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인츠 구데리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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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하인츠 구데리안은 독일의 군인으로, 제2차 세계 대전 중 기갑 부대를 이끌며 전격전 전술을 발전시키는 데 기여했다. 그는 1930년대에 기갑 사단 개념을 정립하고, 전차 개발에도 관여했으며, 1939년 폴란드 침공, 1940년 프랑스 침공, 1941년 소련 침공 등에서 기갑 부대를 지휘했다. 구데리안은 전후 회고록 《기갑 부대 지휘관》을 통해 자신의 업적을 널리 알렸지만, 나치 정권과의 협력 및 전쟁 범죄 연루 의혹, 역사 왜곡 등으로 논란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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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인츠 구데리안 - [인물]에 관한 문서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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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본 정보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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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명 | 하인츠 빌헬름 구데리안 |
별칭 | 슐넬러 하인츠 (Schneller Heinz) 해머링 하인츠 (Hammering Heinz) |
직위 | |
직책 | 독일 육군 고위 사령부 총장 |
임기 시작 | 1944년 7월 21일 |
임기 종료 | 1945년 3월 28일 |
지도자 | 아돌프 히틀러 |
전임자 | 아돌프 호이징어 |
후임자 | 한스 크렙스 |
개인 정보 | |
출생 | 1888년 6월 17일 |
출생지 | 쿨름, 독일 제국 |
사망 | 1954년 5월 14일 (향년 65세) |
사망지 | 슈방가우, 서독 |
배우자 | 마르가레테 괴르네 (1913년 결혼) |
자녀 | 하인츠 귄터 쿠르트 |
군사 경력 | |
소속 | 제국 독일군 (1907–1918) 국방군 (1919–1933) 육군 (1933–1945) |
복무 기간 | 1907–1945년 |
최종 계급 | 상급대장 |
지휘 | 제2 기갑 사단 제16 군단 제19 군단 제2 기갑군 |
참전 | 제1차 세계 대전 베르됭 전투 러시아 내전 에스토니아 독립 전쟁 제2차 세계 대전 폴란드 침공 프랑스 전투 스당 전투 바르바로사 작전 비아위스토크-민스크 전투 스몰렌스크 전투 키예프 전투 모스크바 전투 |
훈장 | 백엽 기사 철십자 훈장 |
2. 생애
하인츠 구데리안은 1888년 6월 17일 서프로이센 헬름노(1920년부터 폴란드)에서 프로이센 장교의 아들로 태어났다. 군 주둔지에서 성장한 그는 1903년 군사 사관학교에 입학, 1907년 장교 후보생으로 경보병 대대에 입대했다. 1908년 소위로 진급, 1913년 마르게레테 괴르네와 결혼하여 두 아들을 두었다.
제1차 세계 대전 발발 당시 구데리안은 통신 장교로 복무, 1914년 대위로 진급했다. 1915년부터 1916년까지 제4군 신호 정보 담당관으로 베르됭 전투에 참전했다. 1918년 참모 부대에 임명되어 점령된 이탈리아에서 작전 장교로 종전을 맞았다. 그는 독일의 휴전 협정에 반대하며, 독일 제국이 계속 싸워야 한다고 믿었다.
제2차 세계 대전에서 구데리안은 전격전의 핵심 인물로 활약했다. 폴란드 침공, 프랑스 침공에서 기갑 부대를 지휘하여 빠른 승리를 이끌었고, 독소전쟁 초기에도 성과를 거두었다. 그러나 모스크바 전투에서 실패하고 아돌프 히틀러와의 갈등으로 해임되었다.
전후 구데리안은 미군에 항복, 뉘른베르크 재판에서 전범으로 기소될 뻔했으나 무혐의로 석방되었다. 이후 회고록 《전격전》(원제: Erinnerungen eines Soldaten)을 출판하여 베스트셀러 작가가 되었으며, 1954년 서독에서 사망했다.
2. 1. 제2차 세계 대전 이전
1888년 프로이센 왕국 서부 쿨름(Kulm) (현 폴란드 헤움노)에서 육군 장교의 아들로 태어났다. 어린 시절부터 군인의 길을 걸어 카를스루에 군사 학교, 베를린 육군사관학교를 졸업했다.1907년 장교 후보생으로 하노버 제10엽병 대대에 배속되었으나, 곧 메츠 군사 학교로 이동했다. 1908년 소위 임관 후 하노버 제10엽병 대대 제3중대장이 되었다. 1911년 제3무선통신 대대로 이동, 1913년 마르가레테 괴르네와 결혼하여 두 아들을 두었다.
제1차 세계 대전 발발 당시 통신 장교로 참전, 1914년 대위로 진급했다. 1915년 제4군 신호 정보 담당관으로 베르됭 전투에 참전했다. 1918년 참모 부대에 임명되었고, 종전 후 베르사유 조약으로 감축된 독일군에 잔류했다.
병무국 산하 교통병감부(독일어: Inspektion der Verkehrstruppen)에서 자동차 수송 및 통신을 담당하며, 존 프레드릭 찰즈 브라, 리델 하트, 샤를 드 골 등의 영향을 받아 기갑전 전술을 연구했다. 독소 비밀 군사 협력에 따라 소련에서 전차 전술 교육 및 훈련에 관여하기도 했다.
1927년 소령 진급 후 베를린에서 기동 전술 연구를 시작, 훗날 전격전의 토대가 되는 전술을 고안했다. 1931년 중령, 1933년 대령으로 진급하며 연구를 지속했다.
1935년 재군비 선언 후 신설된 3개 장갑 사단 중 제2기갑사단 사단장에 임명되었다. 1937년 저서 《'''Achtung Panzer!''' (전차에 주목하라!)》를 출판, 전차, 장갑척탄병, 폭격기 등을 결합한 전격전 전술을 제시했다.
1938년 오스트리아 병합 당시 제2기갑사단과 LSSAH 연대를 이끌고 빈에 진군하여 자신의 이론을 입증했다. 같은 해 소장 진급, 제16군단 군단장이 되어 체코 주데텐 지방 진주 임무를 수행했다. 이후 신속 부대 장관 (Inspekteur der Schnelltruppen)에 취임했으나, 실권은 없었다.
아돌프 히틀러는 구데리안의 전차 부대 집중 운용에 주목, 국가사회주의 자동차단(NSKK)을 창설하여 자동차 운전자와 수리 기술자를 양성하는 등 그를 후원했다.
2. 2. 제2차 세계 대전
1939년 폴란드 침공, 1940년 프랑스 침공, 독소전쟁 등 주요 전역에서 구데리안은 전격전 전술을 활용하여 독일군에 승리를 안겨주었다. 구데리안은 1940년 12월부터 1941년 4월까지 독일을 방문했던 일본의 야마시타 도모유키가 이끌었던 육군 군사 시찰단에게 전격전에 관한 강의를 하기도 했다.[1]하지만, 독소전쟁에서 그의 전격전은 한계를 드러내기 시작했다. 특히, 1941년 겨울, 모스크바 전투에서 독일군은 소련군의 강력한 저항과 혹독한 추위, 그리고 보급 문제로 인해 큰 타격을 입었다. 구데리안은 전차 부대의 집중 운용과 항공 지원을 통한 신속한 돌파를 추구했지만, 소련군의 끈질긴 방어와 넓은 전선은 그의 전술을 무력화시켰다.
1941년 5월까지 구데리안은 바르바로사 작전이 선제 타격이라는 히틀러의 공식 입장을 받아들였다. 그는 국가 사회주의의 몇 가지 핵심 요소를 받아들였다. 영토 확장의 레벤스라움 개념과 소위 유대-볼셰비키의 위협 파괴였다.

구데리안의 제2 기갑군은 6월 22일 부크강을 건너 드네프르강으로 진격하면서 공세를 시작했다. 제2 및 제3 기갑군의 연합군은 민스크 포위망을 닫아 30만 명의 포로를 잡은 후 스몰렌스크로 공격했다. 구데리안은 1941년 7월 17일 기사십자 철십자 훈장을 수여받았다. 스몰렌스크 전투가 끝나고 소련 제16군, 소련 제19군, 소련 제20군이 포위되어 파괴된 후, OKH 참모총장 프란츠 할더 장군은 모스크바를 향한 전면적인 진격을 지지했다. 할더는 구데리안에게 총통 지휘 본부로 가서 모스크바에 대한 공격을 계속하라는 육군의 주장을 펼치라고 지시했다.
9월 15일까지 제1 기갑군과 제2 기갑군을 포함한 독일군은 역사상 최대 규모의 포위전인 키예프 전투를 완료했다. 전투 중 제2 기갑군이 남쪽으로 방향을 틀면서 키예프 동쪽의 소련 남서부 전선 전체를 파괴하여 9월 26일까지 붉은 군대에 60만 명 이상의 손실을 입혔다. 그러나 이 작전은 많은 비용이 들었다. 독일군은 3개월 전에 비해 전차 수가 절반에 불과했다. 그들은 소모전에 갇혔고, 국방군은 이에 대한 준비가 되어 있지 않았다. 구데리안의 제2 기갑군은 최악의 상태였다. 작동 가능한 전차는 21%에 불과했다.
11월, 모스크바 남쪽에 있는 툴라와 카쉬라에 대한 제2 기갑군의 공격은 제한적인 성공을 거두었고, 구데리안은 전선의 상황에 따라 절망과 낙관 사이를 오갔다. 독일 고위 사령부의 압력에 직면한 귄터 폰 클루게 원수는 마침내 약화된 제4군의 남쪽 측면을 12월 1일에 공격에 투입했다. 전투 후, 구데리안은 모스크바에 도달하지 못한 독일군의 실패에 대해 제4군의 공격 지연을 비난했다. 이러한 평가는 클루게의 남은 군대의 능력을 지나치게 과대평가했다. 또한 모스크바가 독일군이 포위하거나 정면 공격으로 점령할 수 있을 만큼 병력이 부족한 대도시라는 현실을 제대로 인식하지 못했다.
2. 2. 1. 폴란드 침공
1939년 폴란드 침공에서 구데리안은 제19군단을 지휘하며 독일 본토와 동프로이센을 잇는 단치히 회랑을 빠르게 통과하여 브레스트-리토프스크까지 진격했다. 당시 제19군단은 독일의 6개 기갑 사단 중 하나를 포함하여 독일 장갑 전투 차량의 14.5%를 통제했다.구데리안은 지휘관이 전선에서 상황을 직접 파악해야 한다는 독일의 "전방 지휘" 개념에 따라, 무선 장비를 갖춘 지휘 차량을 이용하여 군단 지휘부와 긴밀히 소통했다.
9월 5일, 제19군단은 동프로이센에서 서쪽으로 진격하는 부대와 합류하여 첫 승리를 거두었다. 이후 바르샤바를 향해 동프로이센을 가로질러 군단을 이동시켰다. 9월 9일에는 제10기갑사단의 지원을 받아 폴란드 깊숙이 진격, 브레스트 리토프스크에서 작전을 마무리했다. 제19군단은 10일 만에 330km를 진격하며, 350대의 탱크 중 단 8대만 손실되는 성과를 거두었다.
9월 16일, 구데리안은 브레스트 리토프스크 공격을 개시했고, 다음 날 소련군이 폴란드를 침공했다. 구데리안은 도시에 독일군이나 소련군에게 항복하라는 최후통첩을 보냈고, 수비대는 독일군에 항복했다. 소련의 참전으로 폴란드군의 사기가 저하되면서 구데리안 군대에 대량으로 항복하기 시작했다. 이러한 전과로 구데리안은 철십자 기사십자 훈장을 받았다.

그러나 침공 과정에서 독일군은 1929년 제네바 포로 협약과 자국의 군대 규정을 무시하고 전쟁 포로를 학대하고 살해했다. 구데리안 군단은 친위대(SS)가 폴란드 국민에 대한 나치 범죄를 시작하기 전에 철수했지만, 구데리안은 아들 하인츠 귄터 구데리안으로부터 살인 작전과 유대인 강제 이송에 대해 듣고도 어떠한 항의도 하지 않았다.
2. 2. 2. 프랑스 침공
1940년 프랑스 전역에서 구데리안은 에리히 폰 만슈타인의 작전안에 따라 아르덴 고지를 돌파한 뒤 아미앵에서 됭케르크까지 쾌속 진격을 실시했다. 이러한 진격에 독일군 상층부에서 여러 차례 정지 명령이 내려왔다.[1] 됭케르크에 이르러 공격은 금지되어, 됭케르크의 기적을 눈앞에 보고만 있어야 했고, 아무 행동도 할 수 없었다.[1] 이후 남하하여 알프스까지 진격해 프랑스군을 괴멸시키는 원동력이 되었다.[1]구데리안은 세당 전투에서 프랑스 전선을 돌파하는 공격을 이끌었다. 구데리안의 기갑 집단은 "바다로의 질주"를 이끌었고, 영국 원정군(BEF)과 프랑스군이 덩케르크 철수 작전에서 포위되었다. 5월 21일 아라스 전투에서 영국군의 반격으로 독일군의 진격이 늦춰졌고, BEF는 철수 지점 주변에 방어선을 구축할 수 있었지만, 히틀러는 잠재적인 역전과 지원받지 못하는 기갑 부대가 도시 전투에 투입되는 것을 우려하여 중지 명령을 내렸다. 5월 26일 공격 재개가 일반 명령으로 내려졌지만, 그 시점에는 연합군이 다시 결집하여 완강하게 저항했다. 5월 28일, 손실이 증가하자 구데리안은 기갑 공격을 포기하고 전통적인 포병-보병 작전을 선호하도록 권고했다. 그 후 구데리안은 스위스 국경으로 진격하라는 명령을 받았다. 6월 9일 베이강 방어선에서 시작된 공세는 6월 17일 마지노선 방어와 남은 프랑스군의 포위로 마무리되었다.

공격에 앞서 구데리안은 에발트 폰 클라이스트 기병 대장 휘하의 기갑 집단에 속하는 제19기갑군단(3개 기갑 사단 기반)의 사령관이 되었다. 공격 전에 클라이스트나 공군의 후고 슈페를레와의 의견 대립이 있었지만, 공격 본전에서는 연합군을 허를 찌르는 기갑 부대의 집중으로 스당을 돌파했다. 아르덴 운하의 다리를 확보한 후에는 교두보를 확보하라는 당초 명령을 거부하고, 전 병력을 동원하여 아미앵에서 오아즈 강까지 쾌속 진격을 감행했다. 이 진격은 프랑스군에 큰 타격을 입혔고, 프랑스의 운명은 결정되었다. 그러나 구데리안의 쾌속 진격은 클라이스트나 히틀러에게는 측면으로부터의 공격을 초래할 위험한 것이라고 비춰졌다. 이 때문에 5월 16일에는 기갑 부대를 정지시키라는 히틀러의 명령이 내려졌고, 이에 반발한 구데리안은 클라이스트로부터 지휘권을 박탈당했다. 그러나 클라이스트의 상관이었던 제12군 사령관 빌헬름 리스트 상급대장에 의해, 구데리안은 제19기갑군단의 지휘를 계속 맡게 되었다. 5월 19일에는 A 집단군 직속의 호트 기갑 집단으로 전속되어 진격을 재개했다.
2. 2. 3. 독소전쟁
1941년 6월 22일 바르바로사 작전이 시작되면서, 구데리안은 중부 집단군 소속 제2기갑집단(이후 제2기갑군으로 승격)을 지휘했다. 헤르만 호트 상급대장이 이끄는 제3기갑집단과 함께 민스크 포위전, 스몰렌스크 포위전에서 큰 성과를 거두었다. 그의 전차에는 그의 이름 첫 글자인 'G'가 새겨져 있었고, '위대한 하인츠'라는 별명이 붙었다.[1]구데리안은 빠르게 스몰렌스크를 점령하고 모스크바 침공을 시작하려 했으나, 남쪽 키예프 방면으로 진격하라는 명령을 받았다. 그는 남부 집단군과 함께 키예프 포위전을 성공시켰다. 이 전투는 “야전군의 격멸”과 “중요 거점(모스크바) 탈취”라는 상반된 목표에서 야전군 격멸을 우선시한 작전이었다. 구데리안은 훗날 모스크바로 진격했어야 했다고 회고했지만, 당시 남부 집단군의 진격이 곤란했고 보급 문제도 있었기 때문에 히틀러의 선택이 옳았다는 의견도 많다.[1]
10월, 모스크바 진격이 재개되면서 구데리안은 브랸스크, 비얀지마에서 2중 포위전을 성공시켰다. 11월에는 제3기갑군의 게오르그 한스 라인할트 상급대장, 제4기갑군의 에리히 회프너 상급대장과 함께 모스크바 공략을 시작했다. 구데리안은 모스크바 남쪽의 요새화된 툴라를 우회하여 남쪽에서 모스크바를 노렸으나, 병력, 보급, 준비 부족과 툴라 우회 과정에서 입은 피해, 돌출된 남쪽 개방부의 존재, 북쪽의 2개 기갑군과의 간격을 메워야 하는 문제, 제4군 귄터 폰 클루게 원수와의 협력 문제, 그리고 소련군이 극동 시베리아에서 일본과의 전투에 대비해 배치했던 정예부대를 불러와 예비 전력을 확보한 것 때문에 공격은 어려워졌다.[1]
이후 클루게의 고발로 지휘권을 박탈당했다. 12월, 구데리안은 히틀러에게 작전 중지 및 후방 월동 준비를 건의했으나, 이로 인해 사령관직에서 해임되었다.[1]
2. 3. 전후
1945년 5월 10일 미군에 항복한 구데리안은 포로가 되었다. 뉘른베르크 재판에서 소련과 폴란드는 그를 전범으로 기소하려 했으나, 결국 기소는 중지되었고 혐의 없음으로 결론 내려졌다. 그의 전쟁 중 행위는 정당한 군인의 자세에 입각한 것으로 판정되었다. 그는 재판에서 군사 작전, 특히 폴란드 침공에 대해 증언했다.1948년 6월 17일 석방된 후, 구데리안은 미군 육군 기갑학교에서 강의하고 회상록을 집필했다. 1951년에는 바실 리델 하트의 권유로 회고록 《전격전》(원제: Erinnerungen eines Soldaten, 한 군인의 회상)을 출판했다. 이 책은 1952년 영어판으로도 출간되었으며, 《Panzer Leader (전차 지휘관)》라는 제목으로 세계적인 베스트셀러가 되었다.
구데리안은 정치적인 팸플릿을 쓰기도 했는데, 히틀러 체제를 반소련 "독재에 맞서 싸우기 위한 독재"라고 평가하며, 전쟁을 "국민, 나아가 유럽의 생명을 구하기" 위한 것이었다고 주장했다. 영국 정보기관 보고에 따르면, 1949년 7월 22일 전 대관구 지도자 카를 카우프만이 설립한 네오 나치 조직 '브루더샤프트'에 가입했다고 한다.
1954년 5월 14일, 구데리안은 서독 남부 슈반가우에서 사망했다. 당시 독일 연방 공화국에는 군대가 없었기 때문에, 내무 장관 허가를 얻은 국경 경비대가 참석하여 조총 발사가 거행되었다. 그의 묘는 고슬라에 있다.
3. 전술 이론
구데리안은 만슈타인, 클라이스트, 에르빈 롬멜 등과 함께 독일군 전술 발전에 기여했으며, 특히 전차 개발에 큰 영향을 끼쳐 '기갑부대의 아버지'로 평가받는다.
1937년, 오스발트 루츠의 권유로 저술한 『'''Achtung Panzer!''' (전차에 주목하라!)』에서 구데리안은 전차를 주력으로, 기동성을 높인 보병 (장갑척탄병)과 폭격기의 화력 지원을 결합하여 적의 약점을 집중 공격하는 전술을 제시했다. 이 책은 오스트리아 군사 대학교의 필독서로 지정될 정도로 국내외에서 높은 평가를 받았다.
1933년 아돌프 히틀러가 총리로 취임한 후, 구데리안이 지휘한 군사 훈련을 격찬하면서 구데리안은 히틀러의 지지를 확신하게 되었다. 1935년 독일 재군비 선언에 따라 3개 장갑 사단이 신설되면서 구데리안은 제2장갑사단 사단장으로 임명되었다.
1938년 오스트리아 병합에서 구데리안은 제2장갑사단과 LSSAH 연대를 이끌고 단시간에 빈으로 진주했다. 이 과정에서 차량 고장 문제가 발생했지만, 구데리안은 장거리 기동의 불가피한 손실이며 신속히 수리되었다고 반박했다. 이후 구데리안은 제16기갑군단장, 신속 부대 장관을 역임하며 기갑 부대 발전에 힘썼으나, 신속 부대 장관직은 실질적인 권한이 없었다.
3. 1. 전격전의 핵심 요소
구데리안은 1930년대에 기갑 사단 개념과 전격전으로 알려지게 된 기계화된 공격 전술 개발에 중요한 역할을 했다. 그의 제3 기동 수송 대대는 미래 독일 기갑 부대의 청사진이 되었다. 그러나 그의 역할은 회고록에서 주장한 것보다 덜 중요했으며, 전후 시대 역사가들이 이를 반복했다.[1]구데리안과 그의 직속 상관 루츠는 상호 의존적인 관계였다.[2] 두 사람은 기갑 부대를 창설하려는 공동의 목표를 가지고 끊임없이 노력했다. 구데리안은 기계화된 전쟁을 옹호하는 대외적인 인물이었고, 루츠는 배후에서 활동했다. 구데리안은 기갑 부대 개념을 홍보하고 지원을 확보하며 자원을 확보하기 위해 나치 정권에 접근했다. 여기에는 히틀러에게 직접 개념을 시연하는 것도 포함되었다. 루츠는 구데리안의 동료들을 향한 종종 오만하고 논쟁적인 행동을 설득하고, 달래고, 보상했다.
현대 역사가 피에르 바티스텔리는 기갑 부대 뒤에 숨겨진 각 아이디어를 정확히 누가 개발했는지 결정하기 어렵다고 적었다. 발터 네링과 헤르만 브라이트와 같은 다른 많은 장교들도 관련되었다. 그러나 구데리안은 기갑 부대를 위해 개발된 통신 시스템을 개척한 것으로 널리 받아들여지고 있다. 전격전의 핵심 원리인 독립성, 대규모, 기습은 루츠에 의해 기계화된 전쟁에 대한 교리적 진술에서 처음 발표되었다.
1936년 가을, 루츠는 구데리안에게 ''Achtung – Panzer!''를 집필하도록 요청했다. 그는 기동 부대 사령부와 전략적 기계화 전쟁을 홍보하는 논쟁적인 어조를 요청했다. 그 결과물에서 구데리안은 학술 강의, 군사사 검토, 그리고 루드비히 폰 아이만스베르거가 1934년에 저술한 이 주제에 관한 책에 부분적으로 의존하는 기갑전 이론을 혼합했다. 비록 제한적이긴 했지만, 이 책은 여러 면에서 성공적이었다. 이 책에는 육군을 기계화하려면 해결해야 할 두 가지 중요한 질문, 즉 육군에 어떻게 연료, 예비 부품, 교체 차량을 공급할 것인가와 특히 도로에 묶인 대규모 기계화 부대를 어떻게 이동시킬 것인가가 포함되어 있었다. 그는 세 가지 광범위한 영역(연료 보급, 예비 부품, 도로 접근)에 대한 논의에서 자신의 질문에 답했다.
3. 2. 전차 개발에 대한 기여
구데리안은 전차 개발과 전격전 전술 발전에 핵심적인 역할을 수행했다. 1930년대에 그는 기갑 사단 개념과 기계화된 공격 전술을 구체화하는 데 중요한 역할을 했다.[1] 그의 제3 기동 수송 대대는 훗날 독일 기갑 부대의 모델이 되었다.[1]구데리안은 전차 개발에 다음과 같은 구체적인 제안을 했다.
- 확장성 고려: 주포 개량 등 성능 향상을 위한 개조가 쉽도록 전차 내부에 충분한 공간을 확보할 것을 제안했다.
- 무게 지침 제시: 교량 통과 가능 무게를 기준으로 전차 전체 무게에 대한 지침을 제시하여 방어력과 기동성의 균형을 맞추고자 했다.
- 최적 승무원 구성: 전차장, 장전수, 포수, 조종수, 통신수의 5명이 전차 승무원으로 가장 이상적인 조합이라고 결론 내렸다.
- 통신 시스템 개선: 모든 전차에 무전기와 내부 통신용 마이크를 장착하여 지휘 체계를 획기적으로 개선했다. 당시 전차는 지휘관 차량 외에는 무전기가 없어 깃발 신호에 의존해야 했다.[2]
- 전차장용 큐폴라 설치: 360도 시야 확보가 가능한 전차장 전용 큐폴라를 설치하여 전차장이 안전하게 전황을 파악하고 효과적으로 전차를 지휘할 수 있도록 했다.[2]
이러한 구데리안의 제안은 전차의 성능을 향상시키고, 효율적인 운용을 가능하게 했다. 특히, 통신 시스템 개선은 전격전의 핵심 요소 중 하나였다.[1]
1936년 가을, 구데리안의 직속 상관이었던 루츠는 그에게 ''Achtung – Panzer!'' 집필을 요청했다.[1] 이 책에서 구데리안은 기동 부대 사령부와 전략적 기계화 전쟁을 주장했다.[1] 그는 루드비히 폰 아이만스베르거의 저술 등을 참고하여 기갑전 이론을 발전시켰다.[1]
3. 3. 현대전 및 한국전쟁에의 영향
구데리안은 1930년대에 기갑 사단 개념과 전격전으로 알려진 기계화 공격 전술 개발에 중요한 역할을 했다.[1] 그의 이론은 제2차 세계 대전에서 독일군 전술의 청사진이 되었지만, 회고록에서 주장한 것만큼 역할이 크지 않았다는 평가도 있다.[2]구데리안은 기갑 부대 통신 시스템 개발에 기여했으며, 전격전의 핵심 원리인 독립성, 대규모, 기습은 그의 상관 루츠가 처음 발표했다. 구데리안은 저서 ''Achtung – Panzer!''에서 기갑전 이론을 제시하고, 기계화 부대의 연료 공급, 예비 부품, 이동 문제를 해결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전후 구데리안은 회고록 『판처 리더』를 통해 자신을 전격전의 혁신가이자 독일 기갑 부대의 "아버지"로 묘사했다. 그러나 최근 연구들은 그의 회고록 내용에 의문을 제기하며, 그가 기갑 부대 발전에 기여한 여러 인물 중 한 명일 뿐이라고 평가한다.
4. 논란과 비판
하인츠 구데리안은 뛰어난 군사적 업적에도 불구하고, 그의 회고록과 실제 행적 사이에는 여러 논란과 비판이 존재한다.
피에르 바티스텔리는 구데리안이 회고록에서 자신의 전쟁 범죄, 특히 바르바로사 작전 중의 책임을 은폐하려 했다고 주장한다.[1] 그의 부대는 코미사르 명령을 수행하여 적군 정치 장교를 살해했고, 1944년 바르샤바 봉기 이후 보복에도 관여했다.[1]
로널드 스멜서와 에드워드 J. 데이비스는 구데리안의 회고록이 "명백한 거짓, 반 진실, 누락"으로 가득 차 있다고 비판한다. 예를 들어 구데리안은 코미사르 명령이 자신의 부대에 전달되지 않았다고 주장했지만, 실제로는 수행되었다는 증거가 있다. 또한 바르바로사 법령에 대해서도 거짓말을 하며, 독일군이 소련 민간인에게 저지른 범죄를 축소하려 했다.
구데리안은 히틀러로부터 토지와 뇌물을 받았으며, 폴란드 영지를 퇴직 선물로 받았다고 주장했지만, 실제로는 강제 퇴거된 폴란드인들의 땅이었다.[1] 2000acre에 달하는 이 영지는 의 가치를 지녔으며, 프랑스 유대인들로부터 약탈한 재산으로 채워졌다.[1]
1950년에 출판된 팸플릿에서 구데리안은 서방 국가들이 전쟁 중에 잘못된 편을 선택했다고 주장하며, 독일이 "볼셰비키 위협"에 맞선 "유럽의 방어자"였다고 옹호했다. 심지어 뉘른베르크 재판에서 처형된 이들을 "유럽의 방어자"라고 칭송했다.
데이비드 슈타헬은 전후 독일 장군들의 왜곡된 이미지가 쉽게 받아들여졌다고 지적하며, 구데리안을 포함한 독일 장군들이 나치 정권의 대량 학살에 적극적으로 참여했음을 강조한다.
4. 1. 나치 협력 논란
구데리안은 자신의 회고록에서 나치 정권과의 협력 및 전쟁 범죄 연루를 부인했지만, 여러 증거와 정황은 그의 주장에 의문을 제기한다.프리랜서 역사가 피에르 바티스텔리는 구데리안이 회고록에서 역사를 다시 썼다고 주장하며, 특히 바르바로사 작전 중 전쟁 범죄에 대한 책임을 은폐하려 했다고 지적한다.[1] 그의 부대는 적군 정치 장교를 살해하는 코미사르 명령을 수행했으며, 1944년 바르샤바 봉기 이후 보복에도 관여했다.[1]
구데리안은 히틀러로부터 토지와 뇌물을 받았지만, 회고록에서는 이를 언급하지 않았다.[1] 그는 폴란드 영지를 퇴직 선물로 받았다고 썼지만, 실제로는 상당의 2000acre 면적의 영지를 강제로 쫓겨난 폴란드인들로부터 빼앗은 것이었다.[1] 또한, 구데리안은 프랑스 유대인들에게서 훔친 재산으로 영지를 채웠다.[1]
1944년 히틀러 암살 미수 사건 당시, 구데리안은 암살 계획을 사전에 인지했을 가능성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계획에 가담하지도 않고 고발하지도 않았다.[1] 오키 타케시는 이를 기회주의적인 태도로 해석한다.[1]
쿠르트 차이츨러의 후임으로 육군 참모총장 대리에 임명된 구데리안은 '명예 법정'의 일원으로서 암살 계획 가담자들의 불명예 제대를 결정했으며, 이는 인민 법정에서 가담자들이 처형되는 결과로 이어졌다.[1]
1945년 미국군에 항복한 후, 구데리안은 적극적으로 협력하여 전범 기소를 피했다.[1] 폴란드 인민 공화국의 신병 인도 요구에도 불구하고 미국은 이를 거절했다.[1]
구데리안은 회고록에서 전쟁 범죄에 관여하지 않았다고 주장했지만, 폴란드 전 직후 아들로부터 친위대의 유대인 학살 보고를 받고도 이를 보고하지 않았다.[1] 또한, 코미사르 명령과 바르바로사 법령에 대해 거짓말을 하며 자신의 부대가 이러한 명령을 수행하지 않았다고 주장했지만, 이는 사실과 다르다.[1]
데이비드 슈타헬은 독일 장군들이 나치 정권의 대량 학살에 적극적으로 참여했음을 강조하며, 구데리안 역시 예외가 아니었음을 시사한다.[1]
4. 2. 전쟁 범죄 연루 의혹
프리랜서 역사가 피에르 바티스텔리는 구데리안이 자신의 회고록에서 역사를 다시 썼다고 주장하며, 특히 바르바로사 작전 중 그의 전쟁 범죄에 대한 책임을 은폐하려 했다고 지적한다.[2] 그의 지휘 하에 있던 부대는 적군 정치 장교들을 살해하는 코미사르 명령을 수행했다.[2] 그는 또한 1944년 바르샤바 봉기 이후의 보복에 큰 역할을 했다.[2]다른 장군들과 마찬가지로 구데리안은 자신의 회고록에서 독일과 독일 국민에 대한 충성심을 강조했다. 그러나 그는 히틀러가 토지와 월 급여를 포함한 뇌물로 이 충성심을 샀다는 것을 언급하지 않았다. 구데리안은 자신의 회고록에서 폴란드 영지를 퇴직 선물로 받았다고 썼다. 1240000RM 가치가 있는 그 영지는 2000acre 면적을 차지했으며, 점령된 폴란드의 바르테가우 지역의 데이펜호프(현재 Głębokie, 폴란드)에 위치해 있었다. 그곳에 살던 사람들은 강제로 쫓겨났다.
로널드 스멜서와 에드워드 J. 데이비스는 저서 "동부 전선의 신화"에서 구데리안의 회고록이 "명백한 거짓, 반 진실, 누락"과 노골적인 "헛소리"로 가득 차 있다고 결론짓는다. 구데리안은 역사적 증거와 반대로, 범죄적인 코미사르 명령이 그의 부대에 의해 수행되지 않았다고 주장했는데, 그 이유는 "그것이 그의 기갑 부대에 도달하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그는 또한 독일군이 소련 민간인에 대해 저지른 범죄에 대한 기소를 미리 면제해주는 바르바로사 법령에 대해 거짓말을 하면서, 그것이 결코 수행되지 않았다고 주장했다. 구데리안은 민간인에 대해 배려심이 많았고, 러시아 문화 유물을 보존하기 위해 애썼으며, 그의 부대가 소련 시민을 "해방"했다고 주장했다.
데이비드 슈타헬은 영어권 역사가들이 전후 시대에 독일 장군들의 왜곡된 이미지를 너무 쉽게 제시했다고 썼다. 그의 저서 "바르바로사 작전과 독일의 동부 전선에서의 패배"에서 슈타헬은 다음과 같이 썼다. "히틀러의 군대를 통제하는 사람들은 명예로운 사람들이 아니었고, 국가의 충실한 종으로서 그들의 명령을 수행했다. 정권에 대한 단호한 지지를 통해, 장군들은 의심 없이 끊임없이 공격 전쟁을 수행했고, 바르바로사 작전이 시작되자, 기꺼이 나치 정권의 대량 학살에 참여했다."
구데리안은 회고록에서 전쟁 범죄에 일절 관여하지 않았다고 주장하지만, 많은 정황 증거로 볼 때 그의 주장에 의문이 제기된다. 폴란드 전 직후, 아들 하인츠 귄터로부터 폴란드에서 친위대가 유대인 학살 등의 불법 행위를 저지르고 있다는 보고를 받았지만, 구데리안 자신은 이를 상관에게 보고하지 않았다.
1941년 3월 30일, 히틀러는 소련군 포로에 대한 일반 군형법에 따른 재판을 중지하라고 명령했으며, 6월 6일에는 소련군 정치 장교를 재판 없이 처형하라는 코미사르 명령을 발령했다. 구데리안은 회고록에서 군형법 중지에 대해서는 하부 부대에 전달하는 것을 금지했고, 코미사르 명령에 대해서는 존재 자체를 몰랐다고 진술했다. 그러나 러셀 A. 하트(Hart, Russell A)는 구데리안 휘하의 레멜센 제47 기갑군단장이 코미사르와 파르티잔 처형을 독소전 개시 초부터 반복해서 명령했음을 지적하며, 구데리안의 기술은 허위라고 주장했다. 또한 독소전 초기, 전선 부근에서 유대인 학살을 자행한 아인자츠그루펜은 국방군 부대의 지원을 받았으며, 실제로 부대 지휘관은 국방군 사령관과 아무런 문제가 없었다고 증언했다. 하트는 구데리안이 아인자츠그루펜의 행위에 눈치채지 못했을 리 없다고 지적했다.
휴직 중이던 1942년에는 구데리안 가문의 선조 영지가 있던 폴란드 포젠 주의 토지 구입과 관련하여 히틀러로부터 제안을 받았다. 처음 구데리안이 희망했던 토지는 얻지 못했지만, 다른 농장이 준비되어 구데리안은 직접 그 농장을 선택했다. 1944년 2월에는 이 농장의 대금과 개업 비용을 포함한 1240000RM에 달하는 총통의 하사금을 받았다. 만슈타인의 부관 Alexander Stahlberg|알렉산더 슈탈베르크de의 회고록에 따르면, 이 이야기를 들은 만슈타인은 구데리안이 구입한 토지에 살고 있던 폴란드인 지주에 대해 물었지만, 구데리안은 "거기에는 더 이상 폴란드인은 없었고, 어디로 갔는지 모르겠다"라고 대답했다. 이 농장 취득에 대해 구데리안은 자신의 회고록에서 언급하지 않았다.
4. 3. 역사적 평가
구데리안은 제2차 세계 대전에서 활약한 독일군 장성으로, 기동전의 전문가로 널리 알려져 있다. 그의 군사적 능력은 높이 평가받지만, 나치 정권과의 관계 및 전쟁 범죄 연루 의혹은 논란의 대상이다.1945년 미군에 항복한 구데리안은 뉘른베르크 재판에서 기소되지 않았고, 1948년 석방되었다. 이후 미군 육군 기갑학교에서 강의하고 회고록을 집필했으며, 1954년 사망했다.[1] 그의 아들 하인츠 귄터 구데리안도 독일 연방군과 북대서양 조약 기구(NATO)에서 복무했다.
구데리안은 기갑 부대 창설과 운용에 핵심적인 역할을 수행했다. 1940년 프랑스 침공과 1941년 바르바로사 작전에서 그의 기갑 부대는 뛰어난 기동력을 발휘하여 독일군의 승리에 크게 기여했다. 스탈린그라드 전투 패배 이후 1943년에는 기갑 부대 감찰관에 임명되어 기갑 부대 재건과 훈련을 담당했다. 알베르트 슈페어와 협력하여 장갑 전투 차량 생산 증대에 힘썼으나, 판터와 타이거 전차의 결함 수정에는 제한적인 성공만을 거두었다.
쿠르스크 전투 작전에 대해서는 큰 손실을 우려하여 반대 입장을 표명했다. 히틀러와의 대화에서 "올해 우리가 왜 동쪽에서 공격을 감행하는 겁니까?"라고 질문했고, 히틀러는 "그대가 옳네. 이 공격에 대해 생각할 때마다 속이 뒤집힌다."라고 답했다. 구데리안은 "그렇다면 이 상황에 대한 올바른 태도를 가지고 계시는군요. 그냥 내버려 두십시오."라고 결론지었다.
그러나 구데리안은 자신의 회고록에서 전쟁 범죄 책임을 은폐하려 했다는 비판을 받는다. 그의 부대는 코미사르 명령을 수행하여 적군 정치 장교들을 살해했고, 1944년 바르샤바 봉기 진압에도 관여했다.[1] 또한, 히틀러로부터 토지와 뇌물을 받았으며, 폴란드 영지를 퇴직 선물로 받아 그곳 주민들을 강제 퇴거시켰다.[1]
1950년 발표한 팸플릿에서는 서방 국가들이 전쟁 중 잘못된 편을 선택했다고 주장하며, 독일이 "볼셰비키 위협"에 맞선 "유럽의 방어자"였다고 옹호했다. 또한 뉘른베르크 재판에서 처형된 이들을 "유럽의 방어자"라고 칭송했다.
구데리안의 회고록은 많은 논란을 불러일으켰다. 로널드 스멜서와 에드워드 J. 데이비스는 그의 회고록이 "명백한 거짓, 반 진실, 누락"으로 가득 차 있다고 비판했다. 구데리안은 코미사르 명령이 자신의 부대에 전달되지 않았다고 주장했지만, 실제로는 그의 부대가 이를 수행했다는 증거가 존재한다. 또한, 소련 민간인에 대한 배려와 문화 유물 보존을 주장했지만, 실제로는 독일군이 소련 민간인에게 저지른 범죄에 대한 책임을 회피하려 했다.
데이비드 슈타헬은 전후 독일 장군들의 왜곡된 이미지가 쉽게 받아들여졌다고 지적하며, "히틀러의 군대를 통제하는 사람들은 명예로운 사람들이 아니었고, 국가의 충실한 종으로서 그들의 명령을 수행했다."라고 비판했다.
구데리안의 회고록은 여전히 인기가 있지만, 그의 군사적 업적과 나치 정권과의 관계에 대한 평가는 엇갈린다. B.H. 리델 하트와 같은 군사 이론가들은 그를 "역사상 위대한 지휘관" 중 한 명으로 묘사했지만, 케네스 맥키와 같은 전기 작가들은 그의 업적을 과장했다는 비판을 받는다.
1976년, 워게임 잡지 ''스트래티지 앤 택틱스''는 구데리안을 "전격전의 창시자"로 칭송하며, 그를 나치 정권의 범죄와는 무관한 완벽한 전문가로 묘사했다.
최근 연구에서는 구데리안의 회고록에 과장과 기만이 포함되어 있으며, 그의 전략적 능력에 의문을 제기하는 주장도 제기되고 있다. 또한, 나치의 전쟁 범죄에 적극적으로 관여하지는 않았지만, 그 비도덕성을 묵인했다는 사실이 밝혀지고 있다.
마리온 폰 되네호프 백작 부인은 1965년 "구데리안 대장은 현대적인 장갑 병과의 아버지이자 위대한 '노련한 군인'이었다는 점은 의심의 여지가 없다고 모든 전문가가 평가하는 인물이다. 하지만, 그와는 별개로 그의 성격 때문에 행한 행동은 결코 모범이 될 수 있는 것은 아니다."라고 평가했다.
구데리안은 동료들과의 관계가 원만하지 못했고, 특히 클루게와의 관계는 매우 나빴다. 만슈타인과 같이 유능한 인물과도 사이가 좋지 않은 경우가 많았다.[2] 반면, 부하들에 대한 관계는 좋았다.
구데리안은 나치당원은 아니었지만, 베르사유 조약 파기 등 나치당의 주장에 동조했으며, 전후에는 네오나치 조직에 가입하기도 했다. 히틀러에 대해서는 자신의 의견을 받아들여준 것에 대해 긍정적으로 평가했지만, 전선 시찰을 하지 않는 등 후반의 히틀러에 대해서는 비판적인 입장을 보였다. 1944년 7월 20일 히틀러 암살 미수 사건을 일으킨 반 히틀러파 장교들에 대해서는 비판적인 견해를 보였다.
구데리안은 전선을 지휘 차량으로 돌아다닌 최초의 지휘관 중 한 명이었으며, 무선 통신의 중요성을 인식하고 모든 차량에 무전기를 장비했다.
5. 유산
구데리안의 전후 자서전 《판처 리더》는 독자들에게 성공을 거두었다. 그는 자신을 혁신가이자 전쟁 전과 전격전 기간 동안 독일 기갑 부대의 "아버지"로 묘사했다. 이를 통해 그는 1939년부터 1941년까지 전격전의 지휘자로서 자신을 재창조할 수 있었다. 하지만 이것은 과장이었다. 구데리안의 독일어 회고록은 1950년에 처음 출판되었는데, 당시에는 기갑 부대의 발전에 대한 유일한 자료였으며, 독일 군사 기록은 분실되거나 유실된 상태였다. 결과적으로 역사가들은 구데리안의 자기중심적인 자서전에 근거하여 역사적 사건에 대한 해석을 내렸다. 후대의 전기 작가들은 이 신화를 지지하고 더욱 과장했다. 1952년에 구데리안의 회고록은 영어로 재출판되었다. 영국의 언론인이자 군사 이론가인 B. H. 리델 하트는 구데리안에게 자신의 군사 이론이 리델 하트의 이론에 근거했다고 말해 달라고 요청했고, 구데리안은 이에 응했다. 리델 하트는 차례로 서독 재무장을 옹호하게 되었다.
최근 연구에서 역사가들은 구데리안의 회고록에 의문을 제기하고 그들이 만들어낸 신화를 비판하기 시작했다. 바티스텔리는 구데리안의 기록을 검토하여 그가 기갑 부대의 아버지가 아니라고 말했다. 그는 많은 혁신가 중 한 명이었을 뿐이다. 그가 자신의 동료이자 더 유능하다고 평가받는 루츠와 구별되는 두 가지 이유는, 첫째, 그는 주목을 받으려 했고, 둘째, 히틀러와 긴밀한 관계를 유지했기 때문이다. 전격전의 아버지로 자신을 묘사하고 미국인들에게 아첨함으로써 그는 소련으로 인도되는 것을 피했다. 바티스텔리는 그의 가장 놀라운 기술은 이론가나 지휘관으로서가 아니라 작가로서였다고 썼다. 그의 저서 《Achtung-Panzer!》와 《Panzer Leader》는 출판과 동시에 비평적, 상업적 성공을 거두었으며, 그의 사후 여러 해가 지난 지금도 논의되고, 연구되고, 분석되고 있다.
구데리안은 유능한 전술가이자 기술자였으며, 폴란드 침공, 프랑스 공방전, 그리고 소련 침공 초기에 자신의 부대를 성공적으로 이끌었다. 특히 스몰렌스크 진격과 키예프 전투에서 두각을 나타냈다. 리델 하트는 그의 성공 대부분이 상당한 이점을 가진 상황에서 비롯되었으며, 그는 약세의 위치에서 승리를 거둔 적이 없다고 썼다. 하트는 그의 강점이 고의적으로 자신의 기갑 부대와 다른 군대 간의 적대감을 조성하는 것과 같은 그의 결점보다 중요하지 않으며, 이는 재앙적인 결과를 초래했다고 주장한다. 그의 회고록에는 군사적 실패와 히틀러와의 긴밀한 관계에 대한 언급이 생략되어 있다. 제임스 코럼은 저서 《전격전의 뿌리: 한스 폰 젝트와 독일 군사 개혁》에서 구데리안은 회고록과는 별개로 훌륭한 장군이자 일류 전술가였으며, 기갑 사단을 개발하는 데 핵심적인 역할을 한 인물이라고 평가했다.
6. 저작
구데리안은 미국 육군 기갑학교에서 강의를 하거나 집필 활동을 했다. 은행 계좌 동결 및 연금 삭감으로 전쟁 전보다 생활이 어려웠다. 그는 정치적인 팸플릿을 썼는데, 히틀러 체제를 반소련 "독재에 맞서 싸우기 위한 독재"라고 평하며, 전쟁을 "국민, 나아가 유럽의 생명을 구하기" 위한 것이었다고 주장했다. 영국 정보기관 보고에 따르면, 1949년 7월 22일 전 대관구 지도자 카를 카우프만이 설립한 네오 나치 조직 '브루더샤프트'에 가입했다.
1951년 회고록 『전격전』(원제: Erinnerungen eines Soldaten, 한 군인의 회상)을 출판했다. 바실 리델 하트의 권유로 쓰여졌으며, 1952년 발간된 영어판 제목은 『Panzer Leader (전차 지휘관)』이다. 리델 하트는 영국 출판사가 난색을 표한 독일 군인의 민족주의적 표현을 완화하도록 지도했다. 영어판에는 원어판에 없는 리델 하트의 영향을 강조하는 문장이 삽입되었다. 『전격전』은 세계적인 베스트셀러가 되었고, 구데리안은 리델 하트에게 인세의 25%를 지불하려고 제안했다.
구데리안의 주요 저서는 다음과 같다:
제목 | 원제 | 출판 연도 | 비고 |
---|---|---|---|
주목, 전차! | Achtung Panzer! | 1937년 | 전차 부대 운용 이론서. |
전격전 | Erinnerungen eines Soldaten | 1951년 | 회고록. |
7. 가족
구데리안은 아내 마르가레테와의 사이에 2명의 아들을 두었다. 장남 하인츠 귄터는 1935년 국방군 소위로 임관한 이후 전차 장교로 참전하여 두 번 부상당했다. 참모 중령으로 전쟁 종결을 맞이했으며, 전후에는 독일 연방군에 입대, 장갑 여단장 등을 거쳐 아버지와 같은 장갑병 총감에 취임했다. 1974년 육군 소장으로 퇴역했다.
참조
[1]
Hardcover
Paris at War, 1939-1944
The Belknap Press of Harvard University Press
[2]
서적
독일장갑군단 : 구데리안 장군의 전차전격전
산케이 출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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