테레즈 드 리지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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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테레즈 드 리지외는 1873년 프랑스 알랑송에서 태어나 1897년 결핵으로 사망한 가톨릭 수녀이다. 4세에 어머니를 여의고 가르멜회 수녀가 되기를 소망하여, 14세에 입회를 시도했으나 나이 제한으로 거절당했다. 이후 교황을 만나 청원하는 등 적극적인 노력 끝에 15세에 리지외의 가르멜회에 입회하여 ‘아기 예수의 데레사’라는 수도명을 받았다. 그녀는 자신의 영성을 ‘작은 길’이라 칭하며, 하느님의 자비에 대한 굳건한 믿음을 바탕으로 헌신적인 삶을 살았다. 사후 그녀의 자서전 《어떤 영혼의 이야기》가 출판되어 널리 읽히면서, 1925년 시성되었고, 현재 병자, 파일럿, 꽃집, 선교사 등의 수호 성인으로 추앙받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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테레즈 드 리지외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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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본 정보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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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명 | 마리 프랑수아즈테레즈 마르탱 |
출생 | 1873년 1월 2일 |
출생지 | 프랑스 오르네 알랑송 |
사망 | 1897년 9월 30일 (24세) |
사망지 | 프랑스 칼바도스 리지외 |
기념일 | 10월 1일 (로마 달력) 10월 3일 (1969년 이전 로마 달력, 멜키트 달력) |
칭호 | 동정녀, 교회 박사 |
수도회 | OCD |
주요 성지 | 리지외 성녀 테레사 대성당, 프랑스 리지외 |
수호 | 해외 선교 및 선교사 프랑스 러시아 가톨릭 신자 말기 질환 또는 결핵 환자 꽃집 및 정원사 고아 노숙자 비행사 세르케이라 세자르 |
신앙 | |
숭배 대상 | 가톨릭교회 |
시복일 | 1923년 4월 29일 |
시복자 | 교황 비오 11세 |
시성일 | 1925년 5월 17일 |
시성자 | 교황 비오 11세 |
상징 | 맨발의 카르멜회 수녀복 장미로 덮인 십자가 |
이름 | |
프랑스어 | 테레즈 드 리지외 |
다른 이름 | 테레즈 드 랑팡제주 에 드 라 생트 페이스 (어린 예수의 데레사와 거룩한 얼굴) 라 프티트 테레즈 (작은 데레사) |
2. 생애
1887년, 14세가 된 테레즈는 카르멜회 입회를 원했지만, 수녀원 원장과 지도 사제는 너무 어리다는 이유로 거절했다. 바이외의 주교에게 허가를 받으려 했지만, 역시 나이를 이유로 허가받지 못했다. 같은 해 10월, 테레즈는 15세 때 아버지와 언니들과 함께 로마 순례단에 참여, 교황 레오 13세를 알현하고 카르멜회 입회의 특별 허가를 청했지만, 교황은 주교와 지도 사제의 권고에 따르라고 하였다.[148]
1889년 4월, 테레즈가 16세가 되던 해, 주교가 수녀원 입회를 허가했고, 테레즈는 카르멜회에 입회하여 "아기 예수의 데레사"라는 수도명을 받았다. 같은 해, 아버지가 심장 발작을 일으켜 요양원에 들어갔고, 그곳에서 마지막 3년을 보냈다. 1890년 9월 8일, 첫 서원을 한 테레즈는 수도명에 "거룩한 얼굴(존귀한 모습)"(la Sainte Face)이라는 말을 덧붙였다.
1894년 7월 28일 아버지 루이가 사망하였다.
1895년 6월 9일, 삼위일체 대축일 미사 중 테레즈는 자비로운 사랑에 희생 제물로 자신을 바쳐야 한다는 영감을 얻었다. 그녀는 수도실에서 자신과 셀린을 위한 "봉헌 행위"를 작성했고, 6월 11일, 둘은 기적의 성모 앞에 무릎을 꿇고 낭독했다. "이 생의 저녁에, 저는 빈 손으로 당신 앞에 나타날 것입니다. 주님, 제 행위를 헤아려 달라고 청하지 않기 때문입니다."[50]
봉헌문에서 그녀는 "약함으로 인해 제가 실수로 넘어지게 된다면, 당신의 눈길 한 번으로 제 영혼을 즉시 정화하시고, 모든 불완전함을 태워주시기를 바랍니다 – 불이 모든 것을 자신 안으로 변화시키는 것처럼 말입니다."라고 썼다.[51]
1895년 8월, 마르탱 자매 넷은 사촌 마리 게랭이 수녀 마리 데우카리스티로 수도원에 합류했다. 레오니 마르탱은 여러 번의 시도 끝에, 1941년에 사망한 성모 방문 수녀회의 수녀 프랑수아즈-테레즈가 되었다.
14세 때 테레즈는 자신의 소명이 사제들을 위해 기도하고 "사도들의 사도"가 되는 것임을 깨달았다. 1890년 9월, 종교적 서원을 하기 전 심사에서, 왜 가르멜에 왔느냐는 질문에 "저는 영혼을 구원하고, 특히 사제들을 위해 기도하기 위해 왔습니다"라고 답했다. 그녀는 평생 동안 사제들을 위해 기도했으며, 젊은 사제 아돌프 롤랑과 젊은 신학생 모리스 벨리에르와 서신을 주고받으며 그들을 위해 기도했다. "가르멜 수녀로서 우리의 사명은 수천 명의 영혼을 구원할 복음주의적 일꾼을 형성하는 것이며, 우리는 그들의 어머니가 될 것입니다"라고 썼다.[24]
1895년 10월, 백부회의 젊은 신학생 모리스 벨리에르는 리지외의 가르멜에 그의 선교 사업과 미래에 그에게 맡겨질 영혼들을 기도와 희생으로 지원해 줄 수녀를 요청했다. 아녜스 원장은 테레즈를 지명했다. 그들은 한 번도 만난 적이 없지만, 열 통의 편지가 오갔다.
1년 후, 파리 외방전교회의 아돌프 롤랑(1870–1934)은 중국 서부 사천의 선교지에 들어가기 전에 리지외의 가르멜에 같은 도움을 요청했다.[52] 테레즈는 "영적 자매"의 임무를 맡게 되었다.
테레즈는 1896년 4월 결핵으로 객혈을 시작했다.[53] 이 병으로 인해 인도차이나반도 선교와 같은 해외 선교의 꿈을 이루지 못했다.
1897년 7월, 테레즈는 수도원 양호실로 옮겨졌고, 8월 19일 마지막 성체를 영했다. 테레즈는 육체적 고통이 극심하여 "아! 이 젊은 수녀가 얼마나 고통받고 있는지 알기만 한다면!"이라고 의사가 탄식할 정도였다. 테레즈는 마지막 순간에 "이렇게 많이 고통받는 것이 가능하다고는 결코, 결코 믿지 못했을 것이다!"라고 말했다.
1897년 9월 30일, 24세의 젊은 나이로 세상을 떠났다. 임종 직전에 "나는 더 이상 고통받을 수 없는 지경에 이르렀다. 모든 고통이 내게 달콤하기 때문이다"라고 말했으며, 마지막 말은 "나의 하느님, 당신을 사랑합니다!"였다.[54]
테레즈는 "저는 지상에 선을 행하기 위해 천국에서 시간을 보낼 것입니다. 저는 하늘에서 장미 비를 내리겠습니다."라는 유언을 남겼다.
1897년 10월 4일, 리지외 시립 묘지에 있는 가르멜 수도회 묘지에 안장되었고, 그곳에는 그녀의 부모님도 묻혀 있었다. 1910년 9월 유해가 발굴되어 납 관에 안치되어 다른 무덤으로 옮겨졌다. 1923년 3월, 복자로 선포되기 전에 유해는 리지외의 가르멜회로 다시 옮겨져 안치되었다. 유리 관 속에 있는 테레즈의 모습은 실제 시신이 아니라 테레즈 사후 셀린이 그린 그림과 사진을 바탕으로 한 ''조각상''이며, 그 안에는 흉곽과 다른 유해들이 들어 있다.
2. 1. 가족 배경과 어린 시절
테레즈는 1873년 1월 2일 프랑스 알랑송의 생 블레즈 거리에서 루이 마르탱과 마리-아젤리 겡(보통 젤리라고 불림) 부부의 딸로 태어났다. 아버지 루이 마르탱은 보석 세공인이자 시계 제작자였다.[10] 어머니 젤리 마르탱은 알랑송 레이스를 만드는 직공이었다. 테레즈의 부모님은 독실한 가톨릭 신자였으며, 2015년 프란치스코 교황에 의해 로마 가톨릭 교회에서 함께 성인으로 시성된 최초의 부부가 되었다.루이는 정규 카노니크가 되려고 그레이트 생 베르나르 호스피스에 들어가기를 원했지만 라틴어를 몰라서 거절당했다. 젤리는 병든 사람들을 섬기고 싶어했으며, 수도 생활을 고려하기도 했지만 거절당했다. 실망한 젤리는 알랑송 레이스를 배웠고, 22세에 생 블레즈 거리에 자신의 사업체를 열었다.[11]
루이와 젤리는 1858년 초에 만나 같은 해 7월 13일 알랑송 노트르담 대성당에서 결혼했다. 처음에는 영구적인 금욕 생활을 하는 남매처럼 살기로 결정했지만, 고해 신부가 이를 만류하자 생활 방식을 바꾸어 아홉 명의 자녀를 두었다. 1867년부터 1870년까지 그들은 3명의 유아와 다섯 살 된 헬렌을 잃었다. 살아남은 다섯 딸은 모두 수녀가 되었다.
이름 | 출생일 | 사망일 | 비고 |
---|---|---|---|
Marie-Louise Martin|마리 루이즈 마르탱프랑스어 | 1860년 2월 22일 | 1940년 1월 19일 | 리지외의 가르멜 수녀회 소속, 성심의 마리 수녀 |
마리 폴린 마르탱 | 1861년 9월 7일 | 1951년 7월 28일 | 리지외의 가르멜 수녀회 소속, 예수의 아그네스 수녀원장 |
레오니 마르탱 | 1863년 6월 3일 | 1941년 6월 16일 | 방문회 소속, 캉에서, 프랑수아즈-테레즈 수녀 |
Céline Martin|셀린 마르탱프랑스어 | 1869년 4월 28일 | 1959년 2월 25일 | 리지외의 가르멜 수녀회 소속, 거룩한 얼굴의 제네비에브 수녀 |
아버지는 몽상가이자 사색가였으며, 이상주의자이자 낭만주의자였다. 그는 딸들에게 감동적이고 순진한 애칭을 붙여주었는데, 마리는 '다이아몬드', 폴린은 '고귀한 진주', 셀린은 '담대한 자'였다. 테레즈는 그의 '작은 여왕'이었고, 모든 보물이 그녀의 것이었다.
1873년 1월 테레즈 마르탱이 태어난 직후, 테레즈는 허약한 상태 때문에 마르탱 가족의 아이 둘을 이미 돌본 유모 로즈 타이에에게 맡겨졌다.[12] 테레즈는 1874년 4월 2일, 15개월 되었을 때 알랑송으로 돌아와 가족들의 애정을 받았다. 그녀는 오전 5시 30분에 미사에 참석하고, 단식을 엄격하게 지키며, 전례력에 맞춰 기도하는 등 매우 가톨릭적인 환경에서 교육받았다. 마르탱 가족은 자선 활동을 실천하여 병든 노인들을 방문하고 때때로 떠돌이들을 식탁에 초대하기도 했다. 테레즈는 수녀 놀이를 하며 행복한 유년 시절을 보냈지만, 언니들의 증언에 따르면 예민하고 신경질적인 면모도 보였다. 22세의 카르멜 수녀였던 테레즈는 "저는 완벽한 어린 소녀와는 거리가 멀었어요"라고 회고했다.[12]
1865년부터 젤리는 유방 통증을 호소했고, 1876년 12월 의사는 종양의 심각성에 대해 그녀에게 말했다. 1877년 6월 그녀는 치유를 바라며 루르드로 떠났지만 기적은 일어나지 않았다. 1877년 8월 28일, 젤리는 45세의 나이로 사망했고, 장례식은 알랑송 노트르담 대성당에서 거행되었다. 테레즈는 겨우 네 살 반이었다. 그녀는 훗날 "어머니의 병, 특히 마지막 몇 주간의 모든 세부 사항이 여전히 저에게 남아 있습니다."라고 썼다. 또한 죽어가는 어머니가 마지막 성사를 받는 장면을 똑똑히 기억하며, "엄마가 돌아가셨을 때, 제 행복한 기질이 변했습니다. [...] 수줍어하고 과민해져서 누군가 저를 쳐다보면 울었습니다."라고 회고했다.[13]
젤리가 사망한 지 석 달 후, 루이 마르탱은 알랑송을 떠나 노르망디의 칼바도스 주에 있는 리시외로 이사했다. 그곳에는 젤리의 약사 형제인 이지도르 게랭이 그의 아내와 두 딸 잔과 마리와 함께 살고 있었다. 젤리는 마지막 몇 달 동안 레이스 사업을 포기했고, 루이는 그녀가 죽은 후 사업을 팔았다. 루이는 언덕 비탈에 위치한 넓고 아름다운 시골집 Les Buissonnets|레 뷔소네프랑스어를 임대했는데, 그곳은 마을을 내려다보는 넓은 정원이 있었다. 테레즈는 Les Buissonnets|레 뷔소네프랑스어로의 이사를 "제 인생의 두 번째 시기, 셋 중 가장 고통스러운 시기"의 시작으로 보았다. 리시외에서 폴린은 테레즈의 "엄마" 역할을 맡았고, 테레즈는 특히 그녀와 나이가 가장 가까운 자매 셀린과 가까워졌다.[12]
테레즈는 8살 반이 될 때까지 집에서 교육을 받았고, 이후 리지외에 있는 노트르담 뒤 프레 수도원의 베네딕토회 수녀들이 운영하는 학교에 입학했다. 마리와 폴린에게서 훌륭하고 세심한 가르침을 받은 테레즈는 글쓰기와 산수를 제외하고는 반에서 최고가 되었다. 그러나 어린 나이와 높은 성적으로 인해 따돌림을 당했다. 테레즈는 예민한 성격 때문에 매우 고통스러워했고, 조용히 눈물을 흘렸다. 게다가 휴식 시간에 시끄러운 놀이도 그녀의 취향이 아니었다. 그녀는 이야기를 하거나 유치반의 어린 아이들을 돌보는 것을 더 좋아했다. 셀린은 "테레즈는 숨는 것을 좋아하게 되었다.[14] 그녀는 관찰받는 것을 원치 않았는데, 진심으로 자신을 열등하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라고 회상했다.
자유로운 날에 테레즈는 리지외에 있는 두 사촌 중 어린 마리 게랭과 점점 더 가까워졌다. 두 소녀는 은수자 놀이를 하곤 했는데, 이는 위대한 테레사가 한때 오빠와 함께 했던 놀이와 같았다. 그리고 매일 저녁 그녀는 가족과 함께 시간을 보냈다. 그러나 이중 생활과 매일의 자기 극복으로 인해 테레즈는 스트레스를 받았다. 학교에 가는 것은 점점 더 어려워졌다.
1882년 10월, 테레즈가 9살이 되었을 때, 언니 폴린이 리지외의 카르멜 수도원에 들어갔다. 테레즈는 큰 충격을 받았고, "폴린은 나에게서 잃어버린 것이다!"[15]라고 깊은 슬픔을 느꼈다. 그녀 또한 카르멜회에 들어가고 싶었지만 너무 어리다는 말을 들었다.
이 시기에 테레즈는 자주 아팠다. 그녀는 신경 떨림 증세를 겪기 시작했고, 가족들은 진단을 내릴 수 없었던 노타 박사를 불렀다. 1882년 가이랄 박사는 테레즈가 "정서적 좌절에 신경증적 발작으로 반응한다"고 진단했다.
폴린은 은둔 생활을 하면서도 테레즈에게 편지를 쓰고 돕기 위해 노력했다. 1883년 5월 13일, 테레즈는 마리의 방에 놓여 있던 성모 마리아 상을 바라본 후 회복되었는데, 성모가 자신에게 미소를 지었다고 기록했다. 그녀는 "우리 복되신 성모님이 제게 오셔서, 제게 미소를 지어 주셨어요. 저는 얼마나 행복한지요."라고 썼다.[17] 그러나 언니 마리의 요청으로 이 환상에 대해 가르멜 수녀들에게 말했을 때 그들의 질문에 시달리며 자신감을 잃었다. 자기 의심으로 그녀는 일어난 일에 대해 의문을 품기 시작했고, "저는 '거짓말을 했다'고 생각했어요."라며 괴로워했다.[17] 이러한 걱정은 1887년 11월까지 계속되었다.
1886년 10월, 맏언니 마리가 같은 가르멜 수도원에 들어가 테레즈의 슬픔을 더했다. 테레즈는 마리가 자신을 기다리지 않은 것에 대해 "쓰디쓴 눈물"을 흘렸다.[15]
테레즈는 알폰소 리구오리와 이냐시오 데 로욜라와 같은 다른 성인들도 겪었던 결벽증을 앓기도 했다.
2. 2. 수도 생활의 갈망과 가르멜회 입회
1887년, 14세가 된 테레즈는 카르멜회 입회를 원했다. 아버지는 허락했지만, 수녀원 원장과 지도 사제는 너무 어리다는 이유로 거절했다. 이어서 바이외의 주교에게 허가를 받으려 했지만, 역시 나이를 이유로 허가받지 못했다. 같은 해 10월, 테레즈는 15세 때 아버지와 언니들과 함께 로마 순례단에 참여했다. 거기서 교황 레오 13세를 알현하고 직접 카르멜회 입회의 특별 허가를 청했지만, 교황은 주교와 지도 사제의 권고에 따르라고 부드럽게 테레즈를 타일렀다.[148]테레즈가 16세가 되던 1889년 4월, 주교가 마침내 수녀원 입회를 허가했고, 테레즈는 카르멜회에 입회하여 "어린 예수의 테레즈"라는 수도명을 받았다. 같은 해, 이전부터 몸이 좋지 않고 정신 질환 징후를 보이던 아버지가 심장 발작을 일으켜 요양원에 들어갔고, 그곳에서 마지막 3년을 보냈다. 1890년 9월 8일, 첫 서원을 한 테레즈는 수도명에 "거룩한 얼굴(존귀한 모습)"(la Sainte Face)이라는 말을 덧붙였다.
2. 3. 투병과 죽음
테레즈는 1896년 4월 결핵으로 객혈을 시작했다.[53] 이 병으로 인해 그녀는 인도차이나반도 선교와 같은 해외 선교의 꿈을 이루지 못했다.1897년 7월, 테레즈는 수도원 양호실로 옮겨졌고, 8월 19일 마지막 성체를 영했다. 테레즈는 육체적 고통이 극심해 의사조차도 "아! 이 젊은 수녀가 얼마나 고통받고 있는지 알기만 한다면!"이라고 탄식할 정도였다. 테레즈는 마지막 순간에 "이렇게 많이 고통받는 것이 가능하다고는 결코, 결코 믿지 못했을 것이다!"라고 말했다.
1897년 9월 30일, 테레즈는 언니들의 보살핌을 받으며 24세의 젊은 나이로 세상을 떠났다. 임종 직전에 그녀는 "나는 더 이상 고통받을 수 없는 지경에 이르렀다. 모든 고통이 내게 달콤하기 때문이다"라고 말했으며, 마지막 말은 "나의 하느님, 당신을 사랑합니다!"였다.[54]
테레즈는 "저는 지상에 선을 행하기 위해 천국에서 시간을 보낼 것입니다. 저는 하늘에서 장미 비를 내리겠습니다.(Je veux passer mon ciel à faire du bien sur la terre. Je ferai tomber une pluie de roses.)"라는 유언을 남겼다.
테레즈는 1897년 10월 4일, 리지외 시립 묘지에 있는 가르멜 수도회 묘지에 안장되었고, 그곳에는 그녀의 부모님도 묻혀 있었다. 그녀의 유해는 1910년 9월에 발굴되어 납 관에 안치되어 다른 무덤으로 옮겨졌다. 1923년 3월, 복자로 선포되기 전에 그녀의 유해는 리지외의 가르멜회로 다시 옮겨져 안치되었다. 유리 관 속에 있는 테레즈의 모습은 실제 시신이 아니라 테레즈 사후 셀린이 그린 그림과 사진을 바탕으로 한 ''조각상''이며, 그 안에는 흉곽과 다른 유해들이 들어 있다.
3. 영성
테레즈는 성인이 되려는 결심으로 리지외의 가르멜 수도원에 들어갔으나, 1894년 말 6년간의 수도 생활을 통해 자신이 얼마나 작고 미미한지를 깨달았다. 자신의 모든 노력의 한계를 보았고, 실천하고 싶어 하는 변함없는 사랑과는 거리가 멀다고 느꼈다. 테레즈는 그때 자신이 하느님의 도움을 구하는 법을 무의미함에서 배워야 한다는 것을 깨달았다고 한다.
테레즈의 영성은 크게 세 가지로 요약할 수 있다.
- '''작은 길'''
- '''자비로운 사랑'''
- '''예수의 거룩한 얼굴'''
테레즈는 잠언의 "무지한 자는 이리로 오라"(잠언 9:4)[37]와 이사야서의 "너희가 젖을 빨며 옆구리에 안기며 무릎 위에 앉아서 어루만짐을 받을 것이라. 어머니가 위로함 같이 내가 너희를 위로하리라"(이사야 66:12–13)[38]라는 구절에 감동받았다. 예수님께서 그녀를 성덕의 정상으로 이끌어 주실 것이라고 결론지었고, 자신의 작음과 한계는 좌절이 아닌 기쁨의 근거가 되었다. 자서전 원고 C에 이르러서야 이 발견에 "작은 길"(petite voie프랑스어)이라는 이름을 붙였다.[39]
테레즈는 성덕을 추구하고 하느님에 대한 사랑을 표현하기 위해 영웅적인 행위나 위대한 업적이 필요하지 않다고 믿었다.[41] "사랑은 행동으로 증명되는데, 내가 어떻게 내 사랑을 보여줄 수 있을까? 위대한 일들은 나에게 금지되어 있다. 내가 내 사랑을 증명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은 꽃을 뿌리는 것이고, 이 꽃들은 모든 작은 희생, 모든 시선과 말, 그리고 사랑을 위해 가장 작은 행동을 하는 것이다."라고 하였다.[42]
테레즈의 "작은 길"은 그녀 영성의 기초이다.[43] 가톨릭 교회 내에서 테레즈의 길은 한동안 "영적인 어린 시절의 작은 길"로 알려졌지만,[8][41][44][45][46] 테레즈는 "작은 길"을 세 번만 썼고,[39] "영적인 어린 시절"이라는 문구를 쓴 적이 없다. 테레즈 사후에 그녀의 길을 해석하기 위해 "영적인 어린 시절의 작은 길"이라는 문구를 채택한 사람은 언니 폴린이었다.[47] 1897년 5월, 테레즈는 아돌프 롤랑 신부에게 "... 내 길은 전적으로 신뢰와 사랑의 길입니다 ..."라고 썼다.[48]
테레즈는 성체 숭배에 헌신했고, 1895년 2월 26일 죽기 직전에 기억에 의존하여 초고 없이 성체 숭배 중에 작곡했던 시 《사랑으로 살다》를 썼다. 이 시는 다양한 종교 단체에 보내졌고, 그녀의 시 노트에 포함되었다.[57]
테레즈는 숨겨진 삶을 살았고 "알려지지 않기를 원했지만" 영적인 자서전을 통해 죽은 후에 유명해졌다. 그녀의 자매들이 기록한 편지, 시, 종교극, 기도, 마지막 대화와, 셀린이 대부분 제작한 그림과 사진은 그녀가 더 알려지도록 이끌었다.
테레즈는 임종 시에 "나는 단순함을 사랑할 뿐입니다. 나는 허세를 혐오합니다"라고 말했고, 그녀 시대에 쓰여진 성자들의 삶에 관한 주장에 대해 "우리는 불가능한 것 또는 우리가 알지 못하는 것을 말해서는 안 됩니다. 우리는 상상된 삶이 아닌 그들의 진짜 삶을 보아야 합니다."라고 하였다. "나의 길은 모든 자신감과 사랑입니다"라고 말한 그녀의 영성은 많은 신자들에게 영감을 주었다. 그녀는 자신의 작음을 직면하여 성결을 하느님께 맡겼다. 완전히 새로운 작은 길로 천국에 가고 싶어했으며, "나를 예수님께로 들어 올릴 엘리베이터를 찾고 싶었다."라고 하였다. 엘리베이터는 그녀의 작음 속에서 그녀를 들어 올리는 예수님의 팔이 될 것이라고 적었다.[58]
3. 1. 작은 길
테레즈는 자신의 영적 여정에서 "작은 길"이라는 독창적인 영성을 발전시켰다. 이는 자신의 무력함과 한계를 인정하고, 어린아이와 같은 단순함과 신뢰로 하느님의 자비에 온전히 의탁하는 길이다. 테레즈는 위대한 업적이나 영웅적인 행위가 아니라, 일상생활에서의 작은 희생과 사랑의 실천을 통해 성덕에 나아갈 수 있다고 믿었다. 테레즈의 "작은 길"은 당시 프랑스 사회에 만연했던 부르주아적 허영과 위선을 극복하고, 소외된 이웃에게 사랑을 실천하는 구체적인 방법으로 제시되었다.[37][38][39]1894년 말, 6년간의 카르멜 수도 생활을 통해 테레즈는 자신이 얼마나 작고 미미한지를 깨달았다. 자신의 모든 노력의 한계를 보았고, 실천하고 싶어 하는 변함없는 사랑과는 거리가 멀다고 느꼈다. 하느님의 도움을 구하는 법을 무의미함에서 배워야 한다는 것을 깨달았다. 잠언 9장 4절("무지한 자는 이리로 오라")과 이사야서 66장 12-13절("너희가 젖을 빨며 옆구리에 안기며 무릎 위에 앉아서 어루만짐을 받을 것이라. 어머니가 위로함 같이 내가 너희를 위로하리라")에서 영감을 받았다.[37][38]
예수님께서 그녀를 성덕의 정상으로 이끌어 주실 것이라고 결론지었다. 테레즈의 작음, 그녀의 한계는 좌절이 아닌 기쁨의 근거가 되었다. 자서전 원고 C에 이르러서야 이 발견에 "작은 길"(petite voie프랑스어)이라는 이름을 붙였다.[39]
테레즈는 성덕을 추구하고 하느님에 대한 사랑을 표현하기 위해, 영웅적인 행위나 위대한 업적이 필요하지 않다고 믿었다.[41] "사랑은 행동으로 증명되는데, 내가 어떻게 내 사랑을 보여줄 수 있을까? 위대한 일들은 나에게 금지되어 있다. 내가 내 사랑을 증명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은 꽃을 뿌리는 것이고, 이 꽃들은 모든 작은 희생, 모든 시선과 말, 그리고 사랑을 위해 가장 작은 행동을 하는 것이다."라고 말했다.[42]
테레즈의 "작은 길"은 그녀 영성의 기초이다.[43] 가톨릭 교회 내에서 한동안 "영적인 어린 시절의 작은 길"로 알려졌지만,[8][41][44][45][46] 테레즈는 "작은 길"을 세 번만 썼고,[39] "영적인 어린 시절"이라는 문구를 쓴 적이 없다. 사후에 그녀의 길을 해석하기 위해 "영적인 어린 시절의 작은 길"이라는 문구를 채택한 사람은 언니 폴린이었다.[47] 1897년 5월, 테레즈는 아돌프 롤랑 신부에게 "... 내 길은 전적으로 신뢰와 사랑의 길입니다 ..."라고 썼다.[48]
3. 2. 자비로운 사랑
테레즈는 하느님의 자비로운 사랑에 깊이 의지했으며, 자신을 온전히 하느님께 봉헌하는 삶을 살았다. 그녀는 자신의 연약함과 부족함에도 불구하고 하느님의 사랑이 자신을 정화하고 변화시킬 것이라고 믿었다.[38][40] 이러한 믿음을 바탕으로 테레즈는 '작은 길'이라는 영성을 제시했다.테레즈는 잠언 9장 4절("어리석은 자는 이리로 돌이키라")과 이사야 66장 12-13절("어머니가 자식을 위로함 같이 내가 너희를 위로할 것")에서 영감을 받아, 하느님께 어린아이와 같이 자신을 맡기는 '작은 길'을 발견했다.[37] 그녀는 자신의 작음과 한계를 인정하고, 예수님이 자신을 성덕으로 이끌어 주실 것이라고 믿었다.
테레즈는 굳이 거창한 행동을 하지 않더라도, 일상 속의 작은 희생과 사랑의 실천을 통해 하느님께 대한 사랑을 표현할 수 있다고 보았다.[42] 그녀는 "사랑은 행동으로 증명되는데, 위대한 일은 내게 금지되어 있다. 내가 내 사랑을 증명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은 꽃을 뿌리는 것이고, 이 꽃들은 모든 작은 희생, 모든 시선과 말, 그리고 사랑을 위해 가장 작은 행동을 하는 것이다."라고 말했다.
테레즈의 '작은 길'은 전적으로 신뢰와 사랑에 기반을 둔 영성이다.[48] 그녀는 자신의 무력함을 인정하고 하느님의 품에 어린아이처럼 자신을 맡기는 것이 중요하다고 강조했다.[49] 이러한 테레즈의 자비로운 사랑에 대한 헌신은, 현대 사회의 경쟁과 이기주의 속에서 상처받은 사람들에게 위로와 희망을 주는 메시지로 다가온다.
3. 3. 예수의 거룩한 얼굴
테레즈는 예수의 거룩한 얼굴에 대한 특별한 신심을 가지고 있었다. 1889년 1월 10일 수녀복을 받은 테레즈는 자신의 수도명에 ''거룩한 얼굴''을 추가했는데, 이는 그녀의 내면의 삶의 발전과 특징에 점점 더 중요해지는 속성이었다.[64] 그녀는 예수의 거룩한 얼굴과 관련된 고통을 묵상함으로써, 그리스도와 더 가까워질 수 있다고 느꼈다.[71]1895년에 작곡된 시 ''여기 나의 천국''에서 테레즈는 사랑의 신성한 연합을 통해 영혼이 그리스도의 모습을 취한다는 생각을 표현했다. 테레즈는 예수의 수난에서 그리스도의 거룩한 얼굴에 대한 매력을 표현하는 여러 기도를 썼으며, 사랑을 위해 예수처럼 고통받고 싶어하는 소망을 반영했다. 1895년 8월(죽기 2년 전)에 쓴 ''거룩한 얼굴 찬가''에서 "예수님, 당신의 형언할 수 없는 모습은 제 발걸음을 인도하는 별입니다. 아! 당신은 아십니다. 당신의 감미로운 얼굴은 저에게 지상에서의 천국입니다. 제 사랑은 눈물로 장식된 당신의 얼굴의 매력을 발견합니다. 저는 당신의 슬픔을 묵상할 때 제 눈물을 통해 미소짓습니다."라고 하였다.[71]
테레즈는 복음서에서 탄생(아기 예수)과 수난(거룩한 얼굴)의 이야기 모두에서 하느님의 자비를 강조했다. 그녀는 "그[예수의 얼굴]는 일그러지고 피로 덮여 … 알아볼 수 없게! … 하지만 신성한 아이는 떨지 않습니다. 이것이 그가 자신의 사랑을 보여주기로 선택한 것입니다."라고 하였다.[72]
그녀는 ''죄인을 위한 거룩한 얼굴 기도''를 지었다. "영원하신 아버지, 당신께서 제게 당신의 신성한 아들의 숭배할 만한 얼굴을 유산으로 주셨으므로, 저는 그 얼굴을 당신께 바치며, 이 무한한 가치의 동전과 교환하여, 당신께 헌신한 영혼들의 배은망덕을 잊고 모든 불쌍한 죄인들을 용서해 주시기를 간청합니다." 그녀의 시와 기도는 수십 년 동안 예수의 거룩한 얼굴에 대한 신심을 퍼뜨리는 데 도움이 되었다.
예수의 거룩한 얼굴에 대한 신심은 1844년 프랑스 투르의 카르멜 수녀 성 베드로의 마리아에 의해 장려되었다. 이후 거룩한 얼굴의 사도로 알려진 레오 뒤퐁이 이를 장려했으며, 그는 1851년 투르에 거룩한 얼굴 대사제를 창설했다.[62][63] 테레즈는 1885년 4월 26일 이 대사제에 가입했다.[64] 그녀의 부모 루이와 젤리 마르탱도 뒤퐁이 투르에 처음 설립한 거룩한 얼굴 기도회에서 기도했다.[65] 이 신심은 1898년 처음 사진 네거티브로 나타난 토리노의 수의보다는 뒤퐁이 장려한 베로니카의 수건의 이미지에 기초했다.
1896년 8월 6일, 테레즈는 자신과 카르멜의 다른 두 수녀를 위해 ''거룩한 얼굴 봉헌''을 작곡했다. 봉헌의 서문은 "이 ''순수한 사랑''의 작은 부분은 이 모든 다른 작품들을 모두 합친 것보다 교회에 더 유익하다... 그러므로 우리의 영혼이 ''사랑'' 안에서 많이 단련되어 빨리 소모되어 우리가 이 세상에서 오래 머물지 않고 곧 ''예수님, 얼굴을 맞대어'' 뵙는 것이 매우 중요하다."라고 하였다.[67][68]
4. 저술
테레즈는 사도 시대 이후 가장 인기 있는 로마 가톨릭 성인 중 한 명이다. 역사적으로 가깝기 때문에 쉽게 다가갈 수 있으며, 《뉴욕 타임스》는 그녀를 "로마 가톨릭 성인의 에밀리 디킨슨"이라고 칭했다.[55] 교회 박사로서 많은 신학적 논평과 연구의 대상이 되었고, 수백만 명의 삶에 감동을 준 젊은 여성으로서 여전히 대중 신앙의 초점이 되고 있다.[56] 20세기 전반에 걸쳐 가톨릭 신자들에게 영적 삶에 대한 단순하고 실용적인 접근 방식으로 성결의 모델이 되었다.
테레즈는 성체 숭배에 헌신했고, 1895년 2월 26일 죽기 직전 성체 숭배 중에 《사랑으로 살다》라는 시를 썼다. 이 시는 기억에 의존하여 초고 없이 작곡되었으며, 그녀의 생애 동안 다양한 종교 단체에 보내졌고 시집에도 포함되었다.[57]
테레즈는 숨겨진 삶을 살았고 "알려지지 않기를 원했지만" 사후에 영적인 자서전을 통해 유명해졌다. 그녀의 자매들이 기록한 편지, 시, 종교극, 기도, 마지막 대화와 셀린이 제작한 그림 및 사진은 그녀를 더 널리 알리는 데 기여했다.
테레즈는 임종 시 "나는 단순함을 사랑할 뿐입니다. 나는 허세를 혐오합니다"라고 말하며, 당시에 쓰여진 성자들의 삶에 대해 "우리는 불가능한 것 또는 우리가 알지 못하는 것을 말해서는 안 됩니다. 우리는 상상된 삶이 아닌 그들의 진짜 삶을 보아야 합니다"라고 언급했다. 그녀의 영성은 "나의 길은 모든 자신감과 사랑입니다"라는 말로 요약되며, 많은 신자들에게 영감을 주었다. 자신의 작음을 직면하여 성결을 하느님께 맡겼으며, 완전히 새로운 작은 길로 천국에 가고자 했다. "나는 나를 예수님께로 들어 올릴 엘리베이터를 찾고 싶었다"고 하며, 엘리베이터는 자신의 모든 작음 속에서 자신을 들어 올리는 예수님의 팔이 될 것이라고 적었다.[58]
테레즈는 잔 다르크를 기리기 위해 두 편의 희곡을 썼다. 첫 번째 희곡은 잔 다르크가 하늘의 목소리에 응답하여 전투에 나서는 내용을, 두 번째 희곡은 그녀의 순교를 다루었다.[36] 1894년 1월 27일, 레오 13세는 잔 다르크를 존경스러운 인물로 선언했다. 테레즈는 앙리-알렉상드르 발롱의 《잔 다르크의 역사》를 참고하여 1894년 1월 21일에 《잔 다르크의 사명》을, 1895년 1월 21일에 《잔 다르크가 사명을 완수하다》를 카르멜 수도회에서 공연했다. 이 작품들은 "거의 베일을 벗은 자화상"으로 평가받는다.
4. 1. 어떤 영혼의 이야기
《어떤 영혼의 이야기》(Histoire d'une âme프랑스어)는 테레즈가 자신의 어린 시절과 수도 생활, 영적 여정을 기록한 자서전이다. 이 책은 테레즈의 "작은 길" 영성을 생생하게 보여주는 중요한 자료이며, 출판 이후 전 세계적으로 번역되어 수많은 사람들에게 감동을 주었다. 특히 한국 가톨릭교회에서는 이 책이 널리 읽히며, 테레즈의 영성이 한국 신자들의 신앙생활에 큰 영향을 미치고 있다.테레즈는 자신의 영적 자서전인 ''영혼의 이야기''(Histoire d'une âme프랑스어)로 가장 잘 알려져 있다.[59] 이 책은 세 개의 별도 원고를 모은 것이다. 1895년에 쓰여진 첫 번째 원고는 그녀의 어린 시절에 대한 회고록으로, 수녀원장인 언니 폴린, 예수의 아녜스 수녀의 지시에 따라 쓰여졌다. 아녜스 수녀는 그녀의 맏언니, 성심의 마리 수녀의 권유를 받고 이 명령을 내렸다.

두 번째 원고는 1896년 9월에 맏언니 마리의 요청으로 쓰여진 3페이지 분량의 편지이다. 마리는 테레즈의 병세가 심각하다는 것을 알고 그녀에게 그녀의 "작은 교리"를 적어 달라고 요청했다. 1897년 6월, 아녜스 수녀는 그녀의 뒤를 이어 수녀원장이 된 곤자가의 마리 수녀에게 테레즈가 그녀의 종교 생활에 대한 더 자세한 내용을 담은 또 다른 회고록을 쓸 수 있도록 허락해 달라고 요청했다(겉으로는 나중에 예상되는 부고를 작성하는 데 도움을 주기 위해서였다).[60]
테레즈는 임종을 앞두고 이 책이 미래에 영혼들에게 호소하고 유익을 줄 것이라고 여러 차례 언급했다. 그녀는 폴린에게 필요하다고 판단되는 모든 변경을 허가했다. 이 책은 폴린(아녜스 수녀)에 의해 심하게 편집되었으며, 폴린은 테레즈의 원고를 7천 번 이상 수정하고 이를 여동생의 전기 형식으로 제시했다. 스타일상의 고려 사항 외에도 곤자가의 마리 수녀는 폴린에게 원고의 처음 두 부분을 마리 수녀에게도 보내는 것처럼 보이도록 수정하라고 명령했다. 이 책은 수녀의 죽음을 다른 카르멜회에 알리고 기도를 요청하는 통상적인 "서한"으로 발송되었다. 그러나 복사본이 대여되고 널리 배포되면서 훨씬 더 넓은 유통이 이루어졌다.
1973년 이후, 테레즈의 원본, 수정되지 않은 원고, 즉 ''영혼의 이야기'', 그녀의 편지, 시,[61] 기도문, 그리고 그녀가 수도원 휴식을 위해 쓴 연극들을 담은 두 개의 100주년 기념 프랑스어판이 출판되었다.
4. 2. 기타 저술
테레즈는 자서전 외에도 편지, 시, 희곡 등 다양한 글을 남겼다.1895년 2월 26일, 테레즈는 죽기 직전 성체 숭배 중에 《사랑으로 살다》라는 시를 썼다. 이 시는 기억을 더듬어 초고 없이 쓴 작품으로, 테레즈의 대표작 중 하나로 꼽힌다.[57] 이 시는 테레즈가 살아있을 때 여러 종교 단체에 보내졌고, 시집에도 수록되었다.
테레즈는 어린 시절의 영웅인 잔 다르크를 기리기 위해 두 편의 희곡을 썼다. 첫 번째 작품은 잔 다르크가 하늘의 목소리에 응답하여 전투에 나서는 내용을, 두 번째 작품은 잔 다르크의 순교를 다룬다.[36] 1894년 1월 27일, 레오 13세는 잔 다르크를 존경스러운 인물로 선언했다. 테레즈는 앙리-알렉상드르 발롱의 《잔 다르크의 역사》를 참고하여 1894년 1월 21일에 《잔 다르크의 사명》을, 1895년 1월 21일에 《잔 다르크가 사명을 완수하다》를 카르멜 수도회에서 공연했다. 이 작품들은 "거의 베일을 벗은 자화상"으로 평가받는다.
테레즈의 편지, 시, 종교극, 기도, 그리고 마지막 대화는 그녀의 자매들이 기록했다. 또한, 테레즈의 자매 셀린이 그린 그림과 사진은 테레즈를 더 널리 알리는 데 중요한 역할을 했다.
5. 시성과 유산
리시외의 테레즈는 사도 시대 이후 가장 인기 있는 로마 가톨릭 성인 중 한 명으로, 역사적으로 우리와 가깝기 때문에 쉽게 다가갈 수 있다. 《뉴욕 타임스》의 바바라 스튜어트는 테레즈를 "로마 가톨릭 성인의 에밀리 디킨슨"이라고 묘사했다.[55]
테레즈는 성체 숭배에 헌신했으며, 1895년 2월 26일 죽기 직전에 성체 숭배 중에 작곡한 시 《사랑으로 살다》를 기억에 의존하여 초고 없이 썼다. 이 시는 그녀의 생애 동안 여러 종교 단체에 보내졌고, 그녀의 시 노트에 포함되었다.[57]
테레즈는 숨겨진 삶을 살았고 "알려지지 않기를 원했지만" 사후 그녀의 영적인 자서전을 통해 유명해졌다. 그녀는 편지, 시, 종교극, 기도, 그리고 자매들이 기록한 마지막 대화도 남겼다. 그녀의 자매 셀린이 제작한 그림과 사진은 테레즈를 더 널리 알리는 데 기여했다.
테레즈는 임종 시에 "나는 단순함을 사랑할 뿐입니다. 나는 허세를 혐오합니다"라고 말하며, 당대에 쓰여진 성자들의 삶에 대해 "우리는 불가능한 것 또는 우리가 알지 못하는 것을 말해서는 안 됩니다. 우리는 상상된 삶이 아닌 그들의 진짜 삶을 보아야 합니다"라고 언급했다.[32] "나의 길은 모든 자신감과 사랑입니다"라는 말은 그녀의 영성 깊이를 잘 보여주며, 많은 신자들에게 영감을 주었다.
5. 1. 시성 과정과 교회학자 선포
테레즈는 사후 그녀의 전구를 통해 많은 기적이 일어나면서, 1925년 교황 비오 11세에 의해 시성되었다.[73] 그녀는 잔 다르크보다 5년과 하루 후에 성인으로 선포되었으나, 1925년 테레즈를 위한 축하는 프랑스의 전설적인 영웅 잔 다르크를 위한 축하를 "훨씬 능가했다". 당시 교황 비오 11세는 성 베드로 대성당을 횃불과 기름 램프로 덮는 오래된 관습을 부활시켰다. 한 기록에 따르면, "55년 동안 먼지 쌓인 창고에 보관되어 있던 밧줄, 램프, 탈로우가 꺼내졌다. 1870년 마지막으로 이 일이 어떻게 이루어졌는지 기억하는 몇몇 늙은 노동자들이 300명의 남자들에게 2주 동안 성 베드로 대성당의 돔에 램프를 고정하도록 지시했다." ''뉴욕 타임스''는 "새로운 성녀를 위해 빛나는 성 베드로 대성당을 로마 전체가 감탄한다"라는 제목의 기사를 1면에 실었다. ''타임스''에 따르면, 22년 전 교황 비오 10세의 대관식 이후 성 베드로 대성당 내에서 가장 많은 인파로 추정되는 6만 명 이상의 사람들이 시성식을 지켜보았고, 저녁에는 50만 명의 순례자들이 불이 밝혀진 광장에 몰려들었다.1914년 6월 10일, 교황 비오 10세는 테레즈의 시성 조사를 진행하는 선언에 서명했다. 베네딕토 15세는 통상 사후 50년이 지나야 시성할 수 있다는 조건을 테레즈에 한하여 특별히 완화했는데, 이는 이례적인 일이었다. 1925년, 테레즈는 사망한 지 불과 28년 만에 교황 비오 11세에 의해 시성되었다. 4명의 언니들은 모두 장수하여 친동생이 가톨릭의 복자, 성인으로 추대되는 것을 목격했으며, 그중 2, 3명은 테레즈의 시성을 적극적으로 지원했다. 테레즈는 생전에 자신의 시성을 희망했던 몇 안 되는 성인 중 한 명이다.
1997년 10월 19일, 교황 요한 바오로 2세는 깊은 영성과 사상을 칭송하며 테레즈를 "교회학자"로 추가했다. 교회 학자 칭호를 받은 여성 성인은 아빌라의 테레사, 시에나의 카타리나에 이어 세 번째이다. (네 번째는 빙겐의 힐데가르트)
5. 2. 현대 사회에 미치는 영향
테레즈의 영성은 현대 사회의 물질주의와 개인주의를 극복하고, 이웃 사랑을 실천하는 중요한 가르침으로 여겨진다. 그녀의 "작은 길"은 평범한 일상 속에서도 하느님을 섬기고 이웃을 사랑하며 살아갈 수 있음을 보여준다. 특히 대한민국에서는 테레즈의 영성이 가톨릭 신자들의 신앙생활에 큰 영향을 미치고 있으며, 그녀의 삶과 가르침은 사회적 약자와 소외된 이웃에 대한 관심을 환기시키는 계기가 되고 있다.테레즈는 자신의 작음을 직면하여 자신의 성덕(聖德)을 하느님께 맡겼다. 그녀는 완전히 새로운 작은 길로 천국에 가고 싶어했다. "나는 나를 예수님께로 들어 올릴 엘리베이터를 찾고 싶었다." 그녀는 엘리베이터가 자신의 모든 작음 속에서 자신을 들어 올리는 예수님의 팔이 될 것이라고 적었다.[58]
성덕을 추구하고 하느님에 대한 사랑을 표현하기 위해, 영웅적인 행위나 위대한 업적을 달성하는 것이 필요하지 않다고 믿었다.[41] "사랑은 행동으로 증명되는데, 내가 어떻게 내 사랑을 보여줄 수 있을까? 위대한 일들은 나에게 금지되어 있다. 내가 내 사랑을 증명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은 꽃을 뿌리는 것이고, 이 꽃들은 모든 작은 희생, 모든 시선과 말, 그리고 사랑을 위해 가장 작은 행동을 하는 것이다."라고 하였다.[42]
교회 박사로서 그녀는 많은 신학적 논평과 연구의 대상이며, 수백만 명의 삶에 감동을 준 젊은 여성으로서, 여전히 많은 대중의 신앙의 초점이다.[56] 그녀는 영적 삶에 대한 접근 방식의 단순성과 실용성 때문에 20세기 전반에 걸쳐 가톨릭 신자들에게 매우 영향력 있는 성결의 모델이었다.
교황 비오 11세는 그녀를 "자신의 교황 재위의 별"로 만들었다. 1925년 5월 17일, 죽음으로부터 단 28년 만에 교황 비오 11세에 의해 시성되었다.[73] 1927년, 교황 비오 11세는 성 테레즈를 성 프란치스코 하비에르와 함께 선교의 공동 수호 성인으로 임명했다. 1944년, 교황 비오 12세는 그녀를 잔 다르크와 함께 프랑스의 공동 수호 성인으로 선포했다.[77]
1997년 10월 19일, 교황 요한 바오로 2세는 사도 서한 ''Divini Amoris Scientia''(''신성한 사랑의 과학'')를 통해 테레즈를 교회 박사로 선포했으며,[78] 이는 아빌라의 테레사, 시에나의 카테리나, 빙겐의 힐데가르트를 포함한 네 명의 여성 중 한 명이었다.
테레즈에 대한 헌신은 전 세계적으로 발전했다.
6. 유산과 숭배
리지외의 테레즈는 사도 시대 이후 가장 인기 있는 로마 가톨릭 성인 중 한 명이다. 《뉴욕 타임스》는 테레즈를 "로마 가톨릭 성인의 에밀리 디킨슨"이라고 불렀다.[55] 교회 박사이자 수백만 명의 삶에 감동을 준 젊은 여성으로서, 그녀는 많은 대중 신앙의 초점이다.[56] 그녀는 영적 삶에 대한 접근 방식의 단순성과 실용성 때문에 20세기 전반에 걸쳐 가톨릭 신자들에게 매우 영향력 있는 성결의 모델이었다.
테레즈는 성체 숭배에 헌신했고, 1895년 2월 26일, 죽기 직전에 기억에 의존하여 초고 없이 성체 숭배 중에 작곡했던 시 《사랑으로 살다》를 썼다. 이 시는 그녀의 생애 동안 다양한 종교 단체에 보내졌다.[57]
테레즈는 숨겨진 삶을 살았고 "알려지지 않기를 원했지만" 그녀의 영적인 자서전을 통해 죽은 후에 유명해졌다. 그녀의 자매 셀린이 기록한 편지, 시, 종교극, 기도, 마지막 대화와, 셀린이 찍은 그림과 사진은 그녀를 더 알리는 데 기여했다.[92]
테레즈는 임종 시에 "나는 단순함을 사랑할 뿐입니다. 나는 허세를 혐오합니다"라고 말했고, 성자들의 삶에 대해 "우리는 불가능한 것 또는 우리가 알지 못하는 것을 말해서는 안 됩니다. 우리는 상상된 삶이 아닌 그들의 진짜 삶을 보아야 합니다."라고 말했다. 그녀의 영성의 깊이는 "나의 길은 모든 자신감과 사랑입니다"라고 말했고, 많은 신자들에게 영감을 주었다. 그녀는 자신의 작음을 직면하여 그녀의 성결을 하느님께 맡겼다. 그녀는 완전히 새로운 작은 길로 천국에 가고 싶어했다. "나는 나를 예수님께로 들어 올릴 엘리베이터를 찾고 싶었다." 그녀는 엘리베이터가 그녀의 모든 작음 속에서 그녀를 들어 올리는 예수님의 팔이 될 것이라고 적었다.[58]
그녀의 자서전 원고 모음집인 ''영혼의 이야기''는 사후 1년 뒤, 매우 제한적인 독자층에게 인쇄되어 배포되었는데, 그 영향력은 상당했다. 교황 비오 11세는 그녀를 "자신의 교황 재위의 별"로 만들었다.
교황 비오 10세는 1914년 6월 10일 시성 절차 개시를 위한 칙령에 서명했다. 교황 베네딕토 15세는 절차를 서두르기 위해 죽음과 복자 사이의 통상적인 50년의 지연을 면제했다. 1921년 8월 14일, 그는 테레즈의 영웅적 덕에 대한 칙령을 공포하여 그녀를 존경할 만한 인물로 선언했다. 그녀는 1923년 4월 29일에 복자 지위에 올랐다.[54]
테레즈는 1925년 5월 17일, 그녀의 죽음으로부터 단 28년 만에 교황 비오 11세에 의해 시성되었다.[73] 그녀는 잔 다르크보다 5년 1일 후에 성인으로 선포되었다. 1925년 테레즈를 위한 축하는 프랑스의 전설적인 여걸을 위한 축하를 "훨씬 능가했다". 당시 교황 비오 11세는 성 베드로 대성당을 횃불과 기름 램프로 덮는 오래된 관습을 부활시켰다. ''뉴욕 타임스''는 "새로운 성녀를 위해 빛나는 성 베드로 대성당을 로마 전체가 감탄한다"라는 제목의 기사를 1면에 실었다. ''타임스''에 따르면, 22년 전 교황 비오 10세의 대관식 이후 성 베드로 대성당 내에서 가장 많은 인파로 추정되는 6만 명 이상의 사람들이 시성식을 지켜보았다. 저녁에는 50만 명의 순례자들이 불이 밝혀진 광장에 몰려들었다.
그녀는 20세기의 가장 인기 있는 성인 중 한 명이 되었다. 그녀의 축일은 1927년 10월 3일에 기념하기 위해 로마 일반 전례력에 추가되었다.[74] 1969년, 교황 바오로 6세는 그녀의 ''dies natalis''(천국으로의 생일) 다음 날인 10월 1일로 축일을 변경했다.[75]
리지외의 테레즈는 비행사, 꽃집, 질병 및 선교의 수호 성인이다. 교황 비오 11세는 그녀를 러시아 가톨릭 신자들의 수호 성인으로 만들고, 산탄토니오 아바테 알 에스킬리노의 공동 수호 성인으로 선언했으며, 테레즈의 축일을 5월 17일 시성 기념일에 슬라브 전례로 기념하도록 정했다.[76] 1927년, 교황 비오 11세는 성 테레즈를 성 프란치스코 하비에르와 함께 선교의 공동 수호 성인으로 임명했다. 1944년, 교황 비오 12세는 그녀를 잔 다르크와 함께 프랑스의 공동 수호 성인으로 선포했다.[77]
1997년 10월 19일, 교황 요한 바오로 2세는 사도 서한 ''Divini Amoris Scientia''(''신성한 사랑의 과학'')를 통해 테레즈를 교회 박사로 선포했다.[78] 테레즈는 아빌라의 테레사, 시에나의 카테리나, 빙엔의 힐데가르트와 함께 교회 박사로 선포된 네 명의 여성 중 한 명이다.
테레즈에 대한 헌신은 전 세계적으로 발전했다. 에디트 피아프의 몇몇 전기 작가에 따르면, 1922년 당시 무명이었던 일곱 살 소녀는 아직 공식적으로 시성되지 않은 테레즈의 무덤으로 순례한 후 맹목에서 치유되었다고 한다.[79]
1902년 폴란드 가르멜회 신부 라파엘 칼리노프스키는 그녀의 자서전 《어린 영혼의 이야기》를 폴란드어로 번역했다.[93] 1912년, 글래스고 교구 신학교 교사였던 토마스 N. 테일러 신부는 테레즈에 대한 짧은 성인전을 썼다. 이는 그녀의 시성 절차가 시작되기 2년 전의 일이었다. 테일러는 스코틀랜드에서 "작은 꽃"에 대한 신심의 중요한 지지자가 되었다.[94] 그는 카르핀의 성 프란치스코 하비에르 성당의 목사로서 루르드 동굴의 모형을 짓고, 마리아 군단에서 기증받은 조각상으로 테레즈를 기리는 작은 성전을 포함시켰다. 카르핀은 순례지가 되었다.[95]
6. 1. 리지외의 성 테레즈 대성당

테레즈 마르탱이 생애 대부분을 보낸 도시인 리지외는 현재 매년 약 100만 명의 방문객이 찾는 순례 중심지가 되었다.
리시외의 성 테레즈 대성당은 1954년 7월 11일에 봉헌되었으며 전 세계의 순례자들이 찾는 중심지가 되었다. 이 성당은 원래 1937년, 나중에 교황 비오 12세가 된 에우제니오 파첼리 추기경에 의해 헌정되었다. 대성당은 3,000명을 수용할 수 있다.[96]
성 테레즈 대성당 외에도 도시 곳곳에 테레즈의 삶을 기념하는 장소들이 있으며, 대성당과 함께 "리시외 성역"을 형성한다. 이 성역의 주요 장소로는 테레즈의 유해가 보관되었던 리시외의 카르멜, 테레즈가 성장한 "뷔소네" 가족의 집, 테레즈가 가족과 함께 어릴 적에 다니곤 했던 리시외의 생 피에르 대성당, 시복된 후 발굴되기 전 테레즈가 묻혔던 리시외의 묘지 등이 있다. 또한 순례자들을 맞이하고 수용하기 위한 여러 건물들이 성역 내에 마련되어 있다.[97]
6. 2. 기타 기념 장소 및 성지
리시외의 성 테레즈 대성당은 1954년 7월 11일에 봉헌되었으며, 전 세계 순례자들의 중심지가 되었다. 1937년, 훗날 교황 비오 12세가 되는 에우제니오 파첼리 추기경이 이 성당을 헌정했다. 대성당은 3,000명을 수용할 수 있다.[96]
성 테레즈 대성당 외에도, 리시외에는 테레즈의 삶을 기념하는 여러 장소가 있다. 이들은 대성당과 함께 "리시외 성역"을 이룬다. 주요 장소로는 테레즈의 유해가 보관되었던 리시외의 카르멜, 테레즈가 성장한 "뷔소네" 가족의 집, 테레즈가 가족과 함께 다녔던 리시외의 생 피에르 대성당, 시복 후 발굴되기 전 테레즈가 묻혔던 리시외의 묘지 등이 있다. 성역 내에는 순례자들을 위한 건물들도 마련되어 있다.[97]
6. 3. 유물 순례
테레즈의 유해는 1994년부터 전 세계를 순회하기 시작했다.[98] 1급 유물뿐만 아니라 성녀의 수도복, 묵주, 그리고 다른 여러 유품들도 함께 순례하였다.[99]2001년 여름에는 아일랜드를,[99] 같은 해에는 캐나다를 방문했다. 바실 흄 추기경은 1997년에 순례 제안을 거부했지만, 2009년 9월 말과 10월 초에 테레즈의 유해는 잉글랜드와 웨일스를 방문했으며, 10월 1일 축일에는 성공회 요크 민스터에서 하룻밤을 묵었다. 25만 명이 넘는 사람들이 유해를 경배했다.[100]
2008년 5월 31일부터 6월 14일까지 ''디스커버리'' 우주왕복선 임무에 참여했던 론 개런은 텍사스 뉴 케이니의 가르멜회 수녀들이 준 테레즈의 유해를 가져갔다. 가르멜회는 테레즈의 "다섯 개 대륙에서 동시에, 그리고 가장 외딴 섬들까지 복음을 전파하려는" 소망에 근거하여 이 유해를 가져갔다.[101]
2010년 6월 27일, 테레즈의 유해는 2010년 FIFA 월드컵과 함께 남아프리카 공화국을 처음 방문했다. 유해는 2010년 10월 5일까지 그곳에 머물렀다.[102]
테레즈가 카르멜회에서 사용했던 책상(유물과는 구별되는 유물)은 미국 교황청 선교회의 후원으로 2013년 9월과 10월에 미국을 순회했다.[103]
2013년 11월, 테레즈와 그녀의 부모 유물을 담은 새로운 성유물함이 마그니피캇 재단에 의해 필라델피아 대교구에 전달되었다.[104] 이 성유물함은 2013년 11월 9일 마그니피캇 데이에서 처음으로 참배를 위해 공개되었다.
일리노이주 다리엔에 있는 성 테레즈 국립 성지에는 리지외 외부에서 성녀의 유물과 개인 소장품이 가장 많이 소장되어 있다.[105]
7. 테레즈를 따르는 사람들
테레즈는 생전에 프랑스령 인도차이나의 가르멜 선교단과 서신을 주고받으며 초대를 받았으나, 결핵으로 인해 떠나지 못했다. 그녀의 사후, 자서전 ''영혼의 이야기''는 널리 읽히며 큰 영향을 주었고, 교황 비오 11세는 그녀를 "자신의 교황 재위의 별"이라고 칭송했다.[54]
1925년 5월 17일, 교황 비오 11세에 의해 시성된 테레즈는 20세기의 가장 인기 있는 성인 중 한 명이 되었다. 그녀는 비행사, 꽃집, 병자, 선교의 수호 성인이다. 1927년 교황 비오 11세는 성 프란치스코 하비에르와 함께 선교의 공동 수호 성인으로, 1944년 교황 비오 12세는 잔 다르크와 함께 프랑스의 공동 수호 성인으로 임명했다.[77] 교황 비오 11세는 그녀를 러시아 가톨릭 신자들의 수호 성인으로도 선포했다.[76] 1997년 교황 요한 바오로 2세는 테레즈를 교회 박사로 선포했는데, 이는 아빌라의 테레사, 시에나의 카테리나, 빙겐의 힐데가르트와 함께 네 명의 여성에게만 주어진 영예였다.[78]
1969년, 교황 바오로 6세는 그녀의 축일을 10월 1일로 변경했다.[75] 테레즈에 대한 신심은 전 세계적으로 퍼져나갔으며,[79] 1922년에는 에디트 피아프가 테레즈의 무덤을 순례한 후 시력을 회복했다는 일화도 전해진다.[79]
7. 1. 종교 단체
리지외의 성 테레즈 수도회는 1931년 3월 19일 시로-말라바르 가톨릭 교회의 교구장 주교인 아우구스티노 칸다틸의 허가를 받아 바실리우스 토마스 파나트, CST에 의해 설립되었으며, 이는 형제회를 위한 최초의 인도 종교 단체였다.[110]테레즈의 오블라트회(Oblates de Ste. Thérèse)[106]는 1933년 뤼송(프랑스) 교구의 가브리엘 마르탱 신부와 베아트릭스 두이야르에 의해 설립되었다.[107] 이들의 사명은 교구에서 복음을 전파하고 성녀 테레즈가 "지상에서 선행을 함으로써 천국을 보내도록" 돕는 것이다.[108][109]
7. 2. 테레즈의 영향을 받은 인물
테레즈의 자서전 ''영혼의 이야기''는 그녀가 사망한 후 1년 뒤에 출판되어 큰 영향을 주었다. 교황 비오 11세는 테레즈를 "자신의 교황 재위의 별"이라고 칭송했다.[54]교황 비오 10세는 1914년 6월 10일에 테레즈의 시성 절차를 시작하는 교령에 서명했다. 교황 베네딕토 15세는 시성 절차를 빠르게 진행하기 위해 사망 후 복자까지의 50년 유예 기간을 면제했다. 1921년 8월 14일, 테레즈의 영웅적 덕에 대한 교령이 선포되면서 그녀는 존경받을 만한 인물로 인정받았다. 1923년 4월 29일, 테레즈는 복자품에 올랐다.[54]
1925년 5월 17일, 교황 비오 11세는 테레즈를 성인으로 선포했다. 이는 잔 다르크가 성인으로 선포된 지 5년 하루 뒤의 일이었다.[73] 당시 교황 비오 11세는 성 베드로 대성당을 횃불과 기름 램프로 장식하는 오랜 전통을 되살렸다. ''뉴욕 타임스''는 "새로운 성녀를 위해 빛나는 성 베드로 대성당을 로마 전체가 감탄한다"라는 제목의 기사를 1면에 실었다. 6만 명이 넘는 사람들이 시성식에 참석했으며, 저녁에는 50만 명의 순례자들이 빛나는 광장에 모였다.[54]
테레즈는 20세기에 가장 인기 있는 성인 중 한 명이 되었다. 그녀의 축일은 1927년 10월 3일에 로마 일반 전례력에 추가되었다.[74] 1969년, 교황 바오로 6세는 축일을 10월 1일로 변경했다.[75]
테레즈는 비행사, 꽃집, 병자, 선교의 수호 성인이다. 교황 비오 11세는 그녀를 러시아 가톨릭 신자들의 수호 성인으로도 선포했다.[76] 1927년, 교황 비오 11세는 테레즈를 성 프란치스코 하비에르와 함께 선교의 공동 수호 성인으로 임명했다. 1944년, 교황 비오 12세는 테레즈를 잔 다르크와 함께 프랑스의 공동 수호 성인으로 선포했다.[77]
1997년 10월 19일, 교황 요한 바오로 2세는 테레즈를 교회 박사로 선포했다. 그녀는 아빌라의 테레사, 시에나의 카테리나, 빙겐의 힐데가르트와 함께 교회 박사로 선포된 네 명의 여성 중 한 명이다.[78]
테레즈에 대한 신심은 전 세계적으로 퍼져나갔다.[79] 에디트 피아프의 전기 작가들에 따르면, 1922년 당시 일곱 살이었던 에디트 피아프는 테레즈의 무덤을 순례한 후 시력을 회복했다고 한다.[79]
테레즈의 언니인 레오니 마르탱은 다섯 자매 중 유일하게 가르멜회에 입회하지 않았지만, 그녀 역시 성인 추대 후보이다. 레오니는 1899년 캉의 비지타시옹 수녀원에 입회하여 수녀 프랑수아즈-테레즈라는 이름을 받고 테레즈의 가르침을 따랐다. 그녀는 1941년 캉에서 사망했으며, 비지타시옹 수도원 지하 묘소에 있는 그녀의 묘는 일반인에게 공개되고 있다.[82] 2015년 7월 2일, 레오니의 삶과 성성에 대한 교구 조사가 캉의 비지타시옹 수도원 예배당에서 시작되었다. 그녀는 현재 ''하느님의 종'' 레오니 마르탱으로 불리고 있다.[8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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