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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국통일범민족연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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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조국통일범민족연합(범민련)은 한반도의 자주적 평화통일과 민족 대단결을 목표로 하는 통일운동 연합체이다. 1990년 판문점에서 열린 범민족대회 참가자들이 결성을 결의했으며, 남·북·해외의 단체 및 개인들이 참여하여 조직되었다. 범민련은 1991년 남측 준비위원회가 발족했으나 관련자들이 구속되는 등 대한민국 정부의 탄압을 받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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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국통일범민족연합
지도
기본 정보
조국통일범민족연합 깃발
조국통일범민족연합 깃발
약칭범민련
영문 명칭Pan-Korean Alliance for Reunification (PKAR)
창립일1990년 11월 20일
결성 목적조국 통일
본부대한민국 서울 (남측본부)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평양 (북측본부)
일본 도쿄 (해외본부)
조직
의장남측: 이종린
북측: 김완수
해외: 손형근
주요 구성원대한민국: 해산된 한총련 및 민주노총 등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조국통일민주주의전선
해외: 재일본조선인총련합회 (조총련)
강령 및 목표
3대 원칙자주적 평화통일
민족대단결
5대 과제반미자주화 투쟁
연방제 통일
국가보안법 철폐
미군 철수
평화협정 체결
활동
주요 활동통일운동
반제국주의 투쟁
사회운동
연대6.15 공동선언 지지
민족공조
논란 및 비판
대한민국 내 활동 제약국가보안법에 따른 활동 제약
친북 단체 규정
사상적 편향성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에 대한 옹호
대한민국 정부에 대한 비판적 입장
관련 단체
남측 단체민족화해자주통일협의회
6.15공동선언실천 남측위원회
북측 단체조국통일민주주의전선
6.15공동선언실천 북측위원회
해외 단체재일본조선인총련합회 (조총련)
기타
관련 사건황혜로 간첩 사건
왕재산 사건

2. 결성 배경

범민련은 전민족의 대단결과 조국의 자주적 평화통일을 이루는 것을 목적으로 하는 거족적인 통일운동 연합체이다(규약 2조). 범민련은 자주, 평화통일, 민족대단결의 조국통일 3대 원칙을 지지하고 있으며, 남과 북, 해외의 애국적인 정당, 단체 및 개별 인사들로 구성되어 있다(규약 4조).[4]

2. 1. 냉전 종식과 한반도 통일 논의

소련미국의 밀월정책으로 한반도 정책이 변화되어 실질적인 두 개의 주권국가 존재를 인정하는 영구 분단 위기가 닥쳤다. 이런 반통일 국제 정세에 비해 문익환, 임수경, 문규현 등의 방북을 계기로 한민족 내부에는 통일 열망이 강화되었다. 세계가 냉전의 적대적 대결에서 평화와 화해의 분위기로 역사적 전환을 하고 있는 시점으로 한반도에서는 민간 차원에서 통일을 이루어야 한다는 열망이 커졌다.[4]

2. 2. 민간 주도의 통일 운동 필요성 대두

소련미국의 밀월정책으로 한반도 정책이 변화되어, 실질적인 두 개의 주권 국가 존재를 인정하는 영구 분단 위기가 닥쳤다. 이러한 반통일 국제 정세와 달리 문익환, 임수경, 문규현 등의 방북을 계기로 한민족 내부에는 통일 열망이 강화되었다. 세계가 냉전의 적대적 대결에서 평화와 화해의 분위기로 역사적 전환을 하는 시점에서, 한반도에서는 민간 차원에서 통일을 이루어야 한다는 열망이 커졌다.[4]

3. 연혁

1991년 1월 10일 전진상교육관에서 범민족대회 남측추진본부(범추본) 7차 대표자회의가 개최되었다. 1월 23일에는 범민련 남한 준비위원회가 발족하였으나,[4][5] 다음날인 1월 24일 준비위원장 문익환과 실행위원장 이창복이 구속되었다. 1월 25일에는 범민련 북측본부가 결성되었으며(초대의장 윤기복), 1995년 2월 25일에는 범민련 남측본부가 결성되었다(초대의장 강희남).

2001년 1월 13일, 범민련은 출범 후 10년 만에 처음으로 정부의 탄압 없이 공개된 장소인 청주 심신수련원에서 200명의 간부를 모아 수련회를 개최하였다(남측본부 이종린 의장). 같은 해 2월 13일에는 북, 남, 해외 범민련 공동의장단 회의가 개최되었다.[6]

3. 1. 결성 과정 (1990)

1990년 8월 15일 판문점 범민족대회 참가자들이 조국통일범민족연합(약칭 범민련)을 구성하기로 결의하였다.[4] 이후 범민족대회 남측추진본부에서 범민족적인 통일운동체를 결성할 것을 결의하였고, 9월 14일에는 산하에 범민족적인 통일운동체 결성을 위한 검토소위를 두었다.

같은 해 9월 15일에는 조국통일범민족연합 유럽지역 본부가 결성되었고(의장 정규명), 10월 7일에는 일본지역 본부가 결성되었다(의장 양동민).[4] 10월 24일, 범민족대회 남측추진본부 제4차 대표자회의에서 남, 북, 해외 3자회담을 제안하였고, 10월 31일에는 11월 12일 판문점에서 3자 회담을 갖자는 제안을 하는 기자회견을 열었다. 그러나 11월 8일, 국토통일원은 남측추진본부가 제출한 북한 주민접촉신고서의 3자회담 협력요청에 대해 불허 통보를 하였다.

이에 11월 12일, 남측추진본부는 베를린에서 남, 북, 해외 3자 실무회담을 가질 것임을 공표하였다. 11월 17일에는 제5차 대표자회의를 개최하여 조용술, 이해학, 조성우를 실무회담 대표로 공식 인준하였다. 11월 20일, 베를린에서 남, 북, 해외 대표들은 3자 회담을 갖고 전 민족적인 민간통일기구로서 조국통일범민족연합을 결성하기로 합의하였다.[4]

11월 29일, 남측실무회담 대표 3인은 동경에서 ‘7천만 동포에게 드리는 글’을 발표하였으나, 11월 30일 귀국과 동시에 공항에서 치안본부 대공분실 요원들에 의해 연행, 구속되었다.

이후 12월 1일에는 북미주본부가 결성되었고, 12월 16일에는 윤이상을 의장으로 하는 해외본부가 결성되었다.[4]

3. 2. 결성 이후 (1991~현재)


  • 1990년 8월 15일 판문점 범민족대회 참가자들이 조국통일범민족연합(범민련)을 구성하기로 결의하였다.
  • 1990년 9월 15일 조국통일범민족연합 유럽지역 본부가 결성되었고, 의장에 정규명이 선출되었다.
  • 1990년 10월 7일 조국통일범민족연합 일본지역 본부가 결성되었고, 의장에 양동민이 선출되었다.
  • 1990년 11월 20일 베를린에서 남, 북, 해외 대표들이 3자 회담을 갖고 전 민족적인 민간통일기구로서 조국통일범민족연합을 결성하기로 합의하였다.
  • 1990년 12월 1일 범민련 북미주본부가 결성되었다.
  • 1990년 12월 16일 윤이상을 의장으로 범민련 해외본부가 결성되었다.
  • 1991년 1월 23일 범민련 남한 준비위원회가 발족하였다.[4][5]
  • 1991년 1월 25일 범민련 북측본부가 결성되었고, 초대 의장으로 윤기복이 선출되었다.
  • 1995년 2월 25일 범민련 남측본부가 결성되었고, 초대 의장으로 강희남이 선출되었다.
  • 2001년 1월 13일 출범 후 10년 만에 최초로 정부 탄압 없이 공개된 장소인 청주 심신수련원에서 200명 간부를 모아 범민련 수련회가 개최되었으며, 남측본부 의장은 이종린이었다.
  • 2001년 2월 13일 북, 남, 해외 범민련 공동의장단 회의가 개최되었다.[6]

4. 조직 구성 및 활동

조국통일범민족연합(범민련)은 전 민족의 대단결과 조국의 자주적 평화통일을 목적으로 하는 거족적인 통일운동 연합체이다. 범민련은 자주, 평화통일, 민족대단결의 조국통일 3대 원칙을 지지하며, 남과 북, 해외의 애국적인 정당, 단체 및 개별 인사들로 구성된다.[4]

4. 1. 조직 구성

범민련은 자주, 평화통일, 민족대단결의 조국통일 3대 원칙을 지지하고 본 연합의 강령과 규약을 승인하는 남과 북(북과 남), 해외의 애국적인 정당, 단체 및 개별 인사들로 구성한다.[4]

4. 2. 주요 활동

전민족의 대단결과 조국의 자주적 평화통일을 이룩하는 것을 목적으로 하는 거족적인 통일운동 연합체이다(규약 2조). 범민련은 자주, 평화통일, 민족대단결의 조국통일 3대 원칙을 지지하고 본 연합의 강령과 규약을 승인하는 남과 북(북과 남), 해외의 애국적인 정당, 단체 및 개별 인사들로 구성한다(규약 4조).

5. 대한민국 정부와의 관계

대한민국 정부는 1991년 1월 23일 국가보안법 위반으로 범민련 남측 준비위 집행위원장 이창복, 준비위원 김희선, 김희택, 권영택에 대한 사전구속영장을 발부하여 이들이 베를린에서 귀국 하자마자 공항에서 체포해 구속하였다.[7] 범민련 남측본부에서 발행하는 기관지 제호는 《민족의 진로》이며, 범민련 남측본부는 서울특별시 영등포구 국회대로 34길 13 3층에 있다.

5. 1. 이적단체 규정과 탄압

1991년 1월 23일 대한민국 정부국가보안법 위반으로 범민련 남측 준비위 집행위원장 이창복, 준비위원 김희선, 김희택, 권영택에 대한 사전구속영장을 발부하여 이들이 베를린에서 귀국 하자마자 공항에서 체포해 구속하였다.[1]

5. 2. 도청 의혹

조국통일범민족연합 남측본부 준비위원회와 관련하여 국가보안법 위반 혐의로 수배 중이던 김희선 전 민주쟁취 국민운동 서울본부 부의장과 김응관 전 사무처장의 집 전화와 연결된 전신주 전화 단자함에서 일제 도청 장치가 잇따라 발견되었다.[7]

참조

[1] 뉴스 https://news.naver.c[...]
[2] 뉴스 https://news.naver.c[...]
[3] 웹사이트 http://www.scourt.go[...]
[4] 저널 조국통일범민족연합 결성 전망과 통일운동 2013-03-15
[5] 저널 조국통일범민족연합'의 의의와 전망 2013-03-15
[6] 저널 조국통일범민족연합 남측본부 이종린 의장 2013-03-15
[7] 뉴스 https://news.naver.c[...]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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