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통일 (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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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통일벼는 1970년대 대한민국에서 식량 부족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개발된 벼 품종이다. 1950년대부터 심화된 쌀 부족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정부는 쌀 자급을 최우선 과제로 삼고, 3원 교배 기술을 활용하여 수확량을 획기적으로 늘린 통일벼 개발에 성공했다. 통일벼는 기존 품종보다 30% 이상 높은 수확량을 기록하며 쌀 자급자족을 달성하는 데 기여했으나, 쌀의 품질 저하, 병충해, 재배 조건의 까다로움 등의 단점으로 인해 1992년 재배가 중단되었다. 현재는 아프리카 식량난 해결을 위한 대안으로 다시 주목받고 있다.

2. 개발 배경

1950년대 중반부터 1960년대까지 베이비붐으로 인구는 매년 3%씩 크게 늘어나는 데 반해 주식인 쌀 생산량은 답보를 거듭하면서 1970년대 초까지 쌀 부족문제가 갈수록 심각해졌다. 외화 부족으로 부족한 쌀을 수입할 수 없었기 때문에, 쌀을 자급하는 일은 국가의 최우선 정책과제였다. 정부는 쌀의 소비를 줄여보고자 혼식 및 밀가루 분식을 장려했고, 심지어는 학교에서 학생들의 도시락을 검사하기도 했다.

2. 1. 중앙정보부의 볍씨 밀수 사건

1950년대 중반부터 1960년대까지 베이비붐으로 인구가 매년 3%씩 크게 늘어나는 데 반해 주식인 쌀 생산량은 답보를 거듭하면서 쌀 부족 문제가 심각해졌다.[1] 정부는 쌀 자급을 최우선 정책과제로 삼고, 쌀 소비를 줄이기 위해 혼식 및 밀가루 분식을 장려했고, 학교에서 학생들의 도시락을 검사하기도 했다.

이때 중앙정보부이집트에서 나다(Nahada)라는 볍씨를 밀수해와서 농촌진흥청에 건네주었다.[1] 1965년 시험 재배 결과, 기존 벼보다 30% 이상 수확이 커서 '기적의 볍씨'로 소개되었다.[1] 박정희 대통령은 이 볍씨에 큰 기대를 걸고 자신의 이름을 따서 '희농 1호'라는 이름까지 붙였다.[1] 그러나 1967년 일반 농가에 보급되자 씨받이조차 어려울 정도로 처참한 실패로 끝났다.[1] 희농 1호는 '열대 지방에 맞는 자포니카형' 품종이었기 때문에 선선한 가을이 있는 한국 기후와는 맞지 않았다.[1]

3. 연구 개발

1960년부터 서울대학교 농과대학 교수로 근무하던 허문회(1927~2010)는 당시 식량부족의 해결책은 품종개량밖에 없다고 판단하고, 생산성이 높은 벼 품종 개발을 계획했다.[2] 이를 위해 1962년 필리핀에 설립된 국제미작연구소(International Rice Research Institute)에서 1964년부터 2년간 연구원으로 근무했고, 생산성이 높은 품종 개발 연구를 시작했다.[2]

과거 일본 농학자들이 연구한 바에 따르면, 1920년대에 벼를 인디카와 자포니카라는 2갈래로 분류한 이래, 두 아종(亞種)을 교배하면 불임이 된다는 것은 사실을 알고 있었다.[2]

그러나 허문회 교수는 인디카와 자포니카를 우선 교배한 뒤 그것을 다시 다른 인디카 품종과 교배하여 안정된 품종을 만드는 전략을 시도했다.[2] 이른바, '''3원 교배'''를 통해 만들어진 잡종 집단으로부터 높은 생산성이 기대되는 벼들이 등장하자, 그는 이 중 우수한 벼 종자를 선발하고 교배하여 세대를 진전시켜 나갔다.[2]

그 결과 1966년 봄에는 IRRI의 유명 품종들과 비슷하게 키는 작고 이삭이 크지만 온대 기후에서도 잘 자랄 수 있는 통일벼를 개발해 내는 데 성공했다.[2] 육종연구시설이 비교적 잘 갖춰져 있는 농촌진흥청과의 협력을 통해 더욱 효과적으로 이루어졌다.[2] 1971년에 ‘통일벼’가 세상에 빛을 보게 되었고, 1972년부터는 농가에 보급되어 재배되기 시작했다.[2]

3. 1. 3원 교배 기술

허문회는 인디카와 자포니카를 교배한 후 다시 다른 인디카 품종과 교배하는 '3원 교배' 기술을 통해 안정적인 다수확 품종을 개발했다.[2] 이는 기존의 통념을 깨는 혁신적인 시도였다. 1920년대에 벼를 인디카와 자포니카라는 2갈래로 분류한 이래, 두 아종을 교배하면 불임이 된다는 것이 알려져 있었으나,[2] 허문회는 3원 교배를 통해 잡종 집단에서 높은 생산성이 기대되는 벼들을 얻었고, 이 중 우수한 벼 종자를 선발하고 교배하여 세대를 진전시켰다.[2] 그 결과, 1966년 봄에는 국제미작연구소(International Rice Research Institute)의 유명 품종들과 비슷하게 키는 작고 이삭이 크지만 온대 기후에서도 잘 자랄 수 있는 통일벼를 개발하는 데 성공했다.[2]

3. 2. 농촌진흥청과의 협력

1966년 봄, 허문회는 IRRI의 유명 품종들과 비슷하게 키는 작고 이삭이 크지만 온대 기후에서도 잘 자랄 수 있는 통일벼를 개발해 내는 데 성공했다.[2] 육종 연구 시설이 잘 갖춰진 농촌진흥청과의 협력은 통일벼 개발을 가속화하는 데 중요한 역할을 했다.[2] 1971년에 ‘통일벼’가 세상에 빛을 보게 되었고, 1972년부터는 농가에 보급되어 재배되기 시작했다.[2]

4. 다른 국가에서의 연구

1972년 김일성의 지시로 북한 농업과학원에서 남북한 종자를 비교 실험하였다.[3] 북한 용성벼와 통일벼를 3년간 반복해서 심으며 3번의 비교 연구를 하였는데, 안남미와 교잡하여 수확량은 많지만 열대성으로 북한 기후에 맞지 않았고, 연구 결과에서는 북한 벼와 생산성 수준이 같았다.[3]

4. 1. 북한에서의 연구 (1972년)

1972년 김일성의 지시로 북한 농업과학원에서 남북한 종자를 비교 실험하였다.[3] 북한 용성벼와 통일벼를 3년간 반복해서 심으며 3번의 비교 연구를 하였는데, 안남미와 교잡하여 수확량은 많지만 열대성으로 북한 기후에 맞지 않았고, 연구 결과에서는 북한 벼와 생산성 수준이 같았다.[3]

5. 장단점

5. 1. 장점

기존의 자포니카 품종들과 비교할 때 평균 30% 이상 높은 수확량을 보여주었다.

5. 2. 단점

통일벼는 쌀의 질이 나빠 농민과 상인들이 모두 기피하였다.[4] 냉해에 약하고 병충해가 자주 발생했다.[4] 물이 풍부한 환경에서 재배해야 하며, 노동력이 많이 필요하고 재배 시기도 빨라야 하는 등 재배 조건이 까다로웠다. 볏짚이 짧고 약해서 새끼를 꼬아 만들 수 없어, 농한기 농가의 유일한 소득원이었던 볏짚 가공품 생산이 불가능해졌다.[4]

6. 재배 결과

1974년에는 조생 버전의 조생통일이 나왔고, 통일 계통의 벼로 밥맛을 개선한 유신벼 등도 나왔다.[5] 박정희 정부의 통일벼 재배 권장 시책의 실시로 '통일벼'의 재배면적는 1974년 전체 재배면적의 15%였던 것이 1976년에 44%로 확대되면서 평년보다 21.8% 증가한 521만 5천 톤의 쌀을 생산해냈고, 역사상 최초로 쌀의 자급자족을 달성하게 되었다.

1977년에는 600만 5천 톤의 쌀을 생산했으며, 생산성은 현미 기준으로 1ha당 5.31톤으로서 세계 1위에 이르게 되었고, 쌀의 자급률은 113%를 기록했다.[6] 1978년에는 재배면적이 58%까지 증가하였으나 통일계 벼 품종이 도열병에 감염되는 노풍 파동이 발생했다.[7]

1970년대 말부터는 일반 벼의 생산성도 통일벼 못지않게 높아졌었다.[8] 비료와 농약의 사용법을 일반 벼 재배에도 응용하였기에, 1978년에는 통일 계열(4.9MT/㏊)과 일반 벼(4.4MT/㏊)의 생산성 차이가 10% 안팎으로 크게 줄어들기도 했었다.[8]

1980년에 냉해로 인한 흉년이 발생 및 1인당 국민 소득이 향상되면서 양질미에 대한 선호도가 높아지자 통일벼 재배를 기피하게 되었다. 이에 따라 1989년에는 16%, 1991년에는 4%로 통일벼 재배면적이 크게 저하되었다.[9] 1992년 노태우 정부의 통일벼 수매중단에 따라 국내 농촌에서 완전히 사라졌다.[10][11]

그러다가 현재 아프리카 식량난 구원투수로 다시금 부상하고 있다.[12]

6. 1. 쌀 자급자족 달성 (1970년대 중반)

박정희 정부의 적극적인 통일벼 재배 장려 정책으로 1974년 조생통일, 유신벼 등이 개발되었다.[5] 1974년 전체 재배 면적의 15%였던 통일벼 재배 면적은 1976년 44%로 확대되었고, 평년보다 21.8% 증가한 521만 5천 톤의 쌀을 생산하며 한국은 역사상 최초로 쌀 자급자족을 달성했다. 1977년에는 600만 5천 톤의 쌀을 생산, 현미 기준 1ha당 생산성이 5.31톤으로 세계 1위였으며 쌀 자급률은 113%였다.[6] 1978년 재배 면적이 58%까지 증가했으나 도열병 감염으로 인한 노풍 파동이 발생했다.[7]

6. 2. 도열병 피해와 생산성 감소 (1978년)

1978년에는 통일계 벼 품종이 도열병에 감염되는 노풍 파동이 발생했다.[7] 1970년대 말부터는 일반 벼의 생산성도 통일벼 못지않게 높아졌다.[8] 비료와 농약의 사용법을 일반 벼 재배에도 응용하였기에, 1978년에는 통일 계열(4.9MT/㏊)과 일반 벼(4.4MT/㏊)의 생산성 차이가 10% 안팎으로 크게 줄어들기도 했었다.[8]

6. 3. 재배 중단 (1990년대)

1980년에 냉해로 흉년이 발생하고, 1인당 국민 소득이 향상되면서 양질미에 대한 선호도가 높아져 통일벼 재배를 기피하게 되었다.[9] 이에 따라 통일벼 재배면적은 1989년 16%, 1991년에는 4%로 크게 줄었다.[9] 1992년 노태우 정부는 통일벼 수매를 중단했고, 이에 따라 국내 농촌에서 완전히 사라졌다.[10][11]

7. 아프리카에서의 재조명

최근 통일벼아프리카 식량난 해결을 위한 대안으로 다시금 부상하고 있다.[12] 한국의 경험을 바탕으로 아프리카 현지에 맞는 품종 개발과 재배 기술 지원이 이루어지고 있다.

8. 평가 및 의의

8. 1. 긍정적 평가

8. 2. 부정적 평가

8. 3. 종합적 의의

참조

[1] 뉴스 「희농1호」를 벗긴다 https://www.joongang[...] 중앙일보 1965-10-02
[2] 뉴스 식생활 개선등 https://www.joongang[...] 중앙일보 1971-12-22
[3] 영상 "[이민복_1부] 한국 통일벼 종자를 비교 분석하던 북한농업 과학자가 한국에 망명한 이유!" 유미카 2023-11-22
[4] 뉴스 “통일벼, 냉해에 약하다” 예상되는 감수…그 원인과 문제점 https://www.joongang[...] 중앙일보 1972-09-21
[5] 서적 실록 통일벼 - 이완주 https://books.google[...]
[6] 뉴스 77년의 여운 과제와 교훈을 남긴사건들 ④ 쌀대풍 수출 https://www.mk.co.kr[...] 매일경제 1977-12-09
[7] 뉴스 박정희는 왜 통일벼 밥맛이 좋았을까? https://m.sisain.co.[...] 시사IN 2017-11-17
[8] 웹인용 한국문화사 > 04권 근현대 과학 기술과 삶의 변화 > 제3장 한국인이 배우고 개발한 과학 기술 > 1. 녹색 혁명, 그 빛과 그림자 > 유신의 끝, 통일벼의 끝 http://contents.hist[...] 국사편찬위원회 2024-03-08
[9] 뉴스 쌀생산 11년째 풍작 https://news.kbs.co.[...] KBS 9시뉴스 1991-10-04
[10] 뉴스 통일벼 시대 20년만에 끝/미질 안좋아 외면… 종자생산은 계속 https://www.joongang[...] 중앙일보 1992-06-16
[11] 웹인용 맛있는 햅쌀밥의 과학 https://scent.kisti.[...] 한국과학기술정보연구원 2018-09-26
[12] 뉴스 ‘통일벼’ 후예, 아프리카 식량난 구원투수로 https://news.kbs.co.[...] KBS 뉴스7 2023-07-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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