맨위로가기

존 R. 하지

"오늘의AI위키"는 AI 기술로 일관성 있고 체계적인 최신 지식을 제공하는 혁신 플랫폼입니다.
"오늘의AI위키"의 AI를 통해 더욱 풍부하고 폭넓은 지식 경험을 누리세요.

1. 개요

존 R. 하지는 미국의 군인으로, 제1차 세계 대전과 제2차 세계 대전에 참전했다. 그는 1945년 9월 미 제24군단 소속 제7보병사단을 이끌고 인천에 상륙하여 일본 총독부의 항복을 받았으며, 이후 주한 미군 사령관과 미군정청 사령관을 겸임하며 1948년 대한민국 정부 수립 전까지 남한을 통치했다. 하지는 한국의 정치적 배경에 대한 지식이 부족하여, 이 시기 그의 군정은 혼란스러운 정치 상황을 초래했다는 비판을 받기도 했다. 그는 1952년 대장으로 진급했으며, 1963년 사망했다.

더 읽어볼만한 페이지

  • 미국 육군고등사관양성소 동문 - 찰스 린드버그
    찰스 린드버그는 1927년 단독 무착륙 대서양 횡단 비행에 성공하여 세계적인 명성을 얻었으나, 아들 유괴 사건, 나치 독일과의 관계, 반유대주의적 발언 등 논란과 과학 연구, 저술 활동 등 복잡한 삶을 살았던 미국의 비행사이자 저술가이다.
  • 미국 국방산업대학교 동문 - 이철희 (1923년)
    이철희는 대한민국의 군인, 공무원, 기업인, 정치인으로 육군 소장 예편 후 HID 부대장, 중앙정보부 차장, 대화산업 회장을 역임하고 제10대 국회의원을 지냈으나, 장영자·이철희 금융사기 사건으로 구속되어 징역 15년을 선고받는 등 가석방 후에도 여러 차례 사기 사건으로 구속 및 수감되었다.
  • 미국 국방산업대학교 동문 - 존 A. 위컴 주니어
    존 A. 위컴 주니어는 한국 전쟁과 베트남 전쟁에 참전한 미국의 4성 장군으로, 1983년부터 1987년까지 미 육군참모총장을 역임했으며 주한미군사령관으로서 한국의 정치적 긴장 완화에 기여했으나 5·18 광주 민주화 운동 당시 작전통제권 이양 승인 결정으로 논란이 되기도 했다.
존 R. 하지 - [인물]에 관한 문서
기본 정보
존 리드 호지 장군
출생일1893년 6월 12일
사망일1963년 11월 12일
출생지일리노이주 골콘다
사망지워싱턴 D.C.
군 복무 기간1917년 - 1953년
최종 계급육군 대장
군번0-7285
지휘 및 부대
지휘제3군 사령관
제5군단 사령관
제24군단 사령관
부대제43보병사단
아메리카 사단
제24군단
제5군단
미국 제3군
병과보병 병과
참전
전투제1차 세계 대전
제2차 세계 대전
과달카날 전투
카트휠 작전
솔로몬 제도 전역
부건빌 전투
필리핀 전역
레이테 전투
오키나와 전투
블랙리스트 포티 작전
한국 전쟁
수상 및 훈장
훈장육군 공로 훈장 (3회)
해군 공로 훈장
레지옹 오브 메리트
항공 훈장
퍼플 하트 훈장
기타 경력
경력미국 육군 지상군 사령관
직책군정 장관
군정청 민정 장관안재홍
대통령해리 S. 트루먼 미국 대통령
임기1945년 9월 8일 ~ 1948년 8월 27일 (군정장관)
최고 사령관 임기1945년 9월 8일 ~ 1947년 2월 5일
거주지미국 워싱턴 D.C.

2. 생애

존 R. 하지는 1893년 6월 12일 일리노이주 골콘다에서 태어났다. 서던 일리노이 티처스 칼리지와 일리노이 대학교를 다녔으며, 포트 셰리던에 있는 미국 육군 장교 후보생 학교에서 장교 양성 과정을 마친 후, 1917년 육군 보병 소위로 임관되었다.[1] 제1차 세계 대전에 참전하여 프랑스룩셈부르크에서 복무했다.[1]

전쟁이 끝난 후에도 육군에 남아 1921년부터 1925년까지 미시시피 주립 대학교에서 군사학을 가르쳤고, 1926년 보병학교를 졸업했다. 하와이에 파견된 후에는 1934년 사령부 및 참모학교, 육군사관학교(United States Army War College), 공군 전술학교(Air Corps Tactical School)를 졸업했다.[1]

제2차 세계 대전 중에는 태평양 전쟁에서 활약했다. 과달카날 전투, 부겐빌 전투에 참전했고, 1944년 필리핀 전투 중 소장, 1945년 8월 오키나와 전투 이후 중장으로 진급했다. 제10군 제24군단 지휘관을 역임했다.

1945년부터 1948년까지 재조선미육군사령부군정청 군정장관을 역임했다. 1945년 9월 9일 더글러스 맥아더 장군의 지시에 따라 카토크틴(USS Catoctin)을 타고 인천광역시 월미도에 상륙, 38선 이남 주둔 일본군의 항복을 받았고 연합군 포로 석방에도 관여했다.[1]

1948년 미국으로 귀국하여 1950년까지 노스캐롤라이나주 포트 브래그에서 근무했다. 1950년 한국 전쟁 발발 후 제3군 사령관으로 임명되어 주로 미국 본토에서 활동했다. 1953년 6월 군 복무를 마쳤다.

2. 1. 생애 초기

존 리드 하지는 1893년 미국 중서부 일리노이주 골콘다(Golconda)의 농촌에서 태어나 보육원에서 자랐다. 1912년 일리노이 주립대학교 건축학과에 입학하여 1년 휴학 후 1917년 졸업(건축학사)하고, 그 해 포트셰리단 미국 육군포병사관후보생학교에 입학했다.[1]

서던 일리노이 티처스 칼리지와 일리노이 대학교를 졸업하고,[1] 포트 셰리던(Sheridan Reserve Center)에 있는 미국 육군 장교 후보생 학교(Officer Candidate School (U.S. Army))에서 장교 양성 과정을 마친 후, 1917년 육군 보병 소위로 임관되었다.[1] 제1차 세계 대전 당시 프랑스룩셈부르크에서 복무했다.[1]

전쟁이 끝난 후에도 육군에 남아 1921년부터 1925년까지 미시시피 주립 대학교에서 군사학을 가르쳤고, 1926년 보병학교를 졸업했다.[1] 하와이에 파견된 후에는 1934년 사령부 및 참모학교, 육군사관학교(United States Army War College), 공군 전술학교(Air Corps Tactical School)를 졸업했다.[1]

2. 2. 사관 생도

1917년 24세 때 미국 육군포병사관후보생학교를 졸업하고 소위로 임관하여 직업 군인의 길을 걸었다.[3][4] 제1차 세계 대전 당시 프랑스룩셈부르크에서 복무했다.

2. 3. 1, 2차 대전 당시 활동

제1차 세계 대전에 참전하여 프랑스룩셈부르크에서 전투를 치렀다. 제1차 세계 대전 때 프랑스 전선에 대대장으로 참전했다. 미국 육군참모학교, 보병학교, 화학전학교를 거쳐 1937∼42년에는 미국 국방부에서 근무했다. 항공 참관인 자격으로 항공전술학교도 졸업했다.[3]

전쟁이 끝난 후에도 육군에 남아 1921년부터 1925년까지 미시시피 주립 대학교에서 군사학을 가르쳤고, 1926년 보병학교를 졸업했다. 하와이에 파견된 후에는 1934년 사령부 및 참모학교, 육군사관학교, 공군 전술학교를 졸업했다.[3]

제2차 세계 대전 중에는 태평양 전선에서 복무했다. 1944년 필리핀 전쟁 중에 소장이 되었고, 「미국사단」 사단장으로 승진해 솔로몬군도에서 승전한데 이어 1944년에는 소장으로 진급해 미국 육군 24 군단장이 되면서 과달카날 전투에서 승리를 거뒀다.[3] 1945년 오키나와 전투에 참전했다. 1945년 6월 임시 중장(Temporary Lieutenant General)으로 진급하여 제10군 소속 제24(XXIV)군단 사령관으로 취임했다.

제2차 세계 대전이 시작될 무렵, 호지는 캘리포니아에 주둔하며 서부 방위 사령부의 일부였던 제7군단의 참모장으로 근무했으며, 로버트 C. 리처드슨 주니어 소장의 지휘를 받았다. 그는 1942년 6월 준장으로 임시 승진했고, 하와이에 있는 제25보병사단으로 전속되어 길버트 R. 쿡의 뒤를 이어 제이 로턴 콜린스 소장의 부사단장 겸 부관이 되었다.

제25사단은 1942년 11월 과달카날 전투에 참전하기 위해 해외로 파병되었다. 호지는 1943년 4월 소장으로 진급하여 제43보병사단의 임시 사령관으로 전속될 때까지 제25사단에 남아 있었다. 그는 전투로 지쳐 있던 존 H. 헤스터 소장을 대신했다. 호지는 북부 솔로몬 제도 전투에서 제43사단을 지휘했으며, 그 공로로 육군 훈장을 받았다.

제43사단에서 3개월간 복무한 후, 호지는 피지 제도에서 "아메리칼" 제23보병사단의 사령관이 되었다. 이후 그는 부겐빌 전투에서 사단을 지휘했다.

호지는 하와이에서 새로 활성화된 제24군단의 사령관으로 임명되어 1944-45년 필리핀 전역의 레이테 전투와 이후 오키나와 전투에 참가했다. 그는 이러한 각 전투에서 육군 훈장을 받았다. 호지는 1945년 6월 중장으로 임시 승진했다.

연도내용
1941년-1942년제7군단 참모장
1941년-1943년제25보병사단 고급참모(과달카날 전투)
1943년제43보병사단 사단장(뉴조지아 전투)
1943년-1944년제23보병사단 사단장(부겐빌 전투)
1944년-1948년제24군단 사령관(레이테 전투-오키나와 전투)


2. 4. 2차 대전 종전 이후

1945년 9월 8일, 더글러스 맥아더 장군의 명령에 따라 존 하지 중장이 이끄는 미국 제24군단 소속 미군 제7보병사단이 인천에 상륙하여 일본 총독부 및 38선 이남의 조선 주둔군의 항복을 받았다.[1] 이후 주한 미군 사령관과 1945년부터 1948년까지 38선 이남 지역에 대한 미군정청의 사령관을 겸임하여 1948년 대한민국 정부 수립 전까지 남한을 통치했다. 1948년 8월 15일 대한민국 정부수립식에 참여한 후, 서울대학교에서 명예 법학박사 학위를 받았으며, 신생 대한민국 정부에 통치 임무를 인수인계한 후 귀국했다.

호지는 1945년부터 1948년까지 주한 미국 육군(USAFIK) 사령관으로, 더글러스 맥아더의 명령에 따라 1945년 9월 9일 인천에 상륙했다.[1] 그는 38선 이남의 모든 일본군의 항복을 받은 최고 사령관이었다. 호지는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과 그 인민위원회를 인정하지 않고 1945년 12월 12일에 이를 불법화했다.[1]

2. 5. 한국 전쟁 이후

호지는 노스캐롤라이나주 포트 브래그로 돌아가 1948년부터 1950년까지 제5군단을 지휘했다.[1] 알반 C. 길럼 중장이 은퇴한 후, 호지는 제3군 사령관으로 임명되었다.

호지는 1952년 7월 5일 대장으로 진급했다. 그의 마지막 임무는 1952년 5월 8일부터 1953년 6월 30일 군 복무에서 은퇴할 때까지 미 육군 야전군 사령관이었다.

호지는 1963년 워싱턴 D.C.에서 70세의 나이로 사망했다.[1]

2. 6. 말년

1949년부터 1951년까지 노스캐롤라이나주 포트 브래그에서 제5군단장을 맡았다. 한국전쟁이 발발하자 미국 육군 제3군 사령부의 참모장을 맡기도 했으며, 1952년 미육군 지상군사령관으로 임명되었고 1953년에 퇴역했다. 1963년 향년 71세로 별세했다.[3]

1952년 6월 5일, 미국 및 해외 일부 주둔군 사령관들이 프랭크 페이지 육군장관 및 육군참모총장 J. 로턴 콜린스 장군과 함께 펜타곤에서 루틴 회의를 가졌다. 존 R. 호지 중장은 오른쪽에서 네 번째 자리에 앉아 페이지 장관(왼쪽)과 헨리 어런드 중장(오른쪽) 사이에 있다.


'''존 R. 호지''' 장군의 묘소(알링턴 국립묘지)


호지는 1952년 7월 5일 대장으로 진급했다. 그의 마지막 임무는 1952년 5월 8일부터 1953년 6월 30일 군복무에서 은퇴할 때까지 미 육군 야전군 사령관이었다.

호지 장군은 1963년 워싱턴 D.C.에서 70세의 나이로 사망했다.

3. 주한 미군 사령관 겸 미군정청 예하 군정 사령관으로서 활동

1945년 9월 8일 더글러스 맥아더 장군의 명령에 따라 존 하지 중장이 이끄는 미국 제24군단 소속 미군 제7보병사단이 인천에 상륙하여 일본 총독부 및 38선 이남의 조선 주둔군의 항복을 받았다. 이후 주한 미군 사령관 겸 미군정청의 사령관으로서 1948년 대한민국 정부 수립 전까지 남한을 통치했다.[1] 1948년 8월 15일 대한민국 정부수립식에 참여한 후, 서울대학교에서 명예 법학박사 학위를 받고, 신생 대한민국 정부에 통치 임무를 인수인계한 후 귀국했다.

1945년부터 1948년까지 주한 미국 육군(USAFIK) 사령관이었던 호지는 더글러스 맥아더의 명령에 따라 1945년 9월 9일 인천에 상륙, 38선 이남의 모든 일본군의 항복을 받았다. 호지는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과 그 인민위원회를 인정하지 않고 1945년 12월 12일에 불법화했다.[1]

존 R. 하지 군정 사령관 임기 동안 한국 전쟁으로 이어지는 혼란스러운 정치 상황은 군정의 실책으로 비판받기도 한다. 그러나 호지는 정치, 외교, 한국의 정치적 배경에 대한 지식이 부족한 군인이었으며, 유엔군사령부의 무관심도 한 원인이었다고 할 수 있다.

3. 1. 군정청 최고 통치자

1945년 9월 8일 더글러스 맥아더 장군의 명령에 따라 존 하지 중장이 이끄는 미국 제24군단 소속 미군 제7보병사단이 인천에 상륙하여 일본 총독부 및 38선 이남의 조선 주둔군의 항복을 받았다. 이후 주한 미군 사령관과 1945년부터 1948년까지 38선 이남 지역에 대한 미군정청의 사령관을 겸임하여 1948년 대한민국 정부 수립 전까지 남한을 통치했다.[1] 1948년 8월 15일 대한민국 정부수립식에 참여한 후, 서울대학교에서 명예 법학박사 학위를 받고, 신생 대한민국 정부에 통치 임무를 인수인계한 후 귀국했다.

10월 31일 한국민주당 수석총무 송진우를 불러 조병옥을 국립경찰의 장으로 임명하는 것과 같은 중대한 내용을 토의하고, 미국의 행동을 설명하는 데 있어서 송진우를 전달 수단으로 이용하였다.[5]

1945년 12월 30일 김구에게 신탁통치를 반대하는 성명서를 받았으며, 같은 날 맥아더에게 송신하였다. 김구는 하지에게 미국이 이것을 모스크바 협정에 언급된 3개국에 전달해줄 것을 강조하였다.[6]

한국 군정 기간 동안 한국 전쟁으로 이어지는 혼란스러운 정치 상황은 군정의 실책으로 비판받기도 한다. 그러나 하지는 정치, 외교, 한국의 정치적 배경에 대한 지식이 부족한 군인이었으며, 유엔군사령부의 무관심도 한 원인이었다고 할 수 있다.

3. 1. 1. 김구와의 갈등

1945년 12월 29일 송진우가 김구로 하여금 신탁통치 문제에 관하여 미군정과 정면대결을 피하게 하려고 시도하다가[8][9] 귀가 후, 12월 30일 새벽 6시에 자택에서 청년단의 저격을 받고 암살당했다. 하지 사령관은 송진우 암살의 배후로 김구를 지목하고 1946년 1월 1일 김구를 미군정청으로 소환하여 경고를 주었다.[11] 송진우를 암살한 암살범 중 한 명인 한현우는 후에 송진우가 미국의 후견을 지지한 것이 자신의 저격 동기였다고 말했다. 다른 증거는 한현우를 김구와 연결시켰고, 커밍스는 한현우의 배후를 김구라고 보았다.[10]

3. 1. 2. 대한민국 임시정부 요인들과의 관계

1946년 1월 임정가 주권행사를 주장하며 신탁통치 반대운동을 벌이자, 김구 등을 소환하여 경고를 주었다. 임시정부의 반탁 운동 시도에 화가 난 하지는 임시정부 요인들을 강제 추방하려 했다.[12] 12월 31일 0시를 기해 임정 요인들을 인천에 있는 전 일본군의 미군 수용소에 수용했다가 중국으로 추방할 계획을 세웠으나, 군정청 경무부장 조병옥의 설득으로 취소되었다. 1946년 1월 1일 반도호텔의 하지 사무실에서 임시정부측과 군정청 측의 협상이 진행되었다.[12]

참조

[1] 서적 The Making of Modern Korea Routledge
[2] 문서 미 육군 대장
[3] 뉴스 미 점령군 사령관 하지/김학준(해방공간의 주역:4) http://www.donga.com[...] donga.com
[4] 서적 한국 현대사 산책 1940년대편 1 (8∙15해방부터 6∙25전야까지) 인물과사상사 2004-04-03
[5] 서적 한국전쟁의 기원 일월서각
[6] 서적 한국전쟁의 기원 일월서각
[7] 서적 한국전쟁의 기원 일월서각
[8] 서적 한국전쟁의 기원 일월서각
[9] 문서 고하 송진우 선생전, 대한민국사 I
[10] 서적 한국전쟁의 기원 일월서각
[11] 서적 백범어록 돌베게
[12] 서적 한국현대사산책:1940년대편 1 인물과 사상사
[13] 뉴스 秘錄 韓國外交<1> : 건국前夜① http://dna.naver.com[...] 경향신문 2011-04-10
[14] 뉴스 秘錄 韓國外交<1> : 건국前夜① http://dna.naver.com[...] 경향신문 2011-04-10
[15] 서적 한국현대사산책 인물과사상사
[16] 서적 한국현대사산책 인물과사상사
[17] 서적 한국 현대사 산책 1940년대편 1 (8∙15해방부터 6∙25전야까지) 인물과사상사 2004-04-03
[18] 뉴스 秘錄 韓國外交<1> : 건국前夜① http://dna.naver.com[...] 경향신문 2011-04-10
[19] 뉴스 秘錄 韓國外交<1> : 건국前夜① http://dna.naver.com[...] 경향신문 2011-04-10
[20] 서적 한국 현대사 산책 1940년대편 1 (8∙15해방부터 6∙25전야까지) 인물과사상사 2004-04-03
[21] 뉴스 秘錄 韓國外交<1> : 건국前夜① http://dna.naver.com[...] 경향신문 2011-04-10
[22] 서적 강준만의 한국현대사산책:1940년대편 1 인물과사상사
[23] 뉴스 매일신보 1945년 10월 2일자 매일신보 1945-10-02
[24] 뉴스 秘錄 韓國外交<4> : 건국前夜③ http://dna.naver.com[...] 경향신문 1975-01-20
[25] 문서 2020-12-13
[26] 문서 윤석오의 증언
[27] 간행물 흔들리는 國基,이대로 둘 것인가! ; 國家의 正統性과 國是의 再定立을 모색해 본다<座談> 1988-04
[28] 서적 우남 이승만 연구 역사비평사



본 사이트는 AI가 위키백과와 뉴스 기사,정부 간행물,학술 논문등을 바탕으로 정보를 가공하여 제공하는 백과사전형 서비스입니다.
모든 문서는 AI에 의해 자동 생성되며, CC BY-SA 4.0 라이선스에 따라 이용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위키백과나 뉴스 기사 자체에 오류, 부정확한 정보, 또는 가짜 뉴스가 포함될 수 있으며, AI는 이러한 내용을 완벽하게 걸러내지 못할 수 있습니다.
따라서 제공되는 정보에 일부 오류나 편향이 있을 수 있으므로, 중요한 정보는 반드시 다른 출처를 통해 교차 검증하시기 바랍니다.

문의하기 : help@durumis.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