크로아티아 독립국의 세르브인 집단학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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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크로아티아 독립국의 세르브인 집단학살은 제2차 세계 대전 중 크로아티아 독립국(NDH)이 세르비아인, 유대인, 로마인 등을 대상으로 자행한 조직적인 학살을 의미한다. NDH는 나치 독일과 이탈리아 왕국의 괴뢰국으로, 안테 파벨리치가 이끄는 우스타샤 정권은 세르비아인을 제거하기 위한 정책을 추진했다. 이 과정에서 수십만 명의 세르비아인이 학살, 추방, 강제 개종되었으며, 야세노바츠를 비롯한 강제 수용소에서 끔찍한 만행이 자행되었다. 이러한 사건은 집단 학살로 규정되며, 전후 유고슬라비아와 크로아티아에서 역사적 논쟁의 대상이 되었다.
우스타샤 운동의 이념적 기원은 19세기 안테 스타르체비치가 권리당[1]을 창설하고, 요십 프랑크가 극단적인 분파를 이끌고 탈당하여 순수 권리당을 결성하면서 시작되었다.[2] 스타르체비치는 크로아티아 민족주의에 큰 영향을 주었으며, 대크로아티아 건설을 구상하고 반세르비아 정서를 보였다.[3] 그는 세르비아인을 "불결한 인종" 등으로 폄하했고, 그의 동료 유겐 크바테르니크는 크로아티아의 세르비아인의 존재를 부정했다. 밀로반 질라스는 스타르체비치를 "인종주의의 아버지"이자 우스타샤의 "이념적 아버지"라고 불렀다.
1941년 나치 독일과 이탈리아 왕국은 유고슬라비아 왕국을 침공하여 크로아티아 독립국이라는 괴뢰국을 세웠다.[77] 크로아티아 독립국은 세르브인과 동방 정교회 신자들을 학살하였다.[77]
2. 역사적 배경
프랑크의 당은 세르비아인을 크로아티아의 장애물로 여기는 스타르체비치의 입장을 받아들여 공격적인 반세르비아적 태도를 보였다. 이들의 추종자들은 프랑크주의자(''Frankovci'')로 불렸으며, 이후 우스타샤 운동의 주요 구성원이 되었다. 제1차 세계 대전 이후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이 붕괴되고 세르비아인, 크로아티아인 및 슬로베니아인 왕국(유고슬라비아)이 형성되면서, 프랑크주의자의 영향과 전쟁의 유산은 우스타샤 이념과 집단 학살에 영향을 미쳤다. 특히 오스트리아-헝가리 장교들은 세르비아인에 대한 민족 말살 계획을 지지했으며, 이는 우스타샤의 청사진을 제공했다.
20세기 초 크로아티아 지식인 이보 필라르, 치로 트루헬카, 밀란 슈플라이는 우스타샤의 국가 및 인종 정체성 개념과 세르비아인을 열등한 인종으로 보는 이론에 영향을 미쳤다. 필라르는 과학적 인종주의를 강조하며 크로아티아인은 북유럽-아리아인계, 세르비아인은 "블라크"와 "혼혈"이라고 주장했다. 트루헬카는 보스니아 무슬림이 인종적으로 우월한 크로아티아인이며, 세르비아인은 블라크의 "퇴화 인종"이라고 주장했다. 슈플라이는 크로아티아가 세르비아와의 통합으로 인해 "서구 문명의 방벽" 역할을 잃었다고 주장했다.
1918년 이후 크로아티아 민족주의의 발발은 유고슬라비아의 안정에 큰 위협이었다. 1920년대에 안테 파벨리치가 크로아티아 독립의 주요 대변인으로 부상했다. 그는 1927년 베니토 무솔리니와 비밀리에 접촉하여 분리주의 사상을 제시했다. 1928년 6월, 크로아티아 인민당(Hrvatska seljačka stranka|흐르바츠카 셀랴츠카 스트란카sh)의 지도자 스테판 라디치가 의회에서 푸니샤 라치치에게 치명상을 입었다. 이 사건은 자그레브에서 폭력적인 학생 시위를 촉발했다. 유고슬라비아의 알렉산더 1세는 독재를 선포하고 단일 유고슬라비아인 국가를 수립하려 했다.[4] 이는 분리주의 세력을 자극했고, 특히 크로아티아인과 마케도니아인 사이에서 그러했다. ''우스타샤 – 크로아티아 혁명 운동'' (Ustaša – Hrvatski revolucionarni pokret|우스타샤 – 흐르바츠키 레볼루치오나르니 포크레트hr)은 이러한 세력 중 가장 극단적인 운동으로, 1929년 말 또는 1930년 초 구스타브 페르체크와 안테 파벨리치에 의해 창설되었다.
우스타샤는 전간기 유고슬라비아 정부의 정책을 세르비아의 패권으로 묘사하며 자신들의 행동을 정당화했다. 그러나 요조 토마셰비치는 이러한 주장이 사실이 아니며, 실제로는 세르비아인도 시민 및 정치적 권리를 거부당했다고 반박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1920년대와 1930년대 세르비아가 지배하는 유고슬라비아 정부의 반크로아티아 정책과 라디치 암살은 크로아티아 민족주의 세력의 성장과 반세르비아 정책에 크게 기여했다.
우스타샤는 테러 조직으로도 기능했다. 비엔나에 첫 센터를 설립하고 반유고슬라비아 선전을 발전시켰다. 1932년 벨레비트 봉기를 조직하고, 1934년 알렉산더 왕 암살에 가담했다. 파벨리치는 파시스트적 경향을 보였으며, 베니토 무솔리니의 재정적, 이념적 지원을 받았다.[5] 1930년대 나치 독일과의 관계가 강화되면서 파벨리치의 크로아티아 민족 개념은 점점 더 인종 중심적이 되었다.
한편, 당시 크로아티아의 알로이시우스 스테피나츠(Aloysius Stepinac) 대주교는 1941년 4월 14일 나치의 발칸반도 점령을 환영하는 성명을 발표했다.[77] 아브로 맨하탄(Avro Manhattan)은 저서 《바티칸 대학살([http://www.reformation.org/holocaus.html The Vatican's Holocaust])》(1986)에서 이 학살이 로마 가톨릭 교회에 의해 조직적으로 자행되었으며, 우스타샤의 무기가 가톨릭 국가들을 통해 지원되었고, 바티칸의 계획하에 유고슬라비아 왕국의 멸망과 친 가톨릭 독립국가 설립이 기획되었다고 주장했다.[78]
2. 1. 우스타샤 이념의 형성
안테 스타르체비치는 우스타샤의 크로아티아 민족주의에 중요한 이념적 영향을 미쳤다.[1][2] 그는 크로아티아의 통일과 독립을 주장했으며, 합스부르크 왕조에 반대하고 반세르비아 정서를 드러냈다.[3] 스타르체비치는 보스니아인, 세르비아인, 슬로베니아인이 거주하는 영토를 포함하는 대크로아티아 건설을 구상했고, 보스니아인과 세르비아인을 이슬람교와 동방 정교회로 개종한 크로아티아인으로 보았다. 그는 세르비아인을 "불결한 인종", "유목 민족", "노예 민족, 가장 혐오스러운 짐승" 등으로 폄하했다. 그의 공동 창립자인 유겐 크바테르니크는 크로아티아의 세르비아인의 존재를 부정하고 그들의 정치적 의식을 위협으로 간주했다. 밀로반 질라스는 스타르체비치를 "인종주의의 아버지"이자 우스타샤의 "이념적 아버지"라고 불렀으며, 일부 우스타샤 이데올로그는 그의 인종적 사상을 아돌프 히틀러의 인종 이데올로기와 연결했다.
요십 프랑크의 당은 세르비아인이 크로아티아의 정치적, 영토적 야망에 대한 장애물이라는 스타르체비치의 견해를 수용했으며, 공격적인 반세르비아적 태도는 당의 주요 특징 중 하나였다. 초국가주의적인 순수 권리당의 추종자들은 프랑크주의자(Frankovci)로 알려졌고, 이들은 이후 우스타샤 운동의 주요 구성원이 되었다. 제1차 세계 대전에서 중앙 열강의 패배와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의 붕괴 이후, 프랑크주의자의 영향과 제1차 세계 대전의 유산은 우스타샤 이념과 미래의 집단 학살에 영향을 주었다.
20세기 초 크로아티아 지식인 이보 필라르, 치로 트루헬카, 밀란 슈플라이는 우스타샤의 국가 및 인종 정체성 개념뿐만 아니라 세르비아인을 열등한 인종으로 보는 이론에 영향을 미쳤다. 필라르는 과학적 인종주의를 강조하며 크로아티아인은 "북유럽-아리아인"의 인종적, 문화적 유산으로 정의한 반면, 세르비아인은 "블라크"와 "혼혈"되었다고 주장했다. 트루헬카는 보스니아 무슬림이 인종적으로 우월한 북유럽 인종에 속하는 민족 크로아티아인이라고 주장했고, 세르비아인은 블라크의 "퇴화 인종"에 속한다고 주장했다. 슈플라이는 크로아티아가 1918년 유고슬라비아 국가가 형성될 때 세르비아와의 통합으로 인해 잃었다고 주장하는 "수세기 동안 서구 문명의 가장 강력한 방벽 중 하나"였다고 주장했다.
1920년대에 변호사이자 정치인이며 프랑크주의자 중 한 명인 안테 파벨리치가 크로아티아 독립의 주요 대변인으로 떠올랐다. 1927년, 그는 이탈리아의 독재자이자 파시즘의 창시자인 베니토 무솔리니와 비밀리에 접촉하여 자신의 분리주의 사상을 제시했다. 파벨리치는 크로아티아인의 모든 역사적, 민족적 지역을 포함하는 독립적인 대크로아티아를 제안했다.
1928년 6월, 크로아티아 인민당(Hrvatska seljačka stranka|흐르바츠카 셀랴츠카 스트란카sh)의 지도자인 스테판 라디치는 의회 의사당에서 푸니샤 라치치에 의해 치명상을 입었다. 유고슬라비아의 알렉산더 1세는 "통합 유고슬라비아주의"와 단일 유고슬라비아인 국가를 수립하기 위해 독재를 선포했다.[4] 왕정 독재의 도입은 분리주의 세력을 전면에 내세웠고, 특히 크로아티아인과 마케도니아인 사이에서 그러했다. ''우스타샤 – 크로아티아 혁명 운동'' (Ustaša – Hrvatski revolucionarni pokret|우스타샤 – 흐르바츠키 레볼루치오나르니 포크레트hr)은 이러한 세력 중 가장 극단적인 운동으로 부상했다. 우스타샤는 언론인 구스타브 페르체크와 안테 파벨리치에 의해 창설되었다. 그들은 세르비아인과 세르비아에 대한 깊은 증오에 사로잡혀 있었으며, "크로아티아인과 세르비아인은 서로 함께 살 수 없도록 하는 메울 수 없는 문화적 심연에 의해 분리되어 있다"고 주장했다.
우스타샤 지지자들은 제2차 세계 대전 전부터 집단 학살을 계획했는데, 예를 들어 파벨리치의 주요 이데올로그 중 한 명인 미요 바비치는 1932년에 우스타샤가 "크로아티아 국민의 건강한 몸에서 썩은 것을 정화하고 잘라낼 것"이라고 썼다. 1933년, 우스타샤는 운동의 공식 이데올로기를 형성하는 "17가지 원칙"을 발표했다.
우스타샤는 테러 조직으로도 기능했다. 최초의 우스타샤 센터는 비엔나에 설립되었고, 여기에서 곧 반유고슬라비아 선전이 발전했고, 테러 행위를 위한 요원들이 준비되었다. 그들은 1932년 리키의 브루샤니 마을에서 경찰서를 공격하는 소위 벨레비트 봉기를 조직했다. 1934년, 우스타샤는 불가리아, 헝가리 및 이탈리아의 우익 극단주의자들과 협력하여 알렉산더 왕이 프랑스 도시 마르세유를 방문하는 동안 그를 암살했다. 파벨리치의 파시스트적 경향이 분명했다. 우스타샤 운동은 베니토 무솔리니의 재정적, 이념적 지원을 받았다.[5] 1930년대 나치 독일과의 관계가 강화되면서 파벨리치의 크로아티아 민족 개념은 점점 더 인종 중심적이 되었다.
2. 2. 유고슬라비아 왕국의 불안정
우스타샤 운동의 이념적 기반은 19세기 안테 스타르체비치가 권리당[1]을 창설하고, 요십 프랑크가 극단적인 분파를 이끌고 탈당하여 순수 권리당을 결성하면서 시작되었다.[2] 스타르체비치는 크로아티아 민족주의에 큰 영향을 주었으며, 대크로아티아 건설을 구상하고 반세르비아 정서를 보였다.[3] 그는 세르비아인을 "불결한 인종" 등으로 폄하했고, 그의 동료 유겐 크바테르니크는 크로아티아의 세르비아인의 존재를 부정했다. 밀로반 질라스는 스타르체비치를 "인종주의의 아버지"이자 우스타샤의 "이념적 아버지"라고 불렀다.
프랑크의 당은 세르비아인을 크로아티아의 장애물로 여기는 스타르체비치의 입장을 받아들여 공격적인 반세르비아적 태도를 보였다. 이들의 추종자들은 프랑크주의자(''Frankovci'')로 불렸으며, 이후 우스타샤 운동의 주요 구성원이 되었다. 제1차 세계 대전 이후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이 붕괴되고 세르비아인, 크로아티아인 및 슬로베니아인 왕국(유고슬라비아)이 형성되면서, 프랑크주의자의 영향과 전쟁의 유산은 우스타샤 이념과 집단 학살에 영향을 미쳤다. 특히 오스트리아-헝가리 장교들은 세르비아인에 대한 민족 말살 계획을 지지했으며, 이는 우스타샤의 청사진을 제공했다.
20세기 초 크로아티아 지식인 이보 필라르, 치로 트루헬카, 밀란 슈플라이는 우스타샤의 국가 및 인종 정체성 개념과 세르비아인을 열등한 인종으로 보는 이론에 영향을 미쳤다. 필라르는 과학적 인종주의를 강조하며 크로아티아인은 북유럽-아리아인계, 세르비아인은 "블라크"와 "혼혈"이라고 주장했다. 트루헬카는 보스니아 무슬림이 인종적으로 우월한 크로아티아인이며, 세르비아인은 블라크의 "퇴화 인종"이라고 주장했다. 슈플라이는 크로아티아가 세르비아와의 통합으로 인해 "서구 문명의 방벽" 역할을 잃었다고 주장했다.
1918년 이후 크로아티아 민족주의의 발발은 유고슬라비아의 안정에 큰 위협이었다. 1920년대에 안테 파벨리치가 크로아티아 독립의 주요 대변인으로 부상했다. 그는 1927년 베니토 무솔리니와 비밀리에 접촉하여 분리주의 사상을 제시했다.
1928년 6월, 크로아티아 인민당(Hrvatska seljačka stranka|흐르바츠카 셀랴츠카 스트란카sh)의 지도자 스테판 라디치가 의회에서 푸니샤 라치치에게 치명상을 입었다. 라치치는 몬테네그로 세르비아인 지도자이자 집권 세르비아 인민 급진당의 부통령이었다. 이 사건은 자그레브에서 폭력적인 학생 시위를 촉발했다. 유고슬라비아의 알렉산더 1세는 독재를 선포하고 단일 유고슬라비아인 국가를 수립하려 했다.[4] 이는 분리주의 세력을 자극했고, 특히 크로아티아인과 마케도니아인 사이에서 그러했다. ''우스타샤 – 크로아티아 혁명 운동'' (Ustaša – Hrvatski revolucionarni pokret|우스타샤 – 흐르바츠키 레볼루치오나르니 포크레트hr)은 이러한 세력 중 가장 극단적인 운동으로, 1929년 말 또는 1930년 초 구스타브 페르체크와 안테 파벨리치에 의해 창설되었다. 이들은 세르비아에 대한 깊은 증오를 품고 있었으며, "크로아티아인과 세르비아인은 메울 수 없는 문화적 심연에 의해 분리되어 있다"고 주장했다. 파벨리치는 베오그라드 정부를 비난했다. 우스타샤 지지자들은 제2차 세계 대전 전부터 집단 학살을 계획했다. 1933년, 우스타샤는 "17가지 원칙"을 발표하여 크로아티아 민족의 독특성을 명시하고 집단적 권리를 옹호하며, 크로아티아인이 아닌 사람들은 정치 생활에서 배제될 것이라고 선언했다.
우스타샤는 전간기 유고슬라비아 정부의 정책을 세르비아의 패권으로 묘사하며 자신들의 행동을 정당화했다. 그러나 요조 토마셰비치는 이러한 주장이 사실이 아니며, 실제로는 세르비아인도 시민 및 정치적 권리를 거부당했다고 반박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1920년대와 1930년대 세르비아가 지배하는 유고슬라비아 정부의 반크로아티아 정책과 라디치 암살은 크로아티아 민족주의 세력의 성장과 반세르비아 정책에 크게 기여했다.
우스타샤는 테러 조직으로도 기능했다. 비엔나에 첫 센터를 설립하고 반유고슬라비아 선전을 발전시켰다. 1932년 벨레비트 봉기를 조직하고, 1934년 알렉산더 왕 암살에 가담했다. 파벨리치는 파시스트적 경향을 보였으며, 베니토 무솔리니의 재정적, 이념적 지원을 받았다.[5] 1930년대 나치 독일과의 관계가 강화되면서 파벨리치의 크로아티아 민족 개념은 점점 더 인종 중심적이 되었다.
3. 크로아티아 독립국
1941년 4월, 유고슬라비아 왕국은 추축국에 의해 침공당했다. 나치군이 1941년 4월 10일 자그레브에 진입한 후, 안테 파벨리치의 최측근인 슬라브코 크바테르니크는 라디오 자그레브 방송을 통해 크로아티아 독립국(NDH)의 형성을 선포했다. 파벨리치와 수백 명의 우스타샤 자원병들은 이탈리아에 있는 그들의 수용소를 떠나 자그레브로 이동했고, 파벨리치는 1941년 4월 16일 새로운 정부를 선포했다.[77] 그는 스스로를 "포글라브니크(Poglavnik)"(Führer|지도자de)라는 칭호를 사용했다. NDH는 현대 크로아티아의 대부분, 현대 보스니아 헤르체고비나의 전체, 현대 세르비아의 일부를 결합하여 "이탈리아-독일 준보호령"을 형성했다. 세르비아인은 NDH 인구의 약 30%를 차지했다. NDH는 완전한 주권을 갖지 못했지만, 독일 점령 유럽에서 다른 어떤 정권보다 큰 자치를 누린 괴뢰 국가였다. 크로아티아 독립국은 크로아티아의 "민족적, 역사적 영토" 위에 선포되었다.
우스타샤는 민족적으로 순수한 국가를 만드는 데 집착했다. 우스타샤 장관 밀레 부닥, 미르코 푸크, 밀로반 자니치에 의해 개략적으로 설명된, 민족적으로 순수한 크로아티아를 달성하기 위한 전략은 다음과 같았다.
# 세르비아인의 3분의 1을 죽인다.
# 세르비아인의 3분의 1을 추방한다.
# 세르비아인의 3분의 1을 강제로 가톨릭교로 개종시킨다.
역사학자 이보 골드스타인에 따르면, 이 공식은 발표되지 않았지만 우스타샤가 세르비아인에게 적용한 것은 부인할 수 없다.
우스타샤 운동은 일반 크로아티아인들의 제한적인 지지를 받았다. 1941년 5월, 우스타샤는 약 10만 명의 회원을 보유했다. 블라드코 마체크가 크로아티아 농민당 지지자들에게 안테 파벨리치의 새로운 정권에 협력할 것을 요구했기 때문에, 당의 기구와 이전 크로아티아 바노비나의 관리들을 사용할 수 있었다.
역사학자 이리나 오그냐노바는 NDH와 제3제국의 유사점에는 공포와 대량 학살이 국가 보존에 필수적이라는 가정이 포함되어 있다고 말했다. 빅토르 구티치는 1941년 초여름 연설을 통해 세르비아인을 "과거의 적"이자 제거해야 할 "원치 않는 요소"라고 부르며, 그들의 대의를 지지하지 않는 크로아티아인들을 위협했다. 우스타샤 이데올로기 대부분은 나치의 인종 이론에 기초했다. 나치와 마찬가지로 우스타샤는 유대인, 로마인, 슬라브인을 하위 인간(''언터멘쉬'')으로 간주했다. 그들은 크로아티아인이 슬라브인이 아니라 게르만 민족이라는 독일 인종 이론가들의 주장을 지지했다. 따라서 세르비아인, 유대인, 로마인에 대한 그들의 대량 학살은 나치 인종 이데올로기의 표현이었다. 아돌프 히틀러는 세르비아인에게 벌을 주기 위해 파벨리치를 지지했다. 역사학자 마이클 페이어는 나치의 유럽의 모든 유대인 학살 결정이 1941년 후반, 6월 말에 시작된 것으로 추정되는데, 만약 이것이 사실이라면 크로아티아의 대량 학살은 나치의 유대인 학살보다 먼저 시작되었음을 의미한다고 설명했다. 조나단 스타인버그는 NDH의 세르비아인에 대한 범죄가 "제2차 세계 대전 중 시도된 가장 초기의 완전한 대량 학살"이라고 말했다.
안드리야 아르투코비치는 여러 인종 차별 법안에 서명했다. 1941년 4월 30일, 정부는 "인종의 법적 질서"와 "아리안 혈통과 크로아티아 국민의 명예를 보호하는 법적 질서"를 채택했다. 약 75만 명의 보스니아 무슬림이 아리아인으로 선포되었다. 도널드 블록스햄과 로버트 게르바르트는 세르비아인이 인종 차별 법과 살해의 주요 대상이었다고 결론지었다. 우스타샤는 세르비아인의 시민권, 생계, 재산을 박탈하는 법을 도입했다. 제3제국의 유대인과 마찬가지로 세르비아인도 "P"자(Pravoslavac(정교회))가 새겨진 팔찌를 착용해야 했다. 우스타샤 작가들은 비인간화 수사를 채택했다. 1941년, 키릴 문자의 사용이 금지되었고, 1941년 6월에는 크로아티아어에서 "동부" (세르비아) 단어를 제거하는 것과 세르비아 학교의 폐쇄가 시작되었다. 안테 파벨리치는 "크로아티아 언어 사무소"를 통해 새로운 단어를 만들고 많은 세르비아 단어를 제거하도록 명령했다.
우스타샤의 유대인과 로마인에 대한 박해는 체계적이었고 나치 정책의 시행을 나타냈지만, 세르비아인에 대한 박해는 농촌 지역에서 더 큰 세르비아인 인구로 인해 더 많은 변동을 겪으며 시행된, 더 강력한 "토착적" 형태의 증오에 뿌리를 두고 있었다. 이는 정권에 대한 지지를 약화시키고, 세르비아 반란을 부추기며, NDH의 안정을 위태롭게 함에도 불구하고 그렇게 이루어졌다. 세르비아 공동체에 가해진 폭력의 정도는 잘 구조화된 정책보다는 각 지역 우스타샤 군벌의 상호 관계와 성향에 더 많이 의존하는 경우가 많았다.
3. 1. 인종 정책의 실행
알로이시우스 스테피나츠 대주교는 1941년 4월 14일 나치의 발칸반도 점령을 환영하며, 하느님이 아돌프 히틀러와 안테 파벨리치를 인도하여 압제자를 쫓아냈다고 찬양했다.[77]
안테 파벨리치는 순수한 가톨릭 국가 건설을 위해 가톨릭 교리 준수를 의무화하고, 비가톨릭교도를 공공기관과 학교에서 추방했다. 세르브인들이 사용하는 키릴 문자 사용을 금지하고, 가톨릭 신자와 이교도의 결혼을 금지했으며, 공공시설에 '세르브인, 유대인, 집시, 개는 출입금지'라는 팻말을 부착하게 했다. 또한 '위험 인물(세르브인, 유대인, 집시 등 비가톨릭교도)' 제거 작업을 통해 인종 청소를 병행했다.[77]
아브로 맨해튼은 저서 《바티칸 대학살》(1986)에서 이 학살이 로마 가톨릭 교회에 의해 조직적으로 자행되었으며, 우스타샤가 가톨릭 국가들로부터 무기를 지원받고 바티칸의 계획하에 유고슬라비아 왕국 멸망과 친가톨릭 독립국가 설립이 기획되었다고 주장했다. 안테 파벨리치는 바티칸의 지원 속에 유고슬라비아 국왕을 암살하고 우스타샤를 이끌었으며, 2차대전 후 바티칸의 도움으로 남미로 탈출했다. 야세노바츠 강제 수용소 등 절멸 수용소 간부들 대다수가 로마 가톨릭 교회 사제들이었다는 점이 기획 학살설을 뒷받침한다.[78]
당시 많은 가톨릭 성직자들이 조직적인 학살을 주도했다. 프란치스코 수도회 소속 투고미레 솔도 수사는 1941년 대학살을 주도했고, 보지다르 브랄로우 신부는 180명의 세르브인들을 기관총으로 사살한 후 시신 앞에서 춤을 췄다.[81] 드라구틴 캄버 신부는 300명 가까운 세르비아인 학살을 명령했고, 슬로베니아의 그레고리 로즈만 주교는 나치 협력자로 수배되었으며, 사라예보의 이반 사릭 주교는 ‘세르브인들의 교수형 집행인’으로 불렸다. 야세노바츠 강제 수용소 책임자는 프란시스카 수도회 수도승인 밀로슬라브 마지스토로비치였다. 드라가노비츠 신부는 수십만 세르브인 학살 책임자이자, 쥐구멍 라인을 통해 나치 전범들을 남미로 탈출시킨 인물이다. 스테피나츠 대주교 역시 대학살에 연루되었음에도 성인이 되었다.[82]
처음에는 종교적 이유로 사람이 살해된다는 것을 믿기 어려웠으나, 생존자들의 증언과 편지들을 통해 사건의 진상이 알려졌다. 반가톨릭, 반크로아티아 선동이라는 반대 소문도 있었으나, 유고슬라비아의 밀로쉬 세쿠리츠 박사가 세르비아 정교회 주교들의 사명을 받고 런던의 연합국 본부에 우스타샤의 만행을 알리는 문서를 전달하면서 사건이 유럽에 알려졌다. 유고슬라비아 망명정부 내 가톨릭 교도들은 연합국과의 관계 유지를 위해 침묵을 주장했으나, 1942년 1월 3일 〈뉴스 크로니클〉지와 〈데일리 텔레그래프〉지가 세르비아 학살을 보도했다. 가톨릭 교회는 사건 축소 및 왜곡 캠페인을 벌였고, 세쿠리츠 박사를 나치 첩보원으로 몰았으나, 그가 가져온 사진 증거 등으로 인해 은폐는 실패했다. 아브로 맨해튼은 세쿠리츠 박사, 미르코비치 장군, 희생자 가족들을 만나 자료를 수집하여 1953년 책을 출판했다.
가톨릭 신자였던 유고슬라비아 왕국의 장관 그리조고노는 바티칸에 항의문을 보내, 가톨릭 교회가 학살에 동참했으며, 사제들이 수용소 담당 및 소대 대장이 되어 정교회 신자들을 고문하고 학살했다고 비판했다. 교황청은 학살 사실을 부인하지 않았고, 베오그라드의 가톨릭 대주교 우칙스 박사는 그리조고노에게 학살 사실을 알고 있으며 바티칸에 알리겠다는 답장을 보냈다.[83]
1941년 4월, 유고슬라비아 왕국은 추축국에 의해 침공당했다. 나치군이 자그레브에 진입한 후, 슬라브코 크바테르니크는 크로아티아 독립국(NDH) 형성을 선포했다. 안테 파벨리치는 스스로를 "포글라브니크"(Führer|지도자de)라는 칭호를 사용했다. NDH는 현대 크로아티아, 보스니아 헤르체고비나, 세르비아 일부를 결합한 "이탈리아-독일 준보호령"이었다. 세르비아인은 NDH 인구의 약 30%를 차지했다. NDH는 완전한 주권은 없었지만, 독일 점령 유럽에서 다른 어떤 정권보다 큰 자치를 누린 괴뢰 국가였다.
우스타샤는 민족적으로 순수한 국가를 만드는 데 집착했다. 우스타샤 장관 밀레 부닥, 미르코 푸크, 밀로반 자니치에 의해 개략적으로 설명된, 민족적으로 순수한 크로아티아를 달성하기 위한 전략은 다음과 같았다.
# 세르비아인의 3분의 1을 죽인다.
# 세르비아인의 3분의 1을 추방한다.
# 세르비아인의 3분의 1을 강제로 가톨릭교로 개종시킨다.
역사학자 이보 골드스타인에 따르면, 이 공식은 발표되지 않았지만 우스타샤가 세르비아인에게 적용한 것은 부인할 수 없다.
우스타샤 운동은 일반 크로아티아인들의 제한적인 지지를 받았다. 1941년 5월, 우스타샤는 약 10만 명의 회원을 보유했다. 블라드코 마체크가 크로아티아 농민당 지지자들에게 안테 파벨리치의 새로운 정권에 협력할 것을 요구했기 때문에, 당의 기구와 이전 크로아티아 바노비나의 관리들을 사용할 수 있었다.
역사학자 이리나 오그냐노바는 NDH와 제3제국의 유사점에는 공포와 대량 학살이 국가 보존에 필수적이라는 가정이 포함되어 있다고 말했다. 빅토르 구티치는 1941년 초여름 연설을 통해 세르비아인을 "과거의 적"이자 제거해야 할 "원치 않는 요소"라고 부르며, 그들의 대의를 지지하지 않는 크로아티아인들을 위협했다. 우스타샤 이데올로기 대부분은 나치의 인종 이론에 기초했다. 나치와 마찬가지로 우스타샤는 유대인, 로마인, 슬라브인을 하위 인간(''언터멘쉬'')으로 간주했다. 그들은 크로아티아인이 슬라브인이 아니라 게르만 민족이라는 독일 인종 이론가들의 주장을 지지했다. 따라서 세르비아인, 유대인, 로마인에 대한 그들의 대량 학살은 나치 인종 이데올로기의 표현이었다. 아돌프 히틀러는 세르비아인에게 벌을 주기 위해 파벨리치를 지지했다. 역사학자 마이클 페이어는 나치의 유럽의 모든 유대인 학살 결정이 1941년 후반, 6월 말에 시작된 것으로 추정되는데, 만약 이것이 사실이라면 크로아티아의 대량 학살은 나치의 유대인 학살보다 먼저 시작되었음을 의미한다고 설명했다. 조나단 스타인버그는 NDH의 세르비아인에 대한 범죄가 "제2차 세계 대전 중 시도된 가장 초기의 완전한 대량 학살"이라고 말했다.
안드리야 아르투코비치는 여러 인종 차별 법안에 서명했다. 1941년 4월 30일, 정부는 "인종의 법적 질서"와 "아리안 혈통과 크로아티아 국민의 명예를 보호하는 법적 질서"를 채택했다. 약 75만 명의 보스니아 무슬림이 아리아인으로 선포되었다. 도널드 블록스햄과 로버트 게르바르트는 세르비아인이 인종 차별 법과 살해의 주요 대상이었다고 결론지었다. 우스타샤는 세르비아인의 시민권, 생계, 재산을 박탈하는 법을 도입했다. 제3제국의 유대인과 마찬가지로 세르비아인도 "P"자(Pravoslavac(정교회))가 새겨진 팔찌를 착용해야 했다. 우스타샤 작가들은 비인간화 수사를 채택했다. 1941년, 키릴 문자의 사용이 금지되었고, 1941년 6월에는 크로아티아어에서 "동부" (세르비아) 단어를 제거하는 것과 세르비아 학교의 폐쇄가 시작되었다. 안테 파벨리치는 "크로아티아 언어 사무소"를 통해 새로운 단어를 만들고 많은 세르비아 단어를 제거하도록 명령했다.
우스타샤의 유대인과 로마인에 대한 박해는 체계적이었고 나치 정책의 시행을 나타냈지만, 세르비아인에 대한 박해는 농촌 지역에서 더 큰 세르비아인 인구로 인해 더 많은 변동을 겪으며 시행된, 더 강력한 "토착적" 형태의 증오에 뿌리를 두고 있었다. 이는 정권에 대한 지지를 약화시키고, 세르비아 반란을 부추기며, NDH의 안정을 위태롭게 함에도 불구하고 그렇게 이루어졌다. 세르비아 공동체에 가해진 폭력의 정도는 잘 구조화된 정책보다는 각 지역 우스타샤 군벌의 상호 관계와 성향에 더 많이 의존하는 경우가 많았다.
NDH의 무장 병력, 크로아티아 국토 방위군(''도모브라니'')과 우스타샤 민병대에 의해 다수의 학살이 자행되었다. 우스타샤 민병대는 1941년에 5개(나중에는 15개)의 700명 규모의 대대, 2개의 철도 경비 대대, 그리고 정예 흑군단과 포글라브니크 호위 대대(나중에는 여단)로 조직되었다. 이들은 주로 교육받지 못한 인구와 노동자 계급에서 모집되었다. 민병대에는 크로아티아계 외에도 이슬람교도도 포함되어 있었으며, 이들이 구성원의 약 30%를 차지했다.
세르비아인에 대한 폭력은 1941년 4월에 시작되었으며, 처음에는 그 범위가 제한되어 주로 세르비아 지식인을 대상으로 했다. 그러나 7월이 되면서 폭력은 "무차별적이고 광범위하며 체계적인" 양상을 띠게 되었다. 세르비아인에 대한 학살은 필요성과 효율성을 위해 세르비아인이 많이 거주하는 혼합 지역에 집중되었다.
1941년 여름, 우스타샤 민병대와 암살단은 마을을 불태우고 수천 명의 세르비아 민간인을 잔인하게 살해했다. 남성, 여성, 어린이는 난도질당하고, 산 채로 구덩이와 협곡에 던져지거나, 교회에서 불태워졌다. 총기는 거의 사용되지 않았으며, 칼, 도끼 등이 더 흔하게 사용되었다. 세르비아인 희생자들은 사지가 절단되었고, 귀와 혀가 잘리고 눈이 도려내졌다. Srebrenica와 Ozren 근처의 일부 세르비아 마을은 완전히 학살되었고, Vlasenica와 Kladanj 사이의 마을에서는 아이들이 말뚝에 꿰인 채 발견되었다. 우스타샤의 잔혹함과 가학성은 나치 지휘관들조차 충격에 빠뜨렸다. 게스타포의 하인리히 힘러 친위대 국참모에게 보낸 1942년 2월 17일자 보고서에는 다음과 같이 명시되어 있다. "반군 밴드의 활동 증가는 주로 우스타샤 부대가 크로아티아에서 정교회 인구를 상대로 자행한 잔학 행위로 인한 것이다. 우스타샤는 징집 연령의 남성뿐만 아니라 특히 무력한 노인, 여성, 어린이를 상대로 야만적인 방식으로 범행을 저질렀다. 크로아티아인들이 학살하고 고문하여 죽인 정교회의 수는 약 30만 명이다."
우스타샤가 범행을 저지를 때 냉병기를 선호한 것은 부분적으로 전쟁 초기에 탄약과 총기가 부족했기 때문이지만, 칼의 사용을 통해 폭력 숭배와 개인적인 살상에 정권이 부여한 중요성을 보여주기도 했다.
찰스 킹은 대량 학살과 집단 학살 연구에서 수용소가 중심적인 위치를 잃어가고 있다고 강조했는데, 이는 희생자의 상당수가 대량 처형, 협곡 및 구덩이에서 사망했기 때문이다. 그는 크로아티아를 포함한 독일 동맹국의 행동과 마을 수준의 소수 민족 제거도 중요한 역할을 했다고 설명했다.
4. 강제 수용소와 절멸 수용소
우스타샤는 1941년 봄에 임시 강제 수용소를 설치했으며, 가을에는 영구 수용소 네트워크의 기반을 마련했다. 세르비아인에 대한 강제 수용소와 학살 계획은 1941년 훨씬 이전에 우스타샤 지도부에 의해 계획되었다. 자그레브에서 열린 우스타샤 국가 전시회에서 수용소는 생산적이고 "평화로운 노동 수용소"로 묘사되었으며, 미소를 짓는 수감자들의 사진이 전시되었다.
세르비아인, 유대인, 로마인은 체포되어 야세노바츠, 스타라 그리슈카, 고스피치 및 야도브노와 같은 강제 수용소로 보내졌다. 역사학자 요조 토마세비치는 야도브노 강제 수용소 자체가 수감자들이 처형되고 버려진 벨레비트산에 위치한 구덩이로 가는 "중간 기착지" 역할을 했다고 묘사했다.
가장 크고 악명 높은 수용소는 야세노바츠-스타라 그리슈카 단지였으며, 발칸 지역에서 가장 큰 학살 수용소였다.[8] 약 10만 명의 수감자가 그곳에서 사망했으며, 대부분이 세르비아인이었다.[9] 크로아티아 수용소 전체의 사령관인 브예코슬라브 루부리치는 1942년 10월 9일 의식에서 야세노바츠 수용소의 "효율성"을 자랑하며, "우리는 야세노바츠에서 오스만 제국이 유럽을 점령하는 동안 할 수 있었던 것보다 더 많은 사람들을 학살했습니다."라고 언급했다.
강과 두 개의 철조망 울타리로 둘러싸여 탈출이 불가능했던 야세노바츠 수용소는 5개의 수용소로 나뉘었는데, 처음 두 개는 1941년 12월에 폐쇄되었고, 나머지는 전쟁이 끝날 때까지 운영되었다. 야세노바츠에서는 주로 기아, 질병(특히 장티푸스), 망치, 곤봉, 도끼, 독, 칼에 의한 공격 등의 잔혹한 일대일 폭력이 자행되었다. Srbosjek|스르보세크hr ("세르비아인 절단기")는 목을 베도록 설계된 곡선 칼날이 부착된 장갑이었다.
4. 1. 아동 강제 수용소
크로아티아 독립국은 어린이만을 위해 특별히 수용소를 세운 유일한 추축국 위성국이었다.[12] 시사크, 자코보, 야스트레바르스코에는 어린이들을 위한 특별 수용소가 있었고, 스타라 그리디슈카에는 수천 명의 어린이와 여성들이 수용되어 있었다.[13][14] 역사가 토미슬라프 둘리치는 국가에 위협이 될 수 없는 유아와 어린이들을 체계적으로 살해한 것은 우스타샤의 대량 학살이 집단 학살적 성격을 띠고 있다는 중요한 증거라고 설명했다.홀로코스트 및 집단 학살 생존자들은 우스타샤가 어린이들의 손을 잘랐으며, "붓으로 아이들의 입에 액체를 발라" 아이들이 비명을 지르며 나중에 죽게 만들었다고 증언했다.[12] 시사크 수용소 사령관이자 의사인 안툰 나이체르는 생존자들로부터 "크로아티아의 멩겔레"라는 별명을 얻었다.[12]
오스트리아 출신의 인도주의자 디아나 부디사블리에비치는 구조 작전을 수행하여 우스타샤 수용소에서 15,000명 이상의 어린이를 구출했다.[13][14]
4. 2. 주요 수용소 목록
크로아티아 독립국에는 총 22~26개의 수용소가 있었다.[84] 이 중 가장 크고 악명 높았던 수용소는 야세노바츠-스타라 그리슈카 단지로, 발칸 지역에서 가장 큰 학살 수용소였다.[8] 주요 수용소는 다음과 같다.수용소 이름 | 사망자 수 (추정) | 희생자 구성 | 비고 |
---|---|---|---|
야세노바츠 (I–IV) | 약 100,000명 | 최소 52,000명 세르비아인 | 5개의 수용소로 구성, 시글라나(야세노바츠 III)는 사망률 88%로 아우슈비츠보다 높았음[9] |
스타라 그리디슈카 (야세노바츠 V) | 12,000명 이상 | 대부분 세르비아인 | 여성과 어린이 수용 |
고스피치 | 24,000명 ~ 42,000명 | 주로 세르비아인 | 벨레비트산 구덩이로 가는 중간 기착지 역할[15] |
야도브노 | 15,000명 ~ 48,000명 | 세르비아인, 유대인 | |
슬라나 및 메타나 | 4,000명 ~ 12,000명 | 세르비아인, 유대인, 공산주의자 | |
시사크 | 1,152명 ~ 1,630명 | 대부분 세르비아인 어린이 (총 6,693명 수용) | |
다니차 | 약 5,000명 이송, 일부 처형 | 주로 세르비아인 | |
야스트레바르스코 | 449명 ~ 1,500명 | 세르비아 어린이 (총 3,336명 수용) | |
크루슈치차 | 3,000명 | 유대인, 세르비아인 (총 5,000명 수용) | |
자코보 | 최소 569명 | 유대인, 세르비아 여성 및 어린이 (총 3,800명 수용) | |
로보르 | 최소 200명 | 유대인, 세르비아 여성 및 어린이 (총 2,000명 수용) | |
케르스티네츠 | 85명 | 세르비아인, 유대인, 공산주의자 (총 111명 체포) | |
사유미슈테 | 20,000명 ~ 23,000명 | 세르비아인, 유대인, 로마인, 반파시스트 | 처음에는 Einsatzgruppen 운영, 1944년 5월부터 우스타셰 운영 |
흐르바츠카 미트로비차 | - | - | 스렘스카 미트로비차에 있는 강제 수용소 |
야세노바츠 수용소는 5개의 수용소로 나뉘었으며, 그 중 시글라나(벽돌 공장, 야세노바츠 III)는 주요 살해 현장이었다.[9] 용광로는 화장터로 개조되었고, 어린이들을 포함한 사람들이 산 채로 불에 타는 증언이 있었다.[10] 브예코슬라브 루부리치는 야세노바츠 V에 가스실을 건설했지만, 부실한 건설로 인해 폐기되었다.[11] 대부분의 수감자는 기아, 질병, 잔혹한 폭력으로 사망했다.[12] 우스타샤는 "스르보세크"(Srbosjek|스르보세크hr)라는 칼을 사용하여 수감자들을 빠르게 학살했다.[17]
필리포비치를 비롯한 수용소 사령관들은 기발한 고문을 사용했다.[19] 세르비아인 목 자르기 대회가 열렸고, 페타르 브르지차는 1,360명의 수감자를 학살하여 우승했다는 보고가 있다.[20] 수감자들은 강간, 성기 절단 등 잔혹 행위의 희생자였다.
크로아티아 독립국은 어린이만을 위한 수용소를 세운 유일한 추축국 위성국이었다.[15] 어린이 수용소는 시사크, 자코보, 야스트레바르스코에 있었다.[18]
5. 대량 학살
1941년 나치 독일과 이탈리아 왕국이 유고슬라비아 왕국을 침공하여 크로아티아 독립국이라는 괴뢰국을 세우고 세르브인과 동방 정교회 신자들을 학살하였다.
안테 파벨리치가 이끄는 우스타샤는 세르브인 250,000명을 국외로 추방하고, 330,000명에서 390,000명에 달하는 세르브인과 37,000명에 달하는 유대인을 학살했다.[84] 약 200,000명은 고문과 협박으로 인해 로마 가톨릭 교회로 강제 개종해야 했다. 아이들은 대부분 굶어 죽었고 갓난 아이들은 벽에 던져져 머리가 터진 채 죽는 등 부녀자와 어린이도 학살 대상에서 예외는 아니었다. 우스타샤는 정교회 신자들을 편리하게 죽이기 위해 '세르비안 칼날'이라는 도구를 사용하기도 했다.
찰스 킹은 대량 학살과 집단 학살 연구에서 수용소가 중심적인 위치를 잃어가고 있다고 강조했는데, 이는 희생자의 상당수가 대량 처형, 협곡 및 구덩이에서 사망했기 때문이다. 그는 크로아티아를 포함한 독일 동맹국의 행동과 마을 수준의 소수 민족 제거도 중요한 역할을 했다고 설명했다.
크로아티아 독립국의 무장 병력인 크로아티아 국토 방위군(도모브라니)과 우스타샤 민병대에 의해 다수의 학살이 자행되었다. 우스타샤 민병대는 1941년에 5개(나중에는 15개)의 700명 규모의 대대로 조직되었으며, 주로 교육받지 못한 인구와 노동자 계급에서 모집되었다. 민병대에는 크로아티아계 외에도 이슬람교도도 포함되어 있었으며, 이들이 구성원의 약 30%를 차지했다.
세르비아인에 대한 폭력은 1941년 4월에 시작되었으며, 처음에는 그 범위가 제한되어 주로 세르비아 지식인을 대상으로 했다. 그러나 7월이 되면서 폭력은 "무차별적이고 광범위하며 체계적인" 양상을 띠게 되었다. 세르비아인에 대한 학살은 세르비아인이 많이 거주하는 혼합 지역에 집중되었다.
1941년 여름, 우스타샤 민병대와 암살단은 마을을 불태우고 수천 명의 세르비아 민간인을 잔인하게 살해했다. 남성, 여성, 어린이는 난도질당하고, 산 채로 구덩이와 협곡에 던져지거나, 교회에서 불태워졌다. 총기는 거의 사용되지 않았으며, 칼, 도끼 등이 더 흔하게 사용되었다. 세르비아인 희생자들은 사지가 절단되었고, 귀와 혀가 잘리고 눈이 도려내졌다. 우스타샤의 잔혹함과 가학성은 나치 지휘관들조차 충격에 빠뜨렸다.[85]
5. 1. 주요 학살 사건
크로아티아 독립국에서는 여러 차례의 주요 학살 사건이 발생했다. 다음은 그 중 대표적인 사건들이다.- 구도바츠 학살: 1941년 4월 28일, 비옐로바르 지역에서 약 184~196명의 세르비아인이 즉결 처형되었다. 이는 우스타샤 정권 최초의 대량 학살 사건이다.[17]
- 블라가이 학살: 1941년 5월 9일, 여러 마을에서 약 400명의 세르비아인이 체포되어 블라가이 마을의 한 학교 뒤 구덩이에서 처형되었다.[21]
- 바노비나 지역 학살: 1941년 7월 24~25일, 우스타샤 민병대가 바니야 지역의 반스키 그라보바츠 마을에서 1,100명의 세르비아인 농민을 학살했다. 같은 날 블라호비치 마을에서도 800명 이상의 세르비아 민간인이 살해되었다.[15]
- 코스타이니차 학살: 1941년 6월 29일부터 7월 7일 사이에 280명의 세르비아인이 살해되어 코스타이니차 인근 구덩이에 던져졌다.
- 스타로 셀로 토푸스코, 페츠카, 페르나, 보이슈니차, 브르긴모스트, 사딜로바츠 학살: 이 지역들에서 대규모 학살이 발생하여 수많은 세르비아인들이 희생되었다. 특히 페르나에서는 노인과 어린이를 포함한 427명이 학살되었다.[18] 사딜로바츠에서는 주민의 약 60%가 목숨을 잃었고, 185명의 어린이를 포함하여 400명 이상이 살해되었다.
- 보이니치 학살: 1942년 4월 17일, 보이니치 근처 콜라리치 마을에서 99명의 세르비아인이 산 채로 불에 타 죽었다. 보이니치 마을에서는 전쟁 기간 동안 총 3,849명이 학살되었다.[18]
- 크르스티냐 학살: 1942년 7월 31일, 밀란 메시치의 지휘 하에 우스타샤는 크르스티냐 마을 근처에서 약 270명의 어린이를 포함하여 580명 이상의 주민을 학살했다.
- 라코비차 학살: 다양한 날짜에, 주로 여성과 어린이인 2,019명이 라코비차 마을에서 살해되었다.[18]
- 고스피치 지역 학살: 리카 지역에서 최초의 대규모 학살이 발생한 곳으로, 1941년 7월 말부터 8월 초까지 약 3,000명의 세르비아 민간인이 살해되었다.[15]
- 믈라크바 학살: 1941년 8월 6일, 우스타샤는 믈라크바에서 191명의 어린이를 포함해 280명 이상의 마을 사람들을 살해하고 불태웠다.
- 리치코 페트로보 셀로, 멜리노바츠 학살: 1941년 6월부터 8월까지 약 890명의 세르비아인이 살해되어 델리치 구덩이에 던져졌다.
- 디보셀로, 스밀리안, 시로카 쿨라 학살: 전쟁 중 우스타샤는 디보셀로에서 900명 이상, 스밀리안에서 500명 이상, 고스피치 근처의 시로카 쿨라에서 400명 이상을 학살했다.
- 두고 셀로 라신스코, 프르코스 라신스키 학살: 1941년 12월 21일, 약 880명의 세르비아인이 브레제 숲에서 살해되었다.
- 보친 학살: 1942년 1월 14일 세르비아 구정에 슬라보니아에서 민간인 대량 학살이 시작되었다. 마을이 불에 타 약 350명이 보친으로 추방되어 처형되었다.
- 시르미아 학살: 1942년 8월, 우스타샤와 독일 국방군(Wehrmacht)의 시르미아에서 공동 군사 대(對)파르티잔 작전 이후, 최대 7,000명의 세르비아인이 사망했다. 저명한 화가 사바 슈마노비치도 이때 희생되었다.
- 코자라 공세: 주로 세르비아인 민간인 68,500명과 전투원 2,500명이 학살되거나 강제 수용소로 추방되었다. 이를 기념하는 혁명 기념비가 세워졌다.

- 산스키 모스트 학살: 1941년 8월, 동방 정교회 엘리야 축일에, 산스키 모스트와 주변 지역의 세르비아인 2,800명에서 5,500명이 희생자들에 의해 파인 구덩이에 던져져 살해되었다.
- 코자르스카 두비차 학살: 전쟁 동안, NDH군은 코자르스카 두비차 시에서 7,000명 이상의 세르비아인을 살해했다. 1942년 1월, 크로아티아 국토 방위군이 마을 드락세니치를 불태우고 200명 이상을 살해했다.
- 바냐 루카 학살: 1942년 2월, 미로슬라프 필리포비치의 지휘 하에 우스타셰는 세르비아인이 거주하는 드라쿨리치, 모티케, 샤르고바츠 마을에서 성인 2,300명과 어린이 550명을 학살했다.
- 가라비체 학살: 1941년 7월부터 9월까지 수천 명의 세르비아인들이 비하치 인근에 있는 처형 장소인 가라비체에서 유대인과 로마 희생자들과 함께 학살당했다.
- 트레비네 학살: 1941년 5월 31일, 120명에서 270명 사이의 세르비아인이 트레비네 근처에서 체포되어 처형되었다.
- 코리타 학살: 1941년 6월, 가츠코 시의 우스타샤 당국은 코리타와 자그라드치 마을의 세르비아인 남성들을 스테펜 마을의 건물로 보고하도록 명령했다. 그들은 구타당한 후 코빌랴 글라바 근처의 골루브냐차 석회암 구덩이에 던져졌다.[21]
- 류비네 학살: 1941년 6월, 우스타샤는 류비네 마을 근처에서 140명의 농민을 살해했고, 6월 23일에는 추가로 160명을 살해했다. 스톨라츠 시에서는 이틀 동안 약 260명이 살해되었다.[22]
- 리브노 평원 학살: 우스타샤는 370명의 어린이를 포함하여 1,200명 이상의 세르비아인을 살해했다. 리브노 근처 코프리브니차 숲에서는 약 300명의 시민이 고문을 받고 살해되었다.
- 프레빌로브치 학살: 1941년 8월 4일부터 6일까지, 650명의 여성과 어린이가 살해되어 슈르만치 근처의 골루빈카 구덩이에 던져졌다. 그해 여름, 약 4,000명의 세르비아인이 인근 지역에서 학살당했다.
- 라시차 가이 학살: 1941년 6월 22일에서 7월 20일 사이에 보스니아 헤르체고비나의 블라세니차에 있는 라시차 가이에서 약 70명에서 200명의 세르브인이 무슬림 우스타샤 군대에 의해 학살되었다.
- 드리나 계곡 학살: 많은 세르브인들이 특히 비셰그라드 근처의 드리나 계곡을 따라 우스타샤에 의해 처형되었다. 유레 프란체티치의 검은 군단은 수천 명의 무방비 상태의 보스니아 세르브 민간인을 살해하고 시신을 드리나 강에 던졌다. 1942년, 약 6,000명의 세르브인이 로가티차 근처의 스타리 브로드와 밀로셰비치에서 살해되었다.[23]
- 사라예보 학살: 1941년 여름, 우스타샤 민병대는 주기적으로 사라예보 세르비아인들을 구금하고 처형했다. 우스타샤는 세르비아인, 유대인, 정치적 반대자들을 고문하고 투옥하는 도살장이자 장소인 빌라 루부리치에서 최소 323명을 살해했다.
6. 추방과 민족 청소
우스타샤 정권은 순수한 크로아티아 국가를 건설하기 위해 세르비아인과 슬로베니아인을 대상으로 추방 정책을 시행했다. 이 과정에서 폭력과 인권 유린이 자행되었다.
1941년 4월부터 세르비아인에 대한 폭력이 시작되었으며, 초기에는 주로 지식인을 대상으로 했으나, 7월부터는 무차별적이고 광범위하게 학살이 이루어졌다. 학살은 세르비아인이 많이 거주하는 지역에 집중되었으며, 우스타샤 민병대와 암살단은 마을을 불태우고 민간인을 잔인하게 살해했다. 남녀노소 가리지 않고 난도질하고, 산 채로 구덩이에 던지거나 교회에서 불태웠으며, 칼, 도끼 등을 사용했다. 세르비아인 희생자들은 사지가 절단되고, 귀와 혀가 잘리고 눈이 도려내지는 등 잔혹한 피해를 입었다. 이러한 잔혹함은 나치 지휘관들조차 충격에 빠뜨릴 정도였다.
추산에 따르면, 약 12만 명의 세르비아인이 크로아티아 독립국에서 독일 점령하의 세르비아로 추방되었고, 1943년까지 30만 명이 도망쳤다. 1941년 7월 말까지 18만 명, 9월 말까지 20만 명 이상의 세르비아인이 세르비아로 탈출했다. 같은 기간에 14,733명이 합법적으로 이주했다. 또한, 크로아티아 독립국은 20만 명 이상의 슬로베니아인 난민을 받아들여야 했다. 1941년 10월, 세르비아의 독일 당국이 세르비아인의 추가 이민을 금지하면서 조직적인 이주는 중단되었지만, 1942년과 1943년에도 불법 이주가 계속되었으며, 그 수는 20만 명에 달하는 것으로 추정된다.
6. 1. 추방 정책의 배경
추방은 순수한 크로아티아 국가를 만들려는 우스타샤 계획의 핵심 요소 중 하나였다. 제1차 세계 대전 참전 용사들 중 마케도니아 전선 출신으로 슬라보니아와 시르미아에 살던 사람들이 가장 먼저 강제로 떠나야 했다. 1941년 중반까지 5,000명의 세르비아인이 세르비아 군정 지역으로 추방되었다. 일반적인 계획은 먼저 저명한 사람들을 추방하여 그들의 재산을 국유화하고 나머지 세르비아인들을 더 쉽게 조종할 수 있도록 하는 것이었다. 1941년 9월 말까지 약 절반의 세르비아 정교회 성직자, 335명의 사제가 추방되었다.추방을 옹호하는 사람들은 이를 사회적으로 기능하는 국가를 만들기 위한 필요한 조치로 제시했으며, 그리스와 터키 간의 1923년 인구 교환과 비교하여 이러한 계획을 합리화했다. 우스타샤는 많은 사람들을 모아 추방할 목적으로 임시 수용소를 설치했다. 크로아티아 독립국 정부는 또한 "개간된 토지에 크로아티아인을 재정착시키기 위한 식민지화 사무소"를 설립했다. 1941년 여름 동안, 추방은 지역 주민들의 상당한 참여로 이루어졌다. 보스니아 헤르체고비나의 보스니아 무슬림과 슬라보니아 및 시르미아의 독일인을 포함한 많은 지역 엘리트 대표들이 추방에 적극적인 역할을 했다.
7. 종교 박해
우스타샤는 종교와 국적을 밀접하게 연관시켜 로마 가톨릭교와 이슬람교(보스니아 무슬림은 크로아티아인으로 간주됨)는 크로아티아의 국가 종교로 인정했지만, 동방 정교회는 크로아티아 국가 프로젝트와 본질적으로 양립할 수 없는 것으로 여겨졌다. 그들은 정교회를 세르비아인과 동일시했기 때문에 적대적으로 보았다.
1941년 5월 3일, 세르비아인에게 가톨릭으로 개종하여 크로아티아 정체성을 채택하도록 압력을 가하는 종교 개종에 관한 법이 통과되었다. 이 법은 안테 파벨리치가 비오 12세 교황과 로마에서 만나는 것을 앞두고 만들어졌다. 알로이시우스 스테피나크 대주교가 이끄는 크로아티아 가톨릭교회는 이를 환영하여 교회의 내부 법으로 채택했다. 5월 중순에는 "세르비아 정교회"라는 용어가 국가 질서와 양립할 수 없다는 이유로 금지되었고, 그 대신 "그리스-동방 신앙"이라는 용어가 사용되었다.
우스타샤의 선전은 박해를 유럽 지배를 위한 역사적인 가톨릭-정교회 투쟁과 "분열주의자"에 대한 가톨릭의 불관용에 부분적으로 근거한 것으로 정당화했다. 1941년 9월 말까지 약 절반의 세르비아 정교회 성직자, 즉 335명의 사제가 추방되었다. 1941년 5월에서 12월 사이에 150명 이상의 세르비아 정교회 사제가 살해되었다.
세르비아인과 정교회의 모든 역사를 지우기 위해, 1200년대와 1300년대에 지어진 일부 교회를 포함하여 많은 교회가 완전히 파괴되거나 마구간이나 헛간 등으로 사용되어 폄하되었다. 리카, 코르둔 및 바니야에서만 172개의 세르비아 정교회 교회가 폐쇄, 파괴 또는 약탈되었다.
강제 개종 문제가 극도로 논란이 되자, 크로아티아 독립국 정부는 1942년 4월 3일 ''크로아티아 정교회''를 설립하는 법을 채택했다. 이는 세르비아 정교회의 기관을 대체하기 위한 것이었다. 6월에 백계 러시아 망명자 게르모겐 막시모프가 러시아 정교회 자국 외 대주교로 그 수장이 되었다.[28] 그러나 세르비아인에 대한 박해는 계속되었지만, 덜 심했다.
7. 1. 강제 개종 정책
우스타샤는 종교와 국적을 밀접하게 연관시켜 로마 가톨릭교와 이슬람교(보스니아 무슬림은 크로아티아인으로 간주됨)는 크로아티아의 국가 종교로 인정했지만, 동방 정교회는 크로아티아 국가와 양립할 수 없는 것으로 여겼다. 그들은 정교회를 세르비아인과 동일시했기 때문에 적대적으로 보았다. 1941년 5월 3일, 세르비아인에게 가톨릭으로 개종하여 크로아티아 정체성을 채택하도록 압력을 가하는 종교 개종에 관한 법이 통과되었다. 이 법은 파벨리치가 비오 12세 교황과 로마에서 만나기 전에 만들어졌다. 알로이시우스 스테피나츠 대주교가 이끄는 크로아티아 가톨릭교회는 이를 환영하여 교회의 내부 법으로 채택했다. 5월 중순에는 "세르비아 정교회"라는 용어가 국가 질서와 양립할 수 없다는 이유로 금지되었고, 대신 "그리스-동방 신앙"이라는 용어가 사용되었다.1941년 7월 세르비아 봉기 이후, 국가 이사회는 세르비아인의 대규모 강제 종교 개종을 목표로 하는 프로그램을 시작했다. 우스타샤는 대부분의 세르비아 정교회 교회와 수도원을 폐쇄하거나 파괴했으며, 정교회 사제와 주교를 추방, 투옥 또는 살해했다. 개종은 세르비아 정교회를 크로아티아화하고 영구적으로 파괴하기 위한 것이었다.
바티칸은 강제 개종에 반대하지 않았다. 1942년 2월 6일, 교황 비오 12세는 사복을 입은 206명의 우스타샤 회원들을 개인적으로 만나 축복하여 그들의 행동을 상징적으로 지지했다. 1942년 2월 8일, 성좌 특사 니콜라 루시노비치는 '성좌가 강제 개종에 기뻐했다'고 말했다.[24] 1942년 2월 21일 루이지 마글리오네 추기경에게 보낸 편지에서, 성좌의 추기경 국무장관은 크로아티아 주교들에게 개종을 서두르도록 권고했고, "정교회"라는 용어를 "배교자 또는 분열주의자"라는 용어로 대체해야 한다고 말했다.[25]
1941–1942년, 약 20만 또는 24만[26]~25만 명의 세르비아인이 로마 가톨릭교로 개종했지만, 대부분 일시적으로만 이를 실천했다. 세르비아 정교회 성직자의 85%가 살해되거나 추방되었다.

추기경(가톨릭교회) 알로이시우스 스테피나츠는 제2차 세계 대전 중 자그레브 대교구의 대주교로 재임했으며 NDH에 충성을 맹세했다. 그는 가톨릭 크로아티아 건설이라는 초기 목표는 지지했지만, 곧 정권의 강제 개종 명령에 의문을 품기 시작했다.
역사학자 토마세비치는 스테피나츠가 우스타샤 정권에 반하여 한 발언과 그의 행동을 칭찬했지만, 이러한 발언과 행동이 세르비아인과 세르비아 정교회에 대한 우스타샤의 집단 학살 행위에 대해 미흡한 점이 있다고 지적했다.
1941년 5월 14일, 스테피나츠는 글리나 학살에서 우스타샤가 세르비아인 마을 사람들을 학살했다는 소식을 들었다. 같은 날, 그는 파벨리치에게 다음과 같이 편지를 썼다.
> 가톨릭 가르침에 따르면 이것이 허용되지 않는다고 말하는 것이 제 주교의 책임이라고 생각하며, 따라서 독립 크로아티아 국가 전체 영토에서 죽을 죄를 저지른 것이 입증되지 않는 한 단 한 명의 세르비아인도 죽이지 않도록 가장 시급한 조치를 취해 주시기를 요청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우리는 하늘의 축복을 기대할 수 없을 것이고, 그렇지 않으면 우리는 멸망할 것입니다.
1942년과 1943년 후반에 스테피나츠는 우스타샤의 집단 학살에 대해 더욱 공개적으로 발언하기 시작했는데, 이는 이미 대부분의 집단 학살이 저질러진 후였으며 나치와 우스타샤가 패배할 것이라는 점이 점점 더 분명해졌다.
아브로 맨하탄은 저서 《바티칸 대학살]](1986)에서 당시 학살은 로마 가톨릭 교회가 조직적으로 자행하였으며, 학살 최전방에 있던 우스타샤에게 가톨릭 국가들인 오스트리아와 이탈리아를 통해 무기를 지원했고, 바티칸의 계획하에 유고슬라비아 왕국의 멸망과 친 가톨릭 독립국가 설립이 기획되었다고 주장했다.[78]
강제 개종 소식은 대주교 스테피나크가 담당하는 자그레브 주교 관할 기관인 《카톨리키 리스트》에 의해 보도되었다. 1941년 38호는 부딘치 마을의 모든 주민이 가톨릭으로 개종함으로써 "2300 영혼의 새로운 교구가 만들어졌다"고 보도하였다. 만일 단체적으로 저항할 경우 무자비한 집단 처벌이 가해졌다.
가톨릭 신자였던 유고슬라비아 왕국의 장관 그리조고노는 바티칸을 향해 격렬한 항의문을 작성했다. 다음은 그가 바티칸 교황청에 쓴 편지의 일부이다.
> 예하, 나는 인간 대 인간으로, 그리스도인 대 그리스도인으로 이 글을 당신에게 씁니다. 크로아티아 독립국이 시작된 첫날부터 세르비아 사람들은 학살을 당하였습니다. 이 학살은 오늘까지 계속되고 있습니다. (중략)..제가 왜 이 항의문을 당신에게 씁니까? 여기 그 이유가 있습니다. 세상의 범죄들보다 더 악하고 또한 전례 없는 이 모든 범죄에 우리의 가톨릭 교회 역시 두가지 면에서 동참하였습니다. 첫째, 수많은 사제들, 성직자들, 수도승들 조직된 가톨릭 청년들이 적극적으로 이 모든 범죄에 참여하였습니다. 그러나 더 끔찍한 것은 심지어 가톨릭 사제들이 수용소 담당 및 소대 대장이 된 것입니다. 그들은 정교회에서 세례를 받은 사람들을 고문하고 살인하며 학살하라는 명령을 내렸으며 또한 그러한 행위들을 허용하였습니다. 이러한 만행 중에 그 어떤 것도 그들 주교들의 허락 없이는 이루어질 수 없었을 것입니다. 만일 주교의 허락 없이 이 일들이 저질러졌다면 그 사제들은 교회 재판으로 끌려와 면직을 당하여 성복을 벗어야 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이러한 일은 발생하지 않았습니다. 이는 주교들이 노골적으로, 또는 적어도 침묵으로 동의한 것을 의미합니다. 가톨릭교회는 남아 있는 세르브인들을 강제로 가톨릭 교인들로 만들려고 모든 수단을 사용하였습니다.(하략)
그리조고노의 편지에 대해 교황청은 학살 사실에 대해 부인하지 않았다. 베오그라드의 가톨릭 대주교 우칙스 박사는 그리조고노에게 "학살에 대해 잘 알고 있으며 이 사실을 바티칸에 보내 적절한 조치를 취하겠다"는 답장을 했다.[83]
7. 2. 세르비아 정교회 성직자 박해
우스타샤는 동방 정교회를 크로아티아 국가와 양립할 수 없는 존재로 여겨 적대시했다.[30] 종교와 국적을 밀접하게 연관시킨 우스타샤는 로마 가톨릭교회와 이슬람교를 크로아티아의 국가 종교로 인정했지만, 정교회는 세르비아인과 동일시하여 탄압했다.[30]1941년 5월 3일, 세르비아인에게 가톨릭으로 개종하여 크로아티아 정체성을 채택하도록 강요하는 종교 개종에 관한 법이 통과되었다.[30] 5월 중순에는 "세르비아 정교회"라는 용어가 금지되고 "그리스-동방 신앙"이라는 용어가 대신 사용되었다.[30] 1941년 9월 말까지 세르비아 정교회 성직자 약 절반인 335명의 사제가 추방되었다.[30]
세르비아인과 정교회의 모든 역사를 지우기 위해 1200년대와 1300년대에 지어진 일부 교회를 포함하여 많은 교회가 완전히 파괴되거나 폄하되었다.[30]
1941년 5월에서 12월 사이에 150명 이상의 세르비아 정교회 사제가 살해되었다.[30] 1941–1942년에 약 24만 명의 세르비아인이 로마 가톨릭으로 개종했지만, 대부분 일시적이었다.[30] 세르비아 정교회 성직자의 85%가 살해되거나 추방되었다.[30] 리카, 코르둔 및 바니야에서만 172개의 세르비아 정교회 교회가 폐쇄, 파괴 또는 약탈되었다.[30]
강제 개종 문제가 심각해지자, 크로아티아 독립국 정부는 1942년 4월 3일 크로아티아 정교회를 설립하는 법을 채택하여 세르비아 정교회 기관을 대체했다.[30] 6월에는 백계 러시아 망명자 게르모겐 막시모프가 러시아 정교회 자국 외 대주교로 그 수장이 되었다.[30] 그러나 세르비아인에 대한 박해는 계속되었다.[30]

크로아티아 독립국 내 세르비아 정교회 교구의 주교들은 종교 박해의 대상이 되었다.[30] 1941년 5월 5일, 우스타셰는 바냐루카의 플라톤 요바노비치를 고문하고 살해했다.[30] 5월 12일에는 다바르-보스나 관구의 대주교인 페타르 지몬지치가 살해되었고, 8월 중순에는 사바 트르라지치 주교가 살해되었다.[30] 자그레브-류블랴나 관구의 대주교인 도시테이 바시치는 1945년 우스타셰의 고문으로 인한 상처로 사망했다.[30] 1941년 4월 크로아티아 독립국에는 577명의 세르비아 정교회 사제, 수도사 및 기타 종교 고위 인사가 있었다. 12월까지는 한 명도 남지 않았다. 214명에서 217명이 살해되었고, 334명이 추방되었으며, 18명이 도망쳤고, 5명이 자연사했다.[30]
8. 희생자 규모 및 집단 학살 분류
1941년 나치 독일과 이탈리아 왕국이 유고슬라비아 왕국을 침공하여 크로아티아 독립국이라는 괴뢰국을 세우고 세르브인과 동방 정교회 신자들을 학살하였다.
이로 인해 세르브인 250,000명이 국외로 추방되었고, 330,000명에서 390,000명에 달하는 세르브인과 37,000명에 달하는 유대인이 안테 파벨리치가 이끄는 우스타샤에 의해 학살되었으며, 약 200,000명이 고문과 협박으로 인해 가톨릭으로 개종해야 했다. 야세노바츠 강제 수용소에서는 60,000명에서 70,000명이 살해당한 것으로 추정되며, 오늘날 야세노바츠 수용소에는 이 곳에서 살해당한 수감자 75,159명의 이름이 기록되어 있다.
1980년대에 유고슬라비아의 제2차 세계 대전 희생자 수에 대한 계산은 세르비아 통계학자 보고류브 코체비치와 크로아티아 인구 통계학자 블라디미르 제르야비치에 의해 이루어졌다. 코체비치는 전쟁 중 크로아티아 독립국(NDH)에서 세르비아인 37만 명(전투원과 민간인 포함)이 사망했다고 추산했다. 약 10%의 오차를 감안할 때, 세르비아인의 손실은 41만 명을 넘을 수 없다고 지적했다. 제르야비치는 NDH에서 세르비아인의 총 사망자 수를 32만 2천 명으로 추정했는데, 이 중 12만 5천 명이 전투원으로 사망했고, 19만 7천 명이 민간인이었다. 제르야비치는 야세노바츠를 포함한 우스타셰 감옥, 구덩이 및 수용소에서 총 7만 8천 명의 민간인이 살해되었다고 추산했다. 야세노바츠 강제 수용소에서 사망한 희생자 수는 논쟁의 대상이지만, 현재 추정치는 총 10만 명으로, 그 중 절반이 세르비아인이다.[9]
역사학자 조조 토마셰비치는 유고슬라비아의 정확한 희생자 수를 결정하는 것은 불가능하다고 말했다. 그러나 학자 바바라 젤라비치는 토마셰비치의 추정치를 인용하여 우스타셰 통치 기간 동안 35만 명의 세르비아인이 살해되었다고 썼다.[33] 역사학자 로리 예오만스는 가장 보수적인 추정치에 따르면 20만 명의 세르비아인이 우스타셰 사살대에 의해 살해되었지만, 우스타셰에 의해 처형되거나 우스타셰 강제 수용소에서 사망한 세르비아인의 실제 수는 50만 명에 달할 수 있다고 말했다. 1992년 저서에서 사브리나 P. 라메트는 파벨리치와 그의 우스타셰 하수인들에 의해 "숙청"된 세르비아인 35만 명의 수치를 인용했다.[34]
토미슬라브 둘리치는 NDH의 세르비아인들이 제2차 세계 대전 중 유럽에서 가장 높은 사망률을 겪었다고 말했다. 미국 역사학자 스탠리 G. 페인은 NDH 정권에 의한 직접적이고 간접적인 처형이 "특별한 대량 범죄"였으며, 비례적으로 히틀러의 제3제국 외에는 다른 어떤 유럽 정권도 능가했다고 말했다.
많은 역사학자와 저자들은 우스타셰 정권의 세르비아인 대량 살해를 집단 학살의 정의에 부합한다고 묘사하고 있으며, 여기에는 "집단 학살"이라는 단어를 만들고 집단학살 협약을 발안한 라파엘 렘킨도 포함된다.[37][38][39][40]
전후 시대에 세르비아 정교회는 이 집단 학살의 세르비아인 희생자를 순교자로 간주했다. 그 결과, 세르비아 정교회는 9월 13일에 야세노바츠의 성 순교자를 기념한다.[48]
8. 1. 집단 학살 인정 노력
야드 바셈(이스라엘의 홀로코스트 희생자 공식 기념관)은 "우스타셰가 50만 명 이상을 학살하고 25만 명을 추방했으며, 다른 25만 명에게 가톨릭으로 개종을 강요하는 ''세르비아인 집단 학살''을 자행했다"라고 밝혔다.[41][42] 시몬 비젠탈 센터 또한 크로아티아 독립국의 지도자들이 세르비아인, 유대인, 로마인에 대해 집단 학살을 저질렀다고 언급했다.[43]스테판 메시치, 이보 요시포비치 (크로아티아 대통령), 바키르 이제트베고비치, 젤코 콤시치 (보스니아 헤르체고비나 대통령직의 보스니아인과 크로아티아인 구성원)도 크로아티아 독립국에서 세르비아인에 대한 박해를 집단 학살로 묘사했다.[44][45][46][47]
9. 전후
유고슬라비아 공산주의 당국은 전쟁으로 인한 민족 갈등이 새로운 공산 정권을 불안정하게 만들 수 있다고 인식하여 전쟁 범죄를 은폐하고 특정 민족의 피해를 감추려 했다.[32] 요시프 브로즈 티토 정부는 민족 간의 "형제애와 단결"을 구축하여 상처를 치유하고자 했다.[32] 티토는 야세노바츠에 여러 번 초대받았지만, 현장을 방문한 적은 없었다.[32]
전후 학살은 유고슬라비아 공산주의 정부가 독립적인 학자들을 장려하지 않았기 때문에 제대로 조사되지 못했다.[32] 역사가 마르코 아틸라 호어와 마르크 비온디치는 서방 세계의 역사가들이 우스타샤가 저지른 학살에 충분한 관심을 기울이지 않는다고 지적했다.[32]
제2차 세계 대전, 특히 그 민족 간의 갈등은 이후 유고슬라비아 전쟁 (1991–95)에 결정적인 역할을 한 것으로 여겨진다.[49]
9. 1. 전범 재판
마일 부닥과 니콜라 만디치, 율리에 마카넥을 포함한 크로아티아 독립국(NDH) 정부의 여러 구성원들은 유고슬라비아 사회주의 연방 공화국의 유고슬라비아 공산당 공산주의 당국에 의해 반역죄와 전쟁 범죄로 재판을 받고 유죄 판결을 받았다. 그들 중 다수는 처형되었다.[50][51] 미로슬라프 필리포비치는 나치 강제 수용소장인 야세노바츠와 스타라 그리디스카 수용소장으로, 전쟁 범죄 혐의로 유죄 판결을 받고 교수형에 처해졌다.최고 지도자 안테 파벨리치를 포함한 많은 사람들은 도망쳤으며, 대부분 라틴 아메리카로 도망쳤다. 류보 밀로스는 야세노바츠 수용소장이였으나 체포되어 처형되었다. 알로이지예 스테피나츠는 자그레브 대교구 대주교로 재직했으며 반역죄와 정교회 세르비아인의 가톨릭 강제 개종 혐의로 유죄 판결을 받았다.[52]
뉘른베르크 군사 재판소는 포로 재판의 판결에서 크로아티아 독립국이 독일 군대와 독립적으로 행동할 수 있는 주권적 실체가 아니라고 결론지었다. 재판소에 따르면 "크로아티아는 항상 점령된 국가였다".[53][54]
안드리야 아르투코비치는 NDH 내무부 장관이자 법무부 장관으로 여러 인종 법률에 서명하였는데, 전쟁 후 미국으로 도망쳤으나 1986년 유고슬라비아로 인도되어 자그레브 지방 법원에서 재판을 받고 NDH에서 발생한 여러 대량 학살에 대해 유죄 판결을 받았다. 아르투코비치는 사형을 선고받았지만, 그의 나이와 건강 때문에 형이 집행되지 않았다. 딘코 사키치는 또 다른 야세노바츠 수용소장으로 나치 사냥꾼인 에프라임 주로프에 의해 체포되었다. 우익 대통령 프라뇨 투지만에 대한 국제사회의 압력 이후, 그는 사키치의 인도를 요구했고, 78세의 나이로 크로아티아에서 재판을 받았다. 그는 전쟁 범죄와 반인도적 범죄에 대해 유죄 판결을 받고 최고형인 20년 징역형을 선고받았다.
유고슬라비아 파르티잔의 유고슬라비아 해방과 함께, 많은 우스타샤 지도자들이 도망쳐 바티칸 근처의 성 제롬 크로아티아 대학에 은신했다. 가톨릭 사제이자 우스타샤인 크루노슬라브 드라가노비치는 성 제롬에서 도망자들을 지휘했다. 미국 국무부와 방첩대는 전쟁 범죄자들이 탈출하도록 도왔고, (나중에 미국 정보국에서 일한) 드라가노비치가 우스타샤를 해외로 보내는 것을 지원했다. NDH에서 대량 학살의 책임을 져야 할 많은 사람들이 남미, 포르투갈, 스페인, 미국으로 피신했다. 루부리치는 1969년 스페인에서 UDBA 요원에 의해 암살되었고, 아르투코비치는 1986년에 인도되기 전까지 아일랜드와 캘리포니아에서 살다가 감옥에서 자연사했다. 딘코 사키치와 그의 아내 나다는 1998년 인도될 때까지 아르헨티나에서 살았고, 딘코는 감옥에서 사망했으며 그의 아내는 석방되었다.
9. 2. 역사 부정주의 논란
일부 크로아티아인들은 크로아티아 독립국에서 세르비아인에게 저질러진 집단학살의 규모를 축소하려 시도했다.[56] 미르야나 카사포비치(Mirjana Kasapović)는 크로아티아 역사학의 일부에서 세 가지 주요 역사 수정주의 전략이 있다고 결론지었다. 즉, 크로아티아 독립국(NDH)은 당시 정상적인 반란 진압 국가였다는 것, NDH에서는 대량 범죄, 특히 집단학살이 저질러지지 않았다는 것, 야세노바츠 강제 수용소는 학살 수용소가 아니라 단지 노동 수용소였다는 것이다.1989년, 프라뇨 투지만은 크로아티아 민족주의를 받아들였고, ''전쟁의 공포: 역사적 현실과 철학''을 출판하여 제2차 세계 대전 당시 우스타샤에 의해 살해된 공식적인 희생자 수를 문제 삼았다. 투지만은 그의 저서에서 야세노바츠에서 3만에서 4만 명이 사망했다고 주장했다.[57] 일부 학자들과 관찰자들은 투지만이 인종차별적 발언을 하고, "우스타셰 운동과 관련된 사상과 친분을 맺었으며", 전직 우스타셰 관리들을 정치 및 군사 직위에 임명하고, 크로아티아 독립국에서 희생자 수를 축소했다고 비난했다.[57]
2016년 이후, 반파시스트 단체, 크로아티아 세르비아인, 로마인, 유대인 공동체의 지도자들, 그리고 전직 크로아티아 고위 관리들은 야세노바츠 강제 수용소 희생자들을 위한 공식적인 국가 추모 행사를 보이콧했는데, 그 이유는 크로아티아 당국이 우스타셰의 유산을 명시적으로 비난하는 것을 거부했고, 우스타셰에 의해 저질러진 범죄를 축소하고 되살렸기 때문이라고 말했다.[58][59][60][61]
10. 기념
요시프 브로즈 티토는 스렘스카 미트로비차의 희생자 추모 공원을 방문했다.[68] 모셰 카차브 이스라엘 대통령은 2003년 야세노바츠를 방문했고, 후임 시몬 페레스는 2010년 야세노바츠를 방문하여 기념비에 헌화하며 우스타샤의 범죄를 "순수한 사디즘의 표출"이라고 칭했다.[62][63]
야세노바츠 기념 박물관은 2006년 11월 새로운 전시회와 교육 센터로 재개관했다. 기념 박물관 내부는 고무로 덮인 강철 모듈, 비디오 및 프로젝션 스크린, 수용소 유물 전시 유리 케이스 등으로 구성되어 있으며, 전시 공간 위에는 희생자들의 이름이 새겨진 유리 패널이 설치되어 있다.
뉴욕 시 공원 관리국 등은 2005년 4월 (수용소 해방 60주년) 야세노바츠 희생자들을 기리는 공공 기념비를 세웠다. 이 기념비는 발칸 반도 밖에서 야세노바츠 희생자를 기리는 유일한 공공 기념비이다.
4월 22일 야세노바츠 수용소 탈출 기념일에 세르비아는 국가 홀로코스트, 제2차 세계 대전 집단 학살 및 기타 파시스트 범죄 희생자 추모의 날을 기념하며, 크로아티아는 야세노바츠 기념관에서 공식 추모 행사를 개최한다.[64] 세르비아와 스릅스카 공화국은 도냐 그라디나 기념 구역에서 공동 중앙 추모 행사를 개최한다.[65]
2018년 국제 홀로코스트 희생자 추모의 날에는 유엔 본부에서 "야세노바츠 - 기억할 권리" 전시회가 열렸다.[66][67]
야도브노 강제 수용소 희생자 추모식은 2009년부터 조직되었으며, 6월 24일은 크로아티아에서 "야도브노 수용소 추모의 날"로 지정되었다.[65] 2010년 8월 26일에는 야스트레바르스코 어린이 수용소 부분 해방 68주년 기념식이 거행되었다.[69] 스릅스카 공화국 정부는 드리나 계곡에서 우스타샤 학살 희생자들의 기념비에서 추모식을 거행한다.[23]
11. 문화 속의 재현
이반 고란 코바치치는 우스타샤의 범죄를 규탄하는 시 《야마》를 썼다.[70] 브랑코 초피치는 우스타샤에 대한 저항에서 파르티잔을 돕는 아이들의 역할을 그린 소설 《독수리는 일찍 날아든다》를 썼다.[70] 일리야 야코블레비치는 《사바의 강제 수용소》라는 기록을 남겼다.[70] 즈라트코 프리차와 에도 무르티치는 이반 고란 코바치치의 시 "야마(Jama)"의 구절을 그림으로 표현한 삽화를 만들었다.[70]
다음은 영화 작품이다.
- 1955년 보이슬라브 나노비치 감독의 《숄라야》는 제노사이드에 반대하는 세르비아인의 반란을 다룬다.[70]
- 1960년 프란체 슈티글리츠 감독의 《제9의 원》에는 야세노바츠 강제 수용소 장면이 포함되어 있다.[70]
- 1966년 소야 요바노비치 감독의 《독수리는 일찍 날아든다》는 동명 소설을 바탕으로 제작되었다.[70]
- 1967년 에두아르드 갈리치 감독의 《검은 새들》은 스타라그라디슈카 강제 수용소 수감자 그룹에 관한 영화이다.[70]
- 1984년 드라간 크레소야 감독의 《전쟁의 종말》은 아내와 어머니를 고문하고 살해한 우스타셰 민병대원을 찾아 복수하는 세르비아 남자와 아들의 이야기이다.[70]
- 1988년 즈드라브코 쇼트라 감독의 《어머니의 형제들》은 크로아티아인과 세르비아인, 두 의붓형제의 이야기를 통해 우스타셰의 만행을 다룬다.[70]
- 2016년 스베틀라나 페트로프 감독의 단편 영화 "프르바 트레치나 – 오프로슈타이 카오 카즈나"는 쥘레 프리가노비치의 학살을 다룬다.[70]
- 2019년 다나 부디사블레비치 감독의 《다이아나 B.의 일기》는 다이아나 부디사블레비치의 구호 작전을 다룬 전기 영화로, 10,000명 이상의 아이들을 강제 수용소에서 구출하는 내용이다.[70]
- 2020년 프레드라그 안토니예비치 감독의 《야세노바츠의 다라》는 야세노바츠 수용소에서 살아남은 소녀의 이야기이다.[70]
다음은 TV 시리즈와 음악 작품이다.
- 1981년 반차 클랴코비치와 에두아르드 갈리치 감독의 TV 시리즈 《굴복하지 않는 도시》(Nepokoreni grad)는 케레스티네츠 수용소를 포함한 우스타샤 테러 작전을 다룬다.[70]
- 생존자들은 유명한 노래 "Đurđevdan"의 가사가 사라예보에서 야세노바츠 강제 수용소로 죄수들을 실어 나르던 기차 안에서 쓰여졌다고 주장한다.[71]
- 크로아티아 록 밴드 톰슨은 노래와 콘서트에서 우스타샤 정권을 미화한다는 논란을 일으켰으며, 가장 유명한 곡은 "야세노바츠와 그리디슈카 스타라"이다.[72][7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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