튜턴 기사단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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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튜턴 기사단국은 13세기부터 16세기까지 존재했던 국가로, 튜턴 기사단이 프로이센 지역을 정복하여 건설했다. 폴란드인의 프로이센 정착 시도와 교황 칙령을 거쳐 기사단은 프로이센을 장악하고 도시를 건설하며 세력을 확장했다. 1410년 그룬발트 전투에서 폴란드-리투아니아 연합에게 패배하며 쇠퇴하기 시작했고, 1466년 토룬 제2차 평화 조약으로 영토를 폴란드에 양도하고 봉토가 되었다. 1525년 종교 개혁으로 프로이센 공국으로 전환되며 튜턴 기사단국은 해체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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튜턴 기사단국 - [옛 나라]에 관한 문서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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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본 정보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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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반 명칭 | 독일 기사단국 |
긴 명칭 | 독일 기사단국 국가 |
토착어 명칭 | Staat des Diutschen Ordens Civitas Ordinis Theutonici |
상태 | 국가 |
존속 기간 | 중세 시대 |
위치 | 발트해 연안 |
수도 | 마리엔부르크 (1308년–1454년) 쾨니히스베르크 (1454년–1525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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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반 언어 | 고대 프로이센어 (대중적) 저지 독일어 중세 고지 독일어, 이후 초기 신 고지 독일어 (소수 지역) 중세 라틴어 발트어족 에스토니아어 리보니아어 고대 폴란드어 |
종교 | 로마 가톨릭교회 |
통화 | 마르크 |
데모님 | 튜턴족 |
정치 | |
정치 체제 | 신권적 선거 군주제 |
수장 칭호 | 총장 (1308년까지) 총장 겸 프로이센 지방장 (1525년까지) 리보니아 지방장 (1561년까지) |
초대 수장 | 헤르만 폰 잘차 |
초대 수장 임기 | 1226년–1239년 |
마지막 수장 | 알브레히트 폰 브란덴부르크 (프로이센 지방장) 고트하르트 케틀러, 쿠를란트 공작 (리보니아 지방장) |
마지막 수장 임기 | 1510년–1525년 (프로이센) 1559년–1561년 (리보니아) |
입법부 | 신분제 의회 |
역사 | |
시작 이벤트 | 리미니 황금 문서 |
시작 날짜 | 1226년 3월 |
주요 사건 1 | 독일 기사단의 단치히 점령 |
주요 사건 1 날짜 | 1308년 11월 8일 |
주요 사건 2 | 그룬발트 전투 |
주요 사건 2 날짜 | 1410년 7월 15일 |
주요 사건 3 | 13년 전쟁 |
주요 사건 3 날짜 | 1454년–1466년 |
주요 사건 4 | 제2차 토룬 조약 |
주요 사건 4 날짜 | 1466년 10월 19일 |
주요 사건 5 | 폴란드-튜턴 전쟁 |
주요 사건 5 날짜 | 1519년–1521년 |
주요 사건 6 | 프로이센 경의 (프로이센 분국의 종말) |
주요 사건 6 날짜 | 1525년 4월 10일 |
종료 이벤트 | 빌뉴스 조약 (리보니아 분국의 종말) |
종료 날짜 | 1561년 11월 28일 |
존속 상태 | |
상태 설명 | 주권 국가 (1230년–1466년) 봉토 및 일부 폴란드의 일부 (프로이센 한정) (1226년–1230년, 1466년–1525년) |
이전 | |
이전 국가 1 | 고대 프로이센인 |
이전 국가 2 | 에스토니아 공국 |
이전 국가 3 | 야트빙기아인 |
이전 국가 4 | 예루살렘 왕국 |
이후 | |
이후 국가 1 | 프로이센 공국 |
이후 국가 2 | 쿠를란트-젬갈레 공국 |
이후 국가 3 | 리보니아 공국 |
이후 국가 4 | 에스토니아 공국 (1561년-1721년) |
이후 국가 5 | 왕령 프로이센 |
2. 배경
옛 프로이센인들은 튜턴 기사단의 정복 시도 이전에 여러 차례 정복 시도를 견뎌냈다. 폴란드의 볼레스와프 1세는 997년에 프라하의 아달베르트를 파견하면서 정복을 시도하였으나 실패하였다. 1147년, 폴란드의 볼레스와프 4세는 키예프 루스의 도움을 받아 프로이센을 공격했지만 역시 정복하지 못했다. 마조비아 공작 콘라트 1세 아래에서 1209년, 1219년, 1220년, 1222년에 대규모 전투와 십자군 원정이 벌어졌지만, 서 발트 프로이센인들은 대부분의 원정을 성공적으로 격퇴했다.[8]
콘라트 1세는 1208년에 이미 옛 프로이센인을 상대로 십자군을 소집했지만 실패했다. 크리스티안의 조언에 따라 콘라트는 도브르진 기사단을 설립했으나 곧 패배했고, 교황에게 다시 십자군을 소집하고 튜턴 기사단의 지원을 요청했다. 그 결과, 옛 프로이센인을 상대로 한 여러 교황 칙령이 내려졌고, 유럽의 많은 기사들이 참여한 십자군은 60년 동안 지속되었다.
1224년 말, 교황 호노리우스 3세는 기독교 전체에 리보니아, 프로이센, 기타 지역에 대한 교황 특사로 모데나의 빌헬름 주교를 임명한다고 발표했다. 1226년 리미니 황금 칙서와 1234년 교황 리에티 교서의 결과로 프로이센은 튜턴 기사단의 소유가 되었다.
엘베강과 오데르강 사이의 새로 건립된 도시들과 달리, 튜턴 기사단이 건설한 도시들은 훨씬 더 규칙적인 직사각형의 거리 형태를 띠었으며, 이는 계획된 도시 건설의 특징을 나타낸다.[9] 이 도시들은 강력하게 요새화되었으며, 이는 기사단의 지휘하에 무장한 병력과 함께 저항적인 토착민인 옛 프로이센인들과의 오랜 갈등을 설명한다.[9]
2. 1. 폴란드인의 프로이센 정착
옛 프로이센인들은 튜턴 기사단의 정복 시도 이전에 여러 차례의 정복 시도를 견뎌냈다. 폴란드의 볼레스와프 1세는 997년에 프라하의 아달베르트를 파견하면서 일련의 실패한 정복을 시작했다. 1147년, 폴란드의 볼레스와프 4세는 키예프 루스의 도움을 받아 프로이센을 공격했지만 정복하지 못했다. 마조비아 공작 콘라트 1세 아래에서 1209년, 1219년, 1220년, 1222년에 대규모 전투와 십자군 원정이 벌어지는 등 수많은 다른 시도가 뒤따랐다.[8]서 발트 프로이센인들은 대부분의 원정을 성공적으로 격퇴했고 콘라트에게 보복했다. 그러나 남쪽의 프로이센인들과 요트빙기아인들은 그들의 영토를 정복당했다. 요트빙기아인들의 땅은 오늘날 폴란드의 포들라스키에 보이보드십 지역에 위치해 있었다. 프로이센인들은 이미 부분적으로 정복되고 황폐화되어 거의 완전히 인구가 감소된 요트빙기아에서 폴란드 또는 마조비아 군대를 몰아내려 시도했다.
2. 2. 교황 칙령
콘라트 1세(마조비아 공작)는 1208년에 이미 옛 프로이센인을 상대로 십자군을 소집했지만 실패했다. 크리스티안(프로이센의 초대 주교)의 조언에 따라 콘라트는 15명의 기사로 구성된 작은 단체인 도브르진 기사단을 설립했다. 그러나 이 기사단은 곧 패배했고, 콘라트는 교황에게 다시 십자군을 소집하고 튜턴 기사단의 지원을 요청했다. 그 결과, 옛 프로이센인을 상대로 한 여러 교황 칙령이 십자군을 소집했다. 유럽의 많은 기사들이 참여한 이 십자군은 60년 동안 지속되었다.1224년 말, 교황 호노리우스 3세는 기독교 전체에 리보니아, 프로이센, 기타 지역에 대한 교황 특사로 모데나의 빌헬름 주교를 임명한다고 발표했다.
1226년 리미니 황금 칙서와 1234년 교황 리에티 교서의 결과로 프로이센은 튜턴 기사단의 소유가 되었다.
2. 3. 도시 건설
엘베강과 오데르강 사이의 새로 건립된 도시들과 달리, 튜턴 기사단이 건설한 도시들은 훨씬 더 규칙적인 직사각형의 거리 형태를 띠었으며, 이는 계획된 도시 건설의 특징을 나타낸다.[9] 이 도시들은 강력하게 요새화되었으며, 이는 기사단의 지휘하에 무장한 병력과 함께 저항적인 토착민인 옛 프로이센인들과의 오랜 갈등을 설명한다.[9] 대부분의 도시는 기사단의 고향이었던 중앙 독일과 실롱스크에서 온 이민자들로 주로 채워졌다.[10]이 도시들은 일반적으로 마그데부르크법에 따른 도시 특권을 부여받았는데, 엘빙(엘블롱크)만이 예외였다. 이 도시는 뤼베크의 지원으로 건설되었으며, 따라서 뤼베크법을 부여받았다.[9] 뤼베크인들은 그들의 선박을 통해 기사단에 중요한 물류 지원을 제공했지만, 엘빙을 제외하고는 수도원 국가 건설에 거의 관여하지 않았다.[9]
3. 역사
1237년 리보니아 검 형제단이 튜턴 기사단에 흡수되면서 테라 마리아나를 지배하던 리보니아 검 형제단은 튜턴 기사단의 자치적인 분단인 리보니아 기사단이 되었다.[39]
1346년 덴마크 왕은 에스토니아 공작령을 19,000쾰른 마르크에 튜턴 기사단에 매각했다. 덴마크에서 튜턴 기사단으로의 에스토니아 공국의 통치권 이양은 11월 1일에 이루어졌다.[40]
1410년 그룬발트 전투에서 폴란드-리투아니아에 패배한 후, 튜턴 기사단은 쇠퇴했고, 리보니아 기사단은 1422년-1435년에 결성된 리보니아 연맹에 가입하면서 현재의 에스토니아와 라트비아에 걸쳐 있던 영지를 잃었다.[41]
1466년 토룬 제2차 평화 조약으로 13년 전쟁이 종결되었고, 튜턴 기사단은 영토의 서쪽 절반에 대한 권리를 폴란드 왕국에 양도했다. 이 지역은 왕령 프로이센이 되었고, 기사단의 나머지 지역은 폴란드의 봉토이자 보호령이 되었다.[6]
1525년 프로테스탄트 종교 개혁 동안 기사단의 주요 (프로이센) 지부의 수도원주의 국가는 세속화되어 호엔촐레른 가문이 통치하는 프로이센 공국이 되었으며, 폴란드-리투아니아 연방의 봉토로 남았다.
3. 1. 13세기
13세기에 튜턴 기사단은 프로이센과 폴란드 마조비아의 헬름노 지방에 국가를 설립했다. 이 국가는 주로 이교도 발트 프로이센에 대한 프로이센 십자군과 14세기 폴란드 및 리투아니아 대공국 침략의 결과로 확장되었다.[6] 정복 후에는 독일과 폴란드인의 식민화가 이루어졌다.[3]1237년, 테라 마리아나를 통제하던 리보니아 검 형제단은 튜턴 기사단에 통합되어 자율 지부인 리보니아 기사단이 되었다.[4]
1243년, 교황 사절 모데나의 윌리엄은 프로이센을 쿨름 (헬름노) 교구, 포메사니아 교구, 바르미아 교구, 삼비아 교구의 네 개 교구로 나누었다. 이 교구들은 리가 대주교의 관할 교구가 되었으며, 고틀란드의 비스비를 모 도시로 하였다.
3. 2. 14세기
14세기 초, 포메라니아 공국은 서쪽의 폴란드 및 브란덴부르크 변경백국과 전쟁을 벌였다. 튜턴 기사단은 1308년 폴란드 항구 도시 그단스크를 점령하는 등 이 분쟁에 개입했다. 튜턴 기사단은 폴란드 왕 블라디슬라프 1세의 요청으로 브란덴부르크의 침공을 격퇴했지만, 이후 도시와 지역을 점령하고 학살을 자행했다. 이 사건을 계기로 튜턴 기사단은 폴란드와 지속적인 갈등을 겪게 되었다.1326년부터 1332년까지 튜턴 기사단은 폴란드와 전쟁을 벌였고, 1343년 칼리슈 조약을 통해 평화가 찾아왔다. 폴란드는 쿠야비와 도브진 란트를 되찾았지만, 튜턴 기사단은 포메라니아에 대한 지배권을 유지했다.
14세기 동안 튜턴 기사단은 한자 동맹과 긴밀한 관계를 맺었다. 튜턴 기사단은 제2차 덴마크-한자 동맹 전쟁에 참여하여 덴마크에 맞서 싸웠고, 1370년 슈트랄준트 조약 체결에 기여했다. 또한, 튜턴 기사단은 영국 모험 상인들과 교류하며 발트해 무역에서 중요한 역할을 수행했다. 하지만, 이 과정에서 한자 동맹의 다른 세력들과 갈등을 겪기도 했다.
1380년대 후반에는 해적 행위로 인해 프로이센의 생선 가격이 급등하는 사건이 발생했다. 1400년에는 튜턴 기사단과 한자 동맹의 연합 함대가 비툭탈 형제단 해적들을 소탕하고 고틀란드 섬을 점령하기도 했다.
3. 2. 1. 단치히(그단스크)와 한자 동맹
1308년 11월, 튜턴 기사단은 폴란드 항구 도시 그단스크를 점령하고 이 지역을 병합하면서 폴란드와 갈등을 빚기 시작했다. 튜턴 기사단은 그단스크 시민들을 학살했는데, 중세 자료에는 최대 10,000명이 사망했다고 기록되어 있지만 정확한 희생자 수는 논쟁의 대상이다.[27] 1309년 9월, 졸딘 조약을 통해 브란덴부르크 변경백은 튜턴 기사단에게 영토에 대한 자신의 주장을 팔았다.기사단은 프러시아 도시에 광범위한 영토와 특권을 부여하고 법률을 제정하여 도시를 발전시켰지만, 자유 제국 도시보다는 덜 독립성을 허용했다. 한자 동맹은 프러시아 도시 상인들을 동료로 여겼지만, 기사단의 ''총장''만을 프러시아 대표로 인정했다. 브라운스베르크(브라니에보), 쿨름(헤움노), 단치히(그단스크), 엘빙, 쾨니히스베르크, 토른(토룬)의 6개 프러시아 한자 도시 상인들만이 동맹의 완전한 구성원으로 간주되었고, 다른 프러시아 도시 상인들은 더 낮은 지위를 가졌다.
튜턴 기사단의 그단스크(단치히)와 주변 지역 합병은 폴란드 왕 블라디슬라프 1세와 카지미에시 3세에 의해 지속적으로 이의가 제기되었고, 폴란드-튜턴 전쟁 (1326–1332)이 발발했다. 1320년과 1333년에 교황 법원에서 폴란드에 유리한 판결이 내려졌지만, 튜턴 기사단은 이에 따르지 않고 합병된 폴란드 영토를 계속 점령했다. 1343년 칼리슈에서 평화 조약이 체결되었고, 쿠야비와 도브지ń 란트는 폴란드로 반환되었으며, 튜턴 기사단은 폴란드가 봉토로서 포메라니아를 통치하기로 동의했다.
튜턴 기사단의 ''Großschäffer''는 "구매 및 판매 총책임자"로 번역되며, 조달, 상업, 수입, 수출, 신용 대출, 부동산 투자 등을 담당했다. 마리엔부르크의 Großschäffer는 곡물 수출 독점권을 가졌고, 쾨니히스베르크는 호박 수출 독점권을 가졌다.[27] 1392년에는 대영주 콘라트 폰 발렌로데가 한자 동맹과 플랑드르 간 무역 재개를 지원했고,[27] 같은 해 한자 동맹 대표단은 노브고로드와 무역을 재개했다.[21]
1380년대 후반, 해적 행위로 인해 프로이센의 생선 가격이 세 배로 뛰었다.[28] 1400년까지 튜턴-한자 동맹 연합 함대는 비툭탈 형제단 해적들을 발트해에서 몰아내고 고틀란드 섬까지 점령했다.[29][30]
상품 | 가격 | 상품 | 가격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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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프란 | 7040 | 헝가리 철 | 21 |
생강 | 1040 | 트라베 소금 | 12.5 |
후추 | 640 | 청어 | 12 |
밀랍 | 237.5 | 플랑드르 소금 | 8 |
프랑스 와인 | 109.5 | 비스마르 맥주 | 7.5 |
쌀 | 80 | 밀가루 | 7.5 |
강철 | 75 | 밀 | 7 |
라인 와인 | 66 | 호밀 | 5.75 |
기름 | 60 | 보리 | 4.2 |
꿀 | 35 | 재붓꽃 | 4.75 |
버터 | 30 |
3. 2. 2. 제2차 덴마크-한자 동맹 전쟁
발트해 무역을 둘러싼 한자동맹과 덴마크 사이의 분쟁에서, 덴마크의 발데마르 4세는 1361년에 한자동맹 도시 비스뷔를 인질로 잡았다.[15] 그러나 한자동맹 회원들은 그에 대항하여 단결할지 여부에 대해 결정을 내리지 못했다.[16] 하지만 발데마르 4세가 잉글랜드로 향하던 외레순 해협에서 프로이센 상선을 나포하자, 빈리히 폰 크니프로데 대사령관은 덴마크에 대항하는 전쟁 동맹을 제안하기 위해 뤼베크로 가서, 한자동맹의 벤디시-작센 지역을 구성하는 주요 도시들로부터 어렵게 동의를 얻어냈다.[17]발데마르 4세가 캄펜과 주더르해의 다른 지역, 즉 프로이센과 캄펜, 엘뷔르크, 하르데르베이크와 같은 네덜란드 도시들의 선박을 공격했기 때문에, 이들 도시들은 덴마크에 대항하여 동맹을 맺었다.[17] 그 결과 한자동맹은 1367년 쾰른에서 의회를 소집하고 암스테르담과 브리엘을 포함한 비회원 도시들을 소집했다. 그 결과 덴마크의 위협에 대항하기 위한 전쟁 동맹으로 쾰른 연맹이 결성되었다.[18] 서쪽의 라인강 하류 지역에서 동쪽의 리보니아에 이르기까지 더 많은 도시들이 참여했다.[18]
주요 세력 중 브레멘과 함부르크만이 병력을 파견하는 것을 거부했지만 재정적으로 기여했다.[19] 프로이센 외에도 헨리 2세 폰 샤움부르크-렌츠부르크, 메클렌부르크의 알브레히트 2세, 그리고 후자의 아들인 스웨덴의 알브레히트 등 세 명의 영토적 파트너가 동맹에 참여하여 육상과 해상에서 공격을 가했고, 덴마크는 1370년에 슈트랄준트 조약을 체결하게 되었다.[19] 이후 평화 조약의 이행을 보장하기 위해 여러 덴마크의 성과 요새가 한자동맹군에 의해 15년 동안 점령되었다.
3. 2. 3. 영국 모험 상인 회사
1369년/1370년의 리투아니아 십자군 동안, 루다우 전투에서 튜턴 기사단이 승리하면서, 프로이센은 영국 기사들로부터 상당한 지원을 받았다.[22] 기사단은 발트해에서 항해를 시작하여 네덜란드, 작센, 벤디쉬 한자 상인들과 경쟁하고, 단치히와 엘빙 도시에 전초 기지를 열 수 있도록 허용한 영국 모험 상인들을 환영했다.[23] 이는 필연적으로 한자 동맹의 나머지 세력과의 갈등을 초래했는데, 그들은 징수된 높은 요금에 대해 잉글랜드의 리처드 2세와 격렬하게 논쟁을 벌였다. 상인들은 만족스럽지 못한 타협을 이루기 위해 노력했다.[22]불만을 품은 리처드 2세의 해군은 1385년 5월에 즈윈에서 6척의 프로이센 선박과 더 많은 한자 동맹 회원들의 선박을 갑자기 공격했고,[24] 콘라트 죌너 폰 로텐슈타인 대사령관은 즉시 영국과의 모든 무역을 중단했다.[24] 같은 해에 한자 동맹이 슈트랄준트 조약의 이행으로 덴마크 성을 모두 철수했을 때, 프로이센은 잉글랜드와의 갈등에 깊이 우려하여 쾰른 동맹의 갱신을 옹호했지만, 이를 관철시키지 못했다.[25]
도시들은 협상하고 영국 상품의 반대 압류와 같은 보복 조치를 취하는 것을 선호했다.[24] 그리하여 1388년 리처드 2세가 마침내 한자 동맹의 무역 특권을 재확인했을 때, 프로이센은 다시 모험 상인들을 허용하고 잔류 허가를 내주었으며, 이러한 행동으로 인해 1398년 융겐의 콘라트 대사령관에 의해 다시 한 번 비난받았다.[24]
3. 2. 4. 무역
한자 동맹 회원들은 프러시아 도시 상인들을 동료로 여겼지만, 기사단의 ''총장''을 한자 의회에서 프러시아를 대표하는 유일한 영토 통치자로 인정했다.[15] 프러시아 상인들은 디트마르슈 상인들과 함께 자율적 또는 자유로운 도시의 완전한 시민권을 갖지 못했지만, 한자 내에서 준회원 자격만은 유일하게 인정받았다.[16] 브라운스베르크(브라니에보), 쿨름(헤움노), 단치히(그단스크), 엘빙, 쾨니히스베르크, 토른(토룬)의 6개 프러시아 한자 도시에 있는 상인들만이 동맹의 완전한 구성원으로 간주되었고, 다른 프러시아 도시의 상인들은 더 낮은 지위를 가졌다.발트해 무역을 둘러싼 한자동맹과 덴마크 사이의 분쟁에서, 덴마크 발데마르 4세는 1361년에 한자동맹 도시 비스뷔를 인질로 잡았다.[15] 그러나 한자동맹 회원들은 그에 대항하여 단결할지 여부에 대해 결정을 내리지 못했다.[16] 발데마르 4세가 잉글랜드로 향하던 외레순 해협에서 프로이센 상선을 나포하자, 빈리히 폰 크니프로데 대(大)사령관은 덴마크에 대항하는 전쟁 동맹을 제안하기 위해 뤼베크로 가서, 한자동맹의 벤디시-작센 지역 주요 도시들로부터 어렵게 동의를 얻어냈다.[17]
발데마르 4세가 캄펜과 주더르해의 다른 지역, 즉 프로이센과 캄펜, 엘뷔르크, 하르데르베이크와 같은 네덜란드 도시들의 선박을 공격했기 때문에, 이들 도시들은 덴마크에 대항하여 동맹을 맺었다.[17] 1367년 한자동맹은 쾰른에서 의회를 소집하고 암스테르담과 브리엘을 포함한 비회원 도시들을 소집했다. 그 결과 덴마크의 위협에 대항하기 위한 전쟁 동맹으로 쾰른 연맹이 결성되었다.[18] 서쪽의 라인강 하류 지역에서 동쪽의 리보니아에 이르기까지 더 많은 도시들이 참여했다.[18]
주요 세력 중 브레멘과 함부르크만이 병력을 파견하는 것을 거부했지만 재정적으로 기여했다.[19] 프로이센 외에도 헨리 2세 폰 샤움부르크-렌츠부르크, 메클렌부르크의 알브레히트 2세, 그리고 후자의 아들인 스웨덴의 알브레히트 등 세 명의 영토적 파트너가 동맹에 참여하여 육상과 해상에서 공격을 가했고, 덴마크는 1370년에 슈트랄준트 조약을 체결하게 되었다.[19] 이후 평화 조약의 이행을 보장하기 위해 여러 덴마크의 성과 요새가 한자동맹군에 의해 15년 동안 점령되었다.
1367년 리보니아에서 프스코프로의 튜턴 기사단의 침략으로 인해 러시아인들은 노브고로드의 한자 상인들에게 손실을 입혔고, 이로 인해 기사단은 소금과 청어의 러시아 수출을 차단했다.[20] 1371년까지 관계가 완화되어 무역이 재개되었지만, 1388년까지 다시 악화되었다.[21]
1369/1370년의 리투아니아 십자군 동안, 루다우 전투에서 튜턴 기사단이 승리하면서, 프로이센은 영국 기사들로부터 상당한 지원을 받았다.[22] 기사단은 발트해에서 항해를 시작하여 네덜란드, 작센, 벤디쉬 한자 상인들과 경쟁하고, 단치히와 엘빙 도시에 전초 기지를 열 수 있도록 허용한 영국 모험 상인들을 환영했다.[23] 이는 필연적으로 한자 동맹의 나머지 세력과의 갈등을 초래했는데, 그들은 징수된 높은 요금에 대해 잉글랜드의 리처드 2세와 격렬하게 논쟁을 벌였다. 상인들은 만족스럽지 못한 타협을 이루기 위해 노력했다.[22]
불만을 품은 리처드 2세의 해군은 1385년 5월에 즈윈에서 6척의 프로이센 선박과 더 많은 한자 동맹 회원들의 선박을 갑자기 공격했고,[24] 콘라트 죌너 폰 로텐슈타인 대사령관은 즉시 영국과의 모든 무역을 중단했다.[24] 같은 해에 한자 동맹이 스트랄준트 조약의 이행으로 덴마크 성을 모두 철수했을 때, 프로이센은 잉글랜드와의 갈등에 깊이 우려하여 쾰른 연방의 갱신을 옹호했지만, 이를 관철시키지 못했다.[25]
도시들은 협상하고 영국 상품의 반대 압류와 같은 보복 조치를 취하는 것을 선호했다.[24] 1388년 리처드 2세가 마침내 한자 동맹의 무역 특권을 재확인했을 때, 프로이센은 다시 모험 상인들을 허용하고 잔류 허가를 내주었으며, 이러한 행동으로 인해 1398년 융겐의 콘라트 대사령관에 의해 다시 한 번 비난받았다.[24]
부르고뉴의 필리프 2세와의 플랑드르 도시에서의 한자 동맹 특권에 대한 갈등에서 한자 동맹 도시와 프로이센의 입장이 다시 역전되었다. 여기서 한자 동맹 회원 대다수는 1388년 5월 1일 한자 동맹 의회에서 플랑드르 도시에 대한 통상 금지를 결정했다. 한편, 프로이센은 추가 협상에 대한 호소에 성공하지 못했다.[26]
튜턴 기사단의 ''Großschäffer''는 기사단의 주요 간부 중 한 명이었다. 이 단어는 대략 "구매 및 판매 총책임자"로 번역되며, 조달 업무를 담당했다. 이 관리는 튜턴 기사단이 중앙, 서유럽, 남유럽 대부분과 성지(Holy Land)에 걸쳐 있던 관구 및 대행사를 통해 수행했던 상당한 규모의 상업, 수입, 수출, 신용 대출, 부동산 투자 등을 담당했다. 마리엔부르크의 다른 Großschäffer는 곡물 수출 독점권을 가지고 있었다. 수입품과 관련하여 어느 쪽도 특정 상품에 얽매이지 않았다. 호박 수출 독점권을 가진 쾨니히스베르크는 플랑드르로의 호박 수출과 그 대가로 섬유 수입을 계속할 수 있는 특별한 허가를 받았다.[27] 플랑드르 무역 금지령이 내려지자 한자 동맹은 프로이센과 리보니아에 노브고로드와의 교류를 중단할 것을 다시 촉구했지만, 두 봉쇄로 인해 러시아와 플랑드르 상품은 최종 목적지에 도달할 수 없었다.[21] 1392년에는 대영주 콘라트 폰 발렌로데가 한자 동맹과 플랑드르가 수용 가능한 합의를 통해 양자 무역을 재개하도록 지원했다.[27] 같은 해, 요한 니부르가 이끄는 한자 동맹 대표단이 이전의 상호 특권을 재확인한 후 노브고로드와 무역을 재개했다.[21]
1380년대 후반부터 스웨덴 및 메클렌부르크의 알베르트가 지원하고 실제로 덴마크의 마르가레테 1세를 겨냥한 심각한 해적 행위로 인해 스카니아 시장의 청어 공급을 위한 항해가 막혔고, 이에 따라 프로이센의 생선 가격이 세 배로 뛰었다.[28] 작센 한자 동맹 도시들은 프로이센에 개입을 촉구했지만, 콘라트 폰 융잉겐은 덴마크의 승리를 더 우려했다.[28] 뤼베크 시장 힌리히 베스트호프가 이끈 도시들이 스카노르 조약 (1395년)을 협상한 후에야 알베르트의 패배가 명백해졌고, 프로이센은 마침내 단치히 시의회 의원 콘라트 레츠카우가 이끄는 선박을 파견했다.[29][30] 1400년까지 튜턴-한자 동맹의 연합 함대는 비툭탈 형제단 해적들을 발트해에서 완전히 몰아냈고, 1398년에는 고틀란드 섬까지 점령했다.[29][30]
상품 | 가격 | 상품 | 가격 |
---|---|---|---|
사프란 | 7040 | 헝가리 철 | 21 |
생강 | 1040 | 트라베 소금 | 12.5 |
후추 | 640 | 청어 | 12 |
밀랍 | 237.5 | 플랑드르 소금 | 8 |
프랑스 와인 | 109.5 | 비스마르 맥주 | 7.5 |
쌀 | 80 | 밀가루 | 7.5 |
강철 | 75 | 밀 | 7 |
라인 와인 | 66 | 호밀 | 5.75 |
기름 | 60 | 보리 | 4.2 |
꿀 | 35 | 재붓꽃 | 4.75 |
버터 | 30 |
3. 3. 15세기
14세기 말과 15세기 초, 튜턴 기사단은 고틀란드와 노이마르크 영토를 잠시 획득했지만, 수십 년 후에 매각했다. 튜턴 국가는 역사상 폴란드[6] 및 리투아니아 대공국과 수많은 전쟁을 벌였으며, 이는 두 국가가 긴밀한 동맹과 개인 연합을 형성하도록 이끌었고, 결국 16세기에 폴란드-리투아니아 연방의 창설로 이어졌다. 1410년 그룬발트 전투에서 패배한 후 튜턴 기사단은 쇠퇴했고, 사모기티아 지역은 리투아니아 대공국에 반환되었다.[7]
울리히 폰 융잉겐 치하에서 튜턴 국가는 전성기에서 쇠퇴하여 내부 정치적 갈등, 폴란드-리투아니아 연합과의 거의 끊이지 않는 전쟁, 그리고 심각한 전쟁 부채에 시달리게 되었다.
1237년 리보니아 검의 형제 기사단이 독일 기사단에 흡수되면서, 테라 마리아나를 지배하던 리보니아 검의 형제 기사단은 리보니아에서의 독일 기사단의 자치적인 분단인 리보니아 기사단이 되었다.[39]
1346년 덴마크 왕은 에스토니아 공국을 19,000 쾰른 마르크에 독일 기사단에 매각했다. 덴마크에서 독일 기사단으로의 에스토니아 공국의 통치권 이양은 1346년 11월 1일에 이루어졌다.[40]
1410년 그룬발트 전투에서 폴란드-리투아니아에 패배한 후, 독일 기사단은 쇠퇴했고, 리보니아 기사단은 1422년 - 1435년에 결성된 리보니아 연맹에 가입하면서 현재의 에스토니아와 라트비아에 걸쳐 있던 영지를 잃었다.[41]
3. 3. 1. 콘라트 폰 융잉겐
콘라트(콘래드) 폰 융잉겐 치세 하에 튜턴 기사단국은 최전성기를 누렸다. 튜턴 해군은 프로이센과 고틀란드의 기지를 기반으로 발트해를 지배했으며, 프로이센 도시는 튜턴 기사단, 그들의 수행원, 프로이센 농민 징집병, 독일 용병으로 구성된 상당한 규모의 상비군을 유지할 수 있을 만큼 충분한 세입을 제공했다.[32]1402년, 브란덴부르크 변경백국을 통치하던 룩셈부르크 왕가는 크라쿠프에서 폴란드와 협정을 맺어 폴란드가 노이마르크 지역을 매입하여 재병합하기로 했다.[32] 그러나 그해 말, 룩셈부르크는 폴란드와의 사전 약속에도 불구하고 이 지역을 튜턴 기사단에 담보로 제공했고, 기사단은 브란덴부르크가 각각 쾰른과 메베 조약으로 1454년과 1455년에 이를 되찾을 때까지 이 지역을 보유했다. 이 영토를 기사단이 소유함으로써 기사단과 북부 독일의 세속적 지배자 사이의 유대가 강화되었지만, 기사단과 폴란드-리투아니아 연합 사이의 적대적인 관계는 더욱 악화되었다.[32]
1407년 3월, 콘라트는 담석증으로 인한 합병증으로 사망했고, 그의 동생인 울리히 폰 융잉겐이 그의 뒤를 이었다.
3. 3. 2. 폴란드에 대한 패배와 종속
14세기 초, 튜턴 기사단은 폴란드 블라디슬라프 1세 왕의 요청으로 브란덴부르크 변경백국의 침공을 격퇴했으나, 1308년 11월 폴란드 항구 도시 그단스크를 점령하고 스스로 도시와 지역을 점령하기 시작했다. 이후 튜턴 기사단은 졸딘 조약을 통해 영토에 대한 주장을 확보하며 폴란드와의 갈등을 시작했다.튜턴 기사단은 프러시아 도시에 광범위한 특권을 부여했지만, 자유 제국 도시보다는 덜 독립성을 허용했다. 프러시아 상인들은 한자 동맹에서 준회원 자격을 가졌지만, 브라운스베르크(브라니에보), 쿨름(헤움노), 단치히(그단스크), 엘빙, 쾨니히스베르크, 토른(토룬)의 6개 도시 상인들만이 완전한 구성원으로 간주되었다.
튜턴 기사단의 그단스크와 주변 지역 합병은 폴란드 왕들과의 지속적인 분쟁을 야기했고, 폴란드-튜턴 전쟁 (1326–1332)과 교황 법정 소송으로 이어졌다. 1343년 칼리슈에서 평화 조약이 체결되었지만, 폴란드는 봉토로서 포메라니아를 통치하고, 폴란드 왕은 ''포메라니아 공작'' 칭호를 유지했다.

1409년, 튜턴 기사단은 다시 폴란드의 도브르진 땅을 침략하여 폴란드-리투아니아-튜턴 전쟁이 발발했다. 이 전쟁에서 튜턴 기사단은 포메라니아 공국의 지원을 받았고, 폴란드-리투아니아 동맹은 루테니아, 타타르 및 몰다비아 동맹군과 지원군의 지원을 받았다. 그룬발트 전투에서 폴란드와 리투아니아가 승리하면서 튜턴 기사단국은 쇠퇴하기 시작했고, 폴란드-리투아니아 연합은 중앙 및 동유럽의 주요 강국으로 부상했다.[33]
하인리히 폰 플라우엔은 1410년 마리엔부르크 포위전에서 튜턴 기사단을 이끌었고, 1411년 토룬 제1차 평화 조약을 체결했다. 이후 폴란드-튜턴 전쟁이 다시 발발하여 브제시치 쿠야프스키 평화 조약으로 종결되었다.[6]
1440년, 프로이센 도시들은 프로이센 연맹을 결성하여 튜턴 기사단의 지배에서 벗어나려 했다. 1454년, 프로이센 연맹은 카지미에시 4세 국왕에게 반란을 지원하고 폴란드 왕국에 편입해 줄 것을 요청했고, 13년 전쟁이 발발했다.

1466년 토룬 제2차 평화 조약으로 전쟁이 종결되었고, 튜턴 기사단은 영토의 서쪽 절반에 대한 권리를 폴란드 왕국에 양도했다. 이 지역은 왕령 프로이센이 되었고, 기사단의 나머지 지역은 폴란드의 봉토이자 보호령이 되었다.[6] 평화 조약에 따라, 모든 대총장은 폴란드 국왕에게 충성 서약을 해야 했고, 프로이센 외부에서 획득한 영토도 폴란드에 편입되어야 했다. 튜턴 기사단 대총장은 폴란드 국왕의 왕자이자 고문이 되었다.
3. 3. 3. 새로운 귀족 계층 형성
튜턴 기사단은 얇은 지배 계급을 형성했지만, 주로 신성 로마 제국 출신의 용병들을 광범위하게 사용했으며, 그들에게 토지를 하사했다. 이는 점차 새로운 토지 귀족 계급을 만들었다. 전투에서의 높은 초기 사망률을 포함한 여러 요인으로 인해, 이러한 토지는 시간이 지남에 따라 비교적 소수의 귀족의 손에 집중되었고, 각 귀족은 광대한 영지를 소유했다. 이 귀족은 프로이센 융커 귀족으로 진화하게 된다.[34]3. 4. 16세기와 그 이후
1237년 테라 마리아나를 통제하던 리보니아 검 형제단은 튜턴 기사단에 통합되어 자율 지부인 리보니아 기사단이 되었다.[4] 1346년에는 에스토니아 공작령이 덴마크 국왕에 의해 쾰른 마르크 19,000에 튜턴 기사단에 매각되었다. 덴마크에서 튜턴 기사단으로의 주권 이전은 1346년 11월 1일에 이루어졌다.[5] 14세기 말과 15세기 초에 튜턴 기사단은 잠시 고틀란드와 노이마르크 영토를 획득했지만, 수십 년 후에 매각했다.튜턴 국가는 역사상 폴란드[6] 및 리투아니아 대공국과 수많은 전쟁을 벌였으며, 두 국가가 긴밀한 동맹과 개인 연합을 형성하도록 장려하여 결국 16세기에 폴란드-리투아니아 연방의 창설로 이어졌다.
리보니아 지부는 1422년-1435년에 설립된 리보니아 연맹의 일부로 계속 존재했으며, 1559년 리투아니아 대공국의 보호령이 되었고, 마침내 세속화되어 쿠를란트 및 세미갈리아 공국과 리보니아 공국으로 분할되었으며, 두 공국 모두 리투아니아 대공국의 봉토였다.
합스부르크가 이끄는 신성 로마 제국은 프로이센에 대한 지배권을 계속 주장했으며, 튜턴 기사단의 단장들을 임명했는데, 이들은 프로이센의 명목상 행정가였지만, 프로이센 외의 다른 지역에 있는 튜턴 기사단의 영지를 많이 유지할 수 있었다.
3. 4. 1. 프로이센 공국으로의 전환
1410년 그룬발트 전투에서 패배한 후 튜턴 기사단은 쇠퇴했고, 사모기티아 지역은 리투아니아 대공국에 반환되었다.[7] 튜턴 기사단의 프로이센 지부는 포메라니아 (이전 폴란드의 헬름노 지방과 그단스크 포메라니아)를 반환하고 1466년 토르노의 제2차 평화 조약 이후 프로이센 서부 (바르미아, 포메사니아 및 포게사니아의 일부)를 폴란드에 할양했다.[7] 폴란드 왕국에 할양된 영토는 폴란드의 왕실 프로이센이 되었고, 동부는 이후 봉건 봉토이자 폴란드 왕국의 핵심 부분인 '''수도원 프로이센'''(Prusy zakonnepl) 또는 '''튜턴 프로이센'''(Prusy krzyżackiepl)으로 알려지면서 튜턴 기사단의 통치하에 남았다.[7]1525년 프로테스탄트 종교 개혁 동안 기사단의 주요 (프로이센) 지부의 수도원주의 국가는 세속화되어 호엔촐레른 가문이 통치하는 프로이센 공국이 되었으며, 폴란드 왕관, 나중에는 폴란드-리투아니아 연방의 봉토로 남았다. 개신교 종교 개혁 시기 동안 이 지역 전역에서 만연한 종교적 격변과 전쟁이 발생했다. 1525년, 폴란드-튜턴 전쟁 (1519–1521)의 여파로 폴란드 국왕 지그문트 1세는 그의 조카이자 튜턴 기사단의 마지막 단장인 알브레히트(호엔촐레른 가문의 방계 가문 출신)가 그의 직책을 사임하고, 루터교 신앙을 받아들여 프로이센 공작이라는 칭호를 갖는 데 동의했다. 이후 폴란드의 봉토로 남게 된 이곳은 ''공작령 프로이센''(독일어: Herzogliches Preußen, Preußen Herzoglichen Anteils; 폴란드어: Prusy Książęce)이라고 불렸다.

마르틴 루터의 중재로 이루어진 이 거래에서 로마 가톨릭 튜턴 프로이센은 최초의 개신교 국가인 프로이센 공국으로 변모했다. 지그문트의 동의는 알브레히트가 폴란드에 복종하는 조건으로 이루어졌으며, 이는 프로이센 신종으로 알려지게 되었다. 1525년 12월 10일 쾨니히스베르크에서 열린 회의에서 프로이센 신분회는 교회 령을 결정하여 공작령 프로이센에 루터교 교회를 설립했다.[35]
4. 고고학
제2차 세계 대전 이후, 튜턴 기사단국의 요새는 고고학적 발굴 조사를 통해 연구되어 왔다. 특히 14세기에 건설되거나 확장된 요새를 중심으로 연구가 진행되었다. 요새는 오늘날 발트해 지역에 기사단의 존재를 보여주는 가장 잘 보존된 물질적 유산이며, 목재와 흙, 벽돌로 된 사례들이 고고학적 기록에서 확인된다.[36]
튜턴 기사단국 초기의 성은 요새화된 구역에 부속된 단순한 건물로 구성되었으며, 사각 붉은 벽돌 구조는 수도원 건물의 전형이 되었고, 단일 날개 성은 목재 탑과 함께 계속 건설되었다.[36] 일반적인 레이아웃을 따르는 성은 기숙사, 식당, 주방, 참사회, 예배당 또는 교회, 병원, 해자를 가로지르는 탑과 같은 일련의 공동 공간을 포함했다.
마리엔부르크 성 건설은 13세기 3분기에 시작되어 15세기 중반까지 계속되었다. 성과 함께 정착지가 발전하여 총 25ha를 둘러쌌다. 1286년에 도시 권한을 부여받았으며, 그 성은 기사단이 건설한 다른 어떤 성보다 크다. 1997년부터 외곽 방어벽이 철저히 발굴되었으며, 1350년대 중반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마리엔부르크에는 높이 약 8m의 다색 마리아 조각상이 보존되어 있었는데, 인공 석재로 만들어졌으며 원래 모자이크 타일로 장식되었다. 마리아는 기사단의 가장 중요한 수호성인이자 튜턴 기사단의 전례의 중심이었기 때문에, 가장 눈에 띄는 성에서 그녀의 인상적인 표현을 발견하는 것은 놀라운 일이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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