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7군단 (미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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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제7군단 (미국)은 제1차 세계 대전 직후인 1918년 프랑스에서 창설되어 1919년 해체되었으며, 이후 1921년 예비군으로 재창설되었다가 현역으로 전환되기도 했다. 제2차 세계 대전 중에는 노르망디 상륙 작전과 벌지 전투 등에 참전했으며, 냉전 시기에는 서독에 주둔하며 바르샤바 조약 기구에 대비했다. 1990년 걸프 전쟁에 참전하여 사막의 검 작전을 수행했으며, 1992년 해체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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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7군단 (미국) - [군대/부대]에 관한 문서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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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요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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별칭 | 제이호크 군단 (The Jayhawk Corps) |
표어 | 제이호크 (Jayhawk)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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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 | |
활동 기간 | 1918년–1919년 1921년-1927년 1941년–1946년 1950년–1992년 |
국가 | 미국 |
소속 | 미국 육군 |
참전 | 제1차 세계 대전 제2차 세계 대전 노르망디 북부 프랑스 라인란트 아르덴-알자스 중부 유럽 걸프 전쟁 73 이스팅 전투 노퍽 전투 메디나 리지 전투 |
지휘관 | |
주요 지휘관 | 로버트 C. 리처드슨 주니어 조지프 로턴 콜린스 줄리어스 W. 벡턴 주니어 존 갤빈 제임스 M. 개빈 |
2. 역사
제7군단은 제1차 세계 대전 중인 1918년 프랑스에서 창설되어 미국 원정군의 일원으로 활동했으며, 종전 후 1919년에 해체되었다. 이후 제1차 세계 대전 이후 시기인 1921년 미국 육군 예비군으로 재창설되었고, 1927년 현역으로 편입되어 제2차 세계 대전 발발 전까지 훈련 및 동원 계획을 담당했다.
1940년 제2차 세계 대전에 대비하여 다시 소집된 제7군단은 유럽 전선에 투입되어 중요한 역할을 수행했다. 특히 노르망디 상륙 작전에서는 유타 해변 상륙을 성공적으로 이끌었으며, 이후 코브라 작전의 선봉에 서서 프랑스 해방에 기여했다. 벌지 전투 등 서부 전선의 주요 전투에도 참전하여 연합군의 승리에 기여한 뒤, 1946년에 다시 해산되었다.
냉전이 시작되면서 NATO의 방어력 강화 필요성이 대두되자, 제7군단은 1950년에 재편성되어 서독에 주둔하게 되었다. 슈투트가르트에 사령부를 두고 제5군단과 함께 미국 유럽 육군의 핵심 전력으로서 바르샤바 조약 기구의 위협에 맞서 NATO의 중부 전선을 방어하는 임무를 수십 년간 수행했다.
1990년 이라크의 쿠웨이트 침공으로 발발한 걸프 전쟁에서 제7군단은 다시 한번 중요한 역할을 맡았다. 사우디 아라비아에 증파된 후, 1991년 '사막의 폭풍 작전'에서 다국적군의 주공(主攻) 부대로 참전하여 프레드릭 M. 프랭크 Jr. 중장의 지휘 아래 이라크 깊숙이 진격하는 '좌익 포위 기동'을 성공시켰다. 이 과정에서 73 이스팅 전투와 노포크 전투 등 주요 전투를 치르며 이라크 공화국 수비대를 격파하고 쿠웨이트 해방에 결정적으로 기여했다.
냉전 종식 후 미국의 군비 감축 계획에 따라, 제7군단은 1992년 4월 15일 공식적으로 해체되었다.
2. 1. 제1차 세계 대전 (1918년 ~ 1919년)
제7군단은 제1차 세계 대전 말기인 1918년 8월 19일 프랑스 레미르몽Remiremont|레미르몽fra에서 미국 원정군의 일원으로 창설되었다.[1] 군단은 제6보병사단, 제81보병사단, 제88보병사단으로 구성되었으며, 보주 지역에서 작전을 수행했다.[2] 창설 초기 지휘관으로는 윌리엄 M. 라이트, 오마 번디, 윌리엄 G. 한, 헨리 터먼 앨런 소장 등이 있었다.[2] 제1차 세계 대전 종전 후, 군단은 1919년 7월 11일에 해체되었다.[1]2. 2. 제1차 세계 대전 이후 (1921년 ~ 1940년)
조직 예비군 소속으로 1921년 7월 29일 창설되었으며, 제7군단 구역에 배정되어 제3군 예하 부대가 되었다. 1922년 1월 9일, 미국 미주리주 세인트루이스의 올드 커스텀하우스에서 현역 육군 및 조직 예비군 인원으로 군단 사령부가 공식적으로 활동을 시작했다. 초기 임무는 제7군단 구역 내 육군, 군단 및 기타 비사단 예비군 부대(야전 및 해안 포병 제외)에 대한 행정, 조직, 보급, 훈련 지원 및 계획 수립이었다.그러나 1923년 1월 27일, 사령부는 현역 임무에서 해제되었고, 기존 현역 인원은 제7군단 구역 비사단 그룹 사령부로 재배치되어 이전 임무를 이어받았다. 군단 사령부와 사령부 중대는 조직 예비군 소속으로 활동을 계속했다.
1927년 8월 15일, VII 군단 사령부는 조직 예비군에서 분리되어 현역 육군에 정식으로 배속되었다. 1933년 10월 1일에는 4개 육군 계획의 일환으로 제3군에서 제4군으로 소속이 변경되었다. 동시에 미국 네브래스카주 오마하에서 사령부가 부분적으로 활성화되었는데, 현역 인원은 제7군단 구역 사령부에 배속되고 예비군 인원은 해당 군단 구역 전역에서 차출되었다. 같은 날 사령부 중대 역시 조직 예비군에서 현역 육군으로 편입되었다.
"현역 육군 비활성" 부대로 분류된 군단 사령부는 배정된 예비 장교와 제7군단 구역 사령부의 참모 장교들을 활용하여 필요한 경우 단기간 임시로 조직되었다. 이러한 임시 조직은 1930년대에 여러 차례 있었던 제2군의 지휘소 연습(CPX)과 1937년 8월 미국 미네소타주 캠프 리플리에서 열린 제4군 기동 훈련 참여 등이 포함된다.
동원 계획에 따라, 1927년부터 1939년까지 군단 사령부의 지정 동원 기지는 미국 아칸소주 캠프 파이크였다. 이곳에서 군단은 예하 부대(주로 제7군단 구역에서 동원)의 지휘 및 통제를 담당할 예정이었다. 1939년 방어 동원 계획이 수립되면서 군단 사령부의 동원 기지는 미국 미네소타주 포트 스넬링으로 변경되었다.
2. 3. 제2차 세계 대전 (1940년 ~ 1946년)
1940년 11월 25일 앨라배마주 포트 맥클레란에서 다시 소집되어 제2차 세계 대전에 대비하기 위한 훈련에 돌입했다. 루이지애나 기동과 같은 FTX에 참가하였으며, 1941년 12월에는 캘리포니아주 산호세로 이동하여 서부 방위 사령부에 배속되어 훈련을 이어갔다.유럽 전선에 투입된 제7군단은 절대군주 작전의 일부인 노르망디 상륙 작전에 참전하였다. 당시 코트니 호지스 소장이 지휘하는 제1군에 배속되었으며, 군단 지휘관은 조셉 로턴 콜린스 소장이었다. 제7군단은 제82공수사단과 제101공수사단을 이끌고 유타 해변에 상륙하는 임무를 성공적으로 수행했다.
이후 제1군이 주도한 코브라 작전에서 선봉 역할을 맡아 셰르부르옥트빌, 생로 지역을 점령하는 데 기여했으며, 이 작전의 성공은 프랑스에서의 전황을 기동전으로 전환시키는 중요한 계기가 되었다. 또한 휘르트겐 숲 전투와 벌지 전투 등 서부 전선의 주요 전투에 지속적으로 참여하며 연합군의 승리에 기여했다.
유럽에서의 전쟁이 종결된 후, 제7군단은 1946년에 해산되었다.
2. 3. 1. 노르망디 상륙 작전
절대군주 작전의 일환인 노르망디 상륙 작전에 참가한 제7군단은 버나드 몽고메리 원수가 이끄는 제21집단군 예하, 코트니 호지스 소장이 지휘하는 제1군에 배속되었다. 군단은 조셉 로턴 콜린스 소장이 지휘했다.1944년 6월, 제7군단은 카랑탕 정면의 코드명 "유타 해변"에 상륙하는 임무를 맡았다. 상륙 초기에는 강하 부대로 제82공수사단과 제101공수사단이 배속되어 함께 작전을 수행했다. 이 두 공수사단은 노르망디 전투 이후 제18공수군단으로 편입되었다. 노르망디 상륙 당시 제7군단의 편성은 다음과 같다.
부대 | 지휘관 | |
---|---|---|
-- 제7군단 | 조셉 로턴 콜린스 소장 | |
제4보병사단 | 레이먼드 O. 바턴 소장 | |
제90보병사단 | 제이 W. 맥켈비 준장 | |
![]() | 제4기병연대 | 조셉 탈리 대령 |
제82공수사단 | 매슈 벙커 리지웨이 소장 | |
제101공수사단 | 맥스웰 데이븐포트 테일러 소장 |
상륙 이후, 제7군단은 7월부터 시작된 제1군의 공세 작전인 코브라 작전에서 선봉 역할을 담당했다. 이 작전은 노르망디 지역 돌파를 목표로 했으며, 제7군단은 셰르부르옥트빌, 생로 지역을 차례대로 점령하는 데 기여했다. 코브라 작전의 성공은 프랑스에서의 전황을 고착화된 보병 전투에서 기동전 양상으로 전환시키는 중요한 계기가 된 것으로 평가받는다.
2. 3. 2. 코브라 작전
노르망디 상륙 이후, 제7군단은 코트니 호지스 소장이 지휘하는 제1군에 배속되었고, 조셉 로턴 콜린스 소장이 지휘하였다.1944년 7월부터 시작된 제1군의 공세인 코브라 작전에서 제7군단은 공격의 선봉을 담당했다. 이 작전은 노르망디 지역 돌파를 목표로 하였으며, 제7군단은 초기 공격을 이끌며 셰르부르옥트빌, 생로 지역을 차례대로 점령하는 데 기여했다. 코브라 작전의 성공은 프랑스에서의 전쟁 양상을 고착화된 보병 전투에서 기동전으로 전환시키는 중요한 계기가 되었으며, 연합군이 프랑스 내륙으로 깊숙이 진격할 수 있는 발판을 마련한 것으로 평가받는다.
2. 3. 3. 벌지 전투
1944년 7월 미 제1군 주도의 공세인 코브라 작전에서 공격 선봉을 담당한 이후, 제7군단은 벌지 전투를 비롯하여 프랑스와 독일 영토 내에서 벌어진 전투에 지속적으로 참여하였다.2. 4. 냉전 (1950년 ~ 1991년)
공산주의 진영인 바르샤바 조약 기구 창설로 냉전이 본격화되자, 이에 대응하기 위해 제7군단은 1950년에 다시 편성되었다. 같은 해 10월 서독에 도착하여 미국 유럽 육군/제7군(USAREUR/7th US Army) 예하 부대로서 주둔을 시작했다.제7군단은 제5군단과 함께 서독에 주둔한 미군의 두 주요 전투 부대 중 하나였으며, NATO 방어 계획의 핵심적인 역할을 수행했다.[7] 군단 사령부는 슈투트가르트의 켈리 병영(Kelley Barracks)에 위치했다. 냉전 기간 동안 제7군단의 주된 임무는 바르샤바 조약 기구의 군사적 위협에 맞서 NATO의 중부 전선을 방어하는 것이었다.
2. 4. 1. 서독 주둔
공산주의 국가의 연합인 바르샤바 조약 기구가 설립되고 냉전이 시작되면서, 제7군단은 미국 유럽 육군/제7군(USAREUR/7th US Army) 예하의 두 개 군단 중 하나(다른 하나는 제5군단)로서 1950년에 다시 편성되었다. 같은 해 10월, 군단은 서독에 도착하여 주둔을 시작했다.[7]

1950년 재소집 이후 냉전 기간 동안, 제7군단은 바르샤바 조약 기구와의 대치 상황에서 NATO 전선의 일부를 방어하는 임무를 수행했다. 군단 사령부는 슈투트가르트의 켈리 병영(Kelley Barracks영어)에 위치했으며, 프랑크푸르트 암 마인의 아브람스 빌딩에 사령부를 둔 제5군단과 함께 서독에 주둔한 미군의 두 주요 전투 부대 중 하나였다. 제7군단은 서독 제2군단, 미국 제5군단과 함께 중앙군 집단(CENTAG, Allied Force Command Heidelberg영어)의 지휘 아래 남부 서독 지역의 방어를 책임졌다.
1989년 당시 제7군단의 편성은 다음과 같다.
부대 | 주둔지 |
---|---|
-- 제7군단 | 슈투트가르트 |
안스바흐 | |
캔자스주 포트 라일리(Fort Riley영어) (리포저 부대) | |
킹스턴 (전시 중앙군 집단 예비대로 배속 예정)[7] | |
뷔르츠부르크 | |
뉘른베르크 | |
군단 포병 | 슈투트가르트 |
![]() | 아우크스부르크 |
![]() | 베르트하임 |
![]() | 헤르초게나우라흐 |
![]() | 일리샤임(Illesheim영어) |
제7공병여단 | 콘베스트하임 |
![]() | 루트비히스부르크 |
제2지원사령부 | 넬링겐(Nellingen영어) |
제207전투정보여단 | 루트비히스부르크 |
인디애나폴리스 | |
미국 공군 제602항공지원단[26] | 슈투트가르트 |
2. 4. 2. 주요 부대
냉전 기간 동안 제7군단은 NATO의 일원으로서 바르샤바 조약 기구에 맞서 서독 지역 방어의 핵심적인 역할을 수행했다. 군단 사령부는 슈투트가르트의 켈리 병영에 위치했으며, V 군단과 함께 서독 주둔 미군의 주요 전투 부대 중 하나였다.
1989년 냉전 종식 시점의 제7군단 편성은 다음과 같다.[26]
부대 | 주둔지 | 비고 |
---|---|---|
-- 제7군단 | 슈투트가르트, 서독 | 군단 사령부 |
제1기갑사단 | 안스바흐 | |
제1기계화보병사단 | 포트 라일리, 캔자스주 | REFORGER 부대 |
-- 제1보병사단 (전진) | 괴핑겐, 서독 | 제1보병사단 예하 |
제3기계화보병사단 | 뷔르츠부르크 | |
제7군단 포병대 | 아우크스부르크 | |
제17야전포병여단 | 아우크스부르크 | 군단 포병대 예하 |
제72야전포병여단 | 베르트하임 | 군단 포병대 예하 |
제210야전포병여단 | 헤르초게나우라흐 | 군단 포병대 예하 |
제2기갑기병연대 | 뉘른베르크 | |
![]() | 일리샤임 | |
제7공병여단 | 콘베스트하임 | |
제14헌병여단 | 콘베스트하임 | |
루트비히스부르크 | ||
![]() | 루트비히스부르크 | |
제2군단 지원사령부 | 넬링겐 아우프 데르 필데른 | |
제602공중지원작전단 (미국 공군) | 슈투트가르트 |
또한, 유사시 제1 캐나다 사단이 중앙군집단의 예비대로서 제7군단과 함께 작전을 수행할 계획이었다.[7]
2. 5. 걸프 전쟁 (1990년 ~ 1991년)

1990년 이라크의 쿠웨이트 침공 이후, 제7군단은 미국의 두 번째 주요 지상군 파병 부대로 사우디 아라비아에 배치되었다. 이는 사우디아라비아 방어를 넘어 쿠웨이트를 해방하기 위한 공세 능력 확보 차원이었다.
걸프 전쟁이 발발하자 제7군단은 미국 중부 육군(ARCENT) 소속으로 프레드릭 M. 프랭크 Jr. 중장의 지휘 아래 다국적군의 주력 공세 부대로 참전했다. 당시 군단은 냉전기 표준 편제를 초과하는 강력한 전력을 갖추고 있었다. 총 병력 약 146,321명과 전차 1,487대, 보병전투차 1,384대, 야포 568문, MLRS 132문, 공격헬기 242대 등을 보유했다.[10][11] 예하에는 미국 제1기갑사단, 제3기갑사단, 제1보병사단(기계화), 제1기병사단, 영국 제1기갑사단 등 핵심 기갑/기계화 부대와 정찰 임무를 맡은 제2기병연대 등이 포함되었다.
1991년 2월 24일 시작된 지상전 '사막의 검 작전'(Operation Desert Sabre)에서 제7군단은 다국적군의 주공(主攻)으로서 이라크 영토 깊숙이 진격 후 동쪽으로 선회하여 쿠웨이트 내 이라크 공화국 수비대를 포위 섬멸하는 '좌익 포위'(Left Hook) 기동을 성공적으로 수행했다. 이 과정에서 73 이스팅 전투와 노포크 전투 등 주요 전투를 치르며 이라크군 주력 부대를 격파했다.[12]
약 100시간의 지상전 동안 제7군단은 이라크군 전차 약 1,350대, 장갑차 1,224대 등을 파괴하는 압도적인 전과를 올렸고, 이는 다국적군의 승리에 결정적인 기여를 했다. 반면 제7군단의 손실은 전사 47명, 부상 192명으로 상대적으로 매우 적었다.[14] 전쟁 중 노획한 이라크 공화국 수비대의 T-72 전차 한 대는 전후 독일 슈투트가르트의 캘리 막사 입구에 전시되어 군단의 승리를 기념했다.
2. 5. 1. 사막의 폭풍 작전
1990년 사담 후세인이 이끄는 이라크군이 쿠웨이트를 침공하자, 미국은 이에 대응하여 대규모 군사력을 파견했다. 제7군단은 제18공수군단에 이어 두 번째 주요 지상 전투부대로 사우디 아라비아에 배치되었다. 이러한 증파는 사우디아라비아 방어를 넘어 쿠웨이트에서 이라크군을 몰아낼 수 있는 공세 능력을 확보하기 위한 조치였다.[10][11]
1991년 2월 걸프 전쟁의 지상전이 시작되자, 제7군단은 미국 중부 육군(ARCENT)의 지휘 아래 남부 전선을 담당했으며, 프레드릭 M. 프랭크 Jr. 중장이 군단을 이끌었다. 당시 제7군단은 냉전기 표준 편제를 훨씬 능가하는 강력한 전력을 갖추고 있었다. 예하에는 미국 제1기갑사단, 제3기갑사단, 제1보병사단(기계화), 제1기병사단 등 미군 핵심 기갑/기계화 부대와 영국 제1기갑사단이 배속되었다. 또한 정찰 및 선도 부대로 제2기병연대와 제11항공여단 등이 군단의 작전을 지원했다. 제7군단은 총 146,321명의 병력과 함께 전차 1,487대, 보병전투차 1,384대, 야포 568문, 다연장로켓(MLRS) 132문, 랜스 전술 미사일 발사기 8기, 공격헬기 242대 등 압도적인 화력을 보유했다.[10][11]

2월 24일 개시된 지상전 '사막의 검 작전'(Operation Desert Sabre)에서 제7군단은 다국적군의 주공(主攻) 역할을 수행했다. 군단의 핵심 임무는 이라크 영토 깊숙이 서쪽으로 진격한 후 동쪽으로 방향을 틀어 쿠웨이트 내 이라크 공화국 수비대의 정예 기갑 부대들을 포위 섬멸하는, 이른바 '좌익 포위 기동'(Left Hook)이었다. 작전 초기, 제1보병사단이 이라크 방어선을 돌파하며 진격로를 확보했고, 제2기병연대가 선두에서 정찰 및 엄호 임무를 수행했다. 제1기갑사단은 북쪽으로 기동하여 메디나 능선 전투 등에서 공화국 수비대와 교전했으며, 제3기갑사단은 제1보병사단의 측면을 방호하며 군단의 주력 공격을 뒷받침했다.

제7군단은 진격 과정에서 73 이스팅 전투와 노포크 전투를 포함한 여러 결정적인 전투를 치렀다.[12] 특히 73 이스팅 전투는 제2기병연대가 이라크 공화국 수비대 '타와칼나' 기계화사단을 상대로 거둔 압도적인 승리로, 이후 미군 기갑전술 연구의 중요한 사례가 되었다. 제7군단은 좌측의 제18공수군단 및 우측의 아랍 연합군과 긴밀히 협조하며 이라크군의 저항을 효과적으로 제압하고 공화국 수비대 예하 사단들에 막대한 피해를 입혔다. 약 100시간 동안 이어진 지상전에서 제7군단은 이라크군 전차 약 1,350대, 장갑차 1,224대, 야포 285문, 방공 시스템 105기, 트럭 1,229대를 파괴하는 혁혁한 전과를 세웠다. 반면, 제7군단의 인명 피해는 전사 47명, 부상 192명으로 상대적으로 매우 적었다.[14] 이러한 제7군단의 성공적인 작전 수행은 쿠웨이트 해방과 걸프 전쟁의 전반적인 승리에 결정적인 기여를 했다.
걸프 전쟁에서의 뛰어난 활약을 인정받아 제1, 3기갑사단, 제1보병사단, 제2기병연대 등 제7군단 예하의 다수 부대가 용맹 부대 표창(Valorous Unit Award)을 수상했다.[13] 전쟁 중 노획한 이라크 공화국 수비대의 T-72 전차 한 대는 전후 독일 슈투트가르트에 위치했던 제7군단 사령부 캘리 막사 입구에 승리의 상징으로 전시되기도 했다.
2. 5. 2. 73 이스팅 전투
1991년 2월 24일 시작된 걸프 전쟁의 지상전 단계인 '사막의 검 작전'에서 제7군단은 다국적군의 주공(主攻)을 담당했다. 프레드릭 M. 프랭크 Jr. 중장의 지휘 아래, 제7군단은 제18공수군단에 의해 서쪽 측면을 보호받으며 이라크 영토 깊숙이 진격했다. 이후 동쪽으로 방향을 전환하여 쿠웨이트 내 이라크 공화국 수비대를 포위 섬멸하는 대규모 기동 작전, 이른바 '좌익 포위'(Left Hook) 작전을 수행했다.
이 과정에서 군단의 선봉 부대인 제2기갑기병연대는 이라크 공화국 수비대의 강력한 기갑 부대와 정면으로 마주쳤다. 특히 73 이스팅 전투는 제2기갑기병연대가 공화국 수비대의 '타와칼나' 기계화사단을 포함한 이라크 부대와 격돌한 대표적인 교전이다. 이 전투에서 제7군단 예하 부대들은 M1 에이브람스 전차와 M2 브래들리 장갑차 등을 앞세워 야간 전투 능력과 정밀 타격 능력 등 압도적인 기술적, 전술적 우위를 선보이며 이라크군을 효과적으로 제압했다.
제7군단은 73 이스팅 전투를 포함하여 약 100시간 동안 이어진 지상전에서 노포크 전투 등 여러 차례의 격전을 치르며 이라크 정규군 및 공화국 수비대의 핵심 기갑 전력을 격파하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 제7군단은 이 작전 기간 동안 약 1,350대의 이라크 전차와 1,224대의 장갑차를 파괴하는 큰 전과를 올렸으며[14], 다국적군의 승리에 크게 기여했다. 이러한 압도적인 전과에 비해 미군과 영국군을 합친 제7군단의 인명 피해는 상대적으로 매우 적은 수준이었다.
73 이스팅 전투는 현대 기갑전 역사상 가장 유명한 전투 중 하나로 기록되었으며, 이후 미국 육군 참모대학 등 여러 군사 교육 기관에서 성공적인 기동전 및 제병협동작전의 사례로 연구되고 있다.
2. 5. 3. 노포크 전투
걸프 전쟁에서 VII 군단은 이라크 공화국 수비대의 중장갑 사단을 파괴하는 임무를 받았다. 군단 사령관 프레드릭 M. 프랭크 Jr. 중장의 지휘 아래, 군단은 좌익의 제18(XVIII)공수군단과 우익의 아랍 연합군과 함께 진격했다.VII 군단은 진격 과정에서 저항하는 모든 이라크군을 압도적으로 격파했고, 특히 이라크 공화국 수비대 사단의 상당 부분을 파괴했다. 73 이스팅 전투 이후 벌어진 이 대규모 교전은 노포크 전투(Battle of Norfolk)로 알려지게 되었다.[12]
노포크 전투에서 VII 군단은 이라크 공화국 수비대의 메디나 사단과 타와칼나 사단을 포함한 여러 핵심 부대와 지원 부대를 효과적으로 무력화시켰다. 또한 최전선을 방어하던 이라크 제7군단 등 다른 부대 대부분도 격파되었다. 이 전투는 미국 육군 역사상 가장 일방적인 전투 중 하나로 평가받는다.
걸프 전쟁 기간 동안 VII 군단은 약 1,350대의 이라크 전차, 1,224대의 장갑 수송차, 285문의 포병, 105기의 방공 시스템, 1,229대의 트럭을 파괴하는 전과를 올렸다. 반면, 군단 자체의 손실은 장갑차 약 36대, 사망 47명, 부상 192명에 그쳤다.[14] 이는 냉전 시기 바르샤바 조약 기구와의 전면전을 상정한 훈련에서 예상했던 사상자에 비하면 매우 적은 숫자였다.
이 전투에서의 뛰어난 활약으로 제1기갑사단, 제3기갑사단, 제1보병사단(기계화), 제2기갑기병연대의 거의 모든 기동 대대가 용맹 부대 훈장(Valorous Unit Award)을 수여받았다. 또한 공화국 수비대와 격전을 벌인 VII 군단 예하 10개 기동 여단 본부 중 6곳도 이 훈장을 받았다.[13] 노포크 전투에서의 압도적인 승리는 걸프 전쟁에서 다국적군의 승리에 크게 기여했다.
2. 6. 해체 (1992년)
1992년 냉전이 끝나면서 미국의 국방 예산 감축의 일환으로 제7군단은 해체 수순을 밟았다. 군단 소속 부대 대부분은 미국 본토로 돌아가거나 해체되었지만, 일부 부대는 독일에 남아 제5군단 또는 미국 유럽 육군에 재배치되었다. 1992년 3월 18일, 독일 슈투트가르트의 슐로스플라츠에서 군단기 반환 기념식과 함께 고별식이 열렸고,[21] 군단 사령부는 이날 슈투트가르트를 떠났다. 이후 1992년 4월 15일, 미국 조지아주 포트 맥퍼슨에서 공식적으로 해체되었다.[22]3. 주요 참전 전투
제2차 세계 대전
(유럽 전구)

아르덴-알자스
서남아시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