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리히 폰 만슈타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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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에리히 폰 만슈타인은 1887년 베를린에서 태어난 프로이센 귀족 출신으로, 제1차 세계 대전과 제2차 세계 대전에 참전한 독일의 야전원수이다. 그는 1930년대 초 나치 정권의 등장과 재무장 과정에서 군 내 요직을 거쳤으며, 제2차 세계 대전 중에는 폴란드, 프랑스, 소련 침공 등 주요 전역에서 뛰어난 군사적 능력을 발휘했다. 특히, 프랑스 침공 작전의 핵심적인 역할을 수행하고, 동부 전선에서 크림반도와 스탈린그라드 전투를 지휘했다. 그러나 유대인 학살에 연루된 혐의와 스탈린그라드 전투에서의 히틀러와의 갈등 등으로 논란의 중심에 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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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리히 폰 만슈타인 - [인물]에 관한 문서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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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본 정보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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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명 | 프리츠 에리히 게오르크 에두아르트 폰 레빈스키 |
출생 | 1887년 11월 24일 |
출생지 | 베를린, 프로이센 왕국, 독일 제국 |
사망 | 1973년 6월 9일 |
사망지 | 이르헨하우젠, 바이에른, 서독 |
안장지 | 도르프마르크, 바트 팔링보슈텔 |
배우자 | 유타 지빌레 폰 뢰슈(1920년 결혼, 1966년 사별) |
자녀 | 3명 |
친척 | 에두아르트 폰 레빈스키(친부) 알브레히트 구스타프 폰 만슈타인(양조부) 오스카 폰 슈페를링(외조부) 파울 폰 힌덴부르크(삼촌) |
군 경력 | |
소속 | 독일 제국(1906–1918) 바이마르 공화국(1918–1933) 나치 독일(1933–1945) 서독(1949–1956) |
군종 | 독일 제국군 국방군 국방군 |
복무 기간 | 1906–1945년 |
최종 계급 | 원수 |
지휘 | 제18보병사단 제38군단 제56기갑군단 제11군 돈 집단군 남부 집단군 |
주요 참전 전투 | 제1차 세계 대전 제1차 마수리안 호 전투 제2차 세계 대전 폴란드 침공 프랑스 전투 바르바로사 작전 세바스토폴 공방전 레닌그라드 공방전 스탈린그라드 전투 작전 갤럽 제3차 하르코프 공방전 쿠르스크 전투 드네프르 전역 케르치 반도 전투 아조프 해 전투 |
훈장 | 백엽 검 기사 철십자 훈장 |
형사 유죄 판결 | |
유죄 판결 | 전쟁 범죄(9건) |
재판 | 에리히 폰 만슈타인 재판 |
형량 | 18년 징역; 12년 징역으로 감형 |
피해자 | 소련 전쟁 포로 소련 민간인 우크라이나 유대인 |
기타 정보 | |
전후 활동 | 서독 정부의 군사 자문관 |
2. 성장과정
만슈타인은 1887년 베를린에서 프로이센계 귀족이자 포병대장인 에두아르트 폰 레빈스키(1829년 ~ 1906년)와 그 아내 헬레네 폰 슈페를링(1847년 ~ 1910년) 사이의 열째 아들로 태어났다. 원래 이름은 프리츠 에리히 게오르크 에두아르트 폰 레빈스키였다. 폰 레빈스키 가문은 카슈비아인 혈통이었으며 브로흐비츠 문장을 사용하는 귀족가였다. 에리히의 이모 헤드비히 폰 슈페를링(1852년 ~ 1925년)이 중장 게오르크 폰 만슈타인(1844년 ~ 1913년)과 결혼했으나 슬하에 자녀가 없었기에 에리히를 입양함으로써 에리히는 폰 만슈타인이 되었다.
1900년 만슈타인은 13세의 나이로 플뢴의 육군 유년학교에 입학하여 베를린-리히터펠데의 프로이센 육군 사관학교에서 교육을 받았다.[12][13] 1905년에는 빌헬름 황태자 결혼식에서 러시아 블라디미르 대공의 시종을 맡았고, 이듬해 빌헬름 2세 부부의 은혼식에도 참석했다.[14]
만슈타인의 생부와 양부는 모두 프로이센 장군들이었고, 외삼촌과 친조부, 외조부, 양조부 모두 마찬가지였다. 보불전쟁 당시 1개 군단을 지휘한 알브레히트 구스타프 폰 만슈타인이 양부의 아버지였다. 레빈스키-슈페를링-만슈타인 집안은 총 열여섯 명의 일가친척이 장교였고, 그들 중 대부분이 장성 계급을 달았다. 훗날 야전원수이자 제국대통령을 지내게 되는 파울 폰 힌덴부르크는 만슈타인의 또다른 이모 거트루드 폰 슈페를링과 결혼했기 때문에 힌덴부르크는 만슈타인의 이모부가 된다.
만슈타인은 1894년 스트라스부르크에 소재한 가톨릭 김나지움에 입학해 1899년까지 다녔다. 6년간 플뢴과 그로스리히터펠데의 사관후보생 교련단에서 복무하고 1906년 3월 제2보병친위연대에 소위로 임관했다. 1907년 1월 중위로 진급했고, 1913년 10월 프로이센 전쟁대학에서 3년짜리 장교훈련 프로그램을 수강하기 시작했다. 그러나 1914년 8월 제1차 세계 대전이 발발하여 공부는 1년 만에 끝나고 만슈타인은 현역으로 복귀했다. 이후로도 만슈타인은 장군참모 훈련의 나머지 과정을 평생 끝마치지 못했다.
3. 초기 경력
1906년 3월, 프로이센 육군의 정예 부대인 제3 근위 보병 연대에 사관 후보생으로 입대,[5][13][15] 1907년 1월 소위로 임관했다.[13][11] 이후 중위로 진급하여 제3 근위 보병 연대 소속 대대의 대대장 부관으로 근무했다.[5]
1913년 10월, 베를린 육군대학에 입학했으며, 하인츠 구데리안과 동기였다.[13]
3. 1. 제1차 세계 대전
만슈타인은 제1차 세계 대전 당시 서부전선과 동부전선 모두에서 복무했다. 전쟁 발발 당시 중위였던 만슈타인은 제2친위예비보병연대에 소속되어 벨기에 침공에 참여했고, 1914년 8월 나뮈르 점령에 기여했다. 9월에는 동프로이센으로 이동하여 이모부 힌덴부르크가 지휘하는 제8군에 배속되었다. 제1차 마수리안 호 전투에 참전한 후, 만슈타인의 부대는 제9군에 배속되어 오베어슐레지엔에서 바르샤바로 진격했다. 그러나 제9군은 러시아군의 반격으로 후퇴했고, 만슈타인은 1914년 11월 16일 후퇴 중 분견대를 이끌고 러시아 참호선을 공격하다 왼쪽 어깨와 왼쪽 무릎에 총상을 입었다. 총알 한 발이 좌골신경을 끊어 다리가 마비되었고, 비톰과 비스바덴의 병원에서 6개월간 치료를 받았다.[1]
1915년 6월 17일, 만슈타인은 막스 폰 갈비츠가 지휘하는 제10군 작전참모장교로 복귀했고, 얼마 후 대위로 진급했다. 제10군이 폴란드, 리투아니아, 몬테네그로, 알바니아를 공격하는 과정에서 공세작전 계획 및 수행 경험을 쌓았다. 1916년 초에는 베르됭에서 공세작전을 수행했고, 이후 솜강 근처 사령부에서 프리츠 폰 벨로브 장군과 참모장 프리츠 폰 로스베르크 휘하 보급장교로 일했다. 이 지역은 1차 대전 내내 격렬한 전투가 벌어진 곳으로, 영국군과 프랑스군은 1916년 7월부터 11월까지 공세를 펼쳐 독일군을 힌덴부르크 선까지 밀어붙였다. 만슈타인은 1917년 10월까지 벨로브 휘하에 있다가 리가를 점령 중인 제4기병사단 참모장으로 임명되었다. 1918년 3월 브레스트-리토프스크 조약으로 동부전선이 독일의 승리로 끝나자, 만슈타인은 랭스 근교의 제213보병사단으로 옮겨갔다. 독일군은 서부전선에서 일부 성과를 거두었으나 결국 전쟁에서 패배했고, 1918년 11월 11일 휴전협정이 체결되었다.[2]
3. 2. 전간기
만슈타인은 1920년 슐레지엔 지주 집안의 딸 유타 시빌레 폰 로에슈(Jutta Sibylle von Loesch|유타 시빌레 폰 로에슈de)와 결혼했다. 만슈타인은 로에슈를 처음 알게 되고 불과 3일만에 청혼했다. 슬하에 장녀 기젤라(Gisela|기젤라de, 1921년생), 차남 게로(Gero|게로de, 1922년생), 삼남 뤼디게르(Rüdiger|뤼디게르de, 1929년생)를 두었다.[20] 차남 게로 폰 만슈타인은 국방군 중위로 복무 중 1942년 10월 29일 제2차 세계 대전 동부전선 북부 지역에서 전사했다.[7],[8],[28] 장녀 기젤라 폰 만슈타인은 에델하인리히 폰 차하리아에링겐탈 소령과 결혼했고, 사위 폰 차하리아에링겐탈은 2차대전 당시 제15기갑연대를 지휘했다.
만슈타인은 제1차 세계 대전 종전 이후에도 군에 남았다. 1918년 브레슬라우(오늘날의 브로츠와프)에서 전선방위군 참모로 자원했고 1919년까지 거기서 근무했다.[38] 제2군단 사령부에 소속된 만슈타인은 500,000 여명가량의 독일 제국육군 병력을 국가방위군 전력으로 구조조정하는 데 참여했다. 국가방위군은 바이마르 공화국의 군대로서, 베르사유 조약에 의해 병력 수가 100,000 명으로 제한되어 있었다.[40] 젊어서부터 능력 있는 지휘관으로 촉망받던 만슈타인은 베르사유 조약이 허락하는 4,000 명 장교 중 한 명으로 선택되어 군직을 유지할 수 있었다.
1921년 만슈타인은 제5프로이센보병연대 제6중대 중대장으로 임명되었고 그 뒤에는 제2군관구사령부 및 제4군관구사령부 참모가 되어 1927년까지 군사사 및 군사전술 교육을 맡았다. 그 해에 소령으로 승진한 만슈타인은 베를린의 국가방위군 본청 장군참모가 되었고, 각국 군사시설을 탐방하며 육군 동원계획 수립을 거들었다.[21],[22],[26] 이후 중령으로 진급한 만슈타인은 제4보병연대 경보병대대 대대장으로 임명되어 1934년까지 거기 있었다.,
1933년 국가사회주의 독일 노동자당(나치당)이 독일의 권력을 잡음으로써(마흐터그라이풍) 바이마르 공화국은 붕괴했다. 국가방위군은 1920년대부터 이미 베르사유 조약을 어기고 몰래 재무장을 시작하고 있었으며, 나치당 신정부는 공식적으로 조약 파기를 선언하고 대규모 재무장과 군비확장에 돌입했다.[23],[7],[8],[9]
만슈타인은 1934년 2월에 베를린으로 돌아와 대령으로 진급하고 제3군관구사령부 참모장으로 임명되었다. 1935년 7월 1일 만슈타인은 독일 육군 최고사령부(OKH) 산하 육군장군참모 작전처 처장이 되었다. 작전처장으로 재임하면서 만슈타인은 프랑스의 독일 침략을 대비하기 위한 방어작전인 적색 작전(Fall Rot|적색 작전de) 수립에 참여하였다. 또한 이 시기에 전차(Panzer|판처de)의 역할을 강조하며 전쟁의 과감한 변화를 주장하던 하인츠 구데리안과 오즈발트 루츠를 만나게 되었다. 그러나 육군장군참모총장 루트비히 베크를 비롯한 고위 장교들은 그런 급격한 변화에 반대했고, 만슈타인은 보병을 직접 화력 지원할 수 있는 자주포대 개념의 돌격포(Sturmgeschütz; StuG|돌격포de)의 개발을 대안으로 제안하였다.,,, 결과적으로 돌격포는 제2차 세계 대전 당시 가장 가격대비 효율이 뛰어난 무기 체계 중 하나로 활약했다.[9]
만슈타인은 1936년 10월 소장으로 진급하며 별을 달았고, 베크 장군의 부관으로 제1상급설영장교(Oberquartiermeister I|제1상급설영장교de; 참모차장)이 되었다. 1938년 2월 4일 만슈타인은 중장으로 진급하면서 레그니차에 주둔한 제18보병사단 사단장으로 부임했다. 그해 8월, 만슈타인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베크가 사임했다. 베크는 히틀러의 체코슬로바키아 침공(10월)이 너무 이르다고 판단했다. 만슈타인은 베크의 후임 참모총장이 되지 못했고, 그 자리는 만슈타인의 후임으로 참모차장 자리를 맡고 있던 프란츠 할더에게 돌아갔다. 이 일로 만슈타인은 할더에게 앙심을 품었다.,,,
1939년 4월 20일 만슈타인은 히틀러의 50회 생일 잔칫날 연설을 했다. 이 연설에서 만슈타인은 히틀러가 하늘이 독일을 구하기 위하사 내려주신 지도자이며, 독일이 독일 인민의 미래를 위해 나아가는 길을 가로막는 “적대적 세상”이 새로운 세계대전으로 끌려들어가는 것을 보게 된다면 썩 행복할 것이라는 말을 했다.,, 이스라엘의 역사학자 오메르 바르토브는 만슈타인을 비롯한 장교들의 부상은 나치즘의 열렬한 지지자였던 기술관료적 장교들이 전면 부상하는 세태를 일부 드러냈다고 진단한다. 바르토브의 주장에 따르면 국방군은 나치 정권에서 독립적인 정치 중립적 조직이 아니었으며, 이미 독일 제3제국에 완전히 융합되어 있었다.
4. 제2차 세계 대전
만슈타인은 제2차 세계 대전 발발 이후 폴란드 침공과 프랑스 침공에서 참모장으로 활약했다. 특히 프랑스 침공에서는 대담한 기갑 작전을 입안하여 독일군의 승리에 크게 기여했다.
바르바로사 작전 개시 당시 만슈타인은 제56기갑군단을 지휘하여 북부 집단군의 작전 지역 내에서 다우가프필스로 가는 도로를 확보하는 데 성공했다. 1941년 9월에는 남부 집단군 제11군 사령관으로 임명되어 크림 반도의 세바스토폴 요새를 공략하고, 1942년에는 육군 원수로 승진했다.
1942년 말부터 이듬해 1943년 1월까지 프리드리히 파울루스 상급대장의 제6군이 스탈린그라드에서 포위되었을 때, 만슈타인은 돈 집단군 지휘관으로서 남부 전선의 붕괴를 막고 기동 방어 작전으로 소련군에게 큰 타격을 입혔다. 1943년 3월 15일에는 하르코프를 재점령하며, 제3차 하르코프 공방전에서 뛰어난 전략적 안목과 지휘 능력을 보여주었다.
이후 쿠르스크 전투에서 독일군이 패배하고, 만슈타인은 히틀러와의 작전 지휘 방식 차이로 인해 1944년 3월에 해임되었다.
4. 1. 폴란드 침공
1939년 8월 18일, 만슈타인은 폴란드 침공(백색 작전)을 준비하던 게르트 폰 룬트슈테트의 남부 집단군 참모장으로 부임하였다.[17] 작전 참모 귄터 블루멘트리트 대령과 함께 작전 계획 수립에 참여한 만슈타인은 집단군 기갑 병력 다수를 발터 폰 라이헤나우의 제10군에 집중시켜 돌파구를 만들고, 폴란드군을 비스툴라강 서안에 포위하는 계획을 세웠다. 빌헬름 리스트의 제14군과 요하네스 블라코비츠의 제8군은 측면 지원을 맡아, 라이헤나우의 제10군이 폴란드의 수도 바르샤바까지 진격하는 것을 돕는 방식이었다. 룬트슈테트는 이 계획을 승인하였다.만슈타인은 개인적으로 폴란드를 독일과 소련 사이의 완충 지대로 유지하는 것을 선호하여 폴란드 침공에 소극적이었다. 또한, 폴란드 침공이 끝나기 전 서쪽에서 연합군이 공격하여 독일이 양면 전쟁에 빠지는 상황을 우려했다.
1939년 9월 1일 시작된 폴란드 침공은 성공적이었다. 남부 집단군 점령지에서 제8군, 제10군, 제14군은 후퇴하는 폴란드군을 추격했다. 초기 계획은 제8군이 우치로 진군하고, 제10군은 비스툴라 강을 향해 진격하며, 제14군은 크라쿠프의 폴란드군을 포위하는 것이었다. 작전 결과, 9월 8일 ~ 14일 독일군 6개 군단은 라돔에서 폴란드군을 포위 섬멸했다. 폴란드군이 북쪽에서 제8군 좌익을 공격하자, 독일군은 재배치된 제4군, 제8군, 제19군 부대와 공중 지원으로 반격하여 폴란드군 9개 보병 사단을 격파했다. (9월 8일 ~ 19일 브주라 전투). 이 전투는 폴란드 침공 중 최대 규모였다. 10월 6일, 마지막 폴란드군 부대가 항복하면서 폴란드 정복은 빠르게 완료되었다.
4. 2. 프랑스 침공
만슈타인은 1939년 말, 룬트슈테트의 A 집단군 참모장이 되어 블루멘트리트, 트레스코우와 함께 프랑스 침공 작전을 입안했다. 만슈타인은 전차 부대가 행동하기 어렵다고 여겨지는 아르덴의 삼림 지대를 통과하여 적의 허를 찌르고, 뫼즈강의 교량을 확보, 영국 해협에 도달하여 벨기에와 플란데런(플랑드르)에 전개된 영국-프랑스 연합군과 프랑스 본토를 단절할 수 있다고 생각했다. 이 계획은 대낫 작전이라고 불렸다[28]。육군 최고 사령부(OKH)는 이 작전 계획안을 거부했지만, 히틀러는 혁신적인 작전으로 수정안을 채택했다. 이 작전 계획은 나중에 만슈타인 플랜이라고 불렸다. 그러나 만슈타인은 다시 독일 동부로 좌천되었다. 제4군을 지휘한 것은 클루게였다. 이 부대에는 롬멜 장군이 지휘하는 제7 기갑 사단도 포함되어 있었다. 처음으로 아미앵 동쪽을 돌파하여 센 강에 도달한 것은 만슈타인의 옛 부하들이었다. 프랑스 침공은 성공적으로 종료되었고, 이 공적으로 만슈타인은 기사 철십자 훈장을 수여받았다.
4. 3. 영국 본토 항공전
만슈타인은 바다사자 작전으로 명명된, 영국의 침공 작전을 지지했다. 그는 이 작전이 위험하지만 필요하다고 생각했다. 다양한 참모 장교들의 초기 연구에 따르면, 계획된 침공의 전제 조건은 제공권 장악이었다. 그의 군단은 네 개의 부대 중 하나로, 첫 번째 상륙 부대로 불로뉴에서 벡스힐까지 영국 해협을 건너 수송될 예정이었다. 그러나 영국 본토 항공전 동안 독일 공군이 영국 공군을 제압하는 데 실패하면서, 바다사자 작전은 10월 12일에 무기한 연기되었다. 만슈타인은 남은 기간 동안 할 일이 거의 없어 파리와 자택에서 시간을 보냈다.4. 4. 독소전쟁 개전

1941년 초, 독일 최고사령부는 바르바로사 작전이라는 암호명으로 소련 침공 계획을 작성했다. 5월 15일 만슈타인은 제56기갑군단 군단장으로 임명되었고, 5월에 있을 대공세에 대한 상세한 브리핑을 받은 250명의 장성 중 한 명이었다. 만슈타인의 56군단은 빌헬름 리터 폰 레프 원수의 북부 집단군 소속 에리히 회프너 대장의 제4기갑군에 배속되었다.[29] 북부 집단군의 임무는 발트 3국을 거쳐 레닌그라드로 진격하는 것이었다. 만슈타인은 공세 시작 불과 6일 전에 전선에 도착했다. 1941년 6월 22일, 바르바로사 작전이 개시되어 동부전선 전체에서 대규모 독일군 공격이 시작되었다. 만슈타인의 56군단은 게오르크한스 하인하르트의 제41기갑군단과 함께 다우가프필스 근교의 교량들을 확보하기 위해 드니바강 쪽으로 진격했다.[29] 소련군은 여러 차례 반격을 가했으나, 공격받은 것은 라인하르트의 군단(라세이니아이 전투)뿐이었다. 만슈타인의 군단은 100시간 만에 315km를 쾌진격하며 드니바 강에 도달했다. 지나치게 앞서나간 만슈타인의 군단은 다른 아군들과 떨어져 있었고, 여러 차례 소련군의 역습을 받았으나 모두 물리쳤다.[29] 라인하르트의 군단이 뒤따라 오자, 2개 군단은 루가의 소련군 진형을 양면협공하여 포위하기로 했다.

4. 5. 크림-세바스토폴
1941년 9월, 만슈타인은 이전 사령관 오이겐 리터 폰 쇼베르트 상급대장이 비행기 사고로 사망한 후 제11군 사령관으로 임명되었다. 제11군은 크림반도를 침공하고 세바스토폴을 점령하며, 소련 침공 당시 남부 집단군의 측면에서 적군을 추격하는 임무를 맡았다.[29] 히틀러는 붉은 군대가 크림 반도의 비행장을 사용하는 것을 막고, 코카서스에서 소련의 석유 공급을 차단하려 했다.[29]만슈타인의 부대는 초기에 소련의 격렬한 저항에 맞서 빠른 돌파를 달성했다. 페레코프 지협의 대부분을 점령한 후, 그의 부대는 실질적으로 줄어들어 독일 사단 6개와 루마니아 제3군만 남았다. 나머지 페레코프 지협은 느리고 다소 어렵게 점령되었다. 만슈타인은 이 지역에서 소련의 제공권을 다툴 공중 지원 부족에 대해 불만을 표했다. 그는 다음으로 반도를 따라 내려가 심페로폴과 세바스토폴 사이의 도로를 1941년 10월 31일에 차단하는 기동 정찰 부대를 편성했다. 추축군 부대는 다음날 심페로폴을 점령했다. 제11군은 11월 16일까지 세바스토폴을 제외한 크림 반도 전체를 점령했다. 한편, 붉은 군대는 도시에서 30만 명의 병력을 해상으로 철수시켰다.[29]

만슈타인의 11월 세바스토폴에 대한 첫 번째 공격은 실패했고, 즉각적인 공격을 가할 충분한 병력이 남지 않자 그는 요새화된 도시를 포위하라고 명령했다. 1941년 12월 17일 그는 또 다른 공세를 시작했지만 이 역시 실패했다. 12월 26일 소련군은 케르치 해협에 상륙하여 케르치와 그 반도를 탈환했고, 1941년 12월 30일 페오도시아 근처에서 또 다른 상륙 작전을 수행했다. 제46 보병 사단의 한스 그라프 폰 스포넥 장군의 명령을 어기고 케르치 반도에서 급히 철수한 결과, 크림 반도의 동부에서 추축군의 붕괴를 막을 수 있었다. 이 사단은 대부분의 중장비를 잃었다. 만슈타인은 계획했던 공격 재개를 취소하고 대부분의 병력을 동쪽으로 보내 소련의 교두보를 파괴했다. 소련군은 병력과 물자 면에서 우위에 있었고 해상으로 보급을 받을 수 있었기 때문에 스탈린은 그들에게 추가 공세를 수행하도록 압박했다. 그러나 소련군은 독일의 보급선을 차단할 수 있는 중요한 철도 및 도로 접근 지점을 점령할 수 없었다.[29]

1942년 5월 8일에 시작된 케르치 반도 전투를 위해, 히틀러는 마침내 만슈타인에게 주요 공중 지원을 배정했다. 지상에서 제11군은 수적으로 열세였으므로 만슈타인은 북쪽에서 공격을 가장하는 한편, 주력 부대는 남쪽으로 공격했다. 소련군은 곧 도주했다. 만슈타인은 회고록에서 "17만 명의 포로, 1,133문의 대포 및 258대의 전차"를 포획했다고 기록했다.[29] 케르치는 5월 16일에 점령되었다. 국방군은 단 8,000명의 병력만 잃었다.[29]
한 달간의 지연 끝에 만슈타인은 다시 한 번 세바스토폴 점령에 집중했는데, 이 전투에서 독일은 역사상 가장 큰 대포를 사용했다. 대량의 일반 포병 외에도, 초대형 600mm 카를-게르트 박격포와 800mm "도라" 철도포가 공격에 동원되었다. 1942년 6월 2일 아침 격렬한 포격이 시작되었다. 볼프람 폰 리히트호펜이 지휘하는 루프트바페의 모든 자원인 제4 항공함대가 투입되었고, 지상 공격이 시작되기 전 5일 동안 포격이 계속되었다.[29]

제11군은 6월 중순 동안 진격을 했고, 도시 북쪽 접근로에 집중했다. 양측 모두 사상자가 많았고, 한 달이 다 되어가자 만슈타인은 1942년 독일의 공세로 인해 증원 및 보급 가능성이 줄어들기 전에 행동해야 한다는 것을 알고, 1942년 6월 29일 상륙 작전을 통해 세베르나야 만을 가로질러 기습 공격을 명령했다. 이 작전은 성공적이었고 소련의 저항은 무너졌다. 1942년 7월 1일 독일군은 도시에 진입했고 소련군은 무질서한 철수를 수행했으며, 히틀러는 같은 날 만슈타인을 원수로 진급시켰다. 도시 전체는 1942년 7월 4일까지 독일군의 손에 들어갔다.[29]
크림 반도 작전 동안 만슈타인은 특히 유럽의 유대인 학살을 임무로 하는 여러 친위대 (SS) 집단 중 하나인 아인자츠그루펜 D가 저지른 소련 민간인에 대한 만행에 간접적으로 연루되었다. ''아인자츠그루펜'' D는 만슈타인의 제11군을 따라 이동했고 만슈타인의 지휘부로부터 차량, 연료 및 운전사를 제공받았다. 군 헌병은 ''아인자츠그루펜''이 유대인 학살을 계획한 지역을 봉쇄하여 누구도 탈출하지 못하게 했다. ''아인자츠그루펜'' D가 유대인 여성과 어린이를 학살하는 것을 목격하고 충격을 받은 울리히 군제르트 대위는 만슈타인에게 가서 학살을 막기 위해 뭔가 해달라고 요청했다. 군제르트는 만슈타인이 그에게 자신이 본 것을 잊고 붉은 군대와의 싸움에 집중하라고 말했다고 진술했다.[29] 만슈타인에 대한 나중에 열린 전쟁 범죄 재판에서 17건의 혐의 중 11건은 크림 반도에서 유대인과 전쟁 포로에 대한 나치의 학대와 살인과 관련이 있었다.[29]
4. 6. 레닌그라드
1941년 9월부터 레닌그라드가 포위되자, 히틀러는 만슈타인을 투입할 적임자로 판단했다. 만슈타인은 제11군 병력을 이끌고 1942년 8월 27일에 레닌그라드 전선에 도착했다. 그는 도시를 공격할 병력이 부족했기에, 라도가호의 레닌그라드 보급선을 차단하기 위한 노르트리히트 작전을 계획했다.[29]그러나 만슈타인이 도착한 날, 붉은 군대는 시냐비노 공세를 시작했다. 이 공세는 원래 라도가호 서쪽의 좁은 독일군 돌출부에서 게오르크 린데만의 제18군에 대한 방해 공격으로 계획되었지만, 독일군 방어선을 돌파하여 포위를 풀 수 있을 것처럼 보였다. 히틀러는 지휘 체계를 무시하고 만슈타인에게 직접 전화하여 해당 지역에서 공격 작전을 수행하라고 명령했다. 격렬한 전투 끝에 만슈타인은 1942년 9월 21일에 반격을 시작하여 돌출부 내의 두 소련군을 포위했다. 전투는 1942년 10월 내내 계속되었다. 소련의 공세는 격퇴되었지만, 그로 인한 소모로 국방군은 더 이상 레닌그라드에 대한 결정적인 공격을 수행할 수 없었고, '노르트리히트'는 보류되었다.[29] 레닌그라드 공방전은 1944년 1월 소련군에 의해 해제되었다.[30]
4. 7. 스탈린그라드
독일 국방군은 석유 부족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1942년 코카서스 유전을 목표로 청색 작전을 시작했다.[29] 프리드리히 파울루스 지휘 아래 제6군은 볼가강의 주요 도시 스탈린그라드 점령 임무를 맡았다. 제6군은 제4 기갑군의 지원을 받아 9월 12일 도시에 진입, 백병전과 시가전이 벌어졌다.[30] 붉은 군대는 11월 19일 독일군 포위를 위한 천왕성 작전이라는 반격을 시작, 11월 23일에 목표를 달성했다.[31] 히틀러는 스탈린그라드를 잃으면 재탈환이 어려울 것으로 보고 만슈타인을 돈 집단군 사령관으로 임명, 겨울 폭풍 작전을 수행하게 했다. 만슈타인은 11월 24일 제6군이 공중 지원을 받으면 버틸 수 있다고 평가했다.[32]
1942년 10월, 만슈타인의 아들 게로가 전사했다. 그는 이를 "전쟁 중 개인적으로 최악의 일"이라고 묘사했다.[33]
12월 12일 시작된 겨울 폭풍 작전은 초기에 성공을 거두었다. 만슈타인의 3개 기갑 사단(제23, 제6, 제17 기갑사단)과 LVII 기갑 군단 지원 부대는 12월 20일까지 스탈린그라드에서 48km 떨어진 미슈코바 강까지 진격, 눈보라 속에서 소련 탱크의 공격을 받았다. 만슈타인은 12월 18일 히틀러에게 제6군의 돌파를 요청했다.[34] 히틀러는 반대했고, 만슈타인과 파울루스는 명령에 불복하지 않았다.[35] 도시 상황은 악화되었다; 병사들은 이, 추위, 식량 및 탄약 부족으로 고통받았다. 헤르만 괴링은 포위된 제6군이 공중 보급될 수 있다고 확신했지만, 악천후, 항공기 부족, 기계적 어려움으로 인해 불가능했다.[36] 1월 24일, 만슈타인은 히틀러에게 파울루스의 항복을 허락하라고 촉구했지만 거절당했다.[37] 히틀러의 뜻에도 불구, 파울루스는 1943년 1월 31일 9만 1천 명의 병사와 항복했다. 약 20만 명의 독일군과 루마니아 군인이 사망했고, 생존자 중 6천 명만이 독일로 돌아갔다.[38] 만슈타인은 제6군을 위해 최선을 다했다고 믿었지만, 포위된 병사들은 다르게 생각했다.
미국 역사가 윌리엄슨 머레이와 앨런 밀레트는 만슈타인이 11월 24일 히틀러에게 제6군 돌파 불가 조언과 괴링의 루프트바페 보급 가능 발언이 "... 제6군의 운명을 결정했다"라고 썼다.[40] 게르하르트 바인베르크 등 역사가들은 만슈타인의 회고록 속 스탈린그라드 사건 설명이 왜곡되었고, 여러 사건이 꾸며졌을 것이라고 지적했다.[41] 바인베르크는 "전후 독일에서 스탈린그라드 문제는 민감했기에, 만슈타인은 유대인 학살 연루처럼 이 문제에 대한 기록을 왜곡하려 노력했다"라고 썼다.[42]
한편, 붉은 군대는 공세를 시작했다. 토성 작전은 로스토프나도누 점령, 독일 A 집단군 차단을 목표로 했다. 그러나 겨울 폭풍 작전 시작 후, 소련군은 스탈린그라드 구원 저지를 위해 병력을 재배치, 작전 규모가 축소되어 "작은 토성"으로 불렸다. 이로 인해 만슈타인은 전선 붕괴를 막기 위해 병력을 돌려야 했다. 오토 폰 크노벨스도르프 지휘 제48 기갑 군단(제336 보병 사단, 제3 공군 야전 사단, 제11 기갑 사단)의 LVII 기갑 군단 합류도 막혔다. 제48 기갑 군단은 치르 강 방어선을 유지, 소련 공격을 격퇴했다. 헤르만 발크는 제11 기갑 사단으로 소련 돌출부를 반격했다. 독일군은 방어선을 유지했지만, 이탈리아 제8군은 압도되어 파괴되었다.
이 성공에 힘입어, 붉은 군대는 1943년 1월과 2월, 러시아 남부 독일군 격파를 위한 후속 공세를 계획했다. 오스트로고시크-로소쉬 공세 동안 헝가리 및 이탈리아군이 파괴된 후, 별 작전과 갈로프 작전이 하르코프, 쿠르스크 탈환, 도네츠크 동쪽 독일군 차단을 위해 시작되었다. 이 작전들은 독일군 방어선 돌파에 성공, 독일 전선 남부 전체를 위협했다. 이 위협에 대처하기 위해 2월 초 돈 집단군, B 집단군, A 집단군 일부가 만슈타인 지휘하 남부 집단군으로 통합되었다.
4. 8. 하리코프
만슈타인은 하리코프 공방전 직후 쿠르스크 돌출부에 대한 협공을 제안했지만, 히틀러는 도네츠 분지의 산업 지대에서 병력을 빼야 한다는 점을 우려했다. 또한, 라스푸티차로 인해 땅이 질퍽거려 전차 이동이 어려웠다. OKH가 준비한 시타델 작전은 병력 집결과 땅이 굳기를 기다리면서 지연되었다. 한편, 소련군은 포위 위험을 인지하고 대규모 병력을 증원하며 독일군의 공격 위치와 시기를 첩보로 파악했다.[29]시타델 작전은 동부전선 독일 최후의 전략적 공세작전이며, 4백만 명 이상이 동원된 역사상 가장 거대한 규모의 전투 중 하나였다. 1943년 7월 5일 독일군이 공격을 개시했을 때, 소련군은 이미 독일군을 수적으로 거의 세 배가량 압도하고 있었다.[30] 발터 모델의 제9군이 북쪽에서, 만슈타인의 남부 집단군이 남쪽에서 협공을 진행했다. 양군 모두 전차가 지뢰밭에 파괴되거나 소련군의 방어선에 막혀 진격이 더뎠다.[31] 5일간의 전투 후 모델의 진격은 중단되었고, 제9군은 25,000여 명의 사상자를 냈다. 7월 13일 모델의 부대는 오렐로 후퇴했고, 소련군은 쿠투조프 작전을 개시했다.[32] 만슈타인의 부대는 소련군 전열을 돌파했지만 심각한 사상자가 발생했다. 만슈타인은 주요 목표물 중 하나인 프로호로프카에 도달했지만 점령하지는 못했다. 7월 11일, 프로호로프카 전투에서 독일군은 소련군에게 큰 피해를 입혔다.
7월 13일, 히틀러는 쿠르스크 공세가 실패했다고 판단, 철수를 명령했다. 시칠리아 침공이 그 이유였다. 만슈타인은 항의했지만, 히틀러는 작전 포기를 고집했다.[33] 현대 역사학자들은 소련군의 피해가 극심했지만, 독일군이 공세를 계속했을 가능성은 낮다고 평가한다.[34]
만슈타인은 쿠르스크 전투를 독일의 승리로 여겼지만, 소련의 회복 속도는 예상보다 빨랐다. 만슈타인은 기갑예비대를 미우스 강과 드네프르 강 하류로 이동시켰으나, 소련군의 움직임은 양동 작전이었다. 8월 3일 시작된 소련군의 공세는 남부 집단군을 압박했다. 이틀간의 전투 끝에 소련군은 독일군 전열을 넘어 벨고로드를 탈환, 제4기갑군과 켐프 분견대 사이에 폭 56km의 구멍을 냈다. 만슈타인은 증원을 요청했고, 히틀러는 그로스도이칠란트 기갑척탄병사단, 제7기갑사단, 제2SS기갑사단 다스 라이히, 제3SS기갑사단 토텐코프 등을 보냈다.[35]

드네프르 강을 따라 방어선 구축이 시작되었으나 히틀러는 하리코프를 지켜야 한다며 후퇴를 거부했다. 증원군이 찔끔찔끔 들어오는 사이, 만슈타인은 8월 13일에서 17일 사이에 보호두히우와 옥티르카 근교에서 역공과 기갑전을 펼쳤지만, 소련군에 막혀 큰 피해를 입었다. 8월 20일 만슈타인은 OKH에 도네츠 강 유역의 부하들이 병력 부족으로 너무 긴 전선을 유지하고 있으며, 증원이 없으면 드네프르 강까지 후퇴할 수밖에 없다고 알렸다. 소련군의 압박은 남부 집단군과 중부 집단군을 분리시켰고 만슈타인의 북쪽 측면을 위협했다. 8월 21일에서 22일 사이, 소련군이 주력 예비대를 동원하여 하리코프를 탈환하자 만슈타인은 이를 기회로 삼아 제4기갑과 제8군 사이의 간격을 좁혀 방어선을 재구축했다. 9월 15일, 히틀러는 마침내 드네프르 강을 건너 후퇴를 허락했다.[36] 후퇴하면서 만슈타인은 강변 20 ~ 30 킬로미터 지역을 초토화시켰고, 이는 전범재판 때 기소 내용에 포함된다.[3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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