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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리알라 학술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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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카리알라 학술회(AKS)는 1922년 핀란드에서 설립된 민족주의 단체로, 핀란드 민족주의와 대(大)핀란드주의를 추구했다. 윌슨의 14개조 평화 원칙과 핀란드 내전의 반공주의 정서에 영향을 받았으며, 소련의 카렐리아 지역을 획득하고 핀란드계 민족을 해방하는 것을 목표로 삼았다. AKS는 핀란드어 사용을 장려하고, 극우 정당인 애국인민운동과 연대하는 등 국내 정치에도 관여했다. 제2차 세계 대전 이후 파시스트 단체로 규정되어 1944년 해산되었지만, 학계, 종교계, 정계 등 핀란드 사회 각 분야에 영향을 미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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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리알라 학술회
개요
명칭카리알라 학술회
로마자 표기Hakateeminen Karjala-Seura (AKS)
별칭AKS
창립1922년 2월 26일
해산1944년 가을
이념대핀란드주의
민족주의
반공주의
반사회민주주의
반자유주의
본부헬싱키
역사
창립 배경1918년에서 1920년 사이의 카리알라 지역 원정 실패 후, 학생 주도의 카리알라에 대한 지지 확산
주요 활동대핀란드 건설 운동
핀란드화 정책 옹호
소련에 대한 적대감 고취
반공주의 운동
반사회민주주의 운동
해산 이유계속 전쟁 종결 후 소련의 요구에 따라 해산
조직 및 활동
구성원주로 대학생, 학계 인사
활동 방식강연회, 출판, 시위, 정치 로비, 무력 충돌 옹호
영향력1930년대 핀란드 정치 및 사회에 큰 영향력 행사
관련 단체청흑단 (Lapuan liike), 애국인민운동 (IKL) 등 극우 단체와 연계
주요 인물위리외 루오마 (Yrjö Ruoma), 에르키 라이코넨 (Erkki Räikkönen)
이념적 특징
대핀란드주의핀란드 민족의 통일된 국가 건설 주장
민족주의핀란드 민족의 우월성 강조, 외국 문화 배척
반공주의소련과 공산주의에 대한 강한 적대감 표출
반사회민주주의사회민주주의 세력에 대한 비판 및 견제
반자유주의자유주의적 가치에 대한 거부감 표출
논란과 비판
폭력적인 성향정치적 목적 달성을 위해 폭력 사용 옹호
인종차별적인 성향소수 민족에 대한 차별 및 혐오 발언
민주주의에 대한 위협민주적인 절차 무시 및 권위주의적인 통치 옹호
해산 이후
영향핀란드 사회에 극우적 이념 확산에 기여
재평가역사적 관점에서 비판적인 시각으로 재평가

2. 이념적 기원

요한 빌헬름 스넬만은 19세기 펜노만 운동의 창시자로, 강력한 국민 국가 건설과 핀란드어를 핀란드인의 문화 생활 중심에 두어야 한다고 강조했다. 당시 핀란드에서는 스웨덴어가 지배적인 언어였기 때문에, 스넬만의 주장은 핀란드 민족주의 형성에 큰 영향을 미쳤다.

카리알라 학술회(AKS)의 민족주의적 이념은 윌슨의 14개조 평화 원칙에서의 민족 자결 논의에 근거를 두고 있다. 핀란드 내전의 경험은 당시 민족주의 서클에 깊은 반공 감정을 심어주었으며, AKS가 사용한 슬로건 중 하나는 ''"Pirua ja ryssää vastaan!"''(악마와 러시아에 맞서라!)였다. 여기서 악마는 AKS의 주된 적이었던 사회주의자나 공산주의자를 지칭했다.

1922-1940년 학술 카리알라 학회의 서약 게시판

2. 1. 요한 빌헬름 스넬만의 영향

요한 빌헬름 스넬만은 19세기 펜노만 운동의 창시자로, 강력한 국민 국가 건설과 핀란드어를 핀란드인의 문화 생활 중심에 두어야 한다고 강조했다. 당시 핀란드에서는 스웨덴어가 지배적인 언어였기 때문에, 스넬만의 주장은 핀란드 민족주의 형성에 큰 영향을 미쳤다.

카리알라 학술회(AKS)의 민족주의적 이념은 윌슨의 14개조 평화 원칙에서의 민족 자결 논의에 근거를 두고 있다. 핀란드 내전의 경험은 당시 민족주의 서클에 깊은 반공 감정을 심어주었으며, AKS가 사용한 슬로건 중 하나는 ''"Pirua ja ryssää vastaan!"''(악마와 러시아에 맞서라!)였다. 여기서 악마는 AKS의 주된 적이었던 사회주의자나 공산주의자를 지칭했다.

2. 2. 핀란드 내전과 반공주의

핀란드 내전(1918)은 핀란드 사회에 깊은 반공주의 정서를 남겼다. 이러한 분위기 속에서 카리알라 학술회(AKS)는 "''Pirua ja ryssää vastaan!''"(악마와 러시아인에 맞서!/Pirua ja ryssää vastaan!fi)라는 구호를 내세우며 반공주의를 주요 이념으로 삼았다. 여기서 악마는 사회주의자와 공산주의자를 지칭했다. AKS의 이념은 요한 빌헬름 스넬만의 철학에 뿌리를 두고 있었으며, 우드로 윌슨 대통령의 14개조 평화 원칙에서 비롯된 민족 권리 논쟁의 영향을 받았다.

2. 3. 윌슨의 14개조 평화 원칙

제1차 세계 대전 이후 미국의 우드로 윌슨 대통령이 제시한 14개조 평화 원칙 중 민족 자결주의는 AKS의 민족주의 이념 형성에 영향을 주었다. 또한 핀란드 내전의 경험은 당시 민족주의 서클에 깊은 반공 감정을 심어주었다. AKS가 사용한 슬로건 중 하나는 ''"Pirua ja ryssää vastaan!"''(악마와 러시아에 맞서라!)였는데, 악마는 AKS의 주된 적이었던 사회주의자나 공산주의자를 지칭했다.

3. 카렐리야 문제와 민족주의 활동

AKS의 창립자 다수는 카렐리안 전쟁 참전 용사였으며, 소련령 동카렐리아의 카렐리아어 사용 인구의 어려운 상황을 알고 있었다. 카렐리아인들은 핀란드 ''헤이모''(민족)의 일부로 여겨졌고, 그들의 운명은 AKS에게 매우 중요했다. AKS는 소비에트 러시아로부터 동카렐리아를 획득하고 카렐리아 동족을 해방시키는 것을 주요 목표로 삼았다. 이 목표를 달성하기 위한 활동은 주로 대중의 관심을 유지하기 위한 선전 활동을 통해 이루어졌다.

AKS는 소련 러시아의 핀족 소수 민족과 난민을 지원하고, 스웨덴 북부 및 노르웨이의 핀란드어 사용 소수 민족을 돕기 위한 문화 활동을 장려했다. 또한 핀란드와 에스토니아 간의 우호 관계 증진을 위해 노력했다.

3. 1. 동카렐리야 문제

AKS의 창립자 다수는 카렐리안 전쟁 참전 용사였으며, 소련령 동카렐리아의 카렐리아어 사용 인구의 어려운 상황을 알고 있었다. 카렐리아인들은 핀란드 ''헤이모''(민족)의 일부로 여겨졌고, 그들의 운명은 AKS에게 매우 중요했다. AKS는 소비에트 러시아로부터 동카렐리아를 획득하고 카렐리아 동족을 해방시키는 것을 주요 목표로 삼았다. 이 목표를 달성하기 위한 활동은 주로 대중의 관심을 유지하기 위한 선전 활동을 통해 이루어졌다.

AKS는 소련 러시아의 핀족 소수 민족과 난민을 지원하고, 스웨덴 북부 및 노르웨이의 핀란드어 사용 소수 민족을 돕기 위한 문화 활동을 장려했다. 또한 핀란드와 에스토니아 간의 우호 관계 증진을 위해 노력했다.

3. 2. 대(大)핀란드주의

카리알라 학술회(AKS)의 창립자 다수는 카렐리안 전쟁 참전 용사로, 소련령 동카렐리아의 카렐리아어 사용자들이 어려운 상황에 처해 있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카렐리아인들은 핀란드 ''헤이모''(민족)의 일부로 여겨졌고, 그들의 운명은 AKS에게 매우 중요했다. AKS는 핀란드와 동카렐리야를 통합하여 "대(大)핀란드"를 건설하는 것을 목표로 했다. 이는 핀란드 민족주의의 확장된 형태로, 주변 핀란드계 민족 거주 지역까지 포함하는 개념이었다.

AKS는 소련 러시아로부터 동카렐리아를 획득하고 카렐리아 동족을 해방시키는 것을 주요 목표로 삼았다. 이 목표를 달성하기 위한 활동은 주로 대중의 관심을 유지하기 위한 선전 활동을 통해 이루어졌다.

AKS는 또한 소련 러시아의 핀족 소수 민족과 그곳에서 온 난민을 지원했으며, 스웨덴 북부 및 노르웨이의 핀란드어 사용 소수 민족을 돕기 위한 문화 활동을 장려했다. 그들은 새롭게 독립한 핀란드와 에스토니아 간의 우호 관계를 증진시키려 노력했으며, 헝가리와의 관계 증진에도 노력을 기울였다.

3. 3. 선전 활동

카리알라 학술회(AKS)는 대중의 관심을 동카렐리야 문제에 집중시키기 위해 다양한 선전 활동을 펼쳤다.[1] AKS의 설립자들은 대부분 카렐리야 전쟁 참전 경험이 있었으며, 소비에트 러시아 영토 내의 카렐리아어 사용자들이 처한 어려움을 알고 있었다.[2] 카렐리아인들은 핀란드 민족의 일부로 여겨졌으며, 그들의 운명은 AKS에게 매우 중요한 문제였다. AKS는 소비에트 러시아로부터 동카렐리야를 획득하고 카렐리아 민족을 해방시키는 것을 주요 목표로 삼았다.

AKS 선서.


AKS 회원들은 검은 깃발 앞에서 선서를 했다. 1923년부터 선서는 연 2회, 핀란드 정체성의 날과 독립 기념일에 거행되었다. 1924년 봄에는 깃발 외에도 AKS의 두 번째 주요 의식이 된 선서가 도입되었다.[1]

AKS 검은 깃발 앞에서 행해진 선서 내용은 다음과 같다.[2]



나는 나의 조국, 핀란드 민족 각성, 카렐리아와 잉그리아, 대핀란드를 위해 나의 일과 생명을 바치겠다고, 나의 깃발 아래에서, 그리고 나에게 신성하고 소중한 모든 것을 걸고 맹세합니다. 내가 한 위대한 신을 믿는 것처럼, 나는 대핀란드와 그 위대한 미래를 믿습니다.



검은색 AKS 깃발에는 총알이 박혀 있었는데, 이 깃발은 레폴라의 렌스만 보비 시벤(아우누스 원정 참조)을 살해한 것과 동일했다. 시벤은 AKS의 순교자가 되었으며, 훗날 독일의 호르스트 베셀과 유사한 인물 숭배가 이루어졌다. 시벤은 카렐리아 문제가 자신의 생명보다 더 중요하다는 것을 AKS 사람들에게 보여주는 본보기였다.[1]

AKS는 소비에트 러시아의 핀란드계 소수 민족 및 난민에 대한 조직적인 지원과, 북스웨덴과 노르웨이의 핀란드어 사용 소수 민족을 지원하는 문화적 노력을 촉진했다. 또한 핀란드와 에스토니아 간의 우호 관계를 증진하려는 노력을 기울였다.

3. 4. 핀란드계 소수민족 지원

카리알라 학술회(AKS)는 소련 내 핀족 소수 민족과 난민을 지원하고, 스웨덴 북부 및 노르웨이의 핀란드어 사용 소수 민족을 위한 문화 활동을 지원했다. AKS 창립자 다수는 카렐리안 전쟁 참전 용사로, 소련령 카렐리아의 카렐리아어 사용 인구의 어려운 상황을 인지하고 있었다. 카렐리아인들은 핀란드 ''헤이모''(민족)의 일부로 여겨졌고, AKS는 이들의 운명을 중요하게 여겼다. AKS는 소련 러시아로부터 동카렐리아를 획득하고 카렐리아 동족을 해방시키는 것을 주요 목표로 삼았으며, 이를 위해 대중 선전 활동을 펼쳤다. 또한, 핀란드와 에스토니아 간 우호 관계 증진을 위해 노력했으며, 헝가리와의 관계 증진에도 노력을 기울였다.

4. 국내 정책

카리알라 학술회(AKS)는 국내적으로 군비 확장과 사회주의자에 대한 엄격한 제한을 강력하게 지지했지만, 동시에 국가 공동체의 이익을 위해 노동 계급의 처우 개선의 필요성을 강조했다.[3][5] 또한, 특히 대학교와 국가 관료 기구에서 핀란드어가 국내에서 제1 언어가 되도록 권리를 옹호했다.[3] 처음에는 이 단체는 민주주의에 대해 모호한 입장을 보였지만, 빌호 헬라넨의 의장직 하에서 이 개념에 반대하게 되었다.[3][5]

1930년대에 AKS는 극우 애국 인민 운동 정당의 동맹이었다.[3][5] AKS는 또한 비밀 결사인 비한 벨예트와 긴밀한 관계를 유지했다.[3][5] 일부 저자는 비한 벨예트가 실제로 AKS 내부의 단체이며 별도의 조직이 아니라고 주장하지만, 이에 대한 증거는 많지 않다.[5]

4. 1. 군비 확장과 반(反)사회주의

카리알라 학술회(AKS)는 외부 위협에 대처하기 위해 강력한 군대 육성을 지지했으며, 국내 사회주의 세력을 억압해야 한다고 주장했다.[3][5] 그러나 동시에 민족 공동체의 이익을 위해 노동자 계급의 지위 향상이 필요하다고 강조했다.[3][5] 1930년대에 AKS는 극우 정당인 애국 인민 운동의 동맹이었다.[3][5] 또한 비한 벨예트라는 비밀 결사와 긴밀한 관계를 유지했는데,[3][5] 일부 저자는 비한 벨예트가 실제로는 AKS 내부 조직이었다고 주장하지만, 확실한 증거는 없다.[5]

4. 2. 핀란드어 진흥

AKS는 핀란드어를 핀란드의 제1 언어로 만들기 위해 노력했다.[3][5] 특히 대학교와 국가 관료 기구에서 핀란드어 사용을 확대해야 한다고 주장했다.[3][5]

4. 3. 민주주의에 대한 입장 변화

카리알라 학술회(AKS)는 초기에는 민주주의에 대해 양면적인 태도를 보였다.[3][5] 국내적으로는 강화된 군대와 사회주의자에 대한 엄격한 제한을 지지했지만, 국가 공동체의 이익을 위해 노동 계급의 처우 개선 필요성을 강조하기도 했다.[3] 또한 대학교와 국가 관료 기구에서 핀란드어가 제1 언어가 되도록 권리를 옹호했다.[3]

그러나 빌호 헬라넨 의장 시기에는 민주주의에 반대하는 입장을 분명히 했다.[3][5] 1930년대에는 극우 애국 인민 운동 정당의 동맹이었으며, 비밀 결사인 비한 벨예트와 긴밀한 관계를 유지했다.[3][5] 일부에서는 비한 벨예트가 AKS 내부 조직이라고 주장하지만, 확실한 증거는 부족하다.[3][5]

5. 극우 단체와의 관계 및 유산

1930년대 카리알라 학술회(AKS)는 극우 정당인 애국인민운동(IKL)과 동맹 관계를 맺었다. 이는 AKS의 극단적인 민족주의 성향을 보여주는 사례이다. AKS는 비밀 결사 조직인 비한 벨예트(Vihan Veljet)와도 연관되어 있었다.

5. 1. 애국인민운동(IKL)과의 협력

1930년대 카리알라 학술회(AKS)는 극우 정당인 애국인민운동(IKL)과 동맹 관계를 맺었다. 이는 AKS의 극단적인 민족주의 성향을 보여주는 사례이다.

5. 2. 비한 벨예트(Vihan Veljet)와의 관계

5. 3. 제2차 세계 대전 이후 해산

제2차 세계 대전 종전 후, 카리알라 학술회(AKS)는 "파시스트적"이라는 낙인이 찍혀 연합국 통제 위원회의 명령에 따라 1944년 9월 공식적으로 해산되었다.[4] AKS의 기록 보관소는 원래 헬싱키 중심부에 있는 새로운 학생회관에 위치해 있었으나, 당시에는 중요하지 않다고 여겨져 회원들에 의해 숨겨지거나 파괴되었다.[4] 여기에는 AKS 활동 초기 단계와 관련된 현재의 서신, 공개 자료, 필사 에세이, 저술 등이 포함되어 있었다.[4]

주요 전직 회원으로는 상당수의 학자, 주교, 기업 지도자, 장군, 정치인(예: 우르호 케코넨 대통령)이 있다.[8] 1939–1940년1941–1944년 동안 핀란드 육군의 많은 장교가 이 학회의 회원이었다.[8] 1966년까지 AKS의 전직 회원 41명이 핀란드 육군에서 고위 장교의 지위를 가지고 있었고, 1968년에는 핀란드 루터교회의 9명의 주교 중 7명이 AKS의 전직 회원이었다.[8] 리스토 알라푸로에 따르면, 1970년대까지 AKS는 주로 핀란드의 문화 생활에 영향을 미쳤다고 한다.[9]

5. 4. 유산과 영향

카리알라 학술회(AKS)는 제2차 세계 대전 종전 후 "파시스트적"이라는 비판을 받고 연합국 통제 위원회의 명령에 따라 1944년 9월 공식적으로 해산되었다.[4] AKS의 기록 보관소는 원래 헬싱키 중심부에 있는 새로운 학생회관에 있었으나, 당시에는 중요하지 않다고 여겨져 회원들에 의해 숨겨지거나 파괴되었다. 여기에는 AKS 활동 초기 단계와 관련된 서신, 공개 자료, 필사 에세이, 저술 등이 포함되어 있었다.[4]

AKS는 해산되었지만 핀란드 사회 각 분야에 많은 영향을 미쳤다. 학계, 종교계, 정계, 군부 등 다양한 분야에서 AKS 출신 인사들이 활동했다. 주요 전직 회원으로는 상당수의 학자, 주교, 기업 지도자, 장군, 정치인(우르호 케코넨 대통령)이 있다.[8] 1939–1940년1941–1944년 동안 핀란드 육군의 많은 장교가 이 학회의 회원이었다.[8] 1968년에는 핀란드 루터교회의 9명의 주교 중 7명이 AKS의 전직 회원이었다는 사실은 이 단체의 영향력을 보여준다.[4] 1970년대까지 AKS는 주로 핀란드의 문화 생활에 영향을 미쳤다고 평가받는다.[4]

참조

[1] 서적 Me tahdoimme suureksi Suomenmaan: Akateemisen Karjala-Seuran historia. 1, Tausta, organisaatio, aatteet ja asema yhteiskunnassa 1922–1939 WSOY 2004
[2] 서적 Neljätuhatta veljestä, sataneljä elämäntarinaa WSOY 1991
[3] 서적 Biographical Dictionary of the Extreme Right Since 1890 1990
[4] 간행물 Problems of Finnish extreme right-wing organisations of Finland's first republic https://cyberleninka[...] 2017
[5] 서적 Biographical Dictionary of the Extreme Right Since 1890 1990
[6] 간행물 Problems of Finnish extreme right-wing organisations of Finland’s first republic https://cyberleninka[...] 2017
[7] 간행물 Problems of Finnish extreme right-wing organisations of Finland’s first republic https://cyberleninka[...] 2017
[8] 간행물 Problems of Finnish extreme right-wing organisations of Finland’s first republic https://cyberleninka[...] 2017
[9] 간행물 Problems of Finnish extreme right-wing organisations of Finland’s first republic https://cyberleninka[...] 20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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