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동선 (1871년)
"오늘의AI위키"의 AI를 통해 더욱 풍부하고 폭넓은 지식 경험을 누리세요.
1. 개요
조동선은 1871년 전라북도 남원에서 출생하여, 대한제국 시기에 관료로 활동하다가 퇴임 후 향반으로 훈도했다. 1919년 4월 3일 이석기 등과 함께 전라북도 남원군 덕과면의 독립 만세 운동을 주도했으며, 이 일로 징역형을 선고받고 옥고를 치렀다. 출소 후에는 한국독립당에서 활동하며 대한민국 임시 정부에서 부국장보 직을 겸임했다. 대한민국 정부는 그의 공훈을 기려 대통령 표창과 건국훈장을 추서했다.
더 읽어볼만한 페이지
- 김제 조씨 - 조상래
조상래는 민주정의당 소속으로 제11대, 12대 국회의원을 지내고 국회에서 예산결산특별위원회 위원과 농수산위원회 간사를 역임한 대한민국의 정치인이자 동일유업 대표이사와 동일홀딩스 회장을 지낸 기업인이다. - 김제 조씨 - 조관우
조관우는 독특한 가성과 창법으로 인기를 얻은 대한민국의 가수로, 1994년 데뷔 후 〈늪〉 등의 히트곡과 리메이크 앨범을 통해 '리메이크의 대명사'로 불리며 가수 활동과 더불어 드라마와 영화에서 연기 활동도 하고 있다. - 남원시 출신 - 김근식
김근식은 경남대학교 정치외교학과 교수이자 서울대학교 정치학 박사 출신으로, 북한 및 통일 문제 전문가로서 남북정상회담 특별수행원으로 참여했으며 국민의힘 소속으로 여러 선거에 출마했으나 낙선한 정치학자이자 정치인이다. - 남원시 출신 - 류락진
류락진은 일제강점기에 태어나 남로당, 통일혁명당, 구국전위 사건 등으로 여러 차례 투옥되었으며, 서예가로 활동하다 2005년에 사망했다. - 건국훈장 애족장 수훈자 - 강해석
강해석은 광주학생항일운동을 배후에서 지도하고 조선공산당 사건으로 징역형을 받은 사회주의 운동가이자 독립유공자로, 광복 후 농민운동과 통일운동에 헌신하다 만성 저혈압으로 사망, 사후 건국훈장 애족장이 추서되었다. - 건국훈장 애족장 수훈자 - 이우석
이우석은 아버지 이완용의 친일 행위에 대한 죄책감으로 만주에서 독립운동에 투신하여 서로군정서와 북로군정서에서 활동하며 청산리 전투 등에 참전했고, 해방 후에는 경제적 어려움 속에서 생활하다 건국훈장을 받았다.
조동선 (1871년) - [인물]에 관한 문서 | |
---|---|
기본 정보 | |
이름 | 조동선 |
원래 이름 | 趙東先 |
출생일 | 1871년 2월 18일 |
출생지 | 조선 전라도 남원 |
사망일 | 1930년 10월 13일 |
사망지 | 일제강점기 전라북도 전주 |
거주지 | 조선 전라도 장수 조선 전라도 임실 조선 전라도 익산 대한제국 전라북도 익산 대한제국 전라북도 완주 대한제국 전라북도 금산 대한제국 전라북도 전주 대한제국 전라북도 옥구 대한제국 전라북도 고창 대한제국 전라북도 남원 일제강점기 전라북도 남원 일제강점기 경상북도 대구 중화민국 장쑤성 상하이 일제강점기 전라북도 전주 |
본관 | 김제(金堤) |
종교 | 유교(성리학) |
정당 | 무소속 |
배우자 | 전주 최씨 부인 |
자녀 | 슬하 5남 3녀 |
부모 | 조척(부), 영양 남씨 부인(모) |
형제 | 형 2명, 누이동생 2명, 남동생 5명 |
친인척 | 조카 조내헌(독립운동가) 조카 조기담(독립운동가) |
경력 | |
경력 | 조선 전라도 장수군 군서기관 조선 전라도 임실군 군서기관 조선 전라도 익산군 군서기관 대한제국 전라북도 익산군 군서기관 대한제국 전라북도 완주군 군서기관 대한제국 전라북도 금산군 군서기관 대한제국 전라북도 전주군 군서기관 대한제국 전라북도 옥구군 군서기관 대한제국 전라북도 남원군 군서기관 대한제국 전라북도 고창군 군서기관 한국독립당 국가민족행정특보위원 |
관직 | |
직책 | 대한제국 전라북도 김제군 군서기관 |
임기 | 1908년 ~ 1909년 |
군주 | 순종 |
직책2 | 대한 임정 내무부 내무국 부국장보 |
임기2 | 1925년 12월 ~ 1926년 1월 |
대통령2 | 박은식 |
총리2 | 김구 |
서훈 | |
서훈 | 사후 1982년 대한민국 대통령 표창장 추서 사후 1990년 대한민국 건국훈장 애족장 추서 |
웹사이트 | |
웹사이트 | 대한민국 국가보훈처 공훈록 |
2. 생애
2. 1. 초기 생애 (1871년 ~ 1909년)
조동선은 1871년 전라북도 남원에서 유교 성리학자인 조척(趙滌)의 삼남으로 출생하였다. 1889년 음서로써 조선 관직에 천거되었고, 대한제국 시대였던 1909년까지 전라북도 지방에서 군서기관 직책을 지냈다. 관료 직위 퇴임 이후에는 전라북도 남원의 성리학 대표 향반으로 훈도를 하였다.1919년 4월 3일 이석기(李奭器) 등과 함께 전라북도 남원군 덕과면(全羅北道 南原郡 德果面) 일대의 대한 독립 만세 운동을 주도하였다. 당시 전직 대한제국 관료였던 그는 일제의 식민통치에 불만을 품고 면장 이석기 및 면내 유지들과 비밀회의를 통하여 독립만세시위를 전개하기로 결의하였다. 그는 대한 독립 만세 시위 군중들과 함께 남원·전주(全州)간의 도로를 따라 전라북도 남원군 사매면 오신리(全羅北道 南原郡 巳梅面 梧新里)에 있는 헌병주재소 예하 분견소로 시위 행진을 하였다.
이 사건으로 기소되어 1919년 7월 24일 경상북도 대구복심법원에서 징역 1년 6개월형을 선고받고 옥고를 치렀으며, 1920년 10월에 만기출감하였다. 이후 1921년 11월에서 1928년 11월까지 한국독립당 국가민족행정특보위원 직위를 역임하였고, 1925년 12월에서 1926년 1월까지 임정 내무부 내무국 부국장보 직위를 겸직하였다.
2. 2. 독립운동 투신 (1909년 ~ 1920년)
1889년 조선국 음서로써 조선 관직에 천거되어 이후 대한제국 시대였던 1909년까지 전라북도 지방에서 군서기관 직책을 지냈고 관료 직위 퇴임 이후 전라북도 남원의 성리학 대표 향반으로 전라북도 남원에서 훈도하던 그는 1919년 4월 3일 이석기(李奭器) 등과 함께 전라북도 남원군 덕과면(全羅北道 南原郡 德果面) 일대의 대한 독립 만세 운동을 주도하였다. 이날은 식수기념일(植樹紀念日)로서 일제 치하에서 매년 행해지던 연례행사일이었다. 그는 당시 전직 대한제국 관료로서 일제의 식민통치에 불만을 가지고 면장 이석기 및 면내 유지들과 비밀회의를 통하여 이날을 이용하여 독립만세시위를 전개하기로 결의하였다. 이에 이석기는 그의 집에서 각 면장에게 보내는 대한 독립 만세 운동의 참가 취지서와 「경고아동포제군(警告我同胞諸君)」이란 격문을 작성하여 각각 20여매씩 등사한 후, 전라북도 남원군 덕과면 면사무소 사환인 김광삼(金光三)으로 하여금 각 면장들에게 전하도록 하였다. 4월 3일 전라북도 남원군 덕과면 신양리(新陽里) 뒷산의 도화곡(桃花谷)에는 그를 비롯하여 유례없이 많은 약 8백여명이 식수기념일 행사에 참여하였고, 헌병주재소 소장과 보조원들도 점심 식사에 초청되었다. 오후의 식수가 끝나자, 이석기는 여기에 참가한 덕과면 면민들에게 탁주를 대접한 후, 독립만세운동의 필요성을 역설하고 독립만세를 선창하였다. 이에 그를 비롯하여 이승순(李承珣)·이풍기(李豊基)·이석화(李石和)·복봉순(卜鳳淳) 등이 호응하여 식수기념일 행사장은 삽시간에 대한 독립 만세 시위장으로 변하였다. 너무나 돌발적인 일이었기 때문에 이 행사에 함께 참여했던 헌병주재소 소장도 아예 몸둘 바를 몰랐다. 이에 그는 대한 독립 만세 시위 군중들과 함께 남원·전주(全州)간의 도로를 따라 전라북도 남원군 사매면 오신리(全羅北道 南原郡 巳梅面 梧新里)에 있는 헌병주재소 예하 분견소로 시위 행진을 하였다. 그는 전라북도 남원군 사매면 사율리(全羅北道 南原郡 巳梅面 沙栗里)를 지날 무렵, 이석기의 격문서 낭독으로 더욱 사기가 충천한 대한 독립 만세 시위 군중과 함께 헌병주재소 앞 큰길가에 도착하여 독립만세를 외치며 시위를 벌였다. 이때 전라북도 남원군 남원읍에서 응원 출동한 헌병분대장 예속 무장 군인이 자동차로 도착하자 사태가 긴박하게 되었다. 그러나 이석기와 함께 스스로 책임을 지고 자진 체포됨으로써 시위 군중은 무사히 귀가할 수 있었다. 이 사건 관련 기소되면서 그는 결국 이해 1919년 7월 24일을 기하여 경상북도 대구복심법원에서 소위 보안법 위반 혐의로 징역 1년 6개월형을 받고 옥고를 치렀고 1920년 10월에 만기출감하였다.2. 2. 1. 남원 덕과면 만세 운동 주도
1889년 조선국 음서로써 조선 관직에 천거되어 이후 대한제국 시대였던 1909년까지 전라북도 지방에서 군서기관 직책을 지냈고 관료 직위 퇴임 이후 전라북도 남원의 성리학 대표 향반으로 전라북도 남원에서 훈도하던 그는 1919년 4월 3일 이석기(李奭器) 등과 함께 전라북도 남원군 덕과면(全羅北道 南原郡 德果面) 일대의 대한 독립 만세 운동을 주도하였다. 이날은 식수기념일(植樹紀念日)로서 일제 치하에서 매년 행해지던 연례행사일이었다. 그는 당시 전직 대한제국 관료로서 일제의 식민통치에 불만을 가지고 면장 이석기 및 면내 유지들과 비밀회의를 통하여 이날을 이용하여 독립만세시위를 전개하기로 결의하였다. 이에 이석기는 그의 집에서 각 면장에게 보내는 대한 독립 만세 운동의 참가 취지서와 「경고아동포제군(警告我同胞諸君)」이란 격문을 작성하여 각각 20여매씩 등사한 후, 전라북도 남원군 덕과면 면사무소 사환인 김광삼(金光三)으로 하여금 각 면장들에게 전하도록 하였다. 4월 3일 전라북도 남원군 덕과면 신양리(新陽里) 뒷산의 도화곡(桃花谷)에는 그를 비롯하여 유례없이 많은 약 8백여명이 식수기념일 행사에 참여하였고, 헌병주재소 소장과 보조원들도 점심 식사에 초청되었다. 오후의 식수가 끝나자, 이석기는 여기에 참가한 덕과면 면민들에게 탁주를 대접한 후, 독립만세운동의 필요성을 역설하고 독립만세를 선창하였다. 이에 그를 비롯하여 이승순(李承珣)·이풍기(李豊基)·이석화(李石和)·복봉순(卜鳳淳) 등이 호응하여 식수기념일 행사장은 삽시간에 대한 독립 만세 시위장으로 변하였다. 너무나 돌발적인 일이었기 때문에 이 행사에 함께 참여했던 헌병주재소 소장도 아예 몸둘 바를 몰랐다. 이에 그는 대한 독립 만세 시위 군중들과 함께 남원·전주(全州)간의 도로를 따라 전라북도 남원군 사매면 오신리(全羅北道 南原郡 巳梅面 梧新里)에 있는 헌병주재소 예하 분견소로 시위 행진을 하였다. 그는 전라북도 남원군 사매면 사율리(全羅北道 南原郡 巳梅面 沙栗里)를 지날 무렵, 이석기의 격문서 낭독으로 더욱 사기가 충천한 대한 독립 만세 시위 군중과 함께 헌병주재소 앞 큰길가에 도착하여 독립만세를 외치며 시위를 벌였다. 이때 전라북도 남원군 남원읍에서 응원 출동한 헌병분대장 예속 무장 군인이 자동차로 도착하자 사태가 긴박하게 되었다. 그러나 이석기와 함께 스스로 책임을 지고 자진 체포됨으로써 시위 군중은 무사히 귀가할 수 있었다. 이 사건 관련 기소되면서 그는 결국 이해 1919년 7월 24일을 기하여 경상북도 대구복심법원에서 소위 보안법 위반 혐의로 징역 1년 6개월형을 받고 옥고를 치렀고 1920년 10월에 만기출감하였다.2. 2. 2. 투옥과 출소
1889년 조선국 음서로써 조선 관직에 천거되어 이후 대한제국 시대였던 1909년까지 전라북도 지방에서 군서기관 직책을 지냈고 관료 직위 퇴임 이후 전라북도 남원의 성리학 대표 향반으로 전라북도 남원에서 훈도하던 그는 1919년 4월 3일 이석기(李奭器) 등과 함께 전라북도 남원군 덕과면(全羅北道 南原郡 德果面) 일대의 대한 독립 만세 운동을 주도하였다. 이날은 식수기념일(植樹紀念日)로서 일제 치하에서 매년 행해지던 연례행사일이었다. 그는 당시 전직 대한제국 관료로서 일제의 식민통치에 불만을 가지고 면장 이석기 및 면내 유지들과 비밀회의를 통하여 이날을 이용하여 독립만세시위를 전개하기로 결의하였다. 이에 이석기는 그의 집에서 각 면장에게 보내는 대한 독립 만세 운동의 참가 취지서와 「경고아동포제군(警告我同胞諸君)」이란 격문을 작성하여 각각 20여매씩 등사한 후, 전라북도 남원군 덕과면 면사무소 사환인 김광삼(金光三)으로 하여금 각 면장들에게 전하도록 하였다. 4월 3일 전라북도 남원군 덕과면 신양리(新陽里) 뒷산의 도화곡(桃花谷)에는 그를 비롯하여 유례없이 많은 약 8백여명이 식수기념일 행사에 참여하였고, 헌병주재소 소장과 보조원들도 점심 식사에 초청되었다. 오후의 식수가 끝나자, 이석기는 여기에 참가한 덕과면 면민들에게 탁주를 대접한 후, 독립만세운동의 필요성을 역설하고 독립만세를 선창하였다. 이에 그를 비롯하여 이승순(李承珣)·이풍기(李豊基)·이석화(李石和)·복봉순(卜鳳淳) 등이 호응하여 식수기념일 행사장은 삽시간에 대한 독립 만세 시위장으로 변하였다. 너무나 돌발적인 일이었기 때문에 이 행사에 함께 참여했던 헌병주재소 소장도 아예 몸둘 바를 몰랐다. 이에 그는 대한 독립 만세 시위 군중들과 함께 남원·전주(全州)간의 도로를 따라 전라북도 남원군 사매면 오신리(全羅北道 南原郡 巳梅面 梧新里)에 있는 헌병주재소 예하 분견소로 시위 행진을 하였다. 그는 전라북도 남원군 사매면 사율리(全羅北道 南原郡 巳梅面 沙栗里)를 지날 무렵, 이석기의 격문서 낭독으로 더욱 사기가 충천한 대한 독립 만세 시위 군중과 함께 헌병주재소 앞 큰길가에 도착하여 독립만세를 외치며 시위를 벌였다. 이때 전라북도 남원군 남원읍에서 응원 출동한 헌병분대장 예속 무장 군인이 자동차로 도착하자 사태가 긴박하게 되었다. 그러나 이석기와 함께 스스로 책임을 지고 자진 체포됨으로써 시위 군중은 무사히 귀가할 수 있었다. 이 사건 관련 기소되면서 그는 결국 이해 1919년 7월 24일을 기하여 경상북도 대구복심법원에서 소위 보안법 위반 혐의로 징역 1년 6개월형을 받고 옥고를 치렀고 1920년 10월에 만기출감하였다. 이후 1921년 11월에서 1928년 11월까지 한국독립당 국가민족행정특보위원 직위(1925년 12월에서 1926년 1월까지 임정 내무부 내무국 부국장보 직위 겸직)를 역임하였다.2. 3. 한국독립당 활동 (1921년 ~ 1928년)
조동선은 1889년 조선국 음서로써 조선 관직에 천거되어 대한제국 시대였던 1909년까지 전라북도 지방에서 군서기관 직책을 지냈다. 관료 직위 퇴임 이후 전라북도 남원의 성리학 대표 향반으로 훈도하던 그는, 1919년 4월 3일 이석기(李奭器) 등과 함께 전라북도 남원군 덕과면(全羅北道 南原郡 德果面) 일대의 대한 독립 만세 운동을 주도하였다. 1919년 7월 24일을 기하여 경상북도 대구복심법원에서 소위 보안법 위반 혐의로 징역 1년 6개월형을 받고 옥고를 치렀고 1920년 10월에 만기출감하였다. 이후 1921년 11월에서 1928년 11월까지 한국독립당 국가민족행정특보위원 직위(1925년 12월에서 1926년 1월까지 임정 내무부 내무국 부국장보 직위 겸직)를 역임하였다.3. 사후
대한민국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고자 1982년 대한민국 대통령 표창장을, 1990년 대한민국 건국훈장 애족장을 각각 추서하였다.
4. 평가
본 사이트는 AI가 위키백과와 뉴스 기사,정부 간행물,학술 논문등을 바탕으로 정보를 가공하여 제공하는 백과사전형 서비스입니다.
모든 문서는 AI에 의해 자동 생성되며, CC BY-SA 4.0 라이선스에 따라 이용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위키백과나 뉴스 기사 자체에 오류, 부정확한 정보, 또는 가짜 뉴스가 포함될 수 있으며, AI는 이러한 내용을 완벽하게 걸러내지 못할 수 있습니다.
따라서 제공되는 정보에 일부 오류나 편향이 있을 수 있으므로, 중요한 정보는 반드시 다른 출처를 통해 교차 검증하시기 바랍니다.
문의하기 : help@durumis.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