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506보병연대 E중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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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제506보병연대 E중대는 1942년 창설된 미 육군 공수 연대로, 제2차 세계 대전 중 유럽 전선에서 활약했다. 조지아주 캠프 토코아에서 훈련을 받았으며, 노르망디 상륙 작전, 마켓 가든 작전, 벌지 전투 등 주요 전투에 참전했다. 이들은 1945년 해체되었으나, 현재는 제101공수사단 예하 부대로 그 계보가 이어지고 있다. E중대의 이야기는 스티븐 앰브로즈의 저서 《밴드 오브 브라더스》와 동명의 HBO 미니시리즈를 통해 널리 알려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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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506보병연대 E중대 - [군대/부대]에 관한 문서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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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대 정보 | |
부대 명칭 | E(Easy) 중대, 제506낙하산보병연대, 2대대 |
원어 명칭 | Easy Company, 506th Infantry Regiment |
병과 | 보병 |
종류 | 공수부대 |
역할 | 공중 강습 부대 (1954년 ~ 2014년) |
규모 | 139명 (밴드 오브 브라더스 7화에서 "162명의 병사와 장교들"이라고 언급됨) |
별명 | 이지 중대 |
표어 | "커레히"(체로키어: ᏊᏩᎯ, 홀로 서다) |
군가 | Blood on the Risers |
![]() | |
역사 | |
활동 기간 | 1942년 ~ 1945년 1954년 ~ 2014년 |
참전 | 제2차 세계 대전 절대군주 작전 카랑탕 전투 마켓가든 작전 벌지 전투 서부 연합군의 독일 침공 |
지휘관 | |
주요 지휘관 | [[파일:US-O5 insignia.svg|14px]] 허버트 소블 중령 [[파일:US-O5 insignia.svg|14px]] 노먼 다이크 중령 [[파일:US-O5 insignia.svg|14px]] 로널드 스피어스 중령 [[파일:US-O4 insignia.svg|14px]] 리처드 윈터스 소령 [[파일:US-OF1A.svg|8px]] 프레드릭 헤일리거 중위 [[파일:US-OF1A.svg|8px]] 토머스 미헌 3세 중위 |
사단장 | 로버트 싱크 |
2. 역사
제2차 세계 대전 당시 미국 육군 제101공수사단 제506보병연대 소속이었던 E 중대는 1942년 조지아주 캠프 토코아에서 허버트 소벨 중위의 지휘 아래 창설되었다.[1] E 중대는 노르망디 상륙 작전, 마켓 가든 작전, 벌지 전투 등 주요 전투에 참전했다.[1][2][4]
1944년 6월 6일 노르망디 상륙 작전에서 E 중대는 프랑스 코탕탱 반도에 강하하여 유타 해변 상륙을 지원했다.[1] 토머스 미한 중위가 전사하고 리처드 윈터스 중위가 지휘권을 이어받아 독일군 포대를 파괴하고, 카랑탕 점령 작전에 참여하여 오마하 해변과 유타 해변을 연결했다.[2][3]
1944년 9월 마켓 가든 작전에서는 네덜란드 에인트호번 주변 도로와 다리를 방어하는 임무를 맡았다.[2] 손 다리가 파괴되는 등 어려움 속에서도 에인트호번으로 진격했고, 네이메헌 북쪽 "섬"에서 제82공수사단과 합류, 저지 라인 전투와 페가수스 작전을 지원했다.[2]
1944년 12월 벌지 전투에서는 바스토뉴에 포위된 채 추위와 보급 부족 속에 독일군과 싸웠다.[4] 포이 점령전에서 로널드 스피어스 중위가 지휘관으로 임명되어 전투를 승리로 이끌었고, 101 공수 사단은 부대 표창을 받았다.[4]
전쟁 말기 E 중대는 아돌프 히틀러의 독수리 둥지가 있는 베르히테스가덴과 오스트리아에서 점령 임무를 수행했다.[1] 1945년 11월 해체되었으나, 1954년 훈련 부대로 재활성화되어 현재 제101공수사단 "락카산" 소속 제3여단 전투단 예하 제2-506 보병대대 알파 "이지" 중대로 이어진다.[1]
2. 1. 창설과 훈련
1942년 조지아주 캠프 토코아에서 허버트 소벨 제1중위의 지휘 아래 제506공수보병연대 E중대가 창설되었다.[1] E중대는 적진에 C-47 수송기를 타고 강하하는 임무를 수행하기 위해 만들어진 실험적인 공수 연대의 일부였다.[1] 부대원들은 공수 훈련에 앞서 낙하산 보병으로서 필요한 전투 훈련과 체력 훈련을 받았다.[1]훈련 중 하나는 "3마일 올라가고 3마일 내려오는" 가파른 언덕인 커라히을 오르내리는 것이었다.[1] 또한 부대원들은 3개의 4열 런닝 그룹으로 대형 달리기를 했는데, 이는 1960년대에 미국 육군에 의해 채택된 혁신적인 훈련 방식이었다.[1]
소벨은 매우 엄격한 훈련 방식으로 유명했는데, 덕분에 부대원들은 점프 스쿨의 체력 훈련 과정을 건너뛸 수 있을 정도로 체력이 단련되었다.[1] E중대의 세 번째 사령관이 된 리처드 윈터스 제1중위(원래 소벨 휘하의 제2중위로 E중대 제2소대 소대장으로 복무, 나중에 제2대대 전체를 지휘하는 소령)는 E중대가 원래 "3개의 소총 소대와 본부로 구성되었다. 각 소대는 12명의 소총 분대 3개와 6명의 박격포 조 1개로 구성되었다. 또한 각 소총 분대에 기관총 1정과 각 박격포 조에 60mm 박격포 1문을 배치했다."라고 회고했다.[2]
노르망디 상륙 작전을 기다리는 동안, E 중대는 영국 윌트셔주 올드본에 주둔하고 있었다.[3] 윈터스와 소벨 사이의 갈등은 결국 폭발했다.[3] 윈터스는 소벨의 부대 지휘 능력에 대해 우려를 표했고, 많은 사병들 역시 윈터스의 능력은 존경했지만 소벨의 지휘 능력에는 의문을 품었다.[3] 소벨은 윈터스를 "합법적인 명령 불이행"이라는 조작된 혐의로 기소하려 했고,[3] 윈터스는 군사 재판을 요청했다.[3] 윈터스의 처벌이 대대장 로버트 스트레이어 소령에 의해 무효화된 다음 날, 소벨은 윈터스를 또 다른 혐의로 기소했다.[3] 윈터스는 본부 중대로 전출되어 대대 식당 장교로 임명되었다.[3]
이에 부대 내 다수의 부사관들은 연대장 로버트 싱크 대령에게 소벨을 교체하지 않으면 계급장을 반납하겠다는 최후 통첩을 했다.[3] 싱크는 부사관들의 주동자로 여겨진 두 명의 소대 상사를 병장으로 강등시키고 각각 A 중대와 I 중대로 전출시켰다.[4]
그럼에도 싱크는 소벨을 칠턴 폴리엇에 있는 새로운 강하 훈련 학교의 지휘관으로 임명하고, 윈터스를 다시 이지 중대로 복귀시켜 제1소대 중위로 임명했다.[4] 윈터스는 훗날 소벨과의 갈등에도 불구하고, 이지 중대의 성공에는 소벨의 혹독한 훈련과 높은 기대치가 기여한 바가 크다고 회고했다.[4] 1944년 2월, 토머스 미한(Thomas Meehan) 제1중위가 이지 중대 지휘관으로 임명되었다.[4]
2. 2. 노르망디 상륙작전 (오버로드 작전)
E 중대는 1944년 6월 6일 새벽, 오버로드 작전의 일환으로 프랑스 노르망디의 코탕탱 반도 상공에 강하했다. 이들의 임무는 유타 해변으로 상륙하는 연합군을 위해 "제방 2" 입구를 점령하고 주변 장애물을 제거하는 것이었다.E 중대는 스틱 #66-73에 8대의 항공기로 이동했으며, 각 스틱당 약 17명의 낙하산병이 탑승했다. 스틱 66에는 중대장 토머스 미한 중위를 포함한 중대 본부 대부분과 최고참 부사관 3명이 탑승했다.[1] 그러나 스틱 66을 실은 비행기가 대공포에 맞아 추락하면서 탑승자 전원이 사망했다.[1] 이 사고로 미한 중대장이 사망하면서, 리처드 윈터스 중위가 이지 중대의 지휘권을 맡게 되었다.
지상에 집결한 이지 중대 병사들은 독일군 중(重)포 4문의 포대를 무력화시키는 임무를 수행했다.[2] 이 전투에서 이지 중대는 큰 피해를 입었지만, 독일군 포대를 파괴하는 데 성공했다.
D-Day에 많은 장교와 부사관을 잃은 E 중대는 큰 변화를 겪었다. 다음은 D-Day 당시와 이후 지휘관 변동 상황을 나타낸 표이다.
직책 | D-Day 당시 담당자 | 새로운 지휘관 |
---|---|---|
중대장 | 토머스 미한 중위 | 리처드 윈터스 중위 |
제1소대장 | 리처드 윈터스 중위 | 해리 웰시 중위 |
제2소대장 | 워렌 루시 중위 | 벅 컴튼 중위 |
제3소대장 | 로버트 매튜스 중위 | 워렌 루시 중위 |
제1소대 부관 | 해리 웰시 중위 | 공석 |
제2소대 부관 | 벅 컴튼 중위 | 공석 |
제3소대 부관 | C. 카우드 립튼 상사 (대리) | 프랜시스 오브라이언 중위 |
선임 상사 | 윌리엄 에반스 상사 | 제임스 디엘 상사 (대리) |
제1소대 하사 | 레오 보일 상사 | 레오 보일 상사 |
제2소대 하사 | 제임스 디엘 상사 | 윌리엄 구아르네레 상사 |
제3소대 하사 | C. 카우드 립튼 상사 | C. 카우드 립튼 상사 |
이후 E 중대는 카랑탕 점령 작전에 투입되었다. 도널드 말라키의 기록에 따르면, 윈터스 중위는 신속한 공격을 지시했고, 치열한 전투 끝에 독일군의 반격을 격퇴하고 카랑탕을 사수하는 데 성공했다. 이 승리로 미군은 오마하 해변과 유타 해변을 연결할 수 있게 되었다.
부대가 전선에서 철수할 때까지, E 중대는 병력 22명이 전사하고 43명이 부상당해 47%의 사상률을 기록했다.[3]
2. 3. 마켓 가든 작전
마켓 가든 작전은 1944년 9월, 제2차 세계 대전 중 네덜란드에서 벌어진 연합군의 군사 작전이다. E 중대는 이 작전에 참전하여 아른험으로 진격해 라인강의 주요 다리를 건너려는 영국 기갑 사단의 진격을 돕기 위해 에인트호번 주변의 도로와 다리를 방어하는 임무를 맡았다.[2]E 중대는 손 북서쪽 숲에 착륙, 제2 대대의 다른 두 중대 뒤에서 손으로 가는 길을 따라 행진했다. 그러나 손 다리에 도착했을 때 독일군에 의해 다리가 파괴되었고, 적의 공격을 받았다. 연대 공병대가 임시 교량을 건설한 후, E 중대와 제506연대의 나머지 부대는 에인트호번으로 이동했다. (이러한 사건들은 ''밴드 오브 브라더스''에서는 E 중대가 네덜란드에 착륙하여 남쪽에서 진격해 오는 영국군과 합류하기 위해 에인트호번으로 행진하는 것으로 묘사되어 생략되었다.)
9월 19일, E 중대는 영국 제11기갑사단의 크롬웰 전차 6대를 동반하여 헬몬트로 진격했다. 그러나 이들의 진격은 뇌넨 외곽에서 독일 제107 기갑 여단에 의해 저지되었고, 통게르로 후퇴해야 했다. 이후 며칠 동안 E 중대는 XXX 군단 보병이 임무를 맡을 때까지 베헬과 위덴 마을을 방어했다. 마켓 가든 작전이 진행되면서, E 중대와 제101공수사단의 나머지 병력은 네이메헌 북쪽 "섬"에서 제82공수사단에 합류했다.
마켓 가든 작전 종료 후, E 중대는 제텐에서 영국 제43(웨섹스) 보병사단을 대체했다. 1944년 10월 5일, 제1 소대는 저지 라인과 발 강 사이의 "섬" 전투에 참전, 왕립 포병대의 지원을 받아 폭스 중대의 소대와 함께 두 개의 무장 친위대 중대를 격파했다. 싱크 대령은 중대 제1 소대의 용감한 행동을 칭찬하며 "수적으로 우세한 적에 대한 대담한 행동과 숙련된 기동"이라고 묘사하는 일반 명령을 내렸다.
10월, E 중대는 9월 아른험 전투 이후 독일 점령 지역인 저지 라인 근처 레쿰 마을에 갇힌 100명 이상의 영국군을 구출하는 페가수스 작전을 지원했다. 1944년 10월 22-23일 밤, 네덜란드 강 남쪽 기슭에서 캐나다 공병과 E 중대 순찰대가 신호를 관찰하고 보트를 진수했지만, 영국군은 건너는 지점에서 약 500~800미터 상류에 있었다. 북쪽 기슭에 도착한 E 중대는 영국군을 찾기 위해 동쪽으로 향하는 동안 작은 경계선을 설정했다. 병사들은 빠르게 하류로 이동했고, 다음 90분 동안 러시아인 한 명을 제외한 모든 병사가 대피했다. (이 러시아인은 독일군에게 포로로 잡혔다.) 독일군은 산발적으로 사격했고 일부 박격포탄이 건너는 지점 근처에 떨어졌지만, 사격은 부정확했다. 탈출한 영국군들은 나중에 영국으로 이동하여 베를린 작전에서 탈출한 병사들과 재회했다.
E 중대는 네덜란드에서 9명이 전사하고 최소 40명이 부상당했다.
2. 4. 벌지 전투
이지 중대는 1944년 12월부터 1945년 1월까지 벌지 전투에 참전했다.[4] 당시 101 공수사단은 아르덴에서 독일군의 공세가 시작된 12월에 프랑스에 주둔하고 있었는데, 바스토뉴의 중요한 교차로를 사수하라는 명령을 받고 독일군에 포위되었다. 이지 중대는 혹독한 추위와 부족한 보급품, 그리고 독일군의 포격 속에서 전투를 치렀다.1945년 1월 1일부터 13일 사이에, 이지 중대는 포이와 비조리 마을 사이에 있는 벨기에의 자크 숲을 장악했다. 이지 중대는 포이 마을을 점령하는 임무를 부여받았고, 사단 본부는 오전 9시에 공격을 시작하라고 명령했다.
공격 도중 새로 임명된 중대장 노먼 다이크 중위는 이지 중대를 이끌고 전진하다가 제1 소대에게 좌측으로 이동하라고 명령한 후 연락이 끊겼다. 다이크는 나머지 중대원들에게 사격을 받자 엄폐하라고 명령했고, 부대는 전진할 수 없게 되었다. 부하들은 적의 사격에 노출되어 진격하지 않으면 죽을 것이라고 보고했고, 전 중대장이자 대대 지휘관 대행인 리처드 윈터스 대위도 다이크에게 무전을 보내 같은 내용을 전달했다. 다이크는 제1 소대에게 마을 주변으로 우회 기동을 하라고 명령한 후 엄폐했고, 윈터스의 명령을 무시했다. 당시 선임 하사였던 카우드 립튼은 "그는 무너졌다"라고 말했다.
클랜시 라이얼에 따르면, 다이크는 공황 상태에 빠진 것이 아니라 오른쪽 어깨에 부상을 입어 멈췄다고 한다.
다이크는 윈터스 대위의 명령에 따라 로널드 스피어스 제1 중위에 의해 즉시 해임되었다. 스피어스는 다이크의 이전 명령을 무효화하기 위해 직접 마을과 독일군 진영을 가로질러 달려갔고 (제1 소대는 무전기가 없었다), 아이템 중대 병사들과 합류하여 명령을 전달했다. 이를 완료한 후, 그는 다시 독일군이 점령한 마을을 가로질러 달려갔다. 카우드 립튼은 "독일군은 미군 병사가 자기들 진영을 가로질러 달리는 것을 보고 너무 충격을 받아서, 총 쏘는 것을 잊었다!"라고 말했다.[4] 스피어스는 이지 중대 지휘관으로 재배치되어 전쟁이 끝날 때까지 그 자리에 있었다.
포이 점령으로 연합군은 바스토뉴에서 독일군 방어선을 격파했다. 101 공수 사단은 바스토뉴에서 방어선을 사수한 공로로 부대 표창을 받았다.
2. 5. 점령 임무와 해체
E 중대는 전쟁 말기, 아돌프 히틀러의 독수리 둥지가 있는 독일 베르히테스가덴에서 점령 임무를 수행했다. 이후, 중대는 추가 점령 임무를 위해 오스트리아로 보내졌다. 중대는 주로 전쟁의 종전을 기다리며 다양한 순찰 임무를 수행했다.[1]E 중대와 제506 공수보병연대(506th PIR)의 나머지 부대는 1945년 11월에 해체되었다. 1954년에는 훈련 부대로 재활성화되었다. 전투병 연대 시스템과 미 육군 연대 시스템에 따라, 이지 중대(Easy Company)의 계보와 역사는 제101공수사단 "락카산"(Rakkasan)에 소속된 제3여단 전투단 예하 제2-506 보병대대 알파 "이지" 중대로 이어지고 있다.[1]
3. 구성원
이지 중대는 제2차 세계 대전 당시 미국 육군 제101공수사단 제506보병연대 소속으로, 여러 주요 전투에서 활약한 정예 부대였다. 조지아주 캠프 토코아에서 140명의 병사로 처음 창설되었으며, 전쟁이 끝날 무렵에는 총 366명의 병사가 전출 및 보충으로 기록되었다. 이 중 49명이 전투 중 사망했다.[5]
3. 1. 장교
(1944년 6월 6일)(1944년 9월)
(1944년 12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