콘서트 포 방글라데시
"오늘의AI위키"의 AI를 통해 더욱 풍부하고 폭넓은 지식 경험을 누리세요.
1. 개요
"콘서트 포 방글라데시"는 1971년 방글라데시 독립 전쟁 중 발생한 난민들을 돕기 위해 조지 해리슨이 주도하여 기획된 자선 콘서트이다. 라비 샹카르의 제안으로 시작되어, 밥 딜런, 에릭 클랩튼 등 당대 최고의 뮤지션들이 참여하여 뉴욕 매디슨 스퀘어 가든에서 두 차례 공연을 펼쳤다. 이 콘서트는 앨범 및 영화로 제작되어 기금을 모금했으며, 이후 록 자선 행사의 모델이 되었다. 콘서트의 성공은 전 세계적인 공감대를 형성하여 유니세프에 대한 기부와 자원봉사 참여를 이끌어냈으며, 1972년 그래미 올해의 앨범상을 수상했다.
더 읽어볼만한 페이지
- 뉴욕주의 음악제 - 우드스톡 페스티벌
우드스톡 페스티벌은 1969년 미국에서 열린 대규모 야외 음악 축제이며, 1960년대 반문화를 상징하고 40만 명의 관객이 모여 평화와 사랑을 외쳤으며, 영화와 음반 발매를 통해 상업적 성공을 거두었다. - 1971년 음악 - 유로비전 송 콘테스트 1971
1971년 아일랜드 더블린에서 개최된 유로비전 송 콘테스트에는 총 18개국이 참가, 모나코의 세베린이 우승했으며 투표 방식 변경과 디지털 스코어 보드 도입이 있었다. - 밥 딜런 - 관계의 종말
샘 페킨파 감독의 서부 영화 《관계의 종말》은 보안관이 된 팻 개릿이 친구 빌리 더 키드를 쫓는 이야기로, 제임스 코번과 크리스 크리스토퍼슨이 주연을 맡았으며 밥 딜런이 음악을 담당했다. - 밥 딜런 - 제스 딜런
제스 딜런에 대한 정보가 현재 제공되지 않아 위키백과 페이지의 도입부를 작성할 수 없으며, 페이지 제목에 대한 정의나 핵심 정보 제시가 불가능합니다.
콘서트 포 방글라데시 | |
---|---|
콘서트 정보 | |
콘서트 명칭 | The Concert for Bangla Desh (콘서트 포 방글라 데시) |
주최 | 조지 해리슨, 라비 샹카르 |
위치 | 매디슨 스퀘어 가든, 뉴욕 시, 미국 |
날짜 | 1971년 8월 1일 |
장르 | 록 음악 |
음반 정보 | |
음반 제목 | バングラデシュ・コンサート (방글라데시 콘서트) |
아티스트 | Various Artists (다양한 아티스트) |
발매일 (초판) | 1971년 12월 20일 |
발매일 (디지털 리마스터) | 2005년 10월 24일 |
녹음일 | 1971년 8월 1일 |
장르 | 록 |
길이 (초판) | 102분 57초 |
길이 (현행판) | 99분 32초 |
레이블 (초판) | CBS 소니 레코드 |
레이블 (현행판) | 애플/소니 뮤직 다이렉트 |
프로듀서 | 필 스펙터, 조지 해리슨 |
조지 해리슨 이전 음반 | 올 싱스 머스트 패스 (1970년) |
조지 해리슨 다음 음반 | 리빙 인 더 머티리얼 월드 (1973년) |
2. 배경
1970년 11월 보라 사이클론과 1971년 방글라데시 독립 전쟁으로 인해 발생한 대량의 동파키스탄 난민의 참상을 시타르 연주자 라비 샹카르가 조지 해리슨에게 호소했다.[187]
당시 런던의 ''선데이 타임스''는 파키스탄 언론인 앤서니 마스카렌하스의 기사를 통해 방글라데시 학살의 참상을 폭로했다.[20][21]
해리슨은 방글라데시 콘서트 조직에 "3개월"을 소요했다고 언급했는데, 이는 4월 말부터 노력이 시작되었음을 시사한다.[23][24] 콘서트 개최(1971년 8월 1일) 5~6주 전인 1971년 6월 마지막 주에 이 프로젝트가 본격적으로 시작된 것으로 알려져 있다.[10][13][25]
2. 1. 방글라데시 독립 전쟁과 난민 문제
1971년 방글라데시 독립 전쟁 동안 동파키스탄이 독립 국가인 방글라데시가 되기 위해 고군분투하면서 정치적, 군사적 혼란과 관련된 잔혹 행위로 인해 대규모 난민 문제가 발생하여[5] 약 1천만 명의 이재민이 인접국인 인도로 쏟아져 들어갔다.[6] 동파키스탄은 최근 보라 사이클론으로 인해 파괴되었고, 벵골인의 절박한 상황은 그해 3월 폭우와 홍수가 이 지역에 닥치면서 더욱 악화되어[7] 인도적 재앙을 위협했다.[8][9] 당시 이용 가능한 수치를 인용하여, ''롤링 스톤'' 기사는 1970년 11월 사이클론으로 최대 50만 명의 벵골인이 사망했고, 파키스탄 군의 이후 탐색 작전 하의 학살로 최소 25만 명의 민간인이 사망했다고 "가장 보수적인 추산"을 인용해 주장했다.[10] 캘커타로의 대량 탈출 이후, 난민들은 기아와 콜레라와 같은 질병의 발생에 직면하면서 새로운 위협에 닥쳤다.[11][12]자신의 고향과 친척들에게 영향을 미치는 상황에 충격을 받은[7][8] 벵골 음악가 라비 샹카르는 1971년 초 조지 해리슨에게 이 문제를 처음 알렸다.[13][14]
2. 2. 라비 샹카르와 조지 해리슨의 만남
1971년 방글라데시 독립 전쟁 당시 동파키스탄이 독립 국가인 방글라데시가 되기 위해 고군분투하면서, 정치적, 군사적 혼란과 관련된 잔혹 행위로 인해 대규모 난민 문제가 발생하여[5] 약 1천만 명의 이재민이 인접국인 인도로 쏟아져 들어갔다.[6] 동파키스탄은 최근 보라 사이클론으로 인해 파괴되었고, 벵골인의 절박한 상황은 그해 3월 폭우와 홍수가 이 지역에 닥치면서 더욱 악화되어[7] 인도적 재앙을 위협했다.[8][9]자신의 고향과 친척들에게 영향을 미치는 상황에 충격을 받은[7][8] 벵골 음악가 라비 샹카르는 1971년 초 클라우스 보어만의 회고에 따르면 프리어 파크에서의 저녁 식사를 통해 그의 친구 조지 해리슨에게 이 문제를 처음 알렸다.[13][14] 1971년 4월, 샹카르와 해리슨은 로스앤젤레스에서 영화 ''라가''의 사운드트랙 작업을 하고 있었는데,[7] 해리슨은 그 과정에서 "미스 오델"이라는 곡을 써서 구호품인 서방의 쌀 수송이 "봄베이로 가는 길에서 길을 잃"는 등 인도 당국의 부패에 대해 언급했다.[15] 이후 해리슨은 배드핑거의 앨범 ''스트레이트 업''을 제작하고 존 레논의 ''이매진'' 세션에 참여하기 위해 영국으로 돌아갔으며[16][17], 샹카르가 신문과 잡지 스크랩을 통해[18] 계속 소식을 전했다. 해리슨은 6월 말에 ''라가'' 앨범을 마무리하기 위해 로스앤젤레스로 돌아왔다.[9][19] 절망에 빠진 샹카르는 고통을 완화하기 위해 도움을 요청하기 위해 해리슨에게 접근했다.[6][22]
3. 콘서트 준비
1971년, 조지 해리슨은 시타르 스승인 라비 샹카르로부터[187] 전년 11월 벵골 지방을 강타한 1970년 보라 사이클론과 같은 해 3월에 발발한 방글라데시 독립 전쟁으로 인해 발생한 대규모 동파키스탄 난민의 참상을 전해 들었다.[188] 해리슨과 샹카르는 8월 1일 뉴욕 매디슨 스퀘어 가든에서 두 차례의 콘서트를 열기로 했다.
인도 점성가는 8월 초를 콘서트 개최의 좋은 시기로 조언했고,[35] 상황이 전개되면서, 그달의 첫째 날인 일요일은 매디슨 스퀘어 가든을 그렇게 짧은 기간 안에 이용할 수 있는 유일한 날이었다.[23]
7월 중순경, "조지 해리슨 앤 프렌즈"의 콘서트가 뉴욕 타임스의 뒷면에 작은 광고를 통해 발표되었다.[6] 티켓은 순식간에 매진되었고, 두 번째 공연이 발표되었다.[45][56]
해리슨과 더 밴드의 친분으로 조나단 태플린이 제작 매니저를 맡았고, 칩 몽크가 조명을 담당했다.[23] 인근 레코드 플랜트의 게리 켈그렌이 콘서트 녹음을 위해 투입되었고, 필 스펙터가 감독했으며,[8] 소울 스위머를 중심으로 행사의 촬영을 담당했다.[23] 공식 콘서트 사진 작가는 톰 윌키스와 배리 페인스타인이었다.[74]
3. 1. 초기 기획
샹카르는 원래 자선 콘서트를 통해 25000USD를 모금하는 것이 목표였고, 배우 피터 셀러스가 사회자를 맡을 수도 있었다.[11][18][24] 해리슨이 참여하고 비틀즈의 애플 코어를 통해 음반과 영화를 출시할 수 있게 되면서, 이 아이디어는 서양 록과 인도 고전 음악을 혼합한 스타들이 출연하는 음악 행사로 발전했으며, 이 행사는 미국에서 가장 권위 있는 장소인 뉴욕의 매디슨 스퀘어 가든에서 열리게 되었다.[9][27][35][26]음악 사업 관리자이자 전 애플 직원인 크리스 오델에 따르면, 해리슨은 샹카르와 통화한 후 이 개념이 확정되자 아내 패티 보이드와 함께 가능한 출연진에 대해 열정적으로 이야기하기 시작했다.[28] 링고 스타, 레논, 에릭 클랩튼, 레온 러셀, 짐 켈트너, 보어만, 빌리 프레스턴과 배드핑거가 이 초기 브레인스토밍에서 언급되었다.[28]
해리슨은 로스앤젤레스의 니콜스 캐년에 임대한 집에서 지역 음악가들에게 연락을 취하기 시작했고,[30] 무엇보다 밥 딜런의 참여를 확보하고자 했다.[31][32] 해리슨이 가장 먼저 지목한 이름들은 거의 모두 즉시 참여했고,[24] 테네시주 멤피스의 음악가 돈 닉스는 백 보컬 그룹을 조직하는 데 동의했다.[33][34] 현지 인도 점성가는 8월 초를 콘서트 개최의 좋은 시기로 조언했고,[35] 상황이 전개되면서, 그달의 첫째 날인 일요일은 매디슨 스퀘어 가든을 그렇게 짧은 기간 안에 이용할 수 있는 유일한 날이었다.[23]
7월 첫째 주쯤,[36] 해리슨은 로스앤젤레스 스튜디오에서 공동 프로듀서 필 스펙터와 함께 자신이 직접 작곡한 곡 "방글라 데시"를 녹음하고 있었다.[37] 이 곡의 첫 번째 절은 샹카르가 해리슨에게 도움을 요청하는 내용을 담고 있으며, "''내 친구는 눈에 슬픔을 담고 내게 왔지 / 그는 조국이 죽기 전에 도움을 원한다고 말했지''"라는 가사는 유엔 사무총장 코피 아난이 나중에 이 대의의 근본적인 인간적 측면으로 인정한 지속적인 이미지를 제공했다.[39]
해리슨은 런던에서 배드핑거와 만나 ''스트레이트 업'' 작업을 중단해야 한다고 설명한 후,[26][40] 7월 13일 뉴욕으로 날아가 레논을 만났다.[41] 7월 중순경,[42] 로스앤젤레스로 돌아온 해리슨은 샹카르의 방글라데시 자선 음반인 EP ''조이 방글라''를 제작했다.[43] 이 음반에는 동벵골 출신 알리 아크바르 칸이 사로드를 연주하고, 타블라 연주자 알라 라카가 참여했다.[37][44] 해리슨의 "방글라 데시"와 마찬가지로 이 음반의 모든 수익금은 새로 설립된 조지 해리슨-라비 샹카르 특별 긴급 구호 기금으로 전달되어 유니세프가 배분하게 되었다.[6] 7월 중순경, "조지 해리슨 앤 프렌즈"의 콘서트가 뉴욕 타임스의 뒷면에 작은 광고를 통해 발표되었다.[6] 티켓은 순식간에 매진되었고, 두 번째 공연이 발표되었다.[45][56]
7월 말경, 모든 관계자들이 리허설을 위해 뉴욕에서 만날 예정이었을 때,[40] 해리슨은 키보드에 프레스턴, 어쿠스틱 리듬 기타와 탬버린에 배드핑거의 네 멤버, 베이스와 드럼에 각각 보어만과 켈트너, 색소폰 연주자 짐 혼의 이른바 "할리우드 혼스"로 구성된 백 밴드의 참여를 확정했다.[46][47] 기존 스타 중 레온 러셀도 참여했지만, 자신의 투어 밴드 멤버들의 지원을 받는다는 조건이었다.[33] 에릭 클랩튼은 그 자리에는 꼭 참석하겠다고 주장했지만, 오델과 다른 관계자들은 기타리스트의 심각한 헤로인 중독으로 인한 무능력을 알고 있었기 때문에[19] 해리슨이 그를 이 행사에 고려했다는 사실에 놀라움을 금치 못했다.[24][28]
해리슨의 전 밴드 동료 중 레논은 아내이자 음악 파트너인 요코 오노 없이 콘서트에 참여하는 데 처음에는 동의했는데, 해리슨이 그렇게 규정했기 때문이었다.[8][48] 레논은 이 합의의 결과로 오노와 언쟁을 벌였고[137] 콘서트 이틀 전에 격분하여 뉴욕을 떠났다.[49][50] 스타의 참여는 전혀 문제되지 않았고,[11] 그는 참석하기 위해 스페인 알메리아에서 자신의 영화 ''블라인드맨'' 촬영을 중단했다.[9][52] 하지만 폴 매카트니는 비틀즈의 해체로 인한 법적 문제로 인한 좋지 않은 감정을 이유로 참여를 거부했다.[9][53]
3. 2. '방글라데시' 싱글 발매
1971년 7월 첫째 주쯤, 조지 해리슨은 로스앤젤레스 스튜디오에서 공동 프로듀서 필 스펙터와 함께 자신이 직접 작곡한 곡 "방글라 데시"를 녹음하고 있었다.[37] 이 곡의 첫 번째 절은 라비 샹카르가 해리슨에게 도움을 요청하는 내용을 담고 있으며,[38] "''내 친구는 눈에 슬픔을 담고 내게 왔지 / 그는 조국이 죽기 전에 도움을 원한다고 말했지''"라는 가사는 유엔 사무총장 코피 아난이 나중에 이 대의의 근본적인 인간적 측면으로 인정한 지속적인 이미지를 제공했다.[39]
해리슨의 "방글라 데시" 싱글과 마찬가지로, 샹카르의 방글라데시 자선 음반인 EP ''조이 방글라''의 모든 수익금은 새로 설립된 조지 해리슨-라비 샹카르 특별 긴급 구호 기금으로 전달되어 유니세프가 배분하게 되었다.[6]
3. 3. 출연진 확정 및 리허설
샹카르는 자선 콘서트를 통해 25,000달러를 모금하는 것이 원래 목표였고, 피터 셀러스가 사회자를 맡을 수도 있었다.[11][18][24] 해리슨이 참여하고, 비틀즈의 애플 코어를 통해 음반 및 영화를 출시하면서, 이 아이디어는 서양 록과 인도 고전 음악을 혼합한 스타들이 출연하는 음악 행사로 발전했으며, 매디슨 스퀘어 가든에서 열리게 되었다.[9][27] 음악 사업 관리자이자 전 애플 직원인 크리스 오델에 따르면, 해리슨은 샹카르와 통화한 후 이 개념이 확정되자 아내 패티 보이드와 함께 가능한 출연진에 대해 이야기하기 시작했다.[28] 링고 스타, 레논, 에릭 클랩튼, 레온 러셀, 짐 켈트너, 보어만, 빌리 프레스턴과 배드핑거가 이 초기 브레인스토밍에서 언급되었다.[28]오델은 해리슨이 로스앤젤레스의 니콜스 캐년에 임대한 집에서 지역 음악가들에게 연락을 취하기 시작했고, 밥 딜런의 참여를 확보하고자 했다.[30][31][32] 해리슨이 가장 먼저 지목한 이름들은 거의 모두 즉시 참여했고, 테네시주 멤피스의 음악가 돈 닉스는 백 보컬 그룹을 조직하는 데 동의했다.[33][34] 현지 인도 점성가는 8월 초를 콘서트를 열기 좋은 시기로 조언했고, 상황이 전개되면서, 그달의 첫째 날인 일요일은 매디슨 스퀘어 가든을 그렇게 짧은 기간 안에 이용할 수 있는 유일한 날이었다.[35][23]
7월 첫째 주쯤, 해리슨은 로스앤젤레스 스튜디오에서 공동 프로듀서 필 스펙터와 함께 "방글라 데시"를 녹음하고 있었다.[36][37] 해리슨은 런던에서 배드핑거와 만나 ''스트레이트 업'' 작업을 중단해야 한다고 설명한 후,[26][40] 7월 13일 뉴욕으로 날아가 레논을 만났다.[41] 7월 중순경, 로스앤젤레스로 돌아온 해리슨은 샹카르의 방글라데시 자선 음반인 EP ''조이 방글라''를 제작했다.[42][43] 이 음반에는 동벵골 출신 알리 아크바르 칸이 사로드를 연주하고, 타블라 연주자 알라 라카가 참여했다.[44][37] 해리슨의 "방글라 데시"와 마찬가지로 이 음반의 모든 수익금은 유니세프가 배분하게 되었다.[6] 7월 중순경, "조지 해리슨 앤 프렌즈"의 콘서트가 뉴욕 타임스의 뒷면에 작은 광고를 통해" 발표되었다.[6] 티켓은 순식간에 매진되었고, 두 번째 공연이 발표되었다.[45][56]
7월 말경, 모든 관계자들이 리허설을 위해 뉴욕에서 만날 예정이었을 때,[40] 해리슨은 키보드에 프레스턴, 어쿠스틱 리듬 기타와 탬버린에 배드핑거의 네 멤버, 베이스와 드럼에 각각 보어만과 켈트너, 색소폰 연주자 짐 혼의 "할리우드 혼스" (척 핀들리, 재키 켈소, 루 맥크리리가 포함됨)로 구성된 백 밴드의 참여를 확정했다.[46][47] 기존 스타 중 레온 러셀도 참여했지만, 자신의 투어 밴드 멤버들의 지원을 받는다는 조건이었다.[33] 에릭 클랩튼은 그 자리에는 꼭 참석하겠다고 주장했지만, 오델과 다른 관계자들은 기타리스트의 심각한 헤로인 중독으로 인한 무능력을 알고 있었기 때문에[19] 해리슨이 그를 이 행사에 고려했다는 사실에 놀라움을 금치 못했다.[24][28]
해리슨의 전 밴드 동료 중 레논은 아내이자 음악 파트너인 요코 오노 없이 콘서트에 참여하는 데 처음에는 동의했는데, 해리슨이 그렇게 규정했기 때문이었다.[8][48] 레논은 이 합의의 결과로 오노와 언쟁을 벌였고[137] 콘서트 이틀 전에 격분하여 뉴욕을 떠났다.[49][50] 스타의 참여는 전혀 문제되지 않았고,[11] 그는 참석하기 위해 스페인 알메리아에서 자신의 영화 ''블라인드맨'' 촬영을 중단했다.[9][52] 하지만 폴 매카트니는 비틀즈의 해체로 인한 법적 문제로 인한 좋지 않은 감정을 이유로 참여를 거부했다.[9][53]
해리슨은 뉴욕 시의 파크 레인 호텔로 옮겨갔고,[55] 첫 번째 리허설은 7월 26일 월요일, 서 57번가의 Nola Studios에서 열렸다.[56][57] 해리슨은 샹카르의 ''Joi Bangla'' 그림 소매 디자인 아이디어를 스케치하면서 콘서트의 가능한 세트 리스트를 작성했다.[58] 8월 1일에 공연할 노래 외에도 해리슨의 목록에는 자신의 작곡인 "All Things Must Pass", "Art of Dying"과 갓 녹음한 B-side "Deep Blue"가 포함되었다. 클랩튼의 "Let It Rain"도 등장했으며, 딜런의 세트 제안은 "If Not for You", "Watching the River Flow", 그리고 "Blowin' in the Wind"였다.[58] 첫날 Nola Studios에는 해리슨, 보어만, 6인조 관악기 섹션, 배드핑거의 피트 햄, 조이 몰랜드, 톰 에반스, 마이크 기빈스만 참석했다.[10][26] 이후 리허설도 해리슨의 표현대로 "조금씩 조금씩" 진행되었다.[60] 콘서트 전날 밤, 마지막 리허설만이 완전한 밴드 리허설과 비슷했다.[61]
7월 27일 화요일, 해리슨과 샹카르는 두 쇼를 홍보하기 위한 기자 회견을 열었다;[57] "Bangla Desh" 자선 싱글은 7월 28일 미국에서 발매되었고, 이틀 뒤 영국에서도 발매되었다.[42][57] 링고 스타는 목요일에 도착했고,[10] 7월 30일 금요일에는 러셀이 미국 투어를 중단하고 나타났다.[26][57] 러셀의 밴드 멤버인 클라우디아 레니어와 돈 프레스턴이 돈 닉스의 백 보컬 합창단에 추가되었다;[64] 프레스턴은 쇼에서 러셀의 솔로 무대 동안 리드 기타로 전환할 예정이었고, 베이시스트 칼 래들은 일시적으로 보어만을 대체할 예정이었다.[49] 이 시점에서 클랩튼의 참여는 심각하게 의심스러웠고,[24][65] 해리슨은 제시 에드 데이비스를 대체할 가능성이 있는 사람으로 섭외했다.[25][66]
마지막 리허설은 참가자 중 일부에게는 처음이었으며, 7월 31일 늦은 밤 매디슨 스퀘어 가든에서 열린 콘서트 사운드 체크와 결합되었다.[57] 딜런과 클랩튼은 결국 그날 밤 사운드 체크에 나타났다.[68][69] 클랩튼은 헤로인 금단 증상의 초기 단계에 있었는데, 카메라맨이 그에게 약간의 메타돈을 공급한 후에야 영국 기타리스트가 다음날 무대에 오를 수 있었다.[25][45] 해리슨의 답답함에도 불구하고 딜런은 그렇게 큰 규모의 행사 분위기에서 공연하는 것에 대해 심각한 의구심을 품었고[70][71] 여전히 공연에 참여할 의사를 밝히지 않았다.[72]
해리슨과 더 밴드의 친분으로 인해 조나단 태플린이 제작 매니저를 맡았고, 칩 몽크가 조명을 담당했다.[23] 인근 레코드 플랜트의 게리 켈그렌이 콘서트를 녹음하기 위해 투입되었고, 스펙터가 감독했으며,[8] 소울 스위머를 중심으로 행사의 촬영을 담당했다.[23] 공식 콘서트 사진 작가는 톰 윌키스와 배리 페인스타인이었다.[74]
스티븐 스틸스는 콘서트 이틀 전인 7월 30일 매디슨 스퀘어 가든에서 앨범 ''Stephen Stills 2''를 지원하며 매진을 기록한 후,[77] 해리슨이 자신의 무대, 음향, 조명 시스템 및 제작 매니저를 사용하도록 허락했지만, 해리슨이 "그를 공연에 초대하거나, 그의 이름을 언급하거나, 감사를 표하는 것을 소홀히 했다"고 불만을 토로했다.[78]
4. 콘서트 진행
1971년 8월 1일, 뉴욕 매디슨 스퀘어 가든에서 방글라데시 난민들을 돕기 위한 두 번의 콘서트(오후 2시 30분, 오후 8시)가 열렸다. 이 콘서트는 조지 해리슨이 라비 샹카르의 호소를 받고 개최하게 되었다.[187][188]
오후 공연에서 해리슨은 인도 음악 세션에 집중해 줄 것을 요청하며 라비 샹카르, 알리 아크바르 칸(사로드 연주자), 알라 라카(타블라 연주자), 카말라 차크라바르티(탐부라 연주자)를 소개했다.[45][84] 샹카르는 콘서트의 취지를 설명했고, 이들은 "방글라 둔"을 연주했다.[85]
이후 해리슨은 링고 스타, 에릭 클랩튼, 레온 러셀, 빌리 프레스턴 등이 포함된 밴드와 함께 "Wah-Wah", "Something", "Awaiting on You All" 등을 연주했다.[91][88] 프레스턴은 "That's the Way God Planned It"를, 스타는 "It Don't Come Easy"를 불렀다.[97][92][93]
해리슨과 클랩튼은 "While My Guitar Gently Weeps"에서 기타 연주를 선보였고,[97][98] 러셀은 "Jumpin' Jack Flash"와 "Young Blood" 메들리를 불렀다.[99] 해리슨은 피트 햄과 함께 어쿠스틱 기타로 "Here Comes the Sun"을 연주했다.[2]
밥 딜런이 등장하여 "A Hard Rain's A-Gonna Fall", "Blowin' in the Wind" 등을 불렀고, 이는 콘서트의 절정으로 평가받았다.[106][102][104] 해리슨과 밴드는 "Hear Me Lord", "My Sweet Lord", "Bangla Desh"를 끝으로 오후 공연을 마쳤다.[87]
저녁 공연에서는 "Hear Me Lord"가 제외되고, "My Sweet Lord"가 앞 순서로 연주되었다.[109][106] 딜런은 "Mr. Tambourine Man"을 추가하고, 몇 곡의 순서를 변경했다.[108] 두 번째 공연은 전반적으로 더 훌륭했다는 평가를 받았다.[23][111]
딜런은 마지막 곡을 마치고 승리의 제스처를 취했으며,[10] 해리슨은 "Something"으로 공연을 이끌었다.[108] 콘서트 후에는 모든 참가자들이 축하 파티를 열었다.[114][116]
4. 1. 프로그램 구성
1969년 12월 델라니 & 보니 앤 프렌즈 밴드와 레논의 플라스틱 오노 밴드에서 잠시 지원 역할을 한 것을 제외하고, 콘서트 포 방글라데시는 1966년 8월 비틀즈가 투어를 중단한 이후 해리슨이 유료 관객 앞에서 처음으로 라이브 공연을 한 것이었다.[79][80] 딜런 역시 같은 해 투어를 중단했지만, 1969년 8월 와이트 섬 페스티벌에서 성공적인 복귀를 했다.[81] 2005년, ''롤링 스톤''의 창립자 잔 웨너는 비틀즈가 1966년에 방문한 이후 뉴욕에서 경험하지 못한 수준의 "흥분"이 첫 번째 콘서트 포 방글라데시 쇼를 앞두고 있었다고 묘사했다.[83]사회자 역할을 맡은 해리슨은 청중에게 프로그램의 오프닝인 인도 음악 부분에 "집중하도록 노력"해 달라고 요청하면서 오후 쇼를 시작했다.[45] 그는 이어서 라비 샹카르와 그의 동료 음악가들( 사로드 연주자 알리 아크바르 칸, 타블라 연주자 알라 라카, 탐부라 연주자 카말라 차크라바르티)을 소개했다.[84] 샹카르는 먼저 콘서트의 이유를 설명한 후, 네 명의 음악가들은 표준 라가 대신 카얄 형식으로 "방글라 둔"이라는 제목의 전통적인 둔을 연주했다.[85] 팬들은 해리슨이 광고한 "친구들"의 정체를 발견하려는 열망으로 인해 이 연주에 "조심스러운 존경심"을 보였고,[87] 청중의 호의는 뚜렷했다.[6][49] 무대가 치워지고 네덜란드 TV 영화가 상영되는 동안 짧은 휴식 시간이 있었으며,[88] 이 영화는 구 동 파키스탄에서 일어난 잔혹 행위와 자연 재해의 영상을 보여주었다.[63]
뉴욕 군중의 우레와 같은 박수 갈채에,[87][90] 해리슨은 임시 밴드(링고 스타, 에릭 클랩튼, 레온 러셀, 빌리 프레스턴, 클라우스 부어만, 짐 켈트너 외 18명)와 함께 무대에 나타났다.[14][91] 이 "전체 필 스펙터/''All Things Must Pass'' 록 오케스트라"의 지원을 받아,[106] 해리슨은 "Wah-Wah"로 콘서트의 서부 부분을 시작했고, 이어서 그의 비틀즈 히트곡 "Something"과 가스펠 록커 "Awaiting on You All"을 연주했다.[88] 해리슨은 이어서 프레스턴에게 스포트라이트를 넘겼고, 프레스턴은 그의 히트곡인 "That's the Way God Planned It"를 연주했으며,[97] 그 다음에는 스타가 "It Don't Come Easy"라는 노래로 최근 솔로 아티스트로서 입지를 굳혔다.[92][93]
다음은 해리슨의 "Beware of Darkness"였으며, 러셀이 게스트 보컬로 참여했다.[96] 밴드를 소개하는 시간을 가진 후, 해리슨은 화이트 앨범 트랙 "While My Guitar Gently Weeps"의 격렬한 버전을 이어갔고, 이 곡에서는 그와 클랩튼이 긴 기악 연주 동안 리드 기타를 연주했다.[97][98] 또 다른 곡은 레온 러셀이 롤링 스톤스의 "Jumpin' Jack Flash"와 더 코스터스의 "Young Blood"를 메들리로 엮은 곡이었다.[99] 돈 프레스턴이 해리슨과 함께 리드 기타를 연주하기 위해 무대를 가로질러 이동하면서, 일시적으로 4명의 일렉트릭 기타리스트가 라인업에 합류했다.[97] 돈 프레스턴, 해리슨, 클라우디아 레니어는 러셀 뒤에서 보컬을 지원했다.
해리슨은 어쿠스틱 기타를 집어 들었고, 피트 햄이 두 번째 어쿠스틱 기타를 연주하고, 돈 닉스의 가스펠 합창단이 무대 왼쪽에 있는 상태에서,[101][69][102] "Here Comes the Sun"(이 곡의 첫 라이브 공연)을 연주하여 따뜻한 반응을 얻었다.[2] 이후 해리슨은 흰색 펜더 스트라토캐스터 일렉트릭 기타로 바꾸었고,[73][102] 밥 딜런이 등장하는 것을 회상하며, "주변을 둘러보니, '그'가 너무 긴장해서 - 기타를 치고 선글라스를 쓰고 - 그가 나타나서, '팔과 어깨를 펌프질한다'... 내가 그가 확실히 할 것이라고 확신한 것은 바로 그 순간이었다."라고 말했다.[73]
딜런의 미니 세트는 콘서트 포 방글라데시의 절정이었다.[102][104] 해리슨, 러셀(베이스 연주), 스타(탐부린 연주)의 지원을 받아, 딜런은 1960년대에 그의 시대를 정의하는 다섯 곡("A Hard Rain's A-Gonna Fall", "Blowin' in the Wind", "It Takes a Lot to Laugh, It Takes a Train to Cry", "Love Minus Zero/No Limit", "Just Like a Woman")을 연주했다.[105][106]
해리슨과 밴드는 "Hear Me Lord"와 그의 히트곡 "My Sweet Lord"로 구성된 마지막 부분을 연주하기 위해 돌아왔으며, 이어서 "Bangla Desh"가 연주되었다.[87]
해리슨은 첫 번째 공연의 결과에 기뻐했고, 딜런 역시 그와 함께 파크 레인 호텔로 돌아갔다.[107] 그들은 저녁 공연의 세트 리스트에 대한 변경 사항을 논의했으며, 오후 8시에 시작되었다.[61]
연주된 곡들과 순서는 첫 번째 공연과 두 번째 공연 사이에 약간 달랐다.[108] "Wah-Wah" 이후 그는 "My Sweet Lord"를 앞으로 가져와 "Awaiting on You All"을 연주한 후 빌리 프레스턴에게 넘겨주었다.[106] 오후의 "Hear Me Lord"는 제외되었으며,[109] 딜런 이후 밴드 세그먼트는 두 곡으로 구성되었다. 쇼를 마무리하는 "Something"과 앙코르 (콘서트)로 "Bangla Desh"의 열정적인 연주였다.[110] 딜런 또한 몇 가지 변경을 가해 "Blowin' in the Wind"와 "It Takes a Lot to Laugh"의 순서를 바꾸고, "Love Minus Zero" 대신 "Mr. Tambourine Man"을 연주했다.[108]
두 번째 쇼는 오후 공연보다 훌륭하다는 평가를 받았다.[23][111]
쇼의 서부 부분 동안 해리슨의 목소리는 더욱 자신감이 넘쳤고, 음악은 ''Rolling Stone''에 따르면 "약간 더 빛났다".[113] "That's the Way God Planned It"가 끝날 무렵, 프레스턴은 해먼드 오르간 뒤에서 일어나 무대 앞으로 나와 부기를 췄다.[97][112]
딜런의 등장은 다시 한 번 쇼의 "진정한 뇌리에 박히는 순간"이었다.[112] 딜런은 마지막 곡 "Just Like a Woman"을 승리의 경례로 마쳤으며, ''롤링 스톤''의 평론가는 "스트롱맨처럼 두 주먹을 꽉 쥐고" 있었다고 언급했다.[10] 딜런의 세트 이후, 해리슨은 밴드를 소개했고,[108] "Something"으로 쇼를 "또 다른 정점"으로 이끌었다.[10]
두 번의 매진 콘서트 이후, 모든 참가자들은 Ungano's라는 지하실 클럽에서 열린 축하 파티에 참석했다.[114][116] 딜런은 너무 기뻐서 해리슨은 "그가 나를 안아주고 껴안으며 '맙소사! 우리가 세 번의 쇼를 했다면 얼마나 좋았을까!'라고 말했다"고 회상했다.[73]
오후 공연 (14:30)
순서 | 곡명 | 작곡 | 공연 |
---|---|---|---|
1 | 서론 | 조지 해리슨/라비 샹카르 | 조지 해리슨, 라비 샹카르 |
2 | Bangla Dhun | 라비 샹카르 | 라비 샹카르 |
3 | Wah-Wah | 조지 해리슨 | 조지 해리슨 |
4 | 마이 스위트 로드 | 조지 해리슨 | 조지 해리슨 |
5 | Awaiting on You All | 조지 해리슨 | 조지 해리슨 |
6 | Thats the Way God Planned It | 빌리 프레스턴 | 빌리 프레스턴 |
7 | 내일의 소망 | 리처드 스타키 | 링고 스타 |
8 | Beware of Darkness | 조지 해리슨 | 조지 해리슨, 레온 러셀 |
9 | 밴드 소개 | 조지 해리슨 | |
10 | 와일 마이 기타 젠틀리 위프스 | 조지 해리슨 | 조지 해리슨 |
11 | Jumpin' Jack Flash/Young Blood | 믹 재거/키스 리처즈, 제리 리버/마이크 스톨러/닥 포머스 | 레온 러셀 |
12 | 히어 컴스 더 선 | 조지 해리슨 | 조지 해리슨 |
13 | 거친 비가 쏟아질 거야 | 밥 딜런 | 밥 딜런 |
14 | 웃으려면 많은 게 필요해 | 밥 딜런 | 밥 딜런 |
15 | 바람에 실려 | 밥 딜런 | 밥 딜런 |
16 | Love Minus Zero/No Limit | 밥 딜런 | 밥 딜런 |
17 | 여인처럼 | 밥 딜런 | 밥 딜런 |
18 | Hear Me Lord | 조지 해리슨 | 조지 해리슨 |
19 | 마이 스위트 로드 | 조지 해리슨 | 조지 해리슨 |
20 | 방글라데시 | 조지 해리슨 | 조지 해리슨 |
저녁 공연 (20:00)
순서 | 곡명 | 작곡 | 공연 |
---|---|---|---|
1 | 서론 | 조지 해리슨/라비 샹카르 | 조지 해리슨, 라비 샹카르 |
2 | Bangla Dhun | 라비 샹카르 | 라비 샹카르 |
3 | Wah-Wah | 조지 해리슨 | 조지 해리슨 |
4 | 마이 스위트 로드 | 조지 해리슨 | 조지 해리슨 |
5 | Awaiting on You All | 조지 해리슨 | 조지 해리슨 |
6 | Thats the Way God Planned It | 빌리 프레스턴 | 빌리 프레스턴 |
7 | 내일의 소망 | 리처드 스타키 | 링고 스타 |
8 | Beware of Darkness | 조지 해리슨 | 조지 해리슨, 레온 러셀 |
9 | 밴드 소개 | 조지 해리슨 | |
10 | 와일 마이 기타 젠틀리 위프스 | 조지 해리슨 | 조지 해리슨 |
11 | Jumpin' Jack Flash/Young Blood | 믹 재거/키스 리처즈, 제리 리버/마이크 스톨러/닥 포머스 | 레온 러셀 |
12 | 히어 컴스 더 선 | 조지 해리슨 | 조지 해리슨 |
13 | 거친 비가 쏟아질 거야 | 밥 딜런 | 밥 딜런 |
14 | 바람에 실려 | 밥 딜런 | 밥 딜런 |
15 | 웃으려면 많은 게 필요해 | 밥 딜런 | 밥 딜런 |
16 | 미스터 탬버린 맨 | 밥 딜런 | 밥 딜런 |
17 | 여인처럼 | 밥 딜런 | 밥 딜런 |
18 | 섬싱 | 조지 해리슨 | 조지 해리슨 |
19 | 방글라데시 | 조지 해리슨 | 조지 해리슨 |
4. 2. 밥 딜런의 등장
해리슨의 예상대로,[103] 딜런의 미니 세트는 많은 관찰자들에게 콘서트 포 방글라데시의 절정으로 여겨졌다.[102][104] 해리슨, 러셀(이제 부어만의 펜더 프리시전 베이스 연주), 그리고 탐부린을 연주하는 스타의 지원을 받아, 딜런은 1960년대에 그의 시대를 정의하는 다섯 곡을 연주했다:[105] "A Hard Rain's A-Gonna Fall", "Blowin' in the Wind", "It Takes a Lot to Laugh, It Takes a Train to Cry", "Love Minus Zero/No Limit" 및 "Just Like a Woman".[106]딜런은 너무 기뻐서 16년 후 해리슨은 "그가 나를 안아주고 껴안으며 '맙소사! 우리가 세 번의 쇼를 했다면 얼마나 좋았을까!'라고 말했다"고 회상했다.[73] 해리슨과 마찬가지로, 그날 매디슨 스퀘어 가든에서 공연한 경험은 딜런이 즉시 콘서트 무대를 다시 받아들이도록 이끌지 못했다.[117] 1971년–72년 새해 전야에 더 밴드와의 짧은 게스트 출연과 존 프라인 클럽 공연에 참여한 것만이 1974년 1월에 그가 투어에 복귀하기 전에 이루어졌다.[118]
딜런의 등장은 다시 한 번 쇼의 "진정한 뇌리에 박히는 순간"이었다.[112] 딜런은 마지막 곡 "Just Like a Woman"을 승리의 경례로 마쳤으며, ''롤링 스톤''의 평론가는 "스트롱맨처럼 두 주먹을 꽉 쥐고" 있었다고 언급했다.[10]
딜런은 또한 몇 가지 변경을 가해 "Blowin' in the Wind"와 "It Takes a Lot to Laugh"의 순서를 바꾸고, "Love Minus Zero" 대신 호평을 받은 "Mr. Tambourine Man"을 연주했다.[108]
4. 3. 두 번의 공연
델라니 & 보니 앤 프렌즈 밴드와 플라스틱 오노 밴드에서의 짧은 지원 역할을 제외하면, 콘서트 포 방글라데시는 1966년 8월 비틀즈가 투어를 중단한 이후 조지 해리슨이 유료 관객 앞에서 처음으로 라이브 공연을 한 것이었다.[79][80] 밥 딜런은 1969년 8월 와이트 섬 페스티벌에서 성공적인 컴백을 했지만, 그 이후로는 라이브 공연을 하지 않았다.[81][82]오후 쇼에서 해리슨은 사회자 역할을 맡아 청중에게 프로그램의 오프닝인 인도 음악 부분에 "집중하도록 노력"해 달라고 요청했다.[45] 그는 라비 샹카르와 그의 동료 음악가들(사로드 연주자 알리 아크바르 칸, 타블라 연주자 알라 라카, 탐부라 연주자 카말라 차크라바르티)을 소개했다.[84] 샹카르는 콘서트의 이유를 설명한 후, 네 명의 음악가들은 "방글라 둔"이라는 전통적인 둔을 연주했다.[85] 팬들은 해리슨이 광고한 "친구들"의 정체를 발견하려는 열망으로 인해 이 연주에 "조심스러운 존경심"을 보였고, 청중의 호의는 뚜렷했다.[87][6][49]
해리슨은 임시 밴드(링고 스타, 에릭 클랩튼, 레온 러셀, 빌리 프레스턴, 클라우스 부어만, 짐 켈트너 외 18명)와 함께 무대에 나타났다.[91] 해리슨은 "Wah-Wah", "Something", "Awaiting on You All"을 연주했다.[88] 이어서 프레스턴은 "That's the Way God Planned It"를, 스타는 "It Don't Come Easy"를 연주했다.[97][92][93]
다음은 해리슨의 "Beware of Darkness"였으며, 러셀이 게스트 보컬로 참여했다.[96] 밴드를 소개한 후, 해리슨은 화이트 앨범 트랙 "While My Guitar Gently Weeps"를 연주했고, 이 곡에서는 그와 클랩튼이 리드 기타를 "결투"했다.[97][98] 러셀은 롤링 스톤스의 "Jumpin' Jack Flash"와 더 코스터스의 "Young Blood"를 메들리로 엮어 연주했다.[99]
해리슨은 어쿠스틱 기타를 잡고 피트 햄과 함께 "Here Comes the Sun"을 연주했다.[2] 이 시점에서 해리슨은 밥 딜런의 등장을 알렸다. 딜런은 해리슨, 러셀, 스타의 지원을 받아 "A Hard Rain's A-Gonna Fall", "Blowin' in the Wind", "It Takes a Lot to Laugh, It Takes a Train to Cry", "Love Minus Zero/No Limit", "Just Like a Woman"을 연주했다.[106]
해리슨과 밴드는 "Hear Me Lord", "My Sweet Lord", "Bangla Desh"를 연주하며 공연을 마무리했다.[87]
해리슨은 첫 번째 공연의 결과에 기뻐했고, 딜런 역시 그와 함께 호텔로 돌아가 저녁 공연의 세트 리스트에 대한 변경 사항을 논의했다.[107] 오후 8시에 시작된 저녁 공연은 연주된 곡들과 순서가 약간 달랐다.[61]
"Wah-Wah" 이후 해리슨은 "My Sweet Lord"를 앞으로 가져와 "Awaiting on You All"을 연주한 후 프레스턴에게 넘겨주었다.[106] 오후의 "Hear Me Lord"는 제외되었으며,[109] 딜런 이후 밴드 세그먼트는 두 곡으로 구성되었다. "Something"과 앙코르 (콘서트)로 "Bangla Desh"였다.[110] 딜런은 "Blowin' in the Wind"와 "It Takes a Lot to Laugh"의 순서를 바꾸고, "Love Minus Zero" 대신 "Mr. Tambourine Man"을 연주했다.[108]
두 번째 쇼는 오후 공연보다 훨씬 훌륭하다는 평가를 받았다.[23][111]
쇼의 서부 부분 동안 해리슨의 목소리는 더욱 자신감이 넘쳤고, 음악은 ''Rolling Stone''에 따르면 "아마도 약간 더 빛났다".[113] "That's the Way God Planned It"가 끝날 무렵, 프레스턴은 해먼드 오르간 뒤에서 일어나 무대 앞으로 나왔다.[97][112]
딜런의 등장은 다시 한 번 쇼의 "진정한 뇌리에 박히는 순간"이었다.[112] 딜런은 마지막 곡 "Just Like a Woman"을 승리의 경례로 마쳤다.[10] 딜런의 세트 이후, 해리슨은 밴드를 소개했고,[108] "Something"으로 쇼를 "또 다른 정점"으로 이끌었다.[10]
두 번의 매진 콘서트 이후, 모든 참가자들은 축하 파티에 참석했다.[114][116]
5. 콘서트 이후
콘서트 포 방글라데시는 1985년 라이브 에이드와 팜 에이드, 21세기의 뉴욕시 콘서트와 라이브 8에 이르기까지 이후 록 자선 행사의 모델이 되었다.[2][4][137] 밥 겔도프는 라이브 에이드를 개최할 때 이 콘서트에서 영감을 받았다고 말했다.
1972년 6월 5일, 조지 해리슨, 라비 샹카르, 앨런 클라인은 방글라데시 난민을 위한 "선구적인" 기금 모금 노력을 인정받아 유니세프로부터 "아이는 아버지의 아들이다" 상을 공동 수상했다.[154]
2008년 12월, BBC는 방글라데시 고등 법원에서 해리슨이 방글라데시 독립 과정에서 한 역할에 대해 공식적으로 영웅으로 칭송받도록 하는 움직임이 진행 중이라고 보도했다.[155]
2003년, 빌 해리는 해리슨이 영국 훈장 제도에서 제대로 인정받지 못한 것에 대해 아쉬움을 표했다. 해리슨은 1965년 비틀즈 멤버로서 MBE를 받았지만, 밥 겔도프 등 다른 인물들이 받은 기사 작위나 고위 훈장에 비하면 부족하다는 것이다.[1]
5. 1. 반응과 평가
해리슨의 매니저인 앨런 클라인은 이 행사의 평화로운 성격을 자랑했다. "폭동은 없었습니다. 단 한 명의 경찰도 들어오지 못했습니다... 제로!"[116] 그러나 8월 12일 ''The Village Voice''에 보도된 바에 따르면, 저녁 공연 중간에 티켓이 없는 200명의 군중이 매디슨 스퀘어 가든의 문을 뚫고 돌진했다.[123] 100명의 경비원과 뉴욕시 경찰이 군중을 곤봉으로 진압했으며, 이 과정에서 반문화 인물 웨이비 그레이비는 심각한 병을 앓고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경찰에게 유효한 티켓을 보여준 후 뒤에서 공격을 받았다고 한다.[123] 이 사건 외에는 방글라데시를 위한 콘서트에 대한 언론 보도는 압도적으로 긍정적이었다.두 명의 전 비틀즈 멤버와 밥 딜런이 같은 무대에 등장한 것은 센세이션을 일으켰으며,[124][125] 조지 해리슨에게는 아낌없는 찬사가 쏟아졌다.[4][126] "비틀마니아가 도시를 휩쓸다!"는 전형적인 헤드라인이었고,[127] 영국에서는 ''NME''가 이 콘서트를 "10년간 최고의 록 스펙터클!"이라고 선언했다.[51] ''빌보드''는 아티스트들의 공연을 "역대 최고의 음악"이라고 묘사하고 콘서트의 라이브 앨범 발매 가능성에 대해 언급했다. "정치적인 것은 전혀 없습니다. 굶주린 아이들이 관련되어 있으며, 한 번은 음악을 사랑하는 사람들의 감정을 나타내야 하는 35명의 음악가들을 통해 구제를 받습니다."[128]
딜런이 선택한 곡, 특히 "종말론적인" "A Hard Rain's A-Gonna Fall"[110]은 1970년대 초반의 맥락에서 새로운 관련성을 갖는 것으로 밝혀졌으며,[129] ''롤링 스톤''은 그 가사가 "세월이 흐르면서 더욱 소름 끼치게 만들었다"고 평했다.[130] 같은 간행물은 링고 스타의 기여에 대해 "링고 스타가 무대에서 드럼을 치고 노래하는 것을 보는 것은 지구상에서 가장 행복한 느낌 중 하나입니다."라고 언급했다.[125] 콘서트의 주동자이자 유니세프 쇼의 진정한 양심인 라비 샹카르의 역할도 주목받았다.[10][116] 음악적으로 ''The Village Voice''는 샹카르와 알리 아크바르 칸의 조합을 "딜런과 해리슨의 조합만큼 독특하다"라고 언급했다.[112]
당대의 더 넓은 반문화적 맥락에서, 우드스톡 이후의 모든 록 행사마다 환멸이 점점 더 만연해짐에 따라,[112][125] 평론가들은 ''롤링 스톤''의 표현처럼 이 콘서트를 "60년대의 가장 훌륭했던 모든 것을 잠시 빛나게 부활시킨 것"으로 보았다.[131] 1981년에 글을 쓴 ''NME'' 평론가 밥 워핀든은 이를 "믿음의 재발견"에 비유하며 "해리슨은 록 음악을 다시 정상 궤도에 올려놓았다"고 덧붙였다.[183]
해리슨의 전기 작가 중 앨런 클레이슨은 콘서트와 관련 앨범이 발매된 1971-72년 기간을 "조지 해리슨 모멘트"[132]라고 묘사하며, 게리 틸러리는 "방글라데시를 위한 콘서트는 해리슨의 위상을 단순한 유명 인사를 넘어선 무언가로 굳혔다... 그는 녹음 아티스트에 대한 인식을 바꾸어 그들이 고통받는 사람들을 돕기 위해 자신의 자아와 수표를 기꺼이 내려놓을 수 있는 좋은 세계 시민이 될 수 있다는 것을 분명히 했다."[133]라고 말한다. 다카 트리뷴에 글을 기고한 니아즈 알람에 따르면 "예술적 가치만 놓고 보면, 영화와 LP에 담긴 방글라데시를 위한 콘서트는 음악, 낙관주의, 선의의 측면에서 그 시대 최고의 모습을 보여주는 점에서 우드스톡보다 더 훌륭할지도 모른다."[148]
방글라데시 역사가인 파리다 마지드가 언급했듯이, 1971년 8월 콘서트의 "따뜻함, 배려, 호의"는[69] 전 세계에 울려 퍼져, 자원봉사자들이 유니세프에 접근하여 도움을 제공하고, 방글라데시 재난 기금에 대한 개인 기부를 이끌어냈다.[135][136] 이러한 이타적인 정신은 곧 다시 약해졌지만, 콘서트 포 방글라데시는 1985년의 라이브 에이드와 팜 에이드부터 21세기의 뉴욕시 콘서트와 라이브 8에 이르기까지 이후의 록 자선 행사의 영감과 모델로 여겨진다.[2][4][137] 이러한 후기 콘서트와 달리, 그들이 지원하는 문제에 대한 지속적인 미디어 보도의 혜택을 받은 해리슨-샹카르 프로젝트는 문제를 파악하고 주류 서구 사회에 방글라데시의 어려운 상황을 알리는 역할을 했다.[13] 게리 틸러리에 따르면, "인도주의적 노력으로 자리매김했기 때문에 쇼에 대한 모든 설명에는 남아시아의 재앙에 대한 요약이 포함되었습니다. 하룻밤 사이에 록 스타에 대한 매력 때문에 수많은 사람들이 일주일 전에는 알지도 못했던 지정학적 사건에 대해 교육을 받았습니다. 방글라데시의 비극은 국제적인 문제로 부각되었습니다."[138] 이러한 폭로 중 하나는 미국이 야흐야 칸 장군이 이끄는 파키스탄 군대에 무기와 재정적 지원을 제공하고 있다는 것이었다.[139]
해리슨의 음악 전기 작가인 사이먼 렝은 두 유니세프 쇼의 성공의 핵심 요소로 우정을 꼽았는데, 이는 모든 참가자를 무대에 모으는 것과 관객과 음악 평론가들이 행사를 바라보는 애정 모두에서 나타났다.[140] 1960년부터 해리슨의 가까운 친구였던 클라우스 부어만은 이 점을 자주 언급했다.[14][67]
우정은 관련된 라이브 앨범과 콘서트 영화가 출시 준비를 하면서 방글라데시 구호 프로젝트의 다음 단계에서 나타났다.[183][141][61] 해리슨은 모든 주요 출연자들에게 만약 행사가 "엉망"으로 판명될 경우 이러한 릴리스에서 그들의 출연을 삭제하여 누구도 가능한 곤경을 겪지 않도록 보장했다.[142] 9월 1일에 모든 참가자에게 감사의 개인 서한을 보낸 후,[143] 그는 빌리 프레스턴의 첫 번째 앨범에 참여하고 A&M 레코드에 가을에 새로운 노래를 제시 에드 데이비스에게 기증함으로써 감사를 표했다.[144][145]
그 무렵, 런던의 웸블리 스타디움에서 10월 초에 뉴욕 콘서트의 재개 가능성에 대한 소문이 있었다.[51][146] 해리슨과 클라인은 그 생각을 잠재웠지만, 콘서트 포 방글라데시의 영국 버전이 9월 18일 런던 남부의 디 오벌에서 열렸다.[51] "굿바이 투 섬머 – 방글라데시 기근 구호를 위한 록 콘서트"[148]라는 제목으로 더 후, 페이스스, 모트 더 후플, 아메리카, 린디스판 및 퀸테센스의 공연이 포함되었다.[51] 방글라데시 난민은 또한 8월 말 에섹스 주 클랙턴온시 근처에서 열린 위리 페스티벌에서 지원받은 여러 자선 단체 중 하나였다.[148] 9월 22일, 조지 해리슨과 패티 보이드는 영국으로 돌아와, 곧 발매될 라이브 앨범의 믹싱이 완료되었고, 해리슨은 앨범에 부과되는 구매세라는 예상치 못한 장애를 처리하기 위해 영국 재무부의 패트릭 젠킨과 만날 예정이었다.[146][149] 이것은 매디슨 스퀘어 가든 쇼 이후 해리슨의 방글라데시 프로젝트를 방해한 여러 문제 중 하나였으며,[150][151] 영국 정치인은 그에게 "미안합니다! 당신의 높은 이상은 매우 좋지만, 영국도 돈이 필요합니다!"라고 말했을 것이다.[152]
1972년 6월 5일, 방글라데시 난민을 위한 "선구적인" 기금 모금 노력을 인정하여, 조지 해리슨, 라비 샹카르, 앨런 클라인은 유니세프로부터 "아이는 아버지의 아들이다" 상을 공동으로 수상했다.[154] 2008년 12월, 해리슨이 사망한 지 7년 후, BBC는 방글라데시 고등 법원에서 해리슨이 국가의 어려웠던 탄생 과정에서 그의 역할에 대해 공식적으로 영웅으로 인정받고 칭송받도록 하는 움직임이 진행 중이라고 보도했다.[155]
2003년에 저술한 빌 해리는 콘서트 포 방글라데시를 개최한 해리슨이 영국 훈장 제도에서 인정받지 못한 것에 대해 비통해했다. 해리는 이 행사의 영향력과 해리슨의 다른 자선 활동, 그리고 그의 회사 HandMade Films가 "사실상 영국 영화 산업을 부활시켰다"는 점을 고려할 때, 1965년 비틀즈의 멤버로 얻은 그의 MBE 지위는 밥 겔도프, 코미디언, 팝 스타 및 음악 사업의 다른 인물에게 주어진 기사 작위나 기타 고위 훈장과 "동일시하기 어렵다"고 말했다.[1]
본작은 미국의 빌보드지 앨범 차트에서 총 6주 동안 최고 순위 2위를 기록했으며, 1972년 연간 랭킹에서도 16위에 도달했다. 캐시박스지에서는 8주 연속 최고 순위 2위를 기록했으며, 1972년 연간 랭킹 7위였다. 제15회 그래미상(1972년도)의 올해의 앨범상을 수상했다.
2005년, 수록곡 전체를 리믹스하고 보너스 트랙을 추가한 디지털 리마스터판이 재발매되었다.
5. 2. 후속 앨범 및 영화 발매
1971년, 해리슨은 시타르 스승인 샹카르로부터[187] 전년 11월에 벵골 지방을 강타한 1970년 보라 사이클론과 같은 해 3월에 발발한 방글라데시 독립 전쟁으로 인해 대량의 동파키스탄 난민이 발생했다는 소식을 들었다.[188] 두 사람은 같은 해 8월 1일 뉴욕 매디슨 스퀘어 가든에서 오후 2시 30분과 오후 8시 두 차례에 걸쳐 '방글라데시 난민 구제 콘서트'를 개최했다.이 공연의 성공에 힘입어, 라이브 앨범과 콘서트 영화가 출시되어 방글라데시 구호 프로젝트는 더욱 큰 수익을 올릴 수 있게 되었다.[183][141][61] 해리슨은 모든 주요 출연자들에게 행사가 "엉망"으로 판명될 경우 이 앨범과 영화에서 그들의 출연을 삭제하여 누구도 곤경을 겪지 않도록 보장했다.[142]
이 앨범은 미국의 빌보드 앨범 차트에서 총 6주 동안 최고 순위 2위를 기록했으며, 1972년 연간 랭킹에서도 16위에 올랐다. 캐시박스에서는 8주 연속 최고 순위 2위를 기록했으며, 1972년 연간 랭킹 7위였다. 제15회 그래미상(1972년도)에서 올해의 앨범상을 수상했다.
2005년에는 수록곡 전체를 리믹스하고 보너스 트랙을 추가한 디지털 리마스터반이 재발매되었다. 추가된 보너스 트랙은 다음과 같다.
- Love Minus Zero/No Limit[188] (작사/작곡: 밥 딜런)
5. 3. 기금 모금 및 논란
1971년 8월 콘서트의 "따뜻함, 배려, 호의"는[69] 전 세계에 울려 퍼져, 자원봉사자들이 유니세프에 도움을 제공하고 방글라데시 재난 기금에 개인 기부를 이끌어냈다.[135][136] 콘서트 포 방글라데시는 1985년 라이브 에이드와 팜 에이드부터 21세기 뉴욕시 콘서트와 라이브 8에 이르기까지 이후 록 자선 행사의 영감과 모델이 되었다.[2][4][137] 밥 겔도프는 1985년 라이브 에이드를 개최하는 데 있어 콘서트 포 방글라데시에서 영감을 받았다고 인정했다.[138]1972년 6월 5일, 방글라데시 난민을 위한 "선구적인" 기금 모금 노력을 인정하여, 조지 해리슨, 라비 샹카르, 앨런 클라인은 유니세프로부터 "아이는 아버지의 아들이다" 상을 공동으로 수상했다.[154]
두 차례의 매디슨 스퀘어 가든 공연으로 243418.5달러가 모금되었으며, 이 기금은 1971년 8월 12일에 유니세프에 전달되어 관리되었다.[51] 1971년 12월까지 캐피톨 레코드는 ''방글라데시를 위한 콘서트'' 라이브 앨범의 선주문에 대해 약 3750000USD의 수표를 애플 코어에 전달했다.[157][158]
그러나 이 프로젝트의 모금에는 논란도 있었다. 클라인이 사전에 이 행사를 유니세프를 위한 자선 행사로 등록하지 못해 미국 정부로부터 세금 면제 자격을 거부당했다.[161][160][146] 그 결과, 대부분의 돈은 10년 동안 국세청의 에스크로 계정에 보관되었다.[161][162] 1972년 초, ''뉴욕'' 잡지는 수익금 일부가 행방불명되었고 클라인의 계좌로 흘러들어갔다고 보도했다.[125][183]
1985년 6월, ''로스앤젤레스 타임스'' 기사에 따르면 약 1200만달러가 구호 자금으로 방글라데시에 보내졌다.[170] 1991년 ''방글라데시를 위한 콘서트'' CD 발매를 홍보하는 인터뷰에서 해리슨은 1970년대 초 콘서트와 관련 앨범 및 영화를 통해 13500000USD가 모금되었다고 말했다.[171]
1990년대에 해리슨은 방글라데시 구호 노력에 대해 "이제 모든 것이 해결되었고 유엔이 그 권리를 소유하고 있으며, 약 4500만달러가 만들어진 것으로 생각합니다."라고 말했다.[172] 1971년 방글라데시 콘서트의 DVD 및 CD 판매는 현재 조지 해리슨 유니세프 기금으로 알려진 이 사업에 계속 기여하고 있다.[173][174][175]
5. 4. 영향 및 의의
방글라데시 역사가인 파리다 마지드는 1971년 8월 콘서트의 "따뜻함, 배려, 호의"가[69] 전 세계에 울려 퍼져, 자원봉사자들이 유니세프에 도움을 제공하고, 방글라데시 재난 기금에 개인 기부를 이끌어냈다고 언급했다.[135][136] 비록 이러한 이타적인 정신은 곧 약해졌지만, 콘서트 포 방글라데시는 1985년의 라이브 에이드와 팜 에이드부터 21세기의 뉴욕시 콘서트와 라이브 8에 이르기까지 이후의 록 자선 행사의 영감이자 모델로 여겨진다.[2][4][137]해리슨의 음악 전기 작가인 사이먼 렝은 두 유니세프 쇼의 성공의 핵심 요소로 우정을 꼽았는데, 이는 모든 참가자를 무대에 모으는 것과 관객과 음악 평론가들이 행사를 바라보는 애정 모두에서 나타났다.[140] 1960년부터 해리슨의 가까운 친구였던 클라우스 부어만은 이 점을 자주 언급했다.[14][67]
1972년 6월 5일, 방글라데시 난민을 위한 "선구적인" 기금 모금 노력을 인정하여, 조지 해리슨, 라비 샹카르, 앨런 클라인은 유니세프로부터 "아이는 아버지의 아들이다" 상을 공동으로 수상했다.[154] 2008년 12월, 해리슨이 사망한 지 7년 후, BBC는 방글라데시 고등 법원에서 해리슨이 국가의 어려웠던 탄생 과정에서 그의 역할에 대해 공식적으로 영웅으로 인정받고 칭송받도록 하는 움직임이 진행 중이라고 보도했다.[155]
2003년에 빌 해리는 콘서트 포 방글라데시를 개최한 해리슨이 영국 훈장 제도에서 인정받지 못한 것에 대해 비통해했다. 해리는 이 행사의 영향력과 해리슨의 다른 자선 활동, 그리고 그의 회사 HandMade Films가 "사실상 영국 영화 산업을 부활시켰다"는 점을 고려할 때, 1965년 비틀즈의 멤버로 얻은 그의 MBE 지위는 밥 겔도프, 코미디언, 팝 스타 및 음악 사업의 다른 인물에게 주어진 기사 작위나 기타 고위 훈장과 "동일시하기 어렵다"고 말했다.[1]
6. 대중문화 속 방글라데시 콘서트
심슨 가족의 두 에피소드, "아버지와 광대처럼"과 "나는 큐피드와 함께"에서 "방글라데시를 위한 콘서트"가 풍자되었다.[176] 전자의 에피소드에서는 크러스티가 심슨 가족의 집을 방문하여 앨범을 재생한다.[176] "나는 큐피드와 함께"에서는 아푸의 음반 컬렉션에 앨범 표지에 버섯 구름 그림이 있는 ''방글라데시 반대 콘서트''가 등장하는데,[177] 이는 당시 이 지역의 인도-파키스탄 핵 경쟁을 반영한다.[178]
1974년 7월 ("디저트")호의 ''내셔널 램푼'' 잡지는 톰 윌키스의 "방글라데시를 위한 콘서트"의 오리지널 앨범 커버 디자인을 풍자하여, 굶주린 아이를 초콜릿 버전으로 만들고, 머리 부분에는 한 입 베어 문 모습을 사용했다.[179] 이보다 2년 전, 내셔널 램푼 팀은 앨범 "Radio Dinner"의 "The Concert in Bangla Desh"라는 곡에서 해리슨의 인도주의적 역할을 조롱했다.[180] 이 스케치에서 두 명의 방글라데시 코미디언(토니 헨드라와 크리스토퍼 게스트가 연기)은 굶주린 난민들을 위해 공연하며 "조지 해리슨"이 단식 투쟁을 할 수 있도록 쌀 한 그릇을 모으려고 시도한다.[180][181]
"방글라데시를 위한 콘서트"의 군중 소리는 프로듀서 잭 더글러스에 의해 에어로스미스의 "Train Kept A-Rollin'" 커버 버전에 사용되었다.[182] 1971년 콘서트에서 스틸 사진 작가 배리 파인스타인이 촬영한 사진 중 일부는 참여 아티스트들의 후속 앨범, 특히 컴필레이션 앨범 ''밥 딜런의 위대한 히트곡 Vol. II''와 ''에릭 클랩튼의 역사''의 커버에 사용되었다.[183][184]
해리슨은 1985년 HandMade 코미디 영화 ''워터''에서 자선 공연의 컨셉을 패러디했다.[185] 이른바 카스카라 콘서트에서 그는 스타, 클랩튼, 존 로드 등과 함께 유엔 총회 앞에서 "자유"라는 노래를 공연하며 깜짝 등장한다.[186]
참조
[1]
서적
Harry, p. 135.
[2]
간행물
The Editors of Rolling Stone, p. 43.
[3]
논문
Interviews with Charles J. Lyons and Kofi Annan, in The Concert for Bangladesh Revisited.
[4]
서적
Rodriguez, p. 51.
[5]
서적
Lavezzoli, pp. 186–87.
[6]
서적
Schaffner, p. 146.
[7]
서적
Lavezzoli, p. 187.
[8]
간행물
The Editors of Rolling Stone, p. 42.
[9]
서적
Clayson, p. 308.
[10]
간행물
The Editors of Rolling Stone, p. 123.
[11]
서적
Greene, p. 186.
[12]
간행물
Liner notes, booklet accompanying The Concert for Bangladesh reissue (Sony BMG, 2005; produced by George Harrison & Phil Spector), p. 7.
[13]
서적
Leng, p. 111.
[14]
웹사이트
George Harrison's Concert for Bangladesh Featured Drug Trouble for Eric Clapton, Stage Fright for Bob Dylan
https://web.archive.[...]
2013-10-12
[15]
서적
George Harrison, pp. 220, 248.
[16]
서적
Badman, pp. 37–38.
[17]
서적
Leng, pp. 108, 110.
[18]
서적
George Harrison, p. 59.
[19]
서적
Spizer, p. 240.
[20]
뉴스
Bangladesh war: The article that changed history
https://www.bbc.co.u[...]
BBC News Online
2012-09-04
[21]
뉴스
Media coverage and the War of 1971
http://www.thedailys[...]
The Daily Star
2016-01-13
[22]
서적
Greene, p. 185.
[23]
서적
George Harrison, p. 60.
[24]
서적
Clayson, p. 309.
[25]
간행물
A Quiet Storm
Mojo
2001-07
[26]
서적
Madinger & Easter, p. 435.
[27]
서적
Leng, pp. 111, 115.
[28]
서적
O'Dell, pp. 195–96.
[29]
웹사이트
George Harrison – In His Own Words
http://www.superseve[...]
2013-03-15
[30]
서적
O'Dell, pp. 196–97.
[31]
서적
Rodriguez, p. 50.
[32]
간행물
The Editors of Rolling Stone, pp. 42, 123.
[33]
서적
O'Dell, p 197.
[34]
서적
George Harrison, plate XXXI, p. 399.
[35]
서적
Lavezzoli, p. 188.
[36]
서적
Badman, p. 38.
[37]
서적
Leng, p. 112.
[38]
서적
George Harrison, p. 220.
[39]
인터뷰
Interview with Kofi Annan, in ''The Concert for Bangladesh Revisited''.
[40]
서적
Leng, p. 114.
[41]
서적
Badman, pp. 39–40.
[42]
서적
Castleman & Podrazik, p. 103.
[43]
서적
Lavezzoli, p. 190.
[44]
서적
Lavezzoli, pp. 51, 190.
[45]
서적
Tillery, p. 98.
[46]
서적
Clayson, pp. 309, 310.
[47]
서적
Leng, p. 116.
[48]
서적
Clayson, pp. 308–09.
[49]
서적
Clayson, p. 311.
[50]
웹사이트
New York City
https://www.flickr.c[...]
EMI Records
1998
[51]
서적
Badman, p. 45.
[52]
서적
Tillery, p. 97.
[53]
서적
Woffinden, p. 49.
[54]
서적
Badman, p. 54.
[55]
서적
Greene, p. 187.
[56]
서적
Clayson, p. 310.
[57]
서적
Badman, p. 43.
[58]
서적
Olivia Harrison, p. 288.
[59]
서적
Heylin, p. 327.
[60]
서적
George Harrison, p. 61.
[61]
서적
Spizer, p. 241.
[62]
웹사이트
Peter Frampton
http://www.mcapozzol[...]
2012-05-16
[63]
서적
The Editors of ''Rolling Stone'', p. 122.
[64]
서적
Leng, pp. 111–12.
[65]
서적
Harry, p. 133.
[66]
서적
Spizer, pp. 240–41.
[67]
DVD
Klaus Voormann interview, in ''[[George Harrison: Living in the Material World]]'' DVD
2011
[68]
서적
O'Dell, p. 199.
[69]
서적
Leng, p. 119.
[70]
서적
Clayson, pp. 310, 311.
[71]
서적
Leng
[72]
서적
Greene
[73]
간행물
Rolling Stone
[74]
간행물
Interview with Tom Wilkes
Goldmine Magazine
2004-11-12
[75]
서적
Spizer
[76]
서적
Spizer
[77]
뉴스
Stephen Stills Plays at Garden In His First Solo Concert Here
https://www.nytimes.[...]
The New York Times
2019-08-13
[78]
서적
Crosby, Stills & Nash: The Biography
https://books.google[...]
Hachette Books
[79]
서적
Leng
[80]
서적
Doggett
[81]
서적
Heylin
[82]
서적
Sounes
[83]
인터뷰
Interview with Jann Wenner
[84]
서적
Lavezzoli
[85]
서적
Lavezzoli
[86]
뉴스
George Harrison et al.: Concert for Bangla Desh, Madison Square Garden, New York NY
http://www.rocksback[...]
The New York Times
1971-08-02
[87]
서적
Clayson
[88]
서적
Madinger & Easter
[89]
서적
Olivia Harrison
[90]
서적
Lavezzoli
[91]
서적
Castleman & Podrazik
[92]
서적
Woffinden
[93]
서적
Rodriguez
[94]
서적
Schaffner
[95]
서적
Woffinden
[96]
서적
Spizer
[97]
서적
Clayson
[98]
서적
Leng
[99]
서적
Madinger & Easter
[100]
Allmusic
Leon Russell Leon Live
"{{Allmusic |class=a[...]
AllMusic
2012-05-20
[101]
서적
Matovina
[102]
서적
Clayson
[103]
서적
Leng
[104]
서적
Heylin
[105]
간행물
Rolling Stone
[106]
서적
Schaffner
[107]
서적
O'Dell
[108]
서적
Madinger & Easter
[109]
서적
Clayson
[110]
서적
Leng
[111]
서적
The Editors of ''Rolling Stone''
[112]
웹인용
The Event Wound Up as a Love Feast
http://blogs.village[...]
Village Voice
1971-08-05
[113]
서적
The Editors of ''Rolling Stone''
[114]
서적
O'Dell
[115]
간행물
The Concert for Bangladesh
Sony BMG
[116]
서적
Badman
[117]
서적
Lavezzoli
[118]
서적
Heylin
[119]
서적
The New Rolling Stone Encyclopedia of Rock & Roll
[120]
기사
George Harrison et al: ''Concert for Bangla Desh''
http://www.rocksback[...]
2002-03
[121]
서적
Heylin
[122]
서적
The Editors of ''Rolling Stone''
[123]
웹인용
Who Clubbed the Clown?
http://blogs.village[...]
The Village Voice
1971-08-12
[124]
서적
Sounes
[125]
서적
Schaffner
[126]
서적
Woffinden
[127]
서적
Clayson
[128]
뉴스
Harrison & Friends Dish Out Super Concert for Pakistan Aid
https://books.google[...]
Billboard
1971-08-14
[129]
서적
Spizer
[130]
서적
The Editors of ''Rolling Stone''
[131]
서적
The Editors of ''Rolling Stone''
[132]
서적
Clayson
[133]
서적
Tillery
[134]
서적
Greene
[135]
서적
Clayson
[136]
서적
Lavezzoli
[137]
웹사이트
George Harrison's Concert for Bangladesh
http://www.gadflyonl[...]
2001-12-03
[138]
서적
Tillery
[139]
서적
Lavezzoli
[140]
서적
Leng
[141]
서적
Clayson
[142]
서적
Badman
[143]
서적
Olivia Harrison
[144]
서적
Castleman & Podrazik
[145]
서적
Rodriguez
[146]
서적
Clayson
[147]
뉴스
The Oval, Drugs and Rock'n'Roll
https://www.espncric[...]
ESPNcricinfo
2007-10-05
[148]
뉴스
All the Concert(s) for Bangladesh
https://www.dhakatri[...]
Dhaka Tribune
2019-11-28
[149]
서적
Badman
[150]
서적
Woffinden
[151]
서적
Clayson
[152]
서적
Badman
[153]
웹사이트
AC/DC
https://www.onlymelb[...]
2019-12-20
[154]
서적
Badman
[155]
뉴스
Bangladesh 'Beatle Hero' Move
http://news.bbc.co.u[...]
BBC News Online
2008-12-11
[156]
뉴스
George Harrison & Friends: The Concert for Bangladesh (Apple)
https://rocksbackpag[...]
The Guardian
1972-01-04
[157]
서적
Badman
[158]
서적
Harry
[159]
서적
Carr & Tyler
[160]
서적
Soocher
[161]
서적
Lavezzoli
[162]
서적
Woffinden
[163]
간행물
Sweet Sounds
https://web.archive.[...]
Time (magazine)
1972-04-17
[164]
서적
Clayson
[165]
서적
Badman
[166]
서적
The New Rolling Stone Encyclopedia of Rock & Roll
[167]
서적
Rodriguez
[168]
서적
Doggett
[169]
서적
Doggett
[170]
뉴스
Bangladesh: The Benefit That Almost Wasn't
Los Angeles Times
1985-06-02
[171]
서적
Harry
[172]
서적
Huntley
[173]
서적
Ingham
[174]
문서
The Concert for Bangladesh Revisited
[175]
웹사이트
The George Harrison Fund for UNICEF asks 'Help us save some lives': Concert for Bangladesh 40th Anniversary
http://www.unicefusa[...]
2011-10-13
[176]
서적
Richmond & Coffman
[177]
서적
Harry
[178]
웹사이트
"I'm With Cupid/AABF11"
https://web.archive.[...]
2015-12-05
[179]
웹사이트
"National Lampoon'' Issue #52 – Dessert"
http://www.marksvery[...]
2012-10-15
[180]
서적
Rodriguez
[181]
웹사이트
"National Lampoon Radio Dinner'' (1972)"
http://www.marksvery[...]
2012-10-21
[182]
웹사이트
Aerosmith 'Train Kept A-Rollin'
http://www.allmusic.[...]
2012-10-15
[183]
서적
Woffinden
[184]
인터뷰
Interview with Barry Feinstein
[185]
서적
Badman
[186]
서적
Leng
[187]
기타
当時彼等はロサンゼルスで、シャンカルの伝記映画『ラーガ』のサウンドトラック・アルバムを制作していた。
[188]
기타
シャンカルは東パキスタンがあったベンガル地方のバラモン|ブラフミンの出身で、犠牲になった親族もいたという。
[189]
서적
The Editors of Rolling Stone
[190]
인터뷰
Interviews with Charles J. Lyons and Kofi Annan
[191]
서적
Rodriguez
본 사이트는 AI가 위키백과와 뉴스 기사,정부 간행물,학술 논문등을 바탕으로 정보를 가공하여 제공하는 백과사전형 서비스입니다.
모든 문서는 AI에 의해 자동 생성되며, CC BY-SA 4.0 라이선스에 따라 이용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위키백과나 뉴스 기사 자체에 오류, 부정확한 정보, 또는 가짜 뉴스가 포함될 수 있으며, AI는 이러한 내용을 완벽하게 걸러내지 못할 수 있습니다.
따라서 제공되는 정보에 일부 오류나 편향이 있을 수 있으므로, 중요한 정보는 반드시 다른 출처를 통해 교차 검증하시기 바랍니다.
문의하기 : help@durumis.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