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앙아메리카 연방공화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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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중앙아메리카 연방 공화국은 1823년 멕시코로부터 독립한 과테말라 총독령 지역이 결성한 국가로, 코스타리카, 엘살바도르, 과테말라, 온두라스, 니카라과 5개 주로 구성되었다. 1824년 헌법 제정 이후 연방 공화국으로 출범하여 민주적, 대표적, 연방제 형태를 띠었으나, 자유주의자와 보수주의자 간의 정치적 갈등, 콜레라 유행, 각 주의 분리주의적 성향 등으로 인해 1838년부터 각 주가 연방에서 탈퇴하기 시작하여 1841년 엘살바도르의 독립 선언으로 공식 해체되었다. 이후 여러 차례 재통합 시도가 있었으나 실패했으며, 19세기와 20세기에 걸쳐 외교적 노력이나 무력을 통한 재통합 시도가 있었지만 대부분 실패로 끝났다. 중앙아메리카 연방 공화국은 스페인 식민 통치 종식 이후 중앙아메리카 국가들의 유일한 성공적인 정치적 연합으로 평가받지만, 헌법의 이상주의, 지역적 갈등, 재정적 문제 등으로 인해 붕괴되었다는 평가를 받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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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앙아메리카 연방공화국 - [옛 나라]에 관한 문서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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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도 | |
기본 정보 | |
공식 명칭 | 중앙아메리카 연방 공화국 |
표어 (번역) | 신, 단결, 자유 |
국가 (번역) | 척탄병 행진곡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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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용어 | 스페인어 및 다양한 아메리카 원주민 언어 |
종교 | 가톨릭교 |
통화 | 중앙아메리카 레알 |
통칭 | 중앙아메리카 |
수도 | 과테말라 시티 손소나테 산살바도르 |
정치 | |
정치 체제 | 연방 대통령 공화국 |
입법부 | 연방 의회}} |
상원 | 상원 |
하원 | 하원 |
대통령 | 대통령 |
주요 지도자 | 마누엘 호세 아르세 (초대) 프란시스코 모라산 (마지막) |
역사 | |
독립 | 스페인 제국으로부터 독립 |
독립일 | 1821년 9월 15일 |
멕시코 제1제국으로부터 독립 | 1823년 7월 1일 |
헌법 채택 | 1824년 11월 22일 |
해체 | 1839년 4월 17일 |
엘살바도르 독립 선언 | 1841년 1월 30일 |
통계 | |
면적 (추정) | 518,000 km² |
면적 (추정, 제곱마일) | 200,000 sq mi |
인구 (1824년 추정) | 1,287,491명 |
인구 (1836년 추정) | 1,900,000명 |
기타 정보 | |
ISO 3166 코드 | 생략 |
이전 국가 | 멕시코 제1제국 |
후계 국가 | 코스타리카 엘살바도르 과테말라 온두라스 로스 알토스 (국가) 니카라과 |
2. 역사
1808년, 프랑스 제국의 나폴레옹 보나파르트가 스페인을 침공하여 부르봉 왕조의 페르난도 7세를 폐위시키고 그의 형 조제프 보나파르트를 스페인 왕 호세 1세로 임명했다. 스페인 독립 전쟁이 발발하자, 중앙아메리카를 포함한 이베로아메리카의 인디아스 식민지는 호세 1세를 인정하지 않고 페르난도 7세에게 충성하는 임시 정부(훈타)를 수립했다. 중앙 아메리카 식민 정부는 페르난도 7세에게 충성을 유지했지만, 일부 크리오요 지도자들은 더 큰 자치를 원했다. 1811년 11월, 호세 마티아스 델가도와 마누엘 호세 아르세는 산살바도르에서 스페인 통치에 반대하는 반란(1811년 독립 운동)을 일으켰으나, 왕당파 군대에 의해 진압되었다. 이후 니카라과, 1813년 과테말라, 그리고 1814년 산살바도르에서 추가 독립 반란이 발생했지만 모두 왕당파에 의해 진압되었다.
1820년 스페인 본국에서 리에고 혁명이 일어나 자유주의 헌법이 부활하자, 멕시코 시티의 왕당파와 보수파 크리오요는 반자유주의 헌법을 주장하며 독립 움직임을 진행하여, 1821년 아구스틴 데 이투르비데를 수반으로 독립을 달성했다. 이를 받아 중앙 아메리카에서도 보수파 크리오요에 의해 독립 운동이 진행되었고, 같은 해 과테말라 총독 가비노 가인사es가 독립을 선언했다. 중앙 아메리카 식민지 지도자들은 중앙 아메리카 독립 선언서에 서명하고, 자문 훈타를 설립하여 임시로 지역을 통치했다.
1822년 이투르비데는 중앙 아메리카를 멕시코 제국에 병합하고 황제에 즉위했다. 그러나 1823년 이투르비데가 실각하자, 중앙 아메리카의 치아파스를 제외한 구 과테말라 총독령이었던 지역은 다시 독립을 선언하고, '''중앙 아메리카 주 연합'''이 성립했다. 빈센테 필리솔라 준장은 멕시코의 합병 시도에 저항하는 코스타리카, 엘살바도르, 니카라과의 자유주의자들에 맞서 싸웠다. 코스타리카의 오초모고 전쟁에서 자유주의자들이 승리하고, 엘살바도르의 자유주의 반군은 필리솔라의 두 차례 침략에 저항했다. 1823년 3월 19일, 이투르비데는 멕시코 왕위를 포기했고, 중앙 아메리카 의회는 6월 24일에 소집되어 7월 1일에 멕시코로부터 중앙 아메리카의 독립을 선언했다.
중앙아메리카가 멕시코로부터 독립하자 중앙아메리카 의회는 중앙아메리카 연합주를 설립했다. 다음 날, 의회는 국민 제헌 의회로 재편성되어 헌법 초안 작성에 착수했다. 호세 마티아스 델가도는 1823년 7월 10일까지 임시 대통령이었으며, 국민 제헌 의회는 후안 비센테 비야코르타, 페드로 몰리나 마사리에고스와 안토니오 리베라 카베자스로 구성된 삼두정치es를 임명했다. 1824년 1월에는 헌법(중앙아메리카 연방 공화국 헌법)이 제정되어 5개 주로 구성된 '''중앙 아메리카 연방 공화국'''으로 개편되었다. 국민 제헌 의회는 1824년 6월 12일에 헌법 초안을 작성했으며, 11월 22일에 공식적으로 채택되었다.
2. 1. 스페인 식민 통치와 독립
16세기 스페인은 중앙아메리카를 정복하여 여러 개의 아우디엔시아es (관할 구역)으로 나누었다. 1542년에는 북쪽으로는 테우안테펙 지협까지, 남쪽으로는 파나마 지협까지 뻗어있는 하나의 아우디엔시아es로 통합되었다. 1560년 유카탄 반도의 통치권은 누에바 에스파냐(현재의 멕시코)로, 7년 후에는 파나마의 통치권은 페루 부왕령으로 이관되었다. 1568년 중앙아메리카의 아우디엔시아es는 과테말라 총독부로 재편성되었으며, 코레히미엔토es, 고비에르노es, 그레이터 메이요십, 인텐단시로 세분화되었다.중앙아메리카는 카스트 제도를 가지고 있었으며, 최상위에는 스페인인, 중간에는 혼혈, 최하위에는 아프리카인과 원주민이 있었다. 스페인인들은 이 지역의 토지와 부의 대부분을 소유했고, 원주민들은 노동력의 대부분을 차지했다. 가톨릭 교회는 중앙아메리카 사회의 모든 측면을 지배했으며, 원주민들은 점차 가톨릭으로 개종해야 했지만, 많은 문화적 전통을 유지했다.
1808년, 스페인 국왕 페르난도 7세는 나폴레옹에 의해 폐위되었고, 나폴레옹은 그의 형 조제프를 스페인 국왕으로 옹립했다. 과테말라 총독령을 포함한 아메리카 대륙의 스페인 식민지는 조제프를 정당한 국왕으로 인정하지 않고 페르난도를 국왕으로 계속 인정하는 훈타es로 알려진 임시 정부를 수립했다. 중앙아메리카 식민 정부는 페르난도에게 충성을 유지했지만, 일부 크리오요es 지도자들은 더 큰 자치를 원했다. 1811년 11월, 호세 마티아스 델가도와 마누엘 호세 아르세는 스페인 통치에 반대하는 반란을 산살바도르에서 일으켰으나, 왕당파 군대에 의해 진압되었다. 추가 독립 반란은 니카라과에서, 1813년 과테말라에서, 그리고 1814년 산살바도르에서 발생했지만, 모두 왕당파에 의해 진압되었지만, 친독립 정서는 중앙아메리카 지도자들 사이에서 퍼져나갔다.
카디스 의회 (스페인 카디스의 헌법 의회)는 스페인을 입헌 군주제로 만드는 1812년 스페인 헌법을 초안했다. 페르난도는 1814년 권력을 되찾은 후 자유주의 헌법을 폐지했는데, 그 이유는 그가 절대 군주로 통치하기를 원했기 때문이다. 스페인 아메리카 식민지 전역에서 독립 반란이 일어났으며, 반란은 주로 1812년 헌법의 계몽주의 이상을 지지하는 자유주의자들이 주도했다. 보수주의자들은 페르난도가 라파엘 델 리에고 대령에 의해 1812년 헌법을 복원하도록 강요당한 1820년에 독립 운동에 합류했다. 1821년 9월 15일, 중앙아메리카 식민지 지도자들은 스페인으로부터 독립을 선언하고 중앙 아메리카 독립 선언서에 서명했다. 그들은 영구적인 정부가 수립될 때까지 이 지역을 임시로 통치하기 위해 자문 훈타를 설립했다. 가비노 가인사 준장(과테말라의 마지막 총사령관)을 포함한 대부분의 정부 행정관들은 직책을 유지했다.
독립 이후, 중앙아메리카 지도자들은 독립을 유지할지 아니면 제1 멕시코 제국에 합류할지에 대해 이념적으로 분열되었으며, 군주주의자들은 합병을 지지했고 공화주의자와 민족주의자들은 반대했다. 멕시코 섭정(이자 나중의 멕시코 황제) 아구스틴 데 이투르비데는 1821년 11월 자문 훈타에게 제1 멕시코 제국에 합류할 것을 요청했고, 훈타는 1822년 1월 5일 합병에 찬성 투표했다. 멕시코는 빈센테 필리솔라 준장을 합병을 강제하기 위해 파견했다. 코스타리카, 엘살바도르, 니카라과의 자유주의자들은 지역 합병하려는 멕시코의 시도에 저항했다. 코스타리카의 오초모고 전쟁에서 자유주의자와 보수주의자가 싸웠으며, 그 결과 자유주의자들이 국가를 장악했다. 델가도와 아르세가 이끄는 엘살바도르의 자유주의 반군은 1822년과 1823년에 필리솔라의 두 차례 침략에 저항했다. 전자는 휴전과 멕시코의 철수로 끝났고, 후자는 필리솔라가 델가도를 엘살바도르의 정치 지도자에서 축출하고(아르세가 미국으로 도망가도록 강요), 산살바도르 시를 점령하는 결과를 낳았다. 호세 아나클레토 오르도녜스 장군은 보수적인 니카라과 정치 지도자 에 반대하여 반란을 일으켜 여러 도시를 점령했다. 오르도녜스의 반란은 중앙아메리카가 멕시코로부터 독립을 선언한 후에도 계속되었다.
1823년 3월 19일, 이투르비데는 멕시코 왕위를 포기했다. 3월 29일, 이투르비데의 퇴위 소식이 필리솔라에게 전달되자 그는 중앙아메리카 정치 지도자들에게 이 지역의 미래를 결정하기 위한 의회를 소집할 것을 촉구했다. 는 4월 1일에 중앙아메리카에 있는 멕시코 군에게 적대 행위를 중단하도록 명령했고, 중앙아메리카 의회는 6월 24일에 소집되었다. 치아파스 주를 제외하고, 7월 1일에 멕시코로부터 중앙아메리카의 독립을 선언했다.
2. 2. 중앙아메리카 연방 공화국의 성립 (1823-1824)
1808년, 프랑스 제국의 나폴레옹 보나파르트가 스페인을 침공하여 부르봉 왕조의 페르난도 7세를 폐위시키고 그의 형 조제프 보나파르트를 스페인 왕 호세 1세로 임명했다. 스페인 독립 전쟁이 발발하자, 중앙아메리카를 포함한 이베로아메리카의 인디아스 식민지는 호세 1세를 인정하지 않고 페르난도 7세에게 충성하는 임시 정부(훈타)를 수립했다. 중앙 아메리카 식민 정부는 페르난도 7세에게 충성을 유지했지만, 일부 크리오요 지도자들은 더 큰 자치를 원했다. 1811년 11월, 호세 마티아스 델가도와 마누엘 호세 아르세는 산살바도르에서 스페인 통치에 반대하는 반란(1811년 독립 운동)을 일으켰으나, 왕당파 군대에 의해 진압되었다. 이후 니카라과, 1813년 과테말라, 그리고 1814년 산살바도르에서 추가 독립 반란이 발생했지만 모두 왕당파에 의해 진압되었다.1820년 스페인 본국에서 리에고 혁명이 일어나 자유주의 헌법이 부활하자, 멕시코 시티의 왕당파와 보수파 크리오요는 반자유주의 헌법을 주장하며 독립 움직임을 진행하여, 1821년 아구스틴 데 이투르비데를 수반으로 독립을 달성했다. 이를 받아 중앙 아메리카에서도 보수파 크리오요에 의해 독립 운동이 진행되었고, 같은 해 과테말라 총독 가비노 가인사es가 독립을 선언했다. 중앙 아메리카 식민지 지도자들은 중앙 아메리카 독립 선언서에 서명하고, 자문 훈타를 설립하여 임시로 지역을 통치했다.
1822년 이투르비데는 중앙 아메리카를 멕시코 제국에 병합하고 황제에 즉위했다. 그러나 1823년 이투르비데가 실각하자, 중앙 아메리카의 치아파스를 제외한 구 과테말라 총독령이었던 지역은 다시 독립을 선언하고, '''중앙 아메리카 주 연합'''이 성립했다. 빈센테 필리솔라 준장은 멕시코의 합병 시도에 저항하는 코스타리카, 엘살바도르, 니카라과의 자유주의자들에 맞서 싸웠다. 코스타리카의 오초모고 전쟁에서 자유주의자들이 승리하고, 엘살바도르의 자유주의 반군은 필리솔라의 두 차례 침략에 저항했다. 1823년 3월 19일, 이투르비데는 멕시코 왕위를 포기했고, 중앙 아메리카 의회는 6월 24일에 소집되어 7월 1일에 멕시코로부터 중앙 아메리카의 독립을 선언했다.
중앙아메리카가 멕시코로부터 독립하자 중앙아메리카 의회는 중앙아메리카 연합주를 설립했다. 다음 날, 의회는 국민 제헌 의회로 재편성되어 헌법 초안 작성에 착수했다. 호세 마티아스 델가도는 1823년 7월 10일까지 임시 대통령이었으며, 국민 제헌 의회는 후안 비센테 비야코르타, 페드로 몰리나 마사리에고스와 안토니오 리베라 카베자스로 구성된 삼두정치es를 임명했다. 1824년 1월에는 헌법(중앙아메리카 연방 공화국 헌법)이 제정되어 5개 주로 구성된 '''중앙 아메리카 연방 공화국'''으로 개편되었다. 국민 제헌 의회는 1824년 6월 12일에 헌법 초안을 작성했으며, 11월 22일에 공식적으로 채택되었다.
2. 3. 연방의 발전과 갈등 (1825-1830)
1825년 엘살바도르의 자유주의자 마누엘 호세 아르세Manuel José de Arce y Fagoagaes가 초대 대통령으로 선출되었지만, 이로 인해 보수주의 과테말라와 자유주의 엘살바도르, 온두라스 간의 대립이 심화되었다. 자유주의자들과 보수주의자들은 1823년 오르도녜스가 친 멕시코 니카라과 정부에 반대하는 반란을 일으킨 이후부터 니카라과의 지배권을 놓고 싸워왔으며, 충돌로 수백 명이 사망했다. 1824년 10월, 제2차 삼두정은 마누엘 아르수 대령을 파견하여 자유주의자와 보수주의자 간의 평화를 중재하려 했으나 실패했고, 아르세는 1825년 1월 22일 내전을 종식시키기 위해 니카라과에 연방 침공을 이끌었다. 그의 침공군은 전투 없이 자유주의자와 보수주의자가 휴전 협정에 서명하도록 했고, 아르세는 두 정적 정부를 해산하고 그 지도자들을 니카라과에서 추방했다.후안 바룬디아(Juan Barrundiaes)는 연방 정부에 반대했고 아르세의 가장 중요한 비판자 중 한 명이었다. 1825년 중반 과테말라의 수도를 안티구아 과테말라에서 과테말라 시로 옮겼고 연방 정부가 여전히 주 정부 청사를 점거하고 있었기 때문에 주 정부 사무실을 설립하기 위해 사유 재산을 압류했다. 후안 바룬디아가 "폭군의 전제주의를 억제"하기 위해 군대를 소집하겠다고 위협한 후, 연방 의회는 연방 재무부가 사용하던 건물을 비우고 과테말라 주 정부에 넘겨주기로 합의했다.
1826년 중반, 아르세는 병력 요구 사항을 4,000명으로 줄였다. 연방 의회의 과테말라 자유주의자들은 프랑스 군인 Nicolás Raoules에게 연락하여 아르세가 군대를 통제하는 것을 막기 위한 군사 법전을 작성하도록 도왔고, 아르세는 라울을 국외로 추방했다. 결국, 아르세와 연방 의회는 타협하여 의회는 4,000명의 군인 소집을 승인했고, 라울이 모집을 감독했다. 자유주의자들이 최고 사령관으로서의 그의 역할을 회피하려 하자 아르세는 연방 의회가 통과시킨 법률을 시행하는 것을 거부했다. 자유주의자들은 1826년 6월 2일에 그에 대한 탄핵 절차를 시작했지만, 아르세에게 여전히 충성스러운 엘살바도르 자유주의자들은 탄핵 절차에 참석하지 않았고 의회가 개시하는 데 필요한 정족수에 도달하는 것을 막았다.
아르세는 1826년 7월에 라울에게 아르세에게 사임을 요구하는 편지를 보낸 불복종 혐의로 연방 군인을 보내 체포했다. 후안 바룬디아는 라울을 변호하려 했고, 연방 정부가 주 내에서 군인을 이동시키기 위해 주지사의 허가를 받아야 한다고 주장하며, 연방 군 사령관을 체포하기 위해 과테말라 군인 300명을 보냈다. 아르세가 후안 바룬디아를 공식적으로 비난하려 하자, 자유주의 과테말라 상원 의원들은 회의를 보이콧했고 상원은 바룬디아를 비난하는 데 필요한 정족수에 도달하지 못했다.
1826년 10월, 아르세는 새로운 과테말라 정부를 수립하기 위해 특별 선거를 실시할 것을 요청했고, 보수파가 승리하여 마리아노 아이시네나가 1827년 3월 1일 과테말라 주지사가 되었다. 선거 후 많은 자유주의자들이 권력을 되찾기 위해 엘살바도르의 자유주의자들의 지원을 구하고자 과테말라를 떠나 엘살바도르로 피신했다. 아르세는 후안 바룬디아의 체포 이후 연방 의회가 계속해서 정족수에 미달하자 헌법 질서를 회복하기 위해 10월 10일 코후테페케에서 임시 의회를 소집할 것을 요청했다.
마리아노 프라도 (엘살바도르의 자유주의 임시 주지사)는 과테말라를 제외한 모든 주의 대표자들에게 아우아차판에서 자체 임시 의회를 소집할 것을 요청했다. 결국, 두 의회 모두 소집되지 않았다. 프라도는 1826년 12월 말 엘살바도르-과테말라 국경에 엘살바도르 군인들을 배치하여 아르세를 전복할 준비를 했다. 아이시네나는 1827년 3월 초에 몰리나 마사리에고스 및 리베라 카베자스를 포함한 과테말라의 주요 자유주의자들을 과테말라에서 무법자로 선언했다. 프라도는 이에 대응하여 군인들에게 과테말라를 침공하라고 명령했고, 정식으로 선전 포고도 없이 제1차 중앙아메리카 내전이 시작되었다.
아르세가 엘살바도르에서 작전을 펼치는 동안, 그는 호세 후스토 미야 대령이 지휘하는 군대를 온두라스로 보내 자유주의 온두라스 주지사 디오니시오 데 에레라를 체포했다. 미야의 군대는 36일간의 포위 공격 끝에 1827년 5월 10일 온두라스 수도 코마야과를 점령하고 에레라를 체포했다. 프란시스코 모라산은 얼마 지나지 않아 테구시갈파에서 체포되었지만, 탈출하여 니카라과로 도망가 아르세에 반대하는 온두라스 망명군을 소집했다. 그의 군대는 레온에서 아르세에 대항하는 반란을 일으킨 오르도녜스가 이끄는 니카라과 반군들의 지원을 받았다. 모라산의 군대는 1827년 11월 10일 라 트리니다드 전투에서 미야의 군대를 격파하여 코마야과와 테구시갈파를 탈환했다.
아르세는 자유주의자들을 달래기 위해 1828년 초에 대통령 선거를 실시하겠다고 제안했지만, 자유주의자들은 그의 제안을 거절했다. 그는 2월 14일 대통령직에서 사임하고 멕시코로 도망갔고, 벨트라네나가 아르세의 뒤를 이어 임시 대통령이 되었다. 모라산은 1828년 6월 온두라스와 니카라과 군인들로 구성된 군대를 이끌고 엘살바도르를 침공하여 10월 23일 산살바도르를 점령했다. 1828년 말, 모라산은 과테말라 침공을 위해 4,000명의 군인을 모집했다. 벨트라네나 정부는 모라산의 주요 목표가 가톨릭 교회를 파괴하는 것이라고 시민들에게 경고했고, 모라산은 과테말라 정부의 경고를 반박하며 자신의 기독교 "법률 보호 동맹군"(Ejército Aliado Protector de la Leyes)은 교회를 파괴하려는 것이 아니라 단지 "그들이 겪었던 고통" (los males que habéis sufridoes)에서 과테말라를 해방시키려고 하는 것이라고 말했다. 그는 1829년 1월에 침공하여 2월 5일 과테말라 시티를 포위하기 시작했다. 도시는 4월 12일에 항복했고 모라산의 군인들은 다음날 도시로 진입하여 내전을 종식시켰다.
1829년 6월 22일, 모라산은 새로운 연방 의회를 임명했다. 3일 후 연방 의회는 상원 의장인 호세 프란시스코 바룬디아를 중앙아메리카의 임시 대통령으로 선출했다. 모라산의 지시에 따라 연방 의회는 1826년 9월 이후에 통과된 모든 법률을 무효라고 선언했다. 내전 이후 많은 주요 보수주의자들이 투옥되거나 사형 위협으로 추방되었으며, 많은 사람들이 재산을 몰수당했다. 모라산은 또한 교회를 탄압했다.
모라산은 1830년 연방 선거에 대통령 후보로 출마했다. 그는 202표를 얻어 1위를 차지했지만, 과반수를 확보하지는 못했다. 1825년과 마찬가지로 연방 의회에 대통령 선출 권한이 주어졌고, 자유주의가 주도하는 의회는 모라산을 선출했으며, 그는 9월 16일에 취임했다.
2. 4. 연방의 와해 (1830-1841)
프란시스코 모라산의 자유주의 정책에 대한 반발은 보수주의 세력의 저항을 불러일으켰다. 1837년 과테말라에서 발생한 콜레라 유행은 이러한 갈등을 더욱 심화시켰다. 보수주의자들은 콜레라가 자유주의자들의 음모라는 소문을 퍼뜨렸고, 이에 동조한 인디오와 메스티소들이 호세 라파엘 카레라의 지도 하에 반란을 일으켰다.
카레라의 반란은 중앙아메리카 내전을 재발시켰고, 연방의 붕괴를 가속화했다. 1838년 11월 5일, 니카라과가 연방 탈퇴를 선언한 것을 시작으로, 온두라스와 코스타리카도 연이어 연방을 탈퇴했다. 1839년 2월, 모라산 대통령이 사임하면서 연방 정부는 사실상 기능을 상실했다. 후임 대통령은 선출되지 않았고, 1840년까지 엘살바도르를 제외한 나머지 국가들이 모두 독립을 선언했다. 1841년 1월 30일, 엘살바도르마저 독립 공화국임을 선언하면서 중앙아메리카 연방공화국은 공식적으로 해체되었다.
연방 붕괴 당시, 다섯 개의 후속 국가 중 네 개는 연방 통치 반대자이자 각 주의 분리주의 지지자인 브라울리오 카리요 콜리나(코스타리카), 프란시스코 말레스핀(엘살바도르), 카레라(과테말라), 프란시스코 페레라(온두라스)가 이끌었다.
2. 5. 재통합 시도

중앙아메리카 연방 공화국이 해체된 이후, 19세기와 20세기에 걸쳐 외교적 노력이나 무력을 통한 여러 재통합 시도가 있었지만, 대부분 실패로 끝났다. 과테말라 역사가 훌리오 세사르 핀토 소리아는 중앙아메리카 재통합이 실패한 주된 이유로 각 구성국 과두 지배자들의 권력을 지적했다.
1842년, 프란시스코 모라산은 코스타리카의 정치 지도자가 된 후 무력으로 중앙아메리카 재통일을 시도했으나, 그해 9월 패배하여 처형되었다. 같은 해 3월, 엘살바도르, 온두라스, 니카라과 대표단은 안토니오 호세 카냐스를 새로운 연방 정부 대통령으로 선포했지만, 코스타리카와 과테말라의 불참으로 실패하였다. 1844년에는 엘살바도르와 온두라스가 니카라과를 침공하면서 카냐스 정부는 종말을 맞았다.
1852년 10월, 엘살바도르, 온두라스, 니카라과는 중앙아메리카 연합 설립을 선언했지만, 니카라과의 합법주의 정당의 저항과 내전 발발로 인해 1854년에 실패했다. 1848년에는 테구시갈파에서, 다음 해에는 레온에서 중앙아메리카를 위한 새로운 헌법 초안과 대통령, 부통령 및 국립 의회 선출 조약 체결을 위한 회의가 열렸지만, 엘살바도르와 니카라과는 연합 헌법을 비준하지 않았다.
1876년, 과테말라 대통령 후스토 루피노 바리오스는 중앙아메리카 5개국 대표단을 과테말라 시티에 파견하여 통일 국가 복원을 협상하려 했으나, 엘살바도르 침공으로 중단되었다. 1885년, 바리오스는 중앙아메리카 연방 설립을 선언하고 스스로 대통령임을 선포했지만, 코스타리카, 엘살바도르, 니카라과의 반발에 직면했다. 바리오스는 엘살바도르를 침공했으나, 찰추아파 전투에서 사망하면서 재통합 시도는 실패로 끝났다.
1895년, 엘살바도르, 온두라스, 니카라과 대표단은 중앙아메리카 대공화국 형성을 선언하는 아마팔라 조약에 서명했다. 코스타리카와 과테말라도 가입할 수 있었으며, 미국은 1896년 이 공화국과 외교 관계를 수립했다. 1898년, 중앙아메리카 대공화국 헌법이 채택되고 국명이 중앙아메리카 합중국으로 변경되었으나, 엘살바도르 장군 토마스 레갈라도 로메로가 쿠데타를 일으켜 엘살바도르의 탈퇴를 선언하면서 연합은 해산되었다.
20세기 초, 1921년부터 1922년까지 엘살바도르, 과테말라, 온두라스는 연방 결성을 시도하여 각 구성국 대표에 의한 연방 대통령 선거까지 이루어졌지만, 결국 실패했다.
21세기에도 중앙아메리카 재통합 논의는 계속되고 있다. 엘살바도르 대통령 나이브 부켈레는 중앙아메리카가 "하나의 국가"가 되어야 한다고 주장하며 재통합에 대한 열망을 표명했다. 2024년 부켈레는 통합을 위해서는 "국민의 의지"(la voluntad de los puebloses)가 필요하다고 강조했다. 붕괴 후에도 이 지역의 일체감은 강하게 남아있으며, 1960년에는 중미 통합 기구가 발족하는 등 현재도 통합 움직임이 활발하다.
3. 정치
3. 1. 연방 정부
중앙아메리카 연방공화국의 연방 정부는 1824년에 제정된 연방 헌법에 따라 "민주적, 대표적, 연방제" 형태를 띠었다. 모든 선출직 공무원은 간접 선거를 통해 임명되었으며, 의무 투표제가 시행되었다. 연방 정부는 입법부, 행정부, 사법부로 권력이 분립되었고, 각 부서는 견제와 균형의 원칙에 따라 운영되었다.입법부는 양원제 의회로 구성되었다. 하원(Chamber of Deputies)은 인구 3만 명당 1명의 의원을 선출하여 총 41명의 의원으로 구성되었으며, 각 의원에게는 보조 의원이 동반되었다. 하원 의원의 절반은 매년 선출되었다. 상원(Senate)은 각 주에서 2명씩 선출하여 총 10명의 의원으로 구성되었고, 상원 의원의 3분의 1은 매년 선출되었다. 상원은 하원이 통과시킨 법안을 승인하고 대통령의 자문 기관 역할을 수행하며, 대법원의 판결을 검토할 수 있었다. 하원은 3분의 2 이상의 다수결(세법의 경우 4분의 3)로 상원의 거부권을 무효화할 수 있었다. 1824년부터 1838년까지 총 11번의 의회 임기가 있었다.
행정부는 대통령이 이끌었다. 대통령은 4년 임기로 선출되었으며, 연방 육군의 최고 사령관이었다. 대통령은 관계, 전쟁, 재무의 3명의 장관으로 구성된 내각을 두었다. 헌법은 대통령이 한 번의 연임 후 최소 한 번의 임기를 거친 후 재선될 수 있도록 허용했다. 그러나 대통령은 법률 거부권이 없었고, 의회가 통과시킨 법률을 15일 이내에 시행해야 하는 등 권한이 제한적이었다. 이는 독재적 권한을 가진 대통령의 등장을 방지하기 위한 조치였다.
사법부는 1824년 8월 2일에 설립된 대법원이 담당했다. 대법원은 6명의 대법관으로 구성되었으며, 2년마다 2명씩 선출되었다. 첫 번째 대법관은 1825년 4월 29일에 취임했다. 대법원은 연방 의회가 통과시킨 법률의 위헌 여부를 심사했지만, 대법원의 판결은 연방 의회의 검토를 받았다.
3. 2. 주 정부
3. 3. 정치 세력
연방 중앙아메리카 공화국의 주요 정치 세력은 자유주의자와 보수주의자였다. 이들은 조직화된 정당은 아니었다. 자유주의자와 보수주의자들은 서로를 적으로 여겼으며, 서로에게 "선동, 무질서, 무정부주의"라고 비난했다.자유주의자들은 연방 정부와 국가 권력의 이양을 지지하며, 중앙 집중식 식민 정부가 본질적으로 결함이 있으며 급진적인 변화가 필요하다고 여겼다. 1823년에 종교의 자유를 시행하려 했으나, 주로 가톨릭 신자인 인구의 반대로 개혁 시행이 좌절되었고, 가톨릭교가 국가의 공식 종교로 지정되었다. 1825년에는 행정 명령에 따라 국내 모든 가톨릭 성직자들은 연방 공화국에 충성을 맹세해야 했는데, 성직자들은 이 명령이 가톨릭 교회의 권력을 약화시킨다고 보고 반대했다. 자유주의자들은 또한 경제를 개선하기 위해 자유 방임 경제 정책, 자유 무역, 외국인 이민을 지지했다. 주로 상류 중산층과 지식인들의 지지를 받았다.
보수주의자들은 국가 정부를 중심으로 권력을 집중시키는 것을 지지했다. 독립 이전의 식민 중앙 집중식 정부 구조가 사회에 부담을 줄 수 있는 새로운 정부 시스템(연방주의)보다 더 낫다고 믿었다. 보호 무역 경제 정책을 지지했으며, 중앙 아메리카 사회에서 가톨릭 교회의 역할을 도덕의 중재자로서 현상 유지(스타투스 쿠오/status quola)를 유지하는 것으로 옹호했다. 개신교를 가톨릭보다 열등하다고 보았으며, 국가의 원주민들이 지배적인 백인 및 메스티소/mestizoes 인구에게 복종해야 한다고 믿었다. 주로 부유한 토지 소유주, 식민 시대부터 이어져 온 가문, 그리고 성직자들의 지지를 받았다.
4. 행정 구역
중앙아메리카 연방 공화국은 코스타리카, 엘살바도르, 과테말라, 온두라스, 니카라과의 5개 주와 연방 지구로 구성되었다. 1835년 2월 7일부터 1839년 5월 3일까지 연방 지구는 수도인 산살바도르를 중심으로 했다. 각 주는 45개의 파르티도]]/
1824년 5월 5일, 국민 제헌 의회는 연방 공화국의 5개 주에 연방 정부와 유사한 주 수준의 입법, 행정 및 사법부를 구성하고 헌법을 제정하도록 명령했다. 각 주는 간접 선거를 통해 입법 위원, 주지사 및 사법 공무원을 선출할 수 있었고, 모든 주는 1826년 4월까지 헌법을 제정하고 비준했다. 연방 헌법은 각 주 정부를 "자유롭고 독립적인" ("libre e independientees") 것으로 인정했으며, 주 정부는 연방 헌법에 의해 연방 정부에 위임되지 않은 내부 문제를 관리할 수 있었다.
1838년부터 1839년까지 잠시 연방 정부는 과테말라에서 로스 알토스를 분리하여 주 지위로 승격하는 것을 고려했다. 과테말라는 벨리즈를 자국 영토의 일부로 주장했지만, 해안 벨리즈는 영국에 의해 점령되었다. 과테말라와 멕시코는 소코누스코에 대한 주권을 주장했지만, 어느 쪽도 이 지역을 완전히 통제하지 못했다. 중앙 아메리카는 카리브해의 모스키토 해안과 접경해 있었고, 이를 자국 영토의 일부로 주장했다.
주 | 위치 ( 1835–1838년 경계) | 수도 | 주 헌법 채택 | 인구 (1824) | 인구 (1836) |
---|---|---|---|---|---|
코스타리카 | 카르타고 | 1825년 1월 25일 | 70,000 | 150,000 | |
엘살바도르 | 산살바도르 (1834년까지) 코후테페케 (1834) 산 비센테 (1834–1839) 산살바도르 (1839년부터) | 1824년 6월 12일 | 212,573 | 350,000 | |
연방 지구 | 산살바도르 (1835–1839) | 해당 없음 | 50,000 | ||
과테말라 | 안티구아 과테말라 (1825년까지) 과테말라 시 (1825년부터) | 1825년 10월 11일 | 660,580 | 700,000 | |
온두라스 | 코마야과 | 1825년 12월 11일 | 137,069 | 300,000 | |
니카라과 | 레온 | 1826년 4월 8일 | 207,269 | 350,000 |
5. 경제
5. 1. 경제 구조
5. 2. 화폐 제도
1824년 3월 19일, 국민 제헌 의회는 "스페인 군주의 전형적이고 특징적인 흉상, 국장 또는 기타 모든 문장"으로 주화를 주조하는 것을 금지하는 법을 통과시켰다. 이 법은 또한 새로운 통화의 창설을 명령했다.[1] 앞면에는 국가의 국장이, 뒷면에는 "자유롭게 자라서 비옥하라"는 문구("리브레 크레스카 페쿤도/Libre Crezca Fecundoes")와 함께 나무가 묘사될 예정이었다.[1]
"국가 통화"로 알려진 중앙아메리카 통화는 에스쿠도]]/스페인 에스쿠도es, 페소es, 레알/
6. 사회
6. 1. 인구
1824년, 중앙아메리카의 인구는 1,287,491명이었다. 1836년에는 약 1,900,000명으로 추산되었는데, 이는 연방 행정관 후안 갈린도의 추정으로 백인의 수를 "대폭 과대 평가"했으며 온두라스 원주민 인구는 제외되었다. 중앙아메리카는 아메리카 대륙에서 인구 밀도가 가장 높은 국가였다. 인구는 주(州) 전체에 걸쳐 고르게 분포되지 않았으며, 1824년에는 과테말라에 절반 이상이 거주했다. 헌법은 인구에 비례하여 연방 의회에 정치적 대표성을 부여했으므로 인구 불균형으로 인해 과테말라는 다른 주보다 입법부에서 더 많은 대표성을 갖게 되었다.6. 2. 민족 구성

중앙아메리카는 민족적으로 균일하지 않았다. 1824년, 인구의 65%는 원주민, 31%는 혼혈(메스티소es), 4%는 백인(크리오요es)이었다. 흑인의 소수 인구가 있었으며, 갈린도는 1836년에 흑인 인구를 "고려할 수 없을 정도로 사소하다"라고 묘사했다.
민족 구성은 중앙아메리카 국가 전반에 걸쳐 다양했다. 1824년, 과테말라 인구의 최대 70%가 원주민이었고, 엘살바도르, 온두라스, 니카라과는 거의 전부 메스티소es로 구성되었으며, 코스타리카는 스스로 80%가 백인이라고 보고했다.
1836년 중앙아메리카 각 주의 민족 구성은 다음과 같다.
주 | 민족 집단 | |||
---|---|---|---|---|
원주민 | 혼혈 | 백인 | 총계 | |
코스타리카 | 25,000 | — | 125,000 | 150,000 |
엘살바도르 | 70,000 | 210,000 | 70,000 | 350,000 |
연방 지구 | 20,000 | 20,000 | 10,000 | 50,000 |
과테말라 | 450,000 | 150,000 | 100,000 | 700,000 |
온두라스 | — | 240,000 | 60,000 | 300,000 |
니카라과 | 120,000 | 120,000 | 110,000 | 350,000 |
합계 | 685,000 | 740,000 | 475,000 | 1,900,000 |
중앙아메리카의 백인 및 혼혈 인구는 주로 스페인어를 사용했고, 대다수의 원주민 인구는 원주민 언어를 사용했다.
6. 3. 종교
가톨릭교는 중앙아메리카 연방 공화국의 가장 큰 종교이자 공식 종교였다. 처음에는 가톨릭교만이 공적으로 신봉될 수 있는 유일한 종교였다. 1832년 5월까지 다른 종교의 공적 예배는 금지되었지만, 연방 의회는 모든 종교의 공적 신봉을 허용하는 법령을 발표했다(이는 1835년 헌법 개정으로 강화되었다). 가톨릭 교회는 중앙 아메리카 정치에 영향을 미쳤지만, 대통령과 대법원 판사는 성직자가 될 수 없었고, 각 주의 상원 의원 두 명 중 한 명만 성직자일 수 있었다. 교황 칙서는 효력을 발휘하기 전에 중앙 아메리카에 파견되기 전에 연방 의회의 승인을 받아야 했다.6. 4. 교육
7. 외교
7. 1. 외교 관계

연방 공화국은 그란 콜롬비아, 프랑스, 교황청, 멕시코, 네덜란드, 영국 및 미국에 외교관을 파견했고, 칠레, 프랑스, 그란 콜롬비아, 하노버, 멕시코, 네덜란드, 영국, 미국으로부터 외교관을 받았다. 멕시코는 1823년 8월 중앙 아메리카의 독립을 인정했다. 1825년 3월 15일, 연방 외교관들은 대 그란 콜롬비아와 국가 간의 "영구 연맹"(콘페데라시온 페르페투아/confederación perpetuaes)의 존재를 보장하는 조약을 체결했으며, 이 조약은 9월 12일에 비준되었다. 프랑스, 교황청, 네덜란드, 영국은 중앙 아메리카 연방 공화국에 외교관을 파견했지만, 1830년대 후반 연방 정부가 붕괴된 후에야 중앙 아메리카의 독립을 인정했다.
미국은 1824년 8월 4일, 제임스 먼로 대통령이 카냐스를 중앙 아메리카의 미국 특사로 영접하면서 중앙 아메리카 연방 공화국의 스페인으로부터의 독립을 인정했다. 두 나라는 1825년 12월 5일에 평화, 우호, 통상 및 항해 조약을 체결했다. 1826년 5월 3일, 중앙 아메리카는 과테말라 시에서 미국 샤르제 다페르/Chargé d'Affaires프랑스어 존 윌리엄스를 영접했다. 윌리엄 S. 머피는 중앙 아메리카에 파견된 마지막 미국 외교관이었으며, 연방 공화국이 붕괴된 후인 1842년 3월에 직무를 떠났다.
1825년 6월 16일, 연방 의회는 니카라과 운하 건설을 승인하는 법안을 통과시켜 태평양과 카리브해를 연결했다. 의회는 1830년 10월에 운하 프로젝트를 개발하기 위해 네덜란드 정부와 계약을 승인했지만, 네덜란드 정부는 벨기에 혁명으로 인해 다음 해에 계약을 취소했다. 니카라과 정부는 1833년과 1838년에 운하 건설을 연방 정부에 요청했지만, 연방 정부는 두 요청 모두에 대해 아무런 조치도 취하지 않았다.
7. 2. 니카라과 운하 건설 시도
1825년 6월 16일, 연방 의회는 태평양과 카리브해를 연결하는 니카라과 운하 건설을 승인하는 법안을 통과시켰다. 1830년 10월, 의회는 운하 건설을 위해 네덜란드 정부와 계약을 승인했지만, 네덜란드는 벨기에 혁명으로 인해 다음 해에 계약을 취소했다. 니카라과 정부는 1833년과 1838년에 운하 건설을 연방 정부에 요청했지만, 연방 정부는 이에 대해 아무런 조치를 취하지 않았다.8. 대통령
1823년부터 1839년까지 중앙아메리카 연방공화국의 대통령 및 주요 정치 지도자는 다음과 같다.
통치자 | 직함 및 기간 | 비고 |
---|---|---|
가비노 가인사(es) | 최고 통치 조직 대표(Jefe Político Superior) 및 임시 자문 위원회 의장(Presidente de la Junta Provisional Consultiva): 1821년-1822년 | |
비센테 필리소라(es) | 최고 통치 조직 대표(Jefe Político Superior)(멕시코 제국의 지명): 1822년-1823년 | |
호세 마티아스 델가도(es) | Provincias Unidas del Centro de Américaes( Provincias Unidas del Centro de América) 헌법 제정 국민 의회 의장(Presidente de la Asamblea Nacional Constituyente): 1823년 | |
제1차 중앙아메리카 삼두 정치(es) | 1823년 | |
제2차 중앙아메리카 삼두 정치(es) | 1823년-1825년 | |
마누엘 호세 데 아르세 이 파고아가(es) | 공화국 대통령(국회 선출): 1825년-1829년 | 1828년 일시적으로 벨트라네나를 부통령으로 지명했지만 벨트라네나는 그 후 권한 반환을 거부했다. |
마리아노 벨트라네나 이 야노(es) | 공화국 부통령으로 권한 수탁: 1828년-1829년; 1829년 실각. | |
호세 프란시스코 모라산 케사다 | 권한을 장악한 후 국회에서 지명된 평의원(직함: Senador)에게 인계: 1829년 | |
호세 프란시스코 바룬디아 이 세페다(es) | 평의원(대통령 권한을 가짐): 1829년-1830년 | |
호세 프란시스코 모라산 케사다 | 대통령(국회에서 선출): 1830년-1834년 | 통치 기간 중 연방 공화국 수도를 과테말라에서 손소나테로, 그 후 산살바도르로 이전했다. |
호세 세실리오 디아스 델 바예(es) | 대통령으로 1834년-1838년 임기로 선출 | 취임 전에 사망. |
호세 그레고리오 살라사르 이 카스트로(es) | 부통령: 1834년-1835년 | |
호세 프란시스코 모라산 케사다 | 대통령: 1835년-1839년 | 1838년 니카라과, 온두라스, 코스타리카가 연방을 이탈했다. |
디에고 비힐 이 코카냐(es) | 부통령: 1839년 | 최종적으로 연방 공화국을 해체. |
분류:중앙아메리카 연방 공화국의 대통령
9. 평가
미국 의회 도서관 산하 연방 연구부의 편집자인 리처드 A. 해거티는 중앙아메리카 연방 공화국을 "실행 불가능"했지만 스페인 식민 통치 종식 이후 "중앙 아메리카 국가들의 유일한 성공적인 정치적 연합"이라고 묘사했다. 엘살바도르의 교육부는 연방 공화국을 공화주의와 입헌주의와 같은 아이디어를 위한 "정치적 실험실"("laboratorio políticoes")로 묘사했다.
시몬 볼리바르는 ''자메이카 서한''(1815)에서 독립적인 중앙 아메리카 국가가 세계의 수도가 될 잠재력을 가졌다고 평가했다. 그는 파나마에서 과테말라에 이르는 지협의 주들이 연방을 형성하고, 두 대양 사이의 위치 덕분에 세계 상업 중심지가 될 수 있다고 보았다. 또한 이 운하가 전 세계의 거리를 단축하고, 유럽, 아메리카, 아시아와의 상업적 유대를 강화하여 세계의 수도가 될 수 있을 것이라고 예상했다.
일부 전문가들은 연방 헌법이 "너무 이상주의적"이라 연방 공화국의 붕괴의 주요 원인이 되었다고 비판했다. 자유주의 과테말라 정치인 로렌조 몬투파르는 "[연방 공화국이] 연방 제도를 채택하면서 그 결과로 전쟁과 재앙을 얻었다"라고 말했다. 니카라과 언론인 페드로 호아킨 차모로는 미국 연방주의를 모방하려는 시도가 중앙 아메리카 국가들 사이에 분열을 만들었으며, 중앙 정부가 성공했을 것이라고 썼다. 엘살바도르 교육부에 따르면, 연방 헌법은 "무정부 상태와 무질서를 초래한 치명적인 결론"("conclusión fatal que llevó la anarquía y la desorganizaciónes")이었다. 후안 카를로스 국왕 대학교 경제학 교수인 기예르모 바스케스 비센테는 연방 공화국에 대한 헌법의 이상을 달성하는 것이 일관된 정치, 경제, 사회 계획이 없이는 "불가능"("imposiblees")했다고 썼다. 그는 헌법의 공화주의적 이상에 도달하지 못한 것과 다섯 개 주에서 분리주의 정서가 발생한 것을 국가 통일을 달성하기 위한 "극복할 수 없는 장애"("impedimento insalvablees")라고 지적했다.
매사추세츠 대학교 연구 학자 린 V. 포스터는 1820년대의 연방 공화국을 연방 정부에 비해 지역 관리들이 주에서 행사하는 권력과 영향력이 컸기 때문에 "단일 공화국보다는 작은 독립 국가들의 느슨한 연합과 더 유사했다"고 묘사했다.
다른 전문가들은 헌법이나 연방주의가 중앙 아메리카 연방 공화국의 붕괴의 주요 원인이었다는 것에 동의하지 않는다. 노스캐롤라이나 대학교 그린즈버러 역사학 교수 프랭클린 D. 파커는 연방 공화국의 정치 지도자들이 헌법 조항을 준수하고 시행하는 데 실패한 것이 궁극적으로 붕괴를 초래했다고 말했다. 자유주의 중앙 아메리카 역사가 알레한드로 마루레는 1820년대에 아르세가 자유주의자와 보수주의자 모두를 달래려는 시도에 "국가가 겪은 모든 불행"을 돌렸다. 온두라스 변호사이자 정치인 라몬 로사는 발레의 전기를 통해 모라잔의 1835년 재선이 "중앙 아메리카 공화국의 파멸"("la ruina de la República centroamericanaes")을 가져왔다고 썼으며, 모라잔이 타협 대신 분쟁을 해결하기 위해 군사력을 사용한 것이 연방 정부를 약화시켰다고 말했다. 니카라과 작가 살바도르 멘디에타/Salvador Mendietaes는 연방 공화국의 붕괴의 주요 원인이 주들 사이와 내부에 효율적인 통신 인프라가 부족했기 때문이라고 말했다. 샌디에이고 주립 대학교 역사학 교수 필립 F. 플레미온은 연방 공화국의 붕괴를 "지역적 질투, 사회적 및 문화적 차이, 부적절한 통신 및 운송 시스템, 제한된 재정 자원, 그리고 상이한 정치적 견해"로 돌렸다. 스미스는 연방 공화국의 "재정적 잘못된 관리"와 "유산된 경제 발전"이 붕괴에 적어도 작은 역할을 했다고 언급했다.
9. 1. 긍정적 평가
미국 의회 도서관 산하 연방 연구부의 편집자인 리처드 A. 해거티는 중앙아메리카 연방 공화국을 "실행 불가능"했지만 스페인 식민 통치 종식 이후 "중앙 아메리카 국가들의 유일한 성공적인 정치적 연합"이라고 묘사했다. 엘살바도르의 교육부는 연방 공화국을 공화주의와 입헌주의와 같은 아이디어를 위한 "정치적 실험실"("laboratorio políticoes")로 묘사했다.시몬 볼리바르는 ''자메이카 서한''(1815)에서 독립적인 중앙 아메리카 국가가 세계의 수도가 될 잠재력을 가졌다고 평가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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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quote = 파나마에서 과테말라에 이르는 지협의 주들은 아마도 연방을 형성할 것입니다. 이 두 개의 거대한 대양 사이의 이 웅장한 위치는 언젠가 세계의 상업 중심지가 될 수 있습니다. 이 운하는 전 세계의 거리를 단축하고 유럽, 아메리카, 아시아와의 상업적 유대를 강화하며, 지구의 네 구석으로부터 이 행복한 지역에 공물을 가져올 것입니다. 어쩌면 언젠가는 세계의 수도가 그곳에 위치할 수 있을 것입니다. 마치 콘스탄티누스가 비잔티움을 고대 세계의 수도라고 주장한 것처럼 말입니다.
| author = 시몬 볼리바르는 독립적인 중앙 아메리카 국가의 잠재력에 대해 ''자메이카 서한''(1815)에서
}}
9. 2. 부정적 평가
중앙아메리카 연방공화국은 스페인 식민 통치 종식 이후 중앙아메리카 국가들의 유일한 성공적인 정치적 연합이었지만, "실행 불가능"했다는 평가를 받는다. 연방 헌법은 공화주의와 입헌주의와 같은 이상적인 아이디어를 위한 "정치적 실험실"로 묘사되기도 하지만, 너무 이상주의적"이라는 비판을 받았다.일부 전문가들은 연방 헌법이 지나치게 이상주의적이었기 때문에 연방 붕괴의 주요 원인이 되었다고 지적한다. 자유주의 정치인 로렌조 몬투파르는 연방 공화국이 연방 제도를 채택하면서 전쟁과 재앙을 얻었다고 비판했다. 페드로 호아킨 차모로는 미국 연방주의를 모방하려는 시도가 중앙 아메리카 국가들 사이에 분열을 초래했다고 주장했다. 엘살바도르 교육부는 연방 헌법이 "무정부 상태와 무질서를 초래한 치명적인 결론"이었다고 평가했다. 후안 카를로스 국왕 대학교 경제학 교수 기예르모 바스케스 비센테는 일관된 정치, 경제, 사회 계획 없이는 헌법의 이상을 달성하는 것이 불가능했으며, 이는 국가 통일을 달성하기 위한 "극복할 수 없는 장애"였다고 지적했다.
반면, 헌법이나 연방주의가 붕괴의 주요 원인이 아니라는 주장도 있다. 노스캐롤라이나 대학교 그린즈버러 역사학 교수 프랭클린 D. 파커는 연방 공화국의 정치 지도자들이 헌법 조항을 준수하고 시행하는 데 실패한 것이 붕괴를 초래했다고 주장했다. 자유주의 중앙 아메리카 역사가 알레한드로 마루레는 아르세가 자유주의자와 보수주의자 모두를 달래려는 시도가 "국가가 겪은 모든 불행"을 초래했다고 비판했다. 라몬 로사는 모라잔의 1835년 재선과 군사력 사용이 연방 정부를 약화시켰다고 주장했다.
이 외에도, 주들 사이와 내부에 효율적인 통신 인프라 부족, 지역적 질투, 사회적 및 문화적 차이, 부적절한 통신 및 운송 시스템, 제한된 재정 자원, 상이한 정치적 견해, "재정적 잘못된 관리"와 "유산된 경제 발전" 등이 붕괴의 원인으로 지적된다.
9. 3. 종합적 평가
중앙아메리카 연방 공화국은 스페인 식민 통치에서 벗어난 직후 중앙아메리카 국가들의 유일한 성공적인 정치적 연합이었다. 시몬 볼리바르는 ''자메이카 서한''(1815)에서 중앙아메리카가 두 대양 사이에 위치하여 세계 상업의 중심지가 되고, 비잔티움처럼 세계의 수도가 될 잠재력이 있다고 보았다.연방 공화국은 공화주의와 입헌주의 같은 아이디어를 위한 "정치적 실험실"로 묘사되기도 한다. 그러나, 연방 헌법은 너무 이상주의적이라는 비판을 받았다. 자유주의 정치인 로렌조 몬투파르는 연방 제도가 전쟁과 재앙을 초래했다고 말했다. 페드로 호아킨 차모로는 미국 연방주의 모방 시도가 분열을 야기했다고 주장했다. 엘살바도르 교육부는 연방 헌법이 무정부 상태와 무질서를 초래했다고 평가했다.
매사추세츠 대학교 연구 학자 린 V. 포스터는 연방 공화국이 중앙 정부보다 지역 관리들의 권력이 커서, 단일 국가보다는 느슨한 연합에 가까웠다고 설명했다. 후안 카를로스 국왕 대학교 경제학 교수 기예르모 바스케스 비센테는 일관된 정치, 경제, 사회 계획 없이는 헌법의 이상 달성이 불가능했고, 분리주의 정서가 국가 통일에 큰 장애였다고 지적했다.
하지만 헌법이나 연방주의가 붕괴의 주요 원인이 아니라는 의견도 있다. 노스캐롤라이나 대학교 그린즈버러 역사학 교수 프랭클린 D. 파커는 정치 지도자들이 헌법을 준수하고 시행하지 않은 것이 붕괴를 초래했다고 보았다. 자유주의 역사가 알레한드로 마루레는 아르세가 자유주의자와 보수주의자 모두를 달래려 한 것을 국가 불행의 원인으로 지적했다. 라몬 로사는 모라잔의 재선과 군사력 사용이 연방 정부를 약화시켰다고 주장했다. 니카라과 작가 살바도르 멘디에타는 주들 간, 그리고 내부의 효율적인 통신 인프라 부족이 붕괴의 주요 원인이라고 말했다. 샌디에이고 주립 대학교 역사학 교수 필립 F. 플레미온은 지역적 질투, 사회적 및 문화적 차이, 부적절한 통신 및 운송 시스템, 제한된 재정 자원, 상이한 정치적 견해를 붕괴 원인으로 꼽았다. 스미스는 연방 공화국의 재정적 관리 부실과 경제 발전 실패도 붕괴에 영향을 미쳤다고 언급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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