토니 윌리엄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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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토니 윌리엄스는 미국의 재즈 드럼 연주자이다. 11세에 음악을 시작하여, 16세에 재키 맥클린에게 발탁되어 뉴욕으로 이주했다. 1963년 마일스 데이비스 그룹에 합류하여 1969년까지 활동하며 "황금의 퀸텟" 멤버로 이름을 알렸다. 록 음악에 대한 관심을 바탕으로 토니 윌리엄스 라이프타임을 결성하여 재즈 록 퓨전 운동을 이끌었다. 1976년에는 V.S.O.P. 퀸텟에 참여했으며, 트리오 오브 둠을 결성하여 활동했다. 1985년에는 블루 노트 레코드에 복귀하여 앨범을 발표했으며, 1995년에는 아르카나를 결성했다. 샌프란시스코에서 거주하며 후학을 양성하다가 1997년 담낭 수술 후 심장마비로 사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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토니 윌리엄스 - [인물]에 관한 문서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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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본 정보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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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명 | 앤서니 틸먼 윌리엄스 |
출생일 | 1945년 12월 12일 |
사망일 | 1997년 2월 23일 |
출생지 | 미국 일리노이주 시카고 |
사망지 | 미국 캘리포니아주 데일리시티 |
출신지 | 미국 매사추세츠주 보스턴 |
직업 | 음악가 작곡가 프로듀서 밴드 리더 |
악기 | 드럼 |
장르 | 재즈 포스트 밥 재즈 퓨전 모달 재즈 |
활동 기간 | 1961년 ~ 1997년 |
관련 활동 | 마일스 데이비스 토니 윌리엄스 라이프타임 샘 리버스 재키 맥린 앨런 도슨 V.S.O.P. 퍼블릭 이미지 리미티드 |
2. 생애 및 경력
윌리엄스는 일리노이주 시카고에서 태어나 매사추세츠주 보스턴에서 성장했다.[5] 그는 아프리카, 포르투갈, 중국 혈통이었다.[5][6] 11세에 드러머 앨런 도슨에게서 사사받았고, 13세에 색소폰 연주자 샘 리버스와 함께 프로로 연주하기 시작했다. 16세에는 색소폰 연주자 재키 맥린에게 발탁되었다.[5][7]
17세에 마일스 데이비스 퀸텟에 합류하여 세컨드 그레이트 퀸텟의 일원으로 큰 주목을 받았다. 블루 노트 레코드에서 리더로서 ''Life Time''(1964)과 ''Spring''(1965)을 발표했고, 에릭 돌피의 ''Out to Lunch!''와 앤드루 힐의 ''Point of Departure''에 사이드맨으로 참여했다.
1969년, 존 맥러플린, 래리 영과 함께 토니 윌리엄스 라이프타임을 결성하여 재즈 록 퓨전 운동을 이끌었다. ''Emergency!'' 발매 후, 잭 브루스가 합류한 ''Turn It Over''을 발표했다. 1975년에는 앨런 홀즈워스 등이 참여한 "The New Tony Williams Lifetime"을 결성, 컬럼비아 레코드에서 ''Believe It''과 ''Million Dollar Legs'' 두 앨범을 녹음했다.
V.S.O.P. 퀸텟 활동, 존 맥러플린, 자코 파스토리우스와 함께 트리오 오브 둠을 결성, 하바나 국제 재즈 페스티벌에서 공연했다. 1985년 블루 노트 레코드 복귀 후 자신의 퀸텟을 결성, The Story of Neptune 등을 발표했다. 퍼블릭 이미지 리미티드의 ''Album''에 참여했고, 아르카나를 결성하기도 했다.
1979년, 윌리엄스, 맥러플린, 베이시스트 자코 파스토리우스는 하바나 국제 재즈 페스티벌에서 공연했다.[5] 이 트리오는 Trio of Doom으로 알려졌고, 공연 녹음은 2007년에 발매되었다. 윌리엄스는 1980년 앨범에서 그룹 Fuse One과 함께 출연한다.[10]
1980년대에는 블루 노트 레이블에서 자신의 퀸텟을 결성하여 활동했다.
1997년 2월 20일, 윌리엄스는 복통으로 캘리포니아주 데일리 시티의 세톤 메디컬 센터에 입원했다. 2월 23일, 담낭 수술 회복 중 심장마비로 51세의 나이에 사망했다.[11][12]
2. 1. 초기 생애
윌리엄스는 시카고에서 태어나 보스턴에서 자랐다. 그는 아프리카계, 포르투갈계, 중국계 혈통이었다.[31] 어린 나이에 드러머 앨런 도슨에게 드럼을 배웠고,[32] 13세에 색소폰 연주자 샘 리버스와 함께 전문적으로 연주하기 시작했다. 16세에 색소폰 연주자 재키 맥린에게 발탁되었다.[33]2. 2. 마일스 데이비스 퀸텟 (1963-1969)
17세에 윌리엄스는 마일스 데이비스 퀸텟에 합류하여 주목받았다. 윌리엄스는 세컨드 그레이트 퀸텟의 중요한 요소였으며, 데이비스는 자서전에서 그를 "그룹의 사운드가 돌아가는 중심"이라고 불렀다.[8] 그의 연주는 폴리리듬과 미터 변조를 통해 재즈 리듬 섹션의 역할을 재정의하는 데 기여했다.[34] 한편, 그는 블루 노트 레코드에서 리더로서 ''Life Time''(1964)과 ''Spring''(1965) 두 앨범을 녹음했다. 또한 1964년에 에릭 돌피의 ''Out to Lunch!''와 앤드루 힐의 ''Point of Departure'' 등 블루 노트 레이블의 사이드맨으로도 참여했다.2. 3. 토니 윌리엄스 라이프타임 (1969-1976)
1969년 윌리엄스는 존 맥러플린, 래리 영과 함께 토니 윌리엄스 라이프타임을 결성했다.[5] 이 밴드는 재즈 록 퓨전 운동의 선구적인 밴드로 평가받는다.첫 앨범은 ''Emergency!''였다. 이후 Turn It Over 앨범에는 잭 브루스가 베이스 기타리스트이자 보컬리스트로 합류했다. 몇 번의 앨범 발매와 투어 후 라이프타임은 해산되었다. 1975년 윌리엄스는 베이시스트 토니 뉴턴, 키보디스트 앨런 파스콰, 기타리스트 앨런 홀즈워스가 참여한 "The New Tony Williams Lifetime"을 결성하여 컬럼비아 레코드에서 ''Believe It''과 ''Million Dollar Legs'' 두 앨범을 녹음했다.
2. 4. V.S.O.P. 퀸텟 및 그 이후 (1976-1997)
1976년, 윌리엄스는 마일스 데이비스 퀸텟의 동료들인 웨인 쇼터, 허비 행콕, 론 카터와 재결합했다.[5] 프레디 허바드가 마일스 데이비스의 공백을 메웠다.[5] 이들은 V.S.O.P. 퀸텟이라는 이름으로 활동했으며, 콘서트 실황은 ''V.S.O.P''(Very Special One-time Performance)로 발매되었다.[5][9]1979년에는 존 맥러플린, 자코 파스토리우스와 함께 트리오 오브 둠을 결성, 하바나 국제 재즈 페스티벌에서 공연했다.[5] 이 공연의 녹음은 2007년에 발매되었다.
1985년, 윌리엄스는 블루 노트 레코드로 복귀하여 ''Foreign Intrigue'' 앨범을 발표했다. 이후 자신의 어쿠스틱 퀸텟을 결성, ''The Story of Neptune''(1992) 등을 발표하며 활동했다.
그는 퍼블릭 이미지 리미티드의 ''Album''(1986) 등 다양한 음악가들과 협업했다. 1995년에는 데릭 베일리, 빌 라스웰과 함께 아르카나를 결성했다.
2. 5. 사망
1997년 2월 20일, 윌리엄스는 복통으로 캘리포니아주 데일리 시티의 세튼 메디컬 센터에 입원했다.[35][36] 2월 23일, 담낭 수술 회복 중 심장마비로 51세의 나이에 사망했다.[11][12]3. 개인 생활
윌리엄스는 일리노이주 시카고에서 태어나 매사추세츠주 보스턴에서 성장했다.[5] 그는 아프리카, 포르투갈, 중국 혈통이었다.[5][6] 1997년 2월 20일, 윌리엄스는 위통으로 캘리포니아주 데일리 시티의 세톤 메디컬 센터에 입원했다. 3일 후, 담낭 수술에서 회복하던 중 심장마비로 사망했다. 그의 나이 51세였다.[11][12] 윌리엄스는 사망할 때까지 샌프란시스코 베이 에어리어에서 거주하며 후학 양성에 힘썼다.[13][14]
4. 음악 스타일
맥스 로치 등의 정통 스타일로 시작했지만, 1960년대 중반에는 프리 재즈, 1970년대 전후에는 록의 영향을 받아 스타일이 변화했다.[23]
고속의 4비트를 특기로 했다. 그가 가입한 이후, 마일스 데이비스 그룹에서는 같은 곡이라도 해가 갈수록 템포가 빨라지는 것을 잘 알 수 있다. 마일스는 자서전에서 그의 스피드에 마일스가 대항하는 형태로 점점 템포 설정이 빨라졌다고 말했다. 또한 마일스는 윌리엄스가 가입 초부터 2, 4박으로 하이햇을 밟지 않았으므로 제대로 밟으라고 잔소리를 했다고도 말했다.
1970년대에는 반대로 모든 박으로 하이햇을 밟게 되었는데, 이러한 스타일은 이후 다른 드러머들에게 영향을 주었다.
5. 음반 목록
1971년 3월
1991년 12월
1994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