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페나피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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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페나피엘은 포르투갈 북부의 도시로, 선사 시대부터 사람이 거주해 온 유서 깊은 지역이다. 고대 유적과 로마 시대의 흔적을 간직하고 있으며, 중세 시대에는 아리파나 데 수자라는 이름으로 불렸다. 1770년 조제 1세 왕의 법령에 따라 페나피엘로 명칭이 변경되었고, 도시 지위를 부여받았다. 현재 페나피엘은 채굴, 건설, 상업이 발달한 지역 경제의 중심지이며, 상 비센테 온천과 마기클랜드와 같은 관광 명소로도 유명하다. 축구 클럽 FC 페나피엘이 위치해 있으며, 페르난다 리베이루를 비롯한 많은 스포츠 선수와 저명한 인물들을 배출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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페나피엘
지도
기본 정보
페나피엘 깃발
깃발
페나피엘 문장
문장
지역노르트
하위 지역타메가 이 소우사
지구포르투
교구28
면적212.24
인구 (2011년)72,265
웹사이트페나피엘 시청 웹사이트
로마자 표기Penafiel
행정
지리

2. 역사

자비의 성모 교회: 옛 대성당


조제 1세 통치 시기인 1770년 3월 3일 법령에 따라 아리파나 데 수자는 공식적으로 페나피엘로 명칭이 변경되고 도시(포르투갈어: Cidade) 지위를 부여받았다.[3] 같은 해 6월 1일, 교황 클레멘스 14세는 교황 칙서를 통해 페나피엘 교구를 설립하여 포르투 교구에서 분리시켰다.[3] 이는 브라가 대교구의 관할 교구가 되었으며, 당시 실권자였던 폼발 후작이 포르투 주교에게 불이익을 주려는 정치적 의도도 작용한 것으로 보인다.[3] 초대 주교로는 가르멜 수도회의 이냐시오 데 상 카에타누가 임명되었으나, 실제 교구를 관리하지는 못했다.[3][4]

이후 마리아 1세 여왕의 요청으로 1778년 11월 11일, 피우스 6세는 교황 자의 교서를 통해 페나피엘 교구를 폐지하고 다시 포르투 교구에 통합시켰으며, 현재까지 포르투 교구의 일부로 남아있다.[3] 이로 인해 한때 대성당으로 지정되었으나, 자비의 성모 교회는 공동 대성당이 되지는 못하고 그 지위를 잃었다.

1969년, 페나피엘 교구는 라틴 명목 교구인 페나피엘(포르투갈어) / Pintien(sis)la(라틴어 형용사)로 명목상 복원되었다. 이후 다음과 같은 명목 주교들이 임명되었다.

  • 버나드 테오도르 에스펠라게 (O.F.M.) (1969.08.25 – 1971.02.19 사망), 전 갤럽 로마 가톨릭 교구 (미국) 주교
  • 존 조셉 멀케이 (1974.12.28 – 1994.04.26 사망), 보스턴 로마 가톨릭 대교구 (미국) 보좌 주교
  • 프란시스코-하비에르 로자노 세바스티안 (1994.07.09 – 현재), 교황 외교관으로 탄자니아, 콩고 민주 공화국, 크로아티아, 몰도바, 루마니아 등에서 교황 대사 역임.

2. 1. 선사 시대 ~ 중세 시대

산타 마르타의 돌멘, 풍경을 수놓은 선사 시대 무덤 중 하나


이 지역은 선사 시대부터 사람이 거주했으며, 이는 거석 기념물, 석조 정착지, 카스트로(언덕 요새)의 존재로 알 수 있다.[3] 대표적인 유적으로는 기원전 3~4천 년경에 세워진 높이 2.5m의 선돌인 루짐의 메닐이 있다. 또한 시민 교구인 루짐에는 3천 년의 역사를 지닌 암각화가 남아있다.[3] 고고학적 연구 대상인 여러 카스트로 유적도 발견되었는데, 시타니아 데 몬테 모지뉴가 대표적이다.[3] 이곳은 이베리아 반도에서 가장 큰 카스트로 중 하나로, 갈리시아의 조직적인 공동체였던 Cividade Gallaecipt의 전신으로 여겨진다. 이 언덕 요새에는 갈리시아-루시타니아 문화뿐만 아니라 로마, 서고트, 무어 등 다양한 문화의 흔적이 남아있다.[3] '페나피엘'이라는 지명의 유래에 대해서는 여러 전설이 있지만, 공통적으로 이 지역에 있던 많은 요새와 관련이 있다.[3]

로마 제국 시기에는 기존의 카스트로가 재편성되었다. 주민들은 언덕 위 요새에서 내려와 경작지로 둘러싸인 개방된 정착지로 이동했는데, 부사 두 오우루(보엘레)가 그 예시다.[3] 로마 시대의 온천 마을인 상 비센테 두 피네이루는 지역의 천연자원을 활용하여 발전한 또 다른 중심지였다.[3] 또한, 셰일 및 석영 채석장에 분포된 금맥은 로마 정착민들을 끌어들였으며, 이들은 단일 통화, 문화, 언어를 바탕으로 활발한 수공업 경제를 발전시켰다.[3]

9세기 무렵에는 타메가 강과 도루 강 상류에 위치한 Civitas Anegiala가 지역의 중심지로 부상하여 강 유역의 토지를 지배했다.[3] 이 시비타스는 처음에는 농업과 어업 중심의 작은 정착지였으나, 이후 중요한 역할을 하게 될 페나피엘 데 카나스의 전신이 되었다.[3] 이 시기에는 파수 드 수자와 부스텔루의 베네딕토회 수도원이 로마네스크 양식의 교회를 중심으로 영지를 다스렸다. 특히 파수 드 수자는 웅장한 로마네스크 건축물을 자랑했으며, 포르투갈 초대 국왕 아폰수 엔히크스의 스승이었던 에가스 모니즈 리바도우루가 머물렀던 곳이기도 하다.[3] 중세 시대의 다른 귀족 가문으로는 농지를 조망하는 탑을 세운 바르보사 데 오노르(란스)나 코레이샤스(이리부) 등이 있다.[3] 로마네스크 양식의 종교 건축물도 널리 퍼졌다. 보엘레의 로마네스크 사원, 상 살바도르 다 간다라 교회(성인의 두개골 숭배로 유명), 아브라강 교회, 후기 고딕 양식의 상 미겔 다 에자 교회, 에르미다(이리부)의 장례 기념물 등은 많은 순례자를 끌어들였다.[3]

이후 로마네스크 양식의 산타 루지아 교회가 있는 요새화된 정착지가 강둑을 따라, 포르투에서 오는 길목이자 중세 시대에 건설된 세페다 다리를 건너는 수자 강 유역의 모자레스 교구에 자리 잡았다. 이곳은 서비스, 수공예 상업, 제조업 상품 판매에 유리한 위치였으며, 중세 박람회를 통해 도시 공동체로 발전했다.[3] 이 지역은 '아리파나 데 수자'로 알려졌으며, 전설에 따르면 10세기경 아버지의 영지를 상속받은 '아리아나'(에르메네질도 곤잘레스와 무마도나 디아스의 딸)의 이름에서 유래했다고 한다.[3]

초기에는 수자 강 북쪽의 ''아기아르 데 수자 성''과 남쪽의 ''페나 성''이 지역 방어의 중심이었다.[3] 이 마을은 무어인의 잦은 침입에도 굳건히 저항하여 라틴어로 '충실한 바위'라는 뜻의 Pennafidelisla라는 이름을 얻었고, 이것이 줄어들어 '페나피엘 성'으로 불리게 되었다.[3]

13세기에는 이 지역 토지의 상당 부분을 카스티야의 전 왕비였던 포르투갈의 마팔다가 소유했다.[3]

아리파나 데 수자 시민 교구는 16세기에 설립되었다. 같은 세기인 1519년, 포르투갈의 마누엘 1세는 이 지역에 포랄(헌장)을 부여하여 정착지를 마을(Vila) 지위로 승격시켰다.[3] 그러나 공식적인 지위 변화는 주앙 5세 통치 시기인 1741년 10월 7일 법령을 통해 이루어졌다.[3] 이 시기 플랑드르와 교역하던 포르투 출신의 부유한 상인 주앙 코레이아는 이곳에 집을 짓고 성령에게 헌정된 마누엘 양식 예배당을 세웠으며, 청동 장례 무덤도 남겼다.[3] 아리파나가 성장하면서 상 마르티노(마린)를 수호성인으로 모시게 되었으며, 16세기 중반에는 주앙 코레이아의 옛 예배당 자리에 새로운 매너리즘 양식의 사원이 건설되었다.[3]

이 지역은 오랫동안 포르투의 행정적 관할 하에 있었지만, 주앙 1세가 자신의 지지 세력에게 특권을 부여하면서 점차 독립적인 지위를 갖게 되었다.[3] 아리파나 데 수자는 상 마르티노 축제일에 열리는 연례 박람회를 통해 서비스 및 산업 중심지로 계속 성장했으며, 도시 지역은 고지대로 확장되었고 미제리코르디아 교회가 세워졌다.[3] 한편, 귀족들은 토지 임대료, 사업, 해외 무역으로 부를 축적하여 마을 중심부 외곽에 저택을 짓고 살았다.[3]

조제 1세 통치 시기인 1770년 3월 3일 법령에 따라, 이 지역의 공식 명칭은 페나피엘로 변경되었고 도시(Cidade) 지위를 부여받았다.[3]

2. 2. 아리파나 데 수자 시대

9세기에는 활동이 타메가 강과 도루 강 상류에 있는 ''Civitas Anegia|키비타스 아네기아la''에 집중되었으며, 이곳은 강둑을 따라 있는 토지를 지배했다.[3] 이 시비타스는 작은 지역을 점유하고 농업과 어업에 집중된 초기 장소였지만, 중요한 역할을 맡았던 페나피엘 데 카나스의 전신이었다.[3] 이 토지는 파수 드 수자와 부스텔루의 베네딕토회 수도원의 로마네스크 양식의 교회 영주의 자리였다. 풍부한 문화적 영향을 뒷받침하는 파수 드 수자는 웅장한 로마네스크 건축물을 자랑했으며 아폰수 엔히크스의 스승인 역사학자 에가스 모니즈 리바도우루에게 피난처를 제공했다.[3] 중세 시대의 다른 귀족 가문으로는 농지를 내려다보는 탑이 있는 바르보사 데 오노르(란스)나 코레이샤스(이리부)의 변형된 탑 등이 있다.[3] 로마네스크 종교 건축물은 로마 시대 이후에 널리 퍼졌다. 보엘레의 로마네스크 사원이나 상 살바도르 다 간다라 교회(사망한 성인의 두개골을 숭배)는 아브라강 교회, 후기 고딕 양식의 상 미겔 다 에자 교회, 에르미다(이리부)의 장례 기념물과 마찬가지로 이 지역으로 순례자를 끌어들였다.[3]

이 시기에는 새로운 변화가 나타났는데, 로마네스크 양식의 산타 루지아 교회가 있는 요새화된 정착지가 강둑을 따라, 포르투에서 오는 도로를 따라, 중세 시대의 세페다 다리를 건너는 수자 강을 가로지르는 모자레스 교구에 자리 잡고 있었다. 이곳은 서비스, 수공예 상업, 제조 상품 판매를 전문으로 하는 도시 공동체를 건설하기에 이상적인 곳이었으며, 중세 박람회가 이를 뒷받침했다.[3] 이 지역은 Arrifana de Sousa|아히파나 드 소자pt라고 알려졌다. 전설에 따르면 이 이름은 10세기에 아버지의 죽음 이후 그 땅을 상속받은 ''Ariana|아리아나pt''(에르메네질도 곤잘레스와 D. 무마도나 디아스의 딸)의 이름에서 유래되었다고 한다.[3]

창립 당시에는 두 개의 성이 지배했는데, 하나는 수자 강 북쪽 강둑을 따라 있는 ''Castelo de Aguiar de Sousa|카스텔루 드 아기아르 드 소자pt''이고, 두 번째는 남쪽 강둑을 따라 있는 ''Castelo de Pena|카스텔루 드 페나pt''였다.[3] 이 마을은 무어인에 의해 여러 번 공격을 받았지만, 그 저항 때문에 라틴어로 ''Pennafidelis|페나피델리스la''(충실한 바위/성)라고 불렸고, 줄여서 ''Castelo de Penafiel|카스텔루 드 페나피엘pt''이라고 불렸다.[3]

13세기에는 토지의 많은 부분이 카스티야의 전 여왕인 포르투갈의 마팔다 소유였다.[3]

아리파나 데 수자 시민 교구는 16세기에 설립되었다. 같은 세기인 1519년에 마누엘 1세는 이 지역에 포랄 (''헌장'')을 부여하여 이 정착지를 마을 지위로 승격시켰다.[3] 그러나 그 변화는 주앙 5세 왕의 통치 기간인 1741년 10월 7일 법령에 의해서야 실질적으로 이루어졌다.[3]

이 지역은 여러 도로를 통과했는데, 플랑드르에서 계약을 맺은 부유한 포르투 출신 상인인 주앙 코레이아가 집을 세웠다. 그는 마누엘 양식 예배당을 성령에게 헌정하고(청동 장례 무덤을 세운) 새로운 기독교인이었다.[3] 아리파나는 성장하면서 수호성인으로 상 마르티노(마린)를 맞이했고, 16세기 중반에 주앙 코레이아의 옛 예배당 위에 새로운 매너리즘 사원이 건설되었다.[3]

이 토지는 주앙 1세 왕이 그의 대의를 지지하는 특권을 부여할 때까지 포르투의 행정적 종속 지역으로 남아 있었다.[3] 아리파나 데 수자는 상 마르티노 축제일에 열리는 연례 박람회를 통해 서비스 및 산업의 중심지로 계속 성장하여 도시 지역이 고지대로 확장되고 미제리코르디아 교회가 건설되었다.[3] 한편, 귀족들은 토지 임대료, 사업 및 해외 상업에서 형성된 그들의 조상 재산에서 살기를 선호하여 마을 중심 외곽에 집을 지었다.[3]

조제 왕의 통치 기간인 1770년 3월 3일의 법에 따라, 이 지명은 공식적으로 Penafiel|페나피엘pt로 변경되었고[3] 도시의 지위가 부여되었다.

2. 3. 페나피엘 시대



이 지역은 선사 시대부터 사람이 거주해 왔으며, 이는 거석기념물, 석조 정착지, 카스트로의 확산으로 입증된다.[3] 대표적인 유적으로는 기원전 3~4000년의 점유 시기로 거슬러 올라가는 높이 2.5m의 돌인 루짐의 메닐이 있다. 또한 시민 교구인 루짐에는 3000년 동안 존재해 온 암각화가 있다.[3] 고고학적 연구의 대상이 된 여러 바위 요새(카스트로)도 존재하는데, 예를 들어 시타니아 데 몬테 모지뉴의 고고학적 "죽은 자의 도시"가 있다.[3] 이베리아 반도에서 가장 큰 카스트로 중 하나인 이곳은 갈리시아의 조직적인 공동체인 ''Cividade Gallaeci''의 전신이었으며, 언덕 요새에는 갈리시아-루시타니아, 로마, 서고트, 무어 등 다양한 문화의 흔적이 남아 있다.[3] ''페나피엘''이라는 이름의 기원에 대해서는 여러 전설이 있지만, 공통적으로 이 지역에 위치한 많은 요새와 관련이 있다.[3]

로마 제국에 통합되면서 기존의 언덕 요새들은 재조직되었다. 사람들은 언덕 꼭대기에서 내려와 부사 두 오우루(보엘레)처럼 경작지로 둘러싸인 개방된 지역에 집중된 정착지를 형성했다.[3] 로마 시대의 온천 마을인 상 비센테 두 피네이루는 이 지역의 천연자원을 중심으로 발전한 정착지의 예시다.[3] 또한, 셰일 및 석영 채석장에 흩어져 있는 금맥은 로마 정착민들을 끌어들였고, 이는 단일 통화, 문화, 언어를 기반으로 한 활발한 수공업 경제를 발전시켰다.[3]

9세기에는 활동 중심이 타메가 강과 도루 강 상류에 있는 ''시비타스 아네지아''로 옮겨갔으며, 이곳은 강둑을 따라 있는 토지를 지배했다.[3] 이 시비타스는 처음에는 농업과 어업에 집중된 작은 지역이었지만, 중요한 역할을 했던 페나피엘 데 카나스의 전신이 되었다.[3] 이 토지는 파수 드 수자와 부스텔루에 위치한 베네딕토회 수도원의 로마네스크 양식 교회 영주의 자리였다. 풍부한 문화적 영향을 보여주는 파수 드 수자는 웅장한 로마네스크 건축물을 자랑했으며, 아폰수 엔히크스의 스승인 역사가 에가스 모니즈 리바도우루에게 피난처를 제공하기도 했다.[3] 중세 시대의 다른 귀족 가문으로는 농지를 내려다보는 탑이 있는 바르보사 데 오노르(란스)나 코레이샤스(이리부)의 변형된 탑 등이 있다.[3] 로마 시대 이후 로마네스크 양식의 종교 건축물이 널리 퍼졌다. 보엘레의 로마네스크 사원이나 상 살바도르 다 간다라 교회(사망한 성인의 두개골 숭배)는 아브라강 교회, 후기 고딕 양식의 상 미겔 다 에자 교회, 에르미다(이리부)의 장례 기념물과 함께 이 지역으로 순례자들을 끌어들였다.[3]

이 시기에는 새로운 변화가 나타났다. 로마네스크 양식의 산타 루지아 교회가 있는 요새화된 정착지가 강둑을 따라, 포르투에서 오는 도로를 따라, 그리고 중세 시대의 세페다 다리를 건너는 수자 강을 가로지르는 모자레스 교구에 자리 잡았다. 이곳은 서비스, 수공예 상업, 제조 상품 판매를 전문으로 하는 도시 공동체를 건설하기에 이상적인 장소였으며, 중세 박람회가 이를 뒷받침했다.[3] 이 지역은 아리파나 데 수자라고 알려졌다. 전설에 따르면 이 이름은 10세기에 아버지의 죽음 이후 그 땅을 상속받은 ''아리아나''(에르메네질도 곤잘레스와 D. 무마도나 디아스의 딸)의 이름에서 유래되었다고 한다.[3]

창립 당시에는 두 개의 성이 지역을 지배했는데, 하나는 수자 강 북쪽 강둑을 따라 있는 ''아기아르 데 수자 성''이고, 다른 하나는 남쪽 강둑을 따라 있는 ''페나 성''이었다.[3] 이 마을은 무어인에게 여러 차례 공격을 받았지만, 끈질긴 저항 때문에 라틴어로 ''Pennafidelis''(충실한 바위/요새)라고 불렸고, 이것이 줄어들어 ''페나피엘 성''이 되었다.[3]

13세기에는 토지의 많은 부분이 카스티야의 전 여왕이었던 포르투갈의 마팔다 소유였다.[3]

아리파나 데 수자 시민 교구는 16세기에 설립되었다. 같은 세기인 1519년, 마누엘 1세는 이 지역에 포랄(''헌장'')을 부여하여 정착지를 마을 지위로 승격시켰다.[3] 그러나 실질적인 지위 변화는 주앙 5세 왕의 통치 기간인 1741년 10월 7일 법령에 의해 이루어졌다.[3]

이 지역은 여러 도로가 통과하는 교통의 요지였으며, 플랑드르에서 계약을 맺고 온 부유한 포르투 출신 상인 주앙 코레이아가 이곳에 집을 지었다. 그는 새로운 기독교인으로서 마누엘 양식 예배당을 성령에게 헌정하고 청동 장례 무덤을 세웠다.[3]

아리파나가 성장하면서 수호성인으로 상 마르티노(마린)를 맞이했고, 16세기 중반에는 주앙 코레이아의 옛 예배당 자리에 새로운 매너리즘 양식의 사원이 건설되었다.[3]

이 토지는 주앙 1세 왕이 자신의 대의를 지지한 것에 대한 특권을 부여할 때까지 포르투의 행정적 종속 지역으로 남아 있었다.[3]

아리파나 데 수자는 상 마르티노 축제일에 열리는 연례 박람회를 통해 서비스 및 산업의 중심지로 계속 성장했다. 도시 환경은 높은 고도로 확장되었고 미제리코르디아 교회가 건설되었다.[3] 한편, 귀족들은 토지 임대료, 사업 및 해외 상업으로 형성된 조상 대대의 재산으로 생활하며 마을 중심 외곽에 집을 짓는 것을 선호했다.[3]

조제 1세 왕의 통치 기간인 1770년 3월 3일 법에 따라, 지명은 공식적으로 페나피엘로 변경되었고[3] 도시의 지위를 부여받았다.

3. 지리

페나피엘 시는 포르투갈 북부 포르투 현에 위치하며, 총 면적은 212.2km2이다.[5] 도루 강, 타메가 강, 소우사 강이 합류하는 강 계곡에 자리 잡아 해안 지역과 내륙의 트라스몬타나 지역을 연결하는 지리적 특징을 가진다.[5][3] 이 지역은 풍부한 수자원과 다양한 지질 구조를 바탕으로 농업과 채광업이 이루어졌으며, 예로부터 중요한 교통로 역할을 수행했다.[3] 기후는 전형적인 지중해성 기후 (''Csb'')를 보인다.[6] 행정적으로는 28개의 프레게지아(민간 교구)로 나뉘며, 2011년 기준으로 약 72,000명의 인구가 거주한다.[5][7]

3. 1. 자연 지리

페나피엘 시는 212.2km2 면적에 걸쳐 뻗어 있으며, 도루 강, 타메가 강 및 소우사 강이 합류하는 강 계곡에 위치하여 해안 지역과 트라스몬타나 지역을 연결한다.[5] 깊은 계곡으로 이루어진 풍경은 관개 시설이 잘 갖춰진 지역과 목초지, 소나무와 유칼립투스 숲으로 둘러싸인 밭으로 구성되어 있다.[5] 이 강 사이 지역은 화강암 토양을 가지고 있으며 수자원이 풍부하여 집중적인 농업과 채굴 산업을 가능하게 한다.[3] 시의 남서쪽 지역에는 편암과 사암 지질의 복합체가 있어 산악 지형을 이루며 경작되지 않고 대부분 숲으로 덮여 있다.[3]

1930년 페나피엘의 파노라마 뷰


해안 지역과 산악 지역을 나누는 중간 지대인 이 지역은 지역 간, 육상 및 하천 네트워크를 따라 통신선이 뻗어 있어 중요한 통과 지점이었다.[3] 첫 번째 예는 중세 시대에 포르투와 트라스오스몬테스를 연결하는 "왕실 도로"로, 통과하는 사람과 물품을 지원하는 중심지였던 도시 중심지의 발전을 가져왔다.[3] 도루 강은 중요한 연결 고리였으며 내륙으로 뻗어 나갔고, 알토 도루의 측면은 포도원을 생산하는 데 사용되었다.[3] "엔트레오스리오스" 지역 또한 내륙을 따라 여행을 지원하는 중요한 역할을 했다.[3]

3. 2. 기후

페나피엘은 서늘하고 온화하며 비가 많이 오는 겨울과 덥고 건조한 여름을 보이는 지중해성 기후 (쾨펜: ''Csb'')를 띈다.[6]

루짐, 페나피엘의 1982-2000년 평균 및 극값 (고도: 250m)
1월2월3월4월5월6월7월8월9월10월11월12월
역대 최고 기온 (°C)20°C23.2°C31.6°C30.4°C32.9°C36°C38.6°C38.6°C37.2°C31.2°C31°C22.4°C
평균 최고 기온 (°C)12.2°C14.4°C17.2°C17.5°C20.7°C25.1°C27.9°C27.8°C25.4°C20.7°C16.1°C13.2°C
일평균 기온 (°C)8°C9.8°C11.8°C12.4°C15.4°C19°C21.3°C21.1°C19.3°C15.5°C11.7°C9.5°C
평균 최저 기온 (°C)3.8°C5°C6.5°C7.6°C10.1°C12.9°C14.8°C14.4°C13.1°C10.4°C7.4°C5.7°C
역대 최저 기온 (°C)-4.6°C-2.6°C-3.2°C-0.2°C1.2°C4.7°C8.1°C3.8°C5.3°C2.4°C-3.2°C-3.1°C
평균 강수량 (mm)194.4mm126.8mm70mm154.1mm109.8mm45.3mm20.4mm27mm74.2mm152mm198mm237.7mm
평균 강수일수 (≥ 0.1mm)12.89.57.511.69.45.22.52.66.511.213.814.0


3. 3. 인문 지리

(1801–2011)연도인구180118,576184926,944190031,799193037,496196049,924198164,267199168,444200171,800201172,265



페나피엘은 28개의 민간 교구(프레게지아)를 포함하며, 총 인구는 72,265명(2011년 기준)으로 인구 밀도는 제곱킬로미터당 약 338.4명이다. 이 지역은 Associação de Municípios do Vale do Sousa|발레 드 수자 시립 협회pt와 NUTS III 타메가 하위 지역에 속해 있다.[5]

이 지역의 정착 형태는 소규모 산업과 상업 활동을 중심으로 분산된 모습을 보인다. 새로운 주거 지역과 오래된 농촌 가옥들이 함께 자리 잡고 있는 것이 특징이다.[5] 오래된 가옥들은 주로 시간제로 농업에 종사하는 가족이나 노인들이 거주하며 관리하고 있다. 활발한 이주와 주요 도로와의 접근성 덕분에 이러한 생활 방식이 유지되고 있다.[5]

페나피엘 시는 다음의 민간 교구들로 구성된다.

페나피엘의 프레게지아 목록[7]
아브라강라가레스 이 피게이라
보엘레루짐 이 빌라 코바
부스텔로올드롱이스
카베사 산타파수 드 소자
카넬라스페나피엘
카펠라페로젤루
카스텔로이스란스
크로카리우 드 모이뇨스
두아스 이그레자스리우 마우
에자상 마메데 드 레세지뉴스
폰테 아르카다상 마르티뉴 드 레세지뉴스
갈레고스세볼리두
길루페 이 우로테르마스 드 상 비센테
이리보발페드레



이 교구들은 대부분 어느 정도 산업화되어 있으며, 현대적인 주택과 전통적인 농촌 가옥이 혼재하는 모습을 보인다. 마을 곳곳에서는 페나피엘 지역의 특징인 작은 돌과 화강암으로 지어진 집들을 흔히 볼 수 있다.

4. 경제

로마 제국 시대에는 이 지역의 천연자원, 특히 셰일 및 석영 채석장에 흩어져 있던 금맥이 로마 정착민들을 끌어들였다.[3] 이를 바탕으로 단일 통화, 문화, 언어를 기반으로 한 활발한 수공업 경제가 발전했다.[3]

중세에는 Arrifana de Sousa|아리파나 데 수자pt로 알려진 정착지가 경제 활동의 중심지로 떠올랐다. 포르투에서 오는 도로와 수자 강이 교차하는 지점에 자리 잡아 서비스업, 수공업, 상업, 제조 상품 판매를 전문으로 하는 도시 공동체를 형성하기에 유리했다.[3] 중세 시대에 열린 정기 시장(박람회)은 이러한 경제 활동을 더욱 촉진하는 역할을 했다.[3]

16세기 이후, 아리파나 데 수자는 수호성인인 상 마르티노(St. Martin) 축일에 열리는 연례 박람회를 통해 서비스업과 산업의 중심지로 꾸준히 성장했다.[3] 당시 귀족들은 주로 토지 임대료, 사업, 해외 무역을 통해 재산을 형성했으며, 마을 중심보다는 외곽에 거주하는 경향을 보였다.[3]

1770년 조제 1세의 법령에 따라 공식적으로 페나피엘로 이름이 바뀌고 도시 지위를 얻은 후[3], 페나피엘은 지역 경제의 중심지로서 역할을 다하고 있다. 주요 산업 분야는 광업, 토목 건설업, 상업이며, 이들 분야는 많은 고용을 창출하고 있다. 또한 서비스업 부문의 활동 역시 매우 활발하다.[5]

5. 문화

페나피엘 지역의 문화는 선사 시대부터 이어져 온 깊은 역사와 다양한 문명의 영향을 바탕으로 형성되었다. 거석 기념물, 암각화, 카스트로 유적 등 풍부한 선사 시대 유산은 이 지역의 오랜 인류 거주 역사를 보여준다.[3] 로마 시대에는 언덕 요새에서 내려와 평지에 정착촌을 형성하고, 온천과 같은 천연자원을 활용하며 채굴 등을 통해 독자적인 경제와 문화를 발전시켰다.[3]

중세 시대에는 타메가 강과 도루 강 유역을 중심으로 Civitas Anegiapt와 같은 정착지가 발달했으며, 파수 드 수자 수도원과 같은 로마네스크 양식의 종교 건축물이 번성하며 문화적 중심지 역할을 했다.[3] 이 시기에는 성인의 유골을 숭배하는 관습(상 살바도르 다 간다라 교회)이나 순례 문화도 나타났다.[3] 또한, 지역 방어를 위한 요새와 성들이 축조되었는데, '충실한 바위'라는 뜻의 라틴어 Pennafidelisla에서 유래한 '페나피엘'이라는 지명은 무어인의 침입에 맞선 저항의 역사를 담고 있다.[3]

16세기 Arrifana de Sousapt 지역이 형성되고 1519년 포르투갈의 마누엘 1세로부터 포랄(헌장)을 받으며 도시로서의 기틀을 다지기 시작했다.[3] 특히 상 마르티노 축일에 열리는 연례 시장은 서비스, 상업, 수공예의 중심지로 성장하는 데 중요한 역할을 했으며, 이는 도시 문화 형성의 기반이 되었다.[3] 플랑드르와의 교역으로 부를 축적한 상인 계층이 등장하고, 매너리즘 양식의 사원이 건립되는 등 도시 경관과 문화도 점차 변화했다.[3] 1770년 조제 1세에 의해 공식적으로 '페나피엘'이라는 이름과 함께 도시 지위를 얻게 되었다.[3]

현대에 이르러 페나피엘은 온천을 중심으로 한 스파 관광과 포르투갈 최대 테마파크 중 하나인 마기클랜드가 위치한 지역으로 알려져 있다. 또한, 문학 축제인 ''에스크리타리아''나 전통 시장에 기반한 농업 박람회 ''아그리발''과 같은 연례행사를 통해 전통과 현대를 잇는 다채로운 문화 활동이 이어지고 있다.

5. 1. 관광

페나피엘은 상 비센테 온천과 이나텔 엔트리-오스 리오스 온천으로 대표되는 치료 및 스파의 중심지이다. 특히 상 비센테 온천은 고농축 유황, 탄산 알칼리 규산염, 불소화된 물을 포함하는 과다 미네랄 함유 수질로 유명하다. 포르투갈과 유럽의 유황수 중 가장 알칼리성이 높은 온천으로 여겨지며, 수온은 약 18.5°C이다. 이 온천수는 호흡기 질환과 근골격계 질환 치료에 권장된다.

또한, 포르투갈 최대 규모의 테마파크 중 하나인 마기클랜드(구 브라칼란디아)가 페나피엘에 위치해 있다.

페나피엘의 관광은 종교적, 세속적 활동의 변화에 따라 순환적인 특징을 보이며, 연중 특별 행사와 관련이 깊다. 대표적인 행사로는 상 마르티뉴 축제와 관련된 행사들, 문학 축제인 ''에스크리타리아'', 그리고 전통적인 중세 박람회에 기반한 농업 박람회 ''아그리발'' 등이 있다.

5. 2. 역사 유산



고고학 유적지에서 바라본 고대 루짐 멘히르


기원전 3000~4000년의 선사 시대 정착지와 관련된 암각화


몬테 모지뉴 성채 유적


이 지역은 선사 시대부터 사람이 거주해 왔으며, 이는 거석 기념물, 석조 정착지, 카스트로의 확산으로 입증된다.[3] 대표적인 유적으로는 기원전 3~4000년경에 세워진 높이 2.5m의 루짐의 메닐이 있다. 루짐 시민 교구에는 3000년 동안 존재해 온 암각화도 발견된다.[3] 또한 시타니아 데 몬테 모지뉴의 고고학적 유적지를 포함하여 여러 바위 요새(카스트로)가 고고학 연구의 대상이 되고 있다.[3] 이베리아 반도에서 가장 큰 카스트로 중 하나인 이곳은 갈리시아의 조직적인 공동체였던 ''Cividade Gallaeci''의 전신이었으며, 갈리시아-루시타니아, 로마, 서고트, 무어 등 다양한 문화의 흔적이 남아 있다.[3] ''페나피엘''이라는 이름의 기원에 대해서는 여러 전설이 있지만, 공통적으로 이 지역에 위치했던 많은 요새와 관련이 있다.[3]

로마 제국에 통합되면서 언덕 요새들은 재조직되어, 언덕 꼭대기에서 내려와 부사 두 오우루(보엘레)처럼 경작지로 둘러싸인 개방된 지역에 정착지가 형성되었다.[3] 로마 시대 온천 마을이었던 상 비센테 두 피네이루는 이러한 정착지의 예시로, 지역의 천연자원을 중심으로 발전했다.[3] 또한, 셰일 및 석영 채석장에 흩어져 있던 금맥은 로마 정착민들을 끌어들였고, 단일 통화, 문화, 언어를 바탕으로 활발한 수공업 경제가 발달했다.[3]

9세기에는 타메가 강과 도루 강 상류에 위치한 ''시비타스 아네지아''(Civitas Anegiapt)가 활동의 중심지가 되어 강둑 주변 토지를 지배했다.[3] 초기에는 농업과 어업에 집중된 작은 지역이었으나, 이후 페나피엘 데 카나스로 발전하며 중요한 역할을 담당하게 된다.[3] 이 시기 토지는 파수 드 수자와 부스텔루의 베네딕토회 수도원 등 로마네스크 양식 교회의 영주들이 소유했다. 특히 파수 드 수자는 웅장한 로마네스크 건축물을 자랑하며, 아폰수 엔히크스의 스승이었던 역사가 에가스 모니즈 리바도우루의 피난처가 되기도 했다.[3] 중세 시대 귀족 가문으로는 농지를 조망하는 탑이 있는 바르보사 데 오노르(란스)나 변형된 탑 형태의 코레이샤스(이리부) 등이 있다.[3] 로마 시대 이후 로마네스크 양식의 종교 건축이 널리 퍼졌는데, 보엘레의 로마네스크 사원, 상 살바도르 다 간다라 교회(사망한 성인의 두개골 숭배), 아브라강 교회, 후기 고딕 양식의 상 미겔 다 에자 교회, 에르미다(이리부)의 장례 기념물 등은 많은 순례자를 끌어들였다.[3]

파수 드 소우사 수도원/교회의 웅장한 로마네스크 양식 파사드


상 젠스 교회의 파사드


파수스 드 소우사 수도원


피에다드 성모와 산투스 파수스의 성소


이 무렵, 로마네스크 양식의 산타 루지아 교회가 있는 요새화된 정착지가 강둑을 따라, 포르투에서 오는 도로변, 수자 강을 건너는 중세 시대 세페다 다리 인근의 모자레스 교구에 자리 잡았다. 이곳은 서비스, 수공예 상업, 상품 판매에 특화된 도시 공동체를 형성하기에 이상적이었으며, 중세 시장이 이를 뒷받침했다.[3] 이 지역은 아리파나 데 수자(Arrifana de Sousapt)로 알려졌는데, 전설에 따르면 10세기 에르메네질도 곤잘레스와 무마도나 디아스의 딸인 아리아나(Arianapt)가 아버지의 사망 후 땅을 상속받은 데서 이름이 유래했다고 한다.[3]

창립 당시에는 두 개의 성이 지역을 지배했는데, 하나는 수자 강 북쪽 강둑의 ''아기아르 데 수자 성''(Castelo de Aguiar de Sousapt)이고, 다른 하나는 남쪽 강둑의 ''페나 성''(Castelo de Penapt)이었다.[3] 이 마을은 무어인의 잦은 공격을 받았으나 굳건히 저항하여 라틴어로 '충실한 바위'라는 뜻의 ''펜나피델리스''(Pennafidelisla)로 불렸고, 이것이 줄어들어 ''페나피엘 성''(Castelo de Penafielpt)이 되었다.[3]

13세기에는 이 지역 토지의 상당 부분이 카스티야의 전 왕비였던 포르투갈의 마팔다 소유였다.[3]

아리파나 데 수자 시민 교구는 16세기에 설립되었다. 같은 세기인 1519년, 마누엘 1세는 이 지역에 포랄(''헌장'')을 부여하여 정착지를 마을 지위로 승격시켰다.[3] 그러나 실제적인 변화는 주앙 5세 통치 시기인 1741년 10월 7일 법령에 의해 이루어졌다.[3]

이 지역은 여러 도로가 교차하는 곳이었으며, 플랑드르와 교역하던 부유한 포르투 출신 상인 주앙 코레이아는 이곳에 집을 짓고 마누엘 양식 예배당을 성령에게 헌정했다. 그는 새로운 기독교인이었으며, 청동 장례 무덤을 세우기도 했다.[3]

아리파나는 성장하면서 수호성인으로 상 마르티노(마린)를 모시게 되었고, 16세기 중반에는 주앙 코레이아의 옛 예배당 자리에 새로운 매너리즘 양식의 사원이 건설되었다.[3]

이 토지는 주앙 1세가 자신의 지지자들에게 특권을 부여할 때까지 포르투의 행정적 종속 지역으로 남아 있었다.[3]

아리파나 데 수자는 상 마르티노 축일에 열리는 연례 시장을 통해 서비스 및 산업 중심지로 계속 성장했으며, 도시 환경은 높은 고지대로 확장되었고 미제리코르디아 교회가 건설되었다.[3] 한편, 귀족들은 토지 임대료, 사업, 해외 상업으로 형성된 재산을 바탕으로 마을 중심 외곽에 저택을 짓고 살았다.[3]

조제 1세 통치 기간인 1770년 3월 3일 법에 따라, 지명은 공식적으로 페나피엘로 변경되었고[3] 도시 지위를 부여받았다.

페나피엘의 19세기 말 기차역


페나피엘은 1863년에 도서관 건설을 시작했다. 1917년 6월 6일, 아라우조 이 실바 애비뉴에 새로운 페나피엘 시립 도서관이 개관했지만 1919년 10월에 문을 닫았다가, 1927년 6월 6일에 사카두라 카브랄 애비뉴의 작은 공간으로 이전하여 다시 대중에게 공개되었다.

페나피엘 지역은 선사 시대의 돌멘, 암각화에서부터 로마, 서고트, 무어 시대를 거쳐 중세의 영주 저택과 기념비적인 종교 건축물에 이르기까지 풍부한 역사 유산을 간직하고 있다. 주요 유산은 다음과 같다.

'''고고학 유적'''

'''시민 건축'''

6. 스포츠

페나피엘에서 가장 인기 있고 널리 행해지는 스포츠는 축구이며, 수백 명의 젊은이들이 기존 클럽에 참여하고 있다. 가장 큰 클럽인 FC 페나피엘은 1951년에 창단되었으며, 포르투갈 프로 리그의 여러 단계에서 꾸준히 활동하고 있다. 2014-2015 시즌 동안, 이 클럽은 이전 시즌 승격에 성공하여 포르투갈 최상위 리그에서 활동했으며, 모레이렌스 FC(챔피언)와 FC 포르투 B팀에 이어 3위를 기록했다. 또한, 이 클럽은 다른 육상 활동에도 참여하여 여러 국내 및 국제 대회에서 우승을 차지했다.

페나피엘 출신의 유명 스포츠 인물은 다음과 같다.

이름출생 연도종목주요 경력/기록
안토니우 올리베이라1952년축구클럽 306경기 출전, 포르투갈 대표 24경기 출전 (은퇴)
조제 코엘류1961년축구클럽 407경기 출전, 포르투갈 대표 8경기 출전 (은퇴)
아고스티뉴 카에타누1966년축구클럽 320경기 출전, 포르투갈 대표 2경기 출전 (은퇴)
페르난다 리베이루1969년육상 (장거리)1996년 하계 올림픽 여자 10,000m 금메달리스트
아벨 페레이라1978년축구전 축구 선수, 현 파우메이라스 감독
엘데르 페레이라1980년축구클럽 320경기 출전 (은퇴)
조제 폰테1983년축구클럽 600경기 이상 출전, 포르투갈 대표 49경기 출전
페드루 모레이라1983년축구클럽 378경기 출전 (은퇴)
누누 모라이스1984년축구클럽 417경기 출전 (은퇴)
비토르 실바1984년축구클럽 330경기 이상 출전


7. 인물

안토니오 페레이라 고메스


페르난다 리베이루

참조

[1] 웹사이트 Instituto Nacional de Estatística http://www.ine.pt/xp[...]
[2] 웹사이트 Áreas das freguesias, concelhos, distritos e país http://www.dgterrito[...] 2018-11-05
[3] 간행물 Um brevíssimo olhar sobre o passado de Penafiel http://www.cm-penafi[...] Câmara Municipal de Penafiel
[4] 웹사이트 Titular See of Penafiel, Portugal http://www.gcatholic[...]
[5] 간행물 Apresentação do concelho http://www.cm-penafi[...] Câmara Municipal de Penafiel
[6] 웹사이트 Climate normals: Luzim, Penafiel (1982-2000) http://www.ipma.pt/b[...] IPMA 2020-12-14
[7] 웹사이트 Law nr. 11-A/2013, pages 552 90-91 http://dre.pt/pdf1sd[...] 2014-07-29
[8] 웹인용 Climate normals: Luzim, Penafiel (1982-2000) http://www.ipma.pt/b[...] IPMA 2020-12-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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