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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별한 관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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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특별한 관계는 미국과 영국 간의 긴밀한 외교, 군사, 경제, 문화적 유대 관계를 의미한다. 제2차 세계 대전 중 윈스턴 처칠과 프랭클린 D. 루스벨트의 개인적 유대에서 시작되어, 냉전 시기, 테러와의 전쟁, 그리고 탈냉전 시대를 거치며 지속적으로 변화해왔다. 양국은 군사 협력, 정보 공유, 경제적 교류를 통해 긴밀한 관계를 유지해왔으며, 특히 군사 기지 공동 운영, 핵무기 개발 협력, 정보 기관 간의 긴밀한 협력이 두드러진다. 특별한 관계는 긍정적인 측면과 부정적인 측면을 모두 가지고 있으며, 양국 국민과 정치인 사이의 인식 차이, 외교 정책 이견, 무역 분쟁 등 다양한 요인에 의해 영향을 받는다. 최근 여론 조사에서는 양국 관계의 중요성에 대한 인식은 높지만, 특히 젊은 세대를 중심으로 시각 차이가 나타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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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별한 관계
관계 개요
정의"특별한 관계"는 일반적으로 두 국가 간의 매우 긴밀한 정치적, 외교적, 문화적, 경제적, 군사적 관계를 의미함.
영국-미국 관계
주요 특징영국과 미국 간의 관계를 지칭하는 데 가장 일반적으로 사용됨.
역사적 배경제2차 세계 대전 이후 발전.
다른 "특별한 관계"미국-프랑스 관계 미국 국무부
미국-캐나다 관계 Current History
미국-이스라엘 관계 Middle East Forum
미국-이스라엘 관계 Security Studies
영국-미국 관계의 특징
긴밀한 협력외교, 군사, 정보 분야에서 긴밀하게 협력.
역사적 유산공유된 역사적, 문화적 유산.
상호 투자상당한 규모의 상호 투자.
관계의 변화
도전 과제이라크 전쟁과 같은 사건으로 인해 관계가 긴장되기도 함.
미국의 외교 정책 변화에 따라 관계가 변동될 수 있음.
오바마 정부버락 오바마 대통령은 앙겔라 메르켈 독일 총리를 "가장 가까운 파트너"로 지칭하며 영국과의 특별한 관계에 대한 기존 인식을 약화시킴.
비판적 시각
일방적 관계일부에서는 미국이 영국보다 관계에서 더 많은 이익을 얻는다고 주장.
신화"특별한 관계" 자체가 과장된 신화라는 비판도 존재함. 알 자지라
추가 정보
참고 자료BBC 뉴스
Routledge
POLITICO
Sky News

2. 역사

제2차 세계 대전의 발발은 영국과 미국 간의 긍정적인 관계가 급격히 부상하는 계기가 되었다. 1940년 프랑스 공방전국제 관계의 결정적인 사건으로, '특별한 관계'가 영국-프랑스 상호 협약을 대체하여 국제 시스템의 중심축으로 자리 잡게 했다. 전쟁 중 한 관찰자는 "영국과 미국은 전쟁 역사상 주요 동맹국들 사이에서 전례 없는 수준으로 군사적 노력을 통합했다"고 언급했다.[22] 1945년 자유 프랑스의 지도자 샤를 드골 장군에게 윈스턴 처칠은 "나는 당신과 루스벨트 사이에서 선택해야 할 때마다, 루스벨트를 선택할 것입니다"라고 말했다.[23] 1939년에서 1945년 사이에 처칠과 루스벨트는 1,700통의 서신과 전보를 주고받았으며 11번 만났다. 처칠은 그들이 120일 동안 긴밀한 개인적 접촉을 가졌다고 추정했다.[24]

제1차 세계 대전 직후의 포스터로 브리타니아가 엉클 샘과 팔짱을 끼고 있으며, 영미 동맹을 상징한다


처칠의 어머니는 미국 시민이었고, 그는 두 영어권 국가 간의 유대를 예리하게 느꼈다. 그는 1944년 2월 16일에 처음으로 "특별한 관계"라는 용어를 사용했는데, "영국과 미국이 특별한 관계로 결합하지 않는다면... 또 다른 파괴적인 전쟁이 일어날 것"이라는 자신의 "가장 깊은 확신"이라고 말했다.[27] 그는 1945년에 이 용어를 사용하여 영미 관계뿐만 아니라 영국과 미국, 그리고 캐나다 간의 관계를 묘사했다.[28]

처칠은 1년 후 냉전이 시작될 때 다시 이 문구를 사용했는데, 이번에는 미국과 영국 연방 및 대영 제국영연방 간의 특별한 관계를 언급했다. 이 사건은 1946년 3월 5일 미주리주 풀턴에서 열린 그의 "평화의 힘줄 연설"이었다.

한 국제 관계 전문가는 "전간기"의 고립을 고려할 때 "미국이 전후 세계에서 협력하겠다는 약속을 얻는 데 성공한 것은 주요한 승리였다"라고 평가했다.[29]

이 공생 관계를 반영하여 1982년 영국 총리 마거릿 대처는 "영미 관계는 세계의 다른 어떤 동맹보다 자유의 방어와 미래에 더 많은 기여를 했다"고 선언했다.[32]

양측의 대부분의 정부 관계자는 특별한 관계를 지지했지만, 날카로운 비판도 있었다. 영국의 언론인 가이 아놀드 (1932–2020)는 2014년에 이를 "영국의 정치 체제에 있는 질병으로 제거해야 한다"고 비난했다. 대신 그는 "미국의 짐에서 벗어나기 위해" 유럽 및 러시아와의 더 긴밀한 관계를 요구했다.[33]

2. 1. 기원 (19세기-20세기 초)

윈스턴 처칠에 의해 "특별한 관계"라는 용어가 널리 알려졌지만, 그 개념과 용어 자체는 이미 19세기부터 인식되고 있었다.[16]

1900년 영국군미국 군인이 8개국 연합의 다른 대표들과 함께 왼쪽에 서 있다. 영국과 미국은 이 연합에서 주도적인 역할을 했다.


미국과 영국은 미국 독립 선언으로 미국 식민지가 영국으로부터 독립을 선언하고 미국 독립 전쟁이 발발하면서 처음에는 적대적인 외교 관계를 맺었다. 19세기 중반까지 양국 관계는 긴장 상태를 유지했으며, 1812년 전쟁 중에는 전면적인 갈등으로 비화되기도 했다. 미국 남북 전쟁 초기 영국이 남부 연합을 거의 지원하면서 또다시 전쟁 직전까지 갔다. 1830년대부터 1860년대까지 영국 지도자들은 미국이 1838–1839년의 애루스투크 전쟁과 1844–1846년의 오리건 경계 분쟁에서처럼 대중에게 영합하는 것을 보고 끊임없이 불쾌해했다. 그러나 영국의 중산층 여론은 영어, 이주, 복음주의 개신교, 고전적 자유주의, 광범위한 사적 무역 등 양국 간의 공통점을 기반으로 "특별한 관계"를 인식했다. 이들은 전쟁을 반대했고, 결국 영국은 미국을 달랠 수밖에 없었다. 1861년 말 트렌트 사건에서 영국이 강경한 입장을 취하자, 미국은 물러섰다.[17]

1859년 다구 요새 전투에서 양국 군대가 일시적으로 협력하기도 했으며, 제1차 세계 대전 동안 두 자유 민주주의 국가는 공동의 희생을 통해 유대감을 형성했다 (미국은 공식적으로 연합국의 일원은 아니었지만, 1917년에 스스로 "연합국"으로 참전했다). 1930년 램지 맥도널드 영국 총리의 미국 방문은 "특별한 관계"에 대한 그의 믿음을 확인시켜 주었으며, 영일 동맹의 부활보다는 워싱턴 해군 군축 조약을 통해 극동의 평화를 보장하는 방향으로 나아갔다.[18]

그러나 데이비드 레이놀즈 역사학자는 "1919년 이후 대부분의 기간 동안 영국-미국 관계는 냉담했고 종종 의심스러웠다. 미국의 국제 연맹 '배신'은 전쟁 부채, 해군 경쟁, 1931–2년의 만주 사변 및 대공황에 대한 일련의 미국 행동 중 첫 번째였으며, 영국 지도자들은 미국을 믿을 수 없다고 확신했다"라고 지적했다.[19] 해리 S. 트루먼 미국 대통령의 국무장관 딘 애치슨 역시 "영국과 미국 사이에 공통된 언어와 역사를 바탕으로 한 독특한 관계가 있었던 것은 분명하지만, 독특하다는 것이 곧 애정이 있다는 의미는 아니었다. 우리는 동맹국으로서 함께 싸운 것만큼이나 적대국으로서 영국과 싸웠다"라고 회상했다.[20]

2. 2. 처칠과 루스벨트 시대 (1940-1945)

제2차 세계 대전의 발발은 두 국가 사이에 긍정적인 관계가 급격하게 부상하는 계기가 되었다. 1940년 프랑스 공방전국제 관계의 결정적인 사건으로, '특별한 관계'가 영국-프랑스 상호 협약을 대체하여 국제 시스템의 중심축으로 자리 잡도록 했다. 전쟁 중 한 관찰자는 "영국과 미국은 전쟁 역사상 주요 동맹국들 사이에서 전례 없는 수준으로 군사적 노력을 통합했다"고 언급했다.[22] 1945년 자유 프랑스의 지도자 샤를 드골 장군에게 윈스턴 처칠은 "나는 당신과 루스벨트 사이에서 선택해야 할 때마다, 루스벨트를 선택할 것입니다"라고 소리쳤다.[23]

1939년에서 1945년 사이에 처칠과 루스벨트는 1,700통의 서신과 전보를 주고받았으며 11번 만났다. 처칠은 그들이 120일 동안 긴밀한 개인적 접촉을 가졌다고 추정했다.[24] 처칠의 어머니는 미국 시민이었고, 그는 두 영어권 국가 간의 유대를 예리하게 느꼈다. 그는 1944년 2월 16일에 처음으로 "특별한 관계"라는 용어를 사용했는데, "영국과 미국이 특별한 관계로 결합하지 않는다면... 또 다른 파괴적인 전쟁이 일어날 것"이라는 자신의 "가장 깊은 확신"이라고 말했다.[27] 그는 1945년에 이 용어를 사용하여 영미 관계뿐만 아니라 영국과 미국, 그리고 캐나다 간의 관계를 묘사했다.[28]

처칠은 1년 후 냉전이 시작될 때 다시 이 문구를 사용했는데, 이번에는 미국과 영국 연방 및 대영 제국영연방 간의 특별한 관계를 언급했다. 이 사건은 1946년 3월 5일 미주리주 풀턴에서 열린 그의 "평화의 힘줄 연설"이었다.

한 국제 관계 전문가는 "전간기"의 고립을 고려할 때 "미국이 전후 세계에서 협력하겠다는 약속을 얻는 데 성공한 것은 주요한 승리였다"라고 평가했다.[29]

2. 3. 냉전 시대 (1945-1991)

제2차 세계 대전의 발발은 영국과 미국, 양국 간에 긍정적인 관계가 급격하게 부상하는 계기가 되었다. 1940년 프랑스 공방전국제 관계의 결정적인 사건으로, 특별한 관계가 영국-프랑스 상호 협약을 대체하여 국제 시스템의 중심축으로 자리 잡도록 했다. 전쟁 중 한 관찰자는 "영국과 미국은 전쟁 역사상 주요 동맹국들 사이에서 전례 없는 수준으로 군사적 노력을 통합했다"고 언급했다.[22] 1945년 자유 프랑스의 지도자 샤를 드골 장군에게 윈스턴 처칠은 "나는 당신과 루스벨트 사이에서 선택해야 할 때마다, 루스벨트를 선택할 것입니다"라고 말했다.[23] 1939년에서 1945년 사이에 처칠과 루스벨트는 1,700통의 서신과 전보를 주고받았으며 11번 만났다. 처칠은 그들이 120일 동안 긴밀한 개인적 접촉을 가졌다고 추정했다.[24]

처칠의 어머니는 미국 시민이었고, 그는 두 영어권 국가 간의 유대를 예리하게 느꼈다. 그는 1944년 2월 16일에 처음으로 "특별한 관계"라는 용어를 사용했는데, "영국과 미국이 특별한 관계로 결합하지 않는다면... 또 다른 파괴적인 전쟁이 일어날 것"이라는 자신의 "가장 깊은 확신"이라고 말했다.[27] 그는 1945년에 이 용어를 사용하여 영미 관계뿐만 아니라 영국과 미국, 그리고 캐나다 간의 관계를 묘사했다.[28]

처칠은 1년 후 냉전이 시작될 때 다시 이 문구를 사용했는데, 이번에는 미국과 영국 연방 및 대영 제국영연방 간의 특별한 관계를 언급했다. 이 사건은 1946년 3월 5일 미주리주 풀턴에서 열린 그의 "평화의 힘줄 연설"이었다.

한 국제 관계 전문가는 "전간기"의 고립을 고려할 때 "미국이 전후 세계에서 협력하겠다는 약속을 얻는 데 성공한 것은 주요한 승리였다"라고 평가했다.[29]

1982년 영국 총리 마거릿 대처는 "영미 관계는 세계의 다른 어떤 동맹보다 자유의 방어와 미래에 더 많은 기여를 했다"고 선언했다.[32]

1943년의 퀘벡 협정은 영국과 미국이 나란히 원자 무기를 개발할 수 있는 길을 열었으며, 영국은 자체 튜브 얼로이즈 프로젝트의 중요한 문서를 넘겨주고 맨해튼 계획의 작업을 지원하기 위해 대표단을 보냈다. 미국은 나중에 전후 맥마흔법에 따라 작업 결과를 독점했지만, 영국이 자체 열핵 무기를 개발한 후 미국은 1958년 미국-영국 상호 방위 협정을 통해 영국 전쟁용 탄두에 대한 운반 시스템, 설계 및 핵 물질을 공급하기로 합의했다.

영국은 먼저 폴라리스 시스템을 구매한 후, 현재도 사용 중인 미국 트라이던트 시스템을 구매했다. 1958년 협정은 영국에 네바다 핵실험장 시설 접근을 허용했으며, 1963년부터 1991년 핵실험 중단 전까지 총 21번의 지하 핵실험을 그곳에서 실시했다.[37]

트루먼과 처칠이 1949년 블레어 하우스 밖에서 서 있는 모습


처칠은 1951년 10월에 다시 총리가 되었다. 그는 야당 대표로서 6년 동안 트루먼과의 관계를 유지했다. 1946년, 트루먼의 초청으로 처칠은 트루먼의 고향인 미주리 주 웨스트민스터 칼리지에서 연설을 하기 위해 미국을 방문했다. 이 연설은 "철의 장막" 연설로 기억될 것이며, 소련과 나머지 연합국 간에 벌어진 분열에 대한 대중의 관심을 높이는 데 기여했다.

처칠과 이든은 1952년 1월 워싱턴을 방문했다. 당시 트루먼 행정부는 유럽 방위 공동체 계획을 지지하여 서독의 재무장을 허용하고, 그 결과 미국이 독일에 주둔한 미군 병력 수를 줄일 수 있기를 바랐다. 처칠은 EDC에 반대하며, 그것이 효과가 없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는 또한 미국이 이집트와 중동에서 영국을 지원하기 위해 군대를 투입해 줄 것을 요청했지만, 이는 성공하지 못했다. 트루먼은 영국이 한국 전쟁에서 공산군에 맞서 싸우는 미국을 지원해 주기를 바랐지만, 중동에서 영국을 지원하는 것은 탈식민지화를 막으려는 그들의 노력을 돕는 것이며, 이는 공산주의를 막는 데 아무런 도움이 되지 않을 것이라고 생각했다.[69]

아이젠하워(가운데)가 1951년 10월 NATO 회의에서 처칠(왼쪽)과 버나드 몽고메리 사이에 앉아 있다. 아이젠하워는 불과 1년 뒤 대통령으로 선출되었다.


드와이트 D. 아이젠하워와 처칠은 제2차 세계 대전 중 연합군의 중요한 지도자였기에 서로를 잘 알고 있었다.[54]

1953년 1월 5일, 아이젠하워가 대통령 당선인이었을 때, 윈스턴 처칠은 미국을 방문하여 아이젠하워와 일련의 회담을 가졌다.[74] 아이젠하워는 처칠이 조셉 스탈린과 "정상 회담"을 열려는 미흡한 시도에 분노하여 아이젠하워의 대통령 재임 기간 동안 관계가 악화되었다.[54]

전임자처럼, 앤서니 이든은 제2차 세계 대전 동안 아이젠하워와 긴밀히 협력했다.[54]

맥밀런(Harold Macmillan)과 아이젠하워(Dwight D. Eisenhower)는 1957년 3월 버뮤다에서 만나 회담을 가졌으며, 이는 전년도의 수에즈 운하 위기 이후 훼손된 영미 관계를 회복하기 위한 것이었다.


해럴드 맥밀런은 총리 취임 후, 특별한 관계가 이전 몇 년 동안 겪었던 긴장을 완화하기 위해 노력했다.[54] 맥밀런은 미국과 관계를 맺는 것이 마치 고대 그리스로마를 이끌었던 것과 같은 영국의 역사적 의무라고 재치 있게 말하기도 했다.[78]

그러나 아이젠하워는 1960년 5월 파리 정상 회담에서 소련과의 데탕트 정책을 방해함으로써 영국과의 긴장을 고조시켰다.[81]

1961년 키웨스트에서 맥밀런과 케네디
]케네디는 친영주의자였다.[82] 그의 아버지는 이전에 주영 미국 대사를 지냈고 그의 여동생은 하팅턴 후작 부인이었는데, 그의 남편은 우연히 맥밀런의 부인의 조카였다.[54]

영국 정보국은 미국이 쿠바 미사일 위기를 평가하는 것을 도왔다. 케네디는 맥밀런의 꾸준한 리더십에 감사했고 그의 부분 핵실험 금지 조약을 존경했다.[54]

1966년 백악관에서 만난 윌슨존슨
]해럴드 윌슨 총리는 동맹 관계를 "긴밀한 관계"로 재정의했지만,[97] 그와 린든 B. 존슨 대통령 모두 외교 정책에 대한 직접적인 경험이 없었다.[98]

로버트 맥나마라 미국 국방장관은 "특별한 관계의 암묵적인 조건"으로 영국에게 베트남에 군대를 파견해 달라고 요청했고,[104] 윌슨은 여러 면에서 돕기로 동의했지만 정규군은 파견하지 않고 특수 부대 교관만 파견했다. 호주와 뉴질랜드는 베트남에 정규군을 파견했다.[105][106]

존슨 행정부는 IMF 대출을 지원하여 파운드 스털링의 평가 절하를 1967년까지 늦추었다.[102] 영국의 이후 페르시아만과 동아시아 철수는 워싱턴을 놀라게 했는데, 영국군이 기여한 바가 커 강력하게 반대했기 때문이다.[107]

1970년 1월 백악관을 방문한 윌슨


리처드 닉슨이 취임할 무렵, 두 국가 간의 많은 긴장 문제가 해결되었다. 이는 특별한 관계가 꽃피울 수 있도록 했다.[108]

체커스에서 에드워드 히스 총리, 엘리자베스 2세 여왕, 리처드 닉슨 대통령, 팻 닉슨 영부인 (닉슨 부부의 1970년 영국 방문 시)


유럽주의자였던 에드워드 히스 총리는 "특별 관계"라는 용어 대신, 공유된 문화와 유산을 바탕으로 한 "자연스러운 관계"라는 표현을 선호했으며, 특별 관계는 "자신의 어휘의 일부가 아니다"라고 강조했다.[110]

히스-닉슨 시대는 영국의 유럽 경제 공동체 (EEC) 가입 (1973년)으로 특징지어진다.

1973년 아랍-이스라엘 전쟁 당시, 닉슨 대통령이 세계적인 소련과의 대치 상황에서 미국 군대가 DEFCON 3로 격상되었다는 사실을 히스 총리에게 알리지 않았고, 헨리 키신저 미국 국무장관이 영국 대사를 핵 경계에 관해 오도하면서 특별 관계는 "악화"되었다.[115] 이 사건은 특별 관계의 "최저점"을 기록했다.[117]

1974년 6월 해럴드 윌슨 (왼쪽), 리처드 닉슨 (가운데), 헨리 키신저 (오른쪽)
]윌슨과 닉슨은 윌슨의 두 번째 총리 재임 시작부터 닉슨의 사임까지 6개월 동안 다시 한 번 두 국가의 지도자로 동시에 재임했다. 윌슨은 닉슨을 높이 평가했다. 윌슨은 퇴임 후 닉슨을 미국의 "가장 유능한" 대통령이라고 칭찬했다.[118]

1975년 1월 백악관 로즈 가든에서 윌슨과 포드
]제럴드 포드는 닉슨의 사임 이후 대통령이 되었다.

1976년 4월, 제임스 캘러헌은 윌슨이 사임하면서 총리가 되었다. 포드와 캘러헌은 가까운 관계를 맺은 것으로 여겨졌다.[120]

영국 정부는 1976년의 미국 독립 200주년을 특별한 관계를 기념하는 행사로 여겼다.

포드는 1976년 선거에서 패배했다. 결과적으로 그의 대통령 임기는 1977년 1월에 종료되었다. 포드 대통령은 재임 기간 동안 한 번도 영국을 방문하지 못했다.[122]

지미 카터(왼쪽) 대통령과 제임스 캘러핸 (오른쪽) 총리가 1978년 3월 백악관 타원형 집무실에 있는 모습


1976년 선거에서 현직 제럴드 포드를 꺾고 지미 카터가 1977년 1월 미국 대통령으로 취임했다. 캘러핸과 카터의 관계는 우호적이었지만, 중도 좌파 정부가 경제 불황에 몰두하면서 외교적 접촉은 낮은 수준으로 유지되었다.

1977년 3월 캘러핸의 백악관 방문 동안 카터는 두 국가 간에 "특별한 관계"와 "깨지지 않는 우정"이 있다고 확언하며 "영국은 여전히 미국의 모국"이라고 선언했다.

캘러핸이 국내에서 직면한 경제 불황은 "불만의 겨울"로 발전했고, 결국 캘러핸의 노동당은 1979년 5월 총선에서 패배하여 총리로서의 임기를 마감했다.

지미 카터(Jimmy Carter)와 로잘린 카터(Rosalynn Carter)가 1979년 미국 방문 중 백악관에서 마거릿 대처(Margaret Thatcher)를 위한 만찬을 주최하고 있다.


보수당 대표 마거릿 대처는 당이 1979년 영국 총선에서 승리한 후 총리가 되었다. 카터 대통령과 마거릿 대처 총리의 1년 반 동안의 리더십 기간의 관계는, 특히 대처가 카터의 후임자인 로널드 레이건과 이후 발전시킨 친밀함과 비교했을 때, 비교적 냉랭한 것으로 여겨진다.[125][126][127]

카터와 대처가 1979년 미국 방문 중 백악관에서 차를 마시고 있다.


카터와 대처는 모두 소련의 아프가니스탄 침공을 비난했다.[125]

대처는 카터가 소련과의 관계에 대해 순진하다고 우려했다.[126] 그럼에도 불구하고, 대처는 소련군을 아프가니스탄에서 철수하라는 요구를 담은 유엔 결의안 채택에 대한 카터의 열망을 충족시키는 데 (아마도 중요한) 역할을 했다.[128]

마거릿 대처 총리(좌)와 로널드 레이건 대통령(우)이 1981년 2월 블루룸에 있는 모습


로널드 레이건 대통령(좌)과 마거릿 대처 총리(우)가 1988년 11월 오벌 오피스에 있는 모습


로널드 레이건 대통령과 마거릿 대처 총리의 개인적인 우정은 그들을 "이념적 소울 메이트"로 결속시켰다.

1982년, 대처와 레이건은 영국 폴라리스 함대를 미국이 제공한 트라이던트 미사일을 장착한 부대로 대체하는 데 합의했다.

1986년 4월 15일 RAF 레이켄히스에서 이륙하여 리비아에서 공습을 수행하는 미국 F-111F.


1986년 워싱턴은 리비아 테러리스트의 1986년 서베를린 디스코텍 폭탄 테러로 미국 군인 2명이 사망한 것에 대한 보복으로 리비아를 폭격하기 위해 영국 공군 기지 사용 허가를 요청했다.

더 심각한 의견 불일치는 1983년 워싱턴이 그레나다 침공에 대해 런던과 상의하지 않았을 때 발생했다.[143]

마거릿 대처와 부통령 조지 H. W. 부시 (1987년 7월 워싱턴 D.C.)


쿠웨이트 침공 당시 대처는 부시에게 "지금은 흔들릴 때가 아니다."라고 조언했다.[154][155][156][157] 대처는 1990년 11월에 총리직을 잃었다.

존 메이저(John Major) 총리(왼쪽)와 조지 H. W. 부시(George H. W. Bush) 대통령(오른쪽)이 1992년 6월 캠프 데이비드에서


마거릿 대처(Margaret Thatcher) 총리의 마지막 몇 년 동안 분명해지기 시작했듯이, 걸프 전쟁에서의 집중적인 협력에도 불구하고 냉전의 종식으로 인해 특별한 관계는 한동안 약해지기 시작했다.

2. 4. 탈냉전 시대 (1991-2001)

1994년 백악관에서 조찬 회담을 갖는 빌 클린턴 대통령(왼쪽)과 존 메이저 총리(오른쪽).


빌 클린턴 대통령(왼쪽)과 토니 블레어 총리(오른쪽)가 1999년 11월 피렌체에서 열린 진보적 거버넌스 회의에서.


빌 클린턴 민주당 대통령은 특별한 관계를 유지하려 했지만, 그와 존 메이저 총리는 서로 잘 맞지 않았다.[160] 1993년 클린턴이 네바다 핵실험장에서 핵실험 모라토리엄을 연장하고 포괄적 핵실험 금지 조약에 동의하도록 메이저를 압박하면서 핵 동맹은 약화되었다.[161] 영국의 국방부 장관은 이 동결 조치가 영국 트라이던트 II D5 미사일의 업그레이드된 탄두의 "안전성, 신뢰성 및 효율성"을 검증하는 것을 방해하고, 잠재적으로 21세기를 위한 새로운 억지력을 개발하는 것을 방해하여 메이저가 태평양 핵실험 재개를 고려하게 만들었다는 점에서 "유감스럽고 잘못된 것"이라고 묘사했다.[162] 국방부는 컴퓨터 시뮬레이션에 의존했다.[163]

보스니아 전쟁을 둘러싸고 대서양 관계에 위기가 찾아왔다.[164] 런던과 파리는 유엔의 무기 금수 조치 완화를 반대했고,[165] 미국의 개입 확대를 막았다.[166] 무슬림에게 무기를 지원하거나 세르비아인을 폭격하는 것이 유혈 사태를 악화시키고 현장의 평화 유지군을 위험에 빠뜨릴 수 있다고 주장했다.[167] 1993년 5월 워런 크리스토퍼 미국 국무장관의 무기 금수 조치 해제 시도는 메이저와 프랑수아 미테랑 프랑스 대통령에 의해 거부되었다.[165] 1993년 6월 소위 '코펜하겐 매복' 사건 이후, 클린턴이 헬무트 콜 독일 총리와 "합세"하여 유럽 공동체를 평화 유지 국가에 대항하게 만들자, 메이저는 특별한 관계의 종말을 생각하고 있다고 말했다. 그 다음 달 미국은 유엔에서 금수 조치 해제를 놓고 비동맹 국가와 함께 영국과 프랑스에 반대하는 투표를 했다.[168]

1993년 10월, 워런 크리스토퍼는 워싱턴 정책 입안자들이 너무 "유럽 중심적"이라고 격분하며 서유럽이 "더 이상 세계의 지배적인 지역이 아니다"라고 선언했다.[165] 런던 주재 미국 대사 레이먼드 G.H. 세이츠는 특별한 관계에 대한 "묘비"를 세우기에는 아직 너무 이르다고 주장하며 반대했다.[167] 미국 국무부의 한 고위 관리는 1995년 봄 보스니아를 수에즈 이후 영국 및 프랑스와의 최악의 위기로 묘사했다.[169] 여름이 되자 미국 관리는 NATO에 미래가 있는지 의문을 제기했다.[169]

NATO 확대와 크로아티아의 1995년 공세가 NATO 폭격의 길을 열면서, 강화된 클린턴-메이저 관계는 서방 동맹을 구한 세 가지 발전 중 하나로 평가되었다.[169] 클린턴 대통령은 나중에 존 메이저가 보스니아 문제에 대해 자신과 동맹을 위해 많은 노력을 기울였으며, 그가 국내에서 많은 정치적 압박을 받았다는 것을 알고 있지만 결코 흔들리지 않았고 자신을 실망시키지 않는 훌륭한 사람이었다고 인정했다.[169]

1994년 2월, 메이저는 신 페인 지도자 게리 애덤스에게 미국 방문 비자를 발급하여 선동하도록 결정한 것에 대해 클린턴의 전화에 며칠 동안 응답을 거부했다.[170] 애덤스는 내무부에 의해 테러리스트로 분류되었다.[171] 미국 국무부, CIA, 미국 법무부 및 FBI는 모두 이 조치가 미국을 "테러에 관대하게 보이게"하고 "특별한 관계에 회복할 수 없는 손상을 줄 수 있다"는 이유로 반대했다.[172] 미국 의회의 압력으로, 클린턴 대통령은 이번 방문이 IRA가 폭력을 포기하도록 장려할 것이라고 희망했다.[173] 애덤스가 새로운 것을 제안하지 않았고, 몇 주 안에 폭력이 격화되었지만,[174] 클린턴 대통령은 나중에 1994년 8월 IRA 휴전 이후 정당성을 주장했다.[175] 클린턴 대통령은 공식 접촉에 대한 금지 조치를 해제하고 무장 단체가 무장 해제에 동의하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1995년 성 패트릭의 날에 백악관에서 애덤스를 만났다.[171] 북아일랜드와 애덤스 문제에 대한 논쟁은 "격렬한 클린턴 식 분노를 촉발했다"고 한다.[169]

1995년 11월, 클린턴은 영국 국회 양원에서 연설한 두 번째 미국 대통령이 되었지만,[122] 메이저의 임기가 끝날 무렵, 특별한 관계에 대한 환멸이 심화되어 차기 영국 대사 크리스토퍼 마이어는 "진부한 문구"를 대사관에서 금지했다.[176][177]

1997년 영국 총선에서 토니 블레어가 영국 총리로 당선되면서 클린턴이 두 국가의 "특별한 파트너십"이라고 부른 관계를 되살릴 기회가 생겼다. 클린턴 대통령은 새 파트너와의 첫 만남에서 "지난 50년 동안 우리의 깨지지 않는 동맹은 비교할 수 없는 평화와 번영, 안보를 가져오는 데 기여했습니다. 그것은 공유된 가치와 공동의 열망에 기반한 동맹입니다."라고 말했다.[178]

두 지도자는 국내 의제에서 "정신적 동반자"로 여겨졌기 때문에 두 지도자 간의 개인적인 관계는 특히 친밀한 것으로 여겨졌다.[178] 블레어와 클린턴은 모두 자신들의 정당을 중도주의를 포용하도록 재정비하여, 각자 정당이 지도력을 잡기 전에 연이은 전국 선거 패배에 대응하여 채택한 전술인, 좌익 정치에서 멀어지게 했다.[308] 뉴 레이버의 제3의 길, 온건한 사회 민주주의 입장은 클린턴이 도입하는 데 기여한 미국의 뉴 민주당의 사상에 부분적으로 영향을 받았다.[179]

블레어와 클린턴은 모두 각자 세대([베이비 붐 세대])에서 처음으로 자국을 이끌었다.[308] 그러나 방위 및 통신 분야에서의 협력은 블레어가 유럽 연합 (EU)에서의 자신의 리더십 역할과 균형을 맞추려고 노력하면서 그를 당황하게 할 잠재력이 여전히 있었다.[180] 이라크 비행 금지 구역의 시행[181]과 이라크에 대한 미국의 폭격은 EU 파트너들을 실망시켰다.[182] 인도적 개입을 옹호하는 주요 국제적 주창자로서, "매파적" 블레어는 1999년 코소보에서 무력을 동원한 외교를 지지하도록 클린턴을 "괴롭혔"고, 승리를 위해 "필요한 모든 것"을 하도록 대통령을 설득하기 위해 지상군을 투입하라고 압박했다.[183][184]

클린턴은 1998년 영국 정부와 아일랜드 간의 벨파스트 협정으로 이어진 북아일랜드 평화 프로세스에서 핵심적인 역할을 했다.[185] 블레어와 클린턴 간의 파트너십은 이후 2010년 영화 특별한 관계의 초점이 되었다.

2. 5. 테러와의 전쟁 시대 (2001-2009)

토니 블레어 총리(왼쪽)와 조지 W. 부시 대통령(오른쪽)이 2004년 3월 백악관의 이스트룸에서 기자 회견을 가진 후


토니 블레어빌 클린턴의 후임인 미국 대통령 조지 W. 부시 대통령의 2001년 개인 외교는 특별한 관계를 더욱 부각시키는 데 기여했다. 전략적이지 않은 문제에 대한 정치적 차이에도 불구하고, 그들의 공유된 신념과 9.11 테러 이후 국제 정세에 대한 대응은 뉴욕과 워싱턴 D.C.에서 목적의 공통성을 형성했다. 부시처럼 블레어도 세계 평화와 국제 질서에 대한 인지된 위협에 맞서 싸우는 것이 중요하다고 확신했으며, 부시와 "어깨를 나란히" 하겠다고 약속했다.

블레어는 9.11 테러 직후 미국의 연대를 확인하기 위해 워싱턴으로 갔다. 공격 9일 후 미국 의회 연설에서 부시는 "미국은 영국보다 더 진실한 친구가 없다"고 선언했다.[187] 영부인의 특별 손님으로 의회에서 대통령 연설에 참석한 몇 안 되는 세계 지도자 중 한 명인 블레어는 의원들로부터 두 번의 기립 박수를 받았다. 대통령 연설에 블레어가 참석한 것은 미국과 영국의 두 지도자 하의 동맹의 힘을 보여주는 증거로, 미국 정치 역사상 외국 지도자가 미국 의회 비상 합동 회의에 참석한 유일한 사례로 남아 있다. 그 연설 이후 블레어는 군사 행동에 대한 국제적 지지를 결집하기 위해 두 달 동안 외교를 펼쳤다. BBC는 총리가 총 54번의 세계 지도자 회담을 가졌고 40,000 마일 (64,000 km) 이상을 여행했다고 계산했다.

블레어는 이라크 전쟁과 관련하여 부시의 가장 강력한 외국 동맹국으로 여겨졌다.[308] 이라크 전쟁에서 블레어의 지도력 역할은 총리 임기 말까지 부시와의 강력한 관계를 유지하는 데 도움이 되었지만, 이는 그의 당 내에서 인기가 없었고 그의 대중적 지지율을 낮췄다. 일부 영국 언론은 블레어를 "부시의 애완견"이라고 불렀다.[188] 또한 프랑스와 독일 지도자를 포함한 일부 유럽 파트너들을 소외시켰다. 러시아 대중 예술가 미하일 니콜라예비치 자도르노프는 "이라크 전쟁 상황에서 영국이 미국에 대해 취한 입장은 카마수트라에 공식적으로 도입될 것"이라고 말했다. 블레어는 부시와의 친밀한 개인적 관계가 중동 평화 프로세스, 아프리카 지원 및 기후 변화 외교에서 진전을 가져왔다고 주장함으로써 이를 옹호할 수 있다고 느꼈다.[189] 그러나 그는 부시가 아니라 캘리포니아 주지사 아놀드 슈워제네거와 함께 배출권 거래 시장을 구축하는 데 성공하여 "다른 주들이 따를 모델을 만들었다".[49][190]

2006년 레바논 전쟁 또한 중동에 대한 태도에 약간의 차이가 있음을 드러냈다. 블레어와 부시 행정부가 이스라엘에 제공한 강력한 지원은 영국 내각이나 영국 대중이 전적으로 공유하지 않았다. 7월 27일, 외무 장관 마가렛 베켓은 이스라엘에 레이저 유도 폭탄을 전달하기 위한 경유지로 프레스윅 공항을 사용하면서 절차를 무시했다고 미국을 비판했다.[191]

2007년 7월 캠프 데이비드에서 고든 브라운 총리(왼쪽)와 조지 W. 부시 대통령(오른쪽)


고든 브라운 영국 총리는 2007년 취임 당시 미국에 대한 지지를 표명했지만,[192] 그는 이 관계의 측면이나 최근의 미국 정책에 비판적이었던 장관들을 외무부에 임명했다.[193][194]화이트홀 소식통은 "이제 부시와 블레어와 함께했던 개인적인 비전에 대한 강조는 줄어들고, 좀 더 실무적인 방식이 될 것입니다."라고 말했다.[195] 영국 정책은 미국과의 관계가 영국의 "가장 중요한 양자 관계"로 남아 있다는 것이었다.[196]

2003년 이라크 침공 이후, 영국의 고위 인사들은 전후 이라크 계획, 특히 연합 임시 행정처의 바트당 제거 정책과 이후 권력 공백이 발생하여 반군이 성장하는 것을 막는 것의 중요성에 대한 영국의 조언을 미국 정부가 따르지 않은 점을 비판했다. 영국 국방부 장관 제프 훈은 이후 영국이 이라크 재건에 관해 부시 행정부와의 논쟁에서 '졌다'고 말했다.[352]

2. 6. 오바마 행정부 시대 (2009-2017)

버락 오바마 대통령은 2009년 3월 고든 브라운 총리와의 첫 만남에서 "영국은 우리의 가장 가깝고 강력한 동맹국 중 하나이며, 깨지지 않을 유대와 끈이 있습니다. 어떤 방식으로든 특별한 관계가 약화된다는 생각은 오해입니다. 이 관계는 특별하고 강력할 뿐만 아니라 시간이 지날수록 더욱 강해질 것입니다."라고 말했다.[198] 그러나 일부 평론가들은 로버트 깁스 백악관 대변인이 "특별 파트너십"이라는 용어를 반복적으로 사용한 것을 두고 용어 재정립 시도일 수 있다고 지적했다.[199]

고든 브라운 총리(왼쪽)와 버락 오바마 대통령(오른쪽)이 2009년 3월 백악관 오벌 오피스에서 만남


고위 미국 국무부 관리가 헤즈볼라의 정치 세력과 대화하려는 영국의 결정에 대해 비판하고 미국이 제대로 통보받지 못했다고 불만을 제기하면서 특별 관계에 "긴장"이 있었다는 보도가 있었다.[200][201] 이 항의는 오바마 행정부가 하마스와 대화할 준비가 되었다고 말하고, 동시에 시리아이란에 접근하려던 시도와 동시에 이루어졌다.[202]

2009년 6월에는 미국이 버뮤다와 영국 해외 영토에 관타나모 만 수용소의 전 수감자 4명을 재정착시키는 문제를 협상하기 전에 영국의 승인을 구하지 않아 특별 관계가 "또 한 번 타격을 입었다"는 보도가 있었다.[205][206][207]

2009년 8월, 1988년 로커비 폭탄 테러로 유죄 판결을 받은 아브델바세트 알-메그라히의 인도적 석방으로 특별 관계가 다시 "타격을 입었다"는 보도가 있었다. 힐러리 클린턴 미국 국무장관은 알-메그라히를 석방하는 것은 "절대적으로 잘못된 일"이라고 말했고, 오바마 대통령 역시 알-메그라히의 석방을 "실수"이며 "매우 반대할 만한 일"이라고 언급했다.[214]

2010년 3월, 힐러리 클린턴이 아르헨티나포클랜드 제도에 대한 협상 요구를 지지하면서 영국으로부터 일련의 외교적 항의를 촉발했고,[215] 특별 관계의 가치에 대한 대중의 회의론을 다시 불러일으켰다.[216][217]

데이비드 캐머런 총리(왼쪽)가 2013년 6월 G8 정상회담에서 버락 오바마 미국 대통령(오른쪽)과 만나는 모습.


데이비드 캐머런이 2010년 5월 영국 총리로 임명되자, 오바마 대통령은 가장 먼저 축하를 보낸 외국 정상이었다. 오바마는 "미국은 영국보다 더 가까운 친구와 동맹국을 갖고 있지 않으며, 우리 두 나라 사이의 특별한 관계...에 대한 깊고 개인적인 헌신을 재확인했습니다."라고 말했다.[224] 윌리엄 헤이그 외무장관은 "미국은 의심할 여지 없이 영국의 가장 중요한 동맹국입니다."라고 말했다.[225]

2010년 발생한 딥워터 지평선 원유 유출 사고는 미국에서 BP를 상대로 한 언론의 맹공을 촉발했다. 크리스천 사이언스 모니터는 BP에 대한 오바마 행정부의 비판이 고조되면서 "수사적 뾰족함"이 생겨났으며, 특히 회사가 더 이상 그 이름을 사용하지 않음에도 불구하고 "브리티시 페트롤리엄"이라는 용어를 반복적으로 사용하면서 특별 관계가 긴장되었다고 지적했다.[226]

2011년 5월, 오바마는 국빈 방문을 위해 영국을 방문하여 영국 의회 양원에서 연설한 세 번째 미국 대통령이 되었다.[230][231][232][233]

2013년, 미국의 시리아 내전 개입에 참여하지 않는 영국 의회 투표를 앞두고 존 케리 국무장관은 "미국과 영국 간의 관계는 종종 특별하거나 필수적인 것으로 묘사되었으며, 이는 단순하게도 그렇기 때문에 그렇게 묘사되었습니다."라고 말했다.[237]

2015년, 캐머런 총리는 오바마 대통령이 자신을 "브로"라고 부르며, 워싱턴과 웨스트민스터 사이의 "특별 관계"를 "그 어느 때보다 강력하다"고 묘사했다고 말했다.[238]

테리사 메이 총리(왼쪽)와 버락 오바마 대통령(오른쪽)이 2016년 9월 중국 항저우에서 공동 언론 성명을 발표하고 있다.


브렉시트 국민투표 이후 테리사 메이 총리와 오바마 행정부 간의 관계는 존 케리의 연설에서 이스라엘에 대한 비판으로 외교적 긴장이 고조되었다.[241] 오바마는 영국이 브렉시트 이후 미국의 무역 협상에서 우선순위가 낮으며, "뒷전으로 밀려날 것"이라는 입장을 고수했다.[242]

결국 오바마는 퇴임 전 앙겔라 메르켈 독일 총리가 대통령 재임 기간 동안 자신의 "가장 가까운 국제적 파트너"였다고 밝혔다.[245]

2. 7. 트럼프 행정부 시대 (2017-2021)

영국 총리 테레사 메이와 미국 대통령 도널드 트럼프, 2017년 1월 백악관 오벌 오피스


도널드 트럼프 대통령 당선 후, 영국 정부는 트럼프 행정부와 긴밀한 동맹을 구축하려 했다. 메이 총리는 트럼프와 긴밀한 관계를 맺으려 했지만, 이는 영국에서 매우 논란이 되었다.[4] 메이는 트럼프 취임식 이후 트럼프를 만난 첫 번째 세계 지도자였다.[247][4] 이 회담은 백악관에서 약 1시간 동안 진행되었다.[247] 메이의 지지자들은 그녀의 방문을 두 나라 사이의 역사적인 "특별한 관계"를 재확인하려는 시도로 묘사했다.[4]

메이는 트럼프의 "무슬림 금지" 행정 명령을 비난하지 않은 것과 2017년에 트럼프에게 국빈 방문을 초청한 것 때문에 영국에서[248][249][250][251] (자신의 당을 포함한) 모든 주요 정당의 구성원들로부터 비판을 받았다.[248][252][250] 통상적으로 대통령 취임 초기에 국빈 방문 초청이 이루어지지는 않았지만, 메이는 브렉시트 마감일 전에 미국과의 더 강력한 무역 관계를 육성하기 위해 그렇게 했다.[255] 180만 명 이상의 사람들이 "도널드 트럼프의 잘 알려진 여성 혐오와 저속함은 그가 여왕 폐하 또는 웨일스 공의 환영을 받을 자격을 박탈한다"고 말하는 공식 의회 전자 청원에 서명했다.[256] 제러미 코빈 야당 대표는 총리 질의응답에서 트럼프가 "부끄러운 무슬림 금지와 난민 및 여성의 권리에 대한 공격으로 우리의 공유 가치를 훼손하는 동안" 영국에 환영받아서는 안 된다고 말했으며,[257] 트럼프가 여행 금지를 해제할 때까지 영국에서 입국을 금지해야 한다고 말했다.[258][254] 와르시 남작부인 전 보수당 의장은 메이가 트럼프에게 "머리를 숙였다"고 비난했는데, 그녀는 트럼프를 "여성을 존중하지 않고, 소수 민족을 경멸하며, LGBT 커뮤니티에 대한 가치가 거의 없고, 취약한 사람들에 대한 동정심이 없으며, 정책이 분열적인 수사에 뿌리를 둔 사람"이라고 묘사했다.[259][260] 런던 시장 사디크 칸과 스코틀랜드의 보수당 대표 루스 데이비슨도 방문 취소를 요구했다.[261][259] 트럼프의 초청은 나중에 "국빈 방문"에서 "실무 방문"으로 격하되었다.[262] 이 방문은 2018년 7월에 이루어졌으며 여왕과의 회담을 포함했지만 정식 국빈 방문의 의식과 행사는 포함되지 않았다.[253]

메이가 트럼프와 유익한 실무 관계를 구축하려는 노력에도 불구하고, 그들의 관계는 "기능 장애"로 묘사되었다.[263] 통화에서 트럼프가 메이의 말을 자주 끊는 것이 습관이었다고 보고되었다.[263]

2017년 11월, 트럼프는 극우 단체 브리튼 퍼스트의 반무슬림 게시물을 리트윗했다. 이 조치는 영국 정치계 전반에서 비난을 받았고, 메이는 대변인을 통해 "대통령이 이런 짓을 한 것은 잘못되었다"고 말했다.[264] 이에 트럼프는 "나에게 집중하지 말고, 영국 내에서 일어나고 있는 파괴적인 급진 이슬람 테러에 집중하라. 우리는 잘하고 있다!"라고 트윗했다.[265] 트럼프와 메이 사이의 분쟁은 메이의 리더십 아래 강력한 "특별한 관계"에 대한 인식을 약화시켰고 브렉시트 통과를 용이하게 하기 위해 미국과의 긴밀한 관계 이미지를 구축하려는 그녀의 노력을 훼손했다. 일부는 트럼프의 트윗이 특별 관계에 심각한 피해를 입혔다고 보았다.[266][267][268][269][270][271][272][273][274]

2018년 2월, 트럼프는 미국 민주당의 일부에서 보편적 의료를 추진하는 것을 비난하기 위해 "수천 명의 사람들이 영국의 U 시스템이 파산하고 작동하지 않기 때문에 행진하고 있다"고 트윗했다.[275] 트럼프의 영국 국민 보건 서비스 (NHS) 비판은 사실과 달랐다. 트럼프가 언급한 영국의 시위는 실제로 NHS 서비스 개선과 자금 지원 증액을 요구했으며, NHS나 영국의 보편적 의료 시스템에 반대하는 것이 아니었다.[275][276] 이 트윗은 트럼프-메이 관계를 더욱 긴장시켰고, 메이는 영국의 의료 시스템에 대한 자부심을 선언하며 대응했다.[277][278]

2018년 1월, 피어스 모건과의 텔레비전 인터뷰에서 트럼프는 브렉시트 협상에 대한 메이의 접근 방식을 비판하여 그녀와의 관계를 더욱 긴장시켰다.[278] 2018년 G7 정상 회담에서 트럼프는 메이에게 여러 차례 노골적인 모욕을 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메이는 트럼프와의 관계가 여전히 강력하다고 말했다.[279] 2018년 브뤼셀 정상 회담에서 메이는 다른 NATO 회원국이 특정 수준의 국방 자금 지원을 충족하지 못했다고 불만을 토로하는 트럼프를 지지함으로써 호감을 얻으려 했다.[280]

브뤼셀 정상 회담 이후, 트럼프는 미국 대통령으로서 처음으로 영국을 방문했다. 그의 방문은 영국 정치 환경에서 메이에게 상당한 혼란이 선행된 시기에 이루어졌다. 그녀는 "소프트 브렉시트" 계획에 대한 상당한 반대에 직면했고, 그 결과 내각 장관들 사이에서 여러 주요 사임이 발생했다.[281][282][283] 그의 방문 동안, ''더 선''과의 인터뷰에서 트럼프는 다시 브렉시트 협상에 대한 메이의 처리 방식을 비판했다. 그는 메이의 제안이 미영 무역 협정의 가능성을 없앨 것이라고 말했다.[283][282] 이러한 발언은 이미 어려움을 겪고 있던 메이에게 추가적인 피해를 입혔다.[282] 트럼프는 또한 (최근 그녀의 내각에서 사임한) 메이의 정치적 경쟁자인 보리스 존슨을 칭찬하며 존슨이 훌륭한 총리가 될 것이라고 시사하기까지 했다.[283][282] ''배니티 페어''는 메이와 트럼프 아래에서 "특별한 관계"가 "기름진 쓰레기 화재로 전락했다"고 생각했다.[284]

2019년, 영국과 트럼프 행정부 간의 관계는 영국 주미 대사 킴 다록이 작성한 기밀 외교 전문이 ''메일 온 선데이''에 유출된 후 더욱 긴장되었다.[285][286][287] 2017년부터 2019년까지의 외무부에 보낸 전문에서 다록은 트럼프 행정부를 "독특하게 기능 장애"하고 "무능"하며 트럼프가 "불안감을 발산한다"고 보고했으며, 트럼프를 상대할 때는 "요점을 단순하게, 심지어 무뚝뚝하게 만들 필요가 있다"고 미국 관리들에게 조언했다.[285][286] 다록은 또한 트럼프의 이란에 대한 입장이 정치적 고려 사항으로 인해 자주 변경된다고 썼다.[285] 메모가 유출된 후, 트럼프는 다록이 "영국을 제대로 섬기지 못했다"고 말하며 메이를 비판했다. 메이는 다록을 옹호하며 "좋은 정부는 공무원이 완전하고 솔직한 조언을 할 수 있어야 한다"고 말했다. 나이젤 파라지와 리암 폭스와 같은 다른 영국 정치인들은 다록을 비판했다.[288] 2019년 보수당 대표 선거 토론에서 보리스 존슨이 다록을 변호하지 않기로 거부하고 트럼프가 다록을 상대하지 않겠다고 발언한 후, 대사는 사임했다.[287] 메이와 제러미 코빈은 하원에서 다록의 봉사에 찬사를 보내고 그가 미국의 압력으로 사임해야 했던 것을 개탄했다.[289]

영국 총리 보리스 존슨과 미국 대통령 도널드 트럼프가 2019년 9월 뉴욕에서


메이가 사임한 후, 보리스 존슨은 트럼프의 지지 속에 당 대표 경선에서 승리하여[290] 총리가 되었다. 트럼프는 존슨을 총리로서 칭찬하며 존슨과 자신을 비교하는 것을 기뻐하며 "훌륭한 사람입니다. 그는 강하고 똑똑합니다. 사람들은 '영국 트럼프'라고 부르죠. 그를 '영국 트럼프'라고 부르는데, 그걸 좋게 보는 사람들도 있습니다."[291]라고 말했다. 실제로 존슨은 일부 분석가와 비평가들로부터 "영국 트럼프"라고 불리기도 했다.[292] 그러나 보리스 존슨은 사회 정책에서 크게 다르며, 더 진보적인 사회적 입장을 가지고 있다. 존슨은 총리가 되기 전과 후에 트럼프를 칭찬하는 발언을 했다.[293]

11월 초, 영국이 2019년 총선 선거 운동을 시작할 준비를 하면서, 트럼프는 존슨과 보수당을 지지하며 런던 라디오 방송국 LBC에 야당 대표 제러미 코빈과 그의 노동당이 이끄는 정부는 "당신 나라에 매우 좋지 않을 것이고... 당신을 매우 나쁜 곳으로 데려갈 것"이라고 말했다.[294] 같은 인터뷰에서 트럼프는 존슨을 "환상적인 사람"이며 "지금 시대에 꼭 맞는 사람"이라고 칭찬했다.[294] 선거 운동 기간 동안, 존슨은 트럼프와 거리를 두려고 애쓰는 모습이 보였는데, 트럼프는 "영국에서 매우 인기가 없다"는 평가를 받았으며, 재임 기간 동안 실시된 여론 조사에서 영국 시민들은 트럼프에 대한 낮은 신뢰도와 지지도를 보였다.[295][296][297][298]

트럼프와 존슨은 둘 다 포퓰리스트로 여겨지며 서로 전반적으로 우호적인 관계를 맺고 있는 것으로 보였다.[306] 분석가들은 두 지도자 간에 몇 가지 스타일적인 유사점이 있다고 보았다.[299] 존슨은 트럼프에게 호감을 사기 위해 의도적인 노력을 기울이는 것으로 보였다.[299] ''폴리티코''는 나중에 전 백악관 관계자의 말을 인용하여 존슨이 총리가 되기 전에 외무 장관으로 재직하면서 트럼프의 호감을 얻기 위해 특히 스티븐 밀러와 같은 대통령의 최고 보좌관들을 포섭하는 등 적극적으로 노력했다고 보도했다. 전 백악관 관계자는 존슨이 워싱턴 D.C. 방문 중 밀러와 비밀리에 개인적인 만남을 가졌다고 주장했다.[300] ''폴리티코''는 또한 존슨과 트럼프가 서로 개인 휴대폰 번호를 공유할 정도로 가까운 관계가 되었다고 보도했다.[300] 존슨과 트럼프는 영국이 신속하게 브렉시트를 추진하는 것을 보고 싶어하는 공통된 열망을 가지고 있었다. 트럼프는 이전에 메이의 브렉시트 접근 방식에 대해 지나치게 길고 신중하다며 비판했었다.[299]

2019년 12월 런던에서 열린 NATO 정상 회담에서 존슨은 프랑스 대통령 에마뉘엘 마크롱, 네덜란드 총리 마르크 뤼터, 캐나다 총리 쥐스탱 트뤼도 및 앤 공주와의 대화에서 트럼프를 조롱하는 듯한 모습이 카메라에 포착되었다.[301] 이 영상이 공개된 후, 트럼프는 트뤼도를 "두 얼굴"이라고 비판했지만 존슨이나 다른 지도자들을 비판하지는 않았다.[302]

2020년 미국 대통령 선거에서 조 바이든에게 트럼프가 패배한 후, 영국의 벤 월리스 국방부 장관은 도널드 트럼프가 그립고, 그를 영국에 좋은 친구라고 불렀다.[303] 2021년 1월 6일 미국 국회의사당 공격 이후, 트럼프가 퇴임을 불과 14일 앞두고, 존슨은 이 사건과 관련하여 트럼프의 행동을 공개적으로 비난하며, 공격 참가자들을 부추긴 책임을 물었다.[304]

2. 8. 바이든 행정부 시대 (2021-현재)

도널드 트럼프는 2020년 미국 대통령 선거에서 패배했다.[305] 2020년 11월 7일 조 바이든 민주당 후보가 선거에서 승리한 것으로 예측되자 보리스 존슨 영국 총리는 그에게 축하 성명을 발표했다.[306] 존슨 총리는 기후 변화, 무역, 안보 등 공통 관심사에 대해 바이든 대통령과 협력할 것을 기대하며, 미국이 영국의 가장 중요한 동맹국이라고 믿는다고 밝혔다.[306] 바이든 대통령과 그의 팀은 대선 캠페인 기간 동안 외국의 선거 개입 혐의를 피하기 위해 다른 국가와 공모했다는 비난을 피하고자 외국 관리들과의 소통을 피하기로 결정했기 때문에 영국 관리들과 소통하지 않은 것으로 알려졌다.[310] 11월 10일, 존슨 총리는 바이든 대통령과 축하 전화를 주고받았다.[307]

2021년 9월 오벌 오피스에서 만난 보리스 존슨 영국 총리와 조 바이든 미국 대통령


2022년 9월 6일, 리즈 트러스가 영국의 총리가 되었다. 바이든 대통령은 축하 트윗을 통해 미국과 영국의 "특별한 관계"를 더욱 심화시키고 우크라이나 지원에 대한 약속을 재확인하겠다고 밝혔다.[325] 전통과는 달리, 트러스 총리의 첫 통화는 백악관이 아닌 볼로디미르 젤렌스키 우크라이나 대통령에게 걸렸고, 그날 저녁 늦게 바이든 대통령에게 전화했다.[326]

2022년 9월 뉴욕에서 만난 리즈 트러스 영국 총리와 조 바이든 미국 대통령

3. 군사 협력

영국과 미국의 군사 협력은 1941년 12월, 모든 미국 및 영국 작전에 대한 권한을 가진 군사 지휘 기구인 연합 참모 총장의 창설과 함께 시작되었다. 제2차 세계 대전 종전 후, 연합 지휘 체계는 해체되었지만, 1950년대 초 냉전이 시작되면서 양국 간의 긴밀한 군사 협력이 재개되었다.[1][34] 티자드 미션은 제2차 세계 대전 중 연합국의 기술 협력을 촉진했다.

1943년 퀘벡 협정으로 두 나라는 원자 무기를 함께 개발할 수 있게 되었으며, 영국은 자체 튜브 얼로이즈 프로젝트의 중요한 문서를 넘겨주고 맨해튼 계획을 지원하기 위해 대표단을 보냈다. 미국은 나중에 맥마흔법에 따라 작업 결과를 독점했지만, 영국이 자체 열핵 무기를 개발한 후 1958년 미국-영국 상호 방위 협정을 통해 영국 전쟁용 탄두에 대한 운반 시스템, 설계 및 핵 물질을 공급하기로 합의했다.

영국은 먼저 폴라리스 시스템을 구매한 후, 현재도 사용 중인 미국 트라이던트 시스템을 구매했다. 1958년 협정으로 영국은 네바다 핵실험장 시설 접근을 허용받았으며, 1963년부터 1991년 핵실험 중단 전까지 총 21번의 지하 핵실험을 그곳에서 실시했다.[37] 이 협정은 2004년에 갱신되었으며, 핵 반대 활동가들은 이 갱신이 1968년 핵 확산 금지 조약을 위반할 수 있다고 주장했다.[38][39] 미국과 영국은 1998년 포괄적 핵실험 금지 조약에 따라 허용된 대로, 기존 비축량의 효과를 결정하기 위해 2002년과 2006년에 미임계 핵 실험을 공동으로 실시했다.[40][41]

로널드 레이건 행정부는 영국에게 블랙 프로그램이었던 F-117 나이트호크 스텔스기 구매 기회를 제공했다.[42] 영국은 역사상 가장 큰 미국의 항공기 조달 프로젝트인 F-35 라이트닝 II 프로그램의 유일한 협력적(레벨 1) 국제 파트너이다.[43][44] 영국은 사양서 작성 및 선택에 참여했으며, 영국의 최대 방위 군수 업체인 BAE 시스템스는 미국의 주 계약업체인 록히드 마틴의 파트너이다. BAE 시스템스는 미국 국방부의 최대 외국 공급업체이며 록히드 마틴 항공 전자 시스템, 유나이티드 디펜스와 같은 주요 미국 방위 회사를 인수하기도 했다.

미국은 초밤 장갑, 해리어 GR9/AV-8B 해리어 II, 미 해군 T-45 고쇼크를 포함한 여러 영국 설계를 운용한다. 영국 또한 재블린 대전차 미사일, M270 로켓 포병, 아파치 건쉽, C-130 허큘리스, C-17 글로브마스터 수송기를 포함한 여러 미국 설계를 운용한다.

4. 정보 협력

1943년 퀘벡 협정으로 영국과 미국은 원자 무기를 함께 개발할 수 있게 되었고, 영국은 자체 튜브 얼로이즈 프로젝트의 중요 문서를 넘기고 맨해튼 계획에 참여했다. 미국은 나중에 맥마흔법에 따라 작업 결과를 독점했지만, 영국이 자체 열핵 무기를 개발한 후, 미국은 1958년 미국-영국 상호 방위 협정을 통해 영국에 핵탄두 운반 시스템, 설계, 핵 물질을 제공하기로 합의했다.

영국은 폴라리스 시스템을 구매한 후, 현재 사용 중인 미국 트라이던트 시스템을 구매했다. 1958년 협정으로 영국은 네바다 핵실험장 시설을 이용할 수 있게 되었고, 1963년부터 1991년 핵실험 중단 전까지 총 21번의 지하 핵실험을 실시했다.[37] 2004년에 협정이 갱신되자, 핵 반대 활동가들은 이것이 1968년 핵 확산 금지 조약을 위반할 수 있다고 주장했다.[38][39] 미국과 영국은 1998년 포괄적 핵실험 금지 조약에 따라, 기존 비축량의 효과를 확인하기 위해 2002년과 2006년에 미임계 핵 실험을 함께 실시했다.[40][41]

멘위스 힐: 잉글랜드 해로게이트 근처에 있으며, 영국과 미국 모두에 통신 및 정보 지원 서비스를 제공한다.


특별한 관계의 핵심은 정보 수집 및 공유이며, 이는 제2차 세계 대전 중 암호 해독 지식 공유로 시작되어 1943년 BRUSA 협정으로 이어졌고, 블레츨리 파크에서 서명되었다. 전쟁 후, 공산주의 위협 감시 및 대응이라는 공동 목표는 1948년 영국-미국 안보 협정을 이끌었다. 이 협정은 미국, 영국, 캐나다, 호주, 뉴질랜드의 신호 정보 기관을 통합했으며, 오늘날까지 유효하다(파이브 아이즈). 런던 주재 중앙정보국 지부장은 매주 열리는 영국 합동 정보 위원회 회의에 참석한다.[45]

이러한 협력의 현대적 예시로는 미국의 국가안보국, 영국의 정부통신본부, 호주의 국방신호국, 캐나다의 통신보안청으로 구성된 UKUSA 공동체가 있으며, 이들은 글로벌 정보 수집 시스템인 에셜론에서 협력한다. 기밀 양자 협정에 따라 UKUSA 회원국은 서로를 감시하지 않는다.[46]

2006년 대서양 횡단 항공기 음모가 발견된 후, CIA는 보안국(MI5)이 영국 파키스탄인 커뮤니티에서 자체 요원 네트워크를 운영하도록 지원하기 시작했다. 한 정보 관계자는 영국 이슬람교도로부터 미국에 대한 위협에 대해 "우려되는 점은 이와 같은 사건이 단순히 사람들을 죽이는 것을 넘어 미국과 영국 사이에 역사적인 분열을 야기할 수 있다는 것이다."라고 언급했다.[47]

5. 경제 협력

1943년 퀘벡 협정을 통해 영국과 미국은 원자 무기 개발에 협력하게 되었다. 영국은 튜브 얼로이즈 프로젝트의 중요 문서를 미국에 넘기고 맨해튼 계획에 참여했다. 전후 미국은 맥마흔법으로 핵 개발 결과를 독점했지만, 영국이 자체 열핵 무기를 개발한 후 1958년 미국-영국 상호 방위 협정을 통해 핵무기 관련 기술 및 물질을 영국에 제공하기로 합의했다.

영국은 폴라리스 시스템을 구매한 후, 현재는 미국의 트라이던트 시스템을 구매하여 사용하고 있다. 1958년 협정으로 영국은 네바다 핵실험장 시설을 사용할 수 있게 되었고, 1963년부터 1991년까지 21번의 지하 핵실험을 실시했다.[37] 2004년에 협정이 갱신되었으나, 핵 반대 활동가들은 이것이 1968년 핵 확산 금지 조약 위반이라고 주장했다.[38][39] 미국과 영국은 1998년 포괄적 핵실험 금지 조약에 따라 2002년과 2006년에 미임계 핵 실험을 공동으로 실시했다.[40][41]

6. 문화 및 사회 교류

트루먼 대통령 임기 4개월 만에 처칠의 정당은 예상 밖의 선거 패배를 겪었고, 클레멘트 애틀리가 총리가 되었다.[67]

처칠의 전시 연립 정부 부총리였던 애틀리는 루스벨트가 사망했을 당시 미국에 있었고, 따라서 트루먼이 취임한 직후 그를 만났다. 둘은 서로를 좋아하게 되었다.[54] 그러나 애틀리와 트루먼은 특별히 가까워지지는 않았다. 두 사람이 정부 수반으로 재임하는 동안, 그들은 단 세 차례 만났다. 두 사람은 정기적인 서신 교환도 하지 않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서로 간의 업무 관계는 굳건했다.[67]

애틀리가 총리직을 맡았을 때, 7월 17일에 시작된 포츠담 회담의 협상은 아직 완료되지 않았다. 애틀리는 7월 26일 총리로 임명되자 회담에서 처칠의 자리를 대신했다. 따라서 애틀리는 총리로서 처음 16일을 회담 협상에 썼다.[68] 애틀리는 1950년 12월 더글러스 맥아더에 맞서 싸우는 트루먼을 지지하기 위해 워싱턴으로 날아갔다.[54] 1951년, 트루먼은 애틀리에게 모사데크에 대한 이란 개입을 하지 않도록 압력을 가했다.[69] 총리 재임 기간 동안, 애틀리는 또한 트루먼이 더 큰 핵 협력에 동의하도록 설득했다.[54]

7. 주요 쟁점 및 갈등

스카이볼트 위기는 1962년 케네디 대통령이 사전 협의 없이 공동 프로젝트를 취소하면서 발생한 사건으로, 특별한 관계에 큰 시련을 안겨주었다.[83][84][85][86] 영국은 스카이볼트 미사일(소련 영공 침투 가능 핵 공대지 미사일)에 의존하여 자국의 핵 억지력을 유지하려 했기에, 이 취소는 영국 핵 억지력의 약화로 이어질 수 있다는 우려를 낳았다. 이 위기는 영국 해군이 미국의 UGM-27 폴라리스 미사일을 구매하고 이를 탑재할 레졸루션급 잠수함을 건조하는 타협을 통해 해결되었다.[83][84][85][86]

런던 제국 전쟁 박물관에 전시된 영국의 UGM-27 폴라리스 미사일


스카이볼트 논쟁은 극비리에 진행되었으나, 딘 애치슨 전 국무장관이 특별한 관계에 공개적으로 이의를 제기하고 서방 동맹에 대한 영국의 기여를 폄하하면서 긴장이 고조되었다. 애치슨은 "영국은 제국을 잃었고 아직 역할을 찾지 못했다"고 주장하며, 영국이 별개의 강대국 역할을 하려는 시도가 거의 끝났다고 말했다.[87]

이에 대해 해럴드 맥밀런 총리는 "애치슨 씨는 지난 400년 동안 많은 사람들이 범했던 오류를 범했다"며 강하게 반박했다. 그는 영국이 세계 문제에서 중요한 역할을 하고 있으며, 상호 의존의 원칙이 평화와 번영을 보장하는 데 필수적이라고 강조했다.[88]

케네디 대통령은 바하마 나소에서 열린 영미 정상 회담에서 스카이볼트를 대체할 폴라리스 미사일 판매에 합의함으로써 위기를 수습했다.[89] 리처드 E. 노이슈타트는 조사에서 이 위기가 대통령 참모들이 영국의 의도와 능력에 대한 적절한 평가를 하지 못했기 때문에 발생했다고 결론지었다.[89]

케네디 대통령(왼쪽)이 1962년 백악관에서 알렉 더글러스-홈 당시 외무장관(오른쪽)을 환영하고 있다.


알렉 더글러스-홈은 보수당 대표직에서 사임하는 맥밀런의 후임 경쟁에 뛰어들었으나, 케네디 행정부가 퀸틴 호그, 세인트 메리레본 남작의 총리직 승계를 우려한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92] 더글러스-홈은 케네디 대통령이 암살되기 전까지 한 달 남짓 총리직을 수행했다.

1963년 11월 케네디 대통령 암살 사건은 영국에 큰 충격과 슬픔을 안겨주었다. 로렌스 올리비에 경과 같은 저명인사들과 캔터베리 대주교는 추모 예배를 통해 애도를 표했고, 더글러스-홈 총리는 케네디를 "가장 충성스럽고 헌신적인 동맹국"이라고 칭하며 의회 추모사를 이끌었다.[93]

그러나 케네디 대통령 기념관 건립을 위한 모금 운동은 대중의 미미한 반응으로 인해 어려움을 겪었으며, 이는 고(故) 대통령과 미국에 대한 풀뿌리 수준의 반대를 시사했다.[93]

더글러스-홈 총리는 린든 B. 존슨 대통령과 긴장된 관계를 유지했다. 두 정부는 쿠바와의 영국 무역 문제, 특히 영국 레이랜드 버스의 쿠바 판매로 인해 미국의 쿠바 봉쇄 효과가 약화되면서 관계가 더욱 악화되었다.[95][96]

7. 1. 외교 정책

1943년 퀘벡 협정을 통해 영국과 미국은 원자 무기 개발에 협력하기 시작했다. 영국은 튜브 얼로이즈 프로젝트의 중요 문서를 미국에 넘겨주고 맨해튼 계획에 대표단을 파견하여 지원했다. 전후 미국은 맥마흔법에 따라 핵무기 개발 결과를 독점했지만, 영국이 자체 열핵 무기를 개발한 후 1958년 미국-영국 상호 방위 협정을 통해 핵무기 관련 기술과 물질을 공유하기로 합의했다.[37]

영국은 폴라리스 시스템을 구매한 후, 현재는 미국 트라이던트 시스템을 구매하여 사용 중이다. 1958년 협정에 따라 영국은 네바다 핵실험장 시설을 이용할 수 있었고, 1963년부터 1991년까지 총 21번의 지하 핵실험을 실시했다.[37] 2004년에 협정이 갱신되었으나, 핵 반대 활동가들은 이것이 1968년 핵 확산 금지 조약을 위반할 수 있다고 주장했다.[38][39] 미국과 영국은 1998년 포괄적 핵실험 금지 조약에 따라 2002년과 2006년에 미임계 핵 실험을 공동으로 실시했다.[40][41]

로널드 레이건 행정부는 영국에게 F-117 나이트호크 스텔스기 구매 기회를 제공했다.[42] 영국은 F-35 라이트닝 II 프로그램의 유일한 레벨 1 국제 파트너이며,[43][44] 영국의 BAE 시스템스는 미국의 주 계약업체인 록히드 마틴의 파트너이다. BAE 시스템스는 미국 국방부의 최대 외국 공급업체이기도 하다.

미국은 초밤 장갑, 해리어 GR9/AV-8B 해리어 II, T-45 고쇼크 등 영국 설계를 운용하며, 영국은 재블린 대전차 미사일, M270 로켓 포병, 아파치 건쉽, C-130 허큘리스, C-17 글로브마스터 수송기 등 미국 설계를 운용한다.

특별한 관계의 중요한 부분은 정보 수집 및 공유이다. 이는 제2차 세계 대전 중 암호 해독 지식 공유로 시작되어 1943년 BRUSA 협정으로 이어졌고, 블레츨리 파크에서 서명되었다. 전쟁 후, 영국-미국 안보 협정은 양국의 신호 정보 기관을 통합했으며, 이는 오늘날까지 유효하다 (파이브 아이즈). 런던 주재 중앙정보국 지부장은 매주 열리는 영국 합동 정보 위원회 회의에 참석한다.[45]

UKUSA 공동체는 미국의 국가안보국, 영국의 정부통신본부, 호주의 국방신호국, 캐나다의 통신보안청으로 구성되며, 에셜론에서 협력한다. UKUSA 회원국은 서로를 감시하지 않는다.[46]

2006년 대서양 횡단 항공기 음모 이후, CIA는 보안국 (MI5)이 영국 파키스탄인 커뮤니티에서 자체 요원 네트워크를 운영하도록 지원했다.[47]

2013년 9월 9일, 윌리엄 헤이그 영국 외무장관과 존 케리 미국 국무장관은 런던에서 열린 기자 회견에서 특별한 관계를 여러 차례 언급하며, 양국 간의 긴밀한 경제적 유대와 협력을 강조했다.[53]

7. 2. 범죄인 인도

영국과 미국 간의 범죄인 인도 관계는 양국 간의 오랜 협력 관계를 반영한다. 2003년, 양국은 범죄인 인도 조약에 합의하여 범죄인 인도 절차를 간소화했다.[356][357] 이 조약은 9.11 테러 이후 대테러 조치의 일환으로 시행되었으며, 양국 간의 범죄인 인도 요건을 동등하게 적용하는 것을 목표로 했다.[360]

그러나 이 조약은 논란의 여지가 있었다. 비판론자들은 영국이 범죄인 인도를 허가하기 전에 미국 법원에 강력한 ''일응의 증거''를 제시해야 하는 반면, 영국에서 미국으로의 범죄인 인도는 ''일응의 증거'' 없이 행정적인 결정에 불과하다고 주장했다.[358][359][360] 실제로 미국은 이 조약을 사용하여 NatWest Three 및 이안 노리스[361]와 같은 여러 유명 런던 사업가들을 인도하고 기소했다. 이는 1970년대부터 1990년대까지 미국이 임시 IRA 자원봉사자들을 비호하고 영국으로의 인도를 반복적으로 거부했던 것과 대조적이었다.[362]

해리 던의 죽음 사건은 범죄인 인도 조약에 대한 비판을 더욱 심화시켰다. 2019년 8월 27일, 미국 CIA 장교의 아내가 일으킨 교통사고로 해리 던이 사망한 후, 피고인 앤 사쿨라스는 미국으로 송환되어 외교 면책 특권을 주장했다.[363]

2006년 9월 30일, 미국 상원은 만장일치로 2003년 조약을 비준했다.[364] 그러나 일부 아일랜드계 미국 단체들은 이 조약이 북아일랜드에서 영국 정책에 반대하는 미국 시민들에게 새로운 법적 위험을 초래할 것이라고 우려했다.[364] 《스펙테이터》는 3년간의 비준 지연을 '오랫동안 소중히 여겨온 관계의 끔찍한 위반'이라고 비난했다.[365]

7. 3. 무역 정책

미국은 영국에 대한 외국인 직접 투자의 가장 큰 원천이며, 영국 또한 미국에 대한 단일 외국인 직접 투자자 중 가장 큰 국가이다.[48] 영국의 무역과 자본은 미국의 식민지 시대부터 미국의 경제에 중요한 구성 요소였다. 무역과 금융 분야에서 특별한 관계는 "균형 잡힌" 것으로 묘사되었으며, 최근 몇 년 동안 런던 시티의 규제는 월가에서 막대한 자본 유출을 유발했다.[49] 미국으로 수출하는 영국 수출업체의 주요 분야는 항공, 우주항공, 상업용 부동산, 화학 및 제약, 중장비이다.[50]

영국의 고전적이고 현대적인 사상 또한 미국의 경제 정책에 지대한 영향을 미쳤으며, 특히 역사학자 애덤 스미스자유 무역 사상과 경제학자 존 메이너드 케인스의 경기대응 지출 사상이 두드러진다. 미국과 영국의 투자자들은 주택 시장에 대한 기업가적 태도를 공유하며, 두 나라의 패션 및 음악 산업은 서로에게 주요한 영향을 미친다.[51] 무역 관계는 세계화에 의해 강화되었으며, 양국 정부는 중국의 통화 개혁과 국내 교육 개혁을 통해 경쟁력을 강화해야 한다는 데 동의한다.[51] 2007년, 미국 대사 로버트 H. 터틀은 영국 기업인들에게 특별한 관계를 "국제 무역을 증진하고 환경 피해를 제한하며 테러와 싸우는 데" 사용할 수 있다고 제안했다.[52]

2013년 9월 9일, 런던에서 열린 기자 회견에서 윌리엄 헤이그 영국 외무장관과 존 케리 미국 국무장관은 특별한 관계를 여러 차례 언급했다. 케리 장관은 "우리는 서로의 국가에서 서로에게 가장 큰 투자자일 뿐만 아니라, 매일 거의 100만 명이 미국에 있는 영국 회사에서 일하고 있고, 여기 영국에서도 100만 명이 넘는 사람들이 미국 회사에서 일하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엄청나게 서로 묶여 있고, 분명합니다. 그리고 우리는 미국-영국 및 미국-EU 관계를 우리 번영의 더욱 강력한 동력으로 만들 것을 약속합니다."라고 말했다.[53]

무역 분쟁과 그에 따른 고용 불안은 때때로 특별한 관계를 악화시켜 왔다. 미국은 세계 무역 기구 규칙을 사용하거나 무시함으로써 공격적인 무역 정책을 추진하고 있다는 비난을 받아왔다. 영국에 가장 큰 어려움을 야기한 측면은 서인도 제도의 소규모 가족 바나나 농가를 미국 금융 그룹(American Financial Group)과 같은 대형 미국 기업으로부터 보호하는 것에 대한 성공적인 이의 제기[367]와 영국 철강 제품에 대한 높은 관세 부과[368]였다. 2002년, 토니 블레어는 부시 대통령의 철강 관세 부과를 "용납할 수 없고, 정당하지 않으며, 잘못된 것"이라고 비난했지만, 영국 최대 철강 회사인 코러스 그룹(Corus Group)은 개발 도상국의 덤핑으로부터의 보호를 요구했고, 영국 산업 연맹은 정부에 "보복"을 시작하지 말 것을 촉구했다.[369]

8. 평가 및 전망

반전 시위, 트라팔가 광장, 2007년 2월


윈스턴 처칠이 "특별한 관계"를 강조했지만, 용어와 개념 자체는 19세기부터 인식되었다.[16]

미국 독립 전쟁과 1812년 전쟁 등 초기에는 갈등이 있었지만, 19세기 중반 영어, 이주, 복음주의 개신교, 고전적 자유주의, 무역 등 공통점을 기반으로 양국 관계는 발전했다. 1861년 트렌트 사건에서 영국이 양보하면서 전쟁 위기를 넘기기도 했다.[17]

제1차 세계 대전에서 양국은 희생이라는 공통의 유대감을 공유했다. (미국은 공식적으로 연합국은 아니었지만, 1917년에 "연합국"으로 참전). 1930년 램지 맥도널드 영국 총리의 미국 방문은 "특별한 관계"에 대한 믿음을 확인시켜 주었다.[18] 그러나 제1차 세계 대전 이후, 양국 관계는 냉랭하고 의심스러운 상태였다.[19] 해리 S. 트루먼 대통령의 국무장관 딘 애치슨은 양국 관계가 독특하지만 애정은 없다고 회상했다.[20]

제2차 세계 대전 발발은 긍정적 관계로의 전환점이 되었다. 1940년 프랑스 공방전 이후, 특별한 관계는 영국-프랑스 상호 협약을 대체하며 국제 시스템의 중심축이 되었다. 1945년 샤를 드골에게 처칠은 프랭클린 D. 루스벨트를 선택할 것이라고 말했다.[23] 처칠은 1944년 "특별한 관계"라는 용어를 처음 사용했고,[27] 1946년 미주리주 풀턴에서 "평화의 힘줄 연설"을 통해 영국 연방과 미국 간 특별한 관계로 세계 평화를 유지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1982년 마거릿 대처 총리는 "영미 관계는 세계 다른 어떤 동맹보다 자유 수호와 미래에 더 많은 기여를 했다"고 평가했다.[32]

그러나 이러한 관계에 대한 비판도 존재한다. 가이 아놀드는 2014년에 "특별한 관계"를 "영국의 정치 체제에 있는 질병"이라고 비난하며, 유럽 및 러시아와의 더 긴밀한 관계를 요구했다.[33] 비밀스러운 국방 및 정보 관련 연결고리가 "대서양 우호 관계에서 불균형적인 역할을 한다"는 지적도 있다.[332]

냉전 시대 영국 여론 조사는 미국에 대한 양가적인 감정을 드러냈다. 1986년 1986년 리비아 폭격에 대한 마거릿 대처의 결정에 영국인의 71%가 반대했다.[335] 2006년 여론 조사에서는 영국인의 63%가 영국이 미국과 너무 밀접하게 연결되어 있다고 느꼈다.[344] 2008년 이코노미스트는 영국과 미국의 견해가 크게 다르다고 언급했다.

2010년 여론 조사에서 미국인의 57%가 영국과의 특별한 관계를 가장 중요한 양자 파트너십으로 간주했다.[346][347] 같은 해 영국 여론 조사에서는 66%가 미국에 호의적이었지만, 85%는 영국의 영향력이 거의 없다고 믿었다.[348] 2021년 퓨 리서치 센터 여론 조사에서 미국 응답자의 31%가 영국을 가장 가까운 외교 파트너로 선택했다.[350] 2024년 에머슨 칼리지 여론 조사에서는 젊은 미국인 응답자일수록 영국보다 중국을 더 가치 있는 전략적 파트너로 꼽는 경향이 있었다. 하지만 대다수는 여전히 이 관계를 "매우 중요하다"고 인식하고 있으며, 특히 고령층에서 이러한 경향이 강하게 나타났다.

8. 1. 긍정적 측면



윈스턴 처칠이 "특별한 관계"를 강조했지만, 이 용어와 개념은 19세기부터 경쟁국들을 포함하여 이미 인식되고 있었다.[16]

미국 독립 전쟁과 1812년 전쟁 등 초기에는 갈등이 있었지만, 19세기 중반 영어, 이주, 복음주의 개신교, 고전적 자유주의, 광범위한 무역 등 공통점을 기반으로 양국 관계는 발전했다. 1861년 트렌트 사건에서 영국이 양보하면서 전쟁 위기를 넘기기도 했다.[17]

제1차 세계 대전에서 두 나라는 희생이라는 공통의 유대감을 공유했다 (미국은 공식적으로 연합국은 아니었지만, 1917년에 "연합국"으로 참전). 1930년 램지 맥도널드 영국 총리의 미국 방문은 "특별한 관계"에 대한 믿음을 확인시켜 주었다.[18]

제2차 세계 대전 발발은 양국 간 긍정적 관계가 급격히 부상하는 계기가 되었다. 1940년 프랑스 공방전국제 관계에서 결정적 사건이었고, 특별한 관계는 영프 협약을 대체하며 국제 시스템의 중심축이 되었다. 전쟁 중 군사적 노력은 주요 동맹국 사이에서 전례 없이 통합되었다.[22] 처칠과 프랭클린 D. 루스벨트 대통령은 긴밀한 개인적 관계를 유지하며 서신 교환과 회담을 가졌다.[24]

처칠은 1944년 처음 "특별한 관계"라는 용어를 사용하며 양국 간 긴밀한 협력을 강조했다.[27] 1946년 미주리주 풀턴에서 "평화의 힘줄 연설"을 통해 영국 연방과 미국 간 특별한 관계로 세계 평화를 유지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마거릿 대처 총리는 1982년 "영미 관계는 세계 다른 어떤 동맹보다 자유 수호와 미래에 더 많은 기여를 했다"고 평가했다.[32]

조 바이든 대통령 취임 후에도 양국은 새 대서양 헌장을 체결하며 긴밀히 협력하고 있다.[320] 바이든 대통령은 "특별한 관계를 확인"했다.[320]

8. 2. 부정적 측면

영국미국의 "특별한 관계"는 윈스턴 처칠에 의해 강조되었지만, 19세기부터 그 존재가 인식되었다.[16] 초기에는 미국 독립 전쟁과 1812년 전쟁 등으로 적대적이었고, 미국 남북 전쟁 당시 영국이 남부 연합을 지원하려 하면서 긴장이 고조되기도 했다. 1861년 트렌트 사건에서 영국이 강경한 태도를 보이자 미국이 물러섰다.[17]

제1차 세계 대전 이후, 양국 관계는 냉랭하고 의심스러운 상태였다.[19] 미국의 국제 연맹 불참, 전쟁 부채, 해군 경쟁, 만주 사변 등으로 영국은 미국을 신뢰할 수 없다고 여겼다.[19] 해리 S. 트루먼 대통령의 국무장관 딘 애치슨은 양국 관계가 독특하지만 애정은 없다고 회상했다.[20]

제2차 세계 대전 발발은 긍정적인 관계로의 전환점이 되었다. 1940년 프랑스 공방전 이후, 특별한 관계는 영국-프랑스 상호 협약을 대체하며 국제 시스템의 중심축이 되었다. 그러나 샤를 드골에게 처칠은 프랭클린 D. 루스벨트를 선택할 것이라고 말했다.[23]

1943년 퀘벡 협정으로 양국은 원자 무기 개발에 협력했다. 영국은 튜브 얼로이즈 프로젝트 문서를 넘기고 맨해튼 계획을 지원했다. 미국은 맥마흔법으로 결과를 독점했지만, 영국이 열핵 무기를 개발한 후 1958년 미국-영국 상호 방위 협정을 통해 지원했다.

처칠은 트루먼에게 소련에 대한 선제 핵 공격을 제안했지만, 받아들여지지 않았다.[72][73] 드와이트 D. 아이젠하워와의 관계는 아이젠하워가 스탈린과의 정상 회담 시도에 분노하면서 악화되었다.[54] 해럴드 맥밀런은 관계 회복을 위해 노력했지만,[54] 아이젠하워는 1960년 파리 정상 회담에서 데탕트 정책을 방해하며 긴장을 고조시켰다.[81] 존 F. 케네디는 친영주의자였고,[82] 쿠바 미사일 위기 평가와 부분 핵실험 금지 조약에서 맥밀런의 리더십을 존경했다.[54]

조 바이든보리스 존슨과 덜 우호적인 관계를 가질 것이라는 추측이 있었다.[306][309] 바이든은 존슨을 도널드 트럼프와 유사한 우익 포퓰리스트로 비난했다.[306][310][309] 버락 오바마에 대한 존슨의 발언도 문제점으로 지적되었다.[306][310][309]

일반 대중에게는 비밀스러운 국방 및 정보 관련 연결고리가 "대서양 우호 관계에서 불균형적인 역할을 한다"는 지적이 있다.[332] 냉전 시대 영국 여론 조사는 미국에 대한 양가적인 감정을 드러냈다. 1986년 1986년 리비아 폭격에 대한 마거릿 대처의 결정에 영국인의 71%가 반대했다.[335] 2006년 여론 조사에서는 영국인의 63%가 영국이 미국과 너무 밀접하게 연결되어 있다고 느꼈다.[344] 2008년 이코노미스트는 영국과 미국의 견해가 크게 다르다고 언급했다.[345]

2010년 여론 조사에서 미국인의 57%가 영국과의 특별한 관계를 가장 중요한 양자 파트너십으로 간주했다.[346][347] 같은 해 영국 여론 조사에서는 66%가 미국에 호의적이었지만, 85%는 영국의 영향력이 거의 없다고 믿었다.[348] 2021년 퓨 리서치 센터 여론 조사에서 미국 응답자의 31%가 영국을 가장 가까운 외교 파트너로 선택했다.[350] 2024년 에머슨 칼리지 여론 조사에서는 젊은 미국인 응답자일수록 영국보다 중국을 더 가치 있는 전략적 파트너로 꼽는 경향이 있었다. 하지만 대다수는 여전히 이 관계를 "매우 중요하다"고 인식하고 있으며, 특히 고령층에서 이러한 경향이 강하게 나타났다.

8. 3. 전망

윈스턴 처칠에 의해 널리 알려진 영국과 미국의 "특별한 관계"는, 그 용어와 개념 자체가 19세기부터 경쟁국들을 포함하여 인식되었다.[16]

미국 독립 전쟁과 1812년 전쟁을 거치며, 영국과 미국은 19세기 중반까지 긴장 관계를 유지했다. 그러나 양국 국민은 공통된 언어, 이주, 개신교, 고전적 자유주의 및 무역을 기반으로 "특별한 관계"를 인식했다. 1861년 말 트렌트 사건에서 영국이 강경한 입장을 취하자, 미국은 물러섰다.[17]

제1차 세계 대전 동안 두 나라는 공동의 유대감을 형성했다. 1930년 램지 맥도널드 영국 총리의 미국 방문은 워싱턴 해군 군축 조약을 통해 극동의 평화를 보장하는 "특별한 관계"에 대한 믿음을 확인시켜 주었다.[18] 그러나 데이비드 레이놀즈는 1919년 이후 기간 동안 양국 관계가 냉랭하고 의심스러웠다고 지적했다.[19] 해리 S. 트루먼 미국 대통령의 국무장관 딘 애치슨은 양국 관계가 독특하지만 애정이 있는 것은 아니었다고 회상했다.[20]

제2차 세계 대전은 양국 관계의 긍정적인 변화를 가져왔다. 1940년 프랑스 공방전은 "특별한 관계"가 영국-프랑스 상호 협약을 대체하는 계기가 되었다. 1945년 샤를 드골에게 윈스턴 처칠루스벨트를 선택할 것이라고 말했다.[23] 처칠은 1944년 2월 16일 "특별한 관계"라는 용어를 처음 사용하며, 양국 관계가 파괴적인 전쟁을 막을 수 있다고 언급했다.[27]

처칠은 냉전 초기인 1946년 3월 5일 미주리주 풀턴에서 "평화의 힘줄 연설"을 통해 "특별한 관계"를 다시 언급하며, 영국 연방과 미국의 형제적 연합을 강조했다. 그는 군사 협력, 해군 및 공군 기지 공동 사용 등을 제안하며, 이것이 세계 평화 유지에 기여할 것이라고 주장했다.

1982년 마거릿 대처 영국 총리는 "영미 관계는 세계의 다른 어떤 동맹보다 자유의 방어와 미래에 더 많은 기여를 했다"고 말했다.[32]

그러나 이러한 관계에 대한 비판도 존재한다. 영국의 언론인 가이 아놀드는 2014년에 "특별한 관계"를 "영국의 정치 체제에 있는 질병"이라고 비난하며, 유럽 및 러시아와의 더 긴밀한 관계를 요구했다.[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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