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평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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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진평군은 백제가 요서 지역을 다스렸다는 기록에서 유래된 지명이다. 중국 남조 사서에는 백제가 요서를 점유하고 진평군을 설치했다는 기록이 있으나, 북조 사서나 한국 측 기록에는 나타나지 않아 학계에서 논쟁이 있다. 일부 한국 학계에서는 백제의 요서 진출을 사실로 보기도 하지만, 일본과 중국 학계에서는 회의적인 시각이 우세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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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평군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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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요 | |
유형 | 군 |
존속 기간 | 서진 ~ 북위 |
위치 | 현재의 산시 성(山西省) 린펀(臨汾)시 일대 |
역사 | |
설치 시기 | 서진(西晉) 시대 |
폐지 시기 | 북위(北魏) 시대 |
관할 | |
주요 지역 | 진(晉) 안읍(安邑) 문희(聞喜) 동향(桐鄕) |
행정 구역 변천 | |
서진 | 태원군(太原郡)에서 분리되어 설치됨 |
북위 | 평양군(平陽郡)에 병합됨 |
관련 인물 | |
주요 인물 | 사마염(司馬炎): 서진의 초대 황제, 진평군 설치 사마궤(司馬軌): 진평왕(晉平王) |
2. 중국 사서의 기록
송서, 양서 등 남조계 사서에서 백제가 중국 요서 지방에 진출했다는 "백제 요서 경략설"이 나타난다.
그러나 삼국사기를 비롯한 한국 사서나, 요서 지방을 실제로 지배했던 북조계 사서에는 관련 기록이 없다. 북연의 패잔병이 백제를 침입하거나 북위가 백제를 침공한 시기에 요서에 백제 영토가 안정적으로 존재하기 어려웠다는 점에서[14], 한국과 북한을 제외한 학계에서는 주요 학설로 인정받지 않는다.
한국 학계에서도 백제의 요서 진출에 대해 부정적인 시각이 지배적이지만,[15] 최근 요서 진출을 사실로 보는 설이 제기되기도 한다.[16] 동북아역사재단의 Y 연구원은 중국 사서 내용을 그대로 믿으면 왜국과의 전쟁에서 백제와 신라가 왜국을 대국으로 섬겼다는 내용도 믿을 수밖에 없다며, 사료의 의미를 다각도로 파악해야 한다고 비판한다.[19]
미즈노 슌페이는 백제의 요서 영유 기록이 백제와 친밀한 남조 사서에만 보이고, 북조 사서, 삼국사기, 삼국유사, 위서에는 없으며, 백제군과 북위군 충돌 기록도 북위 측 사서에는 없다는 점을 들어 학계에서 회의적이라고 평가한다.
미야와키 준코는 당시 국가 소속 의식이 낮고 이동이 자유로웠으며, 한반도 주변에 다양한 국적의 사람들이 섞여 있었고, 중국과 조선이 하나의 경제권으로 교역했기에 요서에 백제인 커뮤니티가 형성되어도 이상할 것이 없지만, 이를 백제 영토로 해석하는 것은 로스앤젤레스 코리아타운을 한국 영토로 주장하는 것과 같다고 비판한다.
조선 민족주의 역사학자 신채호는 백제가 근초고왕·동성왕 시대에 요서와 산둥의 전진까지 공격·영유했다고 주장했다. 재야사학계에서는 백제의 요서 영유를 인정하며, 대륙사관 주장자들은 백제 위치를 한반도 서남부가 아닌 황하와 양자강 사이로 비정하고 요서 영유가 사실이라고 주장한다.
백제 요서 영유 시기에 대한 쟁점도 있다. 광개토대왕 재위(391–413년) 중 404년에 고구려가 요동을 차지했는데, 이 시기 백제는 고구려에 58성을 빼앗겨 요서 진출 여력이 없었다고 보아, 385년 고구려가 일시 요동을 점유했을 때 백제가 요서에 진출했다는 주장도 있다.[16]
2. 1. 직접적 기록
고려는 요동을 경략하여 차지하였고, 백제는 요서를 경략하여 차지하였다. 백제가 다스린 곳을 진평군 진평현이라 이른다.진나라 말기, 고구려가 요동을 경략하여 차지하자, 낙랑도 요서 진평현을 차지하였다.[1]
진나라 시대, 고구려가 요동을 경략하여 차지하자, 백제도 요서 진평 2군의 땅을 점거하여 차지하고 스스로 백제군을 설치하였다.[2]
진나라 시대, 고구려가 요동을 경략하여 차지하자, 백제도 요서 진평 2군의 땅을 점거하여 차지하였다. 지금의 유성과 북평 사이이다.[3]
출전 | 본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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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송서』 권97 · 동이 백제국전 | 백제국은 본래 고구려와 함께 요동의 동쪽 천여 리에 있었다. 그 후 고구려는 요동을 거의 차지하고, 백제는 요서를 거의 차지했다. 백제가 다스리는 곳을 진평군(晉平郡) 진평현(晉平縣)이라 한다. |
『남제서』 권58 · 열전(列傳) 제39 | 위(魏)의 오랑캐가 또 기병 수십 만을 동원하여 백제를 공격하여 그 경계 안으로 쳐들어왔다. 부여왕은 사법명(沙法名), 찬수류(贊首流), 해례곤(解禮昆), 목간나(木幹那) 등을 보내 오랑캐 군대를 습격하게 하여 크게 격파했다. |
『양서』 권54 열전(列傳) 48 제이(諸夷) · 동이(東夷) 제융(諸戎) · 백제 | 백제 또한 요서(遼西) · 진평(晉平) 두 군(郡)의 땅을 점유하고, 스스로 백제군(百濟郡)을 설치했다. |
2. 2. 간접적 기록
初 夫餘居於鹿山 為百濟所侵 部落衰散 西徙近燕 而不設備 燕王皝遣世子……襲夫餘|처음 부여는 녹산에 있었는데, 백제의 침략으로 부락이 쇠하여 흩어졌다. 서쪽 연나라 근처로 이동했는데, 아무런 방비를 하지 않았다. 연왕 황이 세자를 보내어……부여를 습격하였다.중국어:[1]
句麗百濟及宇文段部之人 皆兵勢所徙 非如中國慕義而至 咸有思歸之心|고구려·백제 및 우문부·단부의 사람들은 모두 병세에 따라 옮겨진 바, 중국의 의로움을 좇아 여기에 온 것이 아니므로 모두 돌아갈 생각을 가지고 있습니다.중국어
:[2]
是歲 魏虜又發騎數十萬攻百濟 入其界 牟大遣將沙法名贊首流解禮昆木干那率衆襲擊虜軍 大破之|이해 위나라 오랑캐가 다시 기병 수십만을 보내어 백제를 쳐서 그 경계에 들어가니, 모대가 장수 사법명·찬수류·해례곤·목간나를 보내어 무리를 거느리고 오랑캐 군대를 습격하여 크게 깨뜨렸다.중국어
:[3]
建武二年 牟大遣使上表曰……去庚午年 獫狁弗悛 擧兵深逼 臣遣沙法名等領軍逆討 宵襲霆擊 匈梨張惶 崩若海蕩|건무 2년에 모대가 사신을 보내어 표문을 올려 말하기를……지난 경오년에는 험윤이 잘못을 뉘우치지 않고 군사를 일으켜 깊숙히 쳐들어 왔습니다. 신이 사법명 등을 보내어 군사를 거느리고 거꾸로 쳐서 밤에 번개처럼 기습 공격하니, 흉리가 당황하여 마치 바닷물이 들끓듯 붕괴되었다.중국어
:[4]
10년 위나라가 병사를 보내 쳐들어왔으나 우리에게 패하였다.[5]
高麗·百濟 全盛之時 强兵百萬 南侵吳越 北撓幽燕齊魯 爲中國巨蠹|고구려와 백제의 전성에 강병이 백만으로 남으로는 오나라와 월나라를 침범하고, 북으로는 유주와 연나라, 제나라, 노나라를 어지럽혀 중국의 커다란 좀이 되었다.중국어
:[6]
3. 백제 요서 경략설에 대한 논쟁
백제가 중국 요서 지방을 경략했다는 '백제 요서 경략설'은 송서, 양서 등 남조계 사서에 기록되어 있다. 이 기록에 따르면 진 시대에 고구려가 요동을 점령한 후, 백제 역시 요서 지방을 정복하고 진평군을 설치했다고 한다. 그러나 북조계 사서나 한국 사서인 삼국사기, 삼국유사에는 관련 기록이 없어 논쟁이 계속되고 있다.
백제 요서 경략설은 긍정적 견해와 부정적 견해로 나뉜다. 긍정적 견해는 백제가 실제로 요서를 경략하여 중국 대륙에 진출했다고 주장하는 반면, 부정적 견해는 기록의 신뢰성이 낮고 당시 국제 정세상 백제의 요서 진출이 불가능했다고 본다.
3. 1. 긍정적 견해
대한민국 교육부 장관을 역임한 안호상은 국회에 "국사 교과서 수정 건의"를 제출했는데, 그 내용은 다음과 같다.[5]번호 | 내용 |
---|---|
1 | 단군은 역사 속의 실존 인물이다. |
2 | 단군은 베이징까지 이르는 영토를 소유했다. |
3 | 왕검성은 요녕성에 있었다. |
4 | 한사군은 베이징에 있었다. |
5 | 3세기에서 7세기까지 백제는 베이징에서 상하이에 이르는 중국 동해안을 지배했다. |
6 | 신라의 초기 영토는 만주 동부에 있었고 신라의 국경은 베이징에 있었다. |
7 | 백제가 일본 문화를 건국했다. |
1990년까지 고등학교 한국사 교과서에서는 백제가 요서를 침략했다고 묘사했지만, 1990년 이후에는 "백제는 해군력을 강화하여 중국의 요서 지방을 침략했으며, 더 나아가 산서 지방과 일본에까지 적극적으로 진출했다"와 같이 묘사되고 그림으로 표현되었다.[5][6]
이노우에는 "유송 시대에 백제는 고구려에 대한 견제 세력으로 높이 평가받았다. 고구려와 위(魏), 연(燕)의 동맹을 통제하기 위해 백제의 요서 침략을 과장할 필요가 있었다"고 지적했다.[3]
한국 학계에서는 백제가 요서를 침략했다는 주장이 여전히 사실로 여겨지고 있다.[4]
3. 2. 부정적 견해
井上秀雄일본어에 따르면, 일본과 중국 학계는 진평군 존재에 대해 회의적이거나 부정적인 입장을 취하고 있다.[3] 그는 잔존한 전연의 군대가 백제를 공격하고 북위의 공격을 받는 시기에 진평군이 존속하는 것은 불가능하며, 진평군 관련 기사를 "완전히 잘못된 기사"라고 일축하며 "결코" 그러한 기사를 언급하지 않는다고 하였다.[3]이노우에는 "유송 시대에 백제는 고구려에 대한 견제 세력으로 높이 평가받았다. 고구려와 위(魏), 연(燕)의 동맹을 통제하기 위해 백제의 요서 침략을 과장할 필요가 있었다"고 지적했다.[3]
동북아역사재단의 연민수 연구원은 백제의 요서, 산둥성, 일본 규슈 진출에 대한 묘사에 많은 문제점이 있다고 지적하며, 그것들이 적절하지 않다고 비판했다. 그는 "비록 ''일본서기''의 진구 황후와 ''칠지도''에 대한 묘사에 근거한 것으로 보이지만, 이러한 해석은 많은 문제점을 가지고 있다."고 하였다. 또한 "역사 기록을 사용할 때는 자의적인 해석을 제거해야 한다. 문제가 많은 ''일본서기''를 따른다면, 역사는 백제가 일본으로 진출한 것이 아니라 일본이 백제로 진출한 것이 되어야 한다"고 비판했다. 그는 백제의 요서 진출과 진평군의 존재에 대한 문제점을 지적했다. 백제의 요서 진출에 대한 묘사는 북조 시대의 ''위서''에는 나타나지 않으며, 이 사건은 전진, 남조 시대의 ''송서''와 ''양서''에 나타난다. 백제는 당시 고구려와 끊임없이 싸우고 있었기 때문에 고구려의 영토를 지나가기가 어려웠을 것이다. 연민수는 "중국 역사서의 모든 것을 믿는다면, 백제와 신라가 왜에 대해 대국으로 섬겼다는 왜와의 전쟁 기록에 대한 묘사도 믿어야 한다"고 말했다.[7]
미야와키 준코는 이 이론이 믿을 수 없다고 말했다. 백제의 중국 영토에 대한 이론은 유송, 남제, 양과 같은 남조의 역사서에 의존하고 있다. 남조의 책에서 북위에 대한 북조의 묘사는 구전 수준이다.[8] ''송서''에는 백제에 대한 묘사가 있지만, ''제나라서''에서는 고구려, 가야 연맹, 왜와 함께 백제에 대한 묘사가 남만전 안에 포함되어 있다. 그녀는 이러한 정보의 양이 신뢰하기에 너무 적다고 비판했다. 또한, 당시 사람들은 국가에 대한 소속감이 적었고, 국가 간의 이동이 더 자유로웠다고 지적했다.[9] 한국과 주변 지역에는 여러 국가의 사람들이 섞여 살았다. 당시 중국과 한국은 같은 경제권을 공유했으며, 일부 백제인들이 요서에 정착하여 공동체를 이루었다.[9]
미즈노 슌페이는 백제가 중국 영토를 소유했을 것이라고 생각하는 경향이 있지만, "상상만큼 쉽지는 않다"고 말한다. 중국 역사서에 따르면 백제의 요서 점령은 3세기 말에서 5세기 초에 일어났지만, 당시 전연, 전진, 후연, 남연, 북위는 요서 지역을 차지하려고 했으며, 오호 십육국 시대와 남북조 시대의 가장 혼란스러운 시기에도 백제는 요서를 영토로 만들 수 없었다.[10] 진평군과 관련된 기사는 백제와 밀접한 관계를 맺고 있던 남조의 역사 기록에서만 발견되며, 남조의 역사서에서는 발견되지 않는다.
백제의 진출에 대한 기록은 한국 역사서인 ''삼국사기''와 ''삼국유사''에서 발견되지 않는다. 북위와의 충돌에 대한 기록은 ''제나라서''에 기록되어 있다.[11] 이러한 이유로 미즈노는 "이 이론은 학계에서 회의적이며" "이 이론이 역사 학계에서 널리 받아들여지고 있다고 말할 수 없다"고 말한다. 그는 남조가 가장 강력한 경쟁자인 북위에 의한 약화를 받아들이지 않겠다는 국제 정책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에 백제를 중요하게 생각했다고 지적했다. 그래서 그들은 백제를 자신들의 폐쇄적인 국제적 틀에 포함시키고 백제의 주장을 담아 역사서를 썼다.[12][13]
4. 한국의 관점
井上秀雄일본어에 따르면, 일본과 중국 학계는 진평군 존재에 대해 회의적이거나 부정적인 입장을 취하고 있다.[3] 잔존한 전연의 군대가 백제를 공격하고 북위의 공격을 받는 시기에 진평군이 존속하는 것은 불가능하다고 보았다.[3] 그는 진평군 관련 기사를 "완전히 잘못된 기사"라고 일축하며 "결코" 그러한 기사를 언급하지 않는다.[3]
이노우에는 "유송 시대에 백제는 고구려에 대한 견제 세력으로 높이 평가받았다. 고구려와 위(魏), 연(燕)의 동맹을 통제하기 위해 백제의 요서 침략을 과장할 필요가 있었다"고 지적했다.[3]
한국 학계에서는 백제가 요서를 침략했다는 주장이 여전히 사실로 여겨지고 있다.[4] 대한민국 교육부 장관을 역임한 안호상한국어은 국회에 "국사 교과서 수정 건의"를 제출했는데, 그 내용은 다음과 같다.[5][6]
1) 단군은 역사 속의 실존 인물이다. |
2) 단군은 베이징까지 이르는 영토를 소유했다. |
3) 왕검성은 요녕성에 있었다. |
4) 한사군은 베이징에 있었다. |
5) 3세기에서 7세기까지 백제는 베이징에서 상하이에 이르는 중국 동해안을 지배했다. |
6) 신라의 초기 영토는 만주 동부에 있었고 신라의 국경은 베이징에 있었다. |
7) 백제가 일본 문화를 건국했다. |
1990년까지 고등학교 한국사 교과서에서는 백제가 요서를 침략했다고 묘사했지만, 1990년 이후에는 "백제는 해군력을 강화하여 중국의 요서 지방을 침략했으며, 더 나아가 산서 지방과 일본에까지 적극적으로 진출했다"와 같이 묘사되고 그림으로 표현되었다.[5][6]
대한민국 정부 산하의 동북아역사재단한국어 연구원인 연민수한국어는 백제의 요서, 산둥성, 일본 규슈 진출에 대한 묘사에 많은 문제점이 있다고 지적하며, 그것들이 적절하지 않다고 비판했다. 그는 "비록 ''일본서기''의 진구 황후와 ''칠지도''에 대한 묘사에 근거한 것으로 보이지만, 이러한 해석은 많은 문제점을 가지고 있다. 역사 기록을 사용할 때는 자의적인 해석을 제거해야 한다. 문제가 많은 ''일본서기''를 따른다면, 역사는 백제가 일본으로 진출한 것이 아니라 일본이 백제로 진출한 것이 되어야 한다"고 비판했다. 그는 백제의 요서 진출과 진평군의 존재에 대한 문제점을 지적했다. 백제의 요서 진출에 대한 묘사는 북조 시대의 ''위서''에는 나타나지 않으며, 이 사건은 전진, 남조 시대의 ''송서''와 ''양서''에 나타난다. 백제는 당시 고구려와 끊임없이 싸우고 있었기 때문에 고구려의 영토를 지나가기가 어려웠을 것이다. 연민수는 "중국 역사서의 모든 것을 믿는다면, 백제와 신라가 왜에 대해 대국으로 섬겼다는 왜와의 전쟁 기록에 대한 묘사도 믿어야 한다"고 말했다.[7]
宮脇淳子일본어는 이 이론이 믿을 수 없다고 말했다. 백제의 중국 영토에 대한 이론은 유송, 남제, 양과 같은 남조의 역사서에 의존하고 있다. 남조의 책에서 북위에 대한 북조의 묘사는 구전 수준이다.[8] ''송서''에는 백제에 대한 묘사가 있지만, ''제나라서''에서는 고구려, 가야 연맹, 왜와 함께 백제에 대한 묘사가 남만전 안에 포함되어 있다. 그녀는 이러한 정보의 양이 신뢰하기에 너무 적다고 비판했다. 또한, 그녀는 당시 사람들이 국가에 대한 소속감이 적었고, 국가 간의 이동이 더 자유로웠다고 지적했다.[9] 한국과 주변 지역에는 여러 국가의 사람들이 섞여 살았다. 당시 중국과 한국은 같은 경제권을 공유했으며, 일부 백제인들이 요서에 정착하여 공동체를 이루었다.[9]
미즈노 슌페이는 백제가 중국 영토를 소유했을 것이라고 생각하는 경향이 있지만, "상상만큼 쉽지는 않다"고 말한다. 중국 역사서에 따르면 백제의 요서 점령은 3세기 말에서 5세기 초에 일어났지만, 당시 전연, 전진, 후연, 남연, 북위는 요서 지역을 차지하려고 했으며, 오호 십육국 시대와 남북조 시대의 가장 혼란스러운 시기에도 백제는 요서를 영토로 만들 수 없었다.[10] 진평군과 관련된 기사는 백제와 밀접한 관계를 맺고 있던 남조의 역사 기록에서만 발견되며, 북조의 역사서에서는 발견되지 않는다.
백제의 진출에 대한 기록은 한국 역사서인 ''삼국사기''와 ''삼국유사''에서 발견되지 않는다. 북위와의 충돌에 대한 기록은 ''제나라서''에 기록되어 있다.[11] 이러한 이유로 미즈노는 "이 이론은 학계에서 회의적이며" "이 이론이 역사 학계에서 널리 받아들여지고 있다고 말할 수 없다"고 말한다. 그는 남조가 가장 강력한 경쟁자인 북위에 의한 약화를 받아들이지 않겠다는 국제 정책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에 백제를 중요하게 생각했다고 지적했다. 그래서 그들은 백제를 자신들의 폐쇄적인 국제적 틀에 포함시키고 백제의 주장을 담아 역사서를 썼다.[12][13]
조선 민족주의 역사학자 신채호는 백제가 근초고왕·동성왕 시대에 요서와 산둥성의 전진까지 공격, 영유했다고 주장했다.[14]
한국의 재야사학계에서는 백제의 요서 영유를 인정하는 방향에 있다.
참조
[1]
서적
[2]
서적
[3]
서적
[4]
논문
4세기 백제의 遼西 지역 진출과 그 배경
한국고대사학회
[5]
서적
国史教科書の波動
ヘアン
[6]
웹사이트
韓国人の起源に関する中高生の意識と『国史』教科書との関係
http://www2.lib.yama[...]
[7]
뉴스
<"국사교과서 임나일본부설 근거될 수도">
http://www.yonhapnew[...]
2007-11-16
[8]
서적
韓流時代劇と朝鮮史の真実
https://books.google[...]
扶桑社
2013-08-08
[9]
서적
韓流時代劇と朝鮮史の真実
https://books.google[...]
扶桑社
2013-08-08
[10]
서적
[11]
서적
[12]
서적
[13]
서적
[14]
서적
日本古代の伝承と東アジア
吉川弘文館
1995-03
[15]
서적
"백제 략유(略有)요서" 기사의 분석
학연문화사
[16]
논문
4세기 백제의 遼西 지역 진출과 그 배경
한국고대사학회
[17]
서적
国史教科書の波動
ヘアン
[18]
서적
[19]
뉴스
<"국사교과서 임나일본부설 근거될 수도">
http://www.yonhapnew[...]
2007-11-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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