 들었다고 한다.

; 로버트 크레이기(주일 영국 대사)

“만약 임시 협정안에 대한 어떤 타협이 성립되어 3개월의 유예 기간을 얻었다면, 계절풍의 조건 하에서 일본군의 말레이 상륙 작전은 어려워졌을 것이다. 또한 독소전의 양상도 변화한다. 대독 잠수함전의 성공이라는 새로운 요소도 더해져 일본 정부가 대미 전쟁 결단에 이르는 것은 매우 어려워졌을 것이다.” (1942년 2월 4일자 처칠 영국 수상에게 보낸 보고서에서)

; 윈스턴 처칠(영국 수상)

크레이기의 보고서에 대해, “일본이 미국을 공격하고, 그 때문에 미국이 온 나라가 힘차게 참전해 온 것은 바로 하늘의 은총이었다. 대영제국에 있어서 이보다 더 큰 행운은 좀처럼 없다. 일본의 대미 공격은, 어느 쪽이 우리나라의 벗이고 적이고를, 백주 대낮에 드러냈다.”라고 비판하고, 보고서를 엄중히 비밀 취급하였다. 영국은 대독 전쟁에 고전하고 있으며, 전황 타개책으로 미국의 참전을 간절히 바라고 있었다.[57] 처칠의 회고록에는, 일미 개전의 소식을 받고, 최종 승리를 확신하고 환희하는 모습이 그려져 있다.

또한 처칠은, 일본의 참전까지 많은 시간을 벌 수 있었던 것에 대해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만약 독일이 1940년 6월 프랑스 붕괴 후 영국 본토 침입을 기도하고, 또 만약 일본이 그와 같은 시기에 영국 제국과 미국에 선전포고를 했다면, 우리의 운명이 어떤 재앙과 고뇌와 고통이었을지는 아무도 알 수 없다.” (1941년 12월 26일 미국 상하 양원 합동 회의에서의 연설에서)

; 장제스

장기전이 된 중일 전쟁에서, 장제스의 염원은 일소 개전 또는 일미 개전의 실현이었다 (일소 중립 조약에 의해 일소 개전이 멀어진 이후로는, “일미 개전만이 일본에 승리하는 유일한 방법”이 되어 있었다)[58] 장제스후스 대사와 쑹쯔원을 통해 미국이 대일 타협을 하지 않도록 루즈벨트에 대한 공작을 진행하고 있었지만, 일미 개전을 받아들이고, 일기에 “항전 4년 반 이래 최대의 효과이며, 또 유일한 목적이었다”고 적었다.[58]

; 왕징웨이

헐 노트에서 왕징웨이 정권은 부정될 것이지만, 왕징웨이 자신은 “만약 자신의 존재가 전면 평화에 방해가 된다면, 언제든지 물러날 것이다.”라고 말하고 있었다. 왕징웨이는 일미 협상을 낙관하고 있었지만, 하타 슌로쿠 중국 파견군 총사령관으로부터 일미 개전을 듣자 “매우 침중한 표정”이었다고 한다.

; 주미 영국 대사

“루즈벨트 대통령은 전쟁을 피하기 위해 경제 제재에 고집했다.”라고 말하고 있다.[59]

; 벤 브루스 브레이크니(도고 담당 변호인)

“본 법정에서 ‘최후통첩’에 관해 많은 이야기가 있었습니다. 헐 노트가 ‘최후통첩’으로 인정되어야 하는지 여부는 전혀 관계없는 문제이며, 문제는 각서의 효력입니다. …헐 노트는 역사가 되었습니다. 그러니 이것을 현대사가의 말에 맡기겠습니다. ‘이번 전쟁에 대해 말하자면, 진주만 전야 국무성이 일본 정부에 보낸 각서를 받았다면 모나코룩셈부르크라도 미국에 대해 무기를 들고 일어섰을 것입니다.’”[60]

; 라다비노드 팔 판사

브레이크니가 인용한 현대사가의 일절을 팔도 개별 의견서에 인용하고 있다.[62][63]

또한, 팔은 6월 21일자 미국안과 헐 노트를 비교하면서, 지금까지의 협상에서 한 번도 언급된 적이 없는 조항이 있다는 점이나 종래의 미국의 주장을 넘어서는 요구를 하고 있다는 점을 지적하고, “일본 내각은, 비록 ‘자유주의적’인 내각이라고 해도, 또 ‘반동적’인 것이라고 해도, 내각의 즉시 붕괴의 위험 또는 그 이상의 위험을 무릅쓰지 않고서는, 그 각서가 규정하는 바를 협상 타결의 기초로서 수락할 수 없었을 것이다.” “루즈벨트 대통령과 헐 국무장관이 도쿄의 일본 정부는 이 각서의 조항을 수락할 것이다, 또는 이 문서를 일본에 전달하는 것이 전쟁의 서막이 될 리는 없다고 1941년 11월 26일 늦게까지 생각할 정도로 일본의 사정에 어두웠다고는 도저히 생각할 수 없는 일이다.”라는 미국인 역사가의 일절도 인용하고 있다.[64]

; 신부 준페이

내외법정연구회(도쿄재판의 변호 대책으로 발족한 민간 단체)의 연구 자료에 다음과 같은 언급이 있다.

“미국의 당시 요구했던 중국 및 프랑스령 인도차이나에서의 철병, 중경 이외의 중국 정권의 부인, 삼국 동맹으로부터의 이탈…, 어느 경우든 적어도 이 세 가지 조항은, 우리 정부로서는 여러 가지 걸림돌 때문에 수락하는 데 어려움을 느꼈다는 것은 충분히 짐작할 수 있다. 그러나 어려움을 느꼈다는 것은 틀림없지만, 절대 불가능한 것은 아니었다. 이것을 수락하는 것은 외교 정책상 좋지 않다는 정도까지, 할 수 없다는 것은 아니었다. 즉, 유책, 무책의 문제이며, 가능, 불가능의 문제가 아니었다. 피할 길이 없는 것도 아니고, 생각할 여유가 없는 것도 아니었다. 그리고 일단 이것을 수락했다면 긴급 사태는 순식간에 사라졌을 것이므로, 자위의 필요를 불러일으킬 필요가 없는 자유 재량의 여지가 아직 남아 있었던 것이다. 특히 위의 요구를 제기해 온 미국의 11월 26일 대일 제안은 미국의 최후통첩으로 우리 정부는 국내외에 선명했지만, 잘 살펴보면, 해당 제안의 머리에는 텐터티브[tentative(잠정)]라고 적혀 있다. 즉, 하나의 시안이다. 시안이므로, 해당 제안은 최후통첩이 아니라 중간 통첩이다. 그러므로 이에 대해 교섭을 계속하겠다는 의지가 우리 쪽에만 있었다면 할 수 있는 여지가 아직 있었을 것이다.” “모든 것을 자위에 빌미로 삼아 자국의 행동을 변호하는 자위 남용의 종래의 관례를 답습한다면 특별히, 자위의 말을 엄정하게 해석하는 한, 국가의 자위권으로 대동아 전쟁을 변호하는 것은 무리라고 나는 생각합니다.”

; 허버트 페이스

“미국의 이 제안에 언급된 극동의 정치적·사회적 질서는 일본이 지금까지 꿈꿔왔던 것과 정면으로 충돌하는 것이었다. 미국의 구상은 상호 독립과 안전을 존중하고, 상호 평등한 입장에서 접하고 통상을 행하는 질서 있는 평등한 여러 국가 간의 국제 사회였다. 일본의 구상은 일본이 극동의 안정적인 중심이 된다는 것이었다. (중략) 미국의 제안은 일본이 전략이나 무력으로 실시하려고 했던 그러한 모든 것을 거부하려는 것이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도, 이 미국의 제안을 최후통첩으로 간주하는 것은 정치적으로나 군사적으로나 타당하지 않다고 필자는 생각한다.” “미국의 제안에 동의하여 그 정책을 전환한다. 남북 어느 쪽에도 더 이상 무력 진출은 하지 않지만 중국에서의 전쟁은 극력 계속한다. 군대의 철수를 시작하여 이에 대해 중국·미국·영국으로부터 어떠한 반응이 있는지 살펴본다. 어디까지나 승리를 얻기 위한 정책을 강행하는 것이 일본에 허락된 네 가지 수단이었다. 일본은 이 마지막 방법을 택했다.”

; 이리에 아키라

“11월 중순부터 말까지라는 단기간에 일본이나 미국 어느 한쪽이 입장을 변경한다는 것은 거의 있을 수 없었다. 그러한 상황에서 미국이 원점으로 돌아가, 그 대외 정책의 기본 원칙을 헐 노트로 11월 26일에 일본 측에 전달한 것에도 나름의 필요성이 있었다. 워싱턴의 일본 외교단 및 일본 정부는 헐 노트에 의해 미일의 입장 차이를 절감했지만, 그들이 헐 노트를 미국의 최후통첩으로 받아들인 것은 적절하지 않았다. 이 노트가 말하고자 하는 것은, 미국은 중국, 영국, 네덜란드령 동인도를 지원하지만, 일본에도 이 진영에의 참가를 촉구하면서 아시아·태평양 지역의 질서 재편을 목표로 하고 싶다는 것이었다. 그러나 일본이 이를 거부하는 이상, 양국 간에 타협이 있을 수 없었던 것도 사실이다.”

; 나카무라 마사루

“헐 노트는 그때까지의 협상 경과를 무시한 전혀 갑작스러운 것이었다. 일본에 대한 도전장이며 시한 없는 최후통첩이라고 도고가 평한 것도 극론이라고는 할 수 없다.” “이 제안에는 약간의 타협이나 양보도 포함되어 있지 않고, 헐과 루즈벨트도 일본이 이를 거부할 것이라는 것을 충분히 알고 있었다.” “루즈벨트는 대일 전쟁을 모의하고 있었다. 11월 25일의 회의에서 의제로 삼은 것은 평화가 아니라, 어떻게 전쟁을 시작할 것인가의 문제였다.”

; 하타 이쿠히코

헐 노트 등의 외교적 도발로 일본은 개전을 강요당했다는 주장을 “광의의 루즈벨트 음모설”로 하고(“협의의 음모설”은 루즈벨트가 사전에 진주만 공격을 알고 있으면서도 하와이에 알리지 않았다는 진주만 공격 음모론) 헐 노트는 루즈벨트로부터의 “도전장”이지만, 일본도 그 이전에 진주만을 향해 기동 부대를 출발시키고 있으므로, 누가 먼저 도발했는지는 물 뿌리기 논쟁이라고 하고 있다.[65] 또한, 하타는 “미국은 만주사변에 대한 스티븐슨 독트린, 일중전쟁에 대한 “고립 연설” 등 만주사변 이후 일본의 행동에 대해 승인하지 않는다는 것을 계속 표명해 왔다. 헐 노트에서 요구한 만주사변 이후의 기정사실의 전면 포기는, 실력에 의한 저지 행동을 취해 오지 않았던 일본의 행동에 대해 그 청산을 요구한 것에 지나지 않는다.”고도 말하고 있다.[66]

; 모리야마 유우

“일본 측은 헐 노트를 미국이 일본에 내민 ‘조건’으로 해석했다. 중국·프랑스령 인도차이나에서의 철병이든, 무차별 원칙의 적용이든, 예외 없이 실현을 요구하고 있는 것처럼 읽히기 때문이다. 그것은 서로의 조건을 조정하는 외교 협상의 상도에서 벗어나 있었다.” “일본 측이 충격을 받은 것은, 첫째로 그 갑작스러움과 불가사의함이었다. 그것을 보충하는 역할을 맡아야 했던 것이 잠정 협정안이었다. 만약 잠정 협정안이 부수되어 있었다면, 헐 노트가 즉시 일본에 실행을 요구하는 것이 아니라, 미래를 향해 제안된 원칙론임이 비교적 정확하게 이해되었을 것이다. (중략) 잠정 협정안이 제외됨으로써 두드러진 것은 미국의 완고한 태도와 협상 포기 자세였다.” “그러나 미래 구상으로서도, 일본 측이 모두를 그대로 받아들일 수는 없을 것이다. 육군과 미국이라는 강대한 적 사이에서 이중 전선 작전을 강요당하고 있던 도고가 조건 투쟁을 전개하려면, 헐 노트는 너무나 불관용적이었다.”

; 오스기 카즈오

“헐 노트의 성격은 기본적으로 미국 6월 21일안 및 10월 2일안의 연장선상에 있으며, 그 반복에 지나지 않고, 원리 원칙론에서 한 걸음도 양보하지 않았다는 것이다. 그 이념은 미국이 구상한 전후 자유주의 국제 체제의 초안이며, …그 이념에는 일본 군부조차 부정할 수 없는 것이 포함되어 있으며, …문제는, 일본이 요구하고 있는 현실적인 처리 방법에 왜 배려해 주지 않는가 하는 것이었다. 철병 문제도 두 곳의 주둔 요구 중 한 곳(예를 들어 화북·내몽골)이라도 인정해 준다면, 일본의 양보는 기간의 점을 포함하여 충분히 있을 수 있었을 것이다. …아무튼 미국이 상대국의 체면을 배려하려는 자세는 전혀 인정되지 않았다.”

; 존 톨랜드

“사실 헐 노트의 내용에 대해서는 미일 간에 비극적인 오해가 있었다. 헐이 말하는 ‘중국’에는 만주는 포함되지 않고, 우선 그는 처음부터 일본에 의한 만주국의 포기를 생각하고 있지 않았던 것이다. 헐 노트는 이 점을 더 명료하게 해 두어야 했다. 만주국은 그대로라고만 알았다면, 일본 측은 그렇게 절대 받아들일 수 없다고 생각하지 않았을 것이다.”[67]

“필자는 도고 외상에게 가까웠던 몇몇 사람에게, 헐 노트가 ‘중국’의 정의를 더 엄밀하게 했다면 어땠을까 하고 질문해 보았다. …사토는 이마를 치며 ‘그랬습니까! 당신이 만주국을 승인한다고만 해 줬다면 할 노트를 수락할 수 있었습니다.’라고 말했다. …카야(쿄센)는 ‘헐 노트가 만주국을 제외하고 있었다면 개전 결단에는 더 오래 걸렸을 것입니다. 연락 회의에서는 공산주의의 위협을 알면서도 북지에서 철병해야 할지 여부를 놓고 대격론이 벌어졌을 것입니다.’라고 답했다.”[68]

5. 3. 헐 노트와 만주국 문제

헐 노트에서 "중국"이라는 표현에 만주국이 포함되는지 여부는 논란의 대상이었다.[45] 당시 미국 국무장관 코델 헐은 만주 문제에 큰 비중을 두지 않았고, 미일 협상에서도 주요 쟁점이 아니었다. 노무라 기치사부로 대사와 헐 모두 "중국"이라는 단어를 만주를 포함하는 의미로 사용하지 않았고, 국무부 극동부 내에서도 이러한 인식이 일반적이었다. 헐 노트의 초안인 모겐소 안에서도 만주는 중국과 별개의 지역으로 취급되었으며, 11월 22일 안과 24일 안에서는 "중국(만주 제외)"이라고 명시되어 있었다. 그러나 25일 안(헐 노트)에서는 이 문구가 삭제되었는데, 그 이유는 불분명하다.

반면, 일본 정부는 12월 1일 천황주재회의에서 헐 노트에 대해 "왕징웨이 정권 부인"은 언급했지만, 만주국 부인은 언급하지 않았다. 도고 시게노리 외무대신은 미국 안을 수락하면 "만주국의 지위도 필연적으로 동요하게 될 것"이라고 말해, 헐 노트의 "중국"에 만주국이 포함되지 않는다는 전제에 서 있었음을 시사했다.

당시 추밀원 의장 하라 요시미치(原嘉道)는 이 점에 대해 질문했고, 도고는 4월 16일 미국 제안(일미 양해안)에는 만주국 승인 내용이 있었으므로 중국에 만주국이 포함되지 않지만, 상황이 바뀌면서 전언을 부인할 수도 있다고 답했다.

스도 신지는 도고의 답변이 논리적으로 불명확하며, 질문에 대한 답변이 되지 않는다고 평가했다. 그는 군부 관계자들의 증언을 근거로 "'(중국 안에 만주국은) 포함되지 않는다는 전제에 서 있었다'고는 생각되지 않는다"고 주장했다.

그러나 안이 준은 스도가 의존한 군부 관계자들의 증언은 전후의 회상이라는 문제점이 있으며, 당시 외무성의 헐 노트 번역문, 천황주재회의에서의 도고의 설명, 주미 무관의 보고, 도조 히데키 총리의 라디오 방송 등에서는 "만주 포함"이라는 문구를 확인할 수 없다고 반박한다. 그는 헐 노트에서 미국이 만주 철병을 요구했다는 주장은 전후, 특히 도쿄 재판에서 일본 측이 주장한 "헐 노트 개전설"에서 비롯된 것이라고 지적한다.

5. 4. 헐 노트와 소련 음모론

헐 노트를 둘러싸고 "소비에트 연방(이하 소련)이 독소전을 유리하게 이끌기 위해 일본과 미국의 개전을 책략했다"는 "소련 음모론"이 일부 존재한다. 헐 노트 작성 과정에 소련이 개입했다는 소문이 있었다.[65]

헐 노트의 원안이 된 모겐소 사안을 작성한 해리 화이트 재무차관보는 전후 소련의 스파이라는 의혹을 받았다.[69] 화이트는 비미활동위원회에서 의혹을 부정하고 얼마 지나지 않아 급사했다.[69] 화이트 사후에도 소련의 스파이였던 위터커 챔버스가 화이트는 소련의 스파이라고 증언했다.[69] 훗날 공개된 베노나 문서에 따르면, 당시 소련의 첩보 활동은 미국 정부 중추에도 미치고 있으며, 그중에서 화이트는 가장 높은 지위에 있던 인물이었던 것으로 보인다.[70] 다만, 화이트는 미국 공산당으로부터 명령을 받았던 것은 아니고, 어디까지나 자주적인 활동・협력에 그쳤으며, 정보원으로서의 평가도 높지 않았다.[70]

1990년대, 소련 내무인민위원부(NKVD, 후의 KGB)에서 미국부 부부장을 지낸 파블로프가 화이트와 접촉하여 미국의 협상 전략에 관한 정보 등을 제공했던 사실이 밝혀졌다.[65] 소련 측에서는 화이트의 이름에서 "설작전"이라고 불렀다.[65] 파블로프는 "설작전"의 목적이 관동군의 위협 속에서 소련 극동 지역을 일본의 공격과 침공으로부터 방어하는 것이었다고 한다.[65] 구체적으로는 미국의 압력으로 만주 관동군을 철수시키고, 그 대가로 미국이 일본에 경제적 보상을 한다는 것이었으며, 화이트가 쓴 사안에도 이러한 내용이 계승되었다.[65] (파블로프가 직접 화이트와 만난 것은 1941년 5월 한 번뿐이라고 한다.[65]).

하지만, 화이트의 사안은 6월 6일에 헨리 모겐소 재무장관에게 제출되었지만, 이때는 모겐소의 흥미를 끌지 못하고 "설작전"은 헛수고가 되었다.[65] 게다가 모겐소가 11월에 사안을 채택할 때까지 5개월 사이에, 독소전 개시, 일본의 관동군 특수연습 실시 등 소련의 위기는 고조되었으며, 애초에 작전의 성과에는 의문부호가 붙는다.[65]

파블로프의 증언에 따르면, 자신들의 생각이 화이트의 상황 이해와 일치했다고 말하는 것에 그치고 있으며,[65] 소련의 공작에 의해 화이트가 모겐소 사안을 썼는지는 확정적이지 않다.[65] 또한 파블로프가 일미 개전을 시킨다는 생각을 전면적으로 부정하고 있고,[65] 모겐소 사안의 내용이 일본에 온화하다고 할 수 있는 점을 고려하면, 소련이 일미 개전을 책략했다는 "소련 음모론"은 성립하지 않는다.[65] 오히려 파블로프의 증언은, 화이트의 영향력을 과장하여 KGB의 공작이 일본을 남진시켜 소련을 이중 전선 작전의 위기로부터 구했다는 이야기가 되어 있으며, KGB 칭찬의 의미가 강하다.[72]

일부에서는 소련의 개입을 가지고 "헐 노트는 소련제"라고 오해하지만, 화이트가 작성한 것은 원안에 지나지 않고, 헐 노트를 작성한 것은 어디까지나 국무성 극동부이다.[74] 게다가 원안에 있던 온건하고 유연한 조항은 각 부처의 이의에 의해 잇따라 삭제되어, 헐 노트는 원안의 원형을 남기지 않은 것이 되었다.[65]

6. 헐 노트 이후의 경과

일본 함대는 1941년 11월 26일(일본 시간) 진주만 공격을 위해 출항했지만, 더 이상의 외교적 진전은 없었다.[9] 12월 1일, 히로히토 천황은 미국, 영국, 네덜란드 식민지에 대한 공격을 승인했다. 12월 4일, 루스벨트 대통령은 일본이 미국 서해안, 파나마 운하, 하와이 영토에 관심을 보인다는 보고서를 받았다. 12월 7일부터 8일까지 일본은 필리핀, , 웨이크섬, 말레이시아, 싱가포르, 홍콩, 진주만 공격을 시작했다.

1941년 11월 28일, 아사히 신문은 헐 장관이 최후 문서를 전달했다는 소식을 보도했고, 중외상업신보는 미국이 원칙적 주장을 굽히지 않는다는 소식을 보도했다.[46] 교도 통신은 뉴욕 발로 미일 협상이 최종 단계에 도달했고 비관론이 짙다는 미국 신문들의 보도를 전했다.[46] 워싱턴 스타 지는 협상 여지가 남아있지 않다고 논평했고, 뉴욕 선 지는 극동 전쟁을 피하기 위해 관계 각국의 양보가 필요하다고 논평했다.[47] 당시 미국 갤럽 여론조사에서는 전쟁을 각오하고서라도 일본의 발전을 저지해야 한다는 의견이 70%였다.[48]

개전 후, 일본 외무성은 "미일 협상의 경과"를 공표했고, 아사히 신문은 12월 9일, 미국이 중국 철병과 삼국 동맹 무효화에 고집한다는 제목으로 보도했다.[49]

7. 역사적 의의와 교훈

1941년 11월 26일, 미국이 일본에 제시한 '''헐 노트'''는 만주사변 이전 상태로의 복귀를 요구하는 최후통첩과 같은 내용이었다. 일본은 이를 받아들일 수 없었고, 결국 12월 1일 천황회의에서 미국, 영국에 대한 개전을 결정했다. 12월 8일, 일본은 진주만 공격과 말레이 반도 기습 상륙을 감행하며 태평양 전쟁을 일으켰다.

미국은 헐 노트를 통해 일본의 중국 철수를 주장했고, 일본은 이를 굴욕적인 요구로 받아들였다.[1] 당시 미국은 일본이 하와이를 공격할 것이라고 예상하지 못했지만,[1] 일본은 진주만을 기습 공격했고, 이는 미국의 참전을 불러왔다.[1]

헐 노트는 미일 협상의 결렬과 태평양 전쟁 발발의 직접적인 원인이 되었으며, 제2차 세계 대전의 중요한 전환점이 되었다.

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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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5] 서적 時々歴史が動いた27 KTC中央出版 2004-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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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6] 서적 昭和ニュース事典 第7巻 昭和14年ー昭和16年 毎日コミュニケーションズ
[47] 서적 アメリカの対日輿論 大雅堂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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