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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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조휘는 한양 조씨 시조 조지수의 아들로, 1258년 몽골의 침략 당시 몽골에 투항하여 쌍성총관부 총관이 되었다. 그는 탁청과 함께 강원도 일대의 성들을 몽골에 귀부하도록 선동하고, 고려군을 살해하며 고주를 점령하는 등 몽골의 침략에 적극 협조했다. 이후 몽골군과 함께 한계성을 공격하려다 실패하고, 고려 사자의 물품을 약탈하는 등 행적을 보였다. 조휘의 후손들은 쌍성총관부를 4대 99년간 세습했으며, 그의 손녀는 이성계의 조부 이춘에게 시집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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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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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생애
한양 조씨의 시조 조지수의 아들로, 선대부터 용진현(龍津縣)[1]에 대대로 세거한 토착 사족이다.[2]
조휘가 몽골에 투항한 뒤, 증손 조소생이 1356년 유인우를 비롯한 고려군에게 쫓겨날 때까지 4대 99년간 쌍성총관부는 조휘 집안이, 천호는 탁청 집안이 세습했다.[6] 조휘의 손녀는 이성계의 조부 이춘의 후궁이 되었다.[7]
2. 1. 가계
관계 | 이름 | 비고 |
---|---|---|
아버지 | 조지수 | |
아들 | 조양기 | 제2대 쌍성총관, 1260년 출생 |
손자 | 조림 | 제3대 쌍성총관 |
증손 | 조소생 | 제4대 쌍성총관, ?~1362년[8] |
증손 | 권종(權琮) | 권종에게 시집감 |
손자 | 조돈 | 1307년~1380년 |
손자 | 조천주(趙天柱) | |
손녀 | 조씨 | 도조 이춘의 후궁, 이성계의 계조모 |
손자 또는 조카손자 | 조숙(趙淑) | 좌윤, 완창대군 이자흥의 장인 |
2. 2. 몽골 투항과 쌍성총관부 설치
1258년 몽골 군사가 화주 지역을 침략하자, 조휘는 정주 출신의 탁청과 함께 강원도 등주, 문주 등 여러 성의 사람들을 선동해 몽골군에 투항하게 했다. 이들은 동북면병마사 신집평이 죽도로 들어간 후 식량 조달로 수비가 허술해진 틈을 타 신집평, 등주부사 박인기, 화주부사 김선보, 경별초(京別抄)[3] 군사들을 살해하고 고주(高州)까지 점령했다. 이후 화주 이북 지역을 몽골에 바치자 몽골은 쌍성총관부를 설치, 조휘를 총관으로, 탁청을 천호(千戶)로 임명했다.[4]1259년 조휘는 등주와 화주 사람들을 이끌고 몽골군을 인도하여 한계성(寒溪城, 지금의 인제군에 위치)을 공격하려 했으나, 방호별감(防護別監) 안홍민이 이끄는 야별초(夜別抄)에게 섬멸당했다.[5]
2. 3. 투항 이후의 행적
1259년 조휘는 등주와 화주 사람들을 이끌고 몽골군을 인도하여 한계성(寒溪城, 지금의 인제군)을 공격하려 했으나, 방호별감(防護別監) 안홍민이 이끄는 야별초에게 섬멸당했다.[5] 고려 왕이 몽골군에게 보낸 사자(使者) 김기성 일행과 선물을 보룡역에서 약탈했으나, 동진국(東眞國) 군사와 함께 춘주의 천곡촌(泉谷村)에 머물다가 신의군(神義軍)에게 다시 빼앗겼다.[2] 양주에서 난민들이 요청하자 군사 400명을 보내 양주 수령 지주사(知州事)를 잡아오게 했다.[2]3. 기타
참조
[1]
문서
현 함경남도 문천시, 원산시 일대
[2]
웹사이트
고려사 130권 열전 제43권 반역 조휘
http://www.history.g[...]
[3]
문서
경초군
[4]
웹인용
고려사절요 제17권, 고종 안효대왕 4(高宗安孝大王四), 무오 45년(1258)
https://web.archive.[...]
2018-11-09
[5]
웹인용
고려사절요 제17권, 고종 안효대왕 4(高宗安孝大王四), 기미 46년(1259)
https://web.archive.[...]
2018-11-09
[6]
웹사이트
http://encykorea.aks[...]
[7]
웹사이트
조선왕조실록, 태조 1권 총서 15번째기사
http://sillok.histor[...]
[8]
웹사이트
http://encykorea.aks[...]
[9]
문서
나해는 그 어머니 조씨가 고려의 왕족으로써(那海以其母趙氏 高麗王族)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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