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젯카이 츄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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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젯카이 츄신은 1334년 일본 도사국에서 태어난 임제종 승려이다. 1368년 명나라로 건너가 유학하며 홍무제와 시를 주고받는 등 교류했고, 귀국 후에는 아시카가 요시미쓰의 지원을 받아 덴류지 주지, 로쿠온인 주지 등을 역임했다. 그는 사륙문 기법을 일본에 전파하여 오산문학 발전에 기여했으며, '젯카이 화상어록'과 '초켄고' 등의 저서를 남겼다. 젯카이 츄신은 린자이 종 몽창파 발전에 기여했으며, 고코마츠 천황과 쇼코 천황으로부터 각각 붓치코쇼 국사, 세이코쿠시라는 시호를 받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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젯카이 츄신 - [인물]에 관한 문서
기본 정보
법명젯카이 츄신(絶海 中津)
자제원(慈済院)에 소장된 젯카이 츄신의 초상화
출생일겐무(建武) 원년 11월 13일(1334년 12월 9일)
출생지이세국
입적일오에이(応永) 12년 4월 5일(1405년 5월 3일)
종파임제종(臨済宗)
칭호료칸(要関)、겐지(堅子)、쇼켄 도인(蕉堅道人) 등

2. 생애

젯카이 츄신은 남북조 시대부터 무로마치 시대 초기에 활동한 임제종 승려이자 오산문학을 대표하는 인물이다.

1334년 도사국의 호족 쓰노 씨(津野氏) 가문에서 태어나, 교토로 상경하여 덴류지에서 무소 소세키를 스승으로 모시며 불교에 입문했다. 이후 겐닌지와 가마쿠라 겐초지 등에서 당대의 고승들 밑에서 수행하였다.

1368년에는 명나라로 건너가 약 10년간 머물며 항저우의 중천축사, 링인쓰 등 여러 사찰에서 수학하고 명나라 고승들과 교류했다. 이 시기 홍무제를 알현하기도 했으며, 당시 유행하던 사륙문 등 중국 문학에도 능통하게 되었다. 이러한 경험은 그가 일본으로 돌아온 후 정치 및 문화계에서 중요한 인물로 부상하는 배경이 되었다.

1378년 귀국 후에는 덴류지에 잠시 머물렀으며, 이후 가이의 에린지 주지로 부임했다.

쇼군 아시카가 요시미쓰의 부름을 받아 교토로 상경하여 요시미쓰가 창건한 로쿠온인의 주지가 되었다. 그러나 요시미쓰와의 관계가 악화되어 한때 셋쓰, 아리마 온천, 사누키 등지로 은둔하기도 했다. 이 시기 스승 무소 소세키의 유적인 도사의 흡강암(吸江庵, 큐코지)을 재건하기도 하였다.

1386년 요시미쓰의 사면을 받아 교토로 돌아온 후에는 도지지, 쇼코쿠지 등 주요 사찰의 주지를 역임했다. 메이토쿠의 난과 같은 정치적 혼란 속에서도 활동을 이어갔으며, 쇼코쿠지가 화재로 소실되자 복구에 힘쓴 공으로 다시 주지로 임명되었다. 이후 승록(僧錄)의 지위에 올라 교토 5산과 임제종 사찰 전반을 통괄하는 역할을 맡았다. 1399년 오에이의 난 때는 쇼군 요시미쓰의 명으로 반란을 일으킨 오우치 요시히로를 설득하는 임무를 수행하기도 했다.

1404년 모든 직책에서 물러나 은퇴하였으며, 이듬해인 1405년 4월 5일, 향년 72세로 입적하였다.

2. 1. 출생과 초기 수행

겐무(建武) 원년(1334년) 11월 13일, 도사국(土佐国) 다카오카 군(高岡郡) 쓰노(津野)[11](현 고치현 다카오카군 쓰노정)를 지배하던 호족 쓰노 씨(津野氏)의 일족으로 태어났다. 기도 슈신과는 동향 출신이다.

조와(貞和) 4년/쇼헤이(正平) 3년(1348년)에 교토로 상경하여 덴류지(天竜寺)에 들어갔다.[12] 간노(観応) 원년/쇼헤이 5년(1350년)에 머리를 깎고 승려가 되었으며, 스승 무소 소세키(夢窓疎石)[8]가 이듬해 사망할 때까지 그의 곁을 모셨다고 한다.

무소 소세키가 입적한 후인 분나(文和) 2년/쇼헤이 8년(1353년)에는 겐닌지(建仁寺)의 류잔 도쿠겐(竜山徳見)에게 나아가, 같은 스승 아래 있던 기도 슈신과 함께 학문을 배웠다.[8] 그러나 이듬해 류잔이 난젠지(南禅寺)로 옮겨가자, 새로 주지로 부임한 다이린 센류쿠(大林善育)에게서 배우고 그에게서 탕약시자(湯薬侍者)를 맡았다.

그로부터 10년 뒤인 조지(貞治) 3년/쇼헤이 19년(1364년)에 가마쿠라(鎌倉)로 가서 겐초지(建長寺)의 세이잔 시에이(青山慈永)의 문하로 들어갔다. 그곳에서는 장주(蔵主)와 연향시자(焼香侍者)를 맡았다. 이듬해 5월, 동향인 슈신이 사가미(相模)의 센푸쿠지(善福寺)로 들어갔을 무렵에는 그의 의발시자(衣鉢侍者)를 맡았다.

2. 2. 명나라 유학과 귀국

오안(応安) 원년/쇼헤이 23년(1368년) 2월, 젯카이 츄신은 중국 으로 건너가[1] 항주의 중천축사(中天竺寺)에 들어갔다. 이후 영은사(霊隠寺), 호성만수사(護聖万寿寺)[13] 등 여러 사찰을 다니며 용정보량(用貞輔良)과 같은 명나라의 고승들을 만나 가르침을 받았다. 그는 명나라에서의 경험을 통해 당시 유행하던 시문 문체인 사륙문(四六文) 기법을 익혔다고 한다.

명나라 홍무(洪武) 9년(1376년)에는 홍무제로부터 알현을 허락받기도 하였다. 이러한 명나라 유학 경험은 스승 무소 소세키처럼[1] 젯카이 츄신이 일본의 정치인이나 무장들에게 주목받는 인물이 되는 계기가 되었다.

홍무 11년(1378년)에 일본으로 귀국한 젯카이 츄신은 덴류지의 쇼가이 레이켄(性海霊見)에게 귀의하였다.

2. 3. 아시카가 요시미쓰와의 관계

에이토쿠 2년/고와 2년(1382년) 쇼군 아시카가 요시미쓰는 젯카이에게 상경을 명했고, 이듬해 9월 젯카이는 교토로 왔다. 요시미쓰는 안세이지(安聖寺)를 헐고 로쿠온인을 창건하여 젯카이를 그곳의 주지로 임명했다.

그러나 점차 요시미쓰와 대립하게 되면서, 지토쿠 원년/겐추 원년(1384년) 6월에는 셋쓰로 물러났다. 더욱이 요시미쓰에게 쫓기는 신세가 되어 이듬해 4월에는 아리마 온천의 우은암(牛隠庵)으로 피신해야 했다. 이 시기 호소카와 요리유키의 초빙으로 사누키로 건너가 호카이지(宝海寺)를 열기도 했다.

지토쿠 3년/겐추 3년(1386년) 2월, 요시미쓰는 젯카이를 사면하고 다시 교토로 올 것을 명했다. 그 해 3월 요시미쓰와 만난 젯카이는 도지지에 들어갔다.[8]

메이토쿠 2년/겐추 8년(1391년)에는 기타야마(北山)의 도지인으로 옮겼다가[8] 이듬해 10월 쇼코쿠지의 주지가 되었다.[8] 오에이 원년(1394년)에는 다시 도지인으로 돌아왔는데, 이러한 이동에는 메이토쿠의 난과 같은 전란이나 요시미쓰와의 계속된 긴장 관계가 영향을 미쳤다고 여겨진다.

오에이 원년(1394년) 9월 쇼코쿠지가 화재로 소실되자 그 복구에 힘썼고, 이 공로로 오에이 4년(1397년) 2월 다시 쇼코쿠지 주지로 임명되었다. 그러나 다음 해 주지직을 사양하고 로쿠온인 원주(院主)가 되었으며, 승록의 지위까지 겸하여 로쿠온 승록으로서 교토 5산과 임제종 사찰 전반을 통괄하는 역할을 맡았다.

오에이 6년(1399년) 오에이의 난이 일어나자, 쇼군 요시미쓰의 명을 받아 반란을 일으킨 오우치 요시히로의 진영을 찾아가 그를 설득하는 임무를 수행했다. 오에이 11년(1404년)에 사임하고 은퇴했다.

2. 4. 오에이의 난과 만년

오에이 원년(1394년) 9월 쇼코쿠지가 화재로 소실되자, 그 복구에 힘썼다. 이 공적으로 오에이 4년(1397년) 2월에 다시 쇼코쿠지의 주지로 재임명되었으나, 이듬해에는 사임하고 로쿠온인 원주(院主)가 되었으며, 더 나아가 승록(僧錄)을 겸임하여 로쿠온 승록으로서 교토 5산과 임제종 사찰들을 통괄했다. 오에이 6년(1399년)에 일어난 오에이의 난에서는, 쇼군 아시카가 요시미쓰에게 반기를 든 오우치 요시히로의 진영에 요시미쓰의 명을 받아 설득하러 갔다. 오에이 11년(1404년)에 사임하고 은퇴했으며, 오에이 12년(1405년) 4월 5일에 향년 72세로 입적하였다.

3. 사상과 활동

젯카이 츄신은 명나라와의 교류를 통해 자신의 사상을 심화시키고 다양한 활동을 펼쳤다. 1376년에는 명나라 사신으로 파견되어 홍무제서복 전설에 관한 시를 주고받는 등 외교적 활동을 하기도 했다.[14][5]

또한 그는 명나라 유학 중 항주 중천축사에서 선승 계담종륵에게 사사하며 선종 사상을 깊이 연구했고, 당시 명나라 선종계의 주요 흐름이었던 대혜파의 영향을 받았다.[14][5] 귀국 후에는 명에서 익힌 학문과 문풍을 바탕으로 일본 오산문학 발전에 기여했으며, 특히 사륙문의 도입에 영향을 주었다.[14][5] 그의 문하에서는 용강건치, 서윤준승 등 오산문학을 이끌어갈 인물들이 배출되었다.[15][6]

3. 1. 선종 사상

젯카이 츄신은 명나라에 건너가 선종 사상을 심화시켰다. 특히 항저우 중천축사에서 명나라 시대 선종계의 주요 세력이었던 대혜파의 선승 계담종륵(소은대흔 법사)에게 사사하였다. 그의 문하에서 향을 피우는 시자와 장주의 직책을 맡았으며, 자신의 도호인 "젯카이" 역시 스승 계담에게서 받았다.[5]

단순히 법맥 상의 관계를 넘어, 귀국 시에는 계담을 통해 그의 스승인 소은대흔의 포실소법을 전수받았다. 이는 일본 오산문학에서 사륙문이 유행하는 데 선구적인 역할을 한 것으로 평가받는다. 이처럼 젯카이 츄신은 명나라 대혜파 법맥과 깊은 교류를 맺었다.[5]

그는 오산문학 분야에서도 중요한 인물들을 길러냈다.

구분인물
주요 문하생용강건치
주요 문하생서윤준승

[6]

3. 2. 오산문학과 사륙문

젯카이 츄신은 명나라 유학 중 항주(杭州) 중천축사(中天竺寺)에서 계담종륵(季潭宗泐)에게 사사하였다. 그는 계담종륵의 문하에서 향을 피우는 시자(侍者)나 경전을 관리하는 장주(蔵主) 등의 직책을 맡기도 했으며, 그의 도호(道号)인 '젯카이'(絶海) 역시 스승 계담종륵이 지어준 것이다.[14][5]

법맥상의 관계를 넘어, 젯카이 츄신은 귀국할 때 계담종륵을 통해 그의 스승인 소은대흔(笑隠大訢)의 포실소법(蒲室疏法)을 전수받았다.[14][5] 이 포실소법은 당시 명나라 선종계에서 큰 세력을 이루었던 대혜파(大慧派)의 문체로, 이것이 일본에 전해지면서 일본 오산문학(五山文学)에서 사륙문(四六文)이 유행하는 중요한 계기가 되었다.[14][5] 이는 젯카이 츄신이 오산문학 발전에 기여한 중요한 부분으로 평가받는다.

오산문학 분야에서 젯카이 츄신의 문하에서는 용강건치(用剛乾治)와 서윤준승(西胤俊承) 등 뛰어난 문인들이 배출되었다.[15][6]

3. 3. 홍무제와의 시 교류

조선의 학자 강항이 저술한 《간양록》에는 젯카이 츄신(津絶海)이 명나라에 사신으로 갔을 때 홍무제의 명으로 시를 지었고, 이에 홍무제가 화답한 시가 기록되어 있다.[14] 이 시들은 일본 연호로 에이와 2년, 중국 연호로 홍무 9년인 1376년에 젯카이 츄신이 명나라에 체류 중 홍무제의 부름을 받아 지은 것으로, 그의 시문집인 《초견고(蕉堅藁)》에도 실려 있다.

당시 홍무제는 일본 구마노 지방의 서복 관련 전설에 대해 물으며 시를 짓도록 요청했다. 젯카이 츄신이 먼저 읊은 시는 다음과 같다.

젯카이 츄신의 시
원문번역
熊野山前徐福祠웅야산 앞에는 서복의 사당이요
滿山藥草雨餘肥온 산의 약초가 빗줄기 끝에 우거졌다오
至今海上波濤穩이제껏 바다 위 물결이 평온하니
直待好風須早歸좋은 바람 기다려 어서 돌아가겠소



이에 홍무제가 화답한 시는 다음과 같다.

홍무제의 화답시
원문번역
熊野峯高血食祠웅야산 높은 봉우리 혈식하는 사당에는
松根琥珀亦應肥솔뿌리 호박도 살이 올랐다는데
昔時徐福浮舟去그 옛날 서복이 배 띄워 가서는
直待好風須早歸돌아오지 않은 채 오늘이 왔네



서복중국 진나라 시대 진시황의 명으로 불로초를 찾아 동쪽 바다로 떠났다고 전해지는 인물이다. 한국과 중국에서는 서복이 일본 열도에 정착하여 일본 황실의 시조가 되었다는 전승이 퍼져 있었다. 그러나 정유재란 당시 포로로 일본에 끌려가 현지 사정을 접할 기회가 있었던 강항은 《간양록》에서 이러한 속설이 사실이 아니라고 명확히 밝혔다.

일본 와카야마현 신구시에는 서복의 무덤이라고 전해지는 유적이 있으며, 이 시 교환은 서복 전설이 당시 일본뿐 아니라 명나라에까지 널리 알려져 있었음을 보여준다.[5]

4. 평가 및 영향

(내용 없음 - 하위 섹션에서 상세 내용을 다루므로 중복 방지를 위해 생략)

4. 1. 당대의 평가

젯카이 츄신은 아시카가 요시미쓰, 아시카가 요시모치 두 쇼군을 비롯해 여러 유력 슈고 다이묘와 조정의 후시미노미야 사다히토 친왕 등에게 귀의를 받을 정도로 당대 불교계에서 큰 영향력을 행사했다. 그는 기도 슈신(義堂周信)과 함께 린자이 종 몽창파(夢窓派) 발전에 기여한 인물로 높이 평가받는다.

또한, 나라의 사륙문(四六文) 작법을 일본에 전하고 고잔 선림(五山禅林)에 널리 퍼뜨리는 데 기여했다.[1]

고코마쓰 천황쇼코 천황 역시 젯카이 츄신에게 귀의했으며, 그의 사후 고코마쓰 천황은 붓치코쇼 국사(仏智広照国師), 쇼코 천황은 세이코쿠시(聖国師)라는 시호를 내려 추증했다. 저서로는 『젯카이 화상어록(絶海和尚語録)』과 시문집인 『초켄고(蕉堅藁)』 등이 전해진다.

4. 2. 후대의 평가

젯카이 츄신은 아시카가 요시미쓰, 아시카가 요시모치 두 쇼군을 비롯해 여러 유력 슈고 다이묘와 조정의 후시미노미야 사다히토 친왕 등 많은 이들의 귀의를 받았다. 그는 당시 불교계에서 큰 영향력을 가졌으며, 기도 슈신과 함께 임제종 몽창파 발전에 기여한 인물로 높이 평가받는다.

그는 명나라에서 사륙문(四六文) 작법을 일본으로 들여와 오산 선림에 널리 퍼뜨렸다.[1] 이러한 활동을 통해 그는 오산 문학을 대표하는 인물 중 하나로 여겨진다.

고코마쓰 천황쇼코 천황 역시 젯카이 츄신에게 귀의했으며, 그의 사후 고코마쓰 천황은 붓치코쇼 국사(仏智広照国師)라는 시호를, 쇼코 천황은 세이코쿠시(聖国師)라는 시호를 추증했다. 그의 저서로는 『젯카이 화상어록(絶海和尚語録)』과 시문집인 『초켄고(蕉堅藁)』 등이 전해진다.

5. 저서

젯카이 츄신의 주요 저서로는 그의 어록을 모은 《젯카이 화상어록(絶海和尚語録|젯카이 오쇼 고로쿠일본어)》과 시문집인 《초켄고(蕉堅藁)》가 있다.

참조

[1] 서적 岩波仏教辞典 岩波書店 2002-10
[2] 문서 1990
[3] 문서 1990
[4] 서적 日本文学史 古代・中世篇六 中公文庫
[5] 서적 足利義満と禅宗 法蔵館 2011-09
[6] 서적 禅宗の歴史 吉川弘文館 2013-02
[7] 문서 겐무 3년(1336년)생이라는 설도 있다.
[8] 서적 岩波仏教辞典 岩波書店 2002-10
[9] 문서 1990
[10] 문서 1990
[11] 문서 일본 고치 현(高知県) 다카오카 군(高岡郡) 쓰노 정(津野町).
[12] 서적 日本文学史 古代・中世篇六 中公文庫
[13] 웹사이트 지금의 중국 저장 성 오흥 서남쪽 7㎞의 도량산(道場山)에 위치한 사찰로 당 중화 연간(881-885) 여눌이 개창한 도장사(道場寺)를 가리킨다. 도장사는 다른 이름으로 진정선원(眞正禪院) ㆍ 묘각사(妙覺寺) ㆍ 호성만수사(護聖萬壽寺)라고 불리었다. http://blog.naver.co[...]
[14] 서적 足利義満と禅宗 法蔵館 2011-09
[15] 서적 禅宗の歴史 吉川弘文館 2013-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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