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3차 하리코프 전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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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제3차 하리코프 전투는 1943년 2월부터 3월까지 동부 전선에서 일어난 전투로, 스탈린그라드 전투 이후 소련군의 공세에 맞서 독일군이 반격하여 하리코프를 재점령한 사건이다. 스탈린의 무리한 공세 계획과 소련군의 전력 약화로 인해 독일군은 '기동 방어' 전술을 통해 소련군을 격파하고 하리코프를 탈환했다. 이 전투에서 소련군은 막대한 인명 피해를 입었으며, 독일군은 전술적 승리를 거두었지만 전략적 우위를 확보하지는 못했다는 평가를 받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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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3차 하리코프 전투 - [전쟁]에 관한 문서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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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요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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분쟁 | 제2차 세계 대전 독소전쟁 |
날짜 | 1943년 2월 19일 ~ 3월 15일 |
장소 | 소련 우크라이나 SSR 하리코프 |
결과 | 독일군의 승리 |
관련 전투 | |
교전 세력 | |
지휘관 | |
소련군 지휘관 | 필리프 골리코프 니콜라이 바투틴 콘스탄틴 로코솝스키 |
독일군 지휘관 | 에리히 폰 만슈타인 파울 하우서 헤르만 호트 에버하르트 폰 마켄젠 |
병력 규모 | |
소련군 병력 | 210,000명 |
독일군 병력 | 70,000명 (반격 이전) 120,000~130,000명 (반격 직후) |
피해 규모 | |
소련군 피해 | 사망 및 실종: 45,219명 부상: 41,250명 총합: 86,469명 사상 |
독일군 피해 | 사망 및 실종: 4,500명 이하 (SS기갑군) 부상: 7,000명 이하 총합: 11,500명 사상 |
지도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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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련군 참여 부대 (전선군) | |
중앙 전선군 | 제1친위군 제2친위군 제3전차군 제4전차군 제6군 제21군 제24군 제40군 제57군 제62군 제63군 제64군 제65군 제66군 제70군 제16공군 |
독일군 참여 부대 | |
제4기갑군 | 제2SS기갑군단 제1SS기갑사단 제2SS기갑사단 제3SS기갑사단 제48기갑군단 그로스도이칠란트 제6기갑사단 제11기갑사단 제17기갑사단 |
제1기갑군 | 제24기갑군단 제5SS기갑사단 제17기갑사단 제23기갑사단 제30군단 제38보병사단 제62보병사단 제387보병사단 제40군단 제46보병사단 제256보병사단 제333보병사단 제57군단 제15보병사단 제198보병사단 제328보병사단 |
항공 지원 | 제4항공대 제6항공대 |
2. 배경
1943년 초, 스탈린그라드 전투에서 소련군이 반격하여 독일 제6군이 궤멸되면서 동부 전선에서의 전황은 완전히 뒤바뀌었다. 1942년 11월까지만 해도 캅카스 북부까지 진출했던 독일군은 이제 역으로 수세에 몰렸다.[4]
콘스탄틴 로코솝스키가 지휘하는 돈 전선의 소련 군대가 독일군을 공격하고 있을 때, 스탈린그라드 전투에서의 잇따른 성공으로 고무된 스탈린과 붉은 군대 수뇌부(스타프카)는 보로네시에서 로스토프까지, 즉 소련-독일 전선의 남부 전체를 아우르는 새로운 공세를 계획하고 있었다.[1] 그러나 이는 당시 소련군의 작전 역량을 훨씬 초과하는 것이었다.[1]
게오르기 주코프 및 알렉산드르 바실렙스키와 같은 고위급 지휘관들과 더불어 니콜라이 바투틴을 비롯한 최전선의 사령관들마저도 이와 같은 낙관주의에 빠져버렸다. 소련군은 하리코프와 벨고로드, 쿠르스크에 대한 공세 작전인 별 작전과 질주 작전을 구상했다.[1]
2. 1. 전황의 반전: 스탈린그라드 전투
1943년 초, 스탈린그라드 전투에서 소련군이 반격하여 독일 제6군이 궤멸되면서 동부 전선에서의 전황은 완전히 뒤바뀌었다. 1942년 11월까지만 해도 캅카스 북부까지 진출했던 독일군은 이제 역으로 수세에 몰렸다.[4] 1943년 2월 2일 프리드리히 파울루스를 비롯한 제6군 사령관들이 항복했으며, 그와 함께 약 9만 명의 독일 병력들이 소련의 포로가 되었다.[4][5] 이를 제외해도 스탈린그라드 전투에서 독일군이 입은 총 병력 손실은 12만에서 15만 명이 넘어갔고,[5] 시각을 더 넓혀보면 1942년 당시 독일군 사상자는 총합 190만 명에 달했다. 그리고 이제 동부 전선에 남아있는 독일 병력은 47만 명에 불과했다. 기갑의 손실 역시 극심했는데, 바르바로사 작전 초기에 3,300대에 달했던 전차 역시 1943년 초에는 구형까지 포함하여 495대밖에 남아 있지 않을 정도였다.2. 2. 낙관주의에 빠진 소련군
콘스탄틴 로코솝스키가 지휘하는 돈 전선의 소련 군대가 독일군을 공격하고 있을 때, 스탈린그라드 전투에서의 잇따른 성공으로 고무된 스탈린과 붉은 군대 수뇌부(스타프카)는 보로네시에서 로스토프까지, 즉 소련-독일 전선의 남부 전체를 아우르는 새로운 공세를 계획하고 있었다.[1] 그러나 이는 당시 소련군의 작전 역량을 훨씬 초과하는 것이었는데, 소련군의 회복 속도가 아무리 빨라도 전사자 50만의 피해는 쉽게 복구될 수 있는 것이 아니었고 전투 효율성 역시 아직은 독일군에 크게 미치지 못하는 상황이었다.[1]게오르기 주코프 및 알렉산드르 바실렙스키와 같은 고위급 지휘관들과 더불어 니콜라이 바투틴을 비롯한 최전선의 사령관들마저도 이와 같은 낙관주의에 빠져버렸다. 1942년 겨울, 총반격을 지시했을 때 주코프와 바실렙스키는 강력히 반대했다가 둘 다 좌천된 과거가 있었으나, 1943년 겨울에는 이 둘조차도 남부전선에서 독일군을 몰아낼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하고 있었다.[1] 이들이 오판을 깨닫건 말건 소련군은 하리코프와 벨고로드, 쿠르스크에 대한 공세 작전인 별 작전과 질주 작전을 구상했다. 우선 별 작전으로 보로네시 전선군이 독일 잔존 B집단군을 격파하여 하리코프 및 쿠르스크로 나아가는 사이, 질주 작전을 통해 남서전선군과 남부전선군이 후방의 돈 집단군을 분쇄하여 드네프르 강 너머로 독일군을 몰아내는 것이 목표였다.[1]
3. 전력 비교
보로네시-하리코프 공세 작전에 참여한 소련군은 1943년 1월 13일부터 4월 3일까지 대략 21만 명이었다.[21] 당시 전선에 투입된 독일군은 2,988,000명, 소련군은 부상자 659,000명을 제외하고 총 6,100,000명이었다. 소련군은 2월 초 공세에 독일군보다 약 2배 많은 인원을 동원했지만, 과도한 진격과 공세 과정에서 누적된 사상자로 인해 독일군 반격 시점에는 오히려 독일군이 전차와 인원 면에서 우세했다. 연료 및 기타 보급 상황도 독일군이 앞섰다.[21]
3. 1. 독일군

에리히 폰 만슈타인은 반격 당시 48기갑군단, SS기갑군,[7] 제1기갑군단으로 구성된 제4 기갑사단의 지원을 받을 수 있었다.[6] 48기갑군단은 제6, 제11, 제17 기갑사단으로, SS 기갑군단은 제1 SS, 제2 SS, 제3 SS 기갑사단으로 편성되었다.[7] 2월 초 SS기갑군의 총 병력은 약 2만 명이었다. 제4기갑군과 제1기갑군은 남부 돌출부에, SS기갑군은 돌출부 북쪽 가장자리를 따라 남부 집단군의 북부 전선에 배치되었다.[6]
전투 개시 당시 독일군 병력은 대략 16만 명으로, 소련군(21만 명)보다 열세였다. 그러나 1942년 6월부터 1943년 2월까지 80만 명의 신병을 모집, 1943년 5월경에는 950만 명을 넘어 동부 전선 개전 이후 최대 병력을 보유했다.
1943년, 독일 기갑부대는 큰 피해를 보아 기갑사단 하나에 전차 100대를 보유한 경우는 드물었고, 평균 70~80대만 가용할 수 있었다. 하인츠 구데리안은 기계화부대 강화를 추진했으나, 6월이 되어서야 각 기갑사단은 100~130대의 전차를 보유할 수 있었다. SS 사단은 보통 150여 대의 전차, 자주돌격포 대대, 보병, 정찰병, 하프트랙 등을 보유했고 총원은 19,000명이었다.[8] 당시 독일 기갑부대는 3호 전차와 4호 전차를 주로 사용했지만, 일부 SS 다스 라이히 사단에는 티거 전차가 있기도 했다.
제4기갑군은 헤르만 호트, 제1기갑군은 에버하르트 폰 마켄젠이 지휘했다.[9] 제6, 제11, 제17기갑사단은 각각 발터 폰 훈너스돌프, 헤르만 발크,[10] 프리돌린 폰 센게 운트 에텔린이 지휘했다.[11] SS 기갑군단은 파울 하우서가 지휘했으며 휘하에는 SS 사단 토텐코프도 있었다.[12]
3. 2. 소련군
콘스탄틴 로코솝스키가 지휘하는 돈 전선의 소련 군대가 독일군을 공격하고 있을 때, 스탈린그라드 전투에서의 잇따른 성공으로 고무된 스탈린과 붉은 군대 수뇌부(스타프카)는 보로네시에서 로스토프까지ㅡ 즉 소련-독일 전선의 남부 전체를 아우르는 새로운 공세를 계획하고 있었다.[21] 그러나 이는 당시 소련군의 작전 역량을 훨씬 초과하는 것이었는데, 소련군의 회복 속도가 아무리 빠르다 해도 전사자 50만의 피해는 쉽게 복구될 수 있는 것이 아니었고 전투 효율성 역시 아직은 독일군에 크게 미치지 못하는 상황이었다.게오르기 주코프 및 알렉산드르 바실렙스키와 같은 고위급 지휘관들과 더불어 니콜라이 바투틴을 비롯한 최전선의 사령관들마저도 이와 같은 낙관주의에 빠져버렸다. 1942년 겨울, 총반격을 지시했을 때 주코프와 바실렙스키는 강력히 반대했다가 둘 다 좌천된 과거가 있었으나, 1943년 겨울에는 이 둘조차도 남부전선에서 독일군을 몰아낼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하고 있던 것이다. 이들이 오판을 깨닫건 말건 소련군은 하리코프와 벨고로드, 쿠르스크에 대한 공세 작전인 별 작전과 질주 작전을 구상한다. 우선 별 작전으로 보로네시 전선군이 독일 잔존 B집단군을 격파하여 하리코프 및 쿠르스크로 나아가는 사이, 질주 작전을 통해 남서전선군과 남부전선군이 후방의 돈 집단군을 분쇄하여 드네프르 강 너머로 독일군을 몰아내는 것이 목표였다.
1943년 1월 13일부터 4월 3일까지, 대략 21만 명의 소련군이 보로네시-하리코프 공세 작전에 참여했다.[21] 당시 전선에 투입된 독일군의 총 숫자는 2,988,000명이었던 것에 비해, 전선에 투입된 소련군은 총 6,100,000명(부상자 659,000명 제외)이었다. 그 결과 소련군은 2월 초의 공세에 독일군보다 약 2배 더 많은 인원을 동원할 수 있었다. 하지만 소련의 과도한 진격, 그리고 공격적인 공세 과정에서 누적된 사상자로 인해 독일의 반격이 시작될 무렵에는 독일군이 오히려 전차와 인원 측면에서 소련군을 압도하고 있었다. 연료 및 기타 보급 상황 역시 독일군이 소련군보다 훨씬 앞섰다.
1943년 1월 말과 2월 초에 걸쳐 전선 남부에 대대적인 공세를 감행한 이래로, 브랸스크와 보로네시에 남서부 전선군이 집결하기 시작했다.[6] 이들은 각각 막스 레이테르,[13] 필리프 골리코프,[9] 니콜라이 바투틴의 지휘를 받고 있었다.[14] 2월 25일부터는 콘스탄틴 로코솝스키가 지휘하는 중부 집단군 또한 공세에 참여하였다.[6] 레이테르가 지휘하는 군대는 보로네시와 쿠르스크 맞은 편에 배치되었고, 남서부 전선군은 상대방과 정면으로 마주보게 배치되었으며, 중부 전선군은 브랸스크-보로네시 전선 사이에 있다가 독일군에 간격이 생기면 곧장 파고들 수 있도록 배치되었다. 그 숫자는 대략 50만 명 정도 되며, 독일 국방군의 반격이 시작된 이래로는 약 34만 6,000명의 소련군이 하리코프 방어에 참여하였다.
다만 독일과 같이 소련군도 전쟁을 거치면서 심각하게 약화된 상태였다. 일례로, 소련 제40군 내의 사단들은 평균 3,500~4,000명의 병력을 보유했던 반면에, 제69군 내의 사단들은 평균 1,000명에서 1,500명이 채 못되었다. 일부 사단들은 화력 지원에 필수적인 박격포가 25~50개밖에 되지 못했다. 인력과 장비 문제가 심각하자, 바투틴의 남서부 전선군은 최소 19,000명 이상의 병력과 300대의 전차를 지원 요청했지만, 1943년에 작전이 시작된 이래로 보로네시 전선에 도달하는 보급품은 요구치보다 훨씬 부족했다.[15] 뿐만 아니라, 만슈타인이 반격에 나섰을 때 남서부 전선군은 더 이상의 자원을 제공할 수도 없을 정도로 과도하게 늘어져 있었다. 루드비크 스보보다가 지휘하는 체코슬로바키아 제1독립야전대대 또한 소련군 휘하에서 활동했으며 소콜로프 전투에서 꽤나 활약했다.
4. 전개
1943년 1월, 필리프 골리코프가 이끄는 소련군 보로네시 전선군이 별 작전을 개시했다. 키릴 모스칼렌코 중장의 제40군과 류발코 중장의 제3전차군이 북쪽에서 벨고로드와 하리코프를 공격하여 헝가리 제7군과 이탈리아 알파니 군단을 격파한 후, 제3전차군은 빠르게 진격했다.[3]
1월 28일, 소련 제40군, 제3전차군, 제69군은 독일 제3군과 제3군단의 약한 남쪽 측면을 돌파했다. 제3전차군은 하르코프로 진격했고, 제40군은 벨고로드를 공격했다. 막시밀리안 폰 바이흐스는 후베르트 란츠 산악대장의 란츠 분견군에게 하리코프 북방면 방어를 지시했지만, 4개 사단만으로는 역부족이었다. 유일한 희망은 파울 하우서의 SS 기갑군단으로, LSSAH, 다스 라이히, 토텐코프 사단이 편제되어 있었다.[3]
2월 2일, 질주 작전이 시작되면서 남서전선군도 군사행동에 나섰다. 포포프 기동집단이 돈 강을 넘어 독일군 후방을 압박했고, 제1근위전차군단과 제25전차군단이 지원했다. 2월 4일, 제69군은 대독일 기갑척탄병사단을 뚫고 볼찬스크에 도착하여 하리코프를 남쪽에서 압박했다.
2월 6일, 아돌프 히틀러는 란츠에게 SS기갑군단을 이용해 반격할 것을 명령했지만, 2월 10일 벨고로드가 함락되면서 이는 불가능했다. 파울 하우서는 명령을 거부했고, 바이흐스는 히틀러에게 하리코프 포기를 요청했지만, 히틀러는 그를 경질하고 B 집단군을 해체하여 남부집단군을 재창설, 사령관에 에리히 폰 만슈타인을 임명했다.
2월 8일, 소련군 제2근위군과 제28군이 접근하자 제4기갑군과 홀리트 분견군은 로스토프에서 철수했다. 2월 9일, 소련 제6군, 제3전차군, 제12전차군단은 도네츠 강 도하에 성공하여 하리코프 동쪽의 LSSAH 방어선을 공격했다. LSSAH는 강력하게 저항하여 제3전차군의 진격을 늦추고 14일에 하르코프 시로 철수했다. 그로스도이칠란트 사단과 168사단도 벨고로드에서 철수했지만, 그로스도이칠란트 사단은 공격을 받아 남부로 후퇴했다.
2월 10일, 모스칼렌코의 제40군이 벨고로드를 점령하고 도네츠 강 도하 준비를 마쳤다. 란츠는 하리코프 동부의 독일군이 포위되는 것을 막기 위해 LSSAH, 다스 라이히, 제168사단을 하리코프로 철수시켰고, 대독일사단은 벨고로드와 하리코프를 잇는 도로에 방어선을 구축했다.
2월 11일, LSSAH 사단과 다스 라이히 사단 소속 기갑척탄연대는 하리코프 남동쪽에서 소련군에게 공격당해 3일 동안 48km를 후퇴했다. 소련 제6기병군단은 독일 전차들을 격파했다. 2월 12일, 포포프 기동집단이 크라스노아르메스카야에 도달했다. 2월 15일, 니콜라이 바투틴은 파블로그라드를 거쳐 드니프르 강 상류의 자포리자를 목표로 진격하여 하리코프 후방을 장악하려 했다.
2월 13일, 소련 제4전차군단은 하르코프 북쪽 외곽에 방어선을 구축했다. 란츠는 반격을 명령하고 시간을 벌도록 했다. 다음날, 그로스도이칠란트와 SS들은 소련 제40군의 공격을 받았다. 소련 제183소총사단이 도시 북부 수미 인근에 도착했고, 제3전차군은 하리코프 외곽에 10km의 회랑을 개척했다.
2월 14일, 로스토프에서 소련 남부전선군 제2근위군, 제28군이 독일 제1기갑군 잔존 병력과 시가전을 벌여 로스토프를 탈환했다. 클라이스트의 A 집단군은 무사히 후퇴했다. 2월 15일, SS 군단의 기갑부대들은 하리코프로 귀환했다. 독일군은 대독일사단을 서쪽, 다스 라이히는 북쪽, LSSAH 1개 연대는 동쪽, 320사단은 남동쪽에 배치하여 방어했다.
SS기갑군단장 파울 하우서는 하리코프를 빠져나가겠다고 란츠에게 통보했다. 란츠는 탈출 중지를 지시했지만, 소련군이 도심으로 진입하자 후퇴를 승인했다. 다스 라이히 사단이 먼저 후퇴하자 소련군이 쇄도했고, 다스 라이히 소속 기갑척탄병들은 소련군 제160소총사단과 제16전차군단을 막지 못했다.
2월 15일, 2개의 새로운 소련 기갑부대가 충원되어 로스토프로 향하는 마지막 통로를 봉쇄하고, 독일 남부집단군과 제4항공함대 사령부가 있는 자포리자를 위협했다. 히틀러는 도시 사수를 명령했지만, 2월 16일 하리코프는 붉은 군대에게 함락되었다. 만슈타인은 '하리코프에 대한 즉각적인 반격은 성과가 없을 것이며, 잠시 후퇴했다가 기갑부대로 얇아진 소련군의 측면을 공격하면 최종적으로 도시를 탈환할 수 있을 것'이라고 히틀러를 설득했다.[16][17]
2월 16일, 소련군은 하리코프를 탈환했다. 히틀러는 란츠를 해임하고 베르너 켐프 대장을 임명했다. 2월 17일, 히틀러는 만슈타인에게 불만을 제기하기 위해 자포리자로 갔다. 만슈타인은 다시 한번 '하리코프에 대한 즉각적인 반격은 성과가 없을 것이며, 잠시 후퇴했다가 기갑부대로 얇아진 소련군의 측면을 공격하면 최종적으로 도시를 탈환할 수 있을 것'이라고 히틀러를 설득했다.[18][19] 히틀러는 사태의 심각성을 깨닫고 후퇴에 대해선 란츠의 해임으로 마무리하고, 하우서의 처벌과 현지사수 명령을 철회했다.
2월 18일, 소련 제60군은 독일 제2군 제4기갑사단을 쿠르스크에서 밀어냈고, 제13군은 독일 제2기갑군을 측면으로 이동시켰다. 소련군은 공세를 개시했다. 하리토노프 중장의 소련 제6군은 켐프 분견군과 제1기갑군 사이를 갈라놓기 시작했다. 소련 제6군은 SS 기갑군단의 배후인 크라스노그라드를 향해 접근했다. 남서전선군 휘하 쿠즈네초프 중장의 제1근위군과 포포프 전차군이 파블로그라드에서 철도망을 차단하고, 남부 집단군 사령부 동쪽 약 45km 지점까지 진출했다.
독일 제40기갑군단의 감청반은 소련군이 보급 부족으로 지원을 요청하는 무전을 감청했다. 만슈타인은 이 정보를 바탕으로 기동 방어 작전과 하리코프 역탈환 계획을 설명하며 히틀러를 설득했다.
2월 19일, 소련 제1근위군과 제6군의 기갑부대가 자포리자로 계속 진격했다. 히틀러는 만슈타인에게 자유로운 작전권을 주고 떠났다. 소련군은 보로실로프그라드와 이줌을 탈환했다.
만슈타인은 제3SS기갑사단으로 개편된 SS기갑군을 제4기갑군과 함께 지휘하게 되었고, 히틀러는 7개 기갑, 기갑척탄병 사단을 남부집단군에 배치시켜 주었다. 만슈타인은 남부집단군, 리히트호펜의 제4항공군의 재정비를 통해 하루 평균 1,000소티의 항공 지원을 받을 수 있게 되었다. 1943년 2월 20일, 붉은 군대가 자포리자 인근에 도달하면서 독일군의 반격이 시작되었다.[21]
4. 1. 소련군의 별 작전 개시

1943년 1월, 필리프 골리코프가 지휘하는 소련군 보로네시 전선군이 별 작전을 개시한다. 골리코프는 키릴 모스칼렌코 중장의 제40군과 류발코 중장의 제3전차군에게 북쪽에서 벨고로드와 하리코프를 공격하라고 명령한다. 모스칼렌코 부대가 하리코프 남서쪽으로 진격하여 헝가리 제7군, 이탈리아 알파니 군단을 공격했고, 이후 제3전차군이 빠르게 진격했다.
1월 28일, 소련 제40군, 제3전차군, 제69군은 독일 제3군과 제3군단의 얇은 남쪽 측면을 돌파했다. 제3전차군은 곧바로 하르코프로 진격했고, 제40군은 벨고로드를 공격하기 시작했다. 소련군이 하리코프 일대까지 진격하자, B 집단군 사령관 막시밀리안 폰 바이흐스는 후베르트 란츠 산악대장이 이끄는 란츠 분견군을 급히 편성하여 4개 사단만으로 하리코프 북쪽 방어를 맡겼다. 또한 최정예 부대인 그로스도이칠란트 사단을 벨고로드로 이동시켰다. 그러나 란츠 분견군만으로는 4개 야전군을 막는 것은 불가능했다. 유일한 변수는 파울 하우서의 SS 기갑군단으로, 당시 LSSAH, 다스 라이히, 토텐코프 사단이 편제되어 있었다.[3]
2월 2일, 질주 작전이 시작되면서 남서전선군도 군사 행동을 개시했다. 4개 전차군단, 2개 전차여단, 3개 소총병 군단, 2개 스키 여단으로 구성된 포포프 기동집단이 2월 초 돈 강을 넘어 독일군 후방을 압박하기 시작했다. 제1근위전차군단과 제25전차군단은 예비대로서 포포프 기동집단을 지원했다. 2월 4일, 제69군이 독일의 정예부대인 대독일 기갑척탄병사단 때문에 진격이 늦어졌지만, 결국 목표였던 볼찬스크에 도착하여 하리코프를 남쪽에서 압박하기 시작했다.
2월 6일, 아돌프 히틀러는 란츠에게 SS기갑군단을 이용하여 하리코프 북쪽으로 진격하는 보로네시 전선군에게 반격하고, 동시에 남서전선군에 대해 역공을 가하라고 명령했다. 그러나 2월 10일에 벨고로드가 함락되고 서쪽의 폴타바를 향한 도로를 제외하고 3면이 차단되었기 때문에 이는 무리한 명령이었다. 란츠는 이 명령에 복종하려 했지만, 파울 하우서는 명령을 거부했고 란츠 또한 반격 계획을 철회한 뒤 바이흐스에게 상황을 설명했다. 바이흐스는 히틀러에게 하리코프를 포기할 것을 요청했지만 히틀러는 그를 경질했다. 2월 13일, B 집단군을 해체하고 돈 집단군과 합쳐 남부집단군을 재창설하고, 새로운 사령관으로 독일군의 명장 에리히 폰 만슈타인을 임명했다.
4. 2. 소련군의 하리코프 탈환과 만슈타인의 등장
1943년 1월, 필리프 골리코프가 이끄는 소련군 보로네시 전선군이 별 작전을 개시했다. 키릴 모스칼렌코 중장의 제40군과 류발코 중장의 제3전차군이 북쪽에서 벨고로드와 하리코프를 공격하여 헝가리 제7군과 이탈리아 알파니 군단을 격파한 후, 제3전차군이 빠르게 진격했다.[3]1월 28일, 소련 제40군, 제3전차군, 제69군은 독일 제3군과 제3군단의 약한 남쪽 측면을 돌파했다. 제3전차군은 하르코프로 진격했고, 제40군은 벨고로드를 공격했다. 막시밀리안 폰 바이흐스 남작은 후베르트 란츠 산악대장의 란츠 분견군에게 하리코프 북방면 방어를 지시했지만, 4개 사단만으로는 역부족이었다. 유일한 희망은 파울 하우서의 SS 기갑군단으로, LSSAH, 다스 라이히, 토텐코프 사단이 편제되어 있었다.[3]
2월 2일, 질주 작전이 시작되면서 남서전선군도 군사행동에 나섰다. 포포프 기동집단이 돈 강을 넘어 독일군 후방을 압박했고, 제1근위전차군단과 제25전차군단이 지원했다. 2월 4일, 제69군은 대독일 기갑척탄병사단을 뚫고 볼찬스크에 도착하여 하리코프를 남쪽에서 압박했다.
2월 6일, 아돌프 히틀러는 란츠에게 SS기갑군단을 이용해 반격할 것을 명령했지만, 2월 10일 벨고로드가 함락되면서 이는 불가능한 명령이었다. 파울 하우서는 명령을 거부했고, 바이흐스는 히틀러에게 하리코프 포기를 요청했지만, 히틀러는 그를 경질하고 B 집단군을 해체하여 남부집단군을 재창설, 사령관에 에리히 폰 만슈타인을 임명했다.
2월 8일, 소련군 제2근위군과 제28군이 접근하자 제4기갑군과 홀리트 분견군은 로스토프에서 철수했다. 다음날인 2월 9일, 소련 제6군, 제3전차군, 제12전차군단은 도네츠 강 도하에 성공하여 하리코프 동쪽의 LSSAH 방어선을 공격했다. LSSAH는 강력하게 저항하여 제3전차군의 진격을 늦추고 14일에 하르코프 시로 철수했다. 그로스도이칠란트 사단과 168사단도 벨고로드에서 철수했지만, 그로스도이칠란트 사단은 공격을 받아 남부로 후퇴했다.
2월 10일, 모스칼렌코의 제40군이 벨고로드를 점령하고 도네츠 강 도하 준비를 마쳤다. 란츠는 하르코프 동부의 독일군이 포위되는 것을 막기 위해 LSSAH, 다스 라이히, 제168사단을 하리코프로 철수시켰고, 대독일사단은 벨고로드와 하리코프를 잇는 도로에 방어선을 구축했다.
2월 11일, LSSAH 사단과 다스 라이히 사단 소속 기갑척탄연대는 하리코프 남동쪽에서 소련군에게 공격당해 3일 동안 48km를 후퇴했다. 소련 제6기병군단은 독일 전차들을 격파했다. 2월 12일, 포포프 기동집단이 크라스노아르메스카야에 도달했다. 2월 15일, 니콜라이 바투틴은 파블로그라드를 거쳐 드니프르 강 상류의 자포리자를 목표로 진격하여 하리코프 후방을 장악하려 했다.
2월 13일, 소련 제4전차군단은 하르코프 북쪽 외곽에 방어선을 구축했다. 란츠는 반격을 명령하고 시간을 벌도록 했다. 다음날, 그로스도이칠란트와 SS들은 소련 제40군의 공격을 받았다. 소련 제183소총사단이 도시 북부 수미 인근에 도착했고, 제3전차군은 하리코프 외곽에 10km의 회랑을 개척했다.
2월 14일, 로스토프에서 소련 남부전선군 제2근위군, 제28군이 독일 제1기갑군 잔존 병력과 시가전을 벌여 로스토프를 탈환했다. 클라이스트의 A 집단군은 무사히 후퇴했다. 2월 15일, SS 군단의 기갑부대들은 하리코프로 귀환했다. 독일군은 대독일사단을 서쪽, 다스 라이히는 북쪽, LSSAH 1개연대는 동쪽, 320사단은 남동쪽에 배치하여 방어했다.
SS기갑군단장 파울 하우서는 하리코프를 빠져나가겠다고 란츠에게 통보했다. 란츠는 탈출 중지를 지시했지만, 소련군이 도심으로 진입하자 후퇴를 승인했다. 다스 라이히 사단이 먼저 후퇴하자 소련군이 쇄도했고, 다스 라이히 소속 기갑척탄병들은 소련군 제160소총사단과 제16전차군단을 막지 못했다.
2월 15일, 2개의 새로운 소련 기갑부대가 충원되어 로스토프로 향하는 마지막 통로를 봉쇄하고, 독일 남부집단군과 제4항공함대 사령부가 있는 자포리자를 위협했다. 히틀러는 도시 사수를 명령했지만, 2월 16일 하리코프는 붉은 군대에게 함락되었다. 만슈타인은 '하리코프에 대한 즉각적인 반격은 성과가 없을 것이며, 잠시 후퇴했다가 기갑부대로 얇아진 소련군의 측면을 공격하면 최종적으로 도시를 탈환할 수 있을 것'이라고 히틀러를 설득했다.[16][17]
2월 16일, 소련군은 하리코프를 탈환했다. 히틀러는 란츠를 해임하고 베르너 켐프 대장을 임명했다. 2월 17일, 히틀러는 만슈타인에게 불만을 제기하기 위해 자포리자로 갔다. 만슈타인은 다시 한번 '하리코프에 대한 즉각적인 반격은 성과가 없을 것이며, 잠시 후퇴했다가 기갑부대로 얇아진 소련군의 측면을 공격하면 최종적으로 도시를 탈환할 수 있을 것'이라고 히틀러를 설득했다.[18][19] 히틀러는 사태의 심각성을 깨닫고 후퇴에 대해선 란츠의 해임으로 마무리하고, 하우서의 처벌과 현지사수 명령을 철회했다.
2월 18일, 소련 제60군은 독일 제2군 제4기갑사단을 쿠르스크에서 밀어냈고, 제13군은 독일 제2기갑군을 측면으로 이동시켰다. 소련군은 공세를 개시했다. 하리토노프 중장의 소련 제6군은 켐프 분견군과 제1기갑군 사이를 갈라놓기 시작했다. 소련 제6군은 SS 기갑군단의 배후인 크라스노그라드를 향해 접근했다. 남서전선군 휘하 쿠즈네초프 중장의 제1근위군과 포포프 전차군이 파블로그라드에서 철도망을 차단하고, 남부 집단군 사령부 동쪽 약 45km 지점까지 진출했다.
독일 제40기갑군단의 감청반은 소련군이 보급 부족으로 지원을 요청하는 무전을 감청했다. 만슈타인은 이 정보를 바탕으로 기동 방어 작전과 하리코프 역탈환 계획을 설명하며 히틀러를 설득했다.
2월 19일, 소련 제1근위군과 제6군의 기갑부대가 자포리자로 계속 진격했다. 히틀러는 만슈타인에게 자유로운 작전권을 주고 떠났다. 소련군은 보로실로프그라드와 이줌을 탈환했다.
만슈타인은 제3SS기갑사단으로 개편된 SS기갑군을 제4기갑군과 함께 지휘하게 되었고, 히틀러는 7개 기갑, 기갑척탄병 사단을 남부집단군에 배치시켜 주었다. 만슈타인은 남부집단군, 리히트호펜의 제4항공군의 재정비를 통해 하루 평균 1,000소티의 항공 지원을 받을 수 있게 되었다. 1943년 2월 20일, 붉은 군대가 자포리자 인근에 도달하면서 독일군의 반격이 시작되었다.[21]
4. 3. 소련군의 작전 규모 확대
콘스탄틴 로코솝스키가 지휘하는 돈 전선의 소련 군대가 독일군을 공격하고 있을 때, 스탈린그라드 전투에서의 잇따른 성공으로 고무된 스탈린과 붉은 군대 수뇌부(스타프카)는 보로네시에서 로스토프까지, 즉 소련-독일 전선의 남부 전체를 아우르는 새로운 공세를 계획하고 있었다.[1] 그러나 이는 당시 소련군의 작전 역량을 훨씬 초과하는 것이었는데, 소련군의 회복 속도가 아무리 빠르다 해도 전사자 50만의 피해는 쉽게 복구될 수 있는 것이 아니었고 전투 효율성 역시 아직은 독일군에 크게 미치지 못하는 상황이었다.[2]게오르기 주코프 및 알렉산드르 바실렙스키와 같은 고위급 지휘관들과 더불어 니콜라이 바투틴을 비롯한 최전선의 사령관들마저도 이와 같은 낙관주의에 빠져버렸다. 1942년 겨울, 총반격을 지시했을 때 주코프와 바실렙스키는 강력히 반대했다가 둘 다 좌천된 과거가 있었으나, 1943년 겨울에는 이 둘조차도 남부전선에서 독일군을 몰아낼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하고 있었다. 소련군은 하리코프, 벨고로드, 쿠르스크에 대한 공세 작전인 '별 작전(Операция Звезда)'과 '질주 작전(Операция Галоп)'을 구상했는데, 우선 별 작전으로 보로네시 전선군이 독일 잔존 B집단군을 격파하여 하리코프 및 쿠르스크로 나아가고, 질주 작전을 통해 남서전선군과 남부전선군이 후방의 돈 집단군을 분쇄하여 드네프르 강 너머로 독일군을 몰아내는 것이 목표였다.
1943년 1월, 필리프 골리코프의 보로네시 전선군이 처음으로 별 작전을 개시한다. 골리코프는 키릴 모스칼렌코 중장의 제40군과 류발코 중장의 제3전차군으로 하여금 북쪽에서 벨고로드와 하리코프에 대한 공격을 명령했다.
1월에 시작한 하리코프, 로스토프에 대한 공세가 성공적으로 돌아가자 스탈린과 스타프카의 기대는 점점 더 커지기 시작했다. 특히 독일군 후방을 향한 과감한 진격으로 남부집단군이 붕괴 직전 상태에 이르는 것처럼 보이자, 스타프카는 토성 작전의 목표를 훨씬 거대하게 만들어 그 대상을 독일 중부집단군까지 확대했다. 이에 따라 스탈린 및 주코프는 2월 2일, 스탈린그라드의 독일 제6군이 항복하자 해당 방면에 묶여있던 병력들을 즉시 재배치시켰다. 콘스탄틴 로코솝스키가 지휘하는 돈 전선군 사령부와 예하 소총군 중에 제65군, 제21군이 새롭게 편성된 제2전차군, 제70군과 합류하여 보로네시-리브니 지역으로 이동할 것을 명령받았으며 돈 전선군은 중부 전선군으로 개칭되었다. 제16항공군과 제2근위기병군단도 이 지역으로 재배치되었다. 나머지 돈 전선군의 제24군, 제64군, 제66군은 스탈린그라드 지역에서 재편성을 거치고 바투틴이나 로코솝스키의 명령에 따라 어디에라도 투입되기 위한 준비 태세를 갖추고 있었다.
확대된 별 작전은 독일 중부집단군에 대해 연속적으로 3개의 공세 작전을 펼치기로 계획되어 있었다.
'''1단계''': 2월 12일에 서부 전선군과 브랸스크 전선군이 협격하여 오룔 돌출부의 독일군을 포위.
'''2단계''': 2월 17일에서 2월 25일 사이에 이들 2개 전선군이 새롭게 투입된 중부 전선군과 조우하여 브랸스크 일대의 독일군을 일소하고, 데스나강을 넘을 공고한 교두보를 확보.
'''3단계''': 25일에서 3월 중순 사이에 칼리닌 전선군과 서부 전선군이 스몰렌스크를 점령하고, 남쪽의 이웃 전선군과 협동하여 르제프-뱌지마 돌출부의 독일 중부집단군을 섬멸.
이 모든 공세들은 보로네시 전선군과 남서 전선군의 승전 시기와 맞아떨어지도록 조정되었다. 이런 작전에 근거해 소련군은 3월 중순에 드니프로 강 서안까지 진출하는 것을 상정하고 있었다.
그러나 계획을 세우는 것과 실제로 시행하는 것은 전혀 별개의 문제였다. 로코솝스키의 충격 집단은 재편성에 불과 6일의 시간밖에 배당받지 못했고, 새로운 지역으로 공세를 준비하는 데 5일만 받았다. 제2전차군과 제2근위기병군단은 이미 리브니 지역에 집결해 있었으나, 제70군은 겨울의 러시아 도로를 200킬로미터 이상 이동해야 했고 제21군, 제65군은 스탈린그라드에서 철도, 도로를 통한 장거리 이동을 감행해야 했다. 하지만 초봄의 눈과 겹친 라스푸티차가 수시로 발생해 집결지에서 공격 예정지로 이동하는 도로조차 심각한 상태가 되어있었고 스탈린그라드로부터 북쪽으로는 오직 단선의 철도선 하나만 존재했기 때문에, 위의 계획일정은 극히 허무맹랑한 것이었다. 로코솝스키도 이 계획에 반대를 표시했지만 상부의 명령에는 단지 따를 수 밖에 없었다. 이와 같은 애로사항들이 겹치면서, 공세 개시일인 2월 25일 당일에도 제2전차군과 제65군은 철도 하차점에서 공격 집결지로 이동 중이었다.
2월 22일, 중부 전선군이 전선배치에 골머리를 앓고 있을 때, 브랸스크 전선군은 작전대로 제13군, 제48군으로 공세를 개시했다. 이들은 독일 제2기갑군의 우익을 공격했고, 동시에 바그랴먄 중장 휘하의 제16군이 지즈라 북쪽에서 독일 제2기갑군의 다른 측면을 공격했다. 그러나 비가 내리는 날씨와 독일군의 교묘한 방어로 바그랴먄의 진격은 방해를 받았다. 2월 24일까지 서부 전선군과 브랸스크 전선군의 성과는 보잘 것 없었다.
2월 25일, 로코솝스키는 로딘의 제2전차군과 바토프의 제65군을 선봉으로 내세워 공세에 착수했다. 타라소프 중장의 NKVD 요원으로만 구성된 정예 부대, 제70군과 치스차코프 중장의 제21군이 도착한 즉시 공세에 가담했으나 전력이 완전 집결하지는 못했다. 제70군, 제21군의 병력 상당수가 진흙탕으로 변한 도로에서 교통 체증에 시달리며 행군 중이었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중부 전선군의 성과는 위의 두 전선군보다는 나은 편이었다. 제13군의 우측면 엄호하의 제65군은 독일군 방어선을 뚫고 후방으로 진격했다. 로딘의 제2 전차군과 기병-소총병 집단은 세프스크를 통과하여 노브고로드-세베르스키를 향해 빠르게 서진을 계속했다.
3월 1일, 이 때까지도 로코솝스키는 괄목할 만한 성공을 거두는 것처럼 보였다. 북쪽으로는 독일 제2기갑군의 옆구리를 파고들었고, 남쪽으로는 독일 제2군의 측면을 위협했다. 제79군은 전방으로 추진하여 바토프의 우익에서 전열에 합류했으며, 독일군 후방 깊숙한 오룔과 브랸스크로의 진격을 노리고 있었다. 3월 7일, 크류코프의 기병-소총병 집단은 로브고로드-세베르스키의 외곽에 도달하게 된다. 이로써 독소전 전체의 동계 전역을 통틀어 붉은 군대 최고의 진격을 달성하게 되었다.
하지만 소련군 중 그 누구도 자신들이 이미 만슈타인의 함정에 걸렸다는 것을 알아차리지 못했다.
4. 4. 만슈타인의 반격
1943년 2월 8일, 소련군 제2근위군과 제28군이 접근하자 독일 제4기갑군과 홀리트 분견군은 로스토프에서 철수하여 미우스 강 서안으로 후퇴했다.[16]
2월 9일, 소련 제6군, 제3전차군, 제12전차군단은 야간을 틈타 도네츠 강을 건너 하리코프 동쪽의 LSSAH 방어선을 공격했다. 그러나 요제프 디트리히가 이끄는 LSSAH의 강력한 저항으로 제3전차군의 진격은 둔화되었다. LSSAH는 제3전차군의 발목을 잡는 데 성공한 후, 14일에 하르코프 시로 철수했다. 그로스도이칠란트 사단과 168사단도 벨고로드에서 서서히 철수했으나, 그로스도이칠란트 사단은 철수 중 소련군의 공격을 받아 169사단이 하리코프 북부 방어를 강화하기 위해 남서쪽으로 이동하는 동안 남쪽으로 후퇴했다.[16]
2월 10일, 소련의 키릴 모스칼렌코가 이끄는 제40군은 독일 제169사단을 몰아내고 벨고로드를 완전히 점령, 도네츠 강 도하 준비를 마쳤다. 벨고로드가 함락되자 란츠는 하르코프 동부의 독일군이 포위되는 것을 막기 위해 하리코프 시내로 철수를 명령했다. 이에 따라 LSSAH와 다스 라이히, 제168사단은 하리코프로 철수했고, 대독일사단은 벨고로드와 하리코프를 잇는 도로에 방어선을 구축했다.[16]
2월 11일, LSSAH 사단과 다스 라이히 사단 소속 1개 기갑척탄병 연대는 하리코프 남동쪽에서 소련군에게 공격당해 3일 동안 48km를 후퇴하며 밀려났다. 소련 제6기병군단은 우수한 험지 기동 능력을 이용해 독일 전차들을 격파했다. 2월 12일, 포포프 기동집단이 크라스노아르메스카야에 도달했다. 2월 15일, 남서전선군 사령관 니콜라이 바투틴은 새로 투입된 2개 전차군단을 추가 증원하고, 파블로그라드를 거쳐 드니프르 강 상류의 자포리자를 목표로 진격하여 하리코프 후방을 장악하려 했다.[16]
2월 13일, 소련 제4전차군단은 독일군 방어선을 뚫고 하르코프 북쪽 외곽에 방어선을 구축했다. 란츠는 소련군에 대한 반격을 명령하고 하리코프 방어선 정비를 위해 시간을 벌도록 했다. 다음날, 6기병군단을 추격하던 그로스도이칠란트와 SS는 벨고로드-하리코프 철로를 따라 진격한 소련 제40군의 공격을 받았다. 소련 제183소총사단이 도시 북부 수미 인근에 도착했고, 곧이어 2개 사단이 추가로 도착했다. 40군의 잔여 병력은 하리코프 후방 남서쪽으로 이동했고, 함께 진격하던 제3전차군은 하리코프 외곽에 10km의 회랑을 개척했다.[16]
2월 14일, 하리코프 남쪽 로스토프에서는 소련 남부전선군 예하 제2근위군, 제28군이 독일 제1기갑군의 잔존 병력과 시가전을 벌여 로스토프를 탈환했다. 그러나 클라이스트의 A 집단군은 1기갑군, 제17군을 포함해 무사히 후퇴하는 데 성공했다. 2월 15일, SS 군단의 기갑부대는 도시 외부 교전을 포기하고 하리코프로 복귀했다. 독일군은 대독일사단을 서쪽, 다스 라이히는 북쪽, 증강된 LSSAH 1개 연대는 동쪽, 320사단은 남동쪽에 배치하여 방어를 명령했다.[16]
SS기갑군단장 파울 하우서는 시가전에서 기갑 자원을 소모하는 대신 하리코프를 빠져나가겠다고 란츠에게 통보했다. 란츠는 탈출 중지를 명령했지만, 소련군이 도심으로 진입하자 결국 후퇴를 승인했다. 북부 교외의 다스 라이히 사단이 먼저 후퇴하자 소련군이 쇄도했고, 다스 라이히 소속 기갑척탄병들은 소련군 제160소총사단과 제16전차군단을 상대로 분전했지만 공격을 막아내지 못했다.[16]
2월 15일, 2개의 새로운 소련 기갑부대가 충원되어 로스토프로 향하는 마지막 통로를 봉쇄하고, 독일 남부집단군과 제4항공함대 사령부가 있는 자포리자를 위협했다.[16] 아돌프 히틀러는 필사적인 도시 사수를 명령했지만, 2월 16일 하리코프는 붉은 군대에게 함락되었다. 에리히 폰 만슈타인은 '하리코프에 대한 즉각적인 반격은 성과가 없을 것이며, 잠시 후퇴했다가 기갑부대로 얇아진 소련군의 측면을 공격하면 최종적으로 도시를 탈환할 수 있을 것'이라고 히틀러를 설득했다.[16][17]
2월 16일, 소련군은 하리코프를 탈환했다. 히틀러는 란츠가 하우서를 통제하지 못했다며 해임하고 베르너 켐프 대장을 임명, 란츠 분견군도 켐프 분견군으로 개칭했다. 2월 17일, 히틀러는 만슈타인에게 불만을 제기하기 위해 자포리자로 직접 날아갔다. 만슈타인은 '하리코프에 대한 즉각적인 반격은 성과가 없을 것이며, 잠시 후퇴했다가 기갑부대로 얇아진 소련군의 측면을 공격하면 최종적으로 도시를 탈환할 수 있을 것'이라고 설득했다.[18][19] 히틀러는 후퇴에 대한 란츠 해임으로 마무리하고, 하우서 처벌 및 현지 사수 명령을 철회했다.
2월 18일, 소련 제60군은 독일 제2군 제4기갑사단을 쿠르스크에서 밀어냈고, 제13군은 독일 제2기갑군을 측면으로 이동시켰다. 이로 인해 생긴 독일군 사이의 틈으로 소련군은 공세를 개시했다.[18] 하리코프의 켐프 분견군과 로스토프에서 퇴각한 제1기갑군 사이로 하리토노프 중장의 소련 제6군이 맹렬한 공세를 가해 두 야전군 사이를 갈라놓기 시작했다. 켐프 분견군의 남부를 돌파한 소련 제6군은 SS 기갑군단의 배후인 크라스노그라드로 접근했다. 남서전선군 휘하 쿠즈네초프 중장의 제1근위군과 포포프 전차군이 남쪽 파블로그라드에서 철도망을 차단, 선두 전차들은 남부 집단군 사령부 동쪽 약 45km 지점까지 진출했다. 소련 제14군과 제 48군이 독일 제2기갑군 측면을 공격하여 시간을 번 사이, 로코솝스키는 2월 25일에 독일군 전선을 뚫고 남하하여 독일 제2기갑군과 독일 제2군을 포위하려 했다.[18] 그러나 독일군의 강력한 저항으로 작전 속도가 느려졌다.[18] 소련군은 전선의 왼쪽 측면과 중앙 방면에서만 살짝 진격할 수 있었다.[18] 한편 소련 제2기갑군은 로코솝스키 공세의 왼쪽 측면을 따라 독일군 후방으로 160km를 침투, 전선 측면을 100km나 늘렸다.[18]
독일 제40기갑군단의 감청반은 소련군이 차량 연료 및 기타 보급 부족으로 지원을 요청하는 무전을 감청했다. 이는 스탈린그라드 전투 이후 연속된 대규모 공세로 소련군의 병참선이 지나치게 신장된 결과였다. 만슈타인은 히틀러에게 첩보를 기반으로 한 기동 방어 작전과 하리코프 역탈환 계획을 설명하며 설득했다.[18]
2월 19일, 보급 한계에도 불구하고 소련 제1근위군과 제6군의 기갑부대가 독일군 방어를 뚫고 자포리자로 계속 진격했다. 히틀러는 만슈타인에게 자유로운 작전권을 주고 지휘권을 일임한 뒤 떠났다. 이때 소련군은 비행장으로부터 불과 30km 떨어진 곳에 있었다.[20] 붉은 군대는 도네츠크로부터 독일군을 밀어내고 보로실로프그라드와 이줌을 탈환했다.[20]
소련군 공세 동안 만슈타인은 제3SS기갑사단으로 개편된 SS기갑군을 제4기갑군과 함께 지휘하게 되었고, 히틀러는 다가올 반격을 위해 전력이 약화된 7개 기갑, 기갑척탄병 사단을 남부집단군에 배치했다. 만슈타인은 남부집단군 예하 호트의 제4기갑군, 마켄젠의 제1기갑군, 홀리트 분견군, 켐프 분견군, 하우서의 SS 기갑군단, 리히트호펜의 제4항공군 재정비를 진행했다. 그 결과 남부집단군은 하루 평균 350소티에서 1,000소티에 달하는 항공 지원을 받을 수 있게 되었다.[20] 1943년 2월 20일, 붉은 군대가 자포리자 인근에 도달하면서 독일군에게 '도네츠 전역'으로 알려질 반격의 서막이 올랐다.[21]

만슈타인을 비롯한 남부집단군 지휘관들은 소련군의 공세를 전면에서 막을 생각이 없었다. 그들은 제40 기갑군단의 감청 정보에 기반, 소련군의 공세종말점을 예측하여 '기동 방어'(Mobile Defence) 전술로 소련군을 격파할 계획을 세웠다. 소련군은 진격 목표 달성이라는 미끼에 걸려 독일군이 패퇴하는 줄 알고 함정 속으로 들어갔다.
남서전선군의 포포프 기동집단은 드네프르 강 북안까지 진격하며 계속된 출혈과 연장된 병참선으로 진격 속도가 크게 저하되었다. 로코솝스키의 중부전선군 또한 비슷한 상황이었다. 오룔을 향한 로코솝스키의 돌파구는 깊숙한 진격으로 양익이 허술해졌고, 독일군 증원이 집결하여 역포위 위험이 있었다. 로코솝스키는 스탈린그라드에서 재편성 중이던 제21군, 62군, 64군을 요청했지만 이동에 시간이 필요했고, 라스푸티차로 후속 병력 집결이 늦어지자 중부전선군은 오룔 남서쪽에서 격렬한 저항에 부딪혀 진격을 멈췄다. 로딘의 제2전차군을 브랸스크에서 오룔로 이동시켰지만, 이는 중부전선군의 좌익과 중앙을 약화시켰다. 독일 제2군의 여러 사단들이 집결하여 반격을 시작했고, 확대된 토성 작전은 실패했다.
소련군 공세가 한계에 달했다고 판단한 만슈타인은 반격을 개시했다. 제1 목표는 남부집단군 사령부가 있는 자포리자를 위협하고 후방을 교란하는 포포프 기동집단과 그 후속인 제1근위군, 제6군이었다. 당시 포포프 기동집단은 파블로그라드에서 진격이 멈춘 상태였고, 무리한 진격과 보급 문제로 가동 가능 차량 규모가 군단급으로 축소되어 있었다. 만슈타인은 포포프 기동집단을 포위하기 위해 에버하르트 폰 마켄젠의 제1기갑군 예하 제40 기갑군단은 북서쪽과 북동쪽으로, 파울 하우서의 SS 기갑군단은 동쪽으로, 헤르만 호트의 제4기갑군 예하 제48 기갑군단은 북쪽으로 진격시켜 파블로그라드 일대를 에워쌌다.
2월 20일, 다스 라이히 사단이 파블로그라드 시내에 돌입해 시가전을 시작했고, 22일에는 소련군을 밀어붙이기 시작했다. 마켄젠의 제1 기갑군은 북동쪽과 북서쪽 사단을 넓게 전개시켜 포포프 기동집단 및 제6군의 포위망을 넓혔다.[21] 포포프는 "우리 군은 (하리코프에서) 퇴각하는 독일군의 진로를 차단 중."이라는 전문을 모스크바에 보냈고, 마켄젠은 이 전문을 감청했다.
2월 23일, 포포프는 함정에 빠졌음을 깨달았지만 이미 늦었다. 마켄젠의 제1기갑군은 북동쪽에서, 남쪽에서는 호트의 제4 기갑군 소속 제40 기갑군단이, 서북방면으로는 SS 기갑군단이 압박을 시작했고, 파블로그라드 동쪽에서는 제4기갑군 예하 제48기갑군단이 제1근위군을 강타했다.[21]
2월 24일, 포포프 기동집단과 제1근위군, 제6군에 대한 포위망이 완성되자 만슈타인은 공격을 개시했다. 호트와 마켄젠은 포위한 소련군을 섬멸하기 시작했다. 소련군은 독일군의 공세에 무너져 제6군, 제1근위군, 포포프 기동집단은 궤멸되었다. 하리코프 수복 후 폴타바로 향하던 소련 제3전차군과 제69군 또한 제4기갑군과 켐프 분견군에 협공당해 전투 불능 상태에 빠졌다. 이후 GD 사단이 퇴로를 차단, 공격하자 두 야전군 또한 궤멸되었다.[21]
4. 5. 하리코프 수복 및 전투 종결
1943년 3월, 만슈타인은 하리코프에 대한 진격을 재개했다. 바투틴은 중부집단군 방면에 배치된 류발코의 제3전차군을 하리코프로 급히 투입했지만, 하우서의 SS 기갑군단이 이를 저지했다. 이어서 호트의 제4 기갑군 예하 제6, 17기갑사단과 켐프 분견군이 측면을 공격하자 제3전차군은 큰 피해를 입고 하리코프를 구원하지 못했다.
얼마 전의 대참사를 기억하는 만슈타인은 곧바로 도시로 진입하는 대신 제1기갑군을 하리코프 북서쪽, 제4 기갑군은 북동쪽으로 이동시켜 하리코프를 포위했다.[22] 제1기갑군은 도네츠 강 남안에, 제4기갑군의 선봉은 하리코프 남쪽 약 16km 지점의 모슈 강에 도달했다.
3월 5일, 히틀러는 만슈타인의 보고에 기뻐하며 3월 7일 하리코프 재점령을 명령했다. 라스푸티차로 진격이 느려졌지만, 갑작스러운 강추위로 도로가 얼어붙어 기동이 원활해졌다. 만슈타인은 SS 기갑군단이 모슈 강을 건너 켐프 분견군과 함께 하리코프를 포위하고 점차 좁혀나가기로 결정했다.
한편, 소련군 최고사령부(스타프카)는 독일 중부집단군에 대한 공세를 계속하려 했다. 3월 7일, 로코솝스키는 공격을 지속하라는 명령을 받았으나, 독일 제2군이 제4기갑사단과 헝가리군 부대로 반격해왔다. 소련군 제2근위기병군단은 지치고 넓게 분산되어 있어 독일군의 공격을 막아내지 못했다.
3월 9일, SS 기갑군단은 모슈 강을 건너 하리코프 시 외곽에 도달했다. 하우서는 히틀러의 허가를 받아 LSSAH 사단을 선봉으로 하리코프 시 공략을 시작했다.
3월 11일, LSSAH는 하리코프 북쪽을 양방향에서 공격했다. 북서쪽의 제2기갑척탄병 연대는 벨고로드-하리코프 철도 양안으로 진입했고, 철도 오른쪽의 제2대대도 함께 도시로 들어갔다. 철도 반대편의 제1대대는 알렉시예프카 지구를 공격했으나 소련군의 T-34를 이용한 반격에 격퇴되었다. 그러나 융커스 Ju 87 '슈투카' 및 StuG 돌격포의 지원을 받은 독일 보병의 공격으로 소련군은 후퇴했고, 독일군은 거점을 확보했다.[22] 벨고로드에서 주요 도로를 따라 공격한 제1친위기갑척탄병 연대는 하리코프 공항 좌측에서 공격, T-34를 격퇴하고 북부 교외로 진입했다. 북동쪽에서는 독일 보병, 기갑척탄병, 자주포병 부대가 소련군과 교전했고, 연료 부족에 시달리던 소련군은 더욱 불리해졌다.[22] 같은 날, 다스 라이히 사단이 하리코프 서쪽을 공격, 대전차포와 대전차 참호를 돌파하고 기차역으로 가는 통로를 확보했다.[22]
3월 12일, LSSAH는 도시 중심부로 진격, 북부 교외의 소련 방어망을 돌파하고 시가전을 시작했다. 프리츠 비트 대령이 지휘하는 '프리츠 비트 전투단'은 소련군 방어망을 분쇄했고, 쿠르트 마이어 소령의 LSSAH 직할 기갑수색대대는 붉은 광장으로 진격해 혈전을 벌였다. 요아힘 파이퍼 소령의 '파이퍼 전투단'은 마이어의 기갑수색대대를 구출하고 붉은 광장을 거점으로 만들었다. 붉은 광장은 '라이프슈탄다르테' 광장으로 개칭되었다. 이날 LSSAH는 도시 북쪽 2블록 떨어진 곳까지 도달했고,[22] 도시의 2/3를 장악했다.[22]
3월 14일, 하리코프 트랙터 공장이 점령되며 시가전은 끝났다. 탈출하던 소련군은 다스 라이히와 토텐코프의 포위망에 걸려 섬멸되었다. LSSAH는 벨고로드를 점령했고, 독일 남부집단군이 북상하여 중부전선군 측면을 압박하자 스타프카는 제62군, 제64군을 로코솝스키에게 보내 전선을 유지하려 했고, 중부집단군에 대한 공세를 중단하고 후퇴를 명령했다.[22]
5. 결과
독일군의 계략에 휘말린 소련군은 80,000명이 넘는 인명 피해를 보았다. 이 가운데 약 45,200명은 사망하거나 실종되었고, 41,200명은 크고 작은 부상을 입었다.[3] 독일군 사상자는 이보다 훨씬 적었는데, 무장친위대(Waffen-SS) 사단이 특히 치열한 전장에 자주 투입된 점을 고려하여 SS 기갑군단의 사상자를 포함해 계산하면, 3월 17일까지 약 160명의 장교와 4,300명의 사병을 포함, 대략 44%의 전력을 상실한 것으로 추정된다.[3]
군사 역사학자 베빈 알렉산더는 제3차 하리코프 전투를 "동부 전선에서 독일군의 마지막 위대한 승리"라고 기록한 반면,[23] 또 다른 군사 역사학자 로버트 시티노는 이 작전을 두고 "전혀 승리가 아니다"라고 말했다. 시티노에 따르면, 이는 단지 자만하여 지나치게 진격한 적군에게 성공적으로 반격한 것에 불과하며, 전략적 승리에 해당하지 않았다.
6. 평가
소련군은 독일군의 계략에 휘말려 8만 명이 넘는 인명 피해를 보았다. 이 중 약 45,200명이 사망하거나 실종되었고, 41,200명이 크고 작은 부상을 입었다.[3] 독일군의 사상자는 이보다 훨씬 적었는데, SS기갑군단의 피해를 포함하여 3월 17일까지 약 160명의 장교와 4,300명의 사병을 포함, 대략 44%의 전력을 상실했던 것으로 추정된다. 와펜-SS 사단은 특히 치열한 전장에 자주 투입되었다는 점을 고려한 결과이다.
군사 역사가인 베빈 알렉산더는 제3차 하리코프 전투가 "동부 전선에서 독일군의 최후의 위대한 승리"라고 평가했지만,[23] 또 다른 군사 역사가인 로버트 시티노는 이 작전을 두고 "전혀 승리가 아니다"라고 말했다. 로버트 시티노는 이것이 단지 자만하고 지나치게 진격하는 적들에게 반격을 성공적으로 가한 것에 불과하며, 전략적인 승리에 해당하지 않았다고 평가했다.
콘스탄틴 로코솝스키가 지휘하는 돈 전선의 소련 군대가 독일군을 공격하고 있을 때, 스탈린그라드 전투에서의 잇따른 성공으로 고무된 스탈린과 붉은 군대 수뇌부(스타프카)는 보로네시에서 로스토프까지, 즉 소련-독일 전선의 남부 전체를 아우르는 새로운 공세를 계획하고 있었다.[3] 그러나 이는 당시 소련군의 작전 역량을 훨씬 초과하는 것이었다. 전사자 50만의 피해는 쉽게 복구될 수 있는 것이 아니었고, 전투 효율성 역시 아직은 독일군에 크게 미치지 못하는 상황이었다.
이는 1년 전 모스크바 공방전 직후와 매우 유사한 상황이었다. 당시 스탈린은 방어전에 승리하고 독일 국방군 전체를 이긴 것인 양 착각하여 전 전선에서의 반격을 명령했었다. 제한적인 측면에서 모든 자원을 집중한 반격도 힘들 지경인데 독일군에 대한 총반격을 개시하라는 것은 누가 봐도 명백한 무리였다. 붉은 군대는 상부의 지시를 거스를 수 없었으므로 일단 작전을 진행했다. 일명 '42년 동계 전역'이라고 이름 붙여진 이 반격은 재앙적인 결과만 남겼으며, 이때 소련 군대가 입은 피해 덕분에 독일군이 청색 작전을 입안, 진행할 수 있었다. 스탈린그라드 전투는 제2차 세계 대전에서 큰 전환점 중 하나이긴 하나, 그 승리 하나만으로 독일 국방군이 전부 붕괴될 것이라는 건 엄연히 착각이었다.
게오르기 주코프 및 알렉산드르 바실렙스키와 같은 고위급 지휘관들과 더불어 니콜라이 바투틴을 비롯한 최전선의 사령관들마저도 이와 같은 낙관주의에 빠져버렸다. 1942년 겨울, 총반격을 지시했을 때 주코프와 바실렙스키는 강력히 반대했다가 둘 다 좌천된 과거가 있었으나, 1943년 겨울에는 이 둘조차도 남부 전선에서 독일군을 몰아낼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하고 있었다. 이들이 오판을 깨닫건 말건 소련군은 하리코프와 벨고로드, 쿠르스크에 대한 공세 작전인 별 작전과 질주 작전을 구상했다.
6. 1. 독일군의 전술적 역량
소련군은 독일군의 계략에 휘말려 8만 명이 넘는 인명 피해를 입었다. 이 중 약 45,200명이 사망하거나 실종되었고, 41,200명이 크고 작은 부상을 입었다.[3] 독일군의 사상자는 이보다 훨씬 적었는데, SS 기갑군단의 사상자를 포함하면 3월 17일까지 약 160명의 장교와 4,300명의 사병을 포함, 대략 44%의 전력을 상실했던 것으로 추정된다. 와펜-SS 사단은 특히 치열한 전장에 자주 투입되었다는 점을 고려한 결과이다.군사 역사가인 베빈 알렉산더는 제3차 하리코프 전투가 "동부 전선에서 독일군의 최후의 위대한 승리"라고 기록한 반면,[23] 또 다른 군사 역사가인 로버트 시티노는 이 작전을 두고 "전혀 승리가 아니다"라고 말했다. 로버트 시티노에 따르면, 이것은 단지 자만하고 지나치게 진격하는 적들에게 반격을 성공적으로 가한 것에 불과하며, 전략적인 승리에 해당하지 않았다.
6. 2. 소련군의 전략적 과오
콘스탄틴 로코솝스키가 지휘하는 돈 전선의 소련 군대가 독일군을 공격하고 있을 때, 스탈린그라드 전투에서의 잇따른 성공으로 고무된 스탈린과 붉은 군대 수뇌부(스타프카)는 보로네시에서 로스토프까지 — 즉 소련-독일 전선의 남부 전체를 아우르는 새로운 공세를 계획하고 있었다.[3] 그러나 이는 당시 소련군의 작전 역량을 훨씬 초과하는 것이었는데, 소련군의 회복 속도가 아무리 빨라도 전사자 50만의 피해는 쉽게 복구될 수 있는 것이 아니었고 전투 효율성 역시 아직은 독일군에 크게 미치지 못하는 상황이었다.1년 전 모스크바 공방전 직후와 매우 유사한 상황으로, 이때도 스탈린은 방어전에 승리하고 독일 국방군 전체를 이긴 것인 양 착각하여 전 전선에서의 반격을 명령한 적이 있었다. 제한적인 측면에서 모든 자원을 집중한 반격도 힘들 지경인데 독일군에 대한 총반격을 개시하라는 것은 누가 봐도 명백한 무리였지만, 붉은 군대는 상부의 지시를 거스를 수 없었으므로 일단 작전을 진행했다. 일명 '42년 동계 전역'이라고 이름 붙여진 이 반격은 재앙적인 결과만 남겼으며, 이때 소련 군대가 입은 피해 덕분에 독일군이 청색 작전을 입안 - 진행할 수 있었다. 스탈린그라드 승리는 스탈린을 다시 들뜨게 만들었다. 물론 스탈린그라드 전투는 제2차 세계 대전에서 큰 전환점 중 하나이긴 하나, 그 승리 하나만으로 독일 국방군이 전부 붕괴될 것이라는 건 엄연히 착각이었다. 제6군이 독일 야전군 중에서 상당한 정예 부대 중 하나라 할지라도, 대전략적 관점에서 냉정하게 따져본다면 이때 항복한 독일군은 기껏해야 1개 야전군 및 제4기갑군과 이탈리아 제8군의 일부였다. 또한 독일군은 6군이 항복하기 직전까지도 구출을 위해 러시아 남부로 대독일 기갑척탄사단 등 최정예 국방군 사단과 SS 부대들을 집결시키고 있었고, 이들은 최신형 병기들도 우선 보급받은 상태였다. 즉 스탈린그라드의 손실은 컸지만, 러시아 남부 전역 자체는 작전술적으로 아직 독일군이 얼마든지 뒤집을 수 있는 상황이었던 것이다.
그리고 소련군에게 더 심각한 것은, 게오르기 주코프 및 알렉산드르 바실렙스키와 같은 고위급 지휘관들과 더불어 니콜라이 바투틴을 비롯한 최전선의 사령관들마저도 이와 같은 낙관주의에 빠져버렸다는 것이다. 1942년 겨울, 총반격을 지시했을 때 주코프와 바실렙스키는 강력히 반대했다가 둘 다 좌천된 과거가 있었으나, 1943년 겨울에는 이 둘조차도 남부 전선에서 독일군을 몰아낼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하고 있던 것이다. 이들이 오판을 깨닫건 말건 소련군은 하리코프와 벨고로드, 쿠르스크에 대한 공세 작전인 별 작전과 질주 작전을 구상한다. 우선 별 작전으로 보로네시 전선군이 독일 잔존 B집단군을 격파하여 하리코프 및 쿠르스크로 나아가는 사이, 질주 작전을 통해 남서전선군과 남부전선군이 후방의 돈 집단군을 분쇄하여 드네프르 강 너머로 독일군을 몰아내는 것이 목표였다.
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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뉴스
Sokolovo: Czechoslovak Soldiers' First Baptism of Fire in the East during WW2
https://english.radi[...]
Radio Prague International
2020-08-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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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적
How Hitler Could Have Won World War II: The Fatal Errors That Led to Nazi Defeat
Three Rivers Pres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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