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죽주산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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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죽주산성은 신라가 6세기 후반에서 7세기 초에 처음 쌓은 것으로 추정되는 산성이다. 몽골군의 침입과 임진왜란 때 격전이 벌어졌으며, 각 시대별로 성벽 보수 및 축성법의 변화가 있었다. 특히 임진왜란 이후 왜성의 축성법이 일부 적용되었으며, 여러 시대의 축성법을 간직하고 있어 한국 축성기술사 연구에 중요한 가치를 지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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죽주산성 - [유적/문화재]에 관한 문서
기본 정보
성벽의 외벽경사가 완만한 왜성의 축성법이 일부 적용된 죽주산성
성벽의 외벽경사가 완만한 왜성의 축성법이 일부 적용된 죽주산성
이름죽주산성
유형기념물
지정 번호69
지정일1973년 7월 10일
주소경기도 안성시 죽산면 죽양대로 111-71 (매산리)
시대알 수 없음
소유알 수 없음
관리안성시
참고알 수 없음
면적알 수 없음
수량일원
전승지알 수 없음
전승자알 수 없음
설명알 수 없음

2. 역사

죽주산성은 비봉산(해발 391m) 동쪽에 인접한 해발 250m 봉우리에 위치한다. 산성에서는 서쪽은 비봉산에 막혀 있지만, 다른 쪽은 멀리까지 볼 수 있다.[1]

죽주산성은 삼국시대, 고려시대, 조선시대에 걸쳐 축성 기술의 변화를 보여주는 중요한 유적이다.[1]


  • 삼국시대: 죽주산성은 내성, 중성, 외성으로 구성되어 있으며, 처음 쌓은 성벽은 고려조선 시대에 걸쳐 계속 수리되었다. 성벽 둘레는 1,322m로 삼국시대 성곽 중에서는 큰 규모이며, 6세기 후반에서 7세기 초 신라가 쌓은 것으로 보인다.[1] (자세한 내용은 하위 섹션 참조)
  • 고려시대: 1236년(고종 23년) 몽골군의 침입 당시, 죽주방호별감 송문주가 이끄는 고려군이 15일 동안 몽골군과 격전을 벌여 승리하였다.[1] (자세한 내용은 하위 섹션 참조)
  • 조선시대: 임진왜란변이중, 황진 장군이 이끄는 조선군 부대가 죽주산성에서 왜군과 싸워 승리했다.[1] (자세한 내용은 하위 섹션 참조)

2. 1. 삼국시대

죽주산성은 내성, 중성, 외성으로 구성되어 있다. 처음 쌓은 성벽은 일부 구간에서 공유되며, 고려조선 시대에 걸쳐 계속 수리되었다. 처음 쌓은 성벽은 산 정상부에서 능선을 따라 골짜기 부분을 감싸도록 쌓은 것으로 보인다. 성벽 둘레는 1,322m로 삼국시대 성곽 중에서는 큰 규모에 속한다. 성벽은 기저부를 계단식으로 정리하고, 내벽과 외벽, 그리고 속을 채우는 것까지 모두 돌로 쌓았다. 성돌은 장방형으로 가공하여 바른층쌓기 방식으로 수직에 가깝게 쌓아 올렸다. 외벽에는 보강 성벽을 덧붙여 쌓았다. 이러한 축성 방식은 죽주산성이 6세기 후반에서 7세기 초 신라가 쌓았다는 것을 보여준다.[1]

2. 2. 고려시대

1236년(고종 23년) 몽골군의 침입 당시, 죽주방호별감 송문주가 이끄는 고려군이 15일 동안 몽골군과 격전을 벌여 승리하였다.[1] 이 시기에 삼국시대에 처음 쌓았던 성벽을 보수했을 것으로 보인다.[1]

2. 3. 조선시대

임진왜란변이중, 황진 장군이 이끄는 조선군 부대가 죽주산성에서 왜군과 싸워 승리했다.[1] 임진왜란 이후에도 성벽 수축이 이루어졌는데, 이때 왜성의 축성법이 일부 적용된 것으로 알려져 있다.[1] 성벽의 외벽 경사가 완만해지고, 특히 남치성은 모서리에 대석이 사용되는 등 왜성의 축성법을 모방한 것으로 보인다.[1] 그러나 다곽의 곡륜(曲輪)을 특징으로 하는 왜성의 평면 배치 양상이나, 독특한 성문의 구조 등은 적용되지 않았다.[1]

3. 구조

죽주산성은 내성, 중성, 외성으로 구성되어 있으며, 전체 둘레는 1,322m로 삼국시대 성곽 중 대규모에 속한다. 초축 성벽은 일부 공유하며 고려조선 시대에 계속 수축되었다. 초축 성벽은 산 정상부에서 능선을 따라 골짜기를 감싸도록 쌓은 것으로 보인다.[1]

3. 1. 성벽

성벽은 기저부를 계단식으로 정지하고, 내벽과 외벽, 속채움을 모두 돌로 쌓았다. 성돌은 장방형으로 가공하여 바른층쌓기 방식으로 쌓았다. 외벽에는 보축성벽을 덧붙여 쌓았다. 이러한 축성법은 죽주산성이 6세기 후반에서 7세기 초 신라가 쌓았다는 것을 말해준다.[1] 조선 임진왜란 때에는 왜성의 축성법이 일부 적용되었다. 성벽 외벽 경사가 완만해지고, 특히 남치성은 모서리에 대석이 사용되는 등 왜성의 축성법을 모방한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다곽의 곡륜(曲輪)을 특징으로 하는 왜성의 평면 배치 양상이나 독특한 성문 구조는 적용되지 않았다.[1]

3. 2. 축성법

죽주산성의 초기 축성법은 신라의 전형적인 축성술을 보여준다. 성벽은 산 정상부에서 능선을 따라 골짜기를 감싸도록 쌓았으며, 기저부를 계단식으로 정지하고 내벽, 외벽, 속채움을 모두 돌로 쌓았다. 성돌은 장방형으로 가공하여 바른층쌓기 방식으로 수직에 가깝게 쌓았고, 외벽에는 보축성벽을 덧붙였다. 이러한 축성법은 죽주산성이 6세기 후반에서 7세기 초 신라가 쌓았다는 것을 보여준다.[1]

조선 임진왜란 이후 수축 과정에서는 왜성의 축성법이 일부 적용되었다. 성벽 외벽 경사가 완만해지고, 남치성 모서리에 대석이 사용되는 등 왜성의 축성법을 모방한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다곽의 곡륜(曲輪)을 특징으로 하는 왜성의 평면 배치나 독특한 성문 구조는 적용되지 않았다.[1]

4. 의의

죽주산성은 여러 시대의 축성법을 간직하고 있어 한국 축성 기술사의 보고(寶庫)로 평가받는다.[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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