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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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청화가는 영웅가 또는 화족으로도 불리며, 섭가와 함께 공달로 불린 가문의 자제들로 구성되었다. 고산조 천황 시대 이후 섭관가가 외척 지위를 잃으면서 청화가의 가격이 형성되었으며, 대신, 대장으로 승진할 수 있고 황후를 배출할 수 있는 자격을 갖추었다. 중세 시대에 많은 가문이 쇠퇴하면서 7개의 가문만이 남게 되었고, 도요토미 정권 하에서는 오대로 가문도 청화가와 동등하게 대우받았다. 가마쿠라 시대부터 아즈치모모야마 시대에는 참의, 중납언, 대납언 등을 거쳐 태정대신까지 승진했으며, 에도 시대에는 좌대신이 청화가의 최고 관직이었으나, 극소수만 임명되었다. 메이지 시대 화족령에 의해 대부분 후작이 되었고, 일부 가문은 공작으로 서임되었다. 주요 가문으로는 구가 가, 산조 가, 사이온지 가, 도쿠다이지 가, 가잔인 가, 오이노미카도 가, 이마데가와 가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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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청화가 - 사이온지가
후지와라노 킨자네의 아들 사이온지 미치스에를 시조로 하는 사이온지 가는 막부와의 소통, 황실과의 혼인, 비파 제작 가문으로서의 명맥 유지, 그리고 사이온지 긴모치의 메이지 유신 공헌과 내각총리대신 역임 등을 통해 일본 역사 속에서 영향력을 이어온 귀족 가문이다. - 무라카미 겐지 - 우림가
우림가는 일본 공가의 가문으로, 후지와라 북가를 중심으로 우다 겐지, 무라카미 겐지 계통을 포함하며, 간인류, 화산원류 등 여러 류파로 나뉘어 구가 사회의 중요한 역할을 수행했다. - 무라카미 겐지 - 고카몬인노 벳토
고카몬인노 벳토는 가마쿠라 시대의 가인으로, 와카를 통해 섬세한 감정 묘사와 독창적인 표현 기법을 선보였으며, 특히 짧은 하룻밤의 사랑을 애절하게 노래하는 와카 작품과 《오구라 백인일수》수록 작품으로 알려져 있다. - 공가 - 판적봉환
판적봉환은 1868년부터 1871년까지 일본에서 시행된 제도로, 봉건적 막번 체제를 개혁하고 중앙집권화를 강화하기 위해 각 번의 토지와 백성을 천황에게 반환하는 것을 골자로 한다. - 공가 - 공경
공경은 고대 중국에서 유래하여 일본 궁중 관리들을 지칭하는 용어이며, 율령 체제에서 대신들을 포함하고 메이지 유신 이후 화족 제도가 창설되면서 폐지되었다.
청화가 | |
---|---|
청화가 | |
신분 | 공경 |
가계 | 공가 |
가각 | 섭가 |
창시 | 등원실현 |
유래 | 등원씨 |
지위 | 섭가 |
존속 기간 | 무로마치 시대 ~ 메이지 시대 |
계통 | |
본류 | 후지와라 북가 |
지류 | 한산원류 |
분파 | 구조가 니조가 고노에가 이치조가 다카쓰카사가 |
개요 | |
설명 | 청화가는 일본의 공경 가문 중 하나이다. 섭가에 이어 대신가를 배출할 수 있는 가문이다. 청화가의 반열에 오를 수 있는 가문은 후지와라 북가의 적류인 한산원류의 구조가, 니조가, 고노에가, 이치조가, 다카쓰카사가의 다섯 가문뿐이다. 이들 다섯 가문을 '오섭가'라고 부른다. |
2. 성립 과정
고산조 천황 이후[1], 섭관가가 외척 지위를 잃고, 대신 외척이 된 가계들이 청화가의 원형을 만들었다. 청화가에 해당하는 가격은 이미 원정기(院政期)에 성립되었다. 청화가는 대신(大臣)・대장(大将)으로 승진할 수 있었고, "딸이 황후가 될 자격이 있다"는 점이 중요했다.
에도 시대에는 셋케 중 하나인 이치조 가문에서 분가한 다이고 가문과 오기마치 천황의 손자인 하치조노미야 도시히토의 아들 히로하타 다다유키가 신적강하하여 가문을 일으킨 히로하타 가문이 추가되었다.
"7청화"는 중세를 거치면서 여러 가문이 단절되거나 가격을 잃은 결과, 최종적으로 7가문만 남은 것을 의미하며, 처음부터 가계가 고정된 것은 아니었다. (예: 후지와라 북가(藤原北家) 간인류(閑院流) 산계가(山階家)・동원가(洞院家), 무라카미 겐지(村上源氏) 겐후사류(顕房流) 토어문가(土御門家)・굴천가(堀川家))
도요토미 정권 하에서는 오대노 (도쿠가와, 모리, 소조천가, 전전가, 우희다, 상삼가)도 청화가와 동등한 취급(무가 청화가)을 받았다.
3. 승진 과정
3. 1. 가마쿠라 시대부터 아즈치모모야마 시대
좌·우 근위대장·대신을 겸임하며, 내대신·우대신·좌대신을 거쳐 최고 태정대신까지 승진할 수 있었다. 가마쿠라 시대 초기에는 후세에 남은 칠청화와 청화의 가격을 유지했던 가문들은, 처음에는 참의에 임관된 후에 중납언, 대납언, 내·우·좌대신·태정대신까지 승진했다. 이후 섭가와 마찬가지로 참의를 거치지 않고 중납언에 임명되는 관례가 성립된 것은 무로마치 시대 초기(남북조 시대)였다.
3. 2. 에도 시대
에도 시대에는 종5위하시종을 시작으로[3] 근위권중장, 권중납언, 권대납언을 거쳐 우근위대장을 겸임하며 대신에 이르렀다.
다만, 에도 시대의 태정대신은 섭정·관백 경험자(섭가)에 한정되어 청화가에서는 나오지 않았다. 청화가의 극관은 사실상 좌대신이었지만, 에도 시대 통틀어 10례에 불과할 정도로 적었고, 노령의 당주가 명예적으로 임명된 경우뿐이었으며 재임 기간도 짧았다. 오이노미카도 쓰네미쓰는 불과 1일 동안 재임했고, 최장인 카잔인 사다요시도 1년 8개월이었다. 게다가 간엔 2년(1749년)의 다이고 후유히로 이후 막말까지 청화가의 좌대신은 나오지 않았다. 다른 시기에도 삼공을 섭가가 차지하는 예가 많았고, 더 나아가 섭가의 위신 확대로 인해 청화가의 대신은 평의에도 참가하지 않는 것이 선례였던 시기도 있었다. 에도 시대에는 청화가의 극관에 대해 섭관가 측은 좌대신, 청화가 측은 태정대신으로 인식하여 인식의 대립이 있었을 가능성도 지적되고 있다.
3. 3. 메이지 시대부터 화족령 폐지까지
1884년(메이지 17년) 화족령에 의해 세이가케 가문은 일률적으로 후작에 서임되었지만, 산조가는 산조 사네토미의 공적으로 인해 공작으로 서임되었다. 그 후, 사이온지가는 사이온지 긴모치의, 도쿠다이지가는 도쿠다이지 사네노리의 공적으로 인해 공작이 되었다.
4. 세이가케 목록
세이가케(清華家)는 공경의 가문 지위 중 하나로, 대신(大臣)으로 승진할 수 있는 가문을 말한다. 에도 시대에는 7개의 가문(7가)과 2개의 신가(新家)가 있었다.
구분 | 가문명 | 시조 | 가계 | 가업 | 봉록(에도 시대) | 가문 문장 |
---|---|---|---|---|---|---|
7가 | 구가 | 미나모토노 모로후사(源師房) | 무라카미 천황의 후손 | 피리 | 700석 | 구가린도(久我竜胆) |
산조 | 산조 사네요키(三条実行) | 후지와라 북가(藤原北家) 간인류(閑院流) | 피리, 장속(装束) | 469석 | 가라비시바나(唐菱花) | |
사이온지 | 사이온지 미치스에(西園寺通季) | 후지와라 북가 간인류 | 비파 | 597석 | 히다리미쓰토모에(左三つ巴) | |
도쿠다이지 | 도쿠다이지 사네요시(徳大寺実能) | 후지와라 북가 간인류 | 피리 | 약 410석 | 모코하나비시후센아야(木瓜花菱浮線綾) | |
가잔인 | 가잔인 이에타다(花山院家忠) | 후지와라 북가 모로자네류(師実流) | 생황(笙), 필도(筆道) | 약 750석 | 가키쓰바타비시(杜若菱) | |
오이노미카도 | 오오이노미카도 쓰네자네(大炊御門経実) | 후지와라 북가 모로자네류 | 필도(筆道), 와카(和歌), 와곤(和琴), 피리, 장속 | 약 400석 | 비시니카타바미(菱に片喰草) | |
이마데가와/기쿠테이 | 이마데가와 가네스에(今出川兼季) | 후지와라 북가 간인류, 사이온지 가문 서자 계통 | 비파 | 1655석 | 미쓰카에데(三つ楓) | |
신가 | 히로하타 | 다다유키 왕 | 고묘 천황의 황손, 오기마치 겐지(正親町源氏) | 약 500석 | 세 잎 국화 | |
다이고 | 다이고 후유모토(醍醐冬基) | 후지와라 북가 섭관류(摂関流), 이치조 가문 분가 | 약 312석 | 사가리후지(下り藤) |
7가(七家)는 무라카미 천황의 후손인 구가를 비롯하여, 후지와라 북가의 분파인 산조, 사이온지, 도쿠다이지, 가잔인, 오이노미카도, 이마데가와(기쿠테이) 가문이다.
신가(新家)는 에도 시대에 추가된 히로하타와 다이고 가문이다. 이 두 가문은 태정대신으로 승진한 예가 없어 7 청화보다 격이 낮게 여겨졌다.
4. 1. 7가 (七家)
세이가케(清華家)는 공경의 가문 지위 중 하나로, 대신(大臣)으로 승진할 수 있는 7개 가문을 말한다.가문명 | 시조 | 가계 |
---|---|---|
구가(久我) | 미나모토노 모로후사(源師房) | 무라카미 천황의 후손 |
산조(三条) | 산조 사네요키(三条実行) | 후지와라 북가(藤原北家) 간인류(閑院流) |
사이온지(西園寺) | 사이온지 미치스에(西園寺通季) | 후지와라 북가 간인류 |
도쿠다이지(徳大寺) | 도쿠다이지 사네요시(徳大寺実能) | 후지와라 북가 간인류 |
가잔인(花山院) | 가잔인 이에타다(花山院家忠) | 후지와라 북가 모로자네류(師実流) |
오이노미카도(大炊御門) | 오오이노미카도 쓰네자네(大炊御門経実) | 후지와라 북가 모로자네류 |
이마데가와(今出川)/기쿠테이(菊亭) | 이마데가와 가네스에(今出川兼季) | 후지와라 북가 간인류, 사이온지 가문 서자 계통 |
4. 1. 1. 산조 가(三条家)
후지와라 북가(藤原北家) 간인류(閑院流) 출신으로, 태정대신 후지와라 긴자네(藤原公実)의 아들 산조 사네요키(三条実行)가 시조이다.[5]가업은 피리와 장속(装束)이다. 에도 시대 봉록은 469석이며, 가문(家紋)은 가라비시바나(唐菱花)이다.
4. 1. 2. 사이온지 가(西園寺家)
후지와라 북가 간인류 출신으로, 후지와라노 긴자네의 차남인 사이온지 미치스에(1090년 ~ 1128년)를 시조로 한다. 미치스에의 어머니 미쓰코가 정실이었기 때문에 적자로 인정받았지만, 요절하여 형제 중에서도 관위가 가장 낮았다.[6] 4대손인 태정대신 사이온지 긴쓰네에 이르러 친막부파로서 조큐의 난 이후 권세를 누렸으며, 셋케로부터 외척의 지위와 간토모시쓰기의 세습직을 빼앗았다. 긴쓰네는 교토 북산에 씨족 사찰인 사이온지를 건립하였는데, 이것이 가문의 이름이 되었다.분가로는 도인(이후 단절), 이마데가와今出川|이마데가와일본어[6]와 우린케의 시미즈다니清水谷|시미즈다니일본어, 무로마치室町|무로마치일본어, 하시모토橋本|하시모토일본어, 오미야大宮|오미야일본어 등이 있다.
가업은 비파이며 에도 시대의 봉록은 597석이다. 가문은 히다리미쓰토모에(左三つ巴)이다.
4. 1. 3. 도쿠다이지 가(徳大寺家)
후지와라 북가 간인류의 분파이다. 후지와라노 긴자네의 셋째 아들이자 사다이진이었던 도쿠다이지 사네요시(徳大寺実能)를 시조로 한다. 도바 천황, 고시라카와 천황 치세에 지속적으로 후궁을 배출했으나 가마쿠라 시대 이후 쇠락하였다. 여러 가문 중에서도 특히 사이온지 가문과의 동족 의식이 강하여, 후일 메이지 시대의 정치가 사이온지 긴모치는 도쿠다이지 가문에서 태어나 사이온지 가문에 입양되어 대를 이었다.가업은 피리이며, 에도 시대의 봉록은 약 410석이었다. 가문의 문장은 모코하나비시후센아야(木瓜花菱浮線綾)이다.[5]
4. 1. 4. 구가 가(久我家)
무라카미 천황의 제8황자 도모히라 친왕(具平親王)의 아들이자 우대신(右大臣)이었던 미나모토노 모로후사(源師房)를 선조로 하는 무라카미 겐지의 직계 혈통이다. 모로후사는 간파쿠 후지와라노 미치나가의 사위였고, 그의 적자가 미치나가의 장남 후지와라노 요시미치의 양자가 되어 셋케와도 가까운 혈연 관계를 맺었다. 모로후사의 5세손인 내대신(内大臣) 미나모토노 미치치카(源通親)는 단고노 쓰보네(丹後局)와 짜고 당시의 간파쿠였던 구조 가네자네를 내쫓아 '미나모토 박륙(源博陸)'이라는 별명을 얻을 정도로 권세를 휘둘렀다.이후 구가 본가의 혈통은 오랫동안 겐지노쵸쟈(源氏長者)나 쥰나인(淳和院)・쇼가쿠인(奨学院) 양 학당을 겸임하는 등의 일을 가업으로 삼았으나, 무로마치 시대에 무가 출신 겐지인 아시카가 쇼군가에게 그 업무와 직책을 빼앗겼다. '구가'라는 명칭은 교토 서남쪽 야마시로노쿠니 구가 지역(현재의 교토시후시미구 구가)에 있던 '구가 수각(久我水閣)'에서 유래하였다.
분가로는 다이진케의 나카노인(中院), 우린케의 로쿠조(六条), 이와쿠라(岩倉), 지구사(千種), 히가시쿠제(東久世), 구제(久世), 우메다니(梅溪), 아타고(愛宕), 우에마쓰(植松) 등 총 9개 가문이 있다.
가업은 피리이며, 에도 시대의 봉록은 700석이다. 문장은 구가린도(久我竜胆)이다.[4]
4. 1. 5. 가잔인 가(花山院家)
후지와라 북가 모로자네류(師実流) 출신으로, 우다이진이었던 가잔인 이에타다(花山院家忠)를 시조로 한다.[7] 이에타다가 가잔 천황의 어소였던 가잔인(花山院)의 전령 역을 맡으면서 가잔인이라는 가명을 사용하게 되었다. 3대손인 다다마사(忠雅)는 당대의 실세였던 다이라노 기요모리와의 친척 관계를 통해 이례적으로 태정대신으로 승진하였다.가업은 생황(笙)과 필도(筆道)이다.[4] 에도 시대의 봉록은 약 750석이다. 가문의 문장은 가키쓰바타비시(杜若菱)이다. 분가로는 우린케의 나카야마가(中山), 노노미야가(野宮), 이마조가(今城)가 있다.
4. 1. 6. 오이노미카도 가(大炊御門家)
후지와라 북가 모로자네류(師実流) 출신으로, 가잔인 이에타다(花山院家忠)와 마찬가지로 후지와라노 모로자네(藤原師実)의 아들인 오오이노미카도 쓰네자네(大炊御門経実)를 시조로 한다. 오이노미카도(大炊御門) 북쪽, 마데노코지(万里小路) 동쪽에 저택이 있어서 가문의 이름이 되었다.[4] 쓰네자네는 곤다이나곤(権大納言)에 그쳤지만, 그의 아들 쓰네무네(経宗)는 동복 누이의 아들 니조 천황의 외숙으로서 세력을 떨치며 좌대신으로 승진하여 세이가케(清華家)의 가문 지위를 확보했다.가업은 필도(筆道), 와카(和歌), 와곤(和琴), 피리, 장속(装束)이다.[4] 에도 시대의 봉록은 약 400석이다.[4] 가문의 문장은 비시니카타바미(菱に片喰草)이다.[4] 근대 작위는 후작이다.[4]
4. 1. 7. 이마데가와 가(今出川家) / 기쿠테이 가(菊亭家)
후지와라 북가 간인류의 분파로 사이온지 가문의 서자 계통이다. 가마쿠라 시대의 태정대신이었던 사이온지 사네카네의 아들, 좌대신 이마데가와 가네스에가 분가하여 이마데가와에 거처를 마련하면서 가명이 유래되었다. 메이지 유신 이후에는 성의 통일을 위해 기쿠테이를 성씨로 하였다.[6]가업은 비파이며 에도 시대의 봉록은 1655석이다. 가문은 미쓰카에데(三つ楓)이다.
4. 2. 신가 (新家)
에도 시대에는 기존의 7개 청화가 외에 2개의 신가(新家)가 추가되었다. 이 두 가문은 태정대신으로 승진한 예가 없어, 기존의 7 청화보다 격이 낮게 여겨졌다. 근대 시기 작위는 모두 후작이었다.4. 2. 1. 히로하타 가(広幡家)
오기마치 겐지(正親町源氏) 직계 가문이다. 고묘 천황의 황손이자 하치조노미야 토모히토 친왕의 셋째 아들인 다다유키 왕(1623년 - 1669년)이 신적강하하여 가문을 일으켰다.[5] 다다유키는 처음에는 오와리 번으로 가서 무가가 되었지만, 후에 교토로 돌아와 대납언으로 진출했다.가문의 봉록은 약 500석이며, 가문의 문장은 세 잎 국화이다.[5]
4. 2. 2. 다이고 가(醍醐家)
후지와라 북가 섭관류(摂関流) 출신으로, 에도 시대에 이치조 가문(一条家)에서 분가하였다. 곤다이나곤 다이고 후유모토(醍醐冬基, 1648년 ~ 1697년)가 초대 당주이다.항목 | 내용 |
---|---|
봉록 | 약 312석 |
가문 문장 | 사가리후지(下り藤, 내려오는 등나무) |
근대 작위 | 후작 |
참조
[1]
문서
藤原氏|藤原朝臣(藤原北家)以外で大臣・大将となった例
[2]
간행물
中世前期における清華の家格とその昇進
文化学年報
2012
[3]
서적
近世の摂家と朝幕関係
吉川弘文館
2018
[4]
웹사이트
御祭神・由緒 | 三峯神社
https://www.mitsumin[...]
[5]
문서
이후 사가(嵯峨)로 개칭하였다.
[6]
문서
기쿠테이(菊亭)라고도 한다.
[7]
문서
혹은 히가시이치조인(東一条院)으로도 불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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