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주 촉석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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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촉석루는 경상남도 진주시에 있는 누각으로, 진주성을 지키는 지휘 본부 또는 경상우도 군사들을 지휘하는 곳으로 사용되었다. 평상시에는 과거 시험을 치르는 고시장으로 활용되었으며, 임진왜란 당시에는 왜군에 항거한 논개의 순국 장소로도 알려져 있다. 촉석루는 건축, 주변 경관, 문화적 의의 등 다양한 측면에서 중요한 가치를 지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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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주 촉석루 - [유적/문화재]에 관한 문서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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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본 정보 | |
이름 | 진주 촉석루 |
한자 표기 | 晋州 矗石樓 |
유형 | 문화재자료 |
지정 번호 | 8 |
지정일 | 1983년 7월 20일 |
주소 | 경상남도 진주시 본성동 500-8번지 |
수량 | 1동 |
꼬리표 | 진주 본성동 |
문화재청 ID | 31,00080000,38 |
2. 역사
진주성의 주장대(主將臺)였던 촉석루는 남강이 내려다 보이는 벼랑 위에 세워진 단층 팔작지붕 건물이다. 1241년 고려 고종 28년에 진주성 축성과 함께 부사(府使) 김충광(金忠光) 등이 처음 건립하여 장원루(壯元樓)라고 불렀다. 《세종실록 지리지》에는 촉석루(矗石樓)라는 이름으로 용두사(龍頭寺) 남쪽 돌벼랑에 위치하고 있다고 기록되어 있다.[2]
1593년 7월 29일 임진왜란 당시 제2차 진주성 전투에서 왜군의 공격으로 진주성 동문이 무너지자, 김천일, 최경회, 이종인 등은 촉석루에서 최후까지 항전하였으나 성이 함락되면서 모두 전사하거나 남강에 투신하였다.[3] 이후 1618년 조선 광해군 10년에 병사(兵使) 남이흥(南以興)이 임진왜란으로 파괴된 촉석루를 재건하였다. 한편, 제2차 진주성 전투에서 승리한 왜군이 촉석루에서 승전연을 벌일 때 논개가 촉석루 앞 의암에서 왜장을 끌어안고 남강에 투신한 것으로 유명하다.
1747년 영조 23년 1월 26일 경상우병영에서 1593년 최경회가 소지하다가 남강에 몸을 던질 때 가지고 있었던 도장을 진주 사람이 남강 가에서 주웠다는 사실을 조정에 보고하였다. 영조는 이 도장을 창열사에 보관하고 제사를 지내도록 명하고, 도장갑을 만들고 그 위에 글을 지어 촉석루의 의열을 기렸다.
1948년 국보로 지정되었으나 1950년 한국 전쟁 때 소실되었다. 지금의 촉석루는 1960년 진주고적보존회가 시민들의 성금으로 다시 지은 것이다.
2. 1. 건립과 중건
1241년(고려 고종 28년) 진주성 축성과 함께 부사(府使) 김충광(金忠光) 등이 창건하여 장원루(壯元樓)라고 불렀다.[2] 1365년(고려 공민왕 14년) 처음 건립된 후, 조선시대에 걸쳐 여러 차례 중건 및 보수되었다.《세종실록 지리지》에서는 촉석루(矗石樓)로 명명되었으며, 용두사(龍頭寺)의 남쪽 돌벼랑에 위치하고 있다고 설명하고 있다.[2]
임진왜란 때 파괴된 것을 1618년(조선 광해군 10년)에 병사(兵使) 남이흥(南以興)이 재건했다.[3]
1948년 국보로 지정되었으나 1950년 한국 전쟁 때 소실되었고, 1960년 진주고적보존회가 시민의 성금으로 새로 건축하였다. 이때 대한민국의 인간 문화재였던 임배근이 공사 총책임을 맡았다.
2. 2. 임진왜란과 촉석루
1593년 7월 29일 왜군의 파상적인 공격으로 진주성 동문이 무너지자, 김천일, 최경회, 이종인 등은 촉석루에 모여서 결사항전 하였으나, 모두 전사하거나 남강에 뛰어들어 자결하였다.[3]임진왜란 제2차 진주성 전투에서 승리한 왜군이 촉석루에서 승전연을 벌일 때 논개가 촉석루 앞 의암에서 왜장을 끌어안고 강으로 뛰어들었다고 해서 유명하다.
1747년 영조 23년 1월 26일 경상우병영에서 조정으로 진주 사람이 남강 가에서 주웠다고 하는 도장 한 개가 진상되었다. 이것은 154년 전인 1593년 최경회가 소지하고 있다가 남강에 몸을 던질 때 가지고 있었던 것이었다. 영조는 이것을 창열사에 두고 제를 올리라고 명하고, 도장갑을 만들고 그 위에 글을 지어 촉석루의 의열을 찬송하였다.
촉석루 앞으로는 남강이 흐르고 왼쪽으로 논개의 의기를 추모하기 위해 세운 의기사가 있다. 1780년 정조 5년 정약용은 19세의 나이로 경상우도 병마절도사인 장인 홍화보가 임지로 있는 진주에 부인과 함께 들렀다. 장인은 촉석루에서 악공과 가인을 불러 사위에게 연회를 베풀었는데, 정약용은 진주검무를 추는 가인에게 〈무검편증미인(舞劒篇贈美人)〉이라는 시를 지어 헌사하였고, 〈진주의기사기(晋州義妓祠記)〉를 지어 의기사에 걸게 하였다. 그 후 10년 후인 1791년 정조 15년에 30살의 나이로 진주목사로 있는 아버지에게 다시 들러서 〈재유촉석루기(再游矗石樓記)〉를 적었다.[5]
촉석루 아래 계단을 통해 의암으로 내려갈 수 있게 작은 통로를 마련해 두었는데 중간 부분에 의암사적비가 있고, 그 아래로 남강이 흐르는 곳에 툭 튀어나온 의암(義巖)이라는 글자가 새겨진 바위가 있다.
2. 3. 조선 후기
1618년(광해군 10년) 병사 남이흥이 임진왜란 때 파괴된 촉석루를 재건했다.[3] 1747년(영조 23년) 1월 26일 경상우병영에서 조정으로 진상된 최경회의 도장이 발견되었다. 이것은 1593년 최경회가 소지하고 있다가 남강에 몸을 던질 때 가지고 있었던 것이었다. 영조는 이것을 창열사에 두고 제를 올리라고 명하고, 도장갑을 만들고 그 위에 글을 지어 촉석루의 의열을 찬송하였다.[4]1780년(정조 5년) 정약용은 19세의 나이로 경상우도 병마절도사인 장인 홍화보가 임지로 있는 진주에 부인과 함께 들렀다. 장인은 촉석루에서 악공과 가인을 불러 사위에게 연회를 베풀었는데, 정약용은 진주검무를 추는 가인에게 〈무검편증미인(舞劒篇贈美人)〉이라는 시를 헌사하였고, 〈진주의기사기(晋州義妓祠記)〉를 지어 의기사에 걸게 하였다. 1791년(정조 15년) 정약용은 30세의 나이로 진주목사로 있는 아버지에게 다시 들러 〈재유촉석루기(再游矗石樓記)〉를 적었다.[5]
2. 4. 근현대
1948년 국보로 지정되었으나, 1950년 한국 전쟁 때 소실되었다.[3] 1960년 진주고적보존회가 시민들의 성금으로 재건하였으며, 대한민국의 인간문화재였던 임배근이 공사 총책임을 맡았다.[3]3. 구조
남강에 접한 벼랑 위에 자리잡은 단층 팔작집의 웅장한 건물로, 진주성의 주장대(主將臺)이다.[2] 1241년 고려 고종 28년 축성 당시에 부사(府使) 김충광(金忠光) 등이 창건하여, 장원루(壯元樓)라고 불렀다. 《세종실록 지리지》에서는 촉석루(矗石樓)로 명명되었으며, 용두사(龍頭寺)의 남쪽 돌벼랑에 위치하고 있다고 설명하고 있다.
1593년 7월 29일 왜군의 파상적인 공격으로 진주성 동문이 무너지자, 김천일, 최경회, 이종인 등은 이곳에 모여서 결사항전 하였으나, 모두 전사하거나 남강에 뛰어들어 자결하였다.[3]
1747년 영조 23년 1월 26일 경상우병영에서 조정으로 진주 사람이 남강 가에서 주웠다고 하는 도장 한 개가 진상되었다. 이것은 당시로부터 154년 전인 1593년 최경회가 소지하고 있다가 남강에 몸을 던질 때 가지고 있었던 것이었다. 영조는 이것을 창열사에 두고 제를 올리라고 명하고, 도장갑을 만들고 그 위에 글을 지어 촉석루의 의열을 찬송하였다.
1948년에 국보로 지정되었으나 1950년 한국 전쟁 때 소실되었다. 지금 남아있는 것은 1960년 진주고적보존회가 시민의 성금으로 새로 건축한 것이다.
3. 1. 건축
1241년 (고려 고종 28년) 고려의 부사(府使) 김충광(金忠光) 등이 진주성의 주장대(主將臺)로 사용하기 위해 창건하였으며, 처음에는 장원루(壯元樓)라고 불렀다. 남강에 접한 벼랑 위에 자리잡은 단층 팔작지붕 형태의 건물이다.[2]임진왜란 때 파괴된 것을 1618년 (조선 광해군 10년)에 병사(兵使) 남이흥(南以興)이 재건했다. 1950년 한국 전쟁 때 다시 소실되었으나, 1960년 진주고적보존회가 시민들의 성금으로 재건하였다. 이때 대한민국의 인간 문화재였던 임배근이 공사 총책임을 맡았다.
3. 2. 주변 경관
촉석루 앞으로는 남강이 흐르고 왼쪽으로 논개의 의기를 추모하기 위해 세운 의기사가 있다. 1780년 정조 5년 다산 정약용은 19세의 나이로 경상우도 병마절도사인 장인 홍화보가 임지로 있는 진주에 부인과 함께 들렀다. 장인은 촉석루에서 악공과 가인을 불러 사위에게 연회를 베풀었는데, 다산 정약용은 진주검무를 추는 가인에게 〈무검편증미인(舞劒篇贈美人)〉이라는 시를 지어 헌사하였고, 〈진주의기사기(晋州義妓祠記)〉를 지어 의기사에 걸게 하였다. 그 후 10년 후인 1791년 정조 15년에 30살의 나이로 진주목사로 있는 아버지에게 다시 들러서 〈재유촉석루기(再游矗石樓記)〉를 적었다.[5]촉석루 아래 계단을 통해 의암으로 내려갈 수 있게 작은 통로를 마련해 두었는데 중간 부분에 의암사적비가 있고, 그 아래로 남강이 흐르는 곳에 툭 튀어나온 의암(義巖)이라는 글자가 새겨진 바위가 있다.
4. 기능
촉석루는 전쟁시 지휘본부 뿐만 아니라 평상시에는 과거 시험 또는 향시를 치르는 고시장으로도 활용되었다. 1365년(고려 공민왕 14년)에 처음 건립된 이후 여러 차례 중건과 보수를 거쳤다.
4. 1. 군사적 기능
촉석루는 본래 전쟁이 일어나면 진주성을 지키는 지휘본부나 경상우도 군사들을 지휘하는 지휘본부로 사용되었다.[2]4. 2. 과거 시험장
1365년(고려 공민왕 14년)에 처음 건립되었으며 세운 후 7차례의 중건과 보수를 거쳤다. 촉석루는 본래 전쟁이 일어나면 유사시 진주성을 지키는 지휘본부 또는 경상우도 군사들을 지휘하는 지휘본부로서 사용하였다. 또한 평상시에는 과거 시험 또는 향시를 치르는 고시장으로도 쓰였다.5. 문화적 의의
1593년 7월 29일 임진왜란 당시 진주성 동문이 무너지자, 김천일, 최경회, 이종인 등은 촉석루에 모여 결사항전 하였으나, 모두 전사하거나 남강에 뛰어들어 자결하였다.[3]
1747년(조선 영조 23년) 1월 26일 경상우병영에서 영조에게 진주 사람이 남강 가에서 주웠다는 도장 한 개를 진상했다. 이것은 154년 전인 1593년 최경회가 소지하고 있다가 남강에 몸을 던질 때 가지고 있었던 것이었다. 영조는 이것을 창열사에 두고 제사를 지내도록 명하고, 도장갑을 만들고 그 위에 촉석루의 의열을 찬송하는 글을 지었다.
追憶往事|지난 일을 돌이켜 생각하니중국어
百有餘年|1백여 년이 지났네.중국어
幸得南江|다행히 남강에서 주웠던 도장에중국어
印篆宛然|새겨진 전자가 완연하니중국어
矗石閫義烈|촉석루에서의 뛰어난 의열중국어
想像愴先|상상하니 먼저 서글퍼지네.중국어
命留嶺閫|영남의 병영에 보관토록 하여중국어
以竪忠焉|충절을 기리게 하노라”중국어[4]
1948년 국보로 지정되었으나, 1950년 한국 전쟁 때 소실되었다. 현재 남아있는 것은 1960년 진주고적보존회가 시민들의 성금으로 다시 건축한 것이다. 대한민국의 인간 문화재였던 임배근이 공사 총책임을 맡았다.
5. 1. 논개와 의암
임진왜란 당시 제2차 진주성 전투에서 승리한 왜군이 촉석루에서 승전연을 벌일 때 논개가 촉석루 앞 의암에서 왜장을 끌어안고 강으로 뛰어들었다고 해서 유명하다.[3]촉석루 아래 계단을 통해 의암으로 내려갈 수 있는 작은 통로가 있고, 중간 부분에 의암사적비가 있다. 그 아래로 남강이 흐르는 곳에 툭 튀어나온 의암(義巖)이라는 글자가 새겨진 바위가 있다.
촉석루 앞으로는 남강이 흐르고 왼쪽으로 논개의 의기를 추모하기 위해 세운 의기사가 있다. 1780년 정조 5년 다산 정약용은 19세의 나이로 경상우도 병마절도사인 장인 홍화보가 임지로 있는 진주에 부인과 함께 들렀다. 장인은 촉석루에서 악공과 가인을 불러 사위에게 연회를 베풀었는데, 다산 정약용은 진주검무를 추는 가인에게 〈무검편증미인(舞劒篇贈美人)〉이라는 시를 지어 헌사하였고, 〈진주의기사기(晋州義妓祠記)〉를 지어 의기사에 걸게 하였다. 그 후 10년 후인 1791년 정조 15년에 30살의 나이로 진주목사로 있는 아버지에게 다시 들러서 〈재유촉석루기(再游矗石樓記)〉를 적었다.[5]
5. 2. 정약용과 촉석루
1780년 (조선 정조 5년), 다산 정약용은 19세의 나이로 경상우도 병마절도사인 장인 홍화보가 임지로 있는 진주에 부인과 함께 들렀다. 장인은 촉석루에서 악공과 가인을 불러 사위를 위해 연회를 베풀었는데, 다산 정약용은 진주검무를 추는 가인에게 〈무검편증미인〉이라는 시를 지어 헌사하였고, 〈진주의기사기〉를 지어 의기사에 걸게 하였다. 그 후 10년 뒤인 1791년(조선 정조 15년)에 30살의 나이로 진주목사로 있는 아버지에게 다시 들러서 〈재유촉석루기〉를 적었다.[5]5. 3. 예술 작품 속 촉석루
1913년 안중식이 그린 촉석루 그림이 있다. 진주검무(팔검무)는 정약용이 19세에 촉석루에서 장인이 베푼 연회에서 검무를 추는 가인에게 〈무검편증미인(舞劒篇贈美人)〉이라는 시를 지어 헌사할 정도로 촉석루와 연관이 깊다.[5]
6. 사진
참조
[1]
간행물
경상남도 지정문화재(문화재자료) 명칭변경 고시
http://210.104.249.3[...]
경상남도지사
2018-12-20
[2]
웹인용
《세종실록지리지》 / 경상도 / 진주목
http://sillok.histor[...]
《조선왕조실록》
2008-12-20
[3]
웹인용
《선조실록》 26년권 27권
http://sillok.histor[...]
《조선왕조실록》
2008-12-20
[4]
웹인용
《영조실록》 23년
http://sillok.histor[...]
《조선왕조실록》
2008-12-22
[5]
웹인용
다산의 생애, 성장기-청년기 / 벼슬시절
https://web.archive.[...]
2008-12-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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